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검투 동맹 글로리아 (128/143)

검투 동맹 글로리아

"오! 여기가 레뮤다 대륙.”

말론 회랑을 지난 유한 일행은 레뮤다 대륙 북동쪽에 자리 잡은 도시 '쿠마나'에 도착했다.

레뮤다 대륙의 모델은 잉카 문명과 로마 문명인지, 쿠마나는 이 두 고대 문명의 스타일이 멋지게 조화되어 있었다.

"흐흐흐,. 역시 라틴계 아가씨들의 미모는 세계 최고라니까!"

송코는 사방으로 눈알 굴리기에 바빴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은 다소 외모를 수정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이나 체형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런 것올 생각하면 송코의 말대로 중남미 여성 유저들의 미모는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 맞는 듯했다. 사방에 늘씬한 미녀들 천지였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송코는 물론이고 오펜도 연방 두리번거렸다.

눈 돌리지 않는 사람은 유한뿐이었다. 유한의 마음속은 채린이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 

'나참, 중남미 녀석들은 연애질 하려고 게임하나?'

유한이 그리 생각한 것은 대부분의 중남미 유저들의 차림새가 화려하고 실용성이 떨어져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사방에 커플들이 무성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연인과 포옹을 하고 키스를 나누곤 했다. 도시의 벽면에는 연인들이 새긴 듯한 사랑의 문구들이 잔뜩 있었다.

'아놔, 이딴 걸 듣고 보려고 통역 서비스를 산 건 아닌 데...'

유한은 말론 회랑을 지나자마자 자칭 소리의 요정이라 하는 드림맥스의 사이버 판매원 랭글을 만났다.

랭글은 레뮤다 대륙에서의 원활한 활동을 위해 통역 서비스가 필요하다며 구매를 부추겼다.

스페인-포르투칼어 동시 통역 서비스의 한 달 이용료 는 6.000원. 크게 비싼 건 아니지만, 퀘스트만 끝내고 돌아갈 유한 입장에선 다소 아깝게 여겨졌다.

"망할 드림맥스자식들."

유한과 같은 심정이었던지, 거리의 건물 곳곳에는 레뮤다 대륙을 방문한 한국 유저들이 새긴 글들이 남아 있었다.

-쌍칼준규 : 레뮤다 대륙은 염장 대륙으로 이름을 바꿔라!

-★키라★ :애인 없는 놈은 서러워서 살겠나.

-무적해병대: 통역서비스는 시간정량제로 바꿔라!

-살살이 : 소설 '대대장 이진구' 겜상에서 공유합니다. 갖고싶은 분은 저에게 쪽지 보내주셈~!

-강찬:아놔 불법 스캔 좀 작작해라, 이것들아!

"얼른 갑시다. 횡금 기계 도시까지 갈 길이 머니까."

"천천히 구경하고 가면 안될까?"

송코의 속셈을 간파한 유한은 눈살을 확 찡그렸다.

"퀘스트 끝나면 구경을 하던 여자를 꼬시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일단은 좀 가자고요. 잘못하면 사람들한테 포위당하니까!"

포위당한다는 유한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중남미 유저들은 흔하지 않은 한국 유저들의 등장에, 그것도 신기한 강철 거인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유한 일행을 졸졸 따라오다 못해 주위를 둘러싼 상태였다.

"뭐 포위당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미모의 아가씨들이 알아서 접근해 오는 것을 마다하고 싶지 않은 송코였다. 그러나 이어진 유한의 말에 송코는 마음을 바꿔 먹게 되었다.

"군중 속에 수상한 놈들이 있으니 문제죠. 그런 놈들에게 우리 정체가 드러나서 좋을 게 없다고요."

유한의 말이 맞는지 블랙이 아까부터 한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대다수의 낙천적인 사람들과 달리, 예사롭지 않은 눈매를 하고 따라붙는 놈들이 있었다.

