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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험난한 퀘스트 (111/143)

험난한 퀘스트

험난한 퀘스트

"벌써 다 했다고?"

파르가스는 유한이 내놓은 통 3개를 보았다.

모두 송진이 가득 담겨 있었다. 혹시 밑에는 다른 것을 담고 눈속임을 한 게 아닌가 싶어 뒤적여 봤지만 부정은 찾을 수없었다.

"말도 안 돼. 이렇게 금방 모을 수 있는 게 아닌데."

송진을 일일이 긁어 채집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데다가, 몬스터도 곧잘 나타나는 위론 숲에서 채집에만 신경 쓰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 지그라는 녀석은 다른 놈들이 1통을 채워 오기도 전에 3통을 채워서 보란 듯이 돌아와 버렸다.

그렇다는 말은…….

"이 자식, 이거 누구 걸 홈쳤어? 바른대로 말해!"

"훔치긴 누가 홈쳐요! 사람 모함하지 말라고요!"

파르가스가 멱살을 잡자 유한은 그의 손을 뿌리치곤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파르가스 님도 아시잖아요. 제가 좀 잘난 놈이란 거 말입니다. 생각보다 통 세 개 채우는 거 안 어렵던데요?"

모험담을 말해 주고다른 유저들에게서 얻어 왔다고 하면 어떤 소리를 할지 모른다. 그래서 유한은 끝까지 진실을 감추고 결과만을 내세웠다.

"흥! 이럴 줄 알았으면 열 통쯤 줄 걸 그랬군."

'이런 사악한 NPC같으니!'

투덜거리긴 했지만 파르가스는 더 이상 따지지 않고 다음 수행으로 넘어갔다.

"다음은 원소 합성로의 제작이다. 이건 만만하지 않으니 제대로 각오하도록."

파르가스는 유한에게 1장의 설계도를 건네주었다.

원소 합성로는 에르젠 합금을 만들기 위한 특수 고로였는데, 전체적인 모양은 길쭉한 주전자처럼 생겼고 내부 구조는 만두 찌는 냄비랑 비슷했다.

'흠, 만드는 데 별로 어렵진 않겠는걸.'

"방금 만드는 게 별로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지?"

유한은 움찔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설마 NPC가 정말 자기 마음을 읽었을 리는 없을 터. 그저 그럴 것이라는 추측하에 대사를 내뱉은 것에 불과할 것이다.

"쇠로 만드는 건 아니죠?"

"당연하지 멍청아. 쇠로 만들면 용융점이 높은 에르젠이 만들어지기 전에 합성로부터 녹아 버릴 거다."

그렇게 쏘아붙인 파르가스는 랑그리아 평원이 상세히 표시된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원소 합성로를 제작하는 재료가있는곳을 가르쳐 주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다 보면 엠돈이라는 풀 한 포기 없는 불모지가 나와. 그 불모지에 입자가 고운 찰흙이 무진장 깔려 있는데, 그 찰흙으로 만든 용기는 내화성(耐火性)이 뛰어나서 에르젠 합금에 필요한 고온의 열을 견뎌 내지."

일단 엠든이란 곳에 있는 찰흙을 구해 오는 것이 우선.

유한은 짐마차를 소환해 서둘러 서쪽으로 떠났다.

언데드 몬스터 몇 마리를 해치우며 가다 보니 파르가스의 말대로 불모지가 나왔다. 붉은 불모지에도 몇 명의 대장장이들이 있었는데, 역시 에르젠 관련 퀘스트 때문에 찰흙을 구하러 온 유저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행동과 자세가 뭔가 좀 이상했다.

"살려 주세요!"

"아니, 이쪽으로 오지는 말고요!"

구해 달라면서 오지는 말라니?

뭔가 이해가 가지 않았던 유한은 의아해 하면서도 유저 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얼미쯤 걸어가다 보니 발이 폭 빠졌다. 빠진 발을 들어 올리던 유한은 발목을 휘감는 끈적거림에 깜짝 놀랐다.

"어? 이게 뭐야!"

억지로 발을 뽑아 내자, 땅에서 흑갈색의 물질이 진득하게 묻어 나왔다. 바로 근방을 뒤덮고 있는 찰흙이었다.

"아니, 무슨 찰흙이?"

이렇게 끈기가 있는 것일까.

"얼른 물러나요! 우리 꼴 되기 전에!"

대장장이 유저들의 외침에 유한은 그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엎어져서 꼼짝달싹도 못히는 이도 있었고, 허리까지 빠져서 낑낑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마치 끈끈이 풀에 들러붙은 파리들처럼 말이다.

유한은 서둘러 뒷걸음질을 치며 찰흙 지대를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들어오는 건 쉬웠던 찰흙 지대는 나가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두 발이 당최 움직이려고 하지 않아 유한은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나 이거야 원. 이건 찰흙이 아니라 찰떡이잖아!"

