Chapter 02 좌충우돌 유한
1
유한이 채린과 대판 싸운 그날 밤.
아바란 왕국 남쪽. 아르페디아 대륙에서 언데드 필드로 유명한 랑그리아 평원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낀다 싶더니 대지가 검은빛으로 물들었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강력한 언데드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아까 어떤 자식들이 새로 발견한 던전에서 봉인 갈은 걸 뜯었다고 하던데‥‥‥."
"그럼 히든 이벤트를 발동시킨 거야?"
유저들은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내 흥분감에 사로잡혔다.
이런 히든 이벤트에서 많은 경험지는 물론 진귀한 아이템도 휙득할 수 있기 때문에.
신이 난 유저들은 파티를 결성하고 새로 태어난 언데드 군단과 싸우기 시작했다. 일부 유저들은 성급하게 솔플로 달려들었다가 죽음을 맞기도 했다.
- 흑영비 : 평원 중앙에 보스인 언데드 킹이 있다능!
- 아이템먹자 : 이름이 바이레스라는데, 무지막지하게 세요. 저렙님들 도망가셈.
- 백은의대미안 : 이놈 지금 서쪽으로 가고 있어요!
몇몇 유저들은 이번 이벤트의 주인공과 맞닥뜨린 모양 그들은 보스의 정보와 스크린샷을 공식 홈페이지에 올렸다.
왕관과 같은 투구를 쓰고 화려하지만 낡고 부서진 갑옷을 입은 언데드 킹의 이름은 바이레스였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마니아들은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연대표를 뒤지며 그 이름을 찾았다. 그리고 그들은 바이레스에 대한 기록을 찾아냈다.
맹왕(猛王) 바이레스.
아바란 왕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킨 정복왕으로 그로지아 왕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하였다고 되어 있었다.
그 위대한 정복왕은 죽음에서 깨어나. 다시 그로지아를 향해 검올 뽑아 들었다.
-가자. 아바란의 용사들이여! 짐과 함께 동방의 오량캐들을 정벌하자!
-우! 우! 우!
죽음에서 부활한 맹왕의 군대는 거침이 없었다. 과거 그들과 싸우다 언데드가 된 그로지아의 기사들이 맹왕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삽시간에 무너졌다.
그들의 뒤를 이어 아이템과 경험치를 노리고 모여든 유저들이 맞서 싸웠지만. 수만의 언데드 군단을 상대론 벅차기만 했다.
"크읏, 우리 길드 녀석들은 언제 오는 거야?"
"이러다 다 죽겠어!"
바이레스의 군대에 포위당한 유저들은 발을 동둥 굴렀다.
뒤가 열려 있으면 도망치기라도 하겠지만, 바이레스는 능수능란한 전술 운영을 보여 주며 삽시간에 그들의 퇴로를 막아 버렸다.
- 죽어라! 짐의 앞읕 막는 자에겐 오직 죽음뿐이다!
"님아, 제발 자비 좀!"
"딴 필드 가서 놀 테니까 한 번만 살려 주세요!"
견디다 못한 유저들은 바이레스에게 애원을 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포위된 유저들을 언데드 창병들이 압박하고 궁수들이 계속 화살을 날려 댔다.
"크윽, 이대로 전멸인가?"
유저들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을 때였다.
갑자기 언데드 군단의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번득이는 초열의 검기가 쓸고 지나가자. 언데드들의 몸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뭐- 뭐냐?
"우와.저건!"
바이레스는 순간 당황했고, 유저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소멸되는 언데드 병사들 사이에서 쌍검을 든 전사가 나타났다. 이미 몇몇 유저들은 그가 사용한 초열의 검기만 보고도 그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다.
"바츠다! 광전사 바츠야!"
"만세! 우린 이제 살았다.!"
광전사 바츠
과거 광룡 카세라스를 물리치고, 언데드로 되살아난 광룡을 다시 스러트린 아르페디아의 특급 히어로가 지금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비록 바츠 혼자서 수만의 언데드 군단을 물리칠 순 없겠지만, 그래도 희망을 발견한 유저들은 기세를 붇돋았다.