"어떤 놈들인지 몰라도, 단순한 구경꾼이 아닌 건 틀림없다. 후손 말대로 서둘러 가야 한다."

상점에서 레뮤다 대륙의 지도와 몇 가지 아이템을 구입한 일행은 서둘러 쿠마나를 떠났다. 

"아까 봤던 놈들 아직 따라오고 있어?" 

도시 밖으로 나오자. 유한은 블랙에게 추적자의 동태를 물었다. 만약 그들이 계속 따라붙으면 잠복했다가 붙잡을 생각이었다. 무엇 때문에 추적하는지 확실히 알아보기 위해서. 

"아니, 더 이상 쫓아오지 않는군."

사라져서 다행이긴 했지만, 아주 마음을 놓올 수는 없었다.

"대체 뭐하는 놈들이지?"

"도적 유저들이 아닐까? 듣자니 외국인 유저들을 털고 다니는 놈들이 있다던데"

그런 녀석들은 아르페디아 대륙은 물론 다른 대륙에도 존재한다. 지리적 물정이 어두운 유저들을 상대로 인벤토리를 쓰리하고 사기를 치는 비매너가 존재하는 것이다. 

"혹시 발리안의 끄나풀이 아닐까?" 

"뭐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앞으로의 여정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저 낯선 대륙에 왔다거나, 발리안의 방해가 예상되어서만은 아니다.

유한은 쿠마나에서 산 레뮤다 대륙의 지도를 드워프 족장 군나르에게 받은 지도와 대조해 가며 살펴보았다.

북서부 방면에 군나르의 지도와 일치하는 지역이 있었다. 산과 강, 인근에 있는 마을의 위치까지 딱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레뮤다 대륙의 지도에는 황금 기계 도시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즉 유저들의 탐사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소리.

대신 '녹색 죽음의 밀림' 이라고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녹색 죽음의 밀림이라..." 

"아마존밀림같은 건가 보군." 

"황금 기계 도시라는 게 전설의 도시 엘도라도가 모델이 된 모양이야."

쉽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주저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이 게임 속에서 힘든 모험과 역경을 이겨 낸 유한의 마음이었고, 그와 함께 가는 동료들의 마음이었다.

"로이디뉴 님. 추적대가 정보를 보내왔습니다." 

검투사 동맹 글로리아의 길드원이 수장인 로이디뉴에게 보고를 올렸다. 

"목표물은 예상대로 쿠마나에 나타나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역시 그렇군. 지금 붉은 기둥의 숲으로 길드원들을 파견하도록."

붉은 기둥의 숲은 쿠마나에서 치클라요로 오는 길에 있었다.

로이디뉴는 지그라는 소년 대장장이가 발리안이 왔던 길을 그대로 따라올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붉은 기둥 의 숲에 몇을 놓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세뇨르 발리안의 뒤는 계속 추적하고 있겠지?"

로이디뉴의 눈빛은 방금 전 의뢰에 대해 논할 때보다도 더 반짝이고 있었다.

"발리안의 일행인 쉐도우 워커 길드가 녹색 죽음의 밀림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녹색 죽음의 밀림으로? 거기가 그들의 목적지인가?" 

로이디뉴는 이번 의뢰를 맡으면서 여러 가지를 알아보았다.

아직 아르페디아 대륙으로 진출한 중남미 유저의 수가 적어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국어에 능통한 길드원에게 시켜 인터넷에서 발리안과 지그의 정보에 대해 알아보도록 했다.

그래서 그는 발리안뿐만 아니라 지그라는 녀석도 아르페디아에서 꽤 유명한 대장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쉐도우 워커 길드가 던전이나 유적 탐사 전문이라고 했지?"

"길드장인 인다아나정수라는 자가 꽤 수완이 좋다고 합니다."

예전에 운석 쟁탈전에선 큰 활약을 보이지 못했지만, 쉐도우 워커 길드는 이후 다른 의뢰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올렸다.