유한은 완전히 질려 버렸다. 손으로 살짝 집어 들어 봤더니 껌처럼 쭉 늘어나는 것이었다. 어찌나 점성이 좋은지, 접착제로 써도 괜찮을 듯.

"아무튼 일단 빠져나가자."

유한은 인벤토리에서 삽을 하나 꺼내 발이 빠진 자리를 파헤쳤다.

아니, 파헤치려고 했다.

이번엔 땅에 푹 들어간 삽이 꿈쩍 하지 않았다. 억지로 삽을 당겼더니 삽자루가 중간에서 뚝 부러졌다.

"아놔! 뭐 이딴 게 다 있어?"

화가 난 유한은 부러진 삽자루로 찰흙을 내리쳤다. 그러나 두들겨 패면 팰수록 찰흙은 더 찰지기만 해질 뿐. 득이 되는 건 없었다.

'흥분하지 말고 생각을 해라, 강유한. 분명히 빠져나갈 방법이 있을 거야.'

찰흙의 점성을 없애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의외로 답은 쉽게 나왔다.

물을 뿌리면 되는 것이다. 물 때문에 찰흙의 농도가 묽어지면 자연히 점성도 약해질 테니까.

"여기 혹시 인벤에 물 갖고 있는 사람 있습니까?"

"있으면 내가 먼저 썼지요."

유저들도 바보는 아니다. 방법은 알지만, 수단이 없었기에 계속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여행을 하는데 물도 안 갖고 다녀요?"

"그러는 지그 님은요?"

유한 역시 물을 갖고 있지 않았다.

현실과 다른 게임이다 보니 물을 충분히 갖고 다녀야 한다는 개념을 갖추지 못했다. 사실 물이야 사막을 빼면 게임 내에 어디든 존재하는 것이기도 했고.

"물 비슷한 거라도 없습니까?"

"그러고 보니 우유가 하나 있는데요."

"여기 오렌지 쥬스가……."

"으윽, 와인 이거 비싼 건데."

몇몇 사람들이 취양에 따라 음료수를 하나둘씩 꺼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턱도 없다는 걸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포션도 물이잖아요! 몽땅 다 털어 봐요."

"아니 포션 그 작은 걸 부어 봤자 얼마나 된다고……."

"티끌 모아 태산이란 말도 몰라요? 전부 나한테 줘 봐요."

지금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사람이 발만 빠진 유한이다.

대장장이들은 그에게 우유와 쥬스. 와인, 포션이 든 병을 있는 대로 집어 던졌다.

유한은 그것을 모두 받아 발치에 부어 자신을 불들고 있는 찰흙을 묽게 만들었다. 그리고 간신히 찰흙 지옥에 서 탈출했다.

"아, 덕분에 잘 빠져 나왔습니다."

"설마 혼자 의리 없이 가 버리는 건 아니겠죠?"

대장장이들은 그냥 가 버리면 평생을 저주할 것처럼 유한을 노려보았다. 물론 유한은 홀랑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 이름까지 알려진 판국에 비매너 짓을 해 봤자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걱정 마세요. 곧 옵니다. 조금만 기다려요."

짐마차를 타고 떠났던 유한은 얼마 후 짐마차에 큰 돌을 잔뜩 싣고 돌아왔다. 근처의 나무를 대충 깎아 만든 나무통에 물도 잔뜩 실어 왔다.

유한은 돌을 찰흙 지대에 던지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했다. 이른바 징검다리를 만든 셈이다. 찰흙의 점성이 강하기 때문에 돌은 쉽게 아래로 빠지지 않았다.

돌을 밟으며 유저들이 있는 곳까지 간 유한은 물을 뿌려 가며 제일 다급한 상황인 유저부터 구조했다.

"자, 이제 나올 수 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찰흙의 점성이 강해서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모두 구조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중간에 문제가 하나 생겼다. 윙윙 벌레 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커다란 곤충들이 유저들의 머리 위에 나타난 것이다.

"어? 저 큰 잠자리는 뭐지?"

"못 보던 녀석인데."

몬스터인 것은 알지만 저렇게 생긴 녀석은 처음.

그것은 유한도 마찬가지였다. 바츠 때부터 플레이해서 웬만한 몬스터는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저런 놈은 본 적이 없었다.

모두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데, 유저 한 명이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나 저거 알아요! 레뮤다 대륙에 산다는 '데빌플라이'라는 몬스터예요!"

"데빌플라이?"

"아르페디아 대륙의 몬스터가 아니라고요?"

유저뿐만 아니라 몬스터까지 이제 원정 플레이를 한단 말인가. 아니면 누가 일부러 옮겨 놓기라도 했단 말인가.

