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여 오는 손길
조여 오는 손길
1
베레타 공화국의 진격은 계속되었다.
초반의 불꽃같던 맹위는 다소 꺾였지만 여전히 남진을 멈추지 않았다.
다크나이트 길드와 B.O.B 길드가 베레타 공화국군을 적극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전부터 기가 꺾인 마노스 제국군은 여전히 제대로 된 반격을 펼치지 못했다. 철십자 길드에서 분투하고 있지만 현재 다수의 NPC 병사들은 제 몫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천하의 마노스 제국군이 이 정도밖에 안 돼?"
"아무래도 정권이 바뀐 여파가 큰 것 같아."
베히모스 등극 이전 미네르바 치세에선 마노스는 군사 국가로서 군대에 아낌없이 돈을 쏟아부었다. 그 때문에 백성들은 몰라도, 기사나 병시들은 여제에 대한 지지가 높았다.
그러나 미네르바가 죽고(?) 베히모스가 등극하면서 국가 정책은 이전과 완전히 뒤바뀌었다. 형편이 어려워서라지만, 군비가 줄어들고 대접이 소홀해지다 보니 병사들의 사기가 상당히 꺾여 버린 것이다.
"거기다 우리가 반란을 예방한다고 영주나 지휘관급 NPC들을 닥치는 대로 없애 버렸잖아."
"그랬지."
다 NPC 마도사 아벨의 조언 때문이었다. 여제를 놓치는 바람에 발키리 작전인가 뭔가로 전환하자면서.
"그게 일단 초기의 수습에는 좋았지만, 전쟁 상황에선 쥐약이 된 거야. 군대를 지휘해야 할 노련한 NPC들을 죄다 없애 버렸으니 전력이 더 떨어질 수밖에."
노벨의 이야기를 들으며 밀리터리 마니아인 몇몇 간부들은 2차 대전의 동부 전선 초창기의 전사(戰史)를 떠올렸다.
나치 독일이 침공하기 전, 소련의 지배자 스탈린은 자신의 독재를 위해 처절한 숙청을 단행했고 이 과정에서 유능한 장교들이 꽤 많이 죽었다.
후대 학자들은 이것이 독소전 초반에 소련이 처참한 패주를 한 원인이라 말했다.
'현재 우리가 딱 그 짝이잖아!'
무서울 정도로 닮지 않았는가.
영주와 지휘관들을 길드원들이나 협력을 약속한 레지스탕스 NPC들로 교체하긴 했지만, 머리가 바뀐 군대가 정상화되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거기다 유저들이 NPC보다 자연스런 판단과 대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군대의 통제 능력은 NPC 지휘관들보다 떨어진다. 군대 경험이 없는 유저의 경우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거기다 스텟의 경우도 쿠데타의 여파로 패널티를 받아 다들 떨어진 상태가 아닌가.
"그럼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베히모스의 물음에 노벨이 대답했다.
"일단 군대를 재정비할 수 있게 시간을 벌어야 해. 내 의견은 북부의 영토 일부를 베레타 공화국에 넘겨주고 불가침 협정을 맺는 게 어떨까 하는데……."
"땅을 떼 주자고?"
베히모스는 물론 다른 간부들도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나도 싫은 건 마찬가지야. 하지만 현재 이 방법밖에는 없잖아!"
노벨의 주장에 베히모스는 슬쩍 옆에 선 아벨을 바라보았다.
저번에 뇌를 팔아먹은 듯한 소릴 지껄이긴 했지만 그래도 예전과 같은 기발한 조언과 작전을 내놓기를 기대했다.
슬쩍 살펴보니 멍청했을 때와 달리, 지금은 행동도 자연스럽고 눈빛도 지혜로 가득 차 보였다.
"일단은 노벨 님 말대로 히는 게 좋겠습니다, 패하."
기대가 무참히 짓밟힌 베히모스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런 그를 아벨이 다독였다.
"열 걸음을 나가기 위해 한 걸음 물러나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수치가 아닙니다."
"알았어, 그리하도록 하지."
베히모스는 노벨을 특사로 삼아, 황제인 자신의 뜻을 적은 친서를 베레타 공화국군 진영에 보냈다.
얼마 후, 노벨이 상대방의 답신을 가지고 들어왔다.
"의장은 만나지도 못했고, 총사령관인 란데르트는 회사에서 일하는 중이라 아직 접속을 안 했어. 하지만 부관이라는 녀석은 만날 수 있었지. 란데르트가 그놈한테 전권을 맡기고 갔더라고."
