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기술 서적
휘이이이잉~!
황량한 바람이 내부 공간을 휘돌다 나갔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황금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선 유한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 거창하게 보물이 쌓여 있던 것과 달리. 안에는 벽화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뭔가 비밀 금고라도...."
유한 일행이 벽을 더듬어 조사하려 했지만,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느새 발리안과 그의 고용인들이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훗, 이런 걸 독 안에 든 쥐새끼라고 하지요."
발리안이 눈짓을 하자, 그의 옆에 있던 용안이 검을 뽑아들고 유한을 공격했다.
'대쉬다!'
유한은 용안이 돌진하기 전에 취한 준비 자세를 보고, 그의 공격 스킬을 파악했다. 그는 곧장 몸을 비스듬히 기올여 용안의 공격을 피해냈다.
"어라, 피했어?"
용안이 의외라는 눈빛을 보이자 유한은 히죽 웃었다.
"내가 예전에 좀 싸워봤거든."
"그래?"
용안은 뒤춤에서 손도끼를 꺼내 들었다. 유한은 그가 부메랑 엑스 스킬을 쓸 거라 예상하고 재빨리 옆으로 피했다. 그러나 용안은 손도끼를 유한에게 던지는 척 하다가 검으로 도끼를 후려쳐 부서트렸다.
'앗! 저건!'
예전에 유한이 공중 요새에서 미케니아의 마도사들을 제압했던 공격법이었다. 그때 라스트모히칸 녀석의 도끼를 공중에서 암 브레이크로 부숴서 마도사들에게 파편을 날렸다.
용안은 그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유한을 공격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가 암 브레이크를 쓰지 않았다는 것뿐.
"크윽!"
-다리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30초간 움직임이 굼떠집니다.
도끼 파편에 맞으면서 hp가 1000 포인트 떨어졌다. 그러나 그보다 심각한 것은 다리를 다쳐 움직이는 데 지장이 있다는 점이다. 유한이 부들거리는 것을 보고 용안은 검을 고쳐 잡고 다가왔다. 분위기로 보건데 치명적인 일격을 날리려는 듯.
'쳇, 드래곤 슬레이어 칭호를 짤짤이로 딴 게 아니군.'
상대가 수준 이상의 탱커였다. 거기다 정해진 공격 스킬이 아닌 변칙 기술을 고안해 쓰는 것을 보면, 전투 경험도 풍부한 듯 했다.
'좀 더 신중하게 상대해야 했는데....'
후회하는 유한을 향해 다가오며 용안은 검을 번쩍 치켜 들었다.
'그런데 이놈들은 왜 날 돕지 않는 거지? 유한이 초조한 안색으로 일행들을 찾으려 할 때 거센 외침이 그의 귀청을 때렸다.
"검을 버려라! 아니면 네 고용주는 죽는다!"
고개를 돌린 용안은 황당한 표정올 지었다. 어느 틈엔지, 발리안의 머리는 블랙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고, 쉐도우 워커 길드원들은 죄다 바닥을 기고 있었다.
용안이 유한을 상대하는 사이, 피라미드 안의 발리안 패거리를 블랙과 송코, 오펜이 제압한 것이다.
용안은 검을 버리는 대신 유한을 블랙이 있는 곳으로 떠밀어 보냈다. 그리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발리안 님을 이쪽으로 보내시오."
"크크크, 바보 아냐? 우리가 미쳤냐? 이놈을 고이 보내 주게."
유한은 자신을 순순히 보내 준 용안을 비웃었다. 이대로 발리안을 죽여 버리면 앞으로 플레이는 편해진다. 발리안이 부활 포인트에서 다시 이곳으로 오는 동안, 느긋하게 황금 기계 도시의 기술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훗,제법 사내다운 친구로군."
"야!무슨짓이야!"
블랙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발리안을 용안에게 보내 주었다.유한이 펄쩍 뛰었지만 블랙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후후후, 이번엔 서로 비겼군요."
"제길!멍청한 깡통 녀석때문에."
블랙의 정정당당한 행동에 분통이 터졌던 유한은 홧김에 주먹으로 가까운 벽면을 후려쳤다.
그저 분풀이로 휘둘렀올 뿐인데, 주먹에 맞은 벽돌이 안으로 쑥 들어갔다. 연이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스르르 밑으로 내려갔다.
"얼래?"
"무,무슨 짓을 한거야?"
일행이 당황하는 사이, 바닥은 더 빨리 내려갔다.
"무슨 함정 같은 거 건드린 거 아닙니까?"
"함정이라면 뭔가 삐죽한 게 튀어나왔겠지!"
