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 합금 상사
지그 합금 상사
1
게임 플레이 시간을 조절한 덕분에 유한은 강의 시간에 졸지 않아도 되었다. 나름 재수생 칭호를 따지 말자고 각오한 까닭인지 몰라도 강의 내용도 머릿속에 제대로 입력 되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강사의 말이 끝나자 유한은 다른 학원 원생들과 마찬가지로 교재를 덮고 가방을 챙겨 나왔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은 유한은 버스 안에 걸린 모니터 쪽으로 눈을 옮겼다. 마침 게임과 관련된 뉴스를 방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근 간 선생님을 잊지 못한 초등학생들이 게임 속에서 선생님을 찾아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뉴스에 따르면, 서해 낙도(落島)의 분교에 재직하던 선생님이 다른 지방으로 전근을 갔다고 한다.
그러자 평소 인자했던 선생님을 몹시 따르던 아이들은 혹시 게임상에서 존재할지 모르는 선생님의 캐릭터를 수배했다고.
이 선생님은 게임에 취미가 없었으나, 지인에게서 제자 들이 게임에서 자신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캡슐을 마련하고 계정을 만들어 제자들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후 직접 만나지는 못하지만, 매일 제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학습 지도에도 도움을 주고 있단다.
예전에 손석진이 말했던 가상현실 게임의 소통 능력으로 인한 흐뭇한 결과었다.
'참 좋은 선생님이네.'
유한은 저런 사람이야말로 '스승님' 칭호를 얻을 만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교육 노동자' 수준도 안 되는 교사들을 봐 온 그에게 있어 낙도의 초등학생들이 무척 부러웠다.
[게임과 관련한 뉴스가 하나 더 있습니다. 게임 내 아이템을 두고 다투던 20대 부부가 급기야 이혼을 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좋은 뉴스가 있으면 나쁜 뉴스도 있었다.
남편이 고가의 아이템 A를 획득했는데, 마침 이것이 필요했던 부인이 달라고 했단다. 그러나 남편은 거절하고 아이템을 팔았고, 그 돈을 게임 내 몬스터 경주 시합에 걸었다가 몽땅 다 날렸다.
격분한 부인은 남편에게 잔소리를 퍼부었고, 남편은 자신의 플레이를 간섭하는 부인을 비난했단다.
결국 안 그래도 이전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부부는 이혼 도장을 찍어 버렸다고 한다.
"저거 에르젠이잖아?"
뉴스에 나온 아이템 A의 정체는 에르젠이었다.
방송에서 부부가 한 게임과 아이템의 이름이 나오진 않 았지만, 유한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다 에르젠 값이 너무 올랐기 때문이야.'
에르젠이 예전 시세 정도였다면 부부가 저리 다투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이전부터 둘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지만 말이다.
[다음은 문화계 소식입니다. 업로더들이 신간 스캔본을 돌리는 데 격분한 장르 소설가 강찬 씨가…….]
다음 뉴스가 이어졌지만, 이미 유한의 관심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퀘스트를 마저 완수하고 에르젠 제조법을 익히자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2
랑그리아 평원 남쪽에는 카마라 해(海)라 불리는 작은 바다가 있었다. 남쪽을 제외하고 육지로 빙 둘러싸인 이 바다의 밑바닥에는 아쿠아틴이 무진장 깔려 있었다.
에르젠 합금 기술을 익히려는 대장장이 유저들은 해저에 있는 아쿠아틴을 인양하기 위해서 바다에 잠수해 들어갔다.
그러나 카마라 해는 의외로 수심이 깊어 해저에 있는 아쿠아틴을 인양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잠수 스킬에 능한 유저를 고용해야 할 것 같은데?"
"쌍끌이 어선 같은 걸로 바다 밑바닥을 싹 훑어 버리면……."
그러나 대타를 불러오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언데드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랑그리아 평원에는 항구도 없고, 자연히 이곳에서 활동하는 어부나 어선이 전무했다.
거가다 인양에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카마라 해로 몰려온 바다의 폭군들 탓이다.
수면에 뾰족한 삼각 지느러미를 내놓고 활개 치는 녀석 들은 바로 레벨 190대의 샤크와 놈들의 두령 격인 필드 보스 죠스.
녀석들은 해안 근처까지 와서 활개를 치고 다녔다.
덕분에 놈들이 등장한 이후 바다에 들어가려는 유저는 전무했다.
"후후후, 이러면 제아무리 지그 녀석이라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상어 작전을 입안한 직원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정경욱은 고개를 저었다.
"민폐야. 다른 유저들의 플레이까지 막고 있잖아."
사실 민폐를 생각했으면 처음부터 퀘스트에 손을 대지 말았어야 한다.
"지그가 퀘스트를 포기하는 즉시 상어들을 다른 바다로 이동시키겠습니다."
하지만 과연 지그가 퀘스트를 포기할까?
지금까지 유한이 해 온 것을 봐 온 정경욱으로선 회의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상어라…… 거기다 해저에 있다 이거지?"
카마라 해에 도착한 유한은 유저들에게 자세한 사정을 들었다.
어차피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는 퀘스트.
대장장이 유저들은 그에게 필요한 정보들을 제공했다. 그들은 명성이 높은 지그라면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해 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흠, 일단 뇌제로 변신하고……."