데빌플라이에 대해 아는 유저를 제외하고 모두들 현재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데빌플라이가 어떤 놈인지 알게 되었다 주변을 빙글빙글 날아다니던 놈들 중에 한 마리가 찰흙 지옥에 빠진 유저에게 달려든 것이다.

"으악! 사람 살려!"

데빌플라이는 공중에 정지한 상태에서 꼬리의 긴 침을 유저의 몸에 푹 질러 넣었다.

공격당한 유저는 야위어 간다 싶더니 HP 칸이 쭉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미라 같은 몰골이 되어 사망 판정을 받았다.

"맙소사, 체액을 빨렸어!"

"꺄아아악!"

유저 한 명이 죽임당한 걸 보곤, 모두들 어쩔 줄을 몰랐다.

안 그래도 싸움괴는 거리가 있는 대장장이들인 데다가 본 적이 없는 몬스터의 공포스러운 살해 방식은 모두를 혼란에 빠지게 만들었다.

"으악! 수입산 몬스터가 사람 잡는다!"

"정신 차려요! 빈틈을 보여선 안 돼!"

그나마 전투 경험이 풍부한 유한은 검을 뽑아 들고 연방 주변을 경계했다.

데빌플라이들은 마구잡이로 덤비지 않았다. 머리 위를 날아다니다 유저에게 빈틈이 생기면 달려들어 날카로운 침을 찔러 대곤 했다.

"이 자식이!"

유한은 자신의 뒤로 몰래 접근한 데빌플라이에게 펜릴 소드를 휘둘렀다. 꼬리가 잘린 데빌플라이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쳐 버렸다.

"흥! 놓칠 줄 알고?"

유한은 왼손을 도망치는 녀석에게 내밀면서 건틀렛 와이어를 쏘았다. 와이어 끝에 달린 추가 데빌플라이의 몸 통을 뚫고 지나갔다.

-경험치 600을 얻었습니다.

-레벨 183이 되었습니다.

 힘이2 을랐습니다.

'호오, 이 녀석들 제법 경험치를 많이 주잖아.'

위론 숲에서 만났던 언데드 나이트들은 레벨이 너무 차이 나서 경험치를 제대로 얻지 못했다.

'크크크. 별로 강하지도 않구먼! 몽땅 다 잡아야지.'

그렇게 히죽대던 유한은 측면에서 데빌플라이가 다가 오는 것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대응하기에 너무 늦었다. 한 마리를 가볍게 해치워서 너무 방심한 것이다.

'아차!'

데빌플라이가 뻗은 침이 코앞에서 번득였다.

2

탕!

절체절명의 순간, 총성이 엠논 불모지에 울려 퍼졌다.

막 그를 공격하려던 데빌플라이가 푸들거리더니 바닥에 툭 떨어졌다.

"총소리?"

유한은 살았다는 것보다 갑자기 울려 퍼진 총성에 더 놀랐다.

총성이 난 곳을 돌아보니, 가죽 재킷에 카우보이모자를 눌러쓴 유저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을 들고 서 있었다.

'설마 프로인?'

유한은 예전에 박살 냈던 유럽 최악의 폭탄마가 떠을랐다. 혹시 자신에게 당한 것을 복수하러 온 게 아닐까.

그러나 프로인이었다면 좀 전에 자신을 살려 주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총으로 자신을 쏘아 버렸을 것. 머리 위의 '카프' 라는 이름을 봐도 그가 프로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펑!

카프는 인벤에서 주둥이가 나팔처럼 벌어진 총을 꺼내 더니 데빌플라이 무리들을 향해 쏘았다. 묵직한 총성이 을리며 서너 마리가 한 번에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오호, 산탄총인가?'

감탄하던 유한은 카프의 등 뒤에서 데빌플라이가 슬그머니 달려들려는 것을 보았다.

"엎드려요!"

"……!"

유한의 경고에 카프가 몸을 숙였다. 유한의 손에서 떠난 펜릴 소드가 구원자를 공격하려던 데빌플라이에 푹 꽂혔다.

"고밥습니다, 지그 님."

"아뇨,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접니다"

카프의 총격은 계속 이어졌다. 산탄총이 연달아 터지자 견딜 수 없다 여긴 모양인지 남은 데빌플라이들은 등을 돌려 도망쳐 버렸다.

몬스터들이 멀리 사라지자 카프도 방아쇠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유한에게 반갑게 말을 건네 왔다.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오랜만이라니, 언제 본 적이 있던가?

곰곰이 기억을 더듬던 유한은 반가운 탄성을 내뱉었다.

"아! 파부치 영감 밑에서 함께 일했던!"

"이제 생각나시는 모양이네요."

지그의 초보 시절, 같이 대장장이 견습생을 하면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줬던 유저 카프.

그 뒤론 전혀 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났다.

"그동안 뭘 하며 지낸 겁니까? 그리고 그 총은 어떻게?"

