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의 맹우
다음 날 늦잠을 잔 유한. 휴대폰을 확인하니 오펜에게서 부재 중 통화가 몇 통 걸려와 있었다. 연락이 닿지 않자 직접 전화를 건 것이다.
'걱정할텐데 전화해 줘야겠다.’
유한은 오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너 뭐 하다가 이제야 전화를 거는 거야?"
"미안. 휴대폰 확인하는 게 늦었어."
"그보다 어젯밤은 어떻게 됐어?"
오펜의 물음에 유한은 비밀 소장고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발리안에게 당한 것과 비밀 소장고 자체가 외부와 연락이 되지 않는 방이라는 것도.
"그럼 기술서를 빼앗긴 거야?"
"아니, 발리안이 가지고 간 것은 가짜야. 진짜는 내가 그 후에 발견했지. 학원 갔다 온 뒤에 접속할 테니까 그 때 자세히 알려 줄게"
"알았어.”
오펜과 약속을 한 유한은 씻고 학원으로 향했다. 학원을 마친 뒤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접속한 그는 간신히 비밀 소장고에서 빠져나왔다.
뜯어낸 천장 위에는 마침 텅 빈 공간이 있었고, 그 공간은 도서관과 연결되어 있었다.
콰직!
도서관 바닥을 부수고 올라온 유한은 비밀 소장고와 통하는 통로로 가보았다.
발리안은 유한이 나오지 못하도록 통로 문을 책장과 책을 쌓아 막아 놓았다. 안에서 아무리 밀어도 열리지 않았던 건 그 이유 때문이었던 것.
"발리안 이 자식, 걸리면 아주 파묻어 버릴겨.”
복수를 다짐한 유한은 밖으로 나왔다. 들어왔던 출입문으로 되돌아 가보니 동료들이 아직 청동 가디언들과 싸우고 있었다.
“뭐야? 아직 여기서 싸우고 있었던 거야?"
“어제 물러났다가 다시 왔는데 다짜고짜 공격하잖아"
청동 가디언들은 오펜 등을 아주 적으로 간주해 버린 듯했다.
"일단 이곳을 나가자"
뇌제로 변신한 유한은 청동 가디언들에게 전격을 날렸다. 청동 가디언들이 주춤하는 사이, 유한과 동료들은 서둘러 연구소를 떠났다.
왔던 길로 되돌아간 그들은 혹시나 카세라스가 돌아오지 않았나 무척 걱정했다.
다행히도 카세라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발리안 일당도 모두 떠났는지, 황금 기계 도시에는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도 얼른 가죠?"
"가기 전에 보물 좀 챙기면 안 될까?"
여전히 보물에 미련이 남았던지 송코가 그리 말했다. 발리안의 용병 유저들이 한 보따리씩 챙겨 가긴 했지만, 아직도 많은 보물들이 황금 피라미드 주변에 널려 있었다.
한 자루만 챙겨도 근사한 곳에 멋진 별장올 짓고, 우아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맘대로 하세요. 그새 카세라스가 와도 난 모릅니다."
"뭐 죽어도 보물만 챙길 수 있으면......."
진짜 죽는 것도 아니니 보물을 건지다 죽는다 해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몸은 죽어도 인벤토리에 들어 간 보물 중 일부는 남아 있기 때문이다.
"뭐 그럴 수도 있지만, 카세라스가 산 채로 잡아 놓고 뇌옥에 가둔다거나 아이템을 죄다 털고 몬스터 소굴에 집어넣으면 어떻게 할겁니까?"
송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간혹 오크나 고블린 등 나름 지성이 있는 종족에게 포로로 잡히는 유저들이 있는데, 포로 생활은 그리 즐거운 것이 못 되었다.
포로로 잡히느니 자살올 하는 게 낫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오크나 고블린 정도만 해도 그런데, 드래곤은 어떻겠는가.
송코는 그것을 상상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여전히 미련을 떨칠 수 없었는지, 널린 보물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결국 유한은 송코의 발을 움직이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했다.
"으악! 저기 카세라스가 온다!"
유한이 기겁한 표정을 하고 달아났다. 블랙도 달렸고,
대강 눈치를 읽은 오펜도 열심히 뛰었다.
갑자기 동료들이 이런 행동을 보이자. 간이 작은 송코가 화들짝 놀라는 건 당연했다.
"기, 기다려! 같이 가!"
무서워서 뒤를 돌아볼 생각도 못하고 송코는 허겁지겁 동료들을 쫓아갔다.
그렇게 유한의 기지 덕분에 일행은 카세라스가 돌아오기 전에 황금 기계 도시를 떠날 수 있었다.
황금 기계 도시를 떠난 유한 일행은 며칠 후 치클라요에 도착했다.
검투 동맹 글로리아 길드가 자리 잡고 있던 도시 치클라요는 저번에 왔을 때와 영 딴판으로 변해 있었다.
"맙소사,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사이 전쟁이라도 있었나?"
치클라요는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도시는 온통 무너진 잔해와 불탄 집들로 가득했다. 곳곳에 다친 NPC들의 울음과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고, 넋이 나간 유저들이 장승처럼 서 있었다.
"이보세요,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오펜이 근처에 있던 상인 유저에게 물어보았다. 재난으로 자신의 점포를 잃은 유저는 한숨을 폭 내쉬며 사정을
이야기했다.
"드래곤이 나타났었습니다."
"드래곤요?"
