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츠,폭풍이 되다
아이언 마스터가 되기로 결심한 다음 날. 학원 강의를 마친 유한은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노트북을 펼쳤다.
"게임 속 학원....이라고 치면 되려나?"
요새 아르페디아 온라인 내에는 학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먼저 만들어진 학원들이 성공을 거두면서 생긴 현상이다.
게임 속의 학원들 중에는 현실의 교육 재단이나 학원에서 만든 것도 있지만, 오직 게임 내에만 존재하는 학원도 있었다.
유한은 그중에 실력 있고. 수강료가 저렴한 곳올 찾았다,
그러나 잘 가르친다고 소문난 곳은 수강료가 비쌌고 수강료가 싼 곳은 소문이 별로 좋지 않았다.
"괜찮은 곳을 찾아내야 채린이랑 같이 다닐 텐데......."
유한은 채린이 학림고가 세운 학림아카데미에 계속 다니게 할 생각이 없었다. 잘 가르치든 어떻든 그런 악의 복마전에서 얼른 그녀를 데리고 나와야 한다고 생각 했다.
"아무래도 여기가 괜찮을 것 같은데."
유한은 여러 학원들 중에서 벨로니 아카데미라는 곳이 제일 나아보였다.
명문으로 소문난 효명 학원이 운영하는 벨로니 아카데미는 현실에서 경력이 탄탄한 강사들에 정년퇴직한 학교 선생님들이 강의를 맡고 있었다.
수강료도 비교적 저렴했고 학원 건물도 멋졌다. 거기다 학원 내에는 '지식의 숲’ 과 '지하의 마성', '미궁 도서관' 이라는 3개의 던전이 있어 공부도 하고 게임도 즐길 수 있었다.
"거기다 교복도 괜찮네."
남자 교복도 그렇지만, 특히 여자 교복이 예쁘고 세련되어 보였다. 채린에게 정말 잘 어울릴 듯.
'뭐 별다른 문제는 없겠지?'
유한은 벨로니 아카데미 홈페이지 게시판을 클릭했다
학생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겉은 번지르르한 학원이라도 이런저런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물 흐리고 다니는 녀석들이 있다든지, 강사가 강의는 안 하고 학생들과 던전에 놀러 다닌다든지.
다행히 벨로니 아카데미에는 그런 문제는 없는 듯 했다. 소소한 불만이나 바람들이 게시판에 올라오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애교 수준.
"어라, 이거?"
글 몇 개를 살펴보는 사이 게시판에 새로운 글이 올라 왔다.
벨로니 아카데미와는 상관없는 내용이었는데, 유한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다.
-라프레이스 : 님들아, 클났음. 카세라스떳어요 ㅠㅠ
-시즈 : 악! 밟혀 죽었다능!
-윤베이더 : 카세라스 언데드 드래곤으로 업글됐습니다.
"카세라스가 다시 나타난 건가?"
레뮤다 대륙 북부를 초토화시키고 사라졌던 카세라스가 마침내 아르페디아 대륙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한은 서둘러 아르페디아 온라인 공식 홈페이지로 갔다, 아무래도 정보를 얻는 데는 그곳이 더 빠르고 정확했기 때문이다.
드림맥스는 미리 준비해 두었는지, 홈페이지 접속 시 ‘돌아온 카세라스’ 라는 오프닝 무비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홈페이지의 스킨이나 이미지도 모두 카세라스와 관련된 것들로 바뀌어 있었다.
드림맥스가 이렇게 준비해 둔 것과 달리, 대다수 유저들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공식 홈페이지에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카세라스에 당한 유저들의 하소연으로 가득했다.
-소년시대 : 카세라스 지금 아바렌 남서쪽 호텐 영지에 떳습니다! 저렙 분들 얼른 피하삼.
-알스터 : 쌍칼준규님 덤비셨다 32초 만에 죽으셨음.
-폭풍의길포드 : 으으! 하필 다른 대륙에 있을 때 저런 왕거니가!
-클레인 : 제발 부탁이니 우리 영지론 오지 마라.
-발리안 : 이 기회에 지그 철공소나 박살 났으면.......
"이런, 왜 하필 아바란 왕국이야?"
글을 읽던 유한이 침음을 삼켰다. 호텐 영지와 철공소가 위치한 케이트 산맥이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는 언데드라 하나 그래도 드래곤이다. 먼 거리를 날아 순식간에 주파할 수 있고, 맘만 먹으면 텔레포트 마법으로 어디든 이동할 수 있었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해."
버스에서 내린 유한은 총알같이 집으로 달려왔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캡슐에 들어간 유한은 곧장 지그로 접속했다.
<지그 님께서 접속하셨습니다. 오늘 하루 게임을 즐기 시길 바랍니다.>
짐마차를 타고 철공소에 오니 송코가 그를 반겼다.
"어서 와, 보상은 잘 완수했고?"
"며칠 뒤면 제철소 설비들이 도착할 겁니다. 그런데 왠 사람들이 이렇게 많죠?"
지그 철공소는 지금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카세라스가 나타나 깽판을 부리면서 무구를 구입하려는 유저가 늘었기 때문이야. 덕분에 지그 표 핸드메이드 무구들이 평소의 세 배가 넘는 가격에 팔려 나가고 있어"
"후후후, 그거 괜찮군요. 그런데 리지스 재는 왜 저런데요?"
유한은 반쯤 넋이 나간 리지스를 보고 어리둥절해 했다.
전쟁이든 재앙이든, 무구가 잘 팔리고 돈만 잘 벌면 된다던 그녀가 아니던가. 카세라스에게 뽀뽀라도 하고 싶어 할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좌절하고 있었다.