레기온의 핵심이 된 새로운 마나 콘트롤러 제조법을 발굴한 것도 그들이었다. 그래서 발리안은 쉐도우 워커와 그들의 길드장인 인디아나정수를 계속 신임하고 있었다.

"녹색 죽음의 밀림이라면 꽤 위험한 곳인데...지금까지 들어가서 온전하게 나온 유저들이 없다지 아마?"

"몬스터도 몬스터지만, 밀림 자체가 완전히 미궁과 같으니까요."

그래도 계속 녹색 죽음의 밀림을 탐험하는 유저들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그곳에 금은보화로 가득한 도시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 분명히 뭔가 있긴 있는 모양입니다. 예전에 그곳 에 npc들이 들어간 적이 있는데 그들은 아르패디아 대륙 북부에 산다는 드워프란 종족이었지요."

"호. 나도 들은 적이 있어. 손재주가 좋은 놈들이라지?"

"예. 그들은 하얀 용의 지배를 받는데, 매년 그 몬스터 에게 금은보화를 갖다 바친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석을 가공하는 기술과 금은 제련술도 뛰어나다고..."

드워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로이디뉴는 자신의 감을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다.

아르페디아의 대장장이 발리안이 뭔가 대단한 것올 찾고 있다고. 아니, 명장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발리안이 찾는 것이라면 그냥 대단한 정도가 아닐 것이다. 유니크 급의 아이템이나 보물이 분명했다. 

"뭐 일단은 의뢰받은 일부터 해결하는 게 맞겠지."

그렇게 말한 로이디뉴는 사악한 표정을 지었다. 

"라이벌은 미리미리 처리하는 게 좋으니까."

글로리아에서 예상한 대로 유한 일행은 붉은 기둥의 숲을 지나가고 있었다. 길이 좁고 울통불통했지만, 그래도 녹색 죽음의 숲으로 가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이 숲에 있는 나무의 껍질은 다 붉은색이군."

"그래서 붉은 기둥의 숲이라 불리는 건가?" 

처음에 유한은 붉은 기둥의 숲이라고 해서, 빨간 돌기둥들이 무수히 늘어선 광경을 생각했다.

"나무의 향기도 짙고, 쭉 곧게 자란 게 척 봐도 고급 목재 같네요."

"그래, 우리 교수님이 보면 군침깨나 흘리시겠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길을 가던 유한 일행은 길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몬스터인가 싶어 일행은 모두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나 수풀 속에서 뛰쳐나온 것은 등에 희살을 맞은 미모의 아가씨였다. 유저인 듯 HP가 거의 다 떨어진 그녀는 비틀거리다 송코의 품에 안겼다. 

'이게 왠 떡이냐?'

입이 헤벌쪽 벌어진 송코는 그녀의 등에서 화살을 뽑고 힐링을 걸어 주었다. 

"이봐요, 아가씨! 괜찮습니까?” 

'호들갑은... 진짜 죽는 것도 아니구먼.’ 유한은 오버액션을 보인 아가씨와 송코를 보며 피식 웃었다.

'에스텔라(Estella)' 라는 이름의 아가씨는 잠시 혼란해 하다가, 송코의 손을 잡고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도와주세요. 지금 제 동료들이 습격을 받고 있어요." 

"어딥니까? 당장 구해드리죠!"

"저 쪽 숲속에....."

에스텔라가 숲 속올 가리키자 송코는 뒤도 안 돌아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 손에 메이스와 방패를 들고 씩씩하게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성직자가 아니라 용감한 용사와 같았다.

"쯧쯧. 의욕이 넘치다 못해 폭발하는군."

"자기가 무슨 김요셉인 줄 아나."

송코가 걱정된 일행은 곧장 뒤따라 숲 속으로 들어갔다.

에스델라는 일행을 숲 속에 있는 공터로 안내했다. 사방에 갈대가 무성한 그 자리에는 이 빠진 무기와 부러진 화살. 핏자국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벌써 전멸한 건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오펜은 바람이 슥 갈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그는 블랙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함정이다! 피해요!"

