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파티
생일파티
1
에르젠 가격 폭락으로 부도 위기에 몰린 것은 미네랄 상회뿐만이 아니었다. 철십자 길드의 지원과 권유로 에르젠 거래에 뛰어든 상단들도 큰 손해를 보았다.
그 상단들에는 메이지스의 경우처럼, 에르젠을 판매한 채권자들이 찾아와 난동을 부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상회의 신용도는 하락했고, 거래와 수입도 확 줄어들었다. 그리고 종국에는 부도와 폐업을 선언한 상단들도 나타났다.
NPC 상인들은 야반도주를 하거나 길거리에 나앉았지만. 유저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철십자 길드의 본부가 자리 잡은 마노스 제국의 황궁으로 찾아가 항의와 보상을 요구했다.
"어쩔 거야? 니들 말대로 했다가 쫄딱 망했잖아!"
"힘들여 세운 내 상점이 딴 놈 손에 넘어갔다고!"
상인 유저들의 거센 항의에 철십자 길드도 어떻게든 수습을 해 보려 노력했다.
"보상해 주겠습니다. 하지만 금방은 곤란합니다. 저희도 현재 국가 운영에 어려움이 있는지라……."
"뭐가 어쩌고 어째? 길드장 나오라 그래! 베히모스 당장 불러오라고!"
"재상님이나 황제 폐하는 현재 국정에 바쁘셔서 곤란합니다."
"염병하고 자빠졌네, 게임에서 왕이니까 진짜 지가 왕이 된 줄 아나?"
유저들의 원성은 황궁 안에 있는 베히모스와 노벨도 다 듣고 있었다.
그들도 나름 해결 방안을 모색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이번 일로 거둔 수입과 상납금들은 마노스 제국의 운영에 모두 쏟아부었기 때문.
사실 그 자금을 회수하려고 하면 못할 것은 없다. 그러나 그랬다간. 민심이 혼들릴 것이고. 국정은 파탄에 이를것이다.
"이봐, 아벨. 뭐 좋은 방법이 없나?"
베히모스는 자신의 옆에 있는 NPC 마도사 아벨에게 조언을 구했다. 웬만한 유저보다 머리가 좋은 아벨이니 분명 이번 일도 수습할 방법이 있을 거라 믿었다.
"간단합니다. 지금 소란을 부리고 있는 상인들을 모두 잡아다 처리해 버리면 그만이지요."
"이봐, 그걸 말이라고……."
"감히 천한 상인들 주제에 황제 폐하와 제국을 능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자식이 갑자기 왜 이래?'
제국을 손에 넣을 때 보여 줬던 명석함과 간교함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지금 아벨은 멍청하고 무식한 말만 내밸고 있었다.
더구나 평소답지 않게 말투도 뭔가 자연스럽지 못했고, 눈빛도 멍했다. 마치 혼이 빠진 것 같았다.
"어차피 장기짝으로 쓰다 버릴 패가 아니었사옵니까? 모조리 처단해 버리십시오."
아벨은 현재 상횡을 깊이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사실 NPC라면 아벨이 밀한 대로 해 버려도 무방하다. 그러나 유저를 상대로 그래선 곤란하다.
'쳇, NPC에게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그리 생각한 베히모스는 아벨에 대한 기대를 거두었다. 황좌에서 일어난 그는 대전을 나가 황궁 정문으로 나갔다.
직접 상인 유저들과 만나 그들을 다독여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중간에 그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NPC 전령이 다급하게 달려 들어온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베히모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어딘가에서 반란이 일어난 게 아닐까. 지금 상황에서 그런 일은 피하고 싶은데.
그러나 반란은 아니었다.
아니, 반란보다 더 큰일이 벌어졌다.
"전쟁입니다! 베레타 공화국군이 국경을 넘어 북부의 성과 요새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베히모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당장 길드원을 닦달해 정확한 상황을 알아보게끔 했다. 얼마 후, 북쪽 전선의 상황이 속속들이 보고되어 올라왔다.
"그라간 성이 베레타 공화국 1군에 함락되었습니다."
"공화국 특전대 삼천과 아서스 관문에서 교전 중!"
"크루노 성의 영주가 적 총사령관 란데르트에게 투항했습니다!"
을라오는 소식마다 암울하고 실망스러운 것들뿐이었다.
무엇보다 베히모스의 분통이 터지는 것은 베래타 공화국에 뒤통수를 맞았다는 점이다.
워낙 대외 관계가 안 좋아서, 얼마 전 베레타 공화국에 교감 선생님, 아니 제르달을 사신으로 파견했다.
특사로 간 제르달은 공화국 의장을 만나, 새 황제가 기존의 군사 우선 정책과 대외 정벌 정책을 폐기했음을 알렸다. 그리고 공회국과 우호 관계를 바란다는 의사도 전했다.
철십자 길드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르페디아 대륙의 제패였지만, 워낙에 제국의 상황이 좋지 않다 보니 잠시 보류를 한 것이다.
아무튼 공화국 의장은 만족하는 눈치였고, 베히모스의 안녕까지 기원해 주었다.
그래 놓곤 이렇게 전면 침공을 해 온 것이다.
의장의 호의만을 믿고 불가침 조약을 맺어 놓지 않은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
"베레타 공화국에 있는 길드원들 말로는 다크나이트 길드랑 B.O.B 길드 녀석들이 한동안 의장 관저를 드나들었대."