뇌제가 된 유한은 한 대장장이가 데려온 용병 NPC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용병 NPC는 방패와 삼지창, 트라이던트를 들고 있었다.
"어이, 이봐요. 그 트라이던트를 상어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던질 수 있겠어요?"
유한의 물음에 용병 NPC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회의적인 눈빛을 보였다.
"지금 놈들이 해안 가까이 있으니 가능은 합니다. 하지만 이걸 던진다고 해서 놈들을 쫓아 버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는데요."
"그래도 일단 던져 보라고요."
용병 NPC는 자신을 고용한 대장장이 쪽을 바라보았다. 물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곧장 들고 있던 창을 상어 무리 쪽으로 던졌다.
상어들은 해안에서 뭔가 날아오자 날렵하게 몸을 피했다.
그런데 트라이던트가 바다에 떨어지는 순간, 하늘에서 무엇인가 번찍 떨어졌다.
"선더 스피어!"
번개의 전격은 트라이던트 창대를 타고 바다로 퍼져 나갔다.
트라이던트를 피했다고 안심하고 있던 상어들은 강력한 전격에 휘말려 굉장한 쇼크를 받았다. HP가 뚝 떨어진 상어들은 허연 배를 드러내곤 수면 위로 떠을랐다.
쇼크로 정신을 차리지 듯한 상어들은 파도에 의해 유저 들이 있는 해안으로 밀려왔다.
"아직 안 죽었네?"
"그럼 죽여야지."
"하지만……."
유저들은 유한의 눈치를 보았다. 상어 군단을 잡은 건 그이기 때문이다.
어느새 원래의 지그로 돌아간 유한은 상어 군단의 두령인 죠스의 숨통을 끊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유저들에게 흔쾌히 선심을 썼다.
"나머지는 님들이 알아서 하세요."
유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저들은 창칼을 뽑아 들고 널부러진 샤크들에게 달려들었다.
"앗싸! 경험치 챙기자!"
"비켜! 저 지느러미는 내 거야!"
상어가 강한 것은 바다에서일 뿐이다. 땅에서는 버둥거려 봤자 속수무책. 상어 군단은 작정을 하고 달려드는 유저들의 손에 난도질을 당했다.
-경힘치 6.000을 얻었습니다.
-죠스의 지느러미를 얻었습니다.
-레밸 190이 되었습니다.
솜씨가 1 올랐습니다.
행운이 1 올랐습니다
죠스를 처치한 유한은 해저에서 아쿠아틴 코어 스톤을 찾을 방법을 강구했다.
수영이나 잠수 스킬을 제대로 익히지 않은 이상, 물속에 들어가서 활동하기 어렵다는 건 심연의 호수에서 충분히 경험했다.
그때 호수 바닥에 있는 운석을 건진다고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렇지! 그게 있었지!"
심연의 호수 일을 떠올리던 유한은 손가락을 튕기며 인벤토리를 뒤졌다. 인벤 구석에 있는 아이템을 주워 든 유한은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했다.
[네시의 비늘]
설명 : 네시의 아가미를 덮고 있던 비늘. 잠수할 때 이것을 입에 물면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다.
심연의 호수의 필드 보스안 네시를 처치하고 얻은 아이템 네시의 비늘. 혹시 쓸 일이 생길지 모른다 생각해서 놔뒀는데 이번에 톡톡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후후후, 이것만 있으면 얼마든지 물속에서 돌아다닐수 있다는 말씀."
유한은 네시의 비늘을 입에 물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아쿠아틴 코어 스톤을 들고 해안으로 올라왔다.
유저들은 한참 동안 잠수를 하고도 멀쩡한 유한을 부러움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 중에는 저번에 찰흙 지옥에서 유한을 구해 주었던 카프도 끼여 있었다.
'그래, 빚 감는 셈 치자.'
유한은 제 몫을 다한 네시의 비늘을 카프에게 내밀었다.
"빌려 줄 테니 쓸래요?"
"고맙습니다."
카프가 네시의 비늘을 물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자 유저들이 유한의 팔다리를 붙잡고 애원했다.
"지그님, 우리도 좀!"
"빌려 주시기만 하면,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들을 외면하고 가려던 유한은 생각을 바꾸었다.
이번 에르젠 사태로 자신을 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서 무정하게 돌아서 버리면 앙심을 품는 사람이 적잖게 나을 것이다.
조그마한 호외를 베풀면 많은 대장장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베푼 은혜는 자신에게 득이 되어 돌아을 터.
"싸우지 말고 돌아가면서 쓰세요. 다 쓰고 저한테 돌려주는거 잊지 말고요."
"고맙습니다!"
기뻐하는 대장장이 유저들을 보며 유한은 슬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혹시 여러분들 중에 의향이 있으신 분들은 저희 지그 철강 조합에……."
지그 철강 조합은 아직 더 성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인원 보강부터 해야 한다.
에르젠 합금 기술을 획득하겠다고 달려든 대장장이치고 실력이 낮은 이들은 없다. 그들을 받아들이면 조합에 상당한 도움이 될 거라 예상한 유한은 대장장이 유저들을 상대로 스카우트 작업을 벌였다.
"저 가입하겠습니다."
