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칸 황제의 무덤
오르골을 바꿔치기하는 데 성공한 유한 일행은 일단 남쪽으로 길을 잡았다.
바르카스 왕국을 서둘러 벗어나기 위해서였고, 테라칸 황제의 무덤도 남쪽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그로지아 왕국이 유력할 거야. 세 개의 보물도 그로지아 왕국에서 발견되었으니까."
"그런데, 지그야. 나 오르골에 대해 궁금한게 하나 있는데."
"오르골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말자고 했잖아."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법이다.
자꾸 떠들다 보면 언젠가 유한일행이 진짜를 빼돌렸다는 이야기가 바르카스 왕실에 전해질지도 모른다.
- 귓말이라면 괜찮겠지?
'채린이 너도 참 잔머리 잘 굴린다.'
말하지 말자고 하니까 귓속말로 대호를 거는 센스란.
유한은 그 성의를 생각해서 채린의 질문을 받아 주었다.
-잘 만들어도 소리를 똑같이 하는 건 힘들 텐데 어떻게 복제한거야? 너 프라테우스 신종 만들땐 애먹었잖아.
-그건 신종이 워낙 특이해서 그런거고…….
오르골은 다르다.
오르골에 들어 있는 금속원통은 오디오로 치면 레코드 판과 마찬가지, 금속 원통에 도드라진 못의 위차만 정확히 맞추면 원칙상 원본과 같은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 난 금속 원통을 주물 스킬로 그대로 복제했어. 그래서 완전히 같은 소리가 나올 수 있었던 거야.
- 그래도 나름 실력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 당연하지, 내가 누구야? '명장' 지그라고.
유한은 유달리 자신의 칭호를 강조했다.
그렇게 콧대 높아진 유한을 보며 채린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유한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는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이제 블랙을 불러서 무덤 위치를 물어봐요."
두 사람이 한창 귓속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에이린이 말했다.
"하지만 쉽게 알려줄까? 저번 엘프의 숲에서도 싫어했잖아."
"하긴."
"일단 우리끼리 한번 알아보자."
일행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여기서부터 그로지아 왕국입니다."
역마차를 타고 온 일행은 마주의 말에 국경 마을에서 내렸다.
마을 주민 NPC들을 상대로 테라칸 황제와 그의 무덤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테라칸 황제에 대해서 NPC들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오래전 이야기책에 나온 대륙 통일의 영웅이라는, 평범하고 단편적인 정보가 전부였다.
"여긴 잘 모르나 봐. 다른 마을에 가서 알아보자."
오펜의 의견에 일행은 몇몇 마을과 도시를 더 들러 정보를 모아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소득은 없었다.
그러다가 나름 테라칸에 대해 잘 아는 늙은 음유시인NPC를 만났다.
"호오, 테라칸 황제 말인가? 대륙을 통일했다는 영웅이 아닌가, 뇌제라 불렸었던……."
"뇌제라고요?"
처음 듣는 말에 유한은 눈을 동그랗게 떳다.
"전설에 따르면 테라칸은 그의 적들을 천둥 번개로 쓸어버렸다는군, 물론 정말 그랬을 리는 없고, 아마도 그의 막강한 무위가 부풀려지면서 지어진 호칭일 게야."
음유시인의 이야기를 들은 일행은 블랙의 신위를 떠올려 보았다. 과연 그만한 실력이면 뇌제라는 호칭을 얻을만 하다 싶었다.
"혹시 테라칸 황제의 무덤이 어디인지 아시나요 ?"
"뇌제의 무덤? 글쎄…… 거기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군. 전설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오래전의 인물이라서 말이야."
역시 이 음유시인도 무덤에 대해서 아는것은 없는듯 했다.
"그로지아 왕국이 당시 그가 세운 아르페디아 제국의 중심이었던 건 분명하니 왕국 어딘가에 그의 무덤이 있겠지. 젊은이들이 어디 기운차게 찾아보게나. 후후훗."
그 말을 남기고 늙은 음유시인 NPC는 갈길을 가버렸다.
분명 그로지아 어딘가에 있다. 그러나 그걸로는 부족하다 완전히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인 것이다.
"역시 본인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나?"
"일단 불러와서 설득해 보자고."
유한은 즉시 귓속말로 블랙을 호출했다.
얼마 후, 지그 철공소를 지키고 있던 블랙이 일행이 머물고 있는 도시에 당도했다.