"호텐 영지에 있던 리지스 무기점이 카세라스에게 박살났대. 개점한 지 일주일도 안 되는 가게였는데....."
송코의 설명에 유한은 그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피 같은 가게를 잃었으니 좌절할 만도 했다. 아니, 좌절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쪼그리고 앉아 있던 리지스는 주먹을 움켜쥐며 벌떡 일어났다.
"카악! 카세라스 이 썩어 빠진 도마뱀 시키!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라고!"
말로는 카세라스를 천 갈래 만 갈래 도륙할 듯한 리지스였다.
유한은 방방 뛰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송코와 갈리 등 철공소의 주요 멤버들을 회의실로 불러 모았다. 채린이는 학원 때문에 못 온다고 했다.
“이렇게 모두를 불러 모은 건 카세라스 때문입니다. 카세라스로부터 철공소를 보호할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한의 말에 갈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자야. 카세라스가 철공소에 나타날지 안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너무 성급하지 않느냐?"
"스승님, 그때 가서 준비하면 늦습니다. 게다가 인근에 제철소까지 짓고 있잖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럼, 다른 방법이 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궁극의 결전 병기인 메카 드래곤을 제작....."
"다른 의견 있으신 분?"
갈리의 의견은 무참하게 묵살되었다. 다음에 의견을 말한 것은 알세인이었다.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고 철공소를 숲으로 위장하는 건 어떻습니까? 위에서 보면 잘 알아보지 못할 텐데요."
"그거 괜찮군요. 또 다른 의견이 있는 사람?"
갈리의 옆에 있던 비탈리가 일어나 말했다.
"지난번처럼 지하동굴에 중요 설비를 옮겨 놓는 건 어떤가?"
"고려해 보겠습니다. 또 다른 의견 있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알세인과 비탈리의 의견이 가장 나아보였다.
일꾼들은 작업을 멈추고 철공소 주변에 나무를 심고,
건물을 초록색으로 새로 칠했다. 그리고 철공소의 중요 설비들을 동굴로 옮겼다.
그러다 보니 철공소의 가동은 중단되었고 유저들을 돌려보내야했다.
뒤늦게 접속한 엔스는 유한의 이런 소심한 방식에 불만을 품었는지 곧장 따지고 들었다.
"궁상맞게 뭐 하는 짓이야?"
"궁상맞아도 좋으니까 이곳이 무사했으면 좋겠어."
여기에 자리를 잡고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지키고 싶었다.
엔스도 유한의 그런 마음을 모르진 않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녀석은 예전에 다짜고짜 칼을 날려 대던 바츠와는 다른 녀석이니까.
"까짓 것, 때려잡자고. 공격이 최선의 방어야!"
"괜찮은 방법이군. 그런데 언제 어디에 나타날 줄 알고?"
상대는 광룡이다. 어디에 나타난다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행동이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는 존재다.
"그거야.... 어쨌거나 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있으면 웅크리지 말고 앞으로 나가 싸워야 한다고 생각해."
무대뽀이긴 해도 유한은 엔스의 그런 의지가 마음에 들었다.
과거 바츠 시절의 그도 그랬지 않은가.
일단 중요 설비를 어느 정도 숨겼으니, 엔스의 말대로 공격에 나서는 것도 나쁠 것은 없었다.
"아까운 캐릭터 묵혀 두지 말고 전설을 다시 재현해 보라고. 그럼 굉장히 멋있을 거야."
엔스의 말에 유한은 피식 웃었다.
지금은 그때처럼 해낼 수 있을 지 의문스러웠다. 그때 어떻게 홀로 싸워 이겼는지 신기할 정도.
"알겠지? 네가 못하면 내가 할 거야. 난 이만 간다."
대화를 끝낸 엔스는 철공소를 떠났다. 그는 사람들 앞 에서 카세라스의 목을 베어 오겠노라고 큰소리를 치고 갔다.
그렇게 엔스가 떠나고 나서 유한은 블랙을 찾아갔다.
여러 블랙 아이언들과 자재를 옮기는 것을 돕고 있던 블랙은 유한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무슨 일인지 물었다.
“아무래도 한동안 철공소를 떠나 있어야 할 것 같아"
“광룡인지 뭔지 때문이냐?"
유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뇌제의 홀올 꺼내 블랙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없는 동안 네가 여길 지켜 줬으면 좋겠어. 원조 뇌제님에게 그런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이걸 나에게 넘기면 넌 어떻게 싸우려고?"
블랙도 유한이 나름 기지가 있고, 전투에 능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뇌제의 힘 없이 카세라스를 상대할 수 있을까?
"다 싸울 수 있는 방법이 있어.”
진지한 유한의 눈빛에 블랙은 더 이상 걱정의 말은 하지 않았다.
"반드시 돌아와라. 내가 다시 너에게 뇌제의 홀을 돌려줄 수 있도록.”
"알았어. 반드시 돌아올게.”
블랙과 대화를 마친 유한은 남은 이들에게 뒷일을 부탁 하고 철공소를 떠났다.
그는 뇌제의 홀을 두고 갔지만, 대신 오래전에 시용하던 무기를 다시 꺼내 갈고 닦았다. 그것은 바로 바츠의 애병이었던 플레임 소드였다.
아바란 왕국의 수도 벨파스.
지방 영주들의 내전과 동떨어져 고요함을 유지하던 이 도시는 최근 여기저기서 모여든 유저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유저들이 모여든 이유는 카세라스 때문이었다.
어제 카세라스는 벨파스 근방의 영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사라졌다. 그래서 유저들은 오늘 녀석이 벨파스를 노리고 나타날 것이라 판단하고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모여든 유저들은 각양각색이었다.