"정말 스킬 랭크를 을리는 거 도와주시는 거지요?"
"지그 님께 도움을 받았는데 저도 도와 드려야죠."
카프를 비롯해 꽤 전도유망한 대장장이 유저들이 지그 철강 조합의 길드원으로 가입했다.
에르젠 합금 기술을 배운다고 이리저리 고생한 퀘스트 였지만, 얻은 것이 적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유한은 에르젠 합금 기술보다도 더 귀한 것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3
쾅!
망치를 내리치자 큼지막한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그래도 성질이 풀리지 않았는지 파르가스는 조각난 바위를 다시 내리치며 가루로 만들었다.
"제기랄! 이런 망할!"
한참 동안 펄펄 뛰던 따르가스는 팔짱을 끼고 자신을 바라보는 유한을 돌아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넌 뭐냐? 대체 어찌 된 놈이기에 이렇게 빨리 코어 스톤들을 모아 올 수 있었냐고!"
사실 유한 입장에선 적잖은 시간이 걸렸지만 파르가스의 입장에선 그렇지 않았다. 그는 적어도 유한이 1달, 아니 몇 달은 넘게 고생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넌 대체 정체가 뭐냐고!"
"뭐긴요. 지그라는 잡놈입니다."
히죽이며 답한 유한은 곧장 말을 이었다.
"그리고 모험하는 대장장이랍니다."
유한의 응담에 파르가스는 기가 막힌 듯 한숨을 내쉬더니 욕지거리를 마구 늘어놓았다.
"이런 빌어먹다 썩을 놈 같으니! 뭐가 어쩌고 어째? 모험하는 대장장이? 젠장!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한참 구시렁거리던 파른가스는 유한에게 책 한 권을 집어 던졌다. 머리를 노려 날렸지만 유한은 능숙하게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가져가! 거기 에르젠 합금 기술이 적혀 있다. 그 기술을 익힌다면 너도 에르젠을 만들 수 있을 거다."
책을 받은 순간, 유한의 눈앞에 퀘스트 종료를 알리는 안내창이 떠올랐다.
[파르가스와 시힘]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명성이 1,000 올랐습니다.
-경험치 3,000을 얻었습니다.
-에르젠 합금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백기를 든 파르가스는 여전히 약이 올랐는지. 유한에게 망치를 집어 던졌다. 물론, 유한은 망치를 가법게 피해 버렸다.
"꺼져! 다신 오지 마! 내 눈에 또 띄면 죽을 줄 알아!"
"저도 다시 파르가스 님을 만나고 싶진 않네요. 안녕히 계세요."
파르가스에게서 물러난 유한은 뇌제의 홀을 꺼내 들고 뇌제로 변신했다. 그리고 여전히 투덜거리는 파르가스의 머리 위로 선더 스피어 한 방을 날려 보냈다.
"크악! 어떤 놈이야!"
괴물 같은 파르가스는 번개에 직격을 당하고도 멀쩡히 살아 있었다. 펄쩍 뛰는 그를 보고 만족한 유한은 재빨리 짐마차를 타고 철공소로 돌아갔다.
"어디보자, 에르젠 제조법이라……."
철공소로 돌아온 유한은 개인 작업실에 원소 합성로를 설치하고 에르젠을 생산할 준비를 했다.
"합성로 중앙에 은괴를 놓고 주변으로 다섯 가지 원소 광물을 배치하라 이거지?"
파르가스가 건네준 책에 적힌 대로 작업을 진행하던 유한은 파르가스에게서도 들어 보지 못한 정보를 책 속에서 발견했다. 바로 코어 스톤에 관한 것이었다.
……원소광물중에 유달리 순도가높고성질이 우수한것을 코어 스톤이라 칭한다.
이것은 식물로 치면 종자와 같은 것으로. 코어 스론을 채굴해 다른곳에 놓아두면, 얼마후 그 자리에 원소 광물이 생성되고, 오랜 시간이 흐르면 다른 코어 스톤이 만들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특징을 생각하면 코어 스톤은 보다 생산적인 용도로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 시대에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었던 연금술사들은 귀중한 코어 스톤을 헛되게 낭비하고 말았다.
부디 후학들은 황금알을 많이 얻읕 욕심에 거위를 죽이는 짓을 하지 않기를…….
다른 대장장이들이 파르가스에게서 받은 책에서 이 내용을 본다면 곧장 코어 스톤울 찾겠다 나설지도 모른다. 귀한 광물을 농사짓는 것처럼 생산해 낼 수 있다지 않는가.
"하마터면 진짜 귀한 걸 날려 버릴 뻔했네."
유한은 코어 스톤으로 에르젠을 만드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근방에 코어 스톤을 묻어 두었다.
철공소 제련 공방 근처에는 플레이마 코어 스톤을, 계곡에는 아쿠아틱 코어 스톤을 묻었고, 나머지 코어 스톤들도 적절한 곳에다가 묻어 두었다.
그리고 코어 스톤을 묻어 둔 곳에는 블랙 아이언을 배치해 함부로 홈쳐 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다음 날, 학원을 갔다 온 유한은 곧장 게임에 접속해 코어 스톤이 묻힌 곳을 파 보았다. 그러자 책에 적힌 대로, 코어 스톤 근처에 있는 몇 개의 돌멩이들이 원소 광물로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크크크, 좋았어! 이걸로 에르젠을 왕창 만들어 내는 거다!"