전쟁 원인에 대해서 정보 담당인 카르산이 보고해 왔다. 전정의 배후에는 유저들. 그것도 자신들과 적대적인 놈들의 입김이 깃들어 있었다.
사실 두 거대 길드는 마노스 제국을 장악한 철십자 길드가 국내를 안정시키고 성장히는 걸 원치 않았다. 거기다 유저 최초로 황제가 되었다며 거들먹거리는 베히모스의 작태에 눈꼴이 시렸는데.
"이후 의장이 관료들을 모아 놓고 서둘러 전쟁 준비 할 것을 명했어. 현재 새 황제의 등극으로 어수선한 마노스를 공격할 절호의 기회라면서……."
그리곤 의장은 베레타 공화국군 총사령관인 란데르트를 불러다가 [마노스 제국 정벌] 퀘스트를 내렸단다.
"'점령' 이 아닌 '정벌' 이었기에 란데르트가 부담 없이 받아들인 모양이더라고. 안 그래도 지난번 전쟁 이후로 베레타 공화국의 전력도 중강되었으니까."
"빌어먹을 꼰대 같으니. 회사에 다니며 돈이나 벌 것이지!"
전황을 살피던 베히모스는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노벨이 슬쩍 조언을 건넸다.
"란데르트의 직장 상사에게 일러 버리는 건 어때? 일은 안 하고 게임만 한다고. 그럼 퀘스트를 중단할 수밖에 없을지도……."
"인마, 어디서 일하는 줄 알고?"
란데르트에 대해 알려진 정보라곤 그가 '직장인'이라는 것뿐이다. 뭘 제대로 알아야 현실에서 압박을 가할 게 아닌가.
"폐하, 란데르트를 암살하는 건 어떻습니까r
NPC 아벨이 그리 말했지만, 역시 영양가 없는 조언이었다. NPC라면 몰라도 유저는 죽었다고 해도 다시 부활하면 그만이다.
적군의 작전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
"급보입니다!"
마침 NPC 전령이 황궁의 사령실로 뛰어 들어왔다. 베히모스는 나름 적을 무질렀다거나 성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도이젠 성이 점령당했습니다."
"뭐! 그게 정말이냐!"
도이젠 성이 제국 북부에서 가장 큰 거점이라서 놀란 게 아니다. 철십자 길드에서는 혹시 모를 반란에 대비하여 도이젠 성에 거대 키메라 10마리를 파견해 놓았다.
그 정도로 수많은 적군을 물리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을 벌어 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점령을 당했다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적군의 거대 병기 때문에……."
"거대 병기 때문이라고?"
베레타 공화국이 개발할 거대 병기로는 거대 키메라를 이길 수 없다.
의아한 마음에 로그아웃을 한 베히모스 아니 정현일은 도르젠 성이 힘락되는 동영상을 공식 홈폐이지에서 보았다.
마노스 정벌에 한몫 끼어든 유저가 을린 동영상인데, 거대 키메라들이 무참하게 당하는 장면이 녹화되어 있었다.
초반에 거대 키메라들은 성 위에서 바위를 던지며 베레타 공화국군의 공성을 저지했다. 거대 강철 병기들이 다가왔지만, 빠르고 유연하게 움직이는 거대 키메라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그러나 베레타 진영에 새로운 놈들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역전되었다. 좀 전에 둥장한 거대 강철 병기들보다 작은 크기의 강철 골렘이 앞으로 나서더니 거대 키메리를 향해 커다란 석궁을 쏘아 대는 게 아닌가.
"저, 저저!"
사냥꾼 유저가 쏘아 대는 것과 같이 자유자재로 발사되는 석궁.
이 석궁에 거대 키메라들이 하나둘 맞아쓰러졌다. 베히모스가 알기에 이렇게 무기까지 조작 가능한 정교한 움직임을 보이는 강철 골렘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블랙 아이언!"
지그란 놈이 만들어 팔고 있다는 강철 골렘.
작지만 날렵하고 정교한 움직임을 보여 주는 블랙 아이언은 현재 유저들은 물론 게임 내 국가를 다스리는 국왕과 귀족 NPC들에게도 팔리고 있었다.
베레타 공화국 의장도 유한에게서 블랙 아이언을 매입했다. 그는 자국의 군대에 블랙 아이언을 배치 전선에 투입했다. 그리고 만족할 만한 결과를 이뤄 냈다.
베히모스, 아니 정현일 입장에선 복장이 터지는 일이지만 말이다.
"강유한 이 자식, 진짜 사람 열 받게 만드네!"
유한이 일부러 전쟁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그저 그가 만든 블랙 아이언이 베레타 공화국에 납품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일은 계속 유한과 충돌하며 피해를 보고 있던 정현일의 뚜껑을 완전히 열어 버렸다. 불난 집에 살며시 기름을 끼얹었다고 할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저번에 할머니 홍영순 간사장이 녀석을 처리하라 했을 때는 그냥 적당히 날 잡아 손봐 주려고 했었다.
그맨 녀석이 대장장이 지그였던 것도 몰랐고, 그냥 학교에서 쫓겨난 찐따 녀석,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갈굴 수 있는 놈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뇌제의 홀 이후로, 이 망할 진따 녀석은 계속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이젠 적당히 날 잡아 손봐주는 정도로는 안 되었다.
끌고 와서 박살을 내 놓아야 성이 풀릴 것이다.
"각오해라, 이 새끼. 게임도 못하는 팔 병신으로 만들어 주마."
분노에 타오른 정현일의 두 눈에 광기가 맺혔다.