참으로 우연히 작동시켰지만, 유한은 이것을 엘리베이터 비슷한 장치라 생각했다.
도시 중앙에 있는 황금으로 치장된 피라미드라면 신전이나 왕의 무덤과 같은 중요한 건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부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보니 자신들의 월등한 지식과 기술을 좀 더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두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하 깊숙한 비밀 공간에다 말이지.'
그의 예상대로, 고대 황금 기계 도시의 은밀한 장소가 일행의 눈앞에 나타났다.
돌바닥이 완전히 내려앉자 사방에 환한 불이 들어오며 거대한 지하의 공간을 밝혔다.
"우와, 이게 뭐지?"
"도시 지하의 공장인가본데."
주변에는 커다란 반송대라든지. 물건을 찍어내는 듯한 기계들이 늘어서 있었다. 천장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연통과 도르래들이 가득했고, 화로나 보일러 같은 시설들도 여기저기 구비되어 있었다.
"대체 여기서 뭘 만든 거지?"
"저기에 답이 있을 것 같은데."
오펜이 지하 공장 벽에 그려진 벽화를 가리켰다. 고대 남미 문명의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수 있는 기괴한 그림들이었지만, 대충 내용을 아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벽화 제일 왼쪽에는 거대한 원반을 타고 고원에 내려오는 일곱 명의 신인이 그려져 있었다. 지상에 있는 드워프들은 그들을 경이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두 번째 그림에는 신인들이 드워프들에게 선진적인 기술과 지식을 가르치는 장면이 있었다.
세 번째 그림에는 그들의 지원 덕분에 크게 발전한 드워프들이 일곱 신인을 기리는 뜻에서 고원에 황금 기계 도시를 건설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이 도시는 외계인 방문을 기념해서 건설된 것이로군."
"의계인에게 기술올 받은 드워프라... 왜 드워프들이 비겁할 정도로 앞선 기술을 가졌는지 알겠군요."
뜬금없이 판타지 배경 게임에 외계 문명 같은 SF 소재가 끼다니.
사실 끼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레뮤다 대륙의 모태가 된 고대 잉카나 마야 문명은 너무나 훌륭해서 외계인이 기술을 전수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드림맥스도 그런 설에 입각해 이런 스토리를 구상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원반을 타고 내려왔다고 마냥 외계인으로 추정할 수도 없는 것이고.
"아무튼 이곳에서 발전된 기술을 습득한 드워프들이 아르페디아 대륙까지 진출한 건가?"
"그 뒤의 역사도 궁금한걸? 이 황금 기계 도시가 폐허가 된 사연 말이야."
"그런 건 나중에 천천히 알아보자고."
감춰진 역사와 유적을 발견하는 것은 유저의 의무이자 권리.
그러나 지금 유한과 발리안에게 우선되는 건 드워프의 역사가 아닌 기술이었다.
'대체 어딜 가야 기술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일단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황금 피라미드 안까지는 들어왔다. 하지만 피라미드 어디에 기술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유한과 발리안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떨어져서 개별적으로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아직 확실한 위치도 모르는 상태에서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자칫 헛다리를 짚으면 퀘스트를 실패할 수도 있기에.
"여기 뭔가 있는데?"
블랙이 또 다른 벽면을 가리켰다. 그것은 지하 공장의 시설들이 배치된 지도였다. 유한과 발리안은 차근차근 지도를 살펴보았다.
"어디 보자, 이곳이 공장이라 치면....."
"서쪽은 동력 생산 단지고, 남쪽은 연구소."
연구소라는 대목에서 두 사람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이번에 선수를 친 것은 유한이었다. 그는 발리안의 머리를 냅다 후려쳐 버리고 남쪽으로 달려갔다.
"크악! 비겁하지 않습니까?"
"시끄럿! 먼저 비겁했던 건 누군데?"
"으으으.... 용안 님 뭐하십니까? 얼른 잡으세요!"
용안이 곧장 유한의 뒤를 쫓아갔다. 그 뒤를 뒤통수를 움켜잡은 발리안이 따랐고, 블랙과 송코, 오팬이 혀를 차며 따라갔다.
"하여간 둘 다 똑같다니까."
먼저 치고 나간 유한이었지만, 랭커인 용안은 무섭게 따라붙었다. 그가 대쉬 스킬올 사용할 때마다 두 사람의 격차가 곽팍 줄어들었다.
당황한 유한은 중간에 잡히는 녹슨 기계들이나 연장들을 뒤로 집어 던졌지만, 용안은 당황하지 않고 피해 가며 쫓아왔다.
'제길, 더 빨리 달려갈 방법이 없나?'