새로 만들어진 원소 광물들을 가지고 개인 작업실에 돌아온 유한은 곧장 에르젠 합금 제조를 시작했다.
은괴와 원소 광물을 배치하고, 책에 적힌 대로 불의 온도를 조정하고, 시간에 맞춰 원소 합성로를 가열했다가 식히기를 되풀이했다.
-에르젠 합금 생산에 실패했습니다. 온도를 제대로 맞추지 못했습니다.
합금 스킬 경험치10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에르젠 생산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재료가 모이고 설비가 갖춰지면 얼마든지 만들어질 거라 생각했었는데.
'하긴 쉽게 만들어지면 비싸지도 않겠지.'
유한은 첫 번째 실패에 그리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에르젠 합금 생산에 도전했다.
-에르젠 재조에 실패했습니다. 냉각 시간을 재대로 맞춰야 합니다.
-에르젠이 아닌. 이상한 금속이 만들어졌습니다. 원소 광물의 배치가 틀렸습니다.
"카악! 그만 완성 좀 되라고!"
계속 실패를 되풀이하자 유한은 펄쩍 뛰었다.
사실 실패하고 있는 것은 유한뿐만이 아니다. 지그 철공소에 와서 에르젠 합금 생산에 도전하고 있는 카프와 다른 대장장이들도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진정해라, 강유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스스로를 다독인 그는 다시 에르젠 합금을 제조했다. 여러 번의 실패 덕분에 유한은 무척 신중하게 되었고, 작업에 대한 집중력도 올라갔다.
사실 연이어 실패했던 것은 집중력이 떨어진 탓이기도 했다. 악명 높은 퀘스트를 완수했다는 기쁨에 마음가짐이 해이해져 있었던 것.
"이번에는꼭!"
유한은 이글거리는 원소 합성로 앞에서 손을 모아 기도 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마지막 작업까지 한순간도 집중력을 흩트리지 않았다. 반드시 에르젠이 만들 거라 확신했다.
-에르젠 합금을 만들었습니다.
합금 스킬 경힘치 200을 얻었습니다.
-에르젠으로 여러 가지 무구와 아티펙트를 제조할 수 있습니다.
"야호, 드디어 만들었다!"
유한은 자신이 완성한 에르젠 합금괴를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이제 블랙 아이언을 다시 정상적으로 생산 할 수 있다. 더해서 에르젠 가격만큼 마진을 남길 수 있다.
"성공했대요!"
"우와! 정말 지그가 에르젠을 만들었어?"
"조수가 큰일을 해냈구나!"
유한의 성공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침체되어 있던 블랙 아이언 생산 공방이 다시 활기를 되찾았고, 유한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카프 외 다른 대장장이들도 힘을 내기 시작했다.
얼마 후 카프도 에르젠 생산에 성공했고, 다른 대장장이들 중에서도 에르젠을 만든 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차차 실수가 적어지고 에르젠 생산도 많아지자 유한은 정식으로 에르젠 생산 공방을 열었다.
"좋아. 이제 슬슬 반격을 해 볼까?"
에르젠을 생산한 것으로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자신을 발전시키도록 만든 고마운 녀석들에게 갚아 줘야 할 것이 있었다.
"아주 이자까지 쳐서 갚아 주마!"
유한은 에르젠을 독점해서 자원 대란을 일으킨 놈들과 그 배후 세력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4
근래에 아르페디아에서 가장 값이 많이 오른 아이템은 에르젠이다. 원래 시세보다 몇 배 뛰어오른 에르젠은 현재 25∼30만골드 사이에 거래될 정도로 값이 을랐다.
덕분에 에르젠이 들어간 마법 무구와 아티펙트들의 가격도 덩달아 히늘 높은 줄 모르고 뛰었고, 에르젠을 매입 하고 판매하는 상단들의 이문도 날로 중가했다.
그 상단들 중에서 요즘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곳이 미네랄 상회였다. 그들은 거미줄 같은 매입망을 구축해 발리안 칠공소와 함께 에르젠 시장을 양분해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키예프 공국에서 에르젠 추가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상회장님, 후소 대록의 다카미 영주가 에르젠 합금 검 삼십 자루를 주문 요청해 왔습니다."
NPC 상인 스톤은 쏟아지는 주문과 돈을 보곤 연방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내수면 내수. 수출이면 수출. 어느 것 하나 안 되는 것이 없었다.
"장사가 잘되어 가는 모양이네."
카잔 공국에 있는 미네랄 상회 본점에 화려한 차림의 여마법사가 둘어왔다. 그녀를 본 스톤은 한걸음에 달려가 꾸벅허리를 숙였다.
"유나 님 오셨습니까?"
유나는 스톤의 인시를 대충 받아 주고 그의 자리를 떡하니 차지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있던 거래 장부를 멋대로 살펴보았다.
마치 자신이 미네랄 상회의 주인이라도 되는 듯이.
"어디 보자, 이번 주 매상이 칠백팔십이만 골드라…… 나쁘지 않은걸?"
"하하하, 이게 모두 베히모스 폐하와 노벨 재상님 덕분이지요."
