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오해 (134/143)

Chapter 01 오해

          1          

 "이게 뭐야! 뭐냐고 젠장!"

 사진 파일올 보고 흥분한 유한은 주먹올 내리쳤다.

 어찌나 강하게 내리쳤던지, 주먹에 맞은 키보드 자판이 

튀어나와 책상 위를 나뒹굴정도.

 "형. 왜 그래?"

 자다가 물 마시러 나왔던 유현은 형이 발악하는 소리를 듣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유한은 재빨리 모니터에 든 사진올 없앴다.

 "별거 아니야. 가서 잠이나 자."

 "별거맞는것같은데?"

 유현은 이렇게 흥분하는 형을 오랜만에 보았다.

 형의 이런 모습은 예전에 학교를 그만뒀을 때와 무척 흡사했다. 그때도 아주 예민해져 별거 아닌 것에 흥분을 하고 화를 내곤 했었다. 

 그래서 유현은 그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무슨일이야? 내가 도와줘?"

 "그냥 가라니까!"

 "내가 남이야?"

 유현의 물음에 유한은 더 윽박지르려다 말았다. 언제나 속을 살살 긁는 얄

미운 동생이지만. 지금은 걱정스런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젠장!"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어 대던 유한은 컴퓨터 앞에서 물러나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사이 유현은 컴퓨터 앞에 앉아 유한이 보았던 사진 파일올 열었다. 

 "전부 게임 스크린샷이잖아."

 학교 같아 보이는 가상의 공간에서 채린과 어떤 남학생이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같이 책올 보고, 던전 같은 곳에서 모험을 하는 사진들도 있었다.

 그 정도였다면 형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둘 사이의 거리는 아주 가까웠으며 오해하기 쉬운 포즈를 취한 장면도 있었다.

 "참나, 요새 안 보인다 했더니‥‥‥."

 고개를 저으며 사진들을 보던 유현은 채린과 함께 찍힌 소년이 어딘가 낯이 익다는 걸 알았다.

 "이 자식 혹시 배히모스란 놈 아냐?"

 "그래, 베히모스 맞다."

 캐릭터를 바꾸었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그놈 내가 알고 있는 녀석이야. 정현일이라고 하는대, 학림 재단의 이사장 손자지. 나 학교 그만두개 만든 주동자다"

 "그 자식도 형이 지그란 걸 알아?"

 "알고 있으니까 지금 이런 수작 부리는 거 아니겠냐"

 채린은 유한이 학교를 그만둔 이유를 모른다.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해 준  적이 없으니까.

 유한은 자신이 이런저런 일들로 바쁠 때, 정현일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린에게 접근했을 거라 판단했다.

 채린을 꼬셔 자신에게 북수를 하려는 생각일 터.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미리 생각했어야 했다.

 아니. 채린이 학림 아카데미에 다닌다고 했을 때 분명 껄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를 다른 학원에 다니게 만들려 하지 않았던가.

 "앞으로 어쩔 거야?"

 "어쩌긴, 박살을 내 놔야지."

 이를 뿌드득 갈아붙인 유한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유현은 그런 그를 진정시켰다. 놈을 때려죽이고 싶은 형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렇게 열을 받은 상태에선 오히려 일이 엉뚱하게 될 수 있었다.

 "진정해, 형. 때려잡는 건 뒤로 미뤄도 늦지 않아."

 "그럼 그 자식이 계속 채린이 주변에 얼쩡대도록 놔두란 말이야?"

 "일단은 누나한테 먼저 이야기를 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

 "채린이한테 먼저 이야기를 하라고?"

 "이 상황에서 날뛰면 TV 드라마의 재현이 될 뿐이라고."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연인에게 접근하는 라이벌을 두들겨팬다.

 영문도 모르고 라이벌과 가까워지고 있던 연인은 그런 남자 주인공의 행동을 비난한다. 연인의 그런 태도에 남자 주인공은 펄펄 뛰며 흥분하다 일은 더 커지기만 하고‥‥‥.

 나중에 뒷수습을 하려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는다. 간악한 라이벌이 주인공의 곤란한 상황올 악의적으로 이용하기에.

 "이게 드라마의 공식이지. 형도 이 삽질 할거야?"

 "아니."

 "그러니까 먼저 누님한테 말을 해. 형이 왜 학교를 잘렸고 베히모스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자신이 바츠였다는 것은 저번에 채린의 앞에서 밝혔다.