"하하, 이야기를 하려면 좀 길지요."

카프는 유한과 함께 대장장이 유저들을 구조하며 자신이 현재에 이른 과정에 대해서 소상하게 알려 주었다.

"파부치 영감 밑에서 나온 뒤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수리도 하고 생산도 해주며 랭크를 높였죠."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대장장이 육성기였다. 카프는 실력이 있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유한과 같은 수준의 명성은 얻지 못했다.

"지그 님이 부러웠어요. 같이 시작했는데 나와 다르게 부쩍 성장하는 걸 보고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느꼈죠."

"하하, 그랬습니까?"

"그러다가 폭탄마 사건 이후, 기회가 되어서 웨스턴에 탐험 가는 파티에 끼이게 되었어요."

통역 서비스도 지르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우연한 기회에 웨스턴의 대장간에서 일하게 되었단다. 그곳에서 총기 제조와 사격에 관련된 스킬을 익힌 카프는 예전과 다른 급성장을 할 수 있었다고.

"건 스미스 칭호를 얻고 완전히 총기 제작자가 되 버렸죠. 아마 저쪽에서 기술을 배워 온 대장장이는 제가 처음일 겁니다."

건 스미스가 된 데에는 나름 비결이 있을 테지만 유한은 묻지 않았다. 물어봐도 쉽게 가르쳐 줄 리 없고, 건 스미스리는 칭호에도 그리 미련이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에르젠 합금 기술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했다.

카프 역시 에르젠 합금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 왔다고 한다. 에르젠을 총기 제작에 이용하기 위해서라나.

"어제 송진 채취를 끝내고 이 근처에 와서 로그아웃 했는데, 오늘 접속하니까 시끄럽더라고요. 그래서 얼른 달려와 봤더니 지그 님이 이상한 몬스터와 싸우고 있기에……."

그 뒤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카프가 나서지 않았다면, 유한은 물론 다른 대장장이 유저들까지 데빌플라이에 몰살을 당했을 것이다.

카프의 이야기를 다 들은 유한은 유저들의 구조에 전력을 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찰흙 지옥에 빠진 사람들을 모두 다 빼낼 수 있었다.

"아직 못 빠져나온 사람 없죠?"

"지그 님이 오기 전에 기다리다 지쳐 로그아웃한 사람들이 있는데……."

"쩝, 그분들의 운명은 팔자에 맡기도록 하죠."

구한답시고 그들을 마냥 기다릴 수도 없었다. 또 무슨 이상한 몬스터라도 나타나면 어떻게 하는가?

유한의 의견에 동의한 대장장이들은 떠나기 전에 찰흙을 수집했다. 또다시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찰떡 같은 찰흙을 칼로 조금씩 떼 내어 가죽 주머니에 넣었다.

채집이 끝나자 그들은 미련 없이 찰흙 지옥에서 등을 돌렸다.

유한은 떠나기 전에 후발 주자들을 위해서 선물을 남겼다. 그가 선물로 남기고 간 팻말에는 '찰흙 지옥-접근 금지' 라는 말이 굵게 적혀 있었다.

유한은 여러 대장장이들과 함께 반쯤 무너진 요새로 돌아왔다. 그런데 요새는 텅 비어 있었고 파르가스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놔, 이 자식 또 어디로 가 버린 거야?"

방랑벽을 가진 NPC 파르가스. 유저가 중요 퀘스트를 수행 중임에도 그 점은 변함이 없었다.

"흩어져서 찾아보죠."

"몬스터가 있으니까 뭉쳐서 다니는 게 좋겠어요."

유한은 카프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예전에 바츠 시절 랑그리아 평원 남쪽에 버려진 신전에 파르가스가 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날의 정보는 쓸모가 없었다. 신전에 가 봤지만 파르가스가 없었던 것이다. 낭패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유한에게 누군가의 귓속말이 떠을랐다.

-파르가스, 지금 동북쪽의 낡은 오두막에 있어요.

찰흙 지옥에서 구조받은 유저가 은혜를 감기 위해서인지 친절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

서둘러 알려 준 곳에 달려간 유한은 대장장이들을 지도하는 파르가스를 보곤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하고 내빼면 어떡합니까!"

"뭐, 인마. 내가 언제 말해 주고 떠난다는 약속이라도했냐?"

오히려 뻔뻔하게 대꾸하는 파르가스였다.

유한은 한 대 때려 주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아직 에르젠 합금 스킬을 익히지 못했다. 분통이 터져도 참아야 했다.

'이 거지 같은 퀘스트가 끝나기만 해 봐라. 끝낸 다음엔 그냥!'

유한은 투덜거리며 수집해 온 찰흙을 꺼냈다.