위험을 각오하고 구경 온 저랩 유저들도 있었고, 카세라스를 물리쳐 위명을 얻으려는 랭커들이나 거대 길드의 정예 부대도 있었다.
거기다 외국 유저들도 찾아왔다. 그들도 관광 혹은 전투를 위해 먼 걸음올 마다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지만, 유저들에게 단연 눈에 띄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드래곤 슬레이어 바츠였다.
“저거봐! 바츠다.진짜 바츠야!”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캐릭터를 다시 키웠다더니."
"옛날보다 훨씬 강하다던데?"
유저들은 다시 등장한 바츠를 보며 연방 쑥덕였다.
바츠는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위압감은 예전 그대로였지만.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음울하고 사나운 눈빛 대신 맑고 강한 눈동자가 투구 안쪽에서 번뜩였다.
"저것 봐. 쌍검이다. 허리에 검을 두 자루나 찼는데?"
"둘 다 플레임 소드다. 저걸 대체 어디서 구했담?"
바츠의 허리에는 두 자루의 플레임 소드가 걸려 있었다. 하나는 과거 화염의 신전에서 얻은 거고 다른 하나는 손석진이 만들어 준 것이다.
바츠는 쑥덕이며 따라오는 유저들을 획 돌아보았다. 움찔 놀란 유저들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갔다.
"봤어? 방금 웃은 것 같은데.”
"웃었다고? 바츠가?"
"그보다, 우릴 그냥 내버려 두고 갔어. 예전 같으면 아예 무시하거나 따라오지 말라고 경고를 했을 텐데 말이야."
과연 예전의 바츠가 맞는지.
맞다면 정말 과거의 무위를 다시 보여줄 수 있을까? 카세라스를 쓰러트려 줄 것인가? 유저들은 상당히 기대가 되었다.
"하여간에 엄청 유명해졌다니까."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온 유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바츠가 예전에도 유명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카세라스의 등장과 절묘하게 맞물려 유저들의 관심을 엄청 끌게 만들었다.
“이쯤이라고 들었는데...."
유한이 벨파스에 온 것은 벨파스가 카세라스의 공격 예정지로 추정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바츠 때 알던 NPC가 이곳으로 옮겨 갔다는 소문올 들었기 때문이다.
"저기 있군.”
골목 한편에 때 묻은 희색의 로브를 입은 노인이 있었다.
수염을 발끝까지 늘어트린 노인은 NPC 아이들을 모아 놓고 뭔가 이야기를 해 주고 있었다. 그는 다가온 유한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니 넌.....”
"안녕하십니까, 하그레스 님. 그동안 편안하셨습니까?"
현자 하그레스.
그는 과거 유한, 아니 바츠와 안면이 있던 NPC였다. 바츠 시절에 유저들과 거리를 멀리 했지만 NPC들과는 그렇지 않았다. 그 중에서 하그레스와 가장 친하게 지냈다.
뭐 친하다는 것도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수준에 불과 했지만.
하그레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유한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머리에서 발끝까지 살펴보았다.
"정말 바츠 너로구나. 분명 죽었다고 들었는데.”
"되살아났더라는 소문은 없었습니까?”
"대마왕이 되살렸더라는 헛소문은 있더군.”
"그거 헛소문 아닙니다.”
유한의 대꾸에 하그레스의 눈이 놀람으로 부릅떠졌다.
“뭐? 정말 대마왕이 널 살렸어?"
손석진을 대마왕 급이라 생각하고 있는 유한은 하그레스의 말을 틀리지 않다고 여겼다. 물론 뒷사정을 모르는 하그레스는 당황할 따름이지만.
"대마왕이 살린 것치고 눈빛이 너무 맑은걸? 너 정말 옛날의 백정 같은 놈이 맞는 게냐?"
“예전의 바츠 맞습니다. 하그레스 님도 예전의 하그레스 님이 맞으시지요?"
"그래, 나는 나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하그레스의 말에 만족한 유한은 곧장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럼 제가 왜 하그레스 님을 찾아왔는지 아시겠군요.”
"카세라스 때문이냐?"
하그레스의 말에 유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 다음번에 언제 어디를 노릴지 알고 싶습니다.”
엔스에게는 카세라스가 언제 어디를 공격할지 알 수 없다고 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르페디아 대륙을 떠도는 현자 하그레스는 아는 것이 많았다. 점성술에도 능숙해서 미래에 대한 예언도 잘했다.
벨파스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벨파스가 맞다면 하그레스가 이곳으로 오지 않았을 테니까.
"그 변덕스런 놈이 다음에 노릴 곳이라"
하그레스는 큼지막한 수정을 꺼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수정에서 환한 빛이 떠오르며 천체와 별자리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재앙의 별이 아바란 동북에 있구나. 하늘이 붉게 타오르는 때, 고대의 욕망과 비탄이 묻힌 땅이 파멸의 운명을 맞게 될 것이야.”
예언이라고 정확히 집어 주지는 않는다.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늘어놓을뿐, 해석은 유저의 몫이었다.
다행히 별로 어렵지 않았다. 특히 유한은 고대의 욕망과 비탄이 묻힌 땅이라 할 만한 유력한 곳을 알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고맙습니다, 하그레스 님.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냐, 다음에 올 땐 늙은이가 마실 술이라도 챙겨서 오너라"
남바린 영지.
케이트 산맥 아래에 자리한 이 영지는 소울리버 길드의 관리하에 있었다.
주변과 별다른 마찰 없이 영지를 운영해 온 소울리버 길드는 최근 근심에 싸여 있었다. 그 근심은 아바란에 터를 두고 있는 다른 길드들과 같은 것이 었다. 바로 카세라스의 부활.