 그러나 학교를 그만둔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퇴학당한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만 미리 이야기해 주었다면, 정현일이 채린의 결에서 얼쩡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형이 숨기고 있는 걸 솔직하게 말하기만 해도 누님과의 사이가 지금보다  더 좋아질 거야. 자신의 비밀을 알려 주는 건 그만큼 상대를 믿고 의지한다는 뜻이니까."

 "그렇구나. 넌 어떻게 그런 걸 잘 아냐?

 "누군가를 사귀는 데 있어선 내가 형보다 내공이 높으니까 그렇지. 친구든 연인이든."

 잘난 척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자니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유현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이런저런 핑계를 댄다 해도 결국 자신이 그녀에게 소홀했기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일 테니까.

 분명 그 점은 반성할 일이다.

 "네 말이 맞아. 일단 채린이한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 그렇게 하라고."

 정현일을 때려잡는 것은 그 뒤에 해도 될 일.

 유한은 흥분한 마을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가 생각을 잘해야 할 때였다. 그리고 정현일이 어떤의도로, 어떤식으로 자신의 소중한 존재를 빼앗으려는 지도 확실히 알고 있어야 했다.

          2          

 해가 뜨자 유한은 곧장 채린의학교로찾아갔다.

 극기도 도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강서 고등학교가 채린이가 다니는 학교였다.

 유한은 강서고 교문 근처에서 채린이 등교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무리 기다려도 채린은 나타나지 않았다. 등교 시간이 거의 다 끝나 가는 데도 그랬다. 

"왜안오지?

 유한이 초조해 할 즈음, 교문을 지키고 있던 체격 좋은 학생 주임 선생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행동에 교문을 향하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아니, 질주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꼭 들소 떼를 보는 것 같네.'

 유한은 그 들소 떼 중간에서 채린을 발견했다. 누구보다 빠르게 교문으로 달려가는 그녀를 보고, 유한은 골목에서 나와 손을 흔들었다.

 "채린아!"

 "어머, 유한아!"

 채린이 유한을 알아보고 밝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이끌린 유한은 들소 때(?)를 헤치고 채린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고."

 "요새 네 얼굴보기 힘들어서."

 "아, 미안."

 그러나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시간은 얼마 없었다. 시계를 보고 있던 학생 주임이자 채린의 담임 선생이 카운터를 세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 십 초 남았다. 십, 구, 팔‥‥‥."

 카운터가 시작되자 학생들의 질주는 더욱 빨라졌다 급한 것은 마찬가지였던 채린도 서둘러 발걸음을 교문으로 옮겼다.

 "미안해, 유한아 나중에 전화할게."

 아침 일찍부터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다.

 그러나 채린을 곤란하게 할 순 없는 노릇이라, 유한은 그녀를 보내주었다. 덕분에 채린은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할 수 있었다.

 채린이 들어가고 난 직후, 이태호 선생은 뒤이어 들어오는 지각생들을 한쪽으로 몰았다.

 "크흐흑! 늦다니‥‥‥."

 "늦을 줄 알았다, 인석아. 너 오늘 새벽가지 아르페디아 온라인 했지?"

 "아녜요, 영어 예습하다 그랬어요."

 "웃기고 있네. 내가 테시아스 필드에서 놀고 있는 널 봤거든."

 이태호는 쭉 늘어진 지각생들의 앞을 지나가며 일일이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러던 그는 교문앞에서 아쉽게 발걸음을 돌리는 유한을 발겼했다. 어딘가 낯이 익은 녀석인데, 생각해 내기 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누구더라?"

 "채린이 남자 친구인 것 같던데요."

 지각생 중 채린과 같은 반인 여자애가 말했다.

 "채린이 남자 친구라고?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전사 아레스로 플레이를 할 때 본 적이 있었다.

 채린과 같은 반 친구들이 늘 들락거리는 철공소, 아니 이젠 제철소의 주인.

 이름이 지그라고 하던가?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꽤 유명한 녀석이다. 예전에 바츠 유저였던 것으로 알려져 공식 홈페이지를 아주 들썩거리게 만들어 놓았다.

 "점잖게 충고라도 해 줄 걸 잘못했군."

 선생된 도리로서 연애질온 게임에서나 해라. 채린이 공부하는 데 방해된다 뭐 이런 식으로.

 하지만 이미 가 버린 녀석에게 어떤 말도 해줄 수는 없었다.