2
다음 날 학교에 간 정현일은 학람고 일진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당장 강유한을 잡아 오라고 지시했다.
"강유한? 그게 누군데?"
"까먹었냐? 재작년에 국에서 생쥐 나왔다고 찌질 댔던 놈 말이야."
"아, 그놈……."
그래도 일진 녀석들은 잘 모르는 눈치였다. 생쥐국 사건 다음에 입학한 1, 2학넌 녀석들의 경우에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놈 주소는 여기 있어. 한 시간 내로 잡아서 체육관 뒤로 끌고와."
정현일은 이미 교무실에 남아 있던 유한의 신상 정보를 파악한 상태였다. 그에게 주소를 넘겨받은 일진 양아치들은 곧장 유한을 잡으러 떠났다.
1시간 후, 양아치들이 정현일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기세등등하게 떠났던 그들은 빈손이었다.
"야, 이 새끼들아! 왜 그냥 왔어?"
정현일이 윽박지르자 녀석들은 머뭇머뭇하며 대답했다.
"그, 그 자식 없던데?"
"학원 갔다고 그래서……."
그러나 녀석들의 대답은 거짓말 같았다. 허탕을 친 것 치고 놈들은 이상할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이것들이 왜 이러는 거야?'
실은 정현일이 유한을 잡아 오라며 보낸 녀석들은 작넌 말에 김필중을 따라갔다가 유한에게 터진 놈들이었다.
좀 전에 녀석들은 유한의 집에 찾아갔었고, 유한이 학원 간다며 집을 나서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확인했다. 진따 강유한과 작년에 자신들을 두들겨 팬 무지막지한 놈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을 했지만, 녀석들은 유한의 앞에 얼굴을 내밀 수가 없었다. 유한을 보자니, 그때 맞았던 고통이 되살아나는 듯 했기에. 더구나 김필중이 처참하게 두들겨 맞던 모습이 떠을랐다.
자신들도 그렇게 될까 봐 무서웠다.
"병신 새끼들. 좀 있다 수업 마치고 다시 모여."
이번엔 자신이 직접 갈 생각이었다. 바보들만 보내선 또 일이 삐딱하게 될 테니까.
"그런데…… 정말 그 녀석 족칠 생각이야?"
일진 중의 하나가 쭈뼛거리며 물어 왔다.
"왜? 싫어?"
살기가 번득이는 정현일의 눈빛과 마주친 녀석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작년에 김필중을 따라나섰다 놈에게 단체로 당했다는 이야기를 하면 정현일은 비웃을 것이다.
아니, 믿어 주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개소리를 한다며 두들겨 팰지도. 그 때문에 일진에서 제명당한 김필중도 아직 아무 말도 못하는 게 아닌가.
'이것들이 정말 왜 이래?'
안색이 어두워진 놈들을 본 정현일도 조금은 심상찮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뿐. 그는 유한을 박살 낸다는 마음을 접지 않았다.
삐리리리─!
학원 수업을 마친 유한은 집으로 돌아오다 핸드폰 벨소리를 들었다.
누군가 했는데, 전화를 건 사람은 채린이였다.
뭐 때문에 전화를 했을까. 요즘 고3이라서 많이 바쁘다더니.
아무튼 기쁜 마음에 유한은 냉큼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채린이니?"
"물론이지. 이 번호로 전화 걸 사람이 나 말고 누가 있겠니."
그렇게 응답한 채린은 곧장 말을 이어 나갔다.
"내일 저녁 일곱 시에 '하베스트'로 나을래? 하베스트 알지?"
하베스트는 시내에 있는 카페 이름이다. 브랜드 커피는 아니지만 맛있는 음료들과 저렴한 가격으로 인기가 많았고, 모임 장소로도 각광을 받는 곳이다.
작넌에 블라덱이 옌스, 아니 고경덕을 꼬드겨 자신과 싸우게 만들었던 날에 처음 찾아가 봤다.
거기 생과일 쥬스가 일품이었던 것이 생각났다.
"뭐야, 데이트? 얼마 뒤에 중간고사라며?"
그래서 요즘 게임에서 유한이 에르젠을 만든다고 정신 없을 때, 채린은 오펜이 정리해 준 요점들을 외운다고 정신이 없었다.
"싫어? 싫으면 말고."
"아니 싫을 리가 없지!"
채린이 그만두려는 것처럼 뾰로통하게 말하자, 유한은 서둘러 그녀를 다독였다.
"후훗, 그럼 나오는 걸로 알고 준비할게. 거지 같은 차림으로 오면 날려 버린다."
"아, 예. 걱정 마십쇼. 공주님."
통화는 그것으로 끝.
즐거운 기분에 유한은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런 흥에 겨운 유한을 멀리서 지켜보는 녀석들이 있었다.
바로 정현일과 학림고 일진들이었다.
"개자식, 아주 신났구먼."
정현일은 유한이 즐거워하는 이유를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즐거워하는 저놈을 잡아다가 묵사발 내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는 유한이 눈치 채지 못하게 천천히 뒤를 따라갔다. 주변에 흩어진 일진들도 그와 발걸음을 맞췄다. 서서히 거리를 좁힌 다음 일시에 달려들 생각이었다.
"어이!"
누군가 큰 소리로 유한을 부르며 다가오자, 깜짝 놀란 정현일과 일진들은 재빨리 흩어져 몸을 숨겼다. 숨지 못 한 녀석들은 슬쩍 가로수를 돌아보는 척하며 딴청을 부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한은 녀석들에게 관심도 두지 않았다. 사실 쫓고 있다는 사실부터 몰랐으니까.