"붉은 드래곤이었는데 반쯤 썩다가 만 놈이었지요. 얼마나 흉폭한 놈인지, 보이는 건 모조리 다 박살 내 놓더군요."
범인은 카세라스였다.
황금 기계 도시를 떠났던 카세라스는 치클라요에 와서 행패를 부리고 떠난 것이다.
'하여간 성질이 지랄 맞은 놈이라니까.
괜히 광룡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아르페디아에 있을 때도 그로지아 남부에 레어를 만들고, 예정도 없이 지나가는 유저들을 공격하거나 마을과 성을 불태우곤 했다,
"이곳에는 드래곤을 잡을 만한 실력자가 없었나 보네."
"연애질만 주로 하다 보니 실력을 못 쌓은 모양이죠."
유한 일행은 잿더미가 된 치클라요를 뒤로 하고 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동쪽으로 갈수록 그들의 표정은 점점 심각하게 변했다.
툭하면 보이는 것이 잿더미가 된 마을이었고, 듣는 것은 언데드 드래곤 카세라스가 습격했다는 이야기였다.
"이거 불안한데?"
"그렇죠? 뭔가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보여요."
마침내 그들은 말론 회랑 앞에 있는 도시 쿠마나에 도착했다.
쿠마나도 카세라스의 습격을 받았는지, 거리 절반이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그나마 피해가 덜했던 것은 마침 쿠마나에 레뮤다 대륙 최강의 길드인 '파라디수스'길드가 와 있었던 덕분이었다.
레뮤다 최강 유저인 ‘에스테반’ 이 이끄는 파라디수스 길드는 과거 레뮤다 남쪽에서 드래곤과 싸워 본 적이 있었다. 비록 그때 패배했지만, 그 경험 덕분에 그들은 카세라스로부터 쿠마나의 절반은 지켜 낼 수 있었다.
물론, 그 대가로 파라디수스 길드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아르페디아로 진출하겠다는 그들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단다.
"파라디수스 길드가 카세라스를 죽였습니까?"
유한은 방금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에게 뒷사정을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드래곤은 난동올 부리다가 북쪽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서쪽이 아니라 북쪽이요?"
"예,뭐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레뮤다 대륙 북쪽에 아르페디아 대륙이 있다.
그 말인즉슨, 쿠바나까지 와서 깽판을 부린 카세라스가 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과거에 행패를 부리던 아르페디아 대륙으로 간 것이다.
'뭐, 큰일이야 있겠어?'
유한이 낙관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르페디아 대륙에는 강한 랭커들과 길드가 많기 때문이다.
카세라스가 언데드 드래곤으로 업그레이드된 점이 좀 걸리긴 했지만, 유저들도 과거보다 더 레벨이 올랐기에 대형 길드에선 충분히 카세라스룰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여차하면 바츠를 꺼내도 되고....'
손석진이 되돌려 준 바츠는 과거보다 훨씬 더 강해진 상태로 되돌아왔다. 만약 기회가 생기면 바츠로 다시 카세라스를 잡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 아저씨가 혹시 이걸 예상하고 되돌려 준 건가?'
카세라스의 재등장과 바츠의 복귀. 혹시 이 일이 손석진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을까 의심스러운 유한이었다.
"드디어 카세라스가 움직였나?"
드림맥스의 부사장 정경욱은 눈앞에 펼쳐진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 업데이트 된 후 고이 잠자고 있던 카세라스를 중남미 유저들이 깨웠다. 그로 인해 레뮤다 대륙 북부는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다. 도시와 마을이 불타고, 수많은 NPC와 유저들이 죽었다.
하지만 카세라스의 행보는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녀석이 얼마나 날뛸지는 드림맥스도 모른다.
알고 있을 만한 인물은 딱 한 사람뿐.
정경욱은 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아르페디아의 창조주인 손석진에게로.
"카세라스의 사망 조건이 뭔가?"
"목을 자르거나 드래곤 하트를 파괴하면 죽습니다."
아무리 생명력이 질긴 언데드라고해도,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파괴되면 죽올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언데드 드래곤 카세라스도 마찬가지.
"그럼 소멸 조건은?"
여기서 소멸이란 몬스터가 리젠되지 않는 조건을 뜻한다. 아예 완전히 사라진다는 의미.
"유저들에게 3번 연속으로 잡히거나 레어에 숨겨 놓은 언데드 코어(Core)가 파괴당하면 소멸됩니다. 하지만 소멸시키는 것은 물론 잡는 것도 어려울 겁니다."
언데드 드래곤으로 업그레이드된 카세라스는 그 힘이 더욱 강해지고. 행동 패턴은 광룡 시절보다도 더욱 종잡을 수 없게끔 만들어졌다.
과거처럼 한 길드의 정예 유저들이 뭉치거나. 혼자 악을 쓰며 덤벼서는 이길 수 없었다.
"설사 바츠라도 카세라스룰 쓰러트릴 수 없단 말인가?"
"과거의 바츠라면 그렇습니다."
손석진은 과거라는 단서를 달았다. 현재의 바츠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물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 승패는 직접 붙어봐야 안다.
"그런데 말일세, 자네 바츠를 되살려 준 이유가 뭔가?"
정경욱은 이미 벌써부터 그것을 묻고 싶었다. 바츠가 재등장한 것은 드림맥스의 의사가 아니 었다. 손석진이 데이터베이스에 손을 대 사라진 바츠를 복구시켰던 것이다.