"후손, 날 불럿는가? 그 미케니아인지 미역국인지 하는 패거리의 왕이 널 노리고 있는가?"
"부른건 맞는데 이바니우스 3 세 때문은 아니야."
유한은 블랙에게 테라칸 황제의 무덤 위치를 물었다.
그러나 블랙은 시큰중한 태도로 응답을 하지 않았다. 침묵을 지켰던 그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아리엘의 오르골을 찾은 건가?"
"그래요 능묘를 여는 세가지 단서를 모두 갖고 있어요."
"너희들 참 대단하군. 대단한 집념이야. 그러나 그런 너희들에게서 사악한 욕망의 기운이 느껴진다."
정곡을 찔린 일행에게 정의로우신 블랙의 설교가 이어졌다.
"과한 욕심은 오히려 화를 부를 뿐이다. 내 능묘에 있는 보물은 값나가긴 하지만 결코 깨끗한 것이 못된다. 대륙 통일 이전 수많은 군웅들이 서로 빼앗고 다투고 피를 묻힌것들이지. 나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그 저주 받은 보물들이 다시 세상에 풀리길 원치 않는다."
이것이 만약 게임이 아닌 현실이었다면, 블랙의 설교는 일행에게 먹혀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게임이다. 보물은 찾으라고 존재하는 것이고, 세상이 어지럽던 말던 그건 게임의 설정일 뿐이다.
일행이 블랙을 설득할 말을 찾고 있을 때 뒤에서 응원군이 나타났다.
"보물이 무슨 죄가 있어? 그걸두고 다툰 인가들이 잘못이지."
모두들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리지스가 서 있었다, 고딕 스타일의 화려한 드레스를 걸친 그녀는 당당한 자세로 블랙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뭘 모르나 본데, 인간에겐 욕망이 바로 그들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야. 따뜻해지고 싶어서 불을 발견하고 더많은 알곡을 얻고자 넓은 땅을 갈기 시작했지."
더 빨리 가기 위해서 기차를, 그리고 자동차를 발명했다.
하늘을 날기 위해 비행기를 발견했고, 우주로 로켓을 쏘아 올렸다. 보다 평등하기 위해 계급의 압제에 대항해 싸웠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많은 사상과 철학을 발전시켰다.
그게 바로 인간이고, 그런 인간을 발전시킨 근본에는 리지스가 말한 욕망이 있었다.
"넌 저주받은 유산을 봉인했다고 좋았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건 인간의 발전을 늦춰 놓은 것에 불과해. 네가 아니었으면 아르페디아는 훨씬 더 풍요롭고 발전된 세상이 되었을지도 몰라."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거냐? 힘없는 백성들을 위해 욕심많은 군웅들을 벌하고 대륙을 통일한 영웅인 내가!"
블랙이 서슬 퍼런 기세로 리지스를 쏘아 붙였다. 그는 조금이라도 리지스가 주저하면 그대로 그녀를 밟아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리지스는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그래, 네가 틀린거야."
"커억!"
무지막지한 블랙을 침몰시키는 그녀를 보고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대체 어디서 저런 당당함과 기백이 나온단 말인가?
"저 애 정말 대단한걸 ?"
로키도 감탄했는지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저 녀석 돈 문제에 관해선 신하고 논쟁해서도 이길 겁니다."
리지스를 잘 아는 유한은 그녀에게 충분히 그런 능력이 있을거라 믿었다.
문제는 리지스가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냐는 것이다. 그녀에게는 연락을 하지 않았건만..
"야, 걍유한."
기분이 상했는지 리지스는 지그라고 부르지 않고 본명을 부르며 다가왔다.
두눈에 살기를 담은게 단단히 화가 난 모양.
"너 또 날 왕따 시켰어. 다음번엔 데려간다고 했잖아!"
"미, 미안 좀 바쁘다 보니 너한테 연락한다는 걸 그만 잊었어."
"닥쳐! 전혀 미안한 표정이 아니잖아!"
리지스는 불 맞은 망아지 처럼 펄펄 뛰었다.
그녀가 이 자리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철공소를 우두커니 지키고 있던 블랙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분명 블랙이 가는곳에 유한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 판단은 적중했고, 이곳에 와서 블랙이 일행에게 하는 설교를 들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그녀는 대번에 끼어든 것이고.
"내가 저 쇳덩어릴 설득했으니까 보물 절반은 내꺼야, 알간 ?"
유한의 행동이 괘씸해 보물의 절반을 차지해야 분이 풀릴것 같다고 떼쓰는 리지스 였다.