그는 자신을 부르며 다가오는 옌스, 아니 고경덕에게 시선을모았다.
"무슨 일이야?"
"바츠, 아니 유한, 아니지! 유한이 형님! 나 부탁이 있는데!"
평소와 달리 고경덕은 유한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굽실 굽실했다. 대체 무슨 부탁이기에 이러는 것인지?
"나 공부 좀 가르쳐 줘. 문제집이나 참고서도 안 쓰는 거 있으면 좀 주고."
"뭐라고? 너 뭐 잘못 먹었냐?"
유한이 알기론 고경덕은 공부와 담을 쌓은 녀석이다. 그래서 자신과 친구들이 중간고사다, 검정고시다 비명을 지를 때도 한가롭게 게임을 즐기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공부를 가르쳐 달라니?
"잘못 먹은 건 아니고. 공부를 해야 해. 대학에 가야 하거든."
"갑자기 그런 결심을 하게 된 이유가 뭐냐?"
이 녀석도 현실에 눈을 뜨고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한 것일까.
대체 누가 이 녀석에게 그런 걱정을 하게 만든 것일까. 분명 고경덕 본인은 아니다. 워낙 제멋대로이고 단순무식한 녀석이니.
"얼마 전에 길에서 유하를 만났어."
"유하? 아, 에이린 말이구나."
"우리 귀여운 공주님을 감히 레벨 5에 불과한 중딩 양아치들이 괴롭히고 있더군. 그래서 난 동화 속의 왕자님처럼 놈들을 처단해 버렸지."
'동화 속의 왕자님? 누가?'
고경덕의 분위기로 보면 만화속의 용병이 딱이다.
"아무튼 집까지 데려다 줬어. 꽤 번듯한 저택이더군. 그냥 가려는데 유하가 음료수라도 먹고 가라는 거야."
그래서 유하네 집에 들어갔는데, 마침 마당에 있던 유하네 할아버지가 달려들어 지팡이로 머리를 때리더란다.
'당연하지. 누가 봐도 넌 범죄형이라고.'
오해는 곧 풀렸지만, 여전히 유하네 할아버지는 경덕을 탐탁지 않아 했다. 경덕이 유하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을 보고 그가 말하기를…….
"내 손녀딸 못 준다?"
"그 정도면 말도 인하지. 그 영감님 왈, '돈도 차도 없는 주제에, 머리에 든 것은 없고 집안도 부실해 보이는 것이, 생긴 것은 조폭에 버금가고 이름조차 경박한 경덕이 네 이놈, 내 손녀딸 근처에는 오지도 마라!'고 하시더군."
'설마 정말 그렇게 장황하게 말했을까?
정말이라면 유한은 경덕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이해했다. 앞뒤를 떠나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그 정도 비난을 받는다면 사람이 주눅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실망한 건, 고2나 되는데 유하가 공부하면서 궁금해 히는 걸 하나도 가르쳐 줄 수 없다는 거야!"
아마 경덕이는 유하에게 힘 세고, 자상하고, 공부 잘하는 멋진 오빠로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난 변할 거야. 현실에서 지식 200을 찍을 거라고! 국영수 랭크도 을려서 대학 입학 퀘스트를 완수하고 말거야!"
그렇게 자신의 포부를 밝힌 고경덕은 다시 한 번 유한에게 요청했다.
"그러니 공부 좀 가르쳐 줘. 문제집, 참고서도 있음 넘겨주고."
"오펜, 아니 준수에게 가르쳐 달라고 해. 채린이 말로는 그 녀석 전교1둥이래."
"안 돼! 그 자식은 레벨이 너무 높아! 갑자기 마스터 급의 스승을 만나면 내가 못 따라갈 거야."
"괜찮아, 준수은 저레벨 학생도 잘 가르치니까."
"정말?"
"그래, 걔 성격도 정말 좋다."
고경덕은 솔깃해 하며 유한에게 달라불었다.
한편, 정현일 일당은 그 자리에 멈춰선 채로 유한과 고경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특히 정현일은 고경덕이 유한에게 굽실굽실 두 손을 모아 애원하는 것을 보며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저놈은 북성 기계공고의 고경덕이잖아. 어째서 저놈이 강유한 같은 진따 녀석에게…….'
믿을 수 없었다. 강북 지역 학교들을 평정한 녀석이 강유한 따위에게 빌빌거리다니.
강유한이 고경덕보다 강한가? 아니, 그럴 리는 없다고 여겨졌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침에 보낸 녀석들이 빈손으로 돌아온 것도 강유한이 고경덕과 친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대로는 안 되겠군.'
끌고 온 패거리는 10여 명 남짓. 강유한이라면 물라도 고경덕을 상대로 싸워서 숭산이 없다. 무엇보다 강유한의 뒤에 고경덕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양아치 녀석들이 주저할 것이다.
"그만 가자."
정현일의 말에 일진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강유한, 그리고 고경덕과 싸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러나 정현일은 유한을 박살 내는 걸 포기한 게 아니었다.
'양아치 패거리론 안 돼. 아무래도 전문가에게 연락해야겠어.'
전문가들.
주먹으로 먹고 사는 어둠의 프로들.
학림재단의 정씨 일가는 그들과 돈독하다.