-저놈. 저놈부터 죽여라!
바츠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안 바이레스는 갖고 있는 모든 전력을 집중시켰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언데드 군단을 보며 바츠, 아니 유한은 빠득 이를 갈았다.
"그래, 와라. 몽땅 다 와라!"
유한은 언데드 군단 정면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수십 개의 창칼들이 한꺼번에 날아오고. 화살들은[분문은 화살이 라고 되어있지만 화살들은 이 맞는것 같아 바꿉니다. by. 곰] 회피할 사각을 허용하지 않고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보통 유저라면 이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 유한은 앞으로, 또 앞으로 나갔다.
"다 쓸어 주마."
그의 손에 들린 두 자루의 플레임 소드가 거칠게 날뛰었다.
난폭하게 휘둘러지는 불꽃의 검에선 강력한 스킬들이 연방 번득였다. 그럴 때마다 바이레스의 언데드 군단은 잘려 나가고, 부서지고, 재가 되어 사라졌다.
평소의 바츠가 광전사로서 유명하다지만. 오늘은 더한 것 같았다.
"오오, 역시 바츠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도 바츠님을 돕자고."
힘을 얻은 유저들은 유한을 도와 언데드 군단을 공격했다.
점차 전세는 유저들에게로 기울어 갔다. 속속 도착하는 지원군들이 힘을 보태 주기도 했지만. 그보다 선두에서 맹활약을 하는 유한의 덕이 컸다.
-네 이놈. 짐이 손수 베어 주마!
전세가 역전되려 하자. 바이레스는 직접 검을 뽑아 들고 유한에게 달려들었다.
바이레스의 공격을 가볍게 피한 유한은 그가 탄 언데드 전마(戰馬)의 다리 베어 넘겼다. 다리를 잃은 말이 쓰러지려 하자. 바이레스는 바로 안장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그의 움직임을 미리 예상했던 유한은 플라잉 소드 스킬로 바이레스를 공격했다.
그러나 히든 이벤트의 주인공답게 바이레스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공중에서 검과 방패를 휘둘리 유한이 조종하는 플라잉 소드를 막아 내고는 가볍게 땅위로 안착했다.
-제법이구나. 그로지아의 국왕이 보냈느냐?
"그로지아랑 상관없어. 솔직하게 너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으니까."
- 그런데 왜 짐의 행보를 방해하느냐!
"그냥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해서."
그렇게 응답한 유한은 곧장 바이레스를 공격했다.
빠르고 사나운 바츠의 검격이 연달아 바이레스에게로 떨어졌다. 바이래스는 침착하게 공격틀들 막고 흘렸다. 그러다가 유한을 향해 매섭게 검을 찔러 넣었다.
검이 닿지 않을 거리라 안심하던 유한은 바이래스의 검이 쭉 늘어나자 깜짝 놀랐다.
캉!
유한은 양손에 든 플레임 소드를 교차하며 간신히 그의 공격을 막아 냈다.
바이레스는 유한이 주춤하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연방 검격을 퍼부어 댔다. 길이가 제멋대로 늘었다 줄었다 하는 바이레스의 검은 마치 살아 있는 한 마리의 뱀 같았다.
'뭔가 했더니 체인 소드(Chain Sword)였군.'
예전에 영화에서 본 적이 있었다. 여러 개의 조각으로 나뉜 검신이 철사에 꿰여져 있는데, 철사를 교묘히 조종하면 검의 길이가 제멋대로 변하곤 했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는 이제까지 나오지 않았던 무기.
"바츠님,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유한이 바이레스에게 밀리자, 근처에 있던 기사 유저가 창을 들고 다가왔다.
"비켜!"
하지만 그는 강력한 일격을 얻어맞고 뒤로 벌렁 쓰러졌다. 그를 공격한 것은 바이레스가 아니라 유한이었다.
"내 싸움에 끼어드는 자는 누굴 막론하고 죽는다."
바츠가 변했다고 하더니 헛소문이었던모양.