반역에 성공한 뒤 철십자 길드의 간부들은 마노스 제국의 고위 관료가 되었다.
스톤의 말에 유나의 가느다란 실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베히모스랑 노벨은 고맙고 나는 고말지 않다는 거야?"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유나 님이 제 은인이라는 걸 잊지 않고 있습니다."
원래 NPC 스톤은 철이나 구리를 거래하는 그저 핑범한 광물 상인이었다. 그런 그를 유나가 발견해 철십자 길드에 추천해 주었고, 철십자 길드는 그들이 가진 인맥과 정보력, 자금을 동원해 스톤을 지원해 주었다.
스톤이 미네랄 상회를 세우고 에르젠 거래로 성공하게 된 것은 다 그 때문이다.
"길드 상납금으로 사백만 골드를 가져가겠어. 그리고 이십만은…… 알지?"
"물론입니다. 소인이 유나 님께 드리는 성의 아닙니까?"
"호호호, 언제나 고마워."
유나는 슬쩍 떼먹은 20만 골드로 유명 메이커에서 내 놓은 명품 구두를 살 생각이었다. 얼마 전에 옷은 새로 맞췄지만, 신발이 코디가 되지 않아 영 맘에 들지 않았다.
"가볼게. 장사 잘하고."
"살펴 가십시오."
스톤은 떠나는 유나를 배웅했다.
때마침 미네랄 상회의 본점으로 들어서려던 소녀가 유나를 보았다.
'메이지스' 라는 이름의 그녀는 장미꽃처럼 도도하고 꽤 성격 있어 보였다. 그녀는 유나를 슬쩍 째려보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쇼. 무슨 일이십니까?"
"갖고 있는 에르젠을 판매하러 왔는데요."
메이지스의 말에 스톤이 냉큼 달려와 거래에 응했다. 에르젠은 사는 족족 큰돈을 벌어다 주는 횡금알 낳는 거위였기 때문이다.
"에르젠을 얼마나 파시렵니까?"
"이만큼이요."
그녀는 들고 있던 네모난 여행 가방의 뚜껑을 열었다. 찬란한 광택을 내쁨는 에르젠 합금괴가 가방 안에 가득 들어 있었다. 스톤의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모두 이십 개예요. 한 번에 이만한 물량을 받아 줄 곳은 미네랄 상회뿐이라 생각해서 찾아왔어요."
"무, 물론입니다. 개당 이십만 골드. 어떻습니까?"
"이십삼만 골드는 받아야겠는데요."
"허허, 매입 시세가 이십만 골드입니다. 이십일만까지 해 드리지요."
밀고 당기던 두 사람은 결국 22만 골드에서 합의를 보았다.
스론이 메이지스에게 지불해야 할 금액은 총 440만 골드. 워낙 액수가 크다 보니 현금으로 지불하기가 곤란했다. 안 그래도 유나가 좀 전에 상납금이라며 왕창 뜯어 가지 않았던가.
"실례지만 일단은 어음으로 지불 약속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일주일 안에 리지스 신용 금고의 메이지스 계좌로 넣어 주세요."
스톤은 그렇게 지불키로 하고 어음을 작성했다.
거래를 끝내고 메이지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스톤은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슬찍 말을 건넸다.
"그런데 메이지스 님은 리지스 님과 많이 닮은 것 같군요?"
리지스가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니 상인들 중에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호호호, 그런 이야긴 많이 들어요. 하지만 제 쪽이 더 매력적이지 않나요?"
"하하핫, 물론입니다."
실은 메이지스는 리지스가 새로 만든 부캐였다.
그녀가 미네랄 상회와 거래를 마치고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옌스가 다가와 물었다.
"누님은 얼마에 팔았수?"
"개당 이십이만. 넌 이십일만 골드에서 적당히 처리해. 똑같은 값을 달라고 하면 의심할지 모르니까."
"알아. 나도 그렇게 멍청하진 않다고."
"그럼 난 다른 데 또 팔러 갈 거니까. 수고!"
"발덴 지부엔 가지 마슈. 그쪽으론 에이린이 갔으니까."
"알았어."
유한의 친구들은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지그 철공소에서 만든 에르젠을 판매했다.
그날 하루,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평소보다 많은 에르젠이 풀렸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5
"흐흐흐, 오늘은 대체 무슨 날이라서 이리 운수가 좋았을까."
NPC 스톤은 매입한 에르젠들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아까 웬 부잣집 아가씨로 보이는 소녀가 에르젠괴 20개를 팔았고, 용병 같아 보이는 녀석이 와서는 또 10개를 팔았다.
모두 30개.
개당 30만 골드에 팔면 총 900만 골드라는 거금이 손에 들어은다. 물론 어음을 대신해 판매자들에게 지불할 돈을 빼야 하지만, 그래도 250만 골드라는 수익이 남는다.
거래 2건으로 250만 골드를 남겼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에르젠 시장을 장악했지만, 한 번에 100만 골드 이상 차익을 남긴 경우는 드물었기에.
"자, 이걸 누구에게 팔아 버린다?"
다음 날, 스톤은 평소 자주 거래했던 대장장이 아론을 찾아갔다.