 이태호는 지각생들에게 오리걸음으로 본관까지 가도록 지시를 한 뒤 교문 밖으로 나와 담장을 훑었다. 몰래 쥐구멍을 이용하거나 담치기 하려는 지각생들을 잡을 요량으로.

 그때 그의 호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뼈리리리리---!

 "아침부터 누구지?"

 모르는 번호였지만. 이태호는 일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강서고 이태호 선생님이십니까?"

 "그런데요, 누구십니까?"

 그렇게 묻긴 했지만 이태호는 내심 짐작했다. 상대 목소리가 낯익었기 때문이다.

 '이자가 왠일이지?'

 한때 같은 조직에 있었지만. 별로 친하게 지낸 적은 없었다. 티쳐스가 붕괴된 이후로는 더더욱.

 "정 교감이라고 하면 기억하시겠습니까?"

 "티쳐스의 길드장이셨지요? 무슨 일이십니까?"

 이태호의 물음에 정교감이 용건율 꺼냈다.

 "언제 이 선생님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말입니다."

 "저는 정 교감님과 나눌 진지한 대화가 없습니다만."

 "그러지 말고 한번 시간을 내 주십시오. 티쳐스 때의 일은 저도 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태호는 끝까지 거절하려 했지만. 상대의 간곡한 청에 결국 넘어가고 말았다. 정 교감과 오프라인에서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한 그는 전화를 끊고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괜한 약속을 한게 아닌가 걱정되었다.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한편, 강서고 교문에서 물러난 유한은 채린이 휴대폰으 로 전화를 걸었다. 채린이 전화를 할 때까지 기다리려다 참지 못하고 먼저 건 것이다.

 아직 수업 시간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으니, 그 사이에 이야기를 해 볼 생각이었다.

 채린은 금방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 끝에 수화기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셔."

 "허걱!"

 유한은 깜짝 놀랐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채린의 맑고 경쾌한 목소리가 아니라. 묵직하고 거친 사내의 음성이었다.

 그것도 잘 아는 사람, 바로 채린의 부친인 송태수의 목소리였다.

 "너 유한이냐?"

 송태수도 유한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모양이다. 유한은 원망 어린 투로 송태수에개 응답했다.

 "왜 채린이 휴대폰을 관장님이 갖고 계신 겁니까?"

 "현관에 놓고 갔던데? 늦잠 자다 지각한다고 설치다가 잊어버린 모양이야."

 "크윽!"

 뭐가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 것인지.

 유한의 속도 모르고 송태수는 마침 기회라는 듯. 그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고 보니까 너 요새 도장에 안 나오던데, 그럼 안돼, 인마. 근육이 살 되는 거 금방이다. 입시 공부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게임이나 하고 채린이를 꼬실 목적이라면‥‥‥."

 "관장님!"

 "잘못한 건 관장님이시죠. 왜 채린이를 학림 아카데미에 보내신 겁니까?

 따지고 보면 채린이와  소원하게 된 원흉은 송태수이지 싶었다.

 성적 올리자고 게임 내의 학원에 보내는 건 이해를 한다. 그러나 왜 그 하고많은 학원들 중에서 학림 아카데미인가! 비리 만연에 그 재수없는 녀석까지 다니는.

 "왜보냈긴. 거기가 잘 가르친다고 해서 보냈지."

 "잘 가르치는 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성적만 올려 줄 뿐이라고요!"

 유한의 외침에 송태수가 느물거리며 말했다.

 "이거 너답지 않게 왜 이러나? 채린이가 좋은 대학에 갈까 봐 걱정 돼? 그럼 너도 학림 아카데미에 다니든가."

 "크아악! 그게 아니라니까요!"

 왜 사람들은 성적만 잘 나오면 다라고 생각하는지. 성적 지상주의 속에 교묘히 포장되어 있는 비리와 추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지.

 터질 것 같은 속을 간신히 진정시킨 유한이 학림 재단에 대해 설명을 하려 할 때 송태수가 말했다.

 "난 이만 출근해야 하니까 더 이야기할 것이 있으면 도장으로 와."

 뚜뚜뚜!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놔, 오늘따라 뭐 이래?"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아 답답한 유한이었다.

 천생 채린이에게 말하는 것은 방과 후로 미뤄야 할 듯.

          3          

 점심시간.

 배식을 받기 위해 친구들과 식당으로 가던 채린은 다른 학교 교복올 입은 남학생이 교내를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았다.