회사 몰래 행한 일이었기에 드림맥스도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다. 각종 게시판에 바츠 동영상이 오르고 유저들의 문의가 쇄도했을 때의 당혹감이란!
손석진은 바츠 유저가 새로 키웠다는 공지를 올리면 된다고 했지만. 그게 먹힐지는 의문이었다. 당사자가 가만히 입 다물고 있어 준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드림맥스는 지금까지 자신들의 실수가 명확한 경우를 제외하고 해킹당한 유저를 복구시켜 준 적이 없었다.
"대체 왜 되살려 준 건가? 카세라스랑 엮어서 뭔가 이벤트라도 꾸미려 했나?"
"지난번 토론회 때 유한 군이 우릴 위해 한몫 해줬잖습니까. 그때 원한다면 바츠를 복구시켜 줄 수 있다고도 했었고요. 그땐 유한 군이 별로 생각이 없다며 거절했지만, 나중엔 마음이 바뀌더군요. 저번에 저한테 전화가 온 것도 그 때문입니다."
손석진이 대충 얼버무렸지만, 정경욱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손석진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정경욱은 손석진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물었다.
"혹시 자네가 바츠를 해킹했기 때문은 아니고?"
회사 간판을 내리게 만든다 어쩐다 하면서 온 이상한 전화.
그 전화를 건 사람은 계속 손석진을 찾았고, 손석진은 전화를 받고 나갔다가 밤늦게 되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후에 사라졌던 바츠가 다시 나타났다.
유저가 원해서 손석진이 복구했다지만, 이건 원가 좀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정경욱은 손석진에 대해서 의심을 하는 것이다.
"그건 아닙니다."
자신은 지시했을 뿐이고. 바츠를 해킹한 건 김정균이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손석진은 당당하게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럼 다행이군."
정경욱도 그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경영자였다. 회사의 이미지와 이익을 위해 서는 입을 다물고, 사건을 묻어버릴 의지가 있는 사람이었다.
"바츠가 다시 나타난 것보다 다른 걸 신경 쓰시는 건 어떻습니까?"
손석진은 슬찍 주제를 돌리며, 들고 있던 서류를 정경욱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
"시궁쥐들이 우리 게임의 물을 버려 놓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정경욱은 손석진이 제출한 서류를 살펴보았다. 그 안에는 예전에 게임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유저들이 벌이고 있는 구린 행각이 낱낱이 정리되어 있었다.
"생쥐 스프를 급식한 것보다 더 큰 일을 벌이려는 모양 입니다."
"생쥐 스프?"
정경욱은 손석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진지한 눈빛에서 뭔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서류에 적힌 게 사실이고. 진짜 진행되고 있는 일이라면, 이건 정말 확실히 조사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행적만으론 뭐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공개했다가 밝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 오히려 그들이 결백하다면서 오히려 이쪽이 곤란해질 수 있다. 그들의 사회적인 위치를 생각하면 명예 훼손 운운하며 악귀같이 달려들 테니까.
"심증만 있어선 안 돼. 물증이 있어야 한다고. 그런 건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것 같군.”
"앞으로 밝혀낼 일이지요."
상대는 이전의 실패를 거울삼아 상당히 치밀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덕분에 온라인에서는 이렇다 할 증거를 캐내지 못했다.
"진짜라면 대한민국이 들썩일 일이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 회사나 게임도 영향을 받겠지요. 좋거나 아니면 나쁘거나.”
손석진은 그렇게 말했지만. 정경욱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을 것은 없어 보였다. 교육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선 게임이 항상 비난을 받는 처지였으니까. 이번이라고 그리 다를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말론 회랑을 통과한 유한은 노스아크로 갈 준비를 했다.
노스아크의 베르겐까지는 먼 거리이기에 처음에는 근처 도시에 있는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해 단숨에 이동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접었다. 텔레포트 게이트에 수상해 보이는 녀석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은 쉐도우 워커 길드원이잖아.”
“정말?"
"황금 기계 도시에서 본 이름이 몇 개 있어.”
전교 1등답게 기억력이 좋은 오펜이 수상한 자들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냈다.
"쉐도우 워커라면 발리안의 용병들인데."
"그런 자들이 왜 텔레포트 게이트에 있지?"
"뭔가 꼼수를 쓰거나 훼방을 놓을 심산이겠지."
그동안 발리안이 한 짓이 있기에 무슨 의도로 어떤 짓을 하려는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노스아크까지의 여정이 아무래도 쉽지는 않을 듯했다.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상태에서 노스아크까지 빨리 갈방법이 없을까?"
유한의 물음에 오팬이 대답했다.
“기구를 타고 가면 되지만, 좀 위험한데......"
근래에 공중 몬스터가 늘어나고 습격도 잦아서 장거리 비행은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물론 공중전이라는 새로운 스릴감을 즐기는 이들도 나타나고 있지만 말이다.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지. 기구를 타고 가겠어"
유한은 기구 여행을 결정하고, 근처의 상점에서 휴대용 기구를 샀다. 블랙은 기구를 탈 수 없었기에 먼저 철공소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조심해라 후손.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 일이다.”
"충고 고마워, 블랙.”
블랙은 유한이 탄 기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더니 철공소로 돌아갔다.
“아까 지그 님이 나에게서 휴대용 기구를 사갔습니다."
블랙이 말한 대로 세상일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유한에게 기구를 판 상인은 텔레포트 게이트 근처를 감시하고 있는 쉐도우 워커 길드원들에게 달려와 이렇게 일러바쳤다.
