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레뮤다 대륙으로 (127/143)

레뮤다 대륙으로

레뮤다 대륙은 작년 대규모 업데이트 이후 아르페디아 대륙 남서쪽에 나타난 대륙으로, 중남미 유저들의 터전이다.

타 대륙에 비해, 레뮤다 대륙은 아르페디아 대륙과 교류가 많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르페디아와 레뮤다 대륙의 끄트머리가 살짝 닿아 있는 말론 회랑이 대륙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거기엔 고레벨의 몬스터들이 득실거려 웬만한 유저가 아니면 오갈 수 없었다.

최가장 길드에선 항로를 개척해 레뮤다 대륙으로 가려 했지만, 그것은 실패로 끝났다. 레뮤다 대륙에는 항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항구가 없다니.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긴가?"

블랙의 물음에 유한은 인터넷에서 검색한 레뮤다 대륙 의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대륙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대륙 주변부가 모두 깎아지는 절벽이라 정박은커녕 난파되지 않는 게 다행이라 하더군."

덕분에 최가장 길드의 탐사선은 레뮤다 대륙을 한 바퀴 빙글 돌고 말았다고. 

"거 참 기이한 대륙이군."

블랙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흥미 있다는 눈빛을 보였다. 옆에서 곰곰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송코가 의아하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그래도 하늘을 통해 갈수는 있을텐데?"

"최정예 공중 몬스터가 늘어나서 쉽지 않대요. 더구나 우린 기구를 탈수 없는 멤버도 있고." 

"하긴..."

송코는 짐마차와 나란히 걸어가는 블랙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유저 10명분의 육중한 무게를 자랑하는 블랙은 기구는 물론 오펜의 부유 마법으로도 띄울 수 없었다.

결국 일행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육로뿐이었다.

"자. 여기서부터 말론 회랑입니다.”

“이야, 무척 험준한데?"

송코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연방 혀를 내둘렀다.

말론 회랑은 두 대륙의 지협 가운데 난 통로로, 고지대의 눈 덮인 산맥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길이 어찌나 좁은지, 마차 두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유한 일행은 짐마차를 소환 해제 하고 걸어가기로 했다.

"소문하고 달리 몬스터가 많지 않은걸?"

"그러게. 왕래하는 사람들도 많고."

그나마 나타나는 몬스터들은 길목 길목에 죽치고 있는 유저들에게 처리되었다.

그렇게 순조롭게 나가던 유한은 중간에 길을 가로막은 높다란 관문을 보았다. 상인과 전사 등, 레뮤다 대륙으로 가는 유저들은 관문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통행세를 지불하고 지나갔다.

그런데, 얼핏 지불하는 통행세가 적잖아 보였다.

유한은 옆을 지나는 상인 유저를 붙들었다.

"말 좀 묻겠습니다. 저기 통행세가 얼만가요?"

"초행인가 보군요. 여기 관문을 지나려면 최소 만 골드를 줘야 합니다." 

"뭐라고요?"

무슨 통행세가 만 골드씩 한단 말인가. 만 골드면 상당히 쓸 만한 검이나 방어구를 살 수 있는 가격. 유한은 상인에게 자세한 사정을 물어보았다. 

"래뮤다 대륙에서 대박을 터트린 유저들이 많아지니, 근래에 아르마달이라는 길드에서'이곳에 관문을 쌓고 통행세를 받기 시작했죠. 그네들이 몬스터까지 청소해 주기 때문에 왕래가 훨씬 수월해졌답니다."

군데군데 죽치고 리젠되는 몬스터를 잡는 유저들은 관문을 차지한 길드의 길드원들이었던 모양. 

"그런데 아르마달 길드라고요?" 

유한은 길드의 이름에 주목했다. 아르마달 길드라면 예전에 노스아크에서 수정 광산올 차지하고 수정의 시세를 조작하던 놈들이었다. 소위 칭칭이라 불리는 중국인들을 대거 고용하여 작업장을 운영하는.