 "누구지? 전학생인가?"

 "멋지다. 연예인 같아."

 "멋지긴 개뿔. 기생오라비같이 생겼네. 뭘."

 여학생들에겐 찬사를. 남학생들에게 악평을 듣고 있던 남학생은 채린을 보고 반색을 하면서 다가왔다.

 "시아 맞지? 실제로 보니까 더 예쁘구나."

 "누구?"

 누군데 자신의 아르페디아 온라인 캐릭터 이름을 알지, 물끄러미 상대를 살펴보던 채린은 손뼉을 마주쳤다.

 "아! 일현이구나! 일현이 맞지?"

 "그래. 맞아."

 캐릭터명 일현(一賢).

 채린이 게임 내에서 내에서 다니는 학원인 학림 아카데미에서 사귄 친구였다.

 그녀가 학림 아카데미에 처음 들어가서 강의를 따라가지 못해 곤란해 하고 있올 때. 일현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성격도 친절하고 매너도 좋은 일현은 강의 내용을 쉽게 풀이한 텍스트 파일을 이메일로 보내 주기도 했고,  학원의 마탑 미궁올 탐험할 때 이런저런 도움올 주기도 했다.

 "우리 학교까진 무슨 일이니?"

 "내가 저번에 오프에서 만나서 점심 산다고 약속했었잖아."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마탑 미궁 10층에서 두 사람은 중간 보스 '탐구의 악마'를 만났다. 레벨200대의 고렙 몬스터 탐구의 악마에게 같이 온 파티원들은 전멸 당했고, 일현도 죽을 위기에 처했다.

 "그때 네 덕분에 살았잖아."

 어디 살았을 뿐인가. 채린의 활약 덕분에 탐구의 악마를 쓰러트릴 수 있었다. 거기다 채린은 그때 획득한 아이템 '과학 탐구 완전 정복 문제집' 을 일현에게 양도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고마웠던 일현은 언제 오프에서 점심올 사겠노라고 약속했다.

 '과학은 별로 안 좋아해서 준 건데'

 채린이 일현에게 아이템을 양도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실제로 일현이 약속을 지키겠노라고 이렇게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냥 해 본 소리에, 나중에 언제 기회가 되면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일이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일현은 찾아왔다. 그것도 점심시간에 맞춰서 불쑥.

 "너 우리 학교는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하하. 학림 카데미 운영자에게 전화해서 부탁을 했지. 시아 네가 다니는 학교만 좀 알려 달라고"

 그렇게 말한 일현은 시계를 슬찍 보았다가 다시 말을이었다.

 "아직 점심 안 먹었지? 맛있는 데 알고 있는데 같이 갈래?"

 "안돼. 땡땡이치면 혼난단 말이야."

 "점심시간 내로 돌아오면 되잖아. 같이 가자, 응?"

 체린은 거절하려 했지만, 거듭된 일현의 청에 결국 수락하고 말았다. 점심 약속을 지키겠다고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거절하는 건 미안한 일이었다.

 거기다 채린은 일현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처음엔 몰랐는데 일현을 몇 번 보자 생각난 일이었다.

 "멀리 있는 곳은 아니지?"

 "그리멀지 않아. 거기다 교문에 차가 대기해 있으니까 괜찮아."

 "차가 대기해 있다고?"

 "하하, 우리 집이 좀 부자라서‥‥‥."

 학교 밖으로 나가는 채린과 일현읕 보며 학생들은 연방 수군거렸다.

 하긴. 생각해 보라. 멋지게 생긴데다가 부잣집 도련님처럼 보이는 애가 학교까지 찾아와 데려갔으니.

 "채린이 부럽다 애." 

 "나도 저런 남친이 있었으면."

 이들과 반대로 김준수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률 갸웃했다.

'채린이한테 저런 친구도 있었나?'

 그런데 이번 일, 지그가 알면 펄쩍 뛰지 않을는지?

 "야, 그게 진짜냐? 아까 그놈이 진짜 그놈이야?"

 "그래, 맞다니까."

 식당에서 배식을 받던 준수는 뒤에 애들이 떠드는 것을 들었다.

 교내에서 문제아 리스트에 올라가 있는 양아치들.

 싸움 이야기, 여자애들 이야기, 게임 이야기 등 언제나 가벼운 소재로 침을 튀기던 녀석들이 간만에 화재를 잡은 듯 입을 놀렸다.