발리안은 유한이 기구를 타고 노스아크까지 올 것도 생각했다. 그래서 말론 회랑 근방의 상인 유저들을 매수해서 지그가 휴대용 기구를 사거들랑 곧장 보고하도록 했다.
"기구를 타고 온다? 그럼 이쪽에서도 준비를 해야겠군요.”
노스아크에서 쪽지로 소식을 받은 발리안은 서들러 용병들을 불러 모았다.
발리안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유한은 기구를 타고 북쪽으로 날아갔다.
공중 몬스터들이 중간 중간에 공격해 왔지만, 오펜의 마법탄이나 뇌제의 스킬로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는 수준.
'공중 몬스터들의 습격이 잦다고 들었는데 별로 그렇지도 않은걸?'
공중 몬스터들의 습격은 예전에 성지 로므나에 갈때보다도 드물었다. 딱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만 나타나곤 했다.
"아마 그 때문이 아닐까?"
"뭔데요?"
송코는 심상찮은 표정을 짓고서 말을 이어 나갔다.
"네가 기구를 사고 있을 때 다른 유저들에게서 들었는데, 우리가 오기 전에 붉은 드래곤이 남쪽에서 날아오는 걸 봤대."
역시 카세라스는 아르페디아 대륙으로 넘어온 것인가
"그런데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인데요?"
"그 사람들 말로는 드래곤이 나타난 뒤로 비행 몬스터의 습격이나 리젠이 많이 줄어들었다는데, 아마 그 때문이 아닐까?"
보통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뭔가 큰일이 생길 적에는 ‘징조'가 나타나곤 했다.
지진이 있기 전에는 새나 쥐들이 도망쳤고, 마왕 급의 보스 몬스터가 나타났을 땐 신전의 신상이 피눈물을 흘렸다.
이번에도 그런 징조가 아닌지. 사악한 드래곤의 기운을 느끼고 비행 몬스터들이 알아서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일지 모르는 것이다.
"아르페디아에선 아직 카세라스의 습격이 없지 않아요?"
"아직은 그렇지. 하지만 그게 더 이상하단 말이야."
이미 레뮤다 대륙 북부의 도시 몇 개를 쑥대밭으로 만든 카세라스라면 이렇게 잠잠할 리가 없었다.
"그냥 웨스턴이나 다른 대륙에 간 건 아닐까요?"
"모르지...이 조용함이 폭풍 전야의 고요함일지도."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가는 사이, 기구는 어느새 네메시스 산맥에 이르렀다. 주변을 둘러보던 유한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왜 이 근처에는 기구들이 이렇게 많지?"
지금 네메시스 산맥의 하늘 위에는 기구들이 잔뜩 떠올라 있었다. 마치 기구들로 진을 치고 있는 듯한 모양새.
"저기요, 이 근방에서 뭔가 이벤트라도 합니까?"
유한은 근처에 있던 기구로 다가가 말을 건네 보았다. 기구 안에서 카드 게임을 하고 있던 유저들은 유한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지그다! 대장장이 지그가 나타났다!"
"서둘러 집결 쪽지를 보내!"
"아냐, 신호탄을 쏘는 게 더 빠를 거야."
난리법석 끝에 신호탄을 쏘아 올린 유저들은 활과 화살을 들더니 유한 일행이 탄 기구를 공격했다.
"으악!무슨짓이야?"
실드! 윈드 커터!"
오펜이 더블 캐스팅으로 두 개의 마법 스킬을 동시에 발동시켰다. 날아온 화살들이 실드에 가로막히고,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궁수 유저들이 탄 기구의 기낭을 길게 찢어 버렸다.
"크악!사람살려!"
상대방의 기구는 속절없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갑자기 습격을 해 오다니, 대체 무엇 때문인가? 영문을 물라 어리둥절해 하던 유한은 주변의 기구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좀 전에 추락한 기구에서 쏜 신호탄 때문인 듯 했다.
그렇게 다가오는 기구들의 중앙에는 왠만한 기구를 능가하는 대형 기구가 있었다. 비행선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그 기구에는 V자의 름다운 문양이 찍혀 있었다 유한은 그 문장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지그 철공소의 숙적인 발리안 철공소의 문장이었다.
"하하핫! 안녕하십니까, 지그 님."
서로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지자, 발리안이 고개를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물론 전혀 반갑지 않은 유한이었다.
"안녕 못해, 인간아. 또 뭔 수작을 벌이려는 거야?"
"전 이번 제철소 퀘스트를 실패했습니다. 저만 퀘스트에 실패하면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지그 님도 다시 저와 같은 출발선에 서야지요."
"아오! 이 사이코 자식아! 이딴 짓을 할 시간과 돈으로 좀 더 영양가있는 일을 해!"
"저는 이게 충분히 영양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뻔뻔하게 대꾸한 발리안은 슬쩍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대형 기구와 주변의 기구에 타고 있던 발리안이 고용한 용병들이 활을 겨누고 마법 스킬올 캐스팅했다.
"자, 이대로 저 아래 눈 덮인 산봉우리에 떨어져 동태가 되시겠습니까? 아님 순순히 황금 기계 도시의 기술을 저에게 넘기겠습니까?"
"닥쳐, 동태가 되는 건 너희들일걸?"