그는 파르가스가 시키는 대로 찰흙에 물을 부은 뒤, 원소 합성로의 형태로 빚어 나갔다. 모양을 다 빚은 다음, 불을 피워 원형을 딱딱하게 굳혔다.

원소 합성로는 별게 아니었다. 고온의 열을 견딜 수 있는 찰흙으로 만들고 구조가 조금 특이하다는 것뿐.

찰흙 지옥에서 땀을 뺐던 것을 생각하면 제작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리고 세 번째 수행도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에르젠을 만드는 데는 다섯 가지 원소와 순도 높은 은이 필요하지. 은의 순도에 따라 에르젠 합금의 완성도가 달라지니까 매우 신경을 써야 해."

파르가스의 말에 대장장이들은 흩어져 은광석을 구해 온다, 은을 제련한다며 부산을 떨었다.

유한도 잠시 철공소로 돌아갔다가 필요한 은광석을 갖고 돌아왔다. 그새 파르가스가 이사를 했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파르가스는 그 자리에서 대장장이들을 갈구고 있었다.

"야, 이 썩을 놈아! 은에 불순물을 이렇게 많이 남겨 두고 에르젠을 만들겠다고? 다시 제련해!"

파르가스는 웬만하게 은을 제련해서는 받아 주지 않았다.

유한은 초열탄을 사용해 충분한 고열을 만든 다음 은을 제련했다. 그는 한 차례 제련해서 만든 은괴를 살펴보았다.

그냥 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 그레인 스킬로 살펴보자 여기저기 가느다란 균열들이 나타났다.

균열이 있다는 건 은과 맞지 않는 성질을 가진 물질이 섞여 있다는 증거.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다시 해야지.'

유한은 일단 거기까지 하기로 하고 로그아웃했다.

다음 날 학원에서 돌아온 유한은 바로 게임에 접속했다. 그런데 망할 파르가스는 그사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 뒤였다.

"젠장. 아예 족쇄를 채우든가 해야지."

일단 순도가 높은 은을 완벽하게 제련한 다음 파르가스를 찾기로 했다. 놈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여서는 일도 제대로 안 될 테니까.

"이번이 열두 번째……."

유한은 12번째로 제련된 은괴를 살펴보았다. 그래인 스킬로 쓸어 봐도 아무런 티가 없는 매우 순수한 은이었다.

"좋았어! 이 정도면 그 망할 털보도 딴죽을 못 걸겠지."

"그 망할 털보라는 게 나를 말히는 거냐?"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유한은 깜짝 놀랐다. 돌아보니 파르가스가 서 있었다.

커다란 보따리를 등에 맨 꼴을 보아하니 어딘가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던 모양. 그의 뒤로는 병아리처럼 몇 명의 대장장이 유저들이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리 내 봐. 제대로 안 됐으면 망할 털보의 주먹맛을 보여 줄 테니까."

파르가스는 으름장을 내뱉으며 유한의 손에 들려 있던 은괴를 빼앗아갔다.

그는 이리저리 은괴를 살펴보고, 망치로 두들겨 보고, 물통에 넣어서 물이 얼마나 넘치는지 재어 보았다. 그러다가 인상을 와락 구기며 유한에게 은괴를 돌려주었다.

"쳇! 합격."

"크크크, 그럴 줄 알았습니다."

유한은 구겨진 파르가스를 보며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결과는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못마땅한 파르가스의 표정을 보자니 기분이 더 좋았다.

"그럴 줄 알았다라…… 역시 네놈에겐 남들에게 없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군."

파르가스의 말에 유한은 움찔했다. 혹시 이걸 꼬투리로 잡고 뭔가 이상한 수행을 시키려는 건 아닌지?

"예전에도 한 번만에 검사를 통과한 녀석이 있었지. 그 녀석도 너처럼 그럴 줄 알았다고 지껄이더군."

"혹시 그 사람의 이름이 귀련 아닙니까?"

"맞아. 그 계집애랑 아는 사이냐?"

"저랑 친한 누나예요."

"그랬나? 미안하다. 내가 널 너무 우습게보았군."

"아닙니다. 하하핫."

파르가스가 사과를 하자 유한은 괜히 우쭐해졌다. 그러나 그 우쭐한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너에게 사과하는 의미로 더욱 힘든 수행을 하도록 해주지."

"크엑! 그게 어째서 사과하는 의미가 됩니까!"

유한은 펄쩍 뛰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파르가스는 유한에게 자원 표시가 된 지도를 건네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에르젠 합금에 필요한 5대 원소 광물은 이 근방에서도 구할 수 있지. 화염의 속성을 지닌 플레이마, 물의 아쿠아틴, 바람의 에어리, 땅의 테라톤, 마지막으로 빛의 광물 레이디안이다."

"그걸 모아 오면 됩니까?"

보통은 그랬지만, 유한은 아니었다.