두리번거리던 유한은 강철 레일에 얹힌 짐차를 보았다.
생산품이나 자재를 옮겼을 것으로 여겨지는 짐차는 예전에 어릴 적 광산 파크에 갔을때 타본 레일 바이크와 비슷했다.
'저거다!'
곧장 짐차에 올라탄 유한은 발로 페달을 돌렸다. 삐걱거리며 움직이던 짐차는 곧 바람같이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좋았어! 하하핫!"
줄어들었던 용안과의 격차가 다시 벌어지자, 유한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가 일그러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용안과 발리안도 다른 짐차를 타고 쫓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 서십시오!"
"택 같으면 서겠수?"
그렇게 레일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커다란 지하 광장에 신전처럼 생긴 크고 하얀 건물이 나왔다. 좀 전에 지도에서 보았던 연구소가 분명했다. 짐차에서 내린 유한은 서둘러 연구소 건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가 다가가자, 연구소 주변에 늘어서 있던 청동상들이 눈을 번뜩이며 음직였다.
"헉! 가디언인가?"
청동상들은 유한의 앞을 가로막고 딱딱하고 기계적인 음성을 토했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 출입증을 제시 바랍니다.
그런 게 있을 턱이 없다. 유한이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자, 청동 가디언들은 허리에 차고 있던 거대한 도끼를 뽑아 들었다.
-관계자가 아니면 돌아가시오. 불응시 공격하겠음.
그러나 유한은 물러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조금 있으면 발리안과 용안도 올 텐데 여기서 시간올 끌어서는 곤란하다.
"흥, 기껏해야 청동 쪼가리 주제에."
유한은 펜릴 소드를 뽑아 들고 앞에 있는 청동 가디언을 후려쳤다. 암 브레이크 스킬이 깃든 일격에 청동 가디언의 머리가 산산이 부서졌다.
"별것도 아닌 녀석이...."
피식 웃던 유한은 이내 안색을 바꾸고 몸을 숙였다 머리가 부서진 청동 가디언이 도끼를 휘둘렀기 때문이다.
-침입자. 침입자 출현.
-제압하라.제압하라.
부서진 놈뿐만 아니라 근처의 다른 녀석들도 공격해왔다. 어눌한 말투를 내뱉는 것과 달리 놈들은 기민한 움직임으로 유한을 압박했다.
'헉, 이놈들 엄청 강하잖아!'
청동 가디언들의 실력은 왠만한 고렙 몬스터들의 전투력 이상이었다. 레벨이 최소 200은 넘을 듯.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들은 황금 기계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의 지킴이들이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정지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신인의 기술올 전수받은 드워프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병기답게 강력함을 자랑했다.
유한이 청동 가디언들을 상대로 꾸물거리는 사이, 발리안과 용안이 도착했다. 두 사람은 고전하는 유한을 내버려두고 연구소로 들어가려 했지만 또 다른 청동 가디언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출입증을 제시하시오
"용안님, 길을 뚫어주십시오."
발리안이 슬쩍 물러서자 용안이 청동 가디언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싱급 랭커답게 연달아 터져 나온 강력한 검격에 청동 가디언들이 산산 조각 났다.
"아니!"
앞으로 나가던 용안과 발리안이 멈칫했다. 바닥에서 뭔가 불쑥 솟아난다 싶더니 부서진 수만큼의 청동 가디언들이 새로 나타난 것이다.
새롭게 등장한 청동 가디언들은 원래 배치되어 있던 녀 석과 달랐다. 놈들은 방패와 검을 들고 있었고, 실력도 도끼를 든 녀석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처음에 짚단 베듯이 청동 가디언을 베어 넘겼던 용안도 새롭게 나타난 녀석들은 쉽게 처리하지 못했다. 놈들은 상급 랭커인 용안의 공격을 막아 내고 틈을 노려 검을 휘둘렀다.
"크윽! 출입증을 가져올 테니까 제발 좀 뵈주라."
청동 가디언들을 상대로 견디다 못한 유한이 애원했지만, 녀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공격했다. 이미 유한을 적으로 간주, 말살하기로 마음먹은 듯.
청동 가디언들에게 위태위태하게 밀려나던 유한은 뒤늦게 도착한 동료들 덕분에 한숨을 돌렸다.
선두로 나선 블랙은 마치 힘자랑을 하듯이 청동 가디언 하나를 번쩍 들어서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청동 가디언은 찌그러진 상태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뒤이어 날아온 오펜의 마법탄에 맞고 박살이 났다.
"지그야 이곳은 우리가 맡을 테니까 년 얼른 연구소 안으로 들어가!"