"그래, 전권을 받은 그 부관 녀석이 뭐라던데?"
노벨은 말하는 대신에 답신을 내밀었다.
종이에는 'KIN' 이라는 간단명료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베히모스는 답신을 와락 구겨 버리며 이를 갈았다.
"이것들이 끝까지 해보자, 이거지?"
"어떻게 하지? 지금 자금도 모자라서 거대 키메라를 충분히 생산할 수가 없어."
베히모스는 머리를 움켜쥐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전력을 보강하고 재원을 마련할 만한.
"있다!"
"있다고? 어떤 방법인데?"
베히모스가 벌떡 일어나 손가락을 튕기자 모두들 시선을 그에게로 모았다.
"영지랑 작위를 파는 거야!"
"그, 그러니까 지금 매관매직을 하자고?"
노벨을 비롯해 간부들은 다들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베히모스가 생각해 낸 특단의 대책이 설마 매관매직인 줄은 몰랐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영주가 되려거나 귀족 칭호를 얻고 싶어 하는 놈들이 꽤 있어. 그런 놈들이 가진 돈을 끌어들이자는 거지."
"하지만 영지나 관직은 이미 공을 세운 길드원들에게 나눠 줬잖아."
"다시 회수하면 돼."
"멋대로 처리할 일이 아니야!"
간부들이 언성을높였다.
손에 쥐어 준 사탕을 도로 뺏어 간다는 데 가만히 있을 녀석이 누가 있겠는가. 다들 심한 반발을 하기 마련이다.
당장 간부들만 해도 저번 쿠데타 이후 지방의 대영지를 차지하고 공작이나 후작의 작위를 받았다. 잘못하면 그것도 내뱉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황제야! 내 나라의 영지와 작위를 내가 멋대로 못할 게 뭐 있어?"
"너 혼자 황제가 되었냐? 누가 널 황제로 올려 주었는데!"
"알고 있어! 하지만 지금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어? 있으면 철회하지!"
베히모스의 말에 간부들은 입을 다물었다. 원통하게도 현재 그 막장스런 방법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알았으면 서둘러 시행하자고. 늑장 부리면 팔아 버릴 영지와 작위도 없을 거야."
확실히 마노스 제국이 망하기라도 하면 그나마도 기회가 없다.
모든 걸 제국의 찬탈에 걸었던 철십자 길드 입장에선 어떻게든 제국을 지켜 내야 했다.
2
간부들과 결판을 본 베히모스는 그날 곧장 길드원들에 게 배분한 영지와 작위를 회수했다. 그리고 특단의 대책을 발표했다.
마노스 제국의 영지를 분양합니다! 자세한 정보는 철십자 길드의 홈폐이지에 접속하셔서 확인하십시오!
아르페디아 온라인 공식 홈페이지와 여러 관련 사이트에 올라온 이 글을 본 유저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쳇, 처음으로 황제가 되었다며 으스대더니 꼴좋군."
"그래도 영주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잖아?"
"대체 얼마에 파는 거야?"
유저들이 수군거리는 사이, 베히모스는 홈페이지 전체 공지를 통해 길드원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모든 것은 재정을 확보하고, 전력을 마련하여 베레타 공화국군을 물리치기 위함이라고. 외부의 적을 물리치고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면 마땅한 대가를 치를 거라고.
그러나 이 같은 통보에도 불구하고 길드원들의 반발은 결코 작지 않았다.
베히모스를 비난하는 글들이 게시판에 가득 을라왔고, 길드를 탈퇴하겠다는 유저들도 나타났다.
그러나 베히모스는 영지 분양 프로젝트를 그만두지 않았다.
그가 책정한 마노스 제국의 영지 가격은 다음과 같았다.
남작 위와 인구 3만 명의 영지, 800만 골드.
자작 위와 인구 6만 명의 영지, 1,500만 골드.
백작 위와 인구 10만 명의 영지, 2,000만 골드.
하나같이 눈이 튀어나을 정도의 고가들이지만 영주가 되고 싶어 하는 유저들은 많았다.
우선 재빠르게 소식을 접한 재력이 있는 중소 길드들과 자력으로 영주가 되기 힘든 생산직 유저들이 마노스 제국으르 달려가 영지를 분양받았다.
그들이 갖고 온 막대한 자금은 베히모스와 철십자 길드의 숨통을 터 주었다. 거기다 그들은 마노스 제국군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자신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서 였다.
"'하얀여우들' 길드에서 궁수 유저 삼백 명을 보내 줬습니다."
"드럼통타이거 님이 최상급 HP포션 오백 개를 쓰라면서……."