"아직 설득되었다는 보장이 없잖아."
블랙이 제 입으로 무덤의 위치를 말해야 설득되었다 할수 있을 것이다. 블랙은 단지 언쟁에 져서 좌절했을 뿐이다.
"내가, 내가 틀렸다니……."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블랙님."
에이린이 블랙을 다독이며 슬쩍 설득했다.
"보물을 묵혀 두는 것보다 좋은 일에 써도 되잖아요 불쌍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을 돕는 용도로요."
"그런가?"
블랙의 마음은 기울어 지는 듯 했다. 페이린은 아직 온전히 기울지 않은 그의 마음을 한번더 흔들었다.
"블랙 님이 보물을 좋은 데 쓰시면 사람들이 잊혀진 전설의 영웅을 다시 기억할 거예요."
그 말에 솔깃한 블랙은 완전히 마음을 바꾸었다.
"험험, 뭐 그렇다면야. 대중적인 차원에서 짐의 재보를 풀 수도 있지."
"능묘의 위치를 가르쳐 주시는 거죠?"
"물론이다."
블랙이 약조하자 일행은 쾌재를 불렀다.
설마 대륙을 통일한 영웅이 한 입으로 두말 하겠는가.
"후후후, 이러면 우리 귀여운 에이린의 승리로군."
또 다른 낯익은 목소리 들려왔다.
그곳에는 옌스가 서있었다. 녀석도 리지스처럼 블랙을 보고 따라온 모양.
"리지스 누님, 능묘의 보물 절반은 에이린 거요."
"누구 맘대로! 저 쇳덩이를 꺽어놓은건 나라고!"
옌스에 일방적인 선언에 리지스는 펄쩍 뛰었다.
"하지만, 설득한 것은 우리 에이린이란 말입니다!"
"싫어! 안 돼 ! 양보못해!"
둘이 다투거나 말거나 일행은 블랙을 앞세우고 테라칸 황제의 무덤이 있는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향한 곳은 그로지아 왕국 남쪽 타사르 평원.
능묘의 보물에 넋을 뺀 그들은 자신들의 뒤를 은밀히 쫓는 유저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2
마노스 제국의 황도.
화려한 집무실에 두사람이 앉아 있었다.
"뭐? 놈들이 타사르 평원으로?"
"감시자에게 연락이 왔어. 그래서 일차로 회수대를 출발시켰어."
길드장 노벨의 말에 베히모스는 히죽 웃었다. 드디어 뇌제의 홀을 찾을 시간이 된 것이다.
"그 시건방진 NPC에겐 연락했고?"
"당연하지. 테라칸 황제의 무덤에서 만나자던데?"
그동안 철십자 길드는 지그와 그의 동료들을 예의 주시 해왔다.
동맹을 맺은 이바니우스 3세가 현재 반크의 열쇠는 지그의 수중에 있을 거라고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유한 일행이 정보를 모으고 다닌다는 말에 각지에 파견된 길드원들을 이용해 그들을 감시해 왔다. 유한일행이 테라칸의 무덤을 찾고 있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뭔가 단서를 얻은 녀석들은 지금 무덤이 있는 타사르 평원으로 가고 있었다.
"회수대에겐 섣불리 공격하지 말라고해."
"왜? 그 시커먼 쇳덩어리 때문에?"
"그도 그렇지만, 놈들이 능묘를 연 다음에 가로채도 늦지 않아 다된밥에 코 빠트리면 굉장히 열받을거 아니야."
"하긴 그렇군."
노벨과 베히모스도 그런 경험을 맛봤다.
베레타-마노스 전쟁에서 완수를 눈앞에 뒀던 '철혈 여제의 특명' 퀘스트를 막판에 망쳐 버렸다. 대장장이 유저들의 단결된 힘을 얕잡아 보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얄미운 건 그 때 유저들을 충동질한 지그라는 녀석 이었다.
"크크크, 이번에 제대로 복수를 해주겠어."
대장장이 지그와는 푸른 새벽 길드와의 길드전 이후 계속해서 악연으로 맺어져 왔다. 아니, 지그가 일방적으로 철십자 길드의 행보를 방해했다고 보는 게 맞을 듯.
그런녀석을 곱게 죽이고 끝낼 생각은 없었다.
놈의 눈앞에서 보물을 가로챈 후 실컷 조롱하고 괴롭히다 없애 버릴 것이다. 그 다음에는 놈이 게임에 쌓아 놓았던 기반도 하나하나 뭉개 버릴 생각이었다.