언데드 드래곤이 되어 돌아온 이놈은 하필이면 아바란 왕국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놈에게 쑥대밭이 된 도시와 영지가 무려 7개.
카세라스가 언제 어떻게 쳐들어올지 몰라 길드원들의 마음은 불안과 초조함으로 가득했다.
"우리 길드의 힘으로 놈을 막을 수 있을까?"
"안 오기를 빌어야지.”
"그래도 길드장이 데려온 아크 위저드 아스탄 님 정도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글쎄. 지금까지 숱한 랭커들이 달려들었지만 줄줄이 깨진 것을 생각해 보면...”
성벽에 경계를 선 길드원들은 요즘 화제가 된 카세라스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 왔다. 태양은 어두운 하늘을 붉게 태우며 솟구쳐 올랐다.
"게임 속의 풍경이라지만, 참 장관이란 말이야.”
"그러게. 드림맥스가 참 재주는 좋아.”
그렇게 아침의 태양을 바라보며 감탄하던 이들의 고막이 찢어질 듯한 고함 소리가 두들겨 댔다.
"드래곤이다! 드래곤이 날아온다!”
영주성 망루에 올라가 있던 NPC 병사가 서쪽 하늘을 가리켰다. 전신에 시커먼 기운이 일렁이는 거대한 붉은 드래곤이 무섭게 날아오고 있었다.
"카세라스다! 카세라스가 나타났다!”
"전원 대공 전투 준비!”
소울리버 길드원들은 성벽 위에 올려 둔 캐터필터를 언데드 드래곤 카세라스에 겨누었다. 사정거리 안으로 카세라스가 들어오자, 캐터필터들이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다.
통! 퉁퉁!
육중한 통나무 화살들이 카세라스를 노리고 날아갔다.
그러나 카세라스는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통나무 화살들을 가볍게 피해 버리곤, 거대한 마법탄을 날렸다.
꽝! 꽈광!
검은 해골 모양의 음침한 마법탄은 서쪽 성벽을 뻥 뚫어 버리고, 남은 힘으로 성안의 가옥들을 부숴 버렸다.
"크크크, 모조리 부숴 주마.”
유저들이 우왕좌왕하는 것을 본 카세라스는 곧바로 성 안으로 난입해 마구 짓밟고 부수었다. 소울리버 길드원들이 악을 쓰며 덤벼들었지만, 그들은 카세라스가 뿜은 산성 브레스에 맞고 사망 판정을 받았다.
피식.
유저들을 비웃던 카세라스의 머리 위로 수백 개의 얼음 창들이 쏟아져 내렸다.
놀란 카세라스는 황급히 실드를 전개하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감히 어떤 놈이?"
카세라스는 방금 마법을 날린 자를 찾았다. 동쪽 망루에서 강력한 마력을 감지한 카세라스는 망루 위에 서 있는 아크 위저드 아스탄을 발견했다.
"흥! 제법이다만, 이것은 어떠냐?"
카세라스가 붉은 눈을 번득였다. 그러자 그의 주변에 마법진이 나타났다 사라지더니 하늘에서 검은 꼬리를 달고서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서, 설마 미티어 스트라이크(Meteo Strike)?"
"아냐! 저건 흑마법인 다크 스타(Dark Star)야!"
"으아악! 모두 피해라!”
최강의 혹마법이라 일컬어지는 다크 스타.
마왕 급의 마족이 사용하는 마법으로 미티어 스트라이크와 효과는 비슷했다.
'카세라스가 강해졌구나!'
과거 카세라스는 사라지기 전 유저들에게 몇 번 잡혔다 그래서 그의 능력이 대부분 알려졌는데 이런 강력한 마법을 시용할 정도는 아니었다.
언데드 드래곤으로 재탄생하며 엄청 강해진 듯.
“크윽! 스톰 오브 데저트!”
카세라스의 광대역 마법에 대항해, 아스탄도 광대역 마법을 전개했다. 트리플 캐스팅에 힘입어 나타난 세 개의 모래 폭풍은 하늘로 솟구쳐 오르며 다크 스타와 충돌했다.
강력한 모래 폭풍과 충돌한 암혹의 유성은 마찰열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태양처럼 불타오르던 암혹의 유성은 어느 순간 하얀 재를 날리며 공중에서 사라졌다.
"와아,다크 스타가 소멸했다!”
"언데드 드래곤의 마법을 막다니, 역시 아크 위저드!”
유저들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카세라스가 아스탄이 있는 망루로 해골 마법탄올 날렸기 때문이다.
한두 번은 실드 마법을 펼쳐 막아 냈지만, 연속된 광대역 마법의 사용으로 MP가 바닥까지 떨어진 아스란은 결국 방어를 포기하고 망루에서 뛰어내렸다. 그런 그에게 카세라스가 다가왔다.
"버러지는 꾹 눌러 죽여야 적격이지.”
작은 언덕만한 카세라스가 앞발을 번쩍 들었다, 아스탄은 급히 엘릭서를 마셔 소진된 MP를 채우려 했지만, 카세라스의 발길질이 조금 더 빨랐다. 위기일발의 순간!
사망을 알리는 음성 대신 카세라스의 비명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크아아악!”
고개를 든 아스탄은 카세라스의 앞발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검을 보았다. 붉은빛이 일렁이는 그 검은 화염의 성검이라 일컬어지는 플레임 소드였다.
"크아아!어떤 놈이냐!”
울부짖는 카세라스에게로 달려드는 이가 있었다. 어찌나 빠르게 돌진하는지, 붉은 잔영만 보일 뿐이었다. 최고 수준의 대쉬 스킬을 보여 준 그는 카세라스의 가슴으로 뛰어들어 검을 크게 휘둘렀다.
"허어억!"