"안전하게 오갈 수 있게 되긴 했지만, 아무래도 통행세가 너무 비싸죠. 그래서 웬만한 유저들은 통행에 엄두를 못내지요"

상인의 말대로 통행료를 지불하고 가는 유저들은 대부분 돈 꽤나 있어 보이는 이들이었다. 돈이 모자라는 유저들은 사정을 해도 봐주지 않았다.

"다른 길은 없습니까?"

"글째요, 몇몇 사람들이 관문올 우회하려고 산올 넘기도 했지만..."

대부분 산이 너무 험하고 가팔라서 포기해 버렸단다. 거기다 눈사태를 만나기라도 하면 곰짝없이 생매장당하기 때문에 선호하지 않는다고.

"하늘로 가기도 힘들죠. 공중에서 비행 몬스터를 만나는 것도 그렇지만, 산 사이를 흐르는 기류에 휘말리면 곧장 추락하고 만답니다."

결국은 돈을 내고 가는 방법뿐.

유한은 터무니없이 비싼 통행료가 불만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서둘러 레뮤다 대륙에 가는 것이 중요 하니까.

더구나 예전과 달리 자신은 갑부급의 유저가 아닌가.

일인당 만 골드의 통행료는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었다. 다만 그 통행료를 받아먹는 자들이 맘에 들지 않을 뿐이다.

'망할 자식들, 수정 광산에서 물 먹으니까 여기 와서 이런다 이거지?'

나중에 블랙 아이언 군단을 끌고 와 손봐주기로 결심한 유한은 관문 쪽으로 다가갔다.

"멈추시오. 통행료를 지불하지 않으면 관문을 통과할 수 없소."

"통행료 낼 거거든요."

관문을 지키고 있던 수문장은 후퍼라는 유저로, 예전에 수정 광산의 책임자였다.

후퍼는 지금 다가오는 이가 예전에 자신들을 물먹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당시의 일은 수정 광산을 노린 골드러시 상인 연합의 짓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한도 그때 일은 아르마달 길드에서 모를 거라 생각했다. 자신은 철저히 배후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후퍼는 검을 빼 들더니 유한의 통행을 가로막았다.

"정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통행 금지요."

"뭐라고? 왜 나만 안 된다는 겁니까?"

혹시 그때 배후에서 일을 꾸민 것이 들통 나기라도 한 것일까?

그러나 다행히 그것은 아니었다.

"대장장이의 통행을 막으라는 길드장의 엄명이 있었다."

후퍼의 설명에 의하면 다른 직종들은 다 통과가 되는데 대장장이만 안 된단다.

"뭐? 그런 법이 어딨어? 길드장 나오라고 그래!"

"길드장님은 지금 접속을 하지 않으셨소. 뭐 있다 해도 만나진 않으실 테지만." 

"뭐라고? 이것들이 진짜!"

유한이 발끈한 순간, 사방에서 철컥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주변은 아르마달 길드원들에게 포위당했다. 거기다 성벽과 주변 방어탑에 배치된 npc 병사들은 석궁과 캐터필드를 이쪽으로 겨냥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그대로 고슴도치가 될 형편. 

"후후, 거기 있는 블랙 아이언을 믿나 본데, 이 관문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소."

후퍼는 슬찍 뒤를 가리켰다. 그러자 관문의 거대한 철문이 열리며 거대한 강철 골렘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바로 발리안 철공소의 레기온이었다. 그것도 신형인 레기온!

"얌전히 물러나는 게 신상에 좋을 거요. 안 그러면 피떡이 될 테니까."

"뭐라고? 짐의 앞에서 감히 저깟 덩치만 큰 쇳덩어리를 갖고 협박하는 것이냐!"

후퍼의 엄포에 블랙이 발끈하고 나섰다. 그러나 유한은 그런 블랙을 말렸다. 블랙의 실력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싸워서 좋올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좋아, 물러나 주지. 하지만 지그 철공소의 주인인 나를 이렇게 쫓아낸 것을 후회하게 될 거야."

"훗, 후회할 일 없으니 얼른 사라지라고." 

유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후퍼는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그런 후퍼의 태도에 블랙은 분통을 터트렸지만, 유한은 그를 말리며 그자리에서 물러났다. 바쁜 상황이지만, 지금은 한 발 물러날 때였다.