"아니. 그 광물들 중에서도 순도가 높고 성질이 더 우수한 코어 스톤을 찾아 가지고 와라. 너라면 충분히 가지고 올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파르가스는 히죽 웃었다. 마치 '찾기 무척 어려울걸?' 이라고 비웃는 것 같았다.

'망할 자식!'

유한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남들보다 잘나거나 튀게 되면 손해 보는 경우도 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2

파르가스에게 광물 지도를 받은 유한은 5대 원소 광물의 코어 스톤을 찾아 헤맸다.

우선은 가까운 곳에 있는 것부터 입수하기로 하고, 플레이마가 매장되어 있다는 마스카 산으로 향했다.

마스카 산은 랑그리아 평원 가운데 홀로 우뚝 선 산으로, 오랜 옛날 화산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산이었다. 그것을 중언이라도 해 주듯, 꼭대기에는 움푹 팬 분화구가 있었다.

이미 순수한 은괴 생산에 성공한 대장장이 몇이 마스카 산의 동굴 속에서 채굴 작업을 벌이는 중이었다. 바로 플레이마를 획득하기 위해서.

유한도 열심히 동굴을 돌아다니고, 채굴을 하며 플레이마, 아니 플레이마의 코어 스톤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파도 코어 스톤은 나오지 않았다.

어쩌다 간혹 불꽃처럼 붉고 뜨거운 광석이 나오긴 했는데, 그것은 평범한 플레이마였을 뿐이다.

"지그 님, 이거 필요 없으신가요? 제가 가져도 되나요?"

"아아, 맘대로 하세요."

하루 종일 곡괭이질과 삽질을 하고도 소득이 없었다. 남 좋은 일만 했을 뿐.

홧김에 곡괭이를 내팽개친 유한은 펄펄 뛰며 고래고래 악을 썼다.

"썅! 내가 신이냐!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걸 갖고 오게!"

유한이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드림맥스의 부사장 정경욱과 사원들. 유한을 생고생시키고 있는 장본인들이다.

"크크큭, 지그 녀석도 이번엔 별수 없을걸."

'그럼요. 산을 아주 뒤집지 않는 이상 불가능합니다."

모두가 유한이 포기해 버릴 거라 생각했지만 손석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유한이 반드시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 믿었다.

아직 유한은 포기하고 있지 않으니까.

"제길, 어두워졌잖아."

동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자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 지 않았다. 유한은 인벤토리에서 램프를 꺼내 불을 붙였다.

팟!

램프에 불이 들어오자 유한은 동굴 속을 이리저리 비춰 보면서 계속 앞으로 나갔다.

'이렇게 무작정 들어간다고 될 일은 아닌데…….'

그냥 동굴 끝에 코어 스톤이 있고, 중간 보스 급 몬스터 한 마리가 지키고 있다면 얼마나 편하고 좋을까.

그러나 이놈의 게임은, 그리고 퀘스트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을 골탕 먹이기라도 작정이나 한 것처럼.

아니면 램프의 불도 이리 둘쭉날쭉 타오를 리가 없지 않은가.

"응? 불빛이?"

유한은 좀 전에 불꽃이 길게 타을랐던 곳에 다시 램프를 가져다 댔다. 보통 크기로 줄어들었던 램프의 불꽃은 다시 길게 피어을랐다.

'설마!'

유한은 불꽃이 길게 피어을랐던 자리를 곡괭이로 파 보았다. 얼마쯤 파 보니 그곳에서 플레이마 광물이 하나 튀어나왔다.

획득한 플레이마 광물을 램프에 가까이 갖다 대자, 램프 불꽃은 훨씬 더 길어졌다. 아니, 불꽃이 플레이마 광물이 있는 곳으로 휘어졌다.

'그래! 이 광물은 화염 속성을 띄고 있다고 했지?'

그래서 불꽃이 광물에 반응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는 말은?

유한은 램프를 들고 복잡한 동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플레이마 코어 스톤이 있는 곳에선 분명 불꽃이 훨씬 더 강한 반응을 보일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 돌아다니고 있는데, 갑자기 불꽃이 거세게 피어을랐다.

화르르륵!

유한은 하마터면 램프를 떨어트릴 뻔했다. 램프 유리관에서 피어오른 불꽃에 덴 것이다.

그는 곡괭이 끝에 램프를 매달고 앞으로 계속 나갔다 유리관 밖으로 일렁이는 불꽃이 방향을 잡아 주었다

"여긴가?"

램프 불꽃이 반응한 동굴의 벽면은 다른 곳에 비해 유달리 따뜻했다. 유한은 곡괭이로 벽면을 파헤쳤다.

딱딱한 벽을 얼마쯤 파 들어가다 보니 루비처럼 붉은 광물이 튀어나왔다. 광물에 손을 댔던 유한은 화들짝 놀랐다. 붉은 광물은 불속에서 금방 끄집어낸 군고구마처럼 뜨거웠다.