그리 판단하자 기사 유저는 잽싸게 유한의 결에서 물러났다. 틈을 봐가세하려던 다른 유저들 역시 아참가지였다.
꼽사리 껴서 경험치나 아이템을 챙기려다간 바츠의 손에 먼저 죽을지도 모른다.
-흥. 오만한 놈이로다 짐과 일대일로 겨루고 싶은 게냐?
"말했잖아, 화 좀 풀려고 할 뿐이라고."
유한은 검을 앞으로 내밀어 날아든 체인 소드를 단단히 엮었다.
카가강![본문은 카카캉! 인데 카가강이 맞는것 같이 수정합니다. by. 곰]
체인 소드가 플래임 소드에 휘감겨 꼼짝도 하지 않자.
바이레스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비해 유한은 실망스런 표정을 지으며 바이레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런데 넌 화풀이감도 안 되는 것 같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한의 모습이 바이레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초고속의 대쉬 스킬이 번뜩이자. 바이레스의 머리가 천천히 몸에서 떨어졌다.
-크윽! 짐의 야망이 여기서 끝날 수는‥‥‥.
"그런 건 널 약하게 만든 드림맥스에 따지라고."
바이레스가 죽자, 그의 언데드 군단을 빠르게 붕괴되기 시작했다. 유저들은 잔달을 섬멸하며 경험치와 아이템을 챙기는 데 열을 올렸다.
그렇게 마지막 언데드까지 때려잡은 뒤, 그들은 승리의 환호성을 질렀다. 한참 신나게 떠들썩대던 유저들은 이번 싸움의 주인공이 없다는 것 알았다.
"얼래? 바츠 어디 갔지?"
"그러게, 방금 전만 해도 있었는데‥‥‥."
당황한 유저들은 곧 바츠에 대해선 잊어버리고 축배를 들었다.
바츠의 뒷사정은 알지도 못하고, 또 알고 싶지도 않은 그들이었다.
2
바이레스를 때려잡은 유한은 인근의 사냥터 몇 개튤 더 초토화시킨 후 캡슐 밖으로 나왔다.
"하아, 역시 이런 걸로는 화가 안 풀려."
예전하곤 달랐다.
교감과 정현일의 수작으로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을 땐, 게임 속 가상 공간에서 날뛰며 현실을 잊고 분노를 풀었다.
그러나 지금을 달랐다. 게임에서 괜한 화풀이를 해 봐야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떄문이다.
"역시 직접 작살을 내 놔야 해."
그렇게 마음먹은 유한은 다음 날 학원을 파하자마자 학림고로 쳐들어갔다.
하교시간에 정현일이 교문 밖으로 튀어나오면 반쯤 죽여 놓을 생각이었다. 그떄는 운전기사라는 변수를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으니 운전기사가 등장하기 전에 최대한 빠르고 신속하게 처리하기로 했다.
하지만 하교 시간이 지나고, 해가 졌는데도 정현일은 나오지 않았다.
'담 넘어서 튄 건가?'
학림고는 뒷문이 없다. 그리고 정현일은 자신이 매복해 있는 줄을 모른다. 혹시 예상할 수는 있지만 패거리를 불러다 동행시키는 건 몰라도 찌질하게 월담올 할 놈은 아니다.
결국 유한은 작전율 변경했다.
그는 학림고 근방의 캡슐방에 들어갔다. 대기실에 학림고 교복을 입은 양아치들이 담배를 피우며 떠들고 있었다.
"야, 정현일이 지금 어디 있어?"
"넌 뭐야? 누군데 현일이 형을 찾아?"
말하는 걸 봐서는 유한을 모르는 1, 2학년들인 모양.
유한은 건들대며 구긴 인상을 들이미는 덩치 큰 녀석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콩팥이 있는 곳을 제대로 맞은 녀석은 얼굴색이 새파랗게 바뀌며 고꾸라졌다.
"이 자식이 미쳤나? 어디서 선방질이야?"
"너 이 새끼 죽고 싶어? 우리가 누군지 알아?"
양아치들이 우르르 일어섰지만 그렇다고 겁먹을 유한이 아니다.