"크악! 왜 말린 거냐. 후손!"

유한이 그냥 관문에서 물러난 것에 화가 난 블랙은 펄펄뛰었다.

"너도 원통해 하지 않았나! 날 믿지 못하는 건가! 내가 그 쇳덩이보다 못하다고 보는가?"

마음만 먹으면 그깟 관문은 단숨에 점령할 수 있다 여긴 블랙이 있다. 그러나 그와 달리 유한은 신중했다.

"그리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니야. 대장장이의 통행이 금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봐야 해."

"그래, 아무래도 이건 발리안 쪽에서 선수를 친 것 같아."

오펜이 유한을 거들고 나섰다. 이미 그는 출발하기 전에 자세한 상황올 전해 들었기에 이 일의 배후에 발리안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발리안 정도면 지그가 퀘스트를 받은 사실을 알고 있올 테니, 돈이든 뭐든 아르마달 길드장을 구워삶았을 거라고.

"분명 황금 기계 도시를 독점하기 위해 지그의 통행올 막으려는 거야. 대장장이 유저들 모두를 통행금지 시킨 것은 배후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감추려는 얄팍한 수에 불과해.”

"그래, 거기다 그놈들은 신형 레기온도 보유하고 있었어."

송코의 지적은 유한이나 오펜도 생각하던 바였다. 레기온표는 신품이라 아직 많은 수가 판매되지 않았다. 그런 물건을 이 변방의 중소 길드에서 가지고 있는 게 이상했다.

블랙 아이언에 대해 알고 있고 지그 철공소의 주인인 유한이 직접 경고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수문장이 코웃음을 친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배후에 발리안이 있다는 증거야."

유한의 말에 송코가 물었다.

"그럼 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관문올 넘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요."

일행은 혹시 숨겨진 길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해서 주변을 샅샅이 뒤져 보았다.

그러나 길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산을 넘기 위해서 는 암벽 등반올 각오해야 했고, 거센 기류 때문에 기구나 부유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어차피 블랙 때문에 날아갈 수도 없지만. 

'젠장, 아스탄을 불러다가 관문을 확 없애 달라고 할까?' 

아크위저드 아스란의 광역 마법이라면 저깟 관문쯤은 무너트리고도 남을 터.

그러나 지금 아스란은 바빴다. 한때 철십자 길드에 대항해 손을 잡았던 B.O.B 길드와 다크나이트 길드가 지난 번 전쟁으로 획득한 마노스 제국의 이권을 두고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란이 B.O.B 길드에 힘을 보태 주러 간 상황이기에, 현재 그를 불러내는건 쉽지 않았다.

'다이노스 왕국에 도움을 청해? 아냐, 걔들도 지금 너무 멀리 있어.'

그들을 불러오려면 시간이 걸렸다.

"지그야,이것 좀 봐."

고민하고 있는 유한에게로 오펜이 달려왔다.

그는 근방에서 주운 돌을 유한에게 보여 주었다. 유한은 뭔가 싶어 살펴봤지만, 아무 쓸모없는 암석에 불과했다.

"이게 뭐가 어떻다고?"

"잘 봐. 이 돌멩이는 이 근방에서 볼수 있는 돌이 아니야."

오펜의 말대로였다. 근방에 있는 돌들은 검은빛올 띠고 있었지만, 지금오펜이 들고 온 돌은 청회색 빛깔이었다.

"거기다 뒷면에 곡괭이나 삽으로 찍은 흔적이 있어."

"그렇다면 이걸... 누가 파냈디는 건가?"

"누군가 땅굴을 파고 있는 게 아닐까? 관문을 우회하는 용도의."

가능성이 충분했다.

관문 주위에 광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심심해서 돌맹이에 곡괭이 자국을 낸 것도 아닐 테니까.

유한은 당장 일행과 함께 오펜이 돌을 주워온 곳으로 가보았다.

얼마쯤 몸을 숨기고 가만히 그 장소를 지켜보고 있자, 웬 커다란 가방을 짊어진 소년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살펴보던 소년은 가방에서 돌올

꺼내 쏟아 버리고는 슬그머니 그곳을 떠났다. 