"87위 랭커인 쌍칼준규 님이 한몫 거드시겠답니다!"
영지를 분양받은 길드와 유저들이 많아질수록 지원도 늘어났다.
덕분에 베레타 공화국군의 남진을 저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거 예상외의 결관데? 이렇게 도와줄 줄은 몰랐어!"
"크크, 당연히 도와야지. 우리가 망하면 자기네 영지도 날아가니까."
그런 이유였다. 결코 철십자 길드와 사이가 돈독하다거나 인심을 크게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큰일 났다! 큰일!"
황궁 안으로 철십자 길드원 한 명이 부리나케 달려 들어왔다.
호들갑을 떨며 들어온 길드원에게 베히모스가 물었다.
"무슨 큰일인데?"
"골드맨이 영지를 사겠대요!"
다행히 나쁜 소식이 아니었다. 그러나 골드맨에 대해서 그리 아는 바가 없었던 베히모스는 그가 왜 이리 호들갑을 떠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근데 골드맨이 누구야?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베히모스 너 아직 모르냐? 웨스턴 최고의 갑부잖아."
"프로인이 사라진 뒤로 유럽 서버 최강자이기도 하지."
영지 분양에 대한 소식이 외국에까지 알려진 모양이다.
골드맨에 대해서 알고 있는 간부들이 그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금광을 10개 넘게 가지고 있다는 둥, 황금으로 저택을 지었다는 둥, 엄청난수의 용병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둥.
"흠, 대단히 좋은 소식이군. 만약 그 작자만 끌어들일 수 있다면……"
"그런데 일반 영지는 안 사겠대요."
"그럼?"
"웨스턴 최강자 대접을 해 달랍니다. 적어도 후작, 아님 공작급 영지를 달라고……."
후작이나 공작급 영지는 간부들이나 보유하고 있다. 어떻게든 양보를 받아 내면 괜찮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돈은 그만큼 있기나 하데?"
"오천만 골드면 되겠냐고 하던데요?"
베히모스를 비롯해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베히모스는 당장 간부 한 명이 가진 공작령을 회수해 골드맨에게 팔았다.
이후로도 외국 유저 몇 명이 마노스 제국의 영지에 대해 구매 의사를 밝혀 왔다. 돈이 아닌 용병으로서 유저나 NPC 병사를 보내 준 이도 있었는데. 이 역시 철십자 길드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미봉책이지만 재원과 병력을 마련한 철십자 길드는 베레타 공화국군의 남진을 완전 저지하고 빼앗겼던 성과 영지들도 차차 되찾을 수 있었다.
"베히모스, 베레타 공화국이 휴전을 제의했는데 어떻게 할 거야?"
마노스 제국군의 반격에 당황했는지, 아님 [마노스 제국 정벌] 퀘스트의 조건을 충분히 달성했는지 란데르트가 휴전을 제의해 왔다.
"휴전? 웃기지 말라고 해! 느닷없이 뒤통수 때릴 땐 언제고 여기서 휴전을 하자고?"
아직 북부에 빼앗긴 영토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벌써 란데르트는 약삭빠르게 전쟁을 끝내고 발을 빼려 들었다."
"휴전은 없어! 둘 중 하나가 망할 때까지 계속한다고 전해!"
"하지만, 란데르트가 말이야……."
란데르트는 철십자 길드의 고딩 황제께서 어떤 생각인지 잘 아는 듯, 휴전 제의 서신에 이런 말을 적어 놓았다.
……만약 전쟁읕 계속하겠다면 우리 쪽에서도 영지를 팔겠네. 이왕이면 승리했읕 때를 생각해 마노스 제국 영토도 미리 팥아 버리려 생각하고 있는데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철십자 길드 간부들은 심장이 싸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들은 최후의 막장스런 결단을 내린 뒤에야 베레타 공화국군을 밀어 낼 수 있었지만, 베레타 공화국군은 아직 최후의 결단을 내리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한다면 마노스 제국의 영토도 미리 팔아 버린다고 한다. 더한 수단을 쓸 자신도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다른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란데르트의 서신을 본 NPC 아벨이 입을 열었다.
"미리 팔아 버리는 대신, 이미 마노스 제국의 영지를 산 사람들의 소유권을 베레타 공화국에서 인정한다고 말할 수도있습니다."
"그래서?"
아벨의 말이 이해가 안 된 베히모스가 물었다.
"저쪽에서 그렇게 말하면 우리한테서 영지를 샀던 자들이 돌아설지도 모릅니다."