그래야 놈에게 농락당한 수모가 풀릴 것 아닌가
"텔레포트 마법진을 전개시켰어. 길드원들도 모두 소집되었고."
"좋아! 타사르 평원으로 가자."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노벨의 말에 베히모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번일만 끝나면 거대 키메라 제조법과 마노스 제국의 황위가 손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다음엔 뇌제의 홀이.
지그에 대한 앙갚음은 물론 길드의 미래를 생각해서도 이번 일은 절대 실패할 수 없었다.
황량한 타스르 평원 가운데 불룩 솟은 부분이 있었다.
블랙을 따라 이곳까지 온 일행은 주위가 썰렁한 무덤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여기가 맞아?"
"그렇다. 이곳이 바로 짐의 무덤이다."
블랙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록 설득당해 무덤을 안내했지만, 그래도 선뜻 내키지는 않은 모양.
"그런데, 왜 이리 작아?"
잘쳐줘도 고위 귀족의 무덤 정도로밖에 안되어 보인다.
명색이 최초로 아르페디아 대륙을 통일한 황제의 무덤인데 겨우 이 정도 밖에 안되는게 말이 되는가.
그것은 유한 뿐만 아니라 일행 모두의 생각 이었다.
"훗. 생각이 짧군 이건 겉보기에 지나지 않아. 무덤 지하에 거대한 공간이 있다. 그곳에 짐의 시신과 보물이 묻혀있지."
"진시황릉처럼 되어 있는 건가?"
백성들을 위한 공공 근로 사업이라서 피라미드 같은 줄 알았는데, 진시황릉과 비슷한 모양이다.
TV에서 본 진시황릉은 엄청난 지하공간을 자랑했다.
축조에 동원된 인원은 이집트 피라미드 못지 않았고, 도기인형을 비로한 부장품도 엄청난 수준.
아마 테라칸 황제의 무덤도 그에 못지 않을 것이다.
"그럼 돌아가지."
블랙이 동굴 입구를 찾아 문을 열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계단을 따라 쭉 내려가자 커다란 지하 광장이 나왔는데.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지하 광장에는 부서진 석상 조각이나 돌조각 밖에 없었다.
황폐한 모습에 실망한 리지스가 입술을 삐죽이자 클락이 맞은편 벽을 가리켰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저기에 안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이곳은 짐을 지키던 호위 병사들의 석상이 있던 곳이지."
진시황제의 병마용갱(兵馬俑坑)처럼 아마 이곳은 황제의 안식을 지키는 병사들의 자리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오랜세월이 흐르면서 이렇게 황폐하게 되었던 것.
아무튼 이곳에 볼일이 없는 일행은 블랙이 가리킨 벽쪽으로 다가갔다. 벽에는 커다란 석문이 있었고, 석문옆에는 작음 홈이 있었다.
"여기가 열쇠 구멍인가 봐."
채린의 말에 유한은 반크의 열쇠를 꺼내 홈에 꽂아 넣었다. 그러자 육중한 소리가 울리며 커다란 석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석문 안으로 들어간 일행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별다른 위험이 느껴지지 않자. 그들의 경계심은 스르르 풀리고 말았다.
"생각보다 간단하네."
"맞아. 화살이 날아오거나 바위가 굴러나오는 장치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단서 찾는다고 고생했는데 그런 것 까지 있으면 너무 하잖아요."
희희낙락하며 들어가던 일행은 얼마 후 묘한 통로로 들어 서게 되었다.
흐릿한 안개가 서려 있는 통로.
혹시 독 안개가 아닌가 했지만, 안개는 일행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안심한 일행은 마음을 놓고 안개의 통로로 발을 내딛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유한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어느 틈엔지 주변의 동료들이 사라지고 자신 혼자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시아야! 에이린! 로키형! 다들 어디갔어?"
유한은 동료들을 소리쳐 불러 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귓속말을 보내도 응답이 없는것은 마찬가지.
"나참! 다들 어디로 간거야?"
유한은 투덜거리며 통로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안개 속에서 거대한 무엇인가가 나타났다. 전갈과 사마귀를 섞어 놓은 듯한 몬스터는 예전에 플레임 마운트에서 보았던 스콜피언 퀸과 비슷하게 생겼다.
"으악, 이게 대체 어디서?"
유한은 깜짝 놀라 펜릴 소드를 꺼내 휘둘렀다.