대외적인 이미지 때문에 평소엔 서로 거리를 두고 있지만, 연락하면 두 손 두 발 다 걷고 달려온다. 재단 이사장, 그러니까 정현일의 할아버지가 예전에 그쪽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전문가들이라면 보다 확실하겠지.'
이주 똥오줌 못 가릴 정도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런 꼴이 된 강유한을 생각하자 정현일은 절로 흐뭇해 지고, 묘한 쾌감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운이 좋구나, 강유한. 오늘 하루 행복하게 지내라.'
오늘은 일단 물러가지만, 내일은 반드시 처참하게 묵사발을 내 놓으리라 다짐하고 돌아서는 정현일이었다.
3
다음 날, 학원에서 돌아온 유한은 바삐 집으로 돌이왔다. 서둘러 준비를 하고 채린이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다.
"어? 아무도 없나?"
시대에 어을리지 않는 전업주부로, 항상 집을 금건하 지키고 계셨던 어머니가 오늘은 집에 없었다.
'시장에 가셨나?'
그리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문득 오늘 아침 분위기가 이상하게 냉랭했던 것이 떠을랐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동생 유현이나, 자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말을 걸어도 대충 얼버무리곤 했다.
예전과 같은 게임 폐인이었다면 가족들의 반응 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테지만, 요즘은 달랐다. 아침에 가족들의 그런 태도 때문에 무척 섭섭함을 느꼈다.
"쩝, 뭔가 사정이 있겠지."
가족들을 이해하기로 한 유한은 욕실에 가서 샤워를 하고 옷도 새로 꺼내 갈아입었다.
괜찮은가 싶어 거울 앞에 섰다. 그러자 표정이 밝고 체격이 듬직한 옷걸이가 제법 괜찮은 녀석이 한 명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헷, 부지런히 운동한 보람이 있네."
스스로에게 만족을 느낀 유한은 곧장 집을 나와 하베스트로 향했다.
그런 그의 뒤로 묵직하고 새까만 승용차가 따라왔다.
"왜 지금 잡지 않는 겁니까?"
승용차에 타고 있던 정현일이 불민을 터트렸다 전문가라고 불러왔는데, 바로 옆을 지나쳐도 못 본 척하는 게 아닌가.
"혹곰 아저씨도 저 자식이 겁나는 겁니까?"
정현일의 비아냥에 그의 곁에 앉은 거대한 체격의 사내는 씨익 웃을 뿐이었다.
"이봐, 조카. 우린 프로라고. 프로는 완벽을 기하는 법이지."
혹곰은 품속에서 굵은 시가(Cigar)를 꺼내 날카로운 나이프로 앞을 잘라내 물고는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 짙은 연기를 길게 한 번 내뿜고 말을 이었다.
"아직 날이 밝아. 근방에 사람들도 많고. 녀석이 납치 되었다는 걸 사방팔방에 알리고 싶어?"
"아!"
그제야 정현일도 혹곰이 왜 유한을 놓아 준 것인지 알았다.
분명 자신이 저지르려는 일은 불법적인 수준을 넘어 범죄와 같은 짓이다. 될 수 있으면 사람들 눈을 피하는 게 좋다. 구설수가 적어야 자신은 물론이고 할아버지의 학림 재단에도 해가 되지 않는다.
"어두워지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사나이답게 느긋하게 참아봐."
"예!"
지금은 강유한의 뒤를 쫓는 데만 전념하면 된다.
흑곰, 그리고 흑곰파의 조직원들은 유한의 뒤를 조용히 추적하기 시작했다.
정현일은 뒷세계 최고의 은밀성을 자랑하는 흑곰파를 믿었다. 그리고 곧 있으면 경험할 통쾌한 결과를 기대했다. 반드시 오늘은 저 망할 놈을 뭉개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버스를 타고 시내에 도착한 유한은 카페 하베스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그는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움찔하거나 딴청을 부리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했지만, 수상해 보이는 사람은없었다.
"이상하다. 누가 따라오는 느낌이었는데."
예전에 허진태의 지포라이터를 갖고 있었을 때, 덕근이 파인지 뭔지가 자신을 쫓아다녔을 때도 딱 이런 기분이었다.
뭔가 뒤가 간질간질한 듯한 느낌.
"잘못 안 건가?"
유한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하베스트로 걸어갔다.
실제 추적자는 있었다. 그러나 흑곰파의 조직원들은 상대가 의심한다고 해서 놀라 내색할 정도로 수준이 낮지 않았다.
"저 새끼 감이 제법 좋은데요?"
"조심해야겠다. 잘못하면 들통 나겠어."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는 모습을 한 혹곰파의 추적자들은 유한이 하베스트라는 카페로 들어간 것을 보았다. 그리고 승용차로 천천히 따라오는 보스에게 연락을 보냈다.
한편, 하베스트로 들어간 유한은 순간 엄청난 폭음을 들었다.
팡! 파팡!
불꽃이 번득이고 색종이들이 눈앞을 가로질러 간다 싶더니, 누군가가 머리에 뭔가를 푹 눌러 씌웠다.
"뭐, 뭐야?"
머리에 씌워진 고깔모자를 벗은 유한은 눈앞에 채린이 고깔모자를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터져서 연기만 솔솔 피어나는 폭죽을 들고 있는 채린은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생일 축하해! 유한아."
"생일 축하한다!"
채린의 외침과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내뱉은 측하의 외침이 유한의 고막을 때렸다.