만약 베레타 공화국이 결단을 내리고 다시 마노스 제국을 압박한다면 영지를 산 유저들은 기을어 가는 마노스 대신 베레타에 손을 내밀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제길! 여기서 끝내야 한다는 건가?"
"너무 분해 하지 마십시오. 치욕을 만회할 기회는 반드시 올 겁니다."
결국 베히모스는 베레타 공화국과의 휴전을 받아들였다.
베레타 공화국은 지난 전쟁 때 당했던 참담함을 갚아 준데 만족했고, 란데르트는 퀘스트를 완수하고 공작 작위를 받는데 만족했다.
다크나이트 길드와 B.O.B길드는 다소 아쉬워했지만 베히모스와 철십자 길드가 보여 준 막장 결단의 추태를 감상한 데 만족하기로 했다.
거기다 거대 키메라라는 새로운 병기의 데이터를 입수 한 것은 그들에게 무엇보다 큰 소득이다. 자신들이 보유 한 거대 골렘의 음직임을 지그 철공소의 블랙 아이언 수준으로 을릴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으니까.
마노스 제국을 패망에서 건져 냈다지만, 이번 전쟁에서 이런 저런 망신을 당하고 길드원들의 신망을 잃은 베히모스는 가장 큰 손해를 본 유저였다.
"뿌드득! 이 모든 것은 다 지그라는 놈 때문이야!"
딱히 지그 때문은 아니지만 무조건 죄를 덮어씌우는 그였다.
그러나 분하게도 아직은 현실에서 놈을 박살 낼 만한 좋은 방법이 없었다, 흑곰은 여전히 고개를 내저었고 일진들 가지고는 고경덕 하나 이기기도 힘들다.
그렇다면 일단 게임에서 먼저 한 방 갈겨 줘야 한다. 자신이 약 오른 만큼 펄펄뛰도록.
그렇게 생각한 베히모스는 대장장이 지그를 응징할 방법을 상의하기 위해 노벨을 불렀다.
휴전 이후 다른 간부들은 그의 이야기를 건성으로 여기기에 터놓고 이야기 할 사람은 노벨뿐이었다.
지그 응징 방법에 대해서 한참 머리를 굴리던 노벨은 일단 간단한 방법부터 이야기 했다.
"그냥 길드전을 선포하는 게 어때?"
노벨의 말에 베히모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마노스 제국과 아바란 왕국은 거리가 멀어. 그렇다고 철십자 길드원들만 데려가서 공격하기도 그렇고."
안 그래도 요즘 길드원들의 신망을 많이 잃은 베히모스다.
잘나가다 못해 질주 중인 지그를 공격한다고 하면 몇 명이 찬성해 주겠는가.
더구나 지그는 반칙 같은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얼마 전에 획득한 뇌제의 홀, 그리고 철공소에서 민들어 내는 블랙 아이언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다 놈에겐 리저드 군단도 있다. 그 리저드 군단은 이후로 부찍 성장해 다이노스 왕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만들었다. 아마 지그 놈이 불러온다면 이전보다도 더 많이 오면 왔지. 덜 오진 않을 것이다.
"제길. 아무런 방법도 없는 건가?"
"폐하! 그럼 이 방법은 어떻사옵니까?"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서 있던 NPC 마도사 아벨이 나섰다. 날카롭게 빛나는 두 눈은 명석함과 교활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
베히모스의 물음에 그는 자신이 생각한 계획을 소상히 이야기해 주었다.
처음에는 심드렁하게 듣던 베히모스와 노벨도 나중에는 만족한 기색을 보였다.
"괜찮군. 하긴 꼭 두들겨 패는 방법이 능사는 아니니까"
"오히려 그 방법이 그 자식에겐 더 괴로을지도 모르겠어."
베히모스는 곧장 아벨의 계획을 실행했다.
3
쿠퍼는 지그 철강 조합에 가입한 대장장이 유저로, 아바란 왕국의 수도 벨파스에 대장간을 소유하고 있었다.
유한에게서 질 좋은 제련철을 수급받은 뒤로 그의 대장간의 매상은 예전보다 크게 오른 상태였다. 손님들도 많아지고, 덕분에 무구를 만드느라 생산 스킬의 랭크도 부쩍 올랐다.
'더도 덜도 말고 요즘만 같아라!'
그럼 머지않아 지그처럼 철공소를 짓는 것도 가능하리라.
쿠퍼가 흥겨운 얼굴로 갑옷을 뚝딱거리며 만들고 있을 때였다. 대장간 문이 열리더니 상인 복장의 유저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옵셔!"