유한은 다시 조심스럽게 광물에 손을 대어 광물의 정보창을 열어 보았다.

[플레이마 코어 스톤]

설명 : 타오르는 불꽃의 기운을 머금은 광석. 보통의 풀레이마보다 훨씬 순도가 높고 성질이 우수하다. 연금술이나 합금 등의 작업에 유용하게 쓰일 것 같다.

"만세! 찾았다!"

힘들게 플레이마 코어 스톤을 찾아낸 것도 기뻤지만 코어 스톤을 발견할 방법을 알아낸 것도 큰 소득이었다.

'분명 다른 광물도 플레이마와 같은 성질이 있을 거야.'

아쿠아틴은 물에, 에어리는 바람에, 테라톤은 땅. 레이디안은 빛에 반응할 것이다.

유한은 곧장 다음 코어 스톤을 찾아 떠났다. 마스카 산에서 가까운 곳은 에어리가 있다는 타르스 필드였다.

갈대가 무성한 타르스 필드는 바람이 불 때마다 기이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람?"

"귀곡성이야. 전사자들의 울음소리지."

"어째 으스스하다 했더니……."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유저들은 제멋대로 떠들어 댔다.

그러나 울음소리가 나는 것은 타르스 필드에 깔린 에어리 때문이었다. 소리가 나는 곳을 뒤져 보자 구멍이 숭숭 뚫린 못생긴 돌이 뒤어나왔다. 그 못생긴 돌이 바로 에어리였다.

'흠, 이 녀석은 바람을 빨아들이는구나.'

바람이 에어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에어리 내부에 뚫린 구멍에 바람이 맴돌면서 기이한 울음이 나게 되는 것이다.

힌트를 얻은 유한은 울음소리가 다른 곳보다 강하게 들리는 곳을 찾아가보았다.

갈대숲 한편에는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바람을 강하게 빨아들이는 곳이 있었다. 갈대를 베어 내고 땅을 파 보자, 에어리 코어 스톤이 나타났다.

"훗, 간단하네. 이제 로비아 숲에 있는 레이디안 코어 스톤을 찾으러 가 볼까?"

유한은 서들러 로비아 숲으로 향했다. 쉽게 코어 스톤을 찾는 방법을 알아냈기 때문인지, 그의 발걸음은 퀘스트를 수락했던 이후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5

드림맥스 7층 게임 관리실은 침을 그 자체였다.

유한이 처음 플레이마 코어 스톤을 찾는다고 헤멜 때만 해도 다들 낄낄거리며 좋아했지만, 그가 2개의 코어 스톤을 연달아 획득하자 분위기가 가라앉아 버렸다.

"지그 자식! 쓸데없을 정도로 예리해 가지고……."

"걱정 마십쇼, 부사장님. 레이디안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알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직원 한 명이 장담했다.

레이디안은 플레이마처럼 불빛에 변화를 주지 않는다. 지금 유한이 하는 것처럼. 램프를 비춰서는 찾아낼 수 없다.

"그리고 만에 하나 운이 좋아 찾는다고 해도 레이디안 코어 스톤은 죽었다 깨도 못 찾을 겁니다."

거기다 로비아 숲은 햇볕이 안 드는 음침한 곳답게 강한 언데드 몬스터들이 득실했다. 용병을 호위로 거느리지 않은 대장장이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당해서 죽어 나자빠진다.

"지그 녀석이 아무리 싸움 좀 한다고 해도, 레벨 200대의 필드 보스인 안개의 마도사에게 걸리기만 하면……."

"근데 저놈은 뇌제잖아."

여차하면 뇌제가 되어 해치우지 않겠느냐는 것이 정경욱의 지적이었다. 그의 지적대로 유한은 힘에 부치는 몬스터들이 등장하자 곧장 뇌제로 변신해서 싸웠다.

필드 보스 안개의 마도사는 뇌제 지그가 날린 선더 스피어에 두들겨 맞고 널부러져 버렸다.

뇌제라는 변수를 잠시 잊었던 직원은 삐질삐질 진땀을 흘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 그래도 레이디안 코어 스톤을 찾기란 불가능……."

"그런데 저 자식은 갑자기 왜 저렇게 번개를 남발하는거야?"

주변에 몬스터도 없는데 뇌제 상태의 유한은 계속 번개를 뿌려 댔다.

"하루에 한 번밖에 변신할 수 없으니 아까워서 그럴 겁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유한이 날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또렷한 목적이 있었다.

유한이 숲에 번개를 떨어트릴 때마다 숲 속에서 불빛들이 번쩍였다. 뇌전의 기운을 흡수한 레이디안이.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레이디안의 특성을 파악한 유한은 하루에 한 번 뇌제로 변신할 때마다 숲에 번개를 뿌려 댔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환한 빛을 번득이는 레이디안 코어 스톤을 찾아냈다.