어리벙벙했던 유한은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낯익은 사람둘이 잔똑 보였다. 극기도장 식구들과, 리지스와 옌스, 오펜을 비롯해 게임 속에서 언제나 사이좋게 지내는 친구들, 거기다 아침에 싸늘하게 굴었던 가족들까지.
모두들 환한 얼굴로 유한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있었다.
"생일? 내 생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늘 4월 28일이 자신의 생일이 맞았다.
오늘따라 가족들의 반응이 무척 섭섭하다 여겼는데,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바보, 그것도 모르고 있었니? 나도 기억하고 있는데."
채린이 핀잔을 주자 머쓱했던 유한은 괜히 기족들 핑계를 댔다.
"난 아무도 언질을 안 줘서……."
"이 녀석아, 말해 주면 감동이 덜할 거 아니냐."
송태수와 마주 앉은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 김 여사는 다가와 유한의 뼘을 쭉 늘이며 쏘아붙였다.
"아침에 엄마가 미역국 끓여 줬잖니! 그 힌트를 보고도 몰라?"
"아야! 미역국이야 평소에도 잘 끓이시면서."
김 여사는 계속 유한의 뺨을 쥐고 흔들며 말했다.
"채린이한테 고맙다고 해. 오늘 생일 파티는 채린이가 계획한 거니까."
"에? 정말?"
채린은 수줍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유한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던 그녀는 깜짝 파티를 열어 주기로 계획했다. 처음엔 같이 게임을 즐기는 친구들만 모아서 하려고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유한의 부모님과 송태수와 극기도 수련생들까지 몽땅 다 나왔다.
채린에게 이야기를 들은 유현이 부모님께 말했고, 표재훈은 곽대발에게, 곽대발은 또 송태수와 극기도 수련생들에게 말했던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내 생일을 축하해 주려고 왔다니.'
작넌 이맘때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었는데.
어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던 유한은 모든 사람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하아, 정말…… 정말 모두 모두 고맙습니다!"
"우우! 생일날 우는 바보는 어떤 놈이냐?"
"울면 생일 축하 노래 안 불러 준다!"
18개의 초가 꽂힌 커다란 케이크가 유한의 앞으로 나왔다.
모두가 생일 축하송을 소리 높여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유한은 입김을 혹 불어 촛불을 껐다. 환호와 박수 소리가 울리고 난 후, 선물 공세가 뒤이어졌다.
"자, 의리의 선물."
이지수가 자그마한 봉투를 내밀었다.
"고마워."
"생일 축하요, 브라더!"
"고맙다, 세라야 너도 왔구나."
선물을 주는 이들 중에는 오프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송코와 귀련이었다. 그들도 게임에서 채린에게 이야기를 듣고 오늘 이 자리에 나왔다.
"입시 준비 한다며? 열심히 해."
"고마워요, 누나."
'으흐흐, 천사다, 천사야!'
귀련을 본 곽대발의 입이 귀에 가서 걸렸다.
오늘 그가 이곳에 나은 이유는 바로 유한의 생일 때문이 아니라 귀련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은근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채린이 게임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들도 부를꺼라 했었으니까.
곽대발은 귀련이 유한에게 선물을 주고 제 자리로 물러 나자. 슬그머니 그녀의 옆에 가서 앉았다.
"안녕하세요. 저 아시죠?"
"아, 자칼 씨군요."
귀련이 아는 척을 하자 곽대발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곽대발이라고 합니다."
"호호, 이혜련이예요. 대발 씨는 실제로도 듬직하고 용감하게 생겼네요."
"하하, 혜련 씨야말로 훨씬 더 아름다우신……."
분위기가 무르익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의 시선은 유한과 채린에게 쏠려 있었다.
"자, 이제 나만 선물을 주면 되나?"
오늘 생일 파티의 주최자인 채린이 유한의 앞으로 다가갔다.
유한은 그녀에게 충분한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이런 화려한 생일 파티는 난생처음이었으니까.
그때 환하게 웃는 채린의 얼굴이 다가온다 싶더니 유한의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맞춰 주었다.
달콤한 채린의 입맞춤에 유한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우와아아아─!"
"삐익! 채린이 생각보다 과감한걸?"
카페 안에 부러움의 환호성과 휘파람이 터져 나왔다. 이상 반응을 보이는 건 동생 유현과 송태수뿐이었다. 유현은 유치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고, 송태수는 얼굴이 굳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빠?"
채린은 아버지가 유한에게 뚜벅뚜벅 걸어오자 자신도 모르게 물러났다. 행복감에 젖어 있던 유한도 움찔 놀랐다.
버럭 화를 내는 게 당연할 텐데, 송태수는 지금 씨익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연애에 빠진 곽대발과 한쪽을 응시하고 있는 표재훈을 빼고 극기도 수련생들도 송태수 처럼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생일이라니 빵을 줘야지."
"예? 빵이라뇨?"
생일에 빵 준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 봤다.
"생일 빵, 인마."
송태수는 어금니 꽉 깨물라는 표정으로 주먹을 치켜 들었다.
유한은 어금니 꽉 깨무는 대신 서둘러 뒤로 몸을 뺐다.
이제 보니 송태수와 극기도 일당은 생일 축하를 빌미로 자신을 두들겨 패러 온 모양이다.
"이 녀석아, 어딜 가냐? 생일이면 생일 빵을 먹어야지!"
"크악! 생일날을 제삿날로 만들 셈이세요?"
"허허! 녀석, 엄살은……."
극기도 수련생들은 유한이 도망 못 가게 둘러싸고. 송태수는 장난이라도 치는 듯이 가법게 주먹을 날렸다.