"정현일이 꼬봉이잖아. 말하기 싫은가 본데, 형이랑 밖에서 상담 좀 하자."
유한이 따라오라는 듯 대기실을 나가자. 양아치들은 피식 웃으면서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캡슐방 건물에서 나가기 전에 유한을 공격했다. 제일 선두에 있던 노랑머리 녀석이 유한의 둥올 노려 날아차기를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녀석의 발이 유한의 등에 닿기 전. 유한의 뒤 차기가 녀석의 복부에 꽃혔다.
"크헉!"
"기습을 하려면 살금살금 해야지."
날아 차기를 한답시고 발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달려들었다.
요새는 농떙이 중이라지만, 극기도 도장에서 감을 쌓은 유한은 그런 허술한 기습에 당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냥 여기서 상담할래? 뭐, 나야 좁은 곳에서 싸우면 유리해서 좋지만." "이 미친 새끼!"
"밟아 버렷!"
양아치들은 한꺼번에 유한에게 달려들었다. 딴에 한 싸움하는 모양인데, 발차기만 봉쇄하면 저 망할 녀석도 별거 아니라고 믿었다.
그러나 유한은 녀석들에게 보여 주지 않은 무기가 있었다. 그건 주먹이었고, 발차기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며 사납게 후려칠 수 있었다. 좁은 곳에서 사용하기에도 무척 유용 했다.
유한은 침착하게 달려드는 녀석들의 턱과 코, 관자놀이를 노리고 주먹을 휘둘렀다.
발치기라는 떡밥에 낚여 주먹이 날아 올 줄 몰랐던 바보 녀석들은 몽땅 건물 복도에 널브러졌다.
"아오, 내 코! 내 코가!"
"턱이 부서진 거 같아!"
"이제 형이랑 이야기할 마음이 생겼냐?"
유한이 주먹을 불끈 쥐고 말하자, 양아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한은 처음에 했던 질문을 다시 했다.
"정현일이 어딨어?"
"모, 몰라요. 요새 현일이 형 학교도 잘 안 와요."
"학교에 안 온다고?"
유한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어제는 점심시간에 채린올 불러내더니 이젠 아주 학교도 떼먹고 껄덕댈 속셈인 듯.
"야, 인마. 학교 안 와도 그 새끼가 잘 들락거리는 데는 있을 거 아냐. 그래, 안 그래 ?"
"그, 그래요."
유한이 손을 들어 올리자 주눅이 든 양아치들은 곧장 실토를 했다.
"알고 있으면 안내해."
"그. 근데 거긴 일진 간부들이나 가는 데고. 우리 같은 졸때기가 갔다간 맞아 죽는데요."
"그래? 그럼 지금 내 손에 맞아 죽어야겠네.
"아. 안내할게요."
때리는 건 좋아도, 맞는 건 싫은 녀석들은 정현일의 근거지로 안내했다.
유한은 녀석들을 따라가면서 미리 준비해 온 가죽장갑을 손에 꼈다. 근거지에는 정현일을 따르는 양아치들이 득실득실할 것이다. 어쩌면 운전기사도 옆에 있을지 모른다.
'괜찮아, 만약을 대비해 챙겨 온 아이템이 있으니까.'
유한은 주머니 속에 있는 전기 충격기를 만지작 거렸다.
옛날에 아버지가 집에 도둑이 들면 쓸 거라며 구해놓은 것인데, 슬쩍 가지고 나왔다.
'그 망할 운전기사 놈도 이것만 맞으면 구운 오징어처럼 널브러질걸, 크크크!'
유한이 그렇게 웃을 때였다.
"경찰 아저씨! 살려 주세요!"
"깡패가 우릴 괴롭혀요"
갑자기 들려온 외침에 유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앞을 보니 길 안내를 하던 양아치들이 순찰을 돌던 경찰에게 달려가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아놔, 양아치 주제에 경찰에게 도움을 청해?'