쿠퍼는 자리에서 일어나 친절한 얼굴로 손님을 맞았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저돌 하나하나가 자신의 성장을 돕는 고마운 존재들이었다.
상인 유저는 대장간 안을 스옥 훑어보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푸힌 상회의 리치라고 합니다."
"아, 리치 님이셨군요. 무일 찾으시는지?"
쿠퍼의 물음에 리치는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이번에 저희 상회에서 브로딘 왕국에 대량의 무기 납품 계약을 맺었는데……."
리치의 말에 의하면 푸힌 상회는 브로딘 왕국에 1만 점의 검과 5천 점의 방패를 납품하는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만 상회 소속의 대장장이들이 파업을 벌이는 바람에 물건 납기를 맞추기 어려워졌다고.
"그래서 말인데, 바스타드 소드 천 개와 방패 오백 개를 만들어 줄 수 있습니까?"
'어이쿠, 이런 큰 거래가!'
바스타드 소드 천 개와 방패 5백 개면 적어도 10만 골드는 나간다. 뜻하지 않는 큰 건수에 쿠퍼의 입이 귀에 걸렸다.
자신의 대장간에서 단기간에 소화할 수 있는 물량은 아니지만, 이런 거래는 무조건 잡아야 한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성장할 수 있으니까.
"당연합지요. 언제 어디로 가져다 드릴까요?"
"보름 후 푸힌 상회의 벨파스 지점으로 가져다주십시오. 저는 그럼 바빠서 이만."
용건을 마친 리치는 서둘러 대장간을 떠났다. 또 다른 대장장이에게 주문을 하러 가는 모양이다. 하긴, 브로딘 왕국과 주문을 생각하면 서두를 수밖에 없을 터.
대장간 문 앞에서 리치를 배웅한 쿠퍼는 순간 자신의 머리를 툭 쳤다.
"이런, 멍청한! 계약서를 작성하는 걸 까먹었잖아!"
보통 1만 골드 이상의 큰 거래는 계약서를 작성하는 게 상식이었다. 거래의 안전과 신용을 위해서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큰 행운에 쿠퍼는 그만 계약서를 작성하는 걸 잊어버렸다. 거기다 바빠 보이는 리치가 서둘러 가 버리기도 했고.
"뭐 문제가 있으려고. 푸힌 상회가 작은 곳도 아니고 말이야."
브로딘 왕국을 중심으로 꽤 큰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이 푸힌 상회다.
그렇게 생각한 쿠퍼는 도시 중앙에 있는 구인 게시판에 잠시 아르바이트 할 대장장이들과 일꾼들을 구한다는 광고를 냈다. 열흘 안에 바스타드 소드 천 개와 방패 5백 개를 만들려면 혼자서는 어림도 없었다.
쿠퍼가 주문을 받은 지도 열흘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10명의 대장장이 유저와 NPC들을 고용해 밤낮으로 주문 받은 무기들을 만들었다.
그의 노력이 가상했는지 아직 5일이란 시간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을 완성했다.
"에휴, 힘들다. 잠시 좀 쉬었다 할까?"
그가 허리를 펴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일전에 보았던 리치란 상인이 대장간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리치 님이 아니십니까? 주문 날짜가 아직 안 된 걸로 아는데……."
의아해 입을 여는 그에게 리치는 미안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저번에 했던 주문을 취소해야겠습니다"
"뭐라고요?"
"파업을 한 대장장이들이 다시 생산에 나서기로 했거든요.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또 들르겠습니다. 그럼 수고 하세요."
쿠퍼의 눈이 놀라 부릅떠질 때 리치는 서둘러 자신이 할 말만 하고 나가 버렸다.
"자, 잠깐만요!"
쿠퍼는 서둘러 리치를 부르며 밖으로 뛰어나갔지만. 리치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귓속말을 보냈지만, 그마저도 응담이 없었다. 로그아웃을 한 것이다.
"망했다!"
주문 물량을 맞추기 위해 비상금까지 톡톡 털어 재료를 사들이고 일꾼들을 고용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허공으로 증발하게 생겼으니.
"이럴 수는 없어!"
잠시 망연한 표정을 짓던 쿠퍼는 화가 난 얼굴로 푸힌 상회의 벨파스 지부로 향했다.
그곳에 가 자신의 억울힘을 말하고 보상을 받을 생각이었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푸힌 상회의 벨파스 지부장이라는 유저가 나왔다.
"아니, 도대체 이게 말이 됩니까? 주문을 했으면 지켜야지 중간에서 취소하면……."