"쫓아가보자"

일행은 몰래 소년을 따라가 보았다. 삐죽한 바위들이 솟구친 절벽에서 소년의 모습이 사라졌다. 소년이 사라진 곳을 살펴보던 일행은 주변 바위들과 비슷한 색의 천막을 발견했다.

워낙에 위장이 교묘해서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못 알아 보았을 정도.

"당신들 뭐야?"

유한 일행이 천막 가까이 접근했을 때였다. 갑자기 바위틈에서 유저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저마다 활과 창칼을 든 그들은 유한 일행을 적대적으로 바라보았다. 

"아르마달 길드원인가?"

"아뇨, 그 우라질 놈들에게 쫓겨난 대장장이올시다."

유한의 말에 그들 중에 몇몇이 유한을 아는 척했다. 

"저사람지그잖아."

"그러게. 뇌제에다 지그 철공소의 사장인." 

"내 친구가 지그 철공소에서 일하는데......."

아르마달 길드와 관련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곧장 무기를 내렸다. 그들의 리더로 보이는 '레이가르딘' 이란 도적 유저가 유한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남의 눈올 피할 일을 하는지라."

"알고 있습니다. 땅굴을 파고 계시죠?"

"하하, 아셨습니까?"

레이가르딘은 유한을 천막 안으로 안내했다. 오펜과 블랙, 송코가 함께 가려 했지만 유저들이 막았다.

유한은 천막 안에 있는 땅굴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지상에서 깊숙이 파 들어간 땅굴은 좁았고,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높이도 낮았다.

레이가르딘은 땅굴을 안내하면서 굴착을 시작한 사연을 이야기했다.

"아르마달 길드 놈들이 너무 통행료를 비싸게 받아서 땅굴을 파기로 작정했죠. 광부 유저들을 고용해서 여기서 보름동안 삽질을 했습니다. 그동안 아르마달 놈들의 눈을 피하느라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지요."

레이가르딘은 땅굴을 파기로 한 유저들이 뽑은 대표였다.

"그런데 얼마까지 팠습니까?"

유한이 가장 궁금한 것은 그것이었다. 잘하면 자신도 이 통로를 이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

"관문 아래까지 파들어 갔어요. 한 일주일만 더 있으면 반대편으로 뚫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레이가르딘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땅굴 안쪽에서

낭패 어린 비명 소리가 터져 왔다. 

"아악! 제기랄!"

"무슨 일이야?"

레이가르딘은 안쪽에서 나오는 광부 유저를 붙들고 물었다.

체념한 듯 어깨를 늘어트린 광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틀렸어. 지금까지 한 게 죄다 물거품이 되었어."

"무슨 말이냐니까?"

"암벽에서 물이 새 나오더라고. 제길! 하필이면 지하수가 있는 지층이 나올게 뭐야."

더 작업을 하다간 모두가 익사당할 판. 그래서 광부들은 작업을 중단했단다. 

"다른 쪽으로 우회해서 굴착할 순 없어?"

"그렇게 하면 시간이 많이 걸려. 게다가 작업을 중단했다 해도 흘러나오는 물의 양이 꽤 많아. 우회고 뭐고 얼마 안있으면 땅굴이 지하수로 꽉 차버릴거야."

그 말을 들은 레이가르딘은 한숨을 폭 쉬었다. 작정을 하고 유저들의 지원을 받아 시작한 일인데 완전히 물거품이 되다니. 

"휴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나."

레이가르딘이 한숨을 터트린 것과 다르게 유한은 눈빛을 번득였다.

"잠깐, 지금 관문 아래쪽까지 팠다고 그랬죠? 거기서 지하수를 만났다고 했습니까?"

"예. 그런데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유한의 의미심장한 말에 레이가르딘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누군가. 지그 칠공소의 주인이다. 단순한 생산직 유저가 아니라 해외 거대 길드들의 침략을 물리친 적이 있는 상당한 거물이다. 그런 그가 방법이 있다고 하니 진짜 될 것만 같았다. 

"그 방법이 뭡니까?" 

"그건..."