금강석만큼이나 단단한 드래곤 스케일과 강철보다 질긴 가죽이 검의 일격을 막아 냈지만, 충격까지 상쇄하진 못했다.
강렬한 충격은 카세라스의 드래곤 하트를 뒤흔들었고, 놀란 카세라스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쳇, 대쉬 정도로는 안 되나?"
"네놈은 바츠!”
카세라스는 자신을 공격한 전사를 보고 놀랐다.
그는 예전에 자신과 싸워 이긴 상대를 기억하고 있었다 드림맥스가 그렇게 설정했기 때문이다. 패배를 안겨 준 이를 상대로 더욱 분노하고 분발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이 버러지 같은 놈! 또다시 내 앞길을 방해하려 드느냐?”
분노한 카세라스의 주변으로 어둠의 창이 무수히 생성되었다.
유한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어둠의 창을 피해 물러섰다. 물론 중간에 아스탄의 손을 낚아채 함께 빠져나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바츠잖아. 바츠가 나를 구해줘?'
독불장군 바츠.
남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남을 돕지도 않는다.
아스탄이 알고 있는 바츠는 그런 캐릭터였다. 그런데 그런 바츠가 자신을 구해주었다.
아스탄을 안전한 곳에 던져 놓은 유한은 다시 카세라스에게 달려들었다. 무섭게 돌진해 오는 유한의 모습에 놀랐던지, 카세라스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플라잉 소드(Flying Sword)!"
유한이 공중으로 검을 날리자 플레임 소드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허공을 누비며 카세라스를 공격했다.
"이, 이런!”
유한의 손짓에 따라 검은 공중올 날며 카세라스를 찌르 기도 하고 베기도 했다. 집요하게 눈을 노리고 들어오는 공격에, 카세라스는 반격을 펼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우와, 플라잉 소드를 저렇게 자유롭게 구사하다니!” "저 신들린 컨트를! 역시 바츠로구나.” 전투를 구경하고 있던 유저들은 연방 탄성을 아끼지 않 았다.
보통은 드래곤의 엄청난 덩치와 위압감에 짓눌려 제 플 래이를 하지 못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면 자연 공격 의 세밀함은 떨어지고 성공률도 낮아진다.
그러나 바츠는 카세라스룰 상대로 전혀 주눅이 들지 않 았다?
약점올 끈질기게 공략하며, 강한 상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크아아! 이 성가신 놈이!”
검이 살짝 빗나간 틈을 타서 카세라스는 드래곤 피어를 터트렸다. 레벨이 낮은 유저들은 스턴에 걸리는 동시에 Hp가 떨어졌고. 고레벨 유저들도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유한도 영향을 받았던지 플라잉 소드의 컨트롤이 흐트러졌다.
카세라스는 유한에게 해골 마법탄을 날렸다.
평!
몸을 숙이고 있던 유한은 펄쩍 뛰어올랐다. 그는 마법탄이 터지며 생긴 반동을 이용, 하늘에 떠 있는 카세라스에게로 날아갔다.
카세라스에게 날아간 유한은 카세라스의 앞발에 박혀 있던 플레임 소드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공격스킬을 시전했다.
"브랜디쉬 (Brandish)!”
유한의 몸이 빙글 돌았다. 앞발에 박혀 있던 플레임 소드도 그에 이끌려 회전하며 카세라스의 앞발을 싹둑 잘라 냈다.
"흐억, 이놈이!”
카세라스의 몸을 박차고 뛰어오른 유한은 플라잉 소드 스킬로 던졌던 검을 회수하여 지상으로 안착했다.
'차, 차원이 달라!'
‘상위 랭커도 이런 움직임을 보여 주지는 못할 거야!’
더 이상 내지를 탄성도 없었던 유저들은 그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두 자루의 플레임 소드를 든 바츠는 이전보다 2배는 강해진 것 같았다.
"왜 그래, 카세라스. 그 정도에 빌빌델 네가 아닐 텐데.”
"이놈이!”
유한은 카세라스에게 맹공을 퍼부은 것도 모자라 도발 스킬까지 걸었다. 분노하는 카세라스의 몸에서 검붉은 빛의 진득한 사기(邪氣)가 흘러나왔다.
전초전이 끝나고 이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분노한 카세라스가 고막을 찢을 듯한 괴성을 내질렀다. 공기를 뒤흔드는 엄청난 충격파에 카세라스 주변에 있던 것들이 휘날려 갔다.
유한은 그 충격파를 억지로 견디려 하지 않았다. 갈대는 거센 태풍 속에서도 부러지지 않는다. 유한은 충격파에 몸올 맡기며 뒤로 물러났다. 물론 속절없이 밀려나지는 않았다. 적당히 버티면서 충격파를 흘려냈다.
"버러지 주제에 날 우롱한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
카세라스는 듬성듬성 빠진 비늘을 곤두세웠다. 곳곳이 일어난 비늘 끝이 칼날처럼 번득였다. 실제로 칼날보다 더 날카로웠다. 이 상태로 돌진하면 무엇이든 갈아 버릴 수 있었으니까.
카세라스는 그렇게 비늘올 세우고 유한에게 돌진해 들어갔다.
“흥! 썩은 고깃덩이 주제에!”
거대한 괴물이 달려들면 물러설 만도 하지만, 유한은 오히려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저렇게 비늘을 날카롭게 세웠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어설프게 피하려 하다간 오히려 믹서에 갈린 고기처럼 될 뿐.
반드시 정면에서 상대해야 한다. 바츠에게는 정면에서 상대할 만한 강력한 스킬도 있으니까.
"블레이즈 블레이드!”
바츠 최강의 공격 스킬.