그러나 아론은 스톤이 부르는 값에 에르젠을 매입하지 않았다. 평소에 에르젠이 모자라다며 비싼 값에도 넙죽넙죽 사들일 때와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아론에게 퇴짜를 맞은 스톤은 맥스&마야 대장간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거래를 거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현 시세보다도 훨씬 낮은 가격을 요구했다.
"거참 이상한 일이군. 발리안 철공소에서 수작이라도 부렸나?"
에르젠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발리안 철공소에서 에르젠 값을 후려친게 아닌가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발리안 철공소에서 에르젠 가격을 좀 내리긴 했지만, 그리 큰 차이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설마 시세가 떨어지고 있는 건가? 에잉! 그래선 곤란한데."
헛걸음을 하고 본점으로 돌아온 스톤에게 점원 NPC가 묵직한 서류를 내밀었다.
"상회장님, 지부들에서 온 거래 보고서입니다."
스톤은 거래 보고서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하나 확인 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보자…… 남바린 지부가 에르젠 합금괴 오십 개 매입, 발덴 지부가 칠십 개 매입, 브로인 지부가 사십 개 매입……."
스톤은 지부들의 에르젠 매입 거래를 살펴보다가 얼굴이 점차 하얗게 변했다.
평소보다 에르젠 매입량이 많았다. 예전 같으면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거래 거부와 가격 인하 요구가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이만큼의 물량이 풀렸다는 것은 에르젠 가격이 떨어질 징조였다.
분명 늘어난 물량을 미네랄 상회에서만 매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에르젠을 거래하는 다른 상단에서도 이만한 물량을 매입했다면…….
"당장 마노스 제국에 보고해라. 에르젠 물량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고. 그리고 무슨 일인지 알아봐 달라고 요청해라!"
스톤은 마노스 제국뿐만 아니라 상계의 인맥을 동원해서도 상황 파악에 나섰다.
그가 초조하게 답을 기다리는 사이, 에르젠 시세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직 보유한 에르젠을 제대로 판매하지도 못했는데, 시세는 매입가인 20만 골드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이래선 이익을 남길 수 없다. 막대한 적자를 짊어져야 할 뿐.
"스톤님! 큰일 났습니다!"
에르젠 시세가 13만 골드까지 떨어졌을 때, 정보 파악을 위해 내보냈던 일꾼이 돌아왔다.
"에르젠 합금을 제조하는 대장장이들이 늘었답니다."
"뭐라고?"
기겁한 것은 스톤뿐만이 아니다.
마노스 제국에 있는 철십자 길드도 발칵 뒤집혔다.
지금까지 길드가 가진 힘으로 여러 상단을 조정하여 에르젠의 시세를 올리고, 그 과정에서 생긴 이문을 챙겨 왔다.
그런데 에르젠 가격이 갑자기 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건 에르젠 합금을 제조할 수 있는 대장장이들이 많아져 시중에 풀린 양이 급격히 늘어난 덕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에르젠 힐금 기술은 웬만해선 배울 수 없다면서?"
베히모스는 길길이 날뛰었다. 길드의 정보 담당 카르산이 자세한 상황을 보고했다.
"퀘스트가 어려운 건 사실이고, 최근엔 심하다 싶을 정도로 난이도가 올랐어. 하지만 완수한 유저들이 적지 않았대."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가능했냐고!"
카르산은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지그란 놈 때문이야. 그 자식이 대장장이들이 퀘스트 하는 걸 도와줬다고 하더군."
몬스터도 잡아 주고, 곤경에 처한 유저를 구해 주기도 했단다. 거기다 바닷속에 들어가라고 중요한 아이템을 빌려 준 적도 있다고.
"제기랄! 또 그 빌어먹을 대장장이 놈이냐!"
어떻게 된 게 자신과 철십자 길드의 행사에 번번이 방해가 되는 지그였다.
"그런데 에르젠은 대장장이만 많다고 해서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에르젠을 만들기 위해서는 은 외에 5대 원소 광물이 필요했다.
"그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지그 철공소 인근에서 5대 원소 광물이 대량으로 나온다고……."
"크아악! 뭐 이딴 녀석이 다 있어!"
운이 좋아도 이렇게 좋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유한이 또 무슨 일을 벌이는가를 알면 베히모스는 고함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철십자 길드원들에게는 아직 속이 터질 일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지그 합금 상사.
오늘 막 남바린 영지에 문을 연 상회다.
이 상회의 주인은 요즘 한창 아르페디아에 그 이름을 날리고 있는 상계의 큰손 리지스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세운 회사들과 달리 지그의 이름을 내세운 이유는 대장장이로서 유명한 유한의 명성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유한도 이름을 빌려 주는 데 기꺼이 동의했다.
"합금 상사? 합금 위주로 파는 데인가?"
"아무래도 그렇겠지."
유저들이 웅성이며 모여든 가운데, 상사 본점 앞의 단상으로 리지스와 유한이 나란히 올라갔다.
리지스는 예전에 행상을 하며 무구를 팔던 시절처럼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새로 만든 회사의 선전과 홍보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아르페디아 상계의 큰손 리지스 입니다. 오늘 저의 네 번째 회사의 창업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께 먼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호기심 때문이지 딱히 축하하러 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매력적인 미녀가 정중히 예를 표하는 데 싫다고 할 사람은 없었다.