유한은 자신이 생각한 계획을 레이가르딘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제대로 운이 따른다면 현재의 고착 상황올 단숨에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지그야, 뭐 만드냐?"

유한이 짐마차를 소환해 뭔가 뚝딱이고 있자 송코가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시계를 만들어요." 

"시계? 시계를 뭣 하러?"

송코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유한이 땅굴을 빨리 파는 기계나 도구를 만들고 있는 줄 알았다. 

"다 쓸모가 있죠. 형, 거기 부싯돌 좀 갖다 줄래요?"

"부싯돌?"

송코는 바로 옆에 놓여 있던 부싯돌을 유한에게 건네주었다.

시계 부품에 부싯돌이 들어가던가? 의문스러웠던 송코지만 유한이 알아서 할 것이라 믿었다.

"근데 천막 안에서 저 친구들이랑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야? 땅굴은 더 이상 안 파는 거야?"

송코는 천막을 들락거리는 광부 유저들을 바라보았다. 광부들은 일체의 굴착 작업을 중단한 채 땅굴에 고인 물을 퍼내는 작업만 하고 있었다. 

"후후후,두고 보면 알아요."

유한이 시계를 거의 완성시켰을 때였다. 유한의 부탁으로 아이템을 사러 갔던 레이가르딘이 돌아왔다. 

"지그 님, 알려 주셨던 아이템을 사왔습니다."

"빨리 갔다 왔네요. 혹시 비싸지 않았습니까?" 

"후후후, 말론 회랑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하니까 상인 유저들이 거저 가져가라던데요."

레이가르딘이 갖고 온 것은 역청이었다. 손에 묻어나는 끈적한 역청을 보고 송코가 말했다.

"이걸로 물이 새는곳을 막으려는 거야?"

역청은 방수 재료로 쓰인다. 역청으로 물이 새는 곳올 막고 다른 지층으로 우회 통로를 뚫으려는 건 아닌지?

그렇게 생각한 송코였지만, 유한은 고개를 저었다.

"송코 형, 이걸 얌전하게 쓸 제가 아니라고요.”

"웅? 얌전하게 안 쓴다고?"

송코가 궁금해 했지만,유한은 곧 있으면 알게 된다며 설명해 주지 않았다.

유한은 역청을 원래 용도로 시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역청이 든 통에 초열탄을 집어넣고, 잘게 부순 초열탄 가루를 완성된 시계에 넣고 혼들었다.

그리곤 시계태엽과 바늘을 돌려 시간을 맞추고 역청이 든 통에 같이 집어넣었다.

-엉성한 폭탄을 만들었습니다. 위력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스킬 경험치를 100 받았습니다.

솜씨가 1올랐습니다.

유한은 완성된 폭탄을 광부에게 건네주고 땅굴 제일 안쪽에 놓아둘 것올 지시했다.

"폭탄이라니? 너 설마관문을 날려 버릴 생각이야?" 

그제야 유한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게 된 송코가 놀라물었다. 

"후후, 물론이죠, 송코 형."

자신을 물 먹인 놈들은 절대 고이 두지 않는 것이 유한의 성격이었다. 그래서 유한은 실패한 땅굴을 이용해 관문을 무너트리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역청이 터지는 정도로 관문이 내려앉을까?" 

역청의 폭발력은 송코도 지난번 철공소 화재 사건 때 본 바 있었다. 하지만 그게 튼튼한 관문을 무너트릴 정도는 아니라 판단했다. 아무리 화력이 좋은 초열탄을 섞어 넣었다하더라도.

"차라리 철공소에 있는 카프한테 달라고 하지 그랬어. 카프라면 화약이나 폭약을 만들 줄 알 텐데.”

유한의 동창생이나 마찬가지인 대장장이 카프는 웨스턴에서 수행한 건스미스였다. 

"뭐, 이 방법이 실패하면 고려해 보죠."

"고려해 본다고? 그럼 이걸로도충분하다 이거야?"

"생각대로 잘만 된다면요."

밖에서 유한 일행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땅굴 끝에 놓인 역청통 속에선 시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겹쳐진 순간. 정오를 알리는 종을 치기 위해 톱니바퀴가 회전했다. 그러나 시계는 종을 치는 대신 유한이 장치한 부싯돌을 때렸다.