"으응?헉!"

오펜을 따라 뒤를 돌아봤던 블랙은 나무 사이로 커다란 바위가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굵은 쇠사슬에 매달린 바위는 진자처럼 날아와 부딪쳤다. 블랙이 다급하게 팔을 교차시켜 막아 내기는 했지만, 뒷걸음질을 쳐야 했을 만큼 충격은 가볍지 않았다.

그런데 뒷걸음질을 쳤던 블랙의 몸이 땅 속으로 쑥 가라앉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런! 늪이다!"

갈대가 자라난 공터 가운데는 질척한 늪이 숨겨져 있었다.

블랙이 높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이, 주변에서 무장한 유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대 검투사 같은 무장을 한 그들은 유한 일행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놈들이 습격자인가?" 

"아니요. 이들은 제 동료들이에요." 송코의 등 뒤에 있던 에스텔라는 단검을 꺼내 들더니, 송코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HP 1,800 포인트가 깎였습니다.

-10초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난데없는 기습을 당한 송코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에스텔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런 송코를 바라보는 에스텔라는 차가운 조소를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조금 전의 가날프고 연약한 느낌은사라지고 없었다. 

"이제보니 우릴 유인한 거였군."

"호호, 그걸 이제 알았나?"

에스텔라는 글로리아 길드 소속의 여검투사로 길드장인 로이디뉴의 오른팔이었다. 

"너희들에게 악의는 없어. 그러니까 한동안 여기서 얌전히 죽치고 있으라고."

"흥, 웃기지 마라!"

유한은 검을 뽑아 에스텔라에게 휘둘렀다.

가볍게 공격을 피하며 물러난 에스텔라는 동료 검투사 들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선두에 선 검투사들이 투척 무기를 꺼내서 빙글빙글 돌렸다.

가죽끈 양쪽에 돌덩이가 달린 기묘한 투척 무기였다.

"조심해, 저건 볼라(Bola)야."

오펜의 경고에 유한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볼라가 원데?"

"남미 원주민들의 사냥도구인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볼라가 날아왔다. 빙글빙글 회전하며 날아오는 볼라에 제일 먼저 당한 사람은 송코였다.

"우악! 이게 뭐야?"

힐링으로 상처를 회복하던 그는 날아온 볼라에 발이 걸렸다. 가죽끈이 송코의 발목을 휘감고 양쪽의 돌멩이들이 빙글빙글 꼬이더니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바로 저렇게 만드는 거지."

"포획 무기로군."

유한은 이들이 자신들을 죽일 뜻이 없다는 것올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화살이나 다른 살상용 무기를 쏘았을 것이다.

에스텔라도 말하지 않았는가. 한동안 여기서 얌전히 죽치고 있으라고. 죽으면 뒤에 있는 마올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으니 산 채로 잡아 놓으려는 것이다.

나무에 꽁꽁 묶어 놓든 머리만 남기고 땅속에 파묻든 로그아웃을 한 뒤에 재접속을 하더라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누가 순순히 잡힐 줄 알아?" 

"우릴 우습게보지 마시죠!"

유한은 검을 휘둘러 날아오는 볼라들을 잘라 버리고, 오펜은 검투사들을 향해 마법탄을 쏘아 댔다.

당황한 검투시들은 방패로 마법탄을 막으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하지만 글로리아 길드의 검투사들은 이대로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레뮤다 대륙의 검투사는 단순히 치고받고 싸우는 직업이 아니다. 그들은 기사나 전사와 달리 상대를 쓰러트리기 위한 모든 스킬과 병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단검으로 기습을 할 줄도 알았고, 볼라를 던져 상대를 포획할 줄도 알았다. 그리고 포획 도구는 볼라 뿐 만이 아니었다. 

"던져라!"

에스텔라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에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검투사들이 나섰다.

상어 머리처럼 생긴 투구에 비늘 갑옷올 입은 검투사들은 손에 들고 있던 그물을 유한과 오펜에게 집어 던졌다.