 "학림고 일진 짱인 정현일이 맞아. 스타일을[본문에선 스타일이 라고 괴어있지만 스타일을 이 맞는것 같아 바꿉니다. by. 곰] 좀 바꿨지만, 내 눈은 못 속인다고."

 "그 자식이 울 학교에는 뭐 때문에 온 거야?"

 "아까 3반의 송채린을 데리고 가던데. 둘이 아는 사이 같더라."

 "그럼 정현일이 대장장이 지그, 아니 광전사 바츠인가?"

 "노노. 정현일 캐릭터는 내가 아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김준수의 일굴이 더 심각하게 변했다. 아무래도 이번 일, 생각보다 더 크게 번질 듯싶었다.

          4          

 일현, 아니 정현일이 채린을 데리고 간 곳은 근방의 유명한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평일이었지만 꽤 인기가 많은 곳이라 그런지 사람들고 북적거렷다. 정현일은 미리 예약한 자리고 채린을 데리고 가서 앉혔다.

 "시아는 뭐 먹고 싶어?"

 "글쎄. 여기 뭐가 맛있니?"

 예약까지 해 놓은 것을 보면 잘 알 것 같아서 채린은 정현일에게 되물었다.

 "이 집은 돈가스를 잘하거든, 나랑 같이 커플돈가스먹자."

 "헤. 커플 돈가스? 일현이 너 점심이 목적이 아니였구나?"

 채린이 살짝 째려보자. 정현일은 다급하게 변명을 늘어 놓았다 점심이 목적이 아닌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사실 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아냐, 커플 돈가스는말이지‥‥‥."

 정현일은 커플 돈가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하트 모양의 커다란 돈가스는 두 사람이 하나를 먹어야 하기에 그렇게 이름이 불여졌지만. 무엇보다 맛이 좋고 푸짐하다고.

 "근데 그 맛있는 걸 혼자서 사 먹으러 오긴 쪽팔려서 말이야. 난 여자친구가 없어서."

 "알았다. 그거 먹자."

 채린이 허락하자 정현일이 냉큼 점원올 불러 주문을 했다.

 "여기 커플 돈가스 하고요 음료수 한 병 주세요."

 잠시 후 음식이 나왔고 두 사람은 서로의 학교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모습올 본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고경덕이었다. 학교를 조퇴하고 시내에 잠깐 물건을 사러 나온 그는 유하와 갈 다음 데이트 장소를 물색하던 중, 이 광경을 목격했다.

 "앗! 저거 채린 누님이잖아?"

 경덕은 레스토랑 창밖에서 한참 동안 두 사람의 행각을 지켜보다 바로 유한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세 번이나 전화를 걸었음에도 유한이 받지 않는 게 아닌가.

 "아놔. 지금 자기 애인이 외간 남자랑 바람을 피우고 있는데, 뭐 하는 거야?"

혹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고경덕은 얼른 가까운 곳에 있는 캡슐방에 들어가 아르페디아온라인에 접속했다.

 <엔스 님께서 접속하셨습니다. 오늘 하루 게임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고운 음성과 함께 주위가 밝아졌다. 어제 마지막으로 접속을 종료한 사냥터였다.

 쪽지나 귓속말을 보낼까 하다가 마침 사냥터가 제철소에서 가까워 직접 달려가 알려 주기로 했다.

 유한은 제철소의 개인 작업실에서 정밀 조립 스킬을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 이 시간에는 입시 학원에 있어야 헀지만, 채린을 기다릴 겸, 그리고 머리도 식힐 겸 해서 강서고 근방의 캡슐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바츠, 한가하구먼."

 "왜왔냐?"

 요즘 에이린과 데이트한다고 바쁜 녀석이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을 찾아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유한이었다.

 "요새 시아 누님이랑자주만나?"

 "그건 왜 묻는 건데?"

 유한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엔스는 짐작할 수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요즘 두 사람 사이가 소원한 모양. 옌스는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입을 열었다.

 "오늘 시아 누님이 이상한 녀석과 데이트하는 거 봤다."

 "뭐라고?"

 순간 유한은 자신이 잘못들은 줄 알았다.

 "누님이 어떤 희멀건 놈하고 데이트하는 걸 봤다고."

 "혹시 네가 잘못 본 건 아니고?"