산도 잘라버릴 초열의 불꽃이 칼 끝에서 터져 나왔다. 카세라스가 칼날처럼 세운 비늘도 이 강력한 초열의 검기 앞에선 짚단이나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이건 예전에 카세라스의 숨통을 끊었던 스킬. 정면으로 달려드는 놈에게 이 일격을 정확히 꽂을 수만 있다면 싸움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웃었어?'
스킬을 발동하던 유한은 돌진해 오는 카세라스가 입꼬리를 말아올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곧장 스킬을 취소했다. 그 순간, 눈앞에서 카세라스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등 뒤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 커다란 덩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모습은 신기에 가까웠다.
‘블링크 (Blink)!’
워프나 텔레포트와 달리 단거리를 순간 이동하는 마법이다.
보통 상대의 뒤통수를 치는 용도로 잘 시용되는데, 고수일수록 남발하지 않는 마법 스킬이었다. 자주 쓰다 보면 상대에 간파당하니까.
"죽어라, 버러지!”
카세라스는 커다란 꼬리를 강하게 휘둘렀다. 순간 강풍이 일었다.
유한은 앞으로 몸을 날렸다. 재빠른 대처로 충격을 절반 이상 홀려 내긴 했지만, 그래도 hp가 1,000이 넘게
떨어졌다.
하지만 이만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스턴 상태가 되었다면 곧바로 죽임을 당했을 테니까.
‘휴, 큰일 날 뻔했네.’
조금만 실수해도 죽는다. 왜냐하면.
'잠깐, 이거 나 혼자만 싸우고 있잖아.’
전투에 집중하고 있던 나머지 그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지금 남바린 영지에 있는 유저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우두커니 지켜보기만 하고 도와주지 않았다. 오히려 같이 싸우려고 나서는 유저가 있으면 말릴 정도였다.
카세라스가 너무 강하고 무서워서가 아니다.
바츠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츠는 다른 누가 자신의 싸움에 끼어드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크 위저드인 아스란도 지켜보기만 하고 거들지는 않았다.
"운이 좋았군. 그러나 거기까지다, 버러지!”
유한이 잠시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 카세라스가 마법을 펼쳤다. 그의 몸 주위에서 어둠의 마법진이 전개되더니 메시지 창이 떴다.
<월드 오브 인폐르노(World Of Inferno) 마법이 발동되었습니다. 서둘러 영향권 밖으로 피하십시오>
'뭐야? 이런 건 예전에 쓰지 않았잖아!’
아무래도 언데드 드래곤이 되면서 새로 익힌 모양. 땅이 뒤흔들린다 싶더니 지진이 난 것처럼 지표가 갈라지고 검은 화염이 솟구쳐 올랐다.
휘청이는 대지 위에선 제대로 몸올 가누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공중에 수백 개의 검은 불꽃올 생성시킨 카세라스는 마치 융단 폭격이라도 하듯이 쏘아 댔다.
유한은 무너지는 땅 위를 달리며 하늘에서 쏟아지는 검은 불꽃들을 피해냈다.
그런데 카세라스는 이 정도도 모자라다 여겼던지, 또 다른 마법을 발동시켰다.
'헉! 이건 그라비티 디스토션(Gravity Distotion)!’
필드에 강력한 중력장을 가동해 상대를 찌그러트리는 마법 스킬이다. 갑자기 온몸을 옭아매는 강력한 중력장에 유한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죽어라!”
멈춰선 유한에게로 검은 불꽃들이 쏟아져 내렸다. 검은 불꽃들이 떨어질 때마다 hp가 쭉쭉 닳았다. 위험과 상태 이상을 알리는 안내창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10초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화상을 입었습니다.
-갑옷의 내구도가 떨어집니다.
-벼락의 투구의 내구도가 0이 되었습니다. 벼락의 투구가 부서졌습니다
'여기서 끝장인가?'
아니다. 여기서 끝나서는 바츠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아직 카드가 한 장 남아 있다. 그 카드를 잘만 이용한다면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버서커(Berserker) 스킬!”
검은 불꽃이 느슨하게 쏟아지는 틈을 타서 유한은 버서커 스킬을 가동했다. 5분간 데미지 딜레이가 사라지고, HP가 떨어진 만큼 공격 속도와 공격력, 그리고 마나 회복속도가 상승하는 스킬.
버서커 스킬을 사용하자 중력장에 묶여 있던 몸도 한결 가벼워졌다. 유한은 양손에 든 플레임 소드를 휘둘러 날아오는 검은 불꽃들을 베어 버리곤, 초고속의 스킬 대쉬를 써 카세라스에게 돌진했다.
"죽어라, 카세라스!"
남은 hp는겨우230.
포션을 마시거나 몸올 회복할 틈은 없다. 죽이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
"건방진놈!”
유한이 다가오자 카세라스가 산성 브레스를 뿜어냈다. 그런데 그가 뿜어낸 산성 브레스가 유한의 앞에서 찍 갈라졌다. 유한이 휘두른 필사의 마나 블레이드가 브레스를 갈라버린 것이다.
모세의 기적에 홍해가 갈라진 것처럼 산성 브레스가 갈 라지자, 유한의 눈앞에 당황하는 카세라스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힘껏 뛰어오른 유한은 카세라스의 정수리를 노리고 검을 박아 넣었다.
"크아아아아악!”
카세라스의 처절한 비명이 남바린 영지에 울려 퍼졌다.
“어떻게 됐지?"
"죽였나?"
유저들은 카세라스의 비명이 길게 울리자 모여들었다. 가까이서 구경하고 싶었지만, 워낙에 위험한 마법들이 난무해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바츠가 결정을 지은 듯해 보이자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그리고 모두들 볼 수 있었다. 카세라스의 머리에 검을 꽃은 바츠의 모습을.