송코가 그렇게 말했지만, 유한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블랙과 오펜이 분투하여 청동 가디언들올 쓰러트리고 있지만, 쓰러진 만큼의 새로운 청동 가디언들이 땅속에서 계속 튀어나왔다.
"제길, 바닥에 청동 가디언 씨라도 뿌려 두었나"
유한은 투덜거리면서도 연방 틈을 살폈다.
그것은 발리안도 마찬가지.
그는 용안이 싸우는 사이 인벤토리에서 원가를 한 움큼 꺼내어 바닥에 굴렸다.
"베어링 어택(Bearing Attack)!"
발리안의 손에서 떠난 수십 개의 작은 쇠구슬들이 청동 가디언들의 발밑으로 굴러갔다.
쿠당당탕!
구슬을 밟은 청동 가디언들이 휘청거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사방에 깔린 쇠구슬 때문에 다시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하하핫! 이거 의외로 잘 통하는군요!"
베어링 어택.
예전에 발리안이 익힌 대장장이의 공격 스킬로, 쇠구슬을 굴려 상대를 넘어트리는 방식이다.
그리 큰 타격을 주는 것도 아니고, 발리안도 전투를 즐기지 않아 이 스킬의 숨겨진 위력을 모르고 있었다. 단순히 용안을 지원하고자 했을 뿐인데, 의외로 좋은 효과를 보이지 않는가.
발리안은 계속해서 쇠구슬을 굴렸다. 장내에 수백 개의 쇠구슬들이 깔리자 청동 가디언들이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용안 님,전 먼저 가겠습니다."
"뒤는 나에게 맡기세요."
발리안은 청동 가디언들이 넘어져 허우적거리는 사이 연구소 건물로 뛰어갔다. 물론 쇠구슬이 없는 곳을 밟고서 지나갔다.
"저런 스킬이 있었을 줄이야!"
유한은 감탄만 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인벤토리에서 방탄 실드를 꺼내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올라탔다. 마치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것처럼 뒷발올 박차자, 방탄 실드는 쇠구슬이 깔린 땅 위를 미끄러지듯이 나갔다.
그렇게 유한도 청동 가디언들 사이를 뚫고 나갈 수 있었다.
-침입자가 침투했다.
-잡아라!잡아라!
청동 가디언들은 허우적거리면서 쫓아왔다.
먼저 연구소의 철문올 열고 들어간 발리안은 유한이 달려오자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러나 유한은 발로 문올 박차고 들어갔다.
"크엑!"
"거, 치사하게 그러지 맙시다."
안으로 들어온 유한은 철문올 닫고 빗장올 걸어 잠갔다.
밖에서 청동 가디언들이 들어오려는 듯, 철문올 두들겨 댔지만, 단단히 잠긴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제 한숨을 좀 돌리겠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유한은 오래 쉬고 있올 수 없었다. 좀 전에 나가떨어졌던 발리안이 연구소 안쪽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하여간 기운도 좋아요."
투덜거리며 발리안을 쫓아간 유한은 그가 안쪽의 거대한 황금 문 앞에서 꾸물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건 어떻게 여는 거지?"
문앞에선 발리안은 문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높이가 5미터도 훨씬 넘는 크고 육중한 황금 문에는 손잡이도 없었고, 열쇠 구멍도 보이지 않았다.
문틈새로 쇠 지렛대를 집어넣어 보려 했지만, 문틈은 날카로운 칼날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촘촘했다.
유한이 다가와 살펴보았지만, 딱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부수기 위해 망치로 내리치고 암 브레이크를 날려 봤지만, 황금문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이거 대체 어떻게 여는 거야?"
"무조건 안에서 열어주는 구조가 아닐지?"
"그래도 방법이 있을 거라고요."
좀 전만 해도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두 사람은 문을 열기 위해 다시 손을 잡았다.
그들은 각각 황금 문의 좌우를 살펴보았다. 있는 거라곤 좌우의 녹슨 청동 화로와 부서진 쇳조각, 그리고 문 양쪽의 벽에 나 있는 작은 구멍뿐이었다.
"이 구멍이 열쇠 구멍 같은 게 아닐까요?"
"열쇠구멍치곤 너무 굵은데요."
"큰 문이니까 큰 열쇠를 썼겠죠"
발리안은 인벤토리에서 가늘고 긴 쇠꼬챙이를 꺼내 구 멍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러나 속이 텅 비었는지 아무리 쑤셔 봐도 걸리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뭘 어떻게해야 여는 건지...."
유한은 문 옆의 청동 화로를 살펴보았다. 문 옆에 왜 화로같은게 있는지 의문이었다.