유한이 되려 엄포를 놓자 발리안은 비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무엇올 믿고 이리 큰소리를 치는지 모르겠군요. 지금 지그 님의 명운을 잡고 있는 것은 바로 접니다."
"이 바부팅아. 내가 누군지 몰라? 나 뇌제야,뇌제 지그!"
유한은 뇌제의 홀올 보란 듯이 꺼내 들었다.
"니들이 공격하기 전에 벼락으로 죄다 날려버리는 건 일도 아니거든!"
"그. 그런."
발리안의 표정이 파리해졌다.
이곳이 땅이라면 피하거나 동료의 몸을 방패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운신이 폭이 자유롭지 못했다.
동영상에서 봤던 뇌제의 힘이라면, 자신의 기구 군단을 죄다 추락시키고도 남을 것.
'제길! 그걸 생각했어야 히는데!'
발리안은 복수에 눈이 멀어 지그가 뇌제라는 사실을 깜빡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원망은 나중에 해도 된다.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였다.
"하하하, 생각해 보니 제가 좀 심했던 것 같군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긴 어딜 가, 이 자식아! 맞을 건 맞고 가야지!"
입장은 완전히 반대가 되었다. 발리안의 기구 군단은 유한의 기구를 피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지금 이대로 추락해서 눈 덮인 산봉우리에 떨어지면, 틀림없이 사망이다. 죽지 않더라도 눈이나 얼음에 파묻혀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그건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한 일.
"죄다 죽여주마!"
"으아악!"
유한이 뇌제의 홀올 휘두르자 발리안과 그의 용병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벼락은커녕 정전기조차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발리안 패거리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유한은 무척 당황했다.
'크악! 그러고 보니 오늘 뇌제로 한 번 변신했었구나!'
네메시스 산맥에 오기 전, 비행 몬스터 군단을 맞아 뇌제로 변신해서 쓸어버린 적이 있었다.
뇌제는 하루에 한 번밖에 변신하지 못한다. 발리안을 응징할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상황은 이쪽이 불리해졌다.
"험험, 다 죽여 버리려 했지만,불쌍해서 한 번은 봐준다."
유한은 불리한 티를 안 내려고 오히려 아량을 베푸는 척했다. 그러면서 오펜과 송코에게 얼른 기구를 움직여 도망치라고 손짓을 보냈다.
"퀘스트에 실패한 거 불쌍해서 뵈주는 거니까 고마운 줄 알아! 쫓아오면 그땐 정말 죽는다"
유한 일행이 탄 기구가 슬금슬금 물러났다. 하지만, 유한은 판단을 잘못했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배짱을 부렸으면, 발리안 쪽이 지레 겁먹고 도망쳤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발을 뺌으로서. 이쪽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후후후, 뭔지 모르지만 지금은 뇌제의 힘올 못 쓰는 모양이군요."
뇌제의 힘올 못 쓰는 지그는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하늘에서라면 더더욱.
"쫓으십시오! 지그 님을 추락시키는 분께 십만 골드를 드리겠습니다.”
"오오오!”
발리안의 기구 군단이 유한이 탄 기구를 추격해 왔다. 점점 거리를 좁혀 온 그들은 유한 일행을 향해 화살을 날리고 마법탄을 쏘았다.
오펜이 실드 스킬로 막았지만, 그의 MP에는 한계가 있었다. 언제까지나 방어하고 있을 순 없는 것이다.
"으으, 뭔가 수를 써야 하는데!"
"이 상황에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까?"
송코가 회의적으로 말했을 때, 유한은 그의 등 뒤에 있는 뾰족한 산봉우리를 발견했다.
"저건 블레이드 마운틴!"
산봉우리가 칼날처럼 뾰족해서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 네메시스 산맥에서도 가장 험준한 산이었고, 만만치 않은 고렙 몬스터들이 득실거렸다. 특히 강하고 성가신 녀석들이 정상 근처에 살았는데, 바츠 시절에 멋도 모르고 갔다가 혼줄이 난적도 있었다.
"기구를 저산으로 돌진시켜요!"
"저기 뭔가 있어?"
"가면 알아요!”
어차피 이판사판이었기에 송코는 유한이 시키는 대로 기구를 블레이드 마운틴 쪽으로 몰아갔다. 그들을 놓칠 생각이 없는 발리안의 기구 군단도 곧장 따라왔다.
그렇게 기구가 블레이드 마운틴 가까이 이르렀을 때, 송코는 기이한 광경을 보았다.
"어? 저쪽은 왜 저렇게 까맣지?"
다른 산들과 마찬가지로, 블레이드 마운틴도 정상에는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런데 유독 한쪽만 새까맸다. 유한은 그 검은 사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펜, 저기 검은 쪽에 파이어볼 한 방 날려."
"저기뭐가있는데?"
"설명할 시간 없어.얼른!"
오펜은 유한이 시키는 대로 검은 사면에 파이어볼을 쏘았다.
쿵!
파이어 볼이 검은 사면 가운데 꽂히자, 그 검은 사면은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리고 사방으로 점점이 홀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쪽으로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저, 저건!"
오펜과 송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새까맣게 날아오는 것은 바로 와이번. 크고 작은 와이번들이 날카로운 고성을 내지르며 기구가 있는 쪽으로 몰려왔다.
"으악! 저게 뭐야?!"
"와이번이다! 와이번이 떼거지로!"
그 검은 사면은 블레이드 마운틴에 있는 와이번들의 군락지였다. 서로 부둥켜안고 잠을 자던 수천 마리의 와이번들은 자신들을 공격한 적들을 향해 분노를 드러냈다.