유한은 양아치의 자존심을 팔아 버린 녀석들의 행각에 황당했다. 적어도 양아치라면 자신보다 고렙 몬스터인 조폭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않는가→않은가 by. 곰]
그러거나 말거나 NPC 민중의 지팡이는 법질서 확립을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이, 학생. 이리 와 봐."
"나 잘못한 거 없어요, 저놈들이 더 질이 나쁘다고요. 한 명이 여러 명을 괴롭히는 거 봤어요?"
유한의 말에 경찰은 양아치들을 돌아보았다. 유한의 말이 일견 타당해 보였기 때문.
녀석들은 최대한 불의에 시달리는 시민, 아니 학생처럼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유한에게 맞아서 터지고 멍이 든 그들이기에, 연기는 경찰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빨리 이리 와 봐. 주머니에 있는 건 또 뭐야? 칼이나 나이프 같은 거 아냐?"
절대 칼이나 나이프보다 더한 물건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정현일을 만나기 전에 경찰서 구경부터 하게 될 테니까.
"아뇨, 지갑이에요. 지갑"
"지갑이면 꺼내 보든가. 이리 오라는데 왜 자꾸 뒷걸음 질을 쳐?"
결국 주춤주춤 물러나던 유한은 돌아서 냅다 도망치고 말았다. 호각 소리와 함께 경찰의 고함 소리가 뒤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야, 너! 당장 거기 안 서?"
"난 무고하다니깐요!"
유한은 한 시간 이상의 하프 마라톤을 뛴 끝에 간신히 경찰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정현일을 손봐 주겠다는 계획은 좌절되었다.
정현일이 양아치들에게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다면, 앞으로 놈을 두들겨 팰 기회를 만들기는 더욱 더 어려워진다.
"크악! 왜 이리 되는 일이 없어!"
죄 없는 거리의 가로수를 걷어찬 유한은 발걸음을 집으로 돌렸다.
3
"지그 녀석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리지스는 비어 있는 회장 자리를 바라보며 연방 투덜거렸다.
삐쳐서 로그아웃을 한 다음에 잠시 돌아온 것 같더니, 어제는 하루 종일 접속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지그 제철소의 쏟아지는 중요 업무와 거래를 혼자서 처리해야만 했다.
그러다 그녀는 뒤늦게 유한의 소식을 들었다.
"그러니까 바츠로 놀았다 이거야?"
"응, 누님. 맹왕 바이레스랑 일대일로 싸워서 썰어 버렸대."
리지스에게 소식을 전해 준 것은 앤스였다.
바이레스 군단의 부활을 전해 들은 그는 서둘러 블루 라이언스들을 끌고 갔지만. 도착했을 땐 이미 싸움이 끝난 다음이었다.
유한에 대한 이야기도 전투에 참여한 유저들로부터 들었다.
"난 서류 더미에 처박아 놓고, 저 혼자 특급 이벤트를 즐겨? 이건 배신이야, 배신!"
"누님, 좀 봐주쇼. 바츠 요새 꽤 열 받을 일이 있어서 그래."
"열 받올 일이라니?"
리지스의 물음에 엔스가 대답하려 했지만,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오펜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시아가 요새 바람를 피우나봐."
"뭐? 정말?"
"학교 점심시간 때 어떤 애랑 같이 가는 걸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어머나, 내 말이 씨가 됐네."
그제는 유한을 놀리느라 채린이 바람을 피우는 건 아닌가 하고 말했지만 정말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는 리지스는 자신의 예상이 맞은게 황당할 따름이었다.
"혹시 사귀는 남자가 누군지 알아?"
"부자라던데? 통학용 승용차도 있는 것 같더라."
리지스는 오펜의 말을 듣고 두 눈을 반짝였다.
"토, 통학용 승용차? 그럼 운전기사도 있겠네? 보디가드도!
"뭐 그럴지도. 그리고 이건 애들에게 주워 들은 이야기긴데 그 일현인지 현일인지 하는 애가 학림고 일진 짱이래."
"학림고 일진짱 정현일이라고?"
이번엔 옌스가 반응을 보였다. 리리스와 오펜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뭐 아는 거 있어, 불량배 학생?"