쿠퍼는 자신이 당한 일을 상세하 설명했다.
지부장은 정말 푸힌 상회에 책임이 있다면 보상해 줄 용의가 있는 것처럼 진지하게 쿠퍼의 이야기를 들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본점에 알아보겠습니다."
본점의 길드원들에게 쪽지를 보낸 지부장은 답신을 기다렸다. 쿠퍼도 안절부절못하며 제발 보상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얼마 후 답신이 왔는지, 지부장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무척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쿠퍼에게 말을 건냈다.
"계약한 대장장이들이 파업한 것도 사실이고 외부에 주문을 맡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뭡니까?"
"죄송하지만, 저희 푸힌 상회에는 리치란 이름의 유저 가 없습니다."
"네에?"
"종종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 상회 소속이라 속이고 사기를 치고 다니는 유저가 말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쿠퍼 님은 그런 비매너 유저에게 속으신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립니까! 가슴에 분명 푸힌 상회의 문장이 있었다고요!"
분명 월계수가 둘러싼 금화를 보았다.
그러자 한숨을 쉰 지부장은 종이 뭉치를 꺼내더니 쿠퍼 에게 보여 주었다. 종이마다 문장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문장들은 푸힌 상회의 문장과 엇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르게 생겼다.
"이, 이건……?"
"사기꾼들은 문장을 내새워 사람을 속입니다. 그래서 이런 거래에서는 철저히 계약서를 사용하고 평소 신용하는 상인들이 아니면 공증을 받거나……."
지부장의 이야기는 더 이상 쿠퍼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결론은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것 아닌가.
쿠퍼는 힘없이 푸힌 상회의 지부에서 나왔다.
사기꾼에 속아서 아까운 돈과 시간, 노력을 날려 버린 그의 눈에 굵은 눈물 방울이 맺혔다.
4
카루라는 최근 들어 칼틴 시에 있는 자신의 대장간을 확장했다. 지그 철강 조합에 든 이후로 매상이 부쩍 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으로 쪽쭉 뻗어나가기만 할 것이라 생각한 그녀의 사업에 먹구름이 끼는 일이 발생했다.
바로 옆에 대장간이 새로 생긴 것이다.
"뭐야? 저 주인은 최소한의 매너도 없나?"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상도덕이라는게 있다.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에선 대장간이 여럿 있어도 상관 없지만, 이곳 칼틴 시는 다소 한산한 수준이었다. 적어도 한 블록은 떨어져야 예의인데, 새로 생긴 대장간의 주인은 그마저도 없는 듯했다.
"뭐, 그렇게 나오면 싸고 질 좋은 제품으로 눌러 주지."
카루라는 자신이 있었다. 지그 철공소에서 제공받는 제련강을 사용해 만든 무구는 값도 싸고 품질도 좋아 고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기 때문.
그러나 그런 카루라의 자신이 바닥을 치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이, 이게 뭐야? 뭐 이런 가격이 있는 거냐고!"
바스타드 소드 한 자루에 100골드를 받았다. 재료값의 반에 반도 안 나오는 가격이다.
그러나 바스타드 소드만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손님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특정 제품을 전략 할인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하지만 이 대장간 안의 제품들은 모두가 그런 식이었다.
C급의 방패가 200골드에, 체인 메일 한 벌의 가격이 300골드.
"아니, 도대체 뭐하자는 수작이야!"
카루라는 당장 옆 대장간에 쳐들어갔다.
"어서 옵셔!"
싹싹하게 보이는 점원 NPC가 카루라를 반겼다.
"당장 주인 나오라고 해!"
카루라의 호통에 가게 안에서 다른 손님을 상대하고 있던 주인이 나왔다.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소넌 유저였다.
"니마, 무슨 일이심?"
카루라는 가게 안에 전시되어 있는 무구들의 가격표를 가리키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허무맹랑한 가격을 붙인 거야?"
"남이사!"
카루라는 이 싸가지 없는 초딩 녀석을 두들겨 패 버리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고 다시 말했다.
"유니온에 신고하기 전에 당장 가격표 바꿔."
"지금 우리 가게에 시비 거는 거심?"
"그래. 시비 건다 어쩔래?"
키루라의 말에 초딩 녀석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뒤를 향해 말했다.
"형아들!"
초딩 녀석의 외침에 가게 안에서 기사와 용병으로 보이는 유저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우락부락한 얼굴에 한 성질 하게 생겼다.
"뭐냐? 누가 우리 꼬맹이 괴롭히는 거냐?"