"와! 카세라스가 죽었다!”
"바츠 최고!”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지만, 단 한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바로 아크 위저드 아스탄이었다.
“큰일 났네. 카세라스는 죽지 않았어요!"
"예?”
그의 말에 유저들은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카세라스 의 머리 위에 있는 HP 바를.
텅 빈 것처럼 보였지만,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치명적인 급소를 노리고 검을 찔러 넣었는데 이게 어찌 된것인가?
'제기랄, 빗나갔다!’
카세라스의 머리 위에 있던 유한은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에 노린 곳은 급소인 정수리. 그러나 막판에 카세라스가 고개를 비틀면서 플레임 소드는 녀석의 안구를 뚫고 들어갔다.
상당한 타격을 입힌 것은 틀림없지만, 끝장을 내는 데
는 실패했다.
유한은 눈앞이 깜깜해짐을 느꼈다.
"크아아아아!”
카세라스가 괴성을 터트렸다. 그 충격파에 놈의 머리 위에 있던 유한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땅을 구른 유한은 HP가 겨우 5밖에, 안 남은 것을 보았다.
'크윽, 다행히 죽진 않았군.’
유한은 서둘러 포션을 마셔 HP를 회복했다. 그러나 회복한 것은 유한뿐만이 아니었다. 괴성을 터트리며 날뛰던 카세라스는 사방에 어둠의 기운을 퍼트렸다.
카세라스 주변의 대지가 마르고 초목들이 순식간에 시들었다.
"헉, 이게 뭐야?”
"아앗! 내 HP가 떨어진다!”
“라, 라이프 드레인(Life Drain)이다!”
사방의 생명력을 긁어모은 어둠의 기운은 다시 카세라스에게로 흡수되었다. 그러자 거의 바닥까지 떨어졌던 카세라스의 HP가 원상 복구 되었다.
"크윽! 기껏 다 죽여놓았더니!”
유한은 검을 고쳐 잡았다. 카세라스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덤벼들 속셈이었지만, 그의 행동은 뒤에서 팔을 붙든 사람 덕분에 저지되었다.
"뭡니까?"
"지금 뛰어들면 개죽음 당합니다.”
유한을 말린 것은 아스탄이었다. 그는 충고를 해주면서 유한의 몸을 가리켰다.
'헉! 방어구가!’
좀 전에 카세라스의 공격에 시달려서 그런지 갑옷과 건틀렛의 내구도가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투구는 이미 박살이 나 없어진 지 오래
아스탄의 말이 맞았다. 이대로 뛰어들면 개죽음인 것이다.
"이놈들, 날 이 지경까지 몰아넣다니! 너희들에게 지옥이 어떤 것인가 보여 주겠다!"
카세라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이 뒤흔들리고 땅에서 검은 화염이 치솟아 올랐다.다시 한 번 월드 오브 인페르노 마법이 전개된 것이다.
이미 폐허가 된 남바린을, 카세라스는 가루로 만들어버리기로 작정한 듯 했다.
"가세하겠습니다. 불만 없지요, 지그 님?"
"아무래도 지금 상황에서 혼자는....”
"역시 지그 님이었군요.”
후드 아래로 씨익 쪼개지는 아스탄의 미소가 보였다.
아스탄은 바츠의 드러난 얼굴을 보고 지그와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냥 한번 슬쩍 넘겨짚어 봤는데, 유한이 걸려든 것이다.
"일단은 전투에 집중하죠.”
그리 말한 유한은 검을 고쳐 잡고 카세라스를 향해 돌진했다.
카세라스의 주변에 암혹의 마법진이 수없이 나타났다. 유한은 또 뭔가 쏟아지려나 싶었다. 그러나 이번 것은 저번과 달랐다. 마법진들에서 칠혹의 칼날이 쏘아진 것이다.
"헉! 무슨 공격이....”
칠혹의 칼날이 박힌 땅이 순식간에 시커떻게 썩었다. 암흑의 기운이 대지를 순식간에 오염시킨 것이다.
'제기랄, 이것도 예전에 없었는데!’
언데드 드래곤으로 업글 되면서 생긴 스킬이 몇 개나 되는 건지.
다소 당황하긴 했지만, 유한은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뒤에서 아스탄이 마법 지원을 해 주며 카세라스의 공격을 상쇄시켜 주었기에 한결 편하게 싸울 수 있었다.
"받아랏!”
"크윽! 이놈이 아직도 꿈틀거리다니!”
유한이 옆구리를 베자, 카세라스는 곧장 반응하며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공중의 암흑 마법진들이 어지럽게 움직이며 유한에게 칠흑의 칼날을 쏘아 댔다.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피하던 유한은 결국 다리에 한방 맞고 말았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습니다. HP가 2,500 떨어졌습니다.
-30초 동안 움직일 수 없습니다.
'헉,벌써 오 분이?'
버서커 상태면 데미지 딜레이가 사라지는데 스턴이 걸렸다는 것은 5분이 지났다는 의미였다.
유한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칠흑의 칼날은 계속 쏟아지고 있는데, 30초 동안 음직일 수 없다니!
"크카카! 끝이다!”
암흑 마법진에 포위된 순간, 유한은 카세라스의 말대로 끝장임을 실감했다.
그런데 유한을 둘러싸고 있던 암혹 마법진들이 한순간에 찢어발기어 사라졌다. 검풍, 고속으로 날아든 검풍이 암흑 마법진을 베어버린 것이다.
유한은 번개같이 날아와 암흑 마법진을 없애 버린 전사를 바라보았다. 큼지막한 덩치의 전사의 얼굴은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바츠,혼자만 재미보지 말라고.”