첫 번째, 두 번째로 튀긴 부싯돌의 불꽃은 점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세 번째로 튀긴 부싯돌의 불꽃은 시계속에 흩날리던 초열탄 가루에 불을 지폈다.

좁은 공간에서 터진 불꽃의 폭발은 시계의 틈새로 빠져 나가 역청에 옮겨 불었다. 끈적한 역청은 뜨겁게 달아오르며 발화했고, 역청 속에 섞여 있던 초열탄도 연이어 발화했다.

콰아아앙!

땅 밑에서 육중하고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터져 나온 폭발의 화염은 땅굴 입구를 가리고 있던 천막을 한순 간에 태워 없앴다.

그 화끈한 화염을 보고 유한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았어!이대로 터져라!"

좁은 땅굴 속에서 억눌린 상태로 터진 폭발은 지하수층을 아슬아슬하게 막고 있던 벽을 뒤흔들었다.

벽에 굵은 금이 가고 연이어 그 틈으로 거센 물줄기가 새어나왔다. 그 물줄기는 점점 굵어지며 이내 벽올 완전히 무너트렸다.

그렇게 가로막고 있던 벽이 사라지자, 억눌려 있던 수압은 한꺼번에 터져 올랐다.

"저게 대체 뭐야?"

관문에 있던 아르마달 길드원들은 갑작스런 사태에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갑자기 어디선가 폭음이 울리더니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화염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물기둥이 터지는 게 아닌가. 

"뭔가 수상하군. 당장 정찰대를 파견해서 알아봐."

"옙!"

뭔가 불길함을 느낀 후퍼는 당장 조사를 명령했다. 그러나 정찰대가 출발하기 전에 사단이 일어나고 말았다. 땅밑에서 괴이한 소리가 울리더니, 바닥이 거미줄처럼 굵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무슨!" 

"지진이다!"

"으아아악!"

당황한 후퍼는 비명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관문 좌우에 배치되어 있던 방어탑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뭔가 기우뚱한다 싶더니, 간신히 세워 놓은 수수깡처럼 넘어가 버렸다.

그리고 철벽같이 튼튼한 관문의 성벽도 밑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후퍼나 아르마달 길드원들은 알지 못했지만, 관문 아래 에는 적잖게 지하수가 고여 있었다.

관문의 무게가 더해진 무거운 지층이 지하수를 짓누르고 있는 가운데, 유한이 일으킨 폭발로 지하수가 땅굴올 통해 빠져나갔고. 이후 땅 속이 텅 비게 되면서 지반이 내려앉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그 지반 위에 세워져 있던 관문은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으악!사람 살려!"

"꿰에엑!"

관문 안에 있던 아르마달 길드원들은 놀란 개구리들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모두들 갑작스런 지진에 어쩔 줄을 몰랐다. 피하려 했지만, 그들이 피하는 속도보다도 땅이 꺼지고 성벽이 무너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발리안에게 얻은 막강한 레기온도 이 상황에선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 채, 무너지는 땅속으로 빨려 내려갔다.

"우와! 관문이 무너졌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캬하하하! 꼴좋다 아르마달 길드 놈들!"

레이가르딘과 그의 동료들은 폭삭 무너지는 관문을 보며 연방 만세를 불렀다. 그들의 환호성은 이어서 유한에게 쏟아졌다. 

"명장 지그 만세!"

"악을 퇴치한 영웅 만세!"

"지그오빠알라뷰!”

한동안 환호를 받은 유한은 일행과 함께 무너진 관문을 넘었다.

폐허 속에 생매장당한 아르마달 길드원들은 더 이상 누구에게도 통행료를 받을 수 없었다.

레뮤다 대륙북부 알데카 산맥. 황금 기계 도시로 가던 중에 '콘돌 전사의 요새' 라는 곳에서 쉬고 있던 발리안은 예상 밖의 비보를 접했다. 

"뭐라고요? 지그가 말론 회랑의 관문을 넘었단 말입니까?"

"그게... 갑작스런 지진에 관문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럴 수가!"