"지그 합금 상사는 말 그대로 합금을 거래하는 회사입 니다. 여러 가지 도구와 무기를 만드는 데 쓰이는 합금을 보다 싸고 원활하게 공급해 드리고자 만든 거지요. 구리, 니켈, 크롬, 그리고 에르젠 합금까지 말이에요."
에르젠이란 말이 나오자 유저들이 술렁거렸다.
비록 대장장이 유저는 몇 없지만, 그들도 알고 있었다. 에르젠 값이 터무니없이 오르는 바람에 마법 무구 값이 천정부지로 을랐다는 것을.
그런 에르젠을 싸고 원활하게 공급해 준다고 한다.
대체 얼마나?
그 대답은 리지스의 옆에 있는 유한이 해 줬다.
"저는 지그 철공소의 사장이자 지그 철강 조합장 지그입니다. 근래에 있었던 에르젠 대란 덕분에 저와 몇 명의 길드원들은 에르젠 제조법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에르젠 제조에 필요한 원료도 대량 구할 수 있게 되었죠."
유저들의 심장은 두근두근했다. 이런저런 유한의 사정보다 그가 에르젠 값을 얼마에 책정할지 얼른 알고 싶었다.
"몇 차례 실패가 있었고 현재도 제조가 까다롭긴 하지만, 적지 않은 에르젠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저는 길드원들에게 싸게 공급하고, 또 남는 것은 많은 분들께 저림한 가격에 팔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얼만데요?"
"빨리빨리 말해 주세요!"
유저들의 애간장을 잠시 끓이던 유한은 오른손을 유저들 앞에 확 펼쳤다. 그리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오만."
"오만 골드라고요?"
얼마 전 떨어지긴 했지만 에르젠은 여전히 괴 하나가 10만 골드를 넘었다. 그런데 유한은 그걸 더 깎아서 원래의 시세가로 불러 버린 것이다.
"사정이야 어떻든 근래의 에르젠 시세 폭등은 정상적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전 그걸 다시 돌려놓을 생각입니다"
원래 유한은 이 정도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바가지 씌우려 했던 미네랄 상회와 그 배후 세력에 따끔한 일침을 가하려고만 했는데, 생각보다 에르젠 생산량이 많자 아예 가격을 원상태로 돌리기로 했다.
"와아아!"
유한의 말에 유저들이 함성을 질렀다.
에르젠 가격이 내리면 마법 무구와 아티펙트의 가격도 떨어지게 될 터. 이것은 단지 대장장이들에게만 기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보다 안정된 에르젠 생산이 가농해지면 더 값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그 님 최고!"
"사랑해요, 지그 님!"
말만이라도 좋았다. 파는 수량이 적어도 괜찮았다. 정말 그렇게만 팔아 준다면 고마운 일 아니겠는가,
유저들의 환호를 뒤로하고 단상을 내려간 유한과 리지스는 망치를 하나씩 잡고 방금 전에 서 있던 단상을 두들겨 부셨다.
나무 단상이 부서지면서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눈부시게 환한 에르젠 합금괴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며칠 동안 카프를 비롯한 에르젠 생산 공방의 대장장이들이 쉬지 않고 생산했던 땀의 결실이었다.
"오늘 특별히 이곳에 모인 분들에게는 개당 삼만 골드에 팔겠습니다!"
"우와아아아!"
유저들은 앞다투어 유한과 리지스에게 몰려갔다. 앞으로 싸게 팔든 어떻든 지금의 이 같은 행운을 결코 놓칠 수 없었다.
"줄 서요! 줄!"
"줄 안서면 번개 날립니다!"
지그 합금 상사 창립 기념 대(大)바겐세일은 성황리에 끝마쳤다,
값싸게 에르젠을 사 간 유저들은 사방팔방으로 소문을 퍼트렸고, 대량의 에르젠 구입을 원하는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지그 합금 상사를 찾아왔다.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장장이들뿐만 아니라 타 대륙과 교역을 하는 길드의 상인들도 있었고 NPC들도 있었다.
찾아오는 고객들을 상대로 리지스는 에르젠을 판매하고 또 납품 계약을 맺었다. 유한은 다시 철공소로 돌아가 부지런히 에르젠 생산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6
지그 합금 상사의 창립과 에르젠 저가 판매 선언은 공식 홈페이지와 게임 관련 웹사이트의 큰 이슈가 되기에 충분했다. 지그 합금 상사의 저가 판매 선언으로 안 그래도 떨어졌던 에르젠 시세가 완전히 폭락한 탓이다.
앞으로 에르젠은 유한이 공언한 5만 골드 그러니까 예전의 시세대로 복귀할 거리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런 이야기는 에르젠을 현질 거래 하는 사람들에게서 언급되는 말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졌다.
-발리안 : 쯧쯧, 고귀한 금속을 싸구려로 만들다니…….
-포란 : 고귀한 게 밥 먹여 주냐, 란?
-제물포상인 : 난 이제 파산 ㅜ.ㅠ 아놔! 어쩔 거나는!
-질주상가 : 앗싸∼ 버틴 보람 있네!
-강철의 열정 : OTL
대부분의 유저들이 유한의 결단을 지지해 주었다.
그러나 엄청난 돈을 날린 에르젠 투기 세력은 유한을 비난하고 저주했다.