"엔스? 너 어떻게?"
"어떻게는 어떻게. 공식 홈페이지 게시판에 보니까 남바린에서 바츠가 카세라스가 싸운다고 적혀 있더만.”
카세라스에게 당한 유저들이 올린 글이었다. 엔스는 그 글을 보고 헐레벌떡 달려 왔고.
"마침 캐릭터가 멀지 않은곳에 있어서 다행이었지.”
"야, 뒤!"
엔스의 등 뒤로 카세라스가 날린 해골 마법탄이 날이왔다.
그러나 그 해골 마법탄은 홀연히 날아온 화살에 맞아 상쇄되었다. 유한은 화살이 날아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채린이 카세라스를 향해 시위를 당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거기엔 오펜과 에이린, 로키도 있었고, 얀과 베르디도 와 있었다.
"잘 만났다, 카세라스. 상인이 한을 품으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 주마!”
"악룡 자식! 오늘이 네놈의 제삿날이다!”
리지스와 포포,블랙도 나섰다. 모두가 줄줄이 사랑처럼 나타나자 유한은 엔스를 쏘아 보았다.
"너 설마...."
"난 비밀을 지켰다. 모두 철공소를 지키기 위해 온 거야.”
.엔스는 남바린에 도착하기 직전 철공소에 들렀다. 남바린에 카세라스가 나타났다고 하자, 모두들 하던 일을 멈추고 따라왔다.
남바린은 지그 철공소와 가까운 곳. 철공소가 위험해질지 모른다고 생각한 그들은 카세라스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 온 것이다.
철공소가 추억이 된 건 유한만이 아니었다.
정을 붙이게 된 건 모두가 마찬가지. 모두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그곳을 잃지 않기 위해 모두가 일어선 것이다.
“감동은 나중에 하고 일단 싸우자고!”
기운차게 달려간 엔스는 대쉬로 카세라스의 몸을 베었다. 연이어 달려든 얀이 반대쪽 옆구리를 검으로 찔러 넣었다.
그들의 뒤를 이어 로키가 공격에 나섰고, 오펜이 아스란과 함께 마법 공격을 지원했다. 에이린은 모두에게 바쁘게 힐과 버프를 걸어 주었다.
“크으윽! 어디서 튀어나온 버러지들이...."
이를 갈던 카세라스의 눈앞으로 꼭두각시 인형들이 춤을 추었다. 베르디의 환술에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카세라스의 앞으로 리지스를 등에 태운 포포가 날아들었다.
“포포! 공격해!”
한껏 숨올 들이견 포포는 드래곤처럼 브레스를 뿜었다. 평소에 철을 주식으로 했던 녀석답게 입으로 토한 것은 쇳가루와 쇳조각이었다.
먼저 유한에게 당해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카세라스의 눈으로 그 쇳가루와 쇳조각들이 가차 없이 파고들었다.
"크아아악!”
"끝장을 내 주마, 카세라스!”
블랙은 불끈 움켜쥔 주먹을 카세라스의 복부에 꽂아 넣었다.
한 방 날리는 데 성공했지만, 끝장을 내는 데는 실패했다. 재차 공격하려 했지만. 오히려 날뛰는 카세라스의 꼬리에 맞아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크윽. 이놈이.... "
"블랙,뇌제의 홀을 가지고 있어?"
유한이 쓰러진 블랙에게 다가갔다. 블랙은 자신을 친근하게 부르는 녀석에 대해 경계의 눈빛을 보였다.
"넌 누구냐? 누군데 뇌제의 홀을 알고 있지?"
'그렇군. 난 지금 바츠지'
닮았다 해도 캐릭터가 다르다. 유저라면 모를까 Npc들은 동일 인물이 아닌 타인으로 여기게끔 설정되어 있다.
"난 지그의 형제 바츠다. 지그의 부탁을 받아 카세라스를 쓰러트리러 왔지.”
"호 그래? 그러고 보니 지그와 닮은 듯...”
지그와 알고 있다고 하자 블랙은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길게 이야기 할 틈은 없어. 저 광룡을 쓰러트리기 위해선 뇌제의 홀이 필요해.”
이미 지그가 가진 힘, 바츠에게 없었던 친구라는 이름의 힘은 카세라스를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수많은 고수들을 저세상으로 보낸 카세라스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끝장을 내기 위해선 바츠와 지그가 힘을 합쳐야 한다.
"뇌제의 홀은 지그가 나에게 맡긴 것이다. 아무에게 함부로 줄 수는 없어.”
역시 이 상태로는 어려운가. 실망하는 유한에게 블랙이 뇌제의 홀을 내밀었다.
"하지만 너에게는 빌려 주지. 지그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는 너에게는.”
“고맙다! 정말고마워!”
뇌제의 홀을 건네받은 유한은 곧바로 뇌제로 변신했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며 전신에 검은 번개 문신이 생겨났다
'뇌제 바츠’가 완성되자 유한은 한손엔 플레임 소드를, 다른 한 손엔 뇌제의 홀을 들고 카세라스에게 달려들었다.
"이것으로 끝이다!”
선더 러쉬 스킬을 발동한 유한은 플레임 소드를 앞세우고 카세라스의 심장으로 뛰어들었다. 비늘과 가죽을 가르고 들어간 칼날은 카세라스가 품고 있던 드래곤 하트에 박혀들었다.
"라이트닝 웨이브!”
이어서 뇌제의 홀에서 터져 나온 전격이 카세라스의 드래곤하트를 부쉈다.
"크아아아악!”
전신에 전격으로 휘감은 카세라스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과거 바츠에게 무릎을 끓었던 광롱은 다시 한 번 바츠에게. 아니 새롭게 태어난 유한의 손에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