"대장장이 계집애 너냐? 너 죽고 잡냐?"
사내들이 건들거리며 묻는 말에 카루라는 맹렬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안이고 밖이고 간에 다시 한 번 우리 꼬맹이를 괴톱히면 아예 게임 접게 만들어 줄 테니까 알아서 해!"
"아,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카루라는 도망치듯 가게에서 빠져 나왔다.
"휴우! 뭐 저런 놈들이 다 있지!"
한숨을 내쉰 카루라는 칼틴 시의 대장장이 유니은을 찾아가 새로 생긴 가게의 만행을 성토했다.
그러나 같은 직종들 간의 경쟁을 조질하고 상거래 질서를 지켜야 할 유니은 수장 NPC의 말은 기가 막힐 뿐이었다.
"비싸게 받는 것도 아니고 싸게 받을 뿐인데. 그게 뭐 어때서?"
'캬아악! 이놈의 NPC 자식! 꼬박꼬박 회비는 잘 받아 챙겨놓고 이래도 되는 거야!'
만약 주위에 보는 사람이 없었더라면 얼굴에 왕복 5차선 도로를 그려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니은의 수장이 이렇게 띠껍게 나오는 이유가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유니온 사무실 안으로 아까 그 무개념 초딩 대장장이가 덜렁 들어왔다.
"님아, 반가요. 저 회비 내러 왔삼."
"오, 자네 왔나?"
유니온 수장의 표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마치 귀여운 손자라도 발견한 듯했다.
"자요, 이번 회비."
카루라는 초딩 녀석이 낸 회비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금화가 한 주머니. 족히 1만 골드는 되어 보였다. 그렇게 물건을 싸게 팔면서 어떻게 저만큼 돈을 낼 수 있는지?
아니, 그보다 회비를 저만큼 낸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유니온에 내는 돈이라고 해 봤자 가입비 50골드, 월 회비 100골드 정도다.
다시 말해 저 초딩은 유니은 수장에게 뇌물을 먹이고 있는 것이다.
'뭐, 저런 게 다 있지?'
이후로 유니온의 비호를 받는 초딩의 대장간은 성황을 이루고 카루라의 대장간은 판매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극소수의 단골들을 제외하고는 손님들을 옆 가게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5
학원에 다녀온 유한은 오늘도 어김없이 게임에 접속했다.
<오늘 하루 게임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주위가 밝아지더니 지그 철공소가 눈앞에 보였다.
"지그야,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들어가자."
"에? 뭐, 뭐예요?"
송코가 획 손목을 낚아채더니 옹접실로 데리고 갔다.
철공소 응접실 안에는 무슨 일인지 지그 철강 조합의 조합원들, 주로 아바란 왕국의 대장장이 유저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이제 오셨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이변 주 제련강은 모두 보내 줬는데요"
"하아, 그것 때문에 찾아온 게 아닙니다."
한숨을 폭 쉰 쿠퍼는 유한에게 덥석 달려들어 애원했다.
"길드장님, 저 좀 도외주십시오"
"저도요. 이대로 가다가는 대장간을 문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고요."
대장장이 유저들은 유한의 팔을 붙잡고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워낙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바람에 유한은 어지러워 쓰러질 지경이었다.
"모두 조용!"
장내를 진정시킨 것은 리지스였다.
팔짱을 끼고 대장장이들을 쫙 노려보던 그녀는 우선 쿠퍼에게 먼저 잔소리를 퍼부었다.
"쿠퍼 씨, 내가 예전에 이야기 했었죠? 잡상인이랑은 거래하지 말라고!"
"그, 그게 워낙 큰 주문이 들어와서 그만 욕심에……."
사실 리지스와 거래를 했으면 사기당할 일은 없었을 것 이다. 리지스는 길드장인 지그와 동업자니까.
리지스는 우물쭈물히는 쿠퍼에게서 카루라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카루라 양, 내가 푼돈 아끼지 말고 유니온 꽉 잡아 놓으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했습니다."
"그런데 왜 내 말 코로 들었어요? 그러니까 초딩에게 발리지!"
초딩에게 발렸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카루라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순식간에 대장장이 둘이 반박을 못하고 침몰했다 사기를 당하거나 영업난에 빠져 유한에게 도움을 구하러 온 다른 대장장이들은 리지스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대장장이들은 지그 철강 조합에 들어온 뒤로 모두 리지스와 거래를 텄다. 상계에서 산전수전 다 경험한 리지스는 그들에게 거래나 운영에 필요한 조언들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대장장이들은 자신보다 나이가 어려 보이고, 여자인 리지스를 다소 무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한과 달리 리지스 말고도 다른 상인들과 종종 거래를 트고 멋대로 사업을 확장하곤 했다.