그들은 유한 일행이 탄 기구만이 아니라. 바로 뒤에 있는 발리안의 기구 군단까지 적으로 간주해 공격했다.
"으아악!사람살려!"
"추락한다-아!"
와이번들은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로 기구를 보이는 족족 찢어 버리고, 떨어지는 유저들을 깨물어 죽였다.
발리안이 선발한 용병 유저들은 실력이 뛰어났지만, 공중전 경험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수천 마리 와이번의 사나운 공격에 전혀 맥을 추지 못했다.
"휴, 큰일 날 뻔했네."
"지그 너 너무 무모했어."
산봉우리에 착지한 유한 일행은 하늘에서 벌어지는 참극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와이번들이 공격해 왔을 때. 그들은 유한을 필두로 기구에서 뛰어내렸다. 그대로 있다간 와이번들의 공격을 받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물론 용감하게 뛰어내릴 수 있었던 데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오펜의 부유 마법.
하지만 오펜의 MP가 거의 바닥난 상태였고, 추락하는 중에는 마법을 쓰기가 어려운 걸 생각하면 이판사판의 도박이었다.
"발리안은 어떻게 됐을까?"
송코의 물음에 유한이 피식 웃었다.
"그 녀석은 뭐하러 걱정해요? 얼른 베르겐으로 가자고요. 여기서 미적거리면 위험해요.”
와이번 말고도 블레이드 마운틴엔 사나운 몬스터들이 많았다.
서둘러 산을 내려가는 유한 일행의 머리 위로 찢어진 기구의 천조각이 눈처럼 휘날렸다.
그 중에는 발리안이 타고 있던 대형 기구의 천 조각도 있었다.
길게 찢어 발겨진 발리안 철공소의 문장은 쓸데없는 오기를 부리다 망한 발리안의 최후를 보여주는 듯 했다.
-지그 이 ㅅㅂㄹㅁ!
어디선가 들려온 메아리가 유한의 귀를 간질였다
블레이드 마운틴에서 발리안을 따돌린 유한은 베르겐에 입성해 녹색 수염 일족의 족장 군나르를 만났다.
“오오! 정말 구해 온 모양이군."
군나르는 유한이 가져온 레코딩 크리스탈을 보고 감탄했다.
그는 당장 수하에게 마나 영사기를 가져올 것을 지시했 다. 얼마 후 마나 영사기가 도착하자 그는 직접 수정을 끼워 넣고 내용을 살폈다.
"오오! 이것이야말로 고대 선조님들이 갖고 있던 기술의 정화!”
레코딩 크리스탈 안에는 별별 내용들이 다 들어 있었다.
무중력 상태에서 순수한 금올 제련하는 법이라든가, 강철보다 더 튼튼한 섬유를 합성하는 법, 심지어 폭발력을 추진력으로 이용하는 기계 장치의 설계도까지.
"정말 고압네. 자네 덕분에 사라졌던 고대 드워프들의 문명을 부활시킬 수 있을 것 같아!”
진심으로 고마웠던지 군나르는 유한의 손을 꼭 잡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유한은 그런 그의 모습보다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창이 더 좋았다. 퀘스트의 성공을 알리는 메시지 창은 이번 퀘스트로 얻은 보상들을 쭉 나열하고 있었다.
[녹색 수염 일족의 족장 군나르의 의뢰] 퀘스트를 성공했습니다.
-명성이 8.000 올랐습니다.
-녹색 수염 일족과 친밀도가 최고가 되었습니다.
[강철의 맹우] 칭호를 받았습니다.
자네 같은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믿고 의지할 수 있을 것 같군. 앞으로 어려운 점이 있거나 뭔가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언제든 날 찾아오게. 전력을 다해 자네를 도와줄테니."
군나르는 그렇게 말하며 녹색 수실로 엮은 작은 해머를 유한에게 건네주었다.
망치 훈장이라는 아이템은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었다.
[망치 훈장]
설명 : 드워프 사회에 큰 공헌을 세운 사람에게 내려지는 훈장. 이것을 지닌 자는 드워프와 다름없는 대접을 받으며 노스아크 어디든 둘러 볼 수 있다.
“아, 그리고 제철소 설비를 구하고 싶다고 했지? 여기 설비 구입 허가증이네. 이것만 있으면 자네는 원하는 기자재를 뭐든 구입할 수 있네.”
'앗싸! 드디어 됐다!’
그렇게 퀘스트를 완료한 유한은 군나르에게 받은 설비 구입 허가증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오펜과 송코는 볼 일이 있다며 먼저 돌아갔다.
"구입하기 전에 직접 뵈야겠지?"
그렇게 생각한 유한은 베르겐 북쪽에 있는 제철소로 향했다.
제철소는 여전했다. 신전이라 착각할 정도로 하얀 대리석 건물을 드워프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것도.
"멈춰라! 여긴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드워프 병사가 앞을 가로막자, 유한은 군나르가 내준 망치 훈장을 내보였다.
"허허,자네는 특별한 존재로군.”
친근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드워프 병사들의 어깨를 토닥여 준 뒤 유한은 안으로 들어갔다. 제철소 안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 넓었다. 커다란 용광로에서 팔팔 끓는 쇳물이 흘러나오자 이를 평로에 넣어 강철을 뽑아냈다. 이렇게 뽑아낸 강철은 압연 공정을 거쳐 다양한 형태의 강재(鋼材)로 만들어 졌다.