"싸움 실력은 그저 그런데 머리를 잘 굴린다는 놈이던가? 돈도 많고 조폭들하고도 연줄이 있어서 그 근방 학교 패거리들은 다 녀석에게 굽실댄다 하더라고."
복성공고의 싸움 대장으로, 강북 지역을 평정한 옌스는 웬만한 학교의 일진 간부들은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현일에 대해서 이름만 알 뿐, 얼굴까지 알고 있진 않았다. 학림고와는 거리도 있고 충돌이 일어난 적도 없었기 때문에.
"어이구. 채린이 얘는 하필이면 질 안 좋은 녀석이랑‥‥‥."
리지스가 혀를 쯧쯧 차자 옌스가 심드렁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님, 아까는 동경하는 것 같더니?"
"내가 좋아하는 남자는 돈 많고, 잘생겼고, 머리 좋고, 성실하고, 성격도 괜찮은 사람이야. 돈만 많고 싸가지에 애들 끝고 다니며 뒷골목 대장 노룻하는 양아치는 아니라고."
리지스의 말을 듭은 앤스는 비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무식한 그였지만. 그런 완벽한 사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존재한다면 백사장에 진주가 떨어져 있을 확률만큼일 터.
"누님은 이제 독신 당침이군. 노처녀 칭호도 달겠고"
"카악! 뭐야!"
"진실을 말한 것뿐인데 왜 이러시나?"
펄펄 뛰는 리지스를 오펜이 간신히 붙들어 말렸다. 여전히 씩씩대는 그녀에게 오펜은 부드러운 충고를 해 주었다.
"리지스. 자신이 원하는 상대를 만나는 방법이 뭔 줄 알아?"
"뭔데?"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 어울리는 인물이 되는거야. 그래야 이상형이 나타나도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어."
"그, 그렇구나."
리지스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오펜을 바라보았다.
오펜은 생긴것이 깔끔한데다, 머리가 좋고, 성실하고 성격도 좋았다. 단 하나만 빼면 자신이 원하는 이상형이었다.
부자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런 점은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돈이야 나중에 일해서 잔뜩 벌면 되니까.
'나 어쩌면 가까이에 있는 왕자님을 못 보고 있었는지도!'
머릿속이 장미빛으로 가득 찬 리지스는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는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실례합니다."
"형, 칼 부러졌어. 수리 좀 해줘."
안으로 들어온 것은 얀과 베르디였다. 혹시나 유한이 접속한 건 아닌가 기대했던 리지스는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어? 우리 형 접속 안 했어요>"
"너네 형이니까 네가 더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니!"
"나랑 베르디는 지금 캡슐방에 있어서요."
데이트 중에 소나기를 만난 얀과 배르디는 잠시 비를 피할 겸 해서 캡슐방에 들어갔다. 유한의 동정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나 너네 형 때문에 결제 서류에 깔려 죽을 판이거든. 그러니까 빨리 접속하라고 해. 바츠 말고 지그로>"
"알았어요, 전화해 볼게요."
리지스의 청을 받아들인 얀은 로그아웃을 하고 캡슐 밖 으로 나갔다.
"아놔. 이 인간은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유현은 짜증이 났다. 학원을 마쳤을 시간임에도 유한이 전화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번도 아니다. 몇 번이고 전화를 했음에도 그랬다.
혹시나 해서 집 전화로 해 봤지만, 받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은 현재 시골 외갓집에 내려가신 중이라, 이래서는 확인을 할 수가 없었다.
"브라더랑 통화 안 돼?"
유현이 금방 돌아오지 않자 베르디, 아니 세라도 접속을 종료하고 캡슐 밖으로 나왔다.
"진짜 왜 이러나 몰라. 드라마 같은 상황이 됐다고 자기가 무슨 드라마 속의 주인공인 줄 아나."
드라마 같은 상황 만들지 말라고 조언했음에도 그렇게 만들고 온 멍청한 형이었다. 직접 물어보진 않았지만 유한의 표정만 보고도 유현은 상황을 알 수 있었다.