유한의 부모님도 장난으로 여길 정도로 송태수의 연기는 능청맞았지만, 그의 주먹 끝에 맺힌 육중한 기운은 장난이 아닌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생일을 축하해 주는 부녀 덕분에 천당과 지옥을 두루 경험하는 유한이었다.
4
유한을 쫓아 하베스트 안으로 들어온 흑곰파의 조직원 들은 지금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유한의 주변 인물들을 살펴본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커피 나왔습니다."
웨이트리스가 커피 잔을 내려놓자 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아가씨. 우린 아직 주문을 안 했는데……."
"내가 사는 겁니다."
낮지만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는 중저음의 목소리.
슬그머니 다가온 표재훈은 조직원들이 자리 잡은 테이블의 의자에 앉았다.
'이, 이 녀석은…….'
조직원들은 표재훈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종격투기 선수. 데뷔와 동시에 L.O.K 대회 8강에 오른 폭풍의 신인.
그러나 대한민국 최강의 야수가 키우고 있는 이 젊은 호랑이는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 무서운 놈 같았 다. 자신들에 대해 뭔가 눈치를 챈 걸 보면 말이다.
"아까 카페에 들어온 내내 유한이를 감시하더군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뭘 노리는지 모르지만, 그만두라 권하고 싶군요. 보시다시피 저 녀석은 우리 식구입니다."
말은 점잖게 했지만 이것운 경고였다. 만약 강유한이라는 저 고딩 녀석을 손대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그럼 알아들은 걸로 알고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 말을 하고서 표재훈은 제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뭔가 서늘한 기분에 커피잔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두 사람은 슬그머니 카페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장 보스인 흑곰에게 전화를 걸었다.
느긋하게 쿠바산(産) 시가를 태우고 있던 흑곰은 부하들의 전화를 받았다.
이야기를 마친 그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그의 얼굴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같이 창백하게 변했다.
"계획취소다. 애들 다 철수시켜."
"뭐예요? 무슨 일입니까?"
갑작스런 혹곰의 지시에 정현일은 당황했다. 흑시 강유한이 경찰에 신고라도 한 것은 아닌지?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말이다.
"이봐, 조카. 그 녀석 손보는 거 포기해라."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정현일이 따지고 들자 흑곰은 시가 연기를 빨아들였다 길게 내쁨으며 말했다.
"그놈 뒤에 극기도의 송태수가 있다."
"예에?"
극기도에 관한 건 정현일도 대충 들어 봤다.
요즘 잘나가는 신종 무술 극기도. 그 창시자인 송태수란 작자는 인간일까 싶을 정도로 괴물이라고 하던가?
"포기해. 만약 수련생에 손댄 걸 송태수가 알면 우린 끝장이야."
"뭐라고요? 대체 관장 나부랭이가 뭐가 그리 대단해서요?"
싸움 잘하는 것과 강한 것은 별개다.
정현일은 그리 믿고 있었다. 일진 세계에도 싸움 잘하는 녀석들이 수두룩하지만 한 손이 열 손을 당해 낼 수 없다.
송태수가 괴물같이 강하다 해도 그뿐. 든든한 배경이 있는 자신들에 비하면 별거 아닐 것 같았다.
"조카는 뭘 모르는 모양이군. 흑시 칠성파라고 들어 봤나?"
"예전 연예계에서 세븐스타 엔터테이먼트를 운영하던. 조직 말입니까?"
"그래, 보스인 김칠성 그 양반은 거느린 애들도 많았고. 정재계에 아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
그런데 김칠성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연예 기획사도 문을 닫았고, 그 많던 부하들도 다 뿔뿔이 흩어졌다.
"조카는 김칠성 그 양반이 지금 뭐하는지 알고 있나?"
"들리는 소문으론 시골에서 농사짓는다고……."
"거짓말이야. 춘천의 어느 병원에서 꿈쩍도 못하고 누워 있어. 팔다리 다 못 쓰고 음식은 씹지도 못해서 죽만 먹고 있지."
"아니, 어쩌다가?"
정현일이 눈이 동그래져 물었다.
"송태수 그 무지막지한 작자한테 깨져서 그래."
예전에 잘나가는 연예인을 하나 빼 간다고 어느 연예 기획사 사장을 칠성파가 손봐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다리가 부러진 이 사장은 송태수와 같은 부대를 나온 둥기의 형님 친구란다.
"부대 동기의 형님 친구…… 요?"
"김칠성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 그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는 다 과장된 거라고 생각했지."
동기의 형님 친구의 복수를 하기 위해 송태수가 칠성파를 공격했다. 그때 그를 도우러 동행한 무술가들이 몇 명 있긴 했지만, 사실 그들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고.
쪽수도, 쇠파이프도, 사시미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누군가 공기총을 쏴 갈기려 했지만 송태수가 던진 벽돌에 맞아서 저승 문턱까지 갔었다고.
"그 누군가가 바로 나였어. 마침 김칠성이랑 사업 이야기 때문에 왔다가 진짜 골로 갈 뻔했지."
"……."
영화 속 터미네이터를 실제로 만난 김칠성은 공포에 질린 나머지 7충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단다. 간신히 목숨은 구했지만, 반신불수의 몸이 되어 병원 침상에서 남은 생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나중에 칠성파 간부들이 연줄을 동원해 복수하려 했지만, 그 연줄들이 다 외면했지. 송태수도 적잖은 연줄이 있기 때문이었어."