"으아악! 난 망했다! 망했다고!"
이번 사태로 가장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은 미네랄 상회였다. 에르젠이 폭락하기 전까지 고가에 에르젠을 사들였던 그들은 갚아야 할 어음을 움켜쥐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어음 지불 기간을 넘기자. 미네랄 상회에 속한 유저들은 전원 신용불량자 칭호를 달게 되었다.
이 같은 상횡을 보고받은 철십자 길드에서는 황급히 미네랄 상회 책임자인 유나를 파견했다. 유나는 카잔 공국에 있는 미네랄 상회 본점에 와서 NPC 스톤부터 찾았다.
"스톤 어디 간 거야? 상회장은. 대체 어딜 간 거냐고?"
"그게……."
"얼른 말하지 못해!"
유나의 실눈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떠졌다. 살벌하게 변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NPC 점원은 버벅이며 말했다.
"사, 상회장님은 도망치셨습니다."
"뭐? 도망이라니?"
"상회에 남아 있는 현금을 모두 가지고 어디론가……."
"유나는 정말 기가 막혀 환장할 노룻이었다.
NPC 주제에 공금 횡령에 잠적까지 할 줄 알다니.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인공지능이 황당하다 못해 두렵기까지 했다.
"어쩌면 좋습니까, 유나 님.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습니다." '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미네랄 상회의 지부가 남발한 어음이었다.
지부는 본점의 자금력을 믿고 거래를 해 왔다.
그러나 본점의 자금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철십자 길드에서 꼬박꼬박 상납금을 뜯어 간 덕분이다.
그리고 그렇게 뜯어 간 상납금은 마노스 제국의 안정을 위해 뿌려져 회수가 불가능했다.
그나마 본점에 남아 있던 돈은 스톤이 모조리 들고 날아 버려 뭘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미치겠군.'
그러나 유나를 더 미치게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쾅!
본점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서슬이 퍼런 표정의 소녀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바로 사홀 전 에르젠 판매 대금을 받기로 했던 메이지스였다.
어디서 데려왔는지 그녀는 껌 좀 씹고 동네에서 좀 놀 것 같은 유저들을 잔뜩 대동해서 나타났다.
"어음을 결제하기로 한 지가 사흘이 넘었는데. 대체 내 돈은 언제 갚을 거야?"
메이지스의 말에 응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긴, 마땅히 대꾸할 말도 없을 것이다.
메이지스는 짐짓 화가 난 표정으로 의자를 걷어차고 책상 위의 서류를 집어 던졌다.
"뭐야 이거! 상회장 어디 갔어? 당장 책임자 불러와!"
메이지스가 앞장서서 채권자의 권리를 행세하자 그녀와 함께 들어온 건달 같은 유저들도 NPC 점원들을 협박했다.
"아그들아, 누님 말하는 거 못 들었냐? 빨리 대장 델고 나오그라잉∼!"
"이 자식들 확 땅속에 파묻어야 정신을 차리려나."
평소 고경덕, 아니 옌스와 어을려 다니던 블루 라이언스들은 톡톡히 진가를 발휘했다.
그들의 흉흉한 기세에 힘없는 NPC 점원들은 시선을 일제히 유나에게 돌렸다. 평소 유나가 상회장 머리 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한 탓 때문이다.
메이지스는 팔짱을 끼고 유나에게 다가갔다.
"당신이 책임자야? 내 돈 사백사십 만 골드는 어쩔 거야?"
"그게……. 다시 에르젠으로 돌려 드리면 안 될까요?"
돈은 없지만 매각되지 못한 애물덩이 에르젠은 그대로 본점에 남아 있었다. 물론 유나의 이런 제의를 받아들일 메이지스, 아니 리지스가 아니었다.
"이 아줌마가 지금 장난해? 어음까지 다 써 놓고 이제 와서 뭐하자는 거야!"
'아, 아줌마라고?'
마음 같아선 자이언트 너클 마법으로 이 건방진 계집애를 피떡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리하면 이리저리 문제가 골치 아파진다.
입술을 깨물며 화를 참는 그녀의 마음을 이는지 모르는지 리지스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할 수 없지. 얘들아. 돈 되는 거 죄다 깡∼그리 챙겨 봐!"
"옛, 누님!"
블루 라이언스들은 본점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마구잡이로 상품과 고가의 가구들을 들고 나갔다.
"얼마 안 되지만 이걸로 팔십만 골드는 갚은 걸로 해주지."
'이런 도둑넌!'
유나는 메이지스가 네모난 가방을 흔드는 걸 보고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 가방은 메이지스가 일전에 놓고 간 것 으르, 처분되지 못한 에르젠 합금괴 20개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지금 시세로 따져도 100만 골드는 가뿐한 금액.
"내일까지 나머지 삼백육십만 골드를 준비해 놓으셔. 아님 이 거지 같은 본사 건물을 몽땅 차압하고 점원들은 새우잡이 어선에 팔아 버릴 테니까."
"히익!"
메이지스의 서슬 퍼런 선언에 NPC 점원들은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그들의 반응과 분해서 일굴이 빨갛게 변한 유나를 보고 리지스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내일까지야. 알아서 해."
미네랄 상회 본점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메이지스는 룰루랄라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