"오오, 역시 스케일이 달라, 스케일이!"
제철소 공정을 견학한 유한은 연방 감탄사를 발했다. 그도 나름 아르페디아에서 유명한 대장장이라 자부하고 있었지만, 드워프들의 기술과 규모엔 미치지 못했다.
이 제철소에서 하루에 만들어 내는 강재는 지그 철공소의 한달 생산물량과 맞먹을 정도였다. 거기다 필요에 따라 강재를 후판, 강관, 차륜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내 일감을 훨씬 줄여 주었다.
"역시 아이언 마스터가 되려면 제철소가 있어야 해!”
견학으로 제철소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한 유한은 즉시 공업사를 운영하는 npc 구센도르프를 찾아갔다.
"그래, 제철소 설비 구입 허가는 받았나?"
"훗, 당연하죠."
유한은 허가증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구센도르프의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났다.
"허, 자네라면 가능할지 모른다 생각했지만, 정말 받아 낼 줄이야! 그래 무엇을 구입하겠나?"
그의 물음에 유한은 생각하고 있던 것을 말했다.
"우선 용광로와 평로, 압연기 등 제철소를 건립하는데 필요한 핵심 설비들과 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주는 반송대 설비들을 주세요.”
"그 많은 걸 다 돌리려면 마법동력로도 필요한데 사겠나?”
“필요하다면 당연히.”
마법 동력로는 일종의 발전기였다.
크고 무거운 제철소의 장비들을 움직이려면 인력만으로는 힘들기에, 마법 동력로는 필수적이었다.
"전부 얼맙니까?"
유한이 구입할 물품들의 가격을 묻자 구센도르프는 손가락 두개를 폈다.
"이백만골드요?"
철공소 설비를 구입하는 데 백만 골드가 들었으니 그 정도면 싼가격이었다.
그런데 구센도르프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천만골드네.”
"예?”
순간 유한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귀가 먹었나? 이천만골드라고.”
'헉!그럴수가!’
유한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빽 소리를 질렀다.
"이거 바가지 아닙니까?!"
"바가지는! 내 비록 인간들에게 기계와 공구를 팔고 있으나 지금까지 한 번도 가격을 속인 적 없네. 내가 제시한 가격이 못미더우면 다른 데 가 봐.”
구센도르프가 삐진 듯 홱 돌아서자 유한은 그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어허, 제가 언제 안 산다고 했습니까? 하하, 삽니다. 사요.”
드워프들이 괴짜이긴 하지만 그래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걸 알고 있는 유한이다.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로 2천만골드를 내놓았다.
'아놔! 제철소 두 번 지었다가는 거지 되겠네.’
그나마 블랙 아이언 판매로 갑부가 되지 않았다면 설비 가격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건은 저번과 같이 준비되는 대로 택배로 보내주겠네. 그리고 자네가 남달라 보여 이야기해 주는 건데 말이야....”
"예, 말씀하십쇼.”
유한은 구센도르프가 중요한 조언을 해주는 것 같아 정신을 가다듬고 귀를 기울였다.
"제철소 설비는 이렇게 사서 들여놔도 되지만, 직접 만들어도 되네. 경비가 줄어들기도 하지만 직접 만들면 기계 설비를 자신의 제철소 규모에 맞추고 조정할 수 있어. 그럼 효율이 높아져서 생산을 더 원활하게 할 수 있지"
"그렇습니까?"
하긴 저번에 대규모 업데이트가 되고 나서 토르가 말했던 것이 있었다. 제철소 전에 철공소를 짓는 것은 제철소에 필요한 기자재를 생산할 능력을 갖추기 위함이라고.
'그런데 난 철공소를 블랙 아이언 생산에 전념하도록 만들어 버렸으니....'
토르가 말한 대로 철공소를 기자재 생산의 용도로 운용하고 기술을 익혔으면, 제철소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그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2천만 골드라는 거금을 아꼈을지도.
'좀 어긋난 건가?'
그래도 제철소를 짓겠다는 목적은 달성했다.사실 철공소 건을 생각해도 그랬다. 유한은 칠공소 설비를 얻기 위해서 신의 광물을 구했지만 발리안은 돈으로 때워 버렸다.
그런 경우처럼 굳이 제철소를 짓기 위해 반드시 퀘스트를 해야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유한의 뒤를 이어 제철소를 짓는 사람은 설비를 스스로 제작할지도.
그게 발리안이 될지, 다른 누구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유한은 아르폐디아 최초의 제철소 건립자로 이름올 남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볼 때 자네는 아직 정밀 조립 제품을 생산하는 실력이 최고에 달하지 못한 것 같군. 그 실력올 최고까지 높여 봐. 그럼 이런저런 기자재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내가 가르쳐주지."
'정밀 조립 스킬을 1랭크까지 올리라 이건가?'
현재 유한의 정밀 조립 스킬 랭크는 2랭크였다. 1랭크까지 올리고 구센도르프를 찾아오면 엔지니어 칭호와 관련된 스킬을 배울 수 있는 모양이다. 철공소나 제철소의 기계들을 만들 수 있는.
유한은 정밀 조립 스킬 1랭크를 찍고 다시 노스아크에 찾아오기로 했다.
"조언 감사합니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잘 가게. 토르의 가호가 있기를 빌지.”