아르페디아에서 오는 대장장이의 통행을 막아라.

아르마달 길드에 막대한 돈을 주고 그렇게 사주하긴 했지만, 발리안도 아르마달 길드가 유한의 행보를 완전히 막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은 벌어 줄 거라 생각했다.자신이 황금 기계 도시에 도착하고 기술을 발굴할 시간을.

그러나 아르마달 길드는 채 하루도 버티지 못했다.

"훗, 갑작스런 지진이라니. 운이 좋군요, 지그 님은."

발리안은 설마 그 지진을 유한이 일으켰을 거라곤 생각도 못하고 그저 유한의 운이 좋았을 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접니다. 남자의 승리는 운보다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스스로를 노력하는 남자라 생각하는 발리안은 자신이 아르페디아 최초의 제철소를 세울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발리안의 노력은 불순했다. 그리고 비겁했다.

"지그 님을 저리 둬선 곤란하군요. 아무래도 따로 처리 할 만한 사람을 고용해 봐야겠습니다. 혹시 이 근방에 쓸 만한 사람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로이디뉴라는 이름의 초고렙 유저가 있습니다. 직업은 검투사(Gladiator). 검투사 길드 '글로리아' 의 수장입니다. 중남미 유저들 중 세번째로 강한 사람이고. 이걸 특히 좋아한답니다." 

전령은 엄지와 검지를 모아 동그랗게 만들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안 발리안은 만족한 미소를 띠었다. 전령이 참으로 부릴 만한 사람을 알아 온 것이다. 

"좋습니다. 당장 그에게 가 보도록 하지요."

콘돌 전사의 요새를 떠난 발리안은 글로리아 길드의 본부가 있다는 치클라요라는 도시로 떠났다.

npc와 유저를 포함해 인구 10만의 도시 치클라요의 중앙에는 원형 검투장이 있었는데, 바로 그곳이 글로리아의 본부였다. 

"당신이 날 보자고 한 코레아노인가"

"그렇소. 세뇨르 로이디뉴."

발리안은 레뮤다 대륙에 들어온 직후 통역 서비스를 구매했기에 로이디뉴와 대화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중요한 건 대화나 협상보다 로이디뉴가 어느 정도의 인물인가 하는 점.

로이디뉴는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갈색 피부의 호남으로 겉보기에는 그다지 강해 보이지 않았다.

직업이 검투사라고 해서 발리안은 그가 우락부락한 체격을 가진 줄만 알았다. 그러나 발리안은 겉보기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눈빛이다. 이자의 눈빛은 영민해 보여. 아마도 힘보다 지혜로 싸우는 타입이겠지'

아무래도 그런 스타일의 전사가 지그의 발목올 잡는데 더 쓸만하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뭐요?"

아르페디아에서 날 쫓아오는 숙적이 있습니다. 그자의 발목을 좀 잡아 주십시오. 사례는 톡톡히 하겠습니다." 

"숙적의 이름이?"

"대장장이 지그라고 합니다."

발리안은 수하에게 부탁해 미리 준비한 유한의 인상 파기(스캔본에서도 이렇게 되 있네요. 인상 파기가 뭐지;)를 로이디뉴에게 건네주었다.

"일이 끝날 때까지 발목을 잡아 준다면 금괴 백 개를 지불하겠습니다."

금괴 100개면 적어도 30만 골드가 넘는 금액. 

"호, 그만큼이나! 이 소년이 꽤 성가신 모양이군요, 세뇨르 발리안." 

"처음엔 아니었는데, 어느새 그런 존재가 되어 있더군요."

"알았습니다. 그 의뢰 받아들이지요."

의뢰를 끝낸 발리안은 검투장에서 물러났다. 발리안이 가고 나서도 로이디뉴는 한참 동안이나 그가 두고 간 인상 파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꽤 영악해 보이는 눈빛을 가진 소년이었다. 굵은 얼굴 선과 입술에선 굳센 의지가 느껴졌다. 상대하기 쉽지 않을 타입 같았다. 인상 파기가 제대로 그려진 것이 맞다면. 

"지그라...어떤 친구인지 궁금한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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