꼼꼼히 화로를 살피던 유한은 화로의 뚜껑에 적힌 작은 문구를 발견했다.
지식의 성수를 붓고,기술의 성화를 피워라.
"지식의 성수? 기술의 성화? 단단히 닫힌 화로의 뚜껑을 열어 보자, 안에서 주전자 같이 생긴 용기가 나왔다. 그 용기의 뚜껑은 화로 뚜껑만큼이나 튼튼히 잠겨 있어 열기 무척 힘들었고, 툭 튀어나 온 주둥이는 문 옆의 구멍과 그 크기가 비슷했다.
거기에 주목한 유한은 근처에 나뒹구는 부서진 쇳조각들을 살꼈다. 깨진 조각들을 몇 개 주워 맞춰 보니 파이프 모양이 나타났다.
'연통은 아닌것 같은데....'
뭔가 곰곰이 생각하던 유한은 박수를 쳤다.
그는 곧장 재료와 연장들을 꺼내서 부서진 파이프와 똑같은 물건을 만들었다.
"갑자기 뭘 만드는 겁니까?"
발리안이 다가와 물었다.
"나중에 가르쳐 줄 테니 댁도 얼른 만들어요!"
영문을 몰랐지만, 발리안도 유한을 도와 청동 파이프를 만들었다. 유한은 그렇게 만든 파이프로 석문 옆의 구명과 화로의 주전자 주둥이를 연결시켰다.
"아! 이거...."
발리안도 이제 원가 알겠던지 주먹을 쳤다. 유한은 인벤토리에서 가죽 물통올 꺼내 주전자에 물을 담았다.
예전에 에르젠 퀘스트를 할 때 물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기에, 그 뒤로는 항상 인벤토리에 여분의 물을 지니고 다녔다.
발리안도 유한이 하는 대로 주전자에 물을 담았다. 그리고 그는 유한이 일러 주지 않았음에도, 장작과 부싯돌을 꺼내 화로에 불을 피웠다.
"불을 피워서 주전자 안의 물이 끓으면 수증기가 생기죠."
"그 수증기가 파이프를 통해 구멍으로 들어가고 수증기의 압력이 문 안의 장치를 돌린다?"
"바로 그겁니다!"
두 사람의 말대로 얼마 후, 주전자에서 생겨난 중기가 쉬쉬 소리를 내며 구멍 속으로 홀러 들어갔다.
구멍 속으로 흘러간 수증기는 황금문 안쪽에 있던 실린더에 모이면서 안에 있던 풍차를 돌렸다.
풍차가 돌면서 실린더와 연결되어 있던 톱니바퀴들이 천천히 회전하며 황금문에 매달린 쇠사슬올 잡아당겼다. 그러자 육중한 황금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 얼마 뒤에는 활짝 열렸다.
"나참, 증기 기관 구조라니"
"아마 이것도 어딘가에서 보고 참고했을 겁니다."
유한은 몰랐지만, 드림맥스는 고대 그리스의 해론이라는 사람이 만든 자동문을 참고했다. 유한과 발리안은 나란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시 경쟁 관계가 된 두 사람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빨랐다.
"우와, 이게 다 뭐지?"
황금문을 지난 유한과 발리안 앞에 나타난 광경은 또 다른 별천지였다.
쭉 늘어선 책상 위에는 이름 모를 온갖 연구 자재들이 가득했고, 만들다가 만 기계들이 녹슬고 먼지가 쌓인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한편에 마련된 서가에는 수없이 많은 책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고. 별자리를 그린 벽화가 가득한 천장에는 신인들이 타고온 원반의 모형이 매달려 있었다.
"이 게임 나중에 가면 우주선까지 만들 수 있는 거 아닐까요?"
발리안은 유합이 건넨 농담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는 수천 권의 책들이 소장된 서가들 사이를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바로 붸스트 조건인 황금 기계 도시 의 기술을 얻기 위해서.
"이건가?아님 저건가?"
책들은 어떤 보존 마법이 걸렸는지 하나같이 상태가 좋아보였다.
천체 운행, 원소의 분류, 화학 작용과 기계적 응용.... 어느 것 하나 진지하지 않은 책이 없지만, 이 정도는 노스아크의 드워프들도 소장하고 있는 책들이었다.
아무리 뒤져 봐도 퀘스트에서 원하는 고대 드워프들의 기술서가 보이지 않자 마음 한편이 불안해졌다.
"혹시 다른 곳에 있나?"