 사진을 보긴 했지만. 그 정도로까지 발전한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그저 정현일이 채린이 곁에서 얼쩡거리는 수준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야. 두 사람이 식당에서 정답게 밥 먹는 걸 봤다고."

 "그냥 밥만 같이 먹은 걸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지만, 메뉴 하나를 사이좋게 나눠 먹고 있더라니깐!"

 그러면서 옌스는 문제의 요리가 어떻게 생겼고. 그걸 어떤 식으로 먹고 있던지, 아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물론 그 과정에 약간의 과장과 살이 덧불었다.

 "서, 설마!"

 옌스의 설명을 들으니 진짜 채린이 바람을 피운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정말일까. 정현일이 부린 수작은 아닐까.

 하지만 그 수작이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문제를 더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

 원래는 채린이 학교 수업을 마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바로 지금 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옌스, 너 그 패밀리 레스토랑이 어딘지 알아?"

 "쳐들어가려고? 나야 위치도 알고 근방에 있지만,바츠 네가 멀리 있으면 소용이 없잖아."

 "상관없으니까 일단 위치나 말해!"

 유한은 옌스에게서 패밀리 레스토랑의 위치를 들었다. 

그는 바로 캡슐방에서 부리나케 튀어나와 두 사람이 있다는 곳으로 달렸다.

 다행히 강서고 근방에 있는 곳이라 그리 멀지 않았다.

 '이 망할 자식! 정말 채린을 꼬신 거라면 내가 가만 안 놔둔다.'

 바람같이 달려가는 유한의 두 눈은 불꽃같이 이글거렸다.

 눈을 벌겋게 치켜뜬 유한이 오고 있다는 것도 모른 체, 정현일은 채린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래 가지곤. 내가 속이 터지는 줄 알았다니깐."

 "그거 너무 심했다."

 담담히 정현일의 이야를 듣고 있던 채린의 눈에 시계가 들어왔다.

 점심시간 끝나기 10분전이었다.

 슬슬 돌아가 봐야 할 시간, 채린은 가기 전에 정현일에게 묻고 싶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사실 그녀가 정현일을 따라나선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현아. 너 혹시‥‥‥."

 "혹시 뭐?"

 "베히모스 아니니? 예전에 철십자 길드에 있던."

 여유 만만하던 정현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긴장하는 그에게 채린이 계속 물었다.

 "너 볼 때마다 베히모스와 많이 닮은 것 같아서. 내가 게임하면서 베히모스를 본 적이 있거든."

 실제로 정현일도 채린이 학림 아카데미에 오기 전에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대략 생각나는 것만 해도 두 번이었다. 뇌제의 능묘, 그리고 마노스 제국의 황궁에서.

 그때 채린은 강유한 옆에 있는 짜증나는 궁수 계집애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학원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결에서 자세히 뜯어보니 상당한 미녀였다.

 독차지하고 싶었고, 강유한의 여자 친구라면 더더욱 빼앗고 싶었다.

 "베히모스 유저는 내 사촌이야.

 "사촌이라고!"

 "나랑 많이 닮아서 사람들이 착각해서 묻곤 해. 덕분에 좀 난처하지."

 정현일의 거짓말에 채린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베히모스가 맞다면 한 대 날려 주려고 했었는데‥‥‥."

 '날 날린다고?'

 채린의 실력을 모르는 정현일은 피식 웃었다. 그냥 해 본 소리라 생각한 것이다.

 "왜 날리려는 건데?"

 "배히모스가 지그틀 꽤 곤란하게 만들었거든. 뭐 지그는 그걸 훌률하게 극복해 냈지만 말이야."

 "정현일은 속에서 뭔가 꿈틀함을 느꼈다.

 지그. 아니 유한에게 철저히 당한 일이 떠올라 불쾌하기도 했지만, 지그를 이야기하며 즐거워하는 채린의 모습을 보자니 속에서 짜증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요샌 학원 때문에 바빠서 지그를 많이 못 봐. 지그도 답답한가봐. 오늘 아침에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거 있지. 전화라도 해 주려고 했는데 휴대폰을 깜박 놓고 와 버려서‥‥‥."

 말을 하고 있는 채린은 무척이나 아쉬워하고 있었다. 정현일은 점점 더 짜중이 났다.

 그동안 채린과 어울리면서 가유한 따위는 잊게 해 주겠노라고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했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던 것 같았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학교까지 직접 쳐들어가서 통학용 승용차와 운전기사까지 데리고 있는 부잣집 아들임을 뽐냈는데, 채린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제 남자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한마디로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의미다.