"현, 혹시 큰일 난 게 아닐까?"
"큰일이라니?"
"깡패 시스터가 브라더 배신했다며? 브라더 쇼크 받고 스스로 kill 한 게‥‥‥."
"자살?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일 없어."
유현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요새 유한의 감정이 무척 격해진 상태가 아니었던가. 채린에게 사정을 말하러 갔다가 상황이 더 이상하게 되어버렸다면?
세라의 말대로 극단적인 행동을 할 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집에 가 봐야겠어."
"세라도 같이 갈래!"
캡슐방에서 나온 두 사람은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어둡고 싸늘한 침묵이 그들을 맞았다. 유현과 세라는 서둘러 유한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막상 당도해서는 방문을 열지 못했다.
문을 열면 목을 맨 유한의 모습이나 피로 붉게 물든 방바닥을 보게 될 것만 같았다.
'제발 멍청한 짓은 하지 마!'
유현은 침을 꿀꺽 삼키고 방문을 열었다. 어둠과 함께 답답하고 후덥지근한 공기가 밀려왔다.
그리고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 안 들어은 건가?"
"그럼 혹시 밖에서‥‥‥."
안도하던 유현은 세라의 말에 다시 불길한 상상올 하였다. 유한이 빌딩 옥상에 서 있다거나, 으슥한 공원에서 목을 맨다거나.
그러나 그런 상상은 5분도 안 돼 깨지고 말았다.
"망할 놈의 기상청. 비 온다는 말은 안 했잖아!"
출입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유한이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장 현관으로 달려간 유현과 세라는 비를 쫄딱 맞은 유한을 볼 수 있었다.
"브라더, 살아 있었네요!"
"대체 어딜 갔었던 거야?"
유한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집 안에서 동생 커플이 튀어나오더니 잔소리를 퍼부어 댔기 때문이다.
자초지종을 들은 유한은 어이없다는 둣. 언성을 높였다.
"이 바보들아! 내가 그런 일로 자살할 것 갑냐!"
"그럼 전화했을 때 받듣가! 안 받으니까 걱정이 되잖아."
"전화?"
뒤늦게 유한은 휴대폰을 살펴보았다. 부재중 통화가 여러 번 들어와 있었다. 하나같이 동생 번호.
"아, 이거 좀 전에 경찰한테 쫓김 때‥‥‥."
시간대가 얼추 그때였다. 도망치느라 바빠서 전화벨이 울리는 줄도 몰랐다.
"경찰에 쫓기다니? 형 설마 정현일 그놈을‥‥‥."
"브라더! 아무리 그래도 살인은 안 돼요!"
"그런 거 아니거든!"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는 동생커플이 못 마땅했지만, 한편으로 유한은 그들에게 고마음을 느꼈다. 괴롭고 답답한 자신을 걱정해 주었으니까.
4
샤워를 하고 젖은 옷을 갈아입은 유한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방 안에는 유현과 세라가 있다가 그가 오자 뚫어져라 바라봤다.
"뭐야? 자살 같은 거 안 하니까 걱정 말고 나가. 세라 넌 얼른 집에 도라가고."
"걱정해서 있는 게 아니라 세라가‥‥‥."
"깡패 시스터의 불륜 상대가 누군지 궁금해서요."
불륜 상대라니. 누가 들으면 크게 오해할 말이다 세라는 아무래도 한국어 공부를 더 해야 할 듯싶었다.
아무튼 그것 때문에 유한의 방에 들어온 두 사람은 멋대로 유한의 컴퓨터를 뒤져 문제의 스크린샷 파일을 찾았다.
"저 풀더 클릭해 봐. 내가 저번에 형 몰래 거기다 파일을 모아놨어."
"보지 마! 당장 삭제해!"
유한의 만류에도 붙구하고. 세라는 스크린샷 파일을 보고 말았다. 그런데 파일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현, 이 스크린샷 파일 이상해."
"이상하다니, 뭐가?"
"깡패 시스터 얼굴, 몸이랑 안 맞아. 그림자 위치도 달라."
이게 무슨 말인가.