그리 생각하던 유한의 눈에 띈 것이 있었다
서가 맞은편 벽에 걸린 초상화들이었다. 황금 기계 도시 지하 연구소의 역대 소장 드워프들이 그려진 초상화 아래에는 그들의 업적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유한은 그중에서 19대 소장이었던 세크투스의 업적을 눈여겨 보았다.
세크투스
재직 : 신인력 1113~1123년.
업적 : 마나의 공명 현상읕 탐구하여. 그림과 문자를 수식과 신호로바꾸어 수정에 이록하는 획기적인 방식을 고안하였다.
'수정에 그림과 문자를 기록한다고?'
컴퓨터의 메모리 칩 비슷한 방식의 저장법을 발명해 낸 모양.
유한이 뭔가를 깨달았을 때, 발리안이 읽고 있던 책을 내팽겨 치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유한은 방금 전에 발리안이 보고 있던 책을 들어 보았다.
그 책의 제목은 '기록의 혁명' 이었고, 저술자는 세크투스였다. 그는 방금 전에 발리안이 보던 내용을 읽어 보았다.
내가 고안한 '세크투스식 입력'은 수백 권에 달하는 지식의 양을 작은 수정 하나에 보관하게 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식이다. 재난으로부터 기록의 유실을 막을 수 있으며 문명의 되보를 방지할 수 있다.
나는 혹시 모를 변란으로부터 문명의 이록을 보존하고자 연구소 도서관 비밀 소장고에 수정들을 남겨.....
'이거로군!'
수백 권의 기록을 담을 수 있는 수정들이야말로 황금 기계 도시의 기술을 모두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세크투스가 남겨 두었다는 수정을 찾아야 한다. 유한은 곧장 연구소 내의 도서관을 찾았다. 황금문의 반대편에 있는 통로로 나가자, 건물의 내부 구역을 알려 주는지도를 발견할수 있었다.
"도서관은 이충인가?"
유한은 위로 올라가는 층계를 찾아 곧장 도서관으로 향했다.
먼저 당도한 발리안에 의해 도서관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유한은 사방으로 쏘다니며 비밀 소장고를 찾는 발리안을 볼 수 있었다.
"여긴가? 아님 이쪽?"
발리안은 벽을 두들겨 보고 책장도 밀어 보며 비밀 소장고를 찾았다. 유한도 뒤질세라 도서관을 뒤지고 다녔다.
도서관을 이 잡듯이 뒤진 두 사람은 마침내 비밀 소장고로 통하는 계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황금으로 만든 작은 방이 나왔다.
으리으리한 황금 소장고 안에는 오색찬란한 빛을 내뿜는 수정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아마 이것들이 세크투스가 남긴 문명의 기록인 모양이다.
아마 수정 안에는 군나르가 찾는 황금 기계 도시의 기술과 고대 드워프의 기록이 가득할 터.
일단 슬쩍 수정을 만진 유한은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했다.
[레코딩 크리스털]
-고대 드워프들이 그림이나 기록, 영상올 저장할 때 사용할 때 사용한 매체. 마나 영사기가 있으면 재생할 수 있다.
"우하하핫! 찾았다!"
드디어 황금 기계 도시의 정수를 찾았다는 마음에 유한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것은 발리안도 마찬 가지였다.
그는 인벤토리에서 포도주와 술잔을 꺼내더니 유한에게 권했다.
"이렇게 좋은 날 술이 빠져서는 안 돼지요."
그러나 유한은 발리안이 주는 술잔을 받아 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발리안은 황금 기계 도시의 기술을 먼저 차지하겠다며 다투지 않았던가.
"내가 왜 댁하고 마셔야 하는데요?"
"하하하, 우리가 경쟁자로서 티격태격했지만 그래도 한 때는 같은 편에 서서 싸웠지 않습니까? 고대 드워프의 기술서를 발굴한 역사적 순간올 축하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은 게임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발리안의 순수한 호의에 유한의 마음이 살짝 끌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술잔을 선뜻 받아 들 수는 없었다.
"난 미성년자인데요."
"나참. 명성이 떨어져 봐야 10밖에 안 떨어집니다. 패널티는 권하는 제가 더 많이 받지요. 그러니까 한 잔하십시오."
"그래도 연장자인 발리안 님이 먼저 드셔야...."
유한은 발리안이 먼저 마시기를 요구했고, 발리안은 순순히 포도주를 술잔에 따라 마셨다.
그가 마시는 것을 확인한 유한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포도주를 냉큼 받아 마셔 버렸다.
-쿠궁! 19세 미만은 술을 마셔선 안 됩니다.
명성을 10 잃었습니다.