 그둥안 꼬셔 데리고 놀다가 차버렸던 여자애들하고는 완전히 달랐다.

 '쉽지 않다 이건가?'

 하지만 정현일은 그 점에서 더 오기가 생겼다. 어떻게 하든 채린을 자신의 여자 친구로 만들어 강유한이 미쳐 날뛰는 꼴을 보고 싶었다.

 "어머, 늦었네. 얼른 가 봐야겠어"

 "걱정마, 태워다 줄께"

 채린과 정현일은 패밀리 레스토랑을 나왔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유한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름 햇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이놈이 언제?'

정현일은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론 기뻣다. 눈이 뒤집어진 유한의 얼굴을 보았기에.

          5          

 "유한아, 너 어떻게‥‥‥."

 유한은 채린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곧장 정현일의 앞으로 다가간 그는 주먹올 휘둘렀다.

 처음에는 채린에게 베히모스의 수작을 설명하려 했지만, 둘의 다정한 모습에 그만 눈이 돌아가고 말았다.

 퍽!

 느닷없이 날아온 주먹을 정현일은 피하지 못했다. 피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려 했을 때 이미 주먹은 뺨에 작렬하고 있었다.

 "뭐, 뭐가 이렇게 빨라?'

 맞던 순각에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눈을 뜨자자 빙글거리는 세상 가운데 씩씩대는 강유한이 보였다.

 아니, 눈앞에 있는 게 과연 강유한이 맞긴 한가?

 예전에 녀석이 악을 쓰며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일어나. 자식아!"

 유한은 쓰러진 정현일올 일으켜 세웠다.

 정현일은 어떻게든 유한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손발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만큼 방금 전에 받은 데미지는 상당했다.

 "유한아, 너 왜 그래?"

 또다시 두들겨 맞을 뻔한 정현일을 채린이 살려 주었다.

 그녀는 재차 날아가려는 유한의 주먹을 붙들고 그를 다독였다.

 "뭔지 모르지만, 일단 좀 진정하고‥‥‥."

 "진정하라고? 뭘 어떻게 진정하라는 건데!"

 사정을 모르는 채린이 이렇게 말리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유한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정현일에게 다사 주먹올 날렸다.

 턱!

 그의 주먹은 중간에서 가로막혔다.

 "학생,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러서야 쓰나."

 어느 틈에 나타났는지 눈앞에 새까만 양복을 입은 까무잡잡한 사내가 서 있었다.

 '휴, 대철 아저씨 때문에 살았네.'

 정현일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대철은 그의 통학 승용차 운전기사로. 예전엔 흑곰파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었다. 체격도 평범하고 암전한 인상이었지만, 싸움 실력은 뒷세계에서도 톱 수준.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르게 만든 게 누군데요!"

 상대의 점잖은 타이름에 화가 났던 유한은 다시 한번 주먹을 날렸다. 대철은 손바닥으로 유한의 주먹올 가볍게 쳐 내곤 반대편 손끝으로 그의 목을 찔렀다.

 "컥!"

 '고, 고수다.'

 한순간 숨통이 턱 막히는 것을 느낀 유한은 비틀거리다 엉덩방아를 찍었다.[본문은 찌었다 로 되어잇지만 찍었다고 바꿉니다. by. 곰]

 대철은 그런 유한의 앞을 막아섰다. 쓰러졌긴 하지만 유한의 눈빛이 이글거렸기 때문이다. 뭐 그건 다 대철의 뒤에서 히죽대는 정현일 때문이었지만.

 "그만하지, 학생. 계속 이러면 경찰을 부르겠어.”

 "웃기고 자빠졌네, 깡패들 주제에 경찰을 부르겠다고."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유한을 본 채린은 다시 한번 그를 말렸다.

 "유한아, 그만해."

 그러나 유한은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을 안 했다.

 채린은 자신을 밀치고 대철에게 다가서는 유한을 들려 세웠다. 그리고 따귀를 철씩 날렸다.

 효과가 있었는지, 유한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크크크, 잘한다! 알아서 쪼개지는구나!'

 싸늘한 기운이 맴도는 둘 사이를 보며 정현일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강유한에게 맞은 뺨이 아직도 욱신거렸지만, 이만한 결과를 보는 셈 치면 싼 편이다 싶었다.