"도대체 무슨 수로 그런 연줄을 갖고 있는 거죠? 그냥 땀내 나는 무술가일 뿐이잖아요."
"'한 가지의 극에 달한 사람에게 여러 사람이 관심을 가지는 법이거든."
관심을 갖게 되면 살펴주기 마련.
송태수는 젊은 시절 아프간에서의 일로 군 고위 관계자들과도 안면이 넓었고, 무술 수련을 하면서 양아치나 조폭들을 두들겨 팬 덕분에 경찰 쪽 사람들과도 알고 지냈다.
거기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수련생들이 정재계 인사의 경호원이나 비서로 들어가면서 그쪽의 비호도 받게 되었다.
"뭐 이건 소문인데 현직 대통령도 취임 전에 송태수에게 경호원들을 교육시키는 교관 자리를 주려고 했다 하더군."
"믿을 수 없어요."
"믿어. 그리고 절대 그 작자와 안 좋게 꼬이면 안 된다는 걸 명심해."
"그럼 강유한 저 자식을 그냥 두라고요?"
"놔두든 패든 그건 조카 맘이지. 대신 우리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이지 않았으면 좋겠군."
아무튼 결론은 흑곰파는 이 일에 절대 가담하지 않겠다는 것.
정현일은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벽에 가로막히다니.
'제길, 좋다. 박살 내는 건 일단 다음으로 미뤄 주마.'
그러나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은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박살을 내 놓을 절호의 기회를 잡을 때까지.
5
하베스트에서 떠들썩한 생일 파티를 마치고 유한은 기 분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어디 보자, 지수 이 녀석은 문화상품권을 줬구나"
방에서 친구들이 건네준 선물들을 뜯어 보는 유한의 마음은 훈훈함으로 가득했다. 어떤 것은 평범하고, 어떤 것은 취양에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준 사람의 마음이 깃든 소중한 선물들이었다.
"헤, 그중에서 가장 좋은 선물은……."
유한은 채린이 뽀뽀해 준 뺨을 어루만졌다.
그때의 달콤한 향기와 촉촉한 감촉이 되살아났다. 어찐지 붕붕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입가에는 절로 웃음이 걸렸다.
'채린이 정말 키스해 줄지는 몰랐어.'
부모님에, 송태수까지 있는데 말이다.
채린의 키스는 마치 '넌 내 거' 라고 도장을 찍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그야말로 우정을 넘어 애정의 영역에 들어왔다는 증거라 할 수 있겠다.
평소에 비아냥거리던 미음속의 바츠도 오늘의 이 대사건엔 할 말이 없었는지, 구석에 콕 처박혀서 니을 줄을 몰랐다.
마음속의 지그는 행복에 젖은 유한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채린이 생일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
그 말에 유한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채린의 생일이 언제였더라?
그는 필사적으로 옛날 기억을 더듬었다. 다행히 금방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채린의 생일은 8월 15일, 그러니까 광복절과 한날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작넌에는 그냥 넘어갔었군.'
그땐 다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만큼 가까운 관계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핑계를 대기엔 너무 큰 실수를 저지른 게 아닌가 후회되었다.
"으음, 올해는 작넌에 못한 걸 두 배로 해서 화려하게 챙겨 줘야지."
선물도 멋진 걸 준비하고, 지난번의 답례라고 키스도 해 주는 것이다. 채린이는 뺨에 했지만 자신은 용감하게 입술에다가…….
"흐흐흐!"
"대마왕이 따로 없군."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놀란 유한은 입에 흐르는 침을 닦고 돌아섰다. 눈앞에 목소리의 주인 유현이 서 있었다.
"무, 무슨 일이냐?"
"형한테 택배 왔던데. 중국에서."
"중국?"
중국에서 자신에게 올 택배가 있던가?
유한은 궁금해 하면서도 포장을 풀고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종이 상자 안에는 상당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피규어 인형이 하나 들어 있었다. 바디 라인이 드러나는 경갑에 멋진 활을 든 늘씬한 미소녀 궁수 피규어.
고정시키는 발판에는 '시아' 라고 적혀 있었다. 바로 채린의 캐릭터 이름.
"와우, 형한테 이런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네."
"이런데 취미 없어, 인마!"
취미는 없지만 좋긴 했다. 마치 작아진 채린을 앞에 두고 있는듯한 기분이었으니까.
"이건 주문 제작형 피규어야. 값도 무지 비싼데 대체 돈을 어디서 마련한 거야? 아이템 현질이라도 했어?"
"내가 산 거아니라니까!"
"아아, 우리형이 덕후였을 줄이야……."
"야! 사람 말 좀 들어!"
유현은 들은 척도 않고 방을 나가 버렸다.
어처구니없게 미소녀 오타쿠로 누명을 쓴 유한은 택배 상자를 다시 잘 살펴보았다.
처음엔 내용물이 궁금해서 누가 보냈는지 제대로 살펴 보지 않았다.
발신 주소와 보낸 사람의 이름은 한자로 적혀 있었다.
베이징에서 유한에게 택배를 보낸 사람의 이름은……."
"홍객(紅客)?"
홍객이란 중국어로 해커를 뜻한다.
다시 말해 이 택배를 보낸 것은 해커, 바츠를 해킹한 해커라는 말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자신을 잡아 보라는 도발인가?
아님 순수한 생일에 대한 축하인가?
유한은 해커가 준 생일 선물을 버리려다 말았다.
절대 채린을 닮아서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