경고창이 떴지만, 유한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초보 시절이라면 모를까, 명성이 35,000이 넘는 지금은 10 정도 떨어지는 것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쿠쿵! 마비독에 걸렸습니다. 1시간동안 움직일 수 없습니다.
난데없는 경고 메시지에 유한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독에 중독되었단 말인가. 같이 포도주를 마신 발리안은 저리 멀쩡한데.
발리안은 돌처럼 굳어 버린 유한을 보며 히죽 웃었다.
"후후후, 순진하긴. 술에 독을 탔는가 살필 게 아니라 술잔에 독을 바를 것도 생각해야죠"
즉 유한이 마신 술잔에 미리 독올 발라 놓았다는 소리.
독을 바른술잔.
발리안이 만만치 않은 상대를 처리하기 위해 준비해 둔 회심의 아이템이었다. 보통은 술에 독이 있올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속아 넘어가 버린다.
"크아악! 이 비겁한 새끼!"
좀 전에 놈이 보인 호의에 잠깐이라도 마음을 놓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속은 지그 님이 멍청한 것이지요. 애초에 우리는 경쟁 상대가 아니었습니까."
"당장 이 독을 풀지 않으면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복수하고 말 거야!"
"후후후, 그러시던지요."
그 뒤로 발리안은 유한이 무슨 말이나 욕설을 내뱉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는 비밀 소장고 안에 있는 레코딩 크리스탈들을 모두 자루에 담았다. 그리고 유한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또 봅시다. 제철소를 완성하면 초청장을 보내 드리지요."
"크악! 개자식 거기 안 서나!"
발리안은 유유히 비웃음을 남기고 떠났다. 완전히 그에게 당해버린 유한은 한참동안 캡슐 속에서 펄펄 뛰었다.
"크아악! 내 다시는 그 새끼랑 상종하면 인간이 아니다!"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 버린 유한은 이를 뿌드득 갈아 붙였다.
그동안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발리안이 이렇게 뒤통수를 후릴 줄은 몰랐다.
"내가 이대로 가만있을 줄 알아? 잡아서 아주 작살을 내 주마!"
빼앗긴 수정을 되찾는 건 물론이다. 유한은 일단 동료들에게 귓속말올 보내기로 했다. 도망 친 발리안을 추적하라 이르기 위해서.
-귓속말을 보낼 수 없습니다. 외부와 연락이 불가능합니다.
"무슨 개소릴 하는 거야? 여기가 무슨 무의식의 방이냐?"
과거 청해도에서 데보라에게 잡혔을 때 그랬다. 그때 무의식의 방에 갇혀 귓속말도 쪽지도 보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그때는 기절해서 의식이 다른 세계에 있었던 것이지만, 지금은 멀쩡하지 않은가.
유한은 다시 귓속말을 쳐 보았다. 그러자 조금 전과 약간 다른 경고창이 떠올랐다.
-이 연구소는 외부와의 통신이 허용되어 있지 않습니다. 보안을 위한 강력한 결계가 구축되어 있습니다.
"빌어먹을 그건 NPC만 적용되면 되지 왜 유저까지 적용되어야 하는건데?"
유저를 우롱해도 유분수지. 무슨 이런 개같은 경우가 다 있단 말인가. 투덜거리던 유한은 일단 비밀 소장고에서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이놈의 마비독이 풀려야 음직이든 말든 하지.'
한시간 후, 유한의 몸에 걸려 있던 마비독이 풀렸다. 곧장 나가서 동료들과 연락을 취하기로 결정했지만, 이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발리안이 무슨 수를 써 놓았는지, 비밀 소장고의 문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악! 진짜 돌아 버리겠네!"
펄펄 뛰던 유한은 간신히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침착하자.열 내봤자 득 될 건 하나도 없어.뒤져보면 비밀통로가 나올 거야.'
빠져나갈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이다. 예전에 남바린 영주성 지하에 있는 푸른 새벽 길드의 함정에 빠졌을 때도 그랬지 않는가. 유한은 비밀 소장고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수정이 놓여 있던 진열장까지 일일이 확인했는데. 그럼에도 불구 하고 비밀 통로를 여는 장치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정말 여기 갇힌 거야? 영영 갇혀 있어야 하는 거냐고?'
유한은 절망 어린 나머지 바닥을 북북 긁었다.
그러자 금박이 벗겨지며 뭔가 나타났다. 금박에는 거울처럼 매끄러운 혹요석 석판이 깔려 있었다
'이게 뭐지?'
모습을 드러낸 혹요석 석판은 거울처럼 뭔가 비추고 있었다.
고개를 획 드니 비밀 소장고의 천장이 보였다. 천장에는 지금까지 유한이 제대로 살피지 못한 다양한 도형과 문자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유한은 진열장을 딛고 올라가 천장의 글씨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희열에 들떠 고함을 질렀다.