 "이제 좀 정신이 드니?"

 채린의 말에 유한은 입술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말했다.

 "야. 송채린. 넌 뭘 안다고 자꾸 나서는 건데?"

 그녀가 편을 들어 줘도 시원찮을 판에 자꾸 딴죽을 걸자 유한은 짜중이 확 치밀어 올랐다.

 "그래, 나 아는 거 없어. 들은 것도 없으니까. 그래도 네가 이렇게 미친 듯이 날뛰는 거 막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분명 유한이 이렇게 나타난 데는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일현의 운전기사와 싸우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한눈에 봐도 대칠은 상당한 실력자였다. 아버지나 곽대발 아저씨에게는 못 미치지만.

 하지만 유한은 채린의 이런 진심 어린 우려를 알아주지 못했다. 아니 알아주기는커녕 오해하기만했다.

 "막지 않으면 안 된다고? 누굴 위해서 그러는 건데?"

 "그거야‥‥‥."

 "됐어. 나 아무 말도 안 들을 거야.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내 귓구멍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으니까."

 유한은 채린이 정현일을 편드는 것 같아 더 엇나갔다.

 "뭐라고? 너 정말 이럴거야!"

 그럼 내가 어째야 되는데? 네가 저 개자식하고 꼴을 손가락 물고 지켜보고 있을까?"

 "놀긴 누가 누구랑 논다고 그래?"

 "내가 두 눈으로 본 건 뭔데? 방금 전에 내가 본 건 뭐냐고!"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두 사람의 감정도 격해졌다,

 유한은 믿었던 채린이 배신했다 생각해서 화가 났고, 채린은 유한이 자신을 불신하는 것처럼 느껴져 무척 기분이 나빳다.

 '제길, 어쩌다 이렇게 된거지?'

 유한은 자신의 감정을 누그릴 수 없었다. 분통은 화산처럼 터지는데 가슴은 미칠 듯이 답답했다.

 원래 계획은 이런 게 아닌데. 채린에게 자신이 학교를 그만두게 된 사정을 말하고. 정현일을 조심하라고 말해 줄 생각이었는데.

 그런데 어쩌다가 TV드라마를 찍고 만 것일까.

 문득 자신의 이런 모습이 우스워졌다.

 "나간다. 송채린. 잘있어라."

 허탈함에 기운이 쏙 빠진 유한은 발걸음을 돌렸다. 더 이상 채린을 바라보는 것이 힘들었다.

 "야, 강유한!"

 채린이 불렀지만, 유한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떠나가는 유한을 보며 정현일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채린이 앞엥 ㅣㅆ어 그 기분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이 너무 아쉬울 따름.

 "미안해, 일현아. 재가 평소에 저러지 않는데‥‥‥."

 "괜찮아. 그보다 늦었으니 얼른 가야지."

 정현일은 차에 타라는 듯 손짓했지만, 채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기왕 늦었으니 그냥 걸어서 갈래."

 유한만큼이나 채린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생각해 보면 뭔가 오해할 만한 장면을 보인 게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 유한이 너무하다 느껴졌다.

 그런 불편한 채린의 마음도 모르고 정현일은 제속 치근덕댔다.

 "그러지 말고. 한낮에 걸어서 가다간 피부가‥‥‥"

 "괜찮다고 했잖아!"

 채린이 쏘아붙인 말에 정현일은 움찔 놀랐다. 어느 틈엔지 그의 발은 채린에게서 뒷걸음질한 상태였다.

 "소리쳐서 미안해, 일현아. 나 좀 내버려 두지 않을래?"

 "으, 응."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린은 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

 정현일은 그런 채린을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위로하면서 자신에 대한 호감을 더 쌓게 만들 셈이었는데, 기회가 아깝게 날아가고 말았다.

 '뭐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그는 이 정도에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채린이 완전하 자신의 여자가 된 모습을 유한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야 녀석이 더 미쳐 날뛸 테니까.

 "크크, 이제 시작일뿐이다."

 히죽 웃던 정현일은 갑자기 얼굴을 찌푸렸다.

 유한에게 맞은 곳이 아팠기 때문이다. 차 유리에 얼굴을 비춰보니, 맞음쪽의 뺨이 불룩하게 부어올라 있었다.

 점점 쓰려 오는 상처의 고통에 정현일은 이를 갈았다.

 "기대해라, 강유한. 오늘 받은 것의 몇 배로 돌려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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