유한은 그물을 검으로 자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검투사들이 던진 그물은 쇠사슬로 민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제길 그렇다면 암 브레이크로....'

하지만 그것도 맘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검투사가 쇠 그물을 쑥 잡아당기자 그물이 오므라들어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유한과 오펜은 검투사들의 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흥, 번거롭게 하다니."

"더 번거롭게 해 줄까?"

죄여진 쇠그물 속에서 간신히 손올 놀린 유한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아이템을 집어 들었다.

"그런 작은 망치로 뭘 어쩌겠다고?"

"그건 두고 보면 알지. 천둥은 나의 소리요, 번개는 나의 검이다!"

유한이 집어든 아이템은 뇌제의 홀이었다. 유한이 발동어을 외자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더니, 유한을 얽매고 있던 쇠그물을 단숨에 찢었다.

강력한 전격의 충격파는 주변에 있던 검투사들까지 죄다 날려 보냈다.

"크악, 이 힘은..." 

"다 죽었어, 이 자식들!"

뇌제로 변신한 유한은 검투사들을 향해 다가갔다. 검투사들은 도망치려 했지만, 도망치는 속도보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숲속에서 번개와 굉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번개가 한 번 떨어질 때마다 공터에 경악에 찬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엑! 이건 사기야!"

"오냐. 그래. 사기 유닛 발목 잡은 대가를 톡톡하게 치러 주마!"

훌륭하게 유한 일행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글로리아 길드의 검투사들은 그 대기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뇌제' 라는 중요한 정보를 얻는 데 성공했다.

"임무에 실패했다고?"

로이디뉴는 되려 유한에게 맞아 죽고 돌아온 검투사들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검투사들은 길드장이 화를 낼 거라 생각했지만, 로이디뉴의 태도는 그저 담담할 뿐이었다. 

"이유가 뭔가?"

"상대가 갑자기 번개를 뿌리는 괴물로 변했습니다."

에스텔라의 말에 로이디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길드장의 태도에 에스텔라는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괴물이란 걸 알고 있었으면서 말올 하지 않으셨습니까?"

"뇌제라는 이야긴 들었지만, 어느 정도로 강한지는 몰랐지. 완전히 진 싸움을 뒤집을 정도라면 함부로 건드릴 상대는 아닌 것 같군."

"그럼 의뢰는 포기하는 겁니까?"

"중요한 건 의뢰가 아니야." 

에스텔라는 짓궂게 변히는 로이디뉴의 눈빛을 보았다. 진지하면서 약간 짓궂은 표정을 지을 때 로이디뉴는 매번 기발한 발상을 해내곤 했다.

"아르페디아 대륙에서 정상을 다투는 대장장이들이 우리 대륙에 와서 뭔가를 찾고 있어. 아마도 의뢰비로 지불 할 금괴 백개는 껌처럼 씹고 버릴 만큼 값진 것이겠지."

로이디뉴의 말을 들은 검투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길드장은 의뢰인의 목표물을 가로채려는 모양. 그들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이 레뮤다 대륙은 우리들의 터전이자 놀이터야. 그런 데 다른 대륙에서 온 도둑놈들이 우리 땅에 묻힌 보물을 홈쳐 가려 하고 있어. 이걸 과연 두고 봐야 할까?"

두고 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타 대륙의 명장들이 노리는 것이라면, 굉장한 유니크일 것이 틀림없다. 아마 그것을 차지할 수 있다면 레뮤다 대 륙 최강의 세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꿈꾸지 못했던 해외 진출을 이룰 수 있게 될 지도. 

"하지만 가로채려 해도 우리가 가진 정보가 없습니다." 

에스텔라의 지적대로였다.

지금 황금 기계 도시로 가는 지도는 유한과 발리안만이 갖고 있었다. 그리고 보물의 정체도 알 수 없었다. 뭔지 알아야 중간에 가로채든가 말든가 할 것 아닌가.