"크하하핫! 이거다! 이게 진짜였어!!"
발리안이 가져간 수정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드워프들이 원하는 황금 기계 도시의 기술은 아닐거라 생각했다.
유한은 즉시 인벤토리에서 끌과 망치를 꺼내 조심스레 천장의 황금을 한 꺼풀 뜯어내기 시작했다. 마지막 조각을 떼어 냈을 때, 안쪽에서 레코딩 크리스탈이 하나 툭 떨어졌다.
유한이 그것을 받아 든 순간, 효과음과 함께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황금 기계 도시의 기술서를 발굴했습니다. 녹색 수염 일족의 부족장 군나르에게 가져다주고 보상을 받으십시오.
메시지를 확인한 유한은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밤이 늦었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로그아웃 했다.
유한의 뒤통수를 갈기고 수정을 모두 가로챈 발리안은 서둘러 연구소를 빠져나왔다.
마침 들어온 방향과 반대편에 출구가 있었고, 그 출구 끝에는 지상으로 올라갈수 있는 승강기가 있었다.
밖으로 나온 발리안은 귓속말로 용안과 다른 용병 유저들을 유적에서 철수시켰다. 중간에 지그 일행 녀석들이 지그는 어떻게 되었냐며 귓속말로 귀찮게 물었지만, 대충 거짓으로 둘러 댔다.
텔레포트 게이트는 아직 아르폐디아 대륙에만 있기에 서둘러 말론 회랑을 건넌 발리안은 가까운 도시에 들렀다. 그곳에서 그는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해 노스아크의 베르겐으로 단숨에 건너갔다.
"호, 이게 바로 조상님들의 기술서란 말이지?"
노란 수염 일족의 족장은 발리안이 내민 수정들을 바라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그렇습니다."
발리안의 대답에 늙은 드워프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하 드워프에게 마나 영사기를 가져오게 했다.
마나 영사기는 고대에 기술이 사장되어 노스아크에서도 몇 대 남지 않은 귀한 유물이었지만, 선조들의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면 박물관에 고이 모셔 놓은 것이라도 가져와야 했다.
잠시 후 마나 영사기가 대령되자 발리안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수정 하나를 골라 재생했다. 그러나 곧 인상을 일그러트리고 말았다. 영사기에서 낯 뜨거운 장면들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자,잘못 고른 걸 겁니다."
얼굴을 붉힌 발리안은 재빨리 다른 수정을 재생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
"하, 하, 하!"
당황한 발리안은 수정을 손에 잡히는 대로 재생시켜 보았으나 하나같이 야동이나 동물의 왕국같은 쓸데없는 자료들만 들어 있었다. 발리안은 몰랐지만. 그가 가져온 동영상은 세크투스의 개인 소장품이었다. 약간 변태 끼가 있었던 그는 비밀 소장고에 황금 기계 도시의 기술서를 숨기면서 자신이 모은 야동과 개인 수집 자료들을 레코딩 크리스털에 담아 보관했던 것이다.
"이게 뭔가! 감히 날 놀리려는 건가!"
드워프 족장이 화를 내자 발리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에게 밉보이면 제철소를 짓는데 피곤해진다.
"뭐, 뭔가 착오가 있는 듯합니다. 제가 일주일 내로 진짜 기술서를 가져을 테니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어허!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군. 자네는 이제 끝이야!"
그렇게 외친 노란 수염 족장은 등을 돌리고 방에서 나가 버렸다. 그리고 발리안의 눈앞에 암울한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명성이 5.000 떨어졌습니다.
-노란 수염 일족과의 친밀도가 최악이 되었습니다. 1달간 제철소 관련 퀘스트를 받을 수 없습니다.
3연속으로 쏟아진 패널티에 발리안은 비명올 질렀다
"크아악! 이게 무슨!"
이 퀘스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그가 들인 돈과 노력이 얼마이던가. 그런데 실패, 그것도 대실패를 하고 말다니!
'제길, 진열된 수정들이 아니라니. 그럼 진짜는 어디 있단 말이야?'
아무래도 진짜는 비밀 소장고 안에서도 은밀한 장소에 숨겨져 있는 모양.
어쩌면 안에 갇힌 지그가 그것을 손에 넣었올지 모른다.
유한이 비밀 소장고 탈출에 성공해 제철소를 짓는 모습을 떠올리자 발리안은 절로 두 주먹이 쥐어졌다.
"절대 그렇게 되어선 안 되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다!"
그렇게 중얼거린 발리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