구센도르프 공업사를 나온 유한은 철공소로 돌아가기 전 베르겐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로 바빠, 최근 아르페디아 대륙의 시세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기회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자, 포션 사세요! 체력이 1 남은 사람도 벌떡 일으키는 정금당의 활력수입니다!”
“상급 재봉사이신 앙드레 봉 님께서 만든 물개 가죽 옷 팝니다!”
"지그 표 무구입니다! 아르페디아 명장인 지그 님이 손 수 만드신 무구! 단돈 오천 골드에 팝니다!”
'뭐? 내 핸드메이드가 오천 골드라고?'
지그제 핸드메이드 무구는 경매로 팔릴 정도로 인기가 높고 가치도 상당하다. 그런 아이템이 단돈 오천 골드일 리는 없는 일.
유한은 당장 그 가격을 제시한 노점올 찾아가 보았다. 접대용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았던 상인 유저는 유한의 머리 위에 적힌 이름 두 글자를 보고 바위처럼 굳어 버렸다.
"뭐야?공장제잖아.”
확인해 보니 지그 표가 맞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철공소에서 일꾼들이 생산한 제품이지, 유한의 핸드메이드는 아니었다.
"과장 광고는 자제하세요."
"네. 넵.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유한은 혀를 끌끌 차며 발걸음을 돌렸다. 천천히 시장올 돌아본 그는 게임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 다는 것올 느낄 수 있었다.
아이템의 성능이나 질도 우수해졌고, 이전에는 보지 못한 아이템들도 등장했다. 화약이나 내단 같은, 해외에서 생산되는 희귀 아이템들이 판매되기도 했다.
그러나 유한의 눈에 확 띈 것은 금속 원자재와 제품들의 거래가 활발해졌다는 점이다.
예전보다 금속의 수요가 늘었는지, 베르겐 시장의 경매장에는 철광석과 여러가지 비철 금속의 판매량이 늘어났고. 가격도 더 을랐다.
"아니. 최가장 놈들은 왜 요새 철이란 철은 싹쓸이 하는 거야?"
"못 들었냐? 그놈들 요새 철갑선을 개발 중이라잖아. "
"나도 들었는데, 어디서 거북선 설계도를 입수했다고 하더라고."
조선 분야에서 금속 자재의 이용이 늘어난 듯했다. 최가장 길드처럼 철갑선까진 아니더라도 배 밑에 불이기 위해 구리판과 구리 리벳을 대량 구입하는 길드도 있단다
예전에 쇠로 된 조선 용품은 닻이나 쇠사슬, 대못이 고작이었던 걸 생각하면 무척 많이 발전한 셈이었다.
'넌 목수가 뭔 쇠가 그리 많이 필요한 건데?"
대장장이 유저의 물음에 목수 유저가 대답했다.
"철골을 세워서 콘크리트로 성벽을 만들 거다.”
"풉! 판타지 게임에 공구리질?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짜샤.”
"내가 최근에 새로운 건축법올 고대 유적에서 발견했거든. 그리고 시멘트나 콘크리트는 고대 이집트랑 로마에서 이미 만들어 시용했다고.”
건축이나 토목에서도 쇠의 사용이 늘어날 모양. 대장장이와 으르렁대고 있는 목수는 앞으로 철을 이용 한 새로운 건축법을 아르페디아에 선보일 모양이다. 아마 이전보다 훨씬 튼튼한 성과 요새들이 등장하게 될 것이 다.
'그렇게 되면 공성용 무기들도 훨씬 발전하겠군.’
새롭게 강화된 무기들은 목재나 석재보다 철을 이용하 는 경우가 많을 테니 철의 가치는 더욱 올라갈 것이다.
철의 가치가 오르는 만큼 그와 관련된 산업들은 더욱 각광을 받게 되고 그만큼 힘을 얻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벌써부터 그런 힘을 얻으려는 유저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저기 대화를 나누는 대장장이들만 해도 그렇다.
"축하합니다, 맥스 님. 이번에 마야 님이랑 철공소를 지으신다면서요?"
"예정보다 좀 늦었지만, 열심히 해 볼 생각입니다. 그런데 아론 님은 어쩌실 겁니까?"
"전 가능하다면 찬드라 대륙에 가서 철공소를 지어 볼 생각입니다. 그 대륙이 그런 산업은 아직 뒤쳐져 있다고 하더군요. 거기서 철공소를 만들어 찬드라의 철 시장을 장악할 겁니다,그리고....”
모두들 꿈꾸는 바가 있고, 노리는 목표가 있었다. 유한은 문득 예전에 토르가 해 줬던 말을 떠올렸다.
"지금보다 발전할 아르페디아는 더 많은 자원과 새로운 기술이 필요하다. 지그 너같은 대장장이들의 활약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지.”
토르, 아니 드림맥스에선 아마 이런 것을 생각하고 대규모 업데이트를 시행했는지 모른다.
그전에 개발자인 손석진이 의도한 바도 있을 것이다. 대장장이든 뭐든, 의지를 갖고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고.
그는 분명 사람들에게 그걸 가르쳐 주고 싶었을 것이다.
"철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법. 유한은 토르가 해 줬던 말을 되씹으며 앞으로 나갔다. 달라지고 있는 아르페디아 대륙에서, 자신은 제철소라는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것은 최고가 되기 위한 시작이었다.
“해 보지. 이 손으로 철을 지배해 보겠어.”
그리고 아이언 마스터가 되어 세상을 지배해 보이리라. 최종 목표를 굳힌 유한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