"죽었다 깨도 못 찾는다며?"

"그, 그게…… 그래도 테라톤 코어 스톤은 절대 획득 불가능할 겁니다"

"테라톤이나 테라톤 코어 스톤은 동굴 벽에 노출되어 있잖아. 다른 것들보다 찾기 쉽다고."

"그 동굴이 도르고라 동굴이라는 걸 생각하셔야지요."

랑그리아 평원 아래 토굴인 도르고라 동굴엔 아무나 함부로 진입할 수가 없었다. 강한 몬스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몬스터보다 더 성가신 녀석들이 있기 때문이다.

"앗 따거! 제기랄! 이놈의 벌레들!"

"크악! 불개미 떼다!"

"까아악! 지네야! 지네!"

멋모르고 도르고라 동굴에 들어간 유저들은 쓴맛을 보고 있었다. 덩치 큰 몬스터라면 칼로 푹 찔러 죽이기라도하지만 작은 벌레들은 그렇게 처리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이 성가신 벌레들은 레벨 100이 넘었고, 만만찮은 공격력에 흉측한 모양을 갖추고 있다.

"뭔 놈의 퀘스트가 이리 어려워?"

"그러게. 내가 듣기로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하던데."

유저들은 생각보다 어려운 퀘스트에 서로 불만을 터트렸다.

'음, 잘하고 있어!'

정경욱은 유저들을 공격하는 벌레들을 바라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완전히 신용하지는 않았다. 어떤 몬스터든 약점이 한 가지씩은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독창적인 벌레 대항책을 갖고 들어온 유저가 있었다. 얼마 전에 유한과 함께 다녀 눈에 익은 카프라는 유저였다.

아르페디아 대륙 출신 대장장이로는 최초로 건 스미스가 된 그는 다소 무식한 방법을 시옹했다.

"여긴 벌레가 너무 많네."

인벤토리에서 기름통을 꺼낸 카프는 동굴에 기름을 쭉 뿌리더니 불을 질러 버렸다. 불과 연기에 놀란 벌레들은 땅속 깊은 곳으로 숨어 나오지 않았다.

벌레들을 쫓아 버린 카프는 유유히 테라톤을 채굴해서 둥굴을 떠났다.

"걱정 마십쇼. 테라톤 코어 스톤은 동굴 깊숙한 곳에 있습니다. 기름을 어지간히 퍼붓지 않는 이상 손댈 수도 없습니다."

"안 그래도 지그 녀석이 동굴에 다가오고 있구민.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자고."

유한도 처음엔 무턱대고 진입했다가 쓴맛을 보고 물러섰다.

한동안 방법을 강구하던 그는 벌떡 일어나 짐마차의 대장간 설비로 뭔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저 자식 도대체 뭘 만드는……."

"어! 저, 저건!"

정경욱과 드림맥스 직원들의 눈은 휘둥그래졌고, 손석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한이 만든 것은 청동으로 만든 체인 메일이었다. 손과 발목까지 뒤덮는 치렁치렁한 체인 메일은 갑옷이라기보다 로브처럼 보였다.

철보다 강도가 약한 구리나 구리 합금으로는 방어구를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구리로 방어구를 만들었을 때 장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벌레를 쫓아 버린다는 것이다.

"헷! 갈리 영감 말대로잖아."

청동 체인 메일을 만들기 전, 유한은 처음 합금 스킬을 배을 때 갈리가 들려주었던 말을 떠을렸다.

"구리 합금은 더러운 균을 죽이고 벌레를 쫓는 신기한 힘이 있어. 그래서 신전에서 제기로 곧잘 만들어 쓰지."

갈리의 말대로 청동 체인 메일은 제대로 효괴를 발휘했다.

도르고라 동굴의 벌레들은 유한에게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몇 마리가 들러붙긴 했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털어 버릴 수 있었다.

청동 체인 메일을 걸치고 도르고라 동굴 끝까지 들어간 유한은 그곳에 있는 테라톤 코어 스톤을 획득했다.

"이제 하나 남았군."

마지막으로 획득해야 할 것은 아쿠아틴 코어 스톤.

그러나 유한은 거기서 로그아웃을 한 뒤 캡슐에서 나왔다.

"더 하면 내일 강의 시간에 졸지도 모르니까."

게임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나중을 생각해야 한다. 모의고사가 얼마 안 남았고 연말에는 수능 시험도 치러야한다.

만약 잘못해서 '재수생' 칭호를 얻게 된다면……. 아니, 그 경우는 생각하기 싫었다.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예전과는 다르다. 게임이 아닌 현실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미래도 생각해야 하니 말이다.

그래서 유한은 오늘의 플레이를 그쯤에서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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