유한은 후다닥 컴퓨터 앞으로 달려가 두 번 다시 보지 않기로 했던 스크린샷 파일을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세라의 말이 맞았다. 정현일과 다정하게 불어 있는 채린의 모습에서 군데군데 이상한 점들을 찾을 수 있었다.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와 몸의 그림자 방향이 다르다거나, 눈의 시선이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거나.
"거기다 이렇게 확대를 하면‥‥‥."
세라는 이미지 뷰어 프로그램의 확대 기능으로 얼굴의 취대한 확대시켰다.
얼굴 주변의 픽셀들이 다른 곳에 비해 부자연스러웠다. 같은 색으로 덧칠을 하거나, 문지른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들이 다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게 나왔다.
"포샵질!"
유한의 생각대로 이 스크린샷 파일은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으로 조작되어 있었다.
정현일이 학림 아카데미에서 채린에게 접근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연인처럼 다정한 포즈를 취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지는 못했다.
채린이 다른 여자애들과 달리 쉽게 넘어오지 않은 탓이다.
이러다 보니 정현일은 조바심이 생겼다. 유한은 제철소를 완공하고, 과거에 바츠였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아주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기세등등해 하는 유한의 얼굴을 구겨 놓고 싶었다. 그래서 정현일은 채린과 키와 몸매가 비슷한 여자에를 꼬셔 사진을 찍고 거기다 채린의 얼굴을 붙여넣었다.
물론 이것은 학림고에서 합성에 꽤 실력이 있다는 녀석을 시켜서 만든 것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은 대충 봐서는 합성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다.
유한도 눈치 채지 못했다.
안목은 둘째 치고, 정현일과 채린이 다정하게 있는 모습에 너무 흥분해 파일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거기다 채린이 요근래 격조했었으니까.
"이, 이거 진짜 합성된 거 맞아?"
"세라가 본 거라면 틀림없어. 명색이 미술 대학 지망생이니까"
유한은 그 자리에 털씩 주저앉았다.
이게 합성으로 만들어진 거라면. 그때 레스토랑에서의 일도 정현일의 수작이었던 것은 아닐까? 채린은 아무런 사심 없이 밥만 갑이 먹은 건 아닐까?
그런 거라면 자신은 정말 실수한 셈이다.
채린을 믿어 주지 못하고 오해하여. 정현일이 좋아할 일만 하고 말았다. 아마 놈은 자신과 채린을 갈라놓는데 성공했다 생각하여 채린에게 더둑 껄떡대고 있을 터.
"으악!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야!"
"착가한 거라면 얼른 사과를 해야지."
동생의 말은 맞았다.
유한은 서둘러 휴대폰을 집어 채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몇 번 울리다가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채린아, 난데‥‥‥."
"나 너랑 할 말 없거든."
유한이 몇 마디 하기도 전에 채린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무안해진 유한은 다시 전화틀 걸었다.
그런데 몇 번이고 전화를 해도 채린은 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단단히 삐친 모양.
'그러게 왜 싸워서는‥‥‥.'
어두운 표정을 짓는 형을 보며 유현은 혀를 끌끌 찼다.
형이 오해한 만큼 채린 누나도 감정이 상한 게 를림없었다. 그녀의 성격이 아무리 시원시원하다 해도 근본은 여자였으니까. 남자보다 감정이 섬세할 것이고, 그만큼 한번 삐치면 회복시키기도 어렵다.
"이제 어쩌면 좋지?"
곤란한 표정을 짓던 유한이 물끄러미 동생과 세라를 바라보았다. 연애 고렙인 녀석들이라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가서 싹싹 빌어요. 브라더."
"그래. 직접 찾아가서 사과하는 게 좋을 거야."
비록 이런 경우는 없었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걸 깨트려 놓고 간단히 전화 한 통화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두 사람의 말에 유한은 내일 채린을 찾아가 제대로 사과하기로 결심했다. 부디 채린이 그 사과를 받아 주어야 할 텐데.
'아. 신이여!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그날 밤새도록 유한은 신을 찾아 구원을 갈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