"그래, 우리에겐 정보가 없지. 그저 놈들이 녹색 죽음의 밀림으로 가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뭐, 그 정도 에 불과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야.”

거기서 말을 잠시 끊은 로이디뉴는 자신을 바라보는 길드원들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동양 속담에 어부지리(漁父之利)라는 말이 있던데 들어 본 적이 있나?"

"아니, 없습니다."

"그럼 내가 설명할 테니까 잘 들어 봐."

부하들에게 속담에 대해 설명하는 로이디뉴였다. 그는 그 속담 그대로 시행할 생각이었다. 물론 어부가 될 사람은 자신이고. 조개와 학은 유한과 발리안이 될 것 이다.

검투사들을 처리한 유한 일행은 다시 황금 기계 도시로 발걸음을 옮겼다. 늪에 빠졌다가 간신히 기어 올라온 블랙은 연방 투덜거렸다.

"크윽! 아직도 몸 속에 진흙이 남아 있는 것 같군. 옷 속에 들어온 벌레처럼 성가시기 짝이 없어."

"참아. 좀 있으면 강이 나오니까 거기서 씻으면 돼."

유한은 블랙을 다독이곤 송코 쪽을 바라보았다. 송코는 상당히 시무룩한 상태였다. 반한 상대에게 험한 꼴올 당했던데다, 모두를 위험에 빠트려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형,그만 기운좀 차려요."

"지그야, 난 여자들에게 이용만 당하는 신세인가 봐."

예전엔 유나의 꼬드김에 넘어가 플레임 마운트까지 끌려갔고. 거기서 리지스에게 코를 꿰인 이후로 대장간, 철공소의 관리인으로 전락했다.

이번에 아주 마음먹고 타 대륙에 와서 제대로 된 여자 친구를 만들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된통 당하고 말았다.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요, 언젠가 형도 여우 같은 여자들 말고 토끼같이 예쁘고 착한 여자를 만날 수 있 을 거예요."

"그럴까?"

"그럼요. 저나 엔스를 보세요."

그러나 송코의 기분은 풀리기는커녕 더 나빠졌다. 일행이 치클라요라는 도시에 당도했을 때 전날 자신들을 속였던 에스텔라와 검투사들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이 비열한놈들, 이번엔 내가 네놈들을 응징해 주마!"

붉은 기둥의 숲에서는 늪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블랙이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에스텔라 뒤에 있던 남자가 손을 가로저으며 앞 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바로 글로리아의 길드장 로이디뉴였다. 

"진정하십시오. 우린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믿어요? 당신들 발리안에게 고용된 거 아닙니까?"

유한은 분명 이들이 발리안에게 고용되었을 거라 생각 했다. 아니면 숲에서 악의가 없다느니, 죽치고 있으라느니 하는 말을 할 리가 없다.

"뭐 그에게 의뢰를 받긴 했습니다. 아르페디아에서 온 대장장이를 공격하라고. 그 대가로 금괴 백 개를 주겠다 고했습니다."

"역시 그랬군.”

"지금 그렇게 실토히는 이유가 뭡니까? 오펜은 이들이 순순히 다가와 자백하는 의도가 궁금했다.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닌지?

"솔직히 말해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시죠.”

"어제 저희 길드의 정예 검투사들이 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그 님의 발목을 잡느니, 지그 님이 발리안 님을 따라잡게 만드는 게 더 이득이라 생각했습니다."

뇌제가 얼마나 강한지는 어제의 일로 알았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지그 패거리의 앞길을 막기보다는 의뢰를 역으로 받는 것은 어떨까?

로이디뉴의 탐욕스런 말과 표정에 기가 찬 나머지, 유한은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뻔뻔해도 정도 가 있지, 이건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먼저 출발한 사람을 어떻게 따라잡는단 말입니까?"