"자기들이 경솔해서 손해 봐 놓고 지그에게 징징거리면 되겠어요?"
"됐어, 그만해. 게임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유한이 점잖게 다독이자 리지스도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리지스가 한발 물러서자 유한은 대장장이들 앞으로 나서서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한 번은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번 실수를 하면 바보 소리를 듣게 되지요. 이번에 큰 교훈을 얻었다 여기시고 다음부터 모두 조심하세요."
유한은 자신이 생각해도 참 멋지게 훈계했다고 생각했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이제 수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길드의 장이되었기 때문일까. 대장간 때부터 일꾼들을 이리저리 부리면서 늘게 된 재주인지도 모르겠다.
"일단 여러분의 자본 문제에 관해서는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제가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비상식적으로 거래를 한다는 곳의 배후는 리지스나 제가 알아보고 손을 쓸 테니 염려하지 마세요."
"고맙습니다."
"길드장님만 믿습니다."
냉정하게 내치면 어쩌나 걱정했던 대장장이들은 진심으로 유한의 배려에 고마워했다.
유한이 길드원들을 살려 준 이유는 어려음이 있어도 항상 휘하의 사람들을 챙겨 줘야 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얼마 전, 철십자 길드의 영지 분양 건을 보면서였다.
정현일, 아니 베히모스가 무리한 수를 쓴 바람에 길드 원들이 원성을 터트리고 탈퇴를 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베히모스는 길드를 위해서, 마노스 제국을 살리려 영지를 판 거라고 했지만, 진실된 이유는 자신의 머리에 쓰고있는 왕관 때문이었다.
정말 길드를 위하고 마노스 제국을 살리려 했다면 길드원들을 무시하고 그런 결정을 멋대로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몇 번이고 란테르트에게 애원하고 부탁하는 방법도 있지 않는가.
"으아악! 사람 살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유한은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를 들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가 봤더니 철공소와 광산 마을 일대가 무척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입니까?"
유한은 남쪽에서 도망쳐 온 유저들에게 말을 걸었다. 먼지투성이가 된 그들은 다급하게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몬스터가 떼거지로 물려오고 있습니다."
"몬스터가요?"
유한은 그 말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지그 철공소가 자리 잡은 케이트 산맥의 계곡은 비교적 몬스터의 위험에서 안전한 곳이다.
왜냐하면 유한이 주기적으로 블랙을 이용해 몬스터 토벌을 하고 있는데다가 지그 철공소를 찾는 손님들도 심심 풀이로 사냥을 하러 다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몬스터 떼가 물려왔다니.
유한은 곧장 사람들이 달려오는 광산 마을 남쪽으로 달려가 보았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수백 수천 마리의 몬스터 무리를.
"뭐가 이렇게 많이 몰려온 거야!"
고블린부터 시작해, 오크, 트롤, 오우거까지.
마치 케이트 산맥의 몬스터들이 죄다 몰려온 듯했다.
이제는 유한의 레벨에서 한참 떨어지는 놈들이지만 그래도 한꺼번에 구름같이 몰려오니 주눅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짓밟혀 줄 마음은 전혀 없었다.
"블랙!"
"알고 있다. 오랜만에 몸 좀 풀어 볼까?"
블랙이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나가서 몬스터들을 상대 했다. 뇌제로 변신한 유한은 벼락을 날리며 블랙을 지원했다.
블랙과 유한이 분전하자 당황해서 도망치던 유저들도 되돌아와 둘에게 힘을 보탰다. 덕분에 몬스터들이 철공소와 광산 마을로 진입하는 것은 막아 낼 수 있었다.
아니, 몬스터들은 애초부터 철공소와 광산 마을의 습격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하다?
몬스터들은 유저들과 제대로 응전하려 들지도 않았다 틈만 나면 밀치고 도망가려고 안달이었다.
'이 녀석들이 왜 이러지?'
"후손! 전방을 봐라!"
블랙의 말에 유한은 몬스터들이 달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이미 유한만이 아니라 다른 유저들도 모두 그쪽을 보고 있었다.
왜 수많은 몬스터들이 이쪽으로 물려왔는가의 해답이 그쪽에 있었다.
시커먼 연기를 쁨어 대는 거대한 불꽃의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바람을 받으며 남쪽의 숲을 먹어 치운 화마는 철공소와 광산 마을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대장장이 지그 1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