"먼저 간 사람의 발목올 잡으면 될 일이지요. 녹색 죽음의 밀림에는 외부인에게 적대적인 원주민 npc들이 가득합니다. 저희가 먼저 가서 그들에게 성역을 더럽힐 자들이 온다고 알리면...."

과연 그런 방법이라면 발리안의 행보를 어느 정도 늦출 수 있올 것이다. 그사이 전력올 다해 나간다면 발리안을 따라잡는 일도 불가능하진 않을 터.

"또 저희는 발리안 일행이 간 길보다 더 빠른 지름길을 알고 있습니다."

로이디뉴의 말에 유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혜택을 보는 만큼 의뢰인을 배신한 당신들에게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겠네요"

"후후후, 계산이 빠르시군요."

로이디뉴는 손가락을 3개 펼쳐 보였다. "발리안 님이 제시한 금괴의 딱 세 배만 주시면 됩니다. 의뢰를 포기한 위약금으로 둘, 그리고 우리가 발리안 님의 발목을 잡을 대가로 하나입니다. 

그만한 가치의 아이템을 주셔도 무방합니다."

'흠, 금괴 삼백 개라....'

90만 골드를 달리는 건데 현재 유한의 입장에선 그리 많은 액수가 아니었다. 틈틈이 무구를 만들기 위해 소지한 에르젠 합금을 처분해도 그만한 액수는 나고도 남으니까.

그런데 유한이 결정을 내리려 할 때 반대하며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지그야, 거절해. 저 사람들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리 말한 것은 송코였다. 그는 미안한 감정 없이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스텔라에게 실망했다.

"후손, 나도 반대다.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소인배들을 신용해선 안 된다."

"맞아, 지름길로 데려다 준다면서 엉뚱한 곳으로 안내 할수도있잖아."

블랙과 오펜 역시 반대하고 나섰다. 유한도 그들의 우려를 충분히 이해했다. 그러나 로이디뉴의 제안은 너무나 솔깃한 것이라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들은 어쩔지 몰라도 유한에게는 누가 먼저 제철소를 짓는가 하는 명예가 달려 있었다. 

"정말 약속할 수 있습니까?"

"성모 마리아께 맹세코 당신과의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성모님께 맹세 안 해도 좋으니 계약서나 씁시다." 

유한은 거래를 할 때 쓰는 전자 계약서를 꺼냈다. 믿을 만한 사람을 상대론 사용할 필요가 없지만, 안면도 없었고, 크게 신용도 할 수 없는 로이디뉴를 상대론 적격인 물건이었다. 유한과 로이디뉴가 한글과 스페인어로 쓴 계약서의 내

용은 이러했다.

글로리아 깅드는 3일 안에 발리안 일행을 따라잡도록 지그 파티를 안내한다.

의뢰가 성공했을 때 지그 파티는 글로리아 길드에 금괴 300개 혹은 그에 해당하는 가치의 아이템을 지불한다. 의뢰가 실패했을 때. 글로리아깉드는 지그 파티에게 의뢰금의 2배에 해당하는 위약금 혹은 그만한 가치의 아이템을 지불한다.

그렇게 적힌 계약서에 유한과 로이디뉴는 서명했다. 글로리아 길드와의 협력에 회의적이던 송코나, 블랙, 오팬도 이렇게 전자 문서로 명시하자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한은 서명을 했어도 상대에게 단단히 엄포를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만약 그쪽에서 패널티를 감수하고 날 배신한다면 그 날로 글로리아 길드는 레뮤다 대륙에서 사라지게 될 겁니다."

지그 철공소가 가진 힘을 똑똑히 보여 줄 생각이었다. 

"후후후, 걱정 마십시오.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다짐하는 로이디뉴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지그가 발리안을 따라잡올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었다. 계약서의 내용을 절대 위반할 생각은 없었다.

'중요한 건 그 뒤의 일이지.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후후후, 동양엔 정말 재미난 속담이 많다니까.'

슬쩍 떠오르는 음흉한 웃음을 로이디뉴는 밝은 표정으로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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