그러나 몬스터는 유한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버리고는 괴성을 지르며 낫같이 생긴 앞다리를 휘둘렀다.
유한은 몬스터의 공격을 피하려고 했지만, 비좁은 통로에서 몸을 놀릴 공간이 부족했다.
엎드려서 황급히 몬스터의 공격을 피하긴 했지만, 이어서 날아오는 꼬리치기는 정통으로 얻어 맞았다.
퍽!
"크악!"
몬스터의 꼬리에 얻어맞은 유한은 바닥을 대굴대굴 굴렀다.
제대로 얻어맞은 덕분에 HP가 절반 가까이 떨어져 있었다.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몬스터의 다음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방금 공격했던 몬스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어리둥절해 하던 유한은 재빨리 뒤로 돌아섰다. 뭔가 기척이 있어 돌아봤더니, 데보라의 목인병이 우두커니 서있는게 아닌가.
"아니, 이게 어째서 여기에?"
유한이 황당해 하거나 말거나 목인병은 두 팔에 장치된 석궁을 그에게로 겨냥하더니, 화살을 쏘아 보냈다. 화살은 한두 발에 그치지 않고 소나기 처럼 계속 날아왔다.
"무, 무슨 목인병이 이렇게 강해?"
기겁한 유한은 정신없이 몸을 날려 화살을 피했다. 최선을 다해 피했지만, 결국 화살이 그의 다리와 어깨에 연달아 꽂혔다. HP도 바닥에 다다랐다.
- 위험합니다. 서둘러 치료하십시오.
"제길, 갑자기 이게 뭐야?"
달아나는 와중에 황급히 포션을 들이키던 유한은 눈앞에 로키와 블랙이 나타나자 황급히 그들에게로 달려갔따.
"형! 살려 줘요. 갑자기 몬스터가 나타나서……."
"진정하고 저길 봐."
로키가 가리킨 곳을 본 유한은 깜짝 놀랐다.
흐릿한 안개 통로 안에서 동료들이 멍한 표정으로 허우적 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에이린, 어디있어?"
"지그 너 장난치면 맞는다!"
"이 바보 고릴라가 대체 어딜 간거야?"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불러대며 통로 안을 이리저리 헤맸다.
그렇게 애타게 찾아 헤매던 것이 무색하게 서로 마주칠 때마다 그들은 칼을 뽑아들고 서로에게 공격을 퍼부어 댔다.
"꺄악! 트롤이다!"
"앗! 스톤 골렘이잖아?"
"죽어라, 괴물!"
상대방이 몬스터로 보이는 모양.
유한은 아까 자신을 공격했던 몬스터가 바로 동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일단은 말려야 했다.
"모두 그만둬! 같은 편이란 말이야!"
그러나 유한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지 모두들 계속 상잔을 펼치고 있을 따름 이었다.
"이 통로엔 황상 마법진이 깔려있다. 발 딛는 자는 환각에 빠져 길을 잃게 되고, 눈앞의 동료를 알아보지 못하게된다."
친절하게 설명을 해 준 것은 블랙 이었다. 그의 뒷북스런 작태에 유한은 펄쩍 뛰었다.
"그런 게 있으면 진작에 말했어야지!"
"글쎄, 해 주려고 했는데 모두 촐랑거리며 가 버려서 말이야."
들어가지 않았던 것은 로키뿐이다. 그는 블랙이 안개통로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정지 했다. 블랙의 행동에서 뭔가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실대로 말해, 실은 알려주기 싫었던거지?"
"천만에, 같은편에게 짐이 그럴리가 있겠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블랙은 애초부터 가르쳐 줄 마음이 없었던 것 같았다, 자신의 무덤을 건드리는 일행이 골탕 먹는것을 보고 싶었는지도,
"망할 불량 가디언 같으니라고!"
입술이 툭 튀어나온 유한에게 로키가 말했다.
"서둘러 애들을 구해야 해. 이대로 있다간 큰일 날 거야."
그 말이 맞았다. 안그래도 지금 채린이 옌스의 참마도에 맞아 죽을 위험에 처한 상태 였다.
그러나 함부로 안으로 발을 내딛을 수는 없었다. 발을 내딛는 순간 구조는 커녕 또다시 환각에 빠져 허우적 거리게 될것이다.
로키가 손도 못 쓰고 우두커니 빠져나오길 기다린 이유가 있었다.
뭔가 동료들을 구조할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래, 그렇게 하면!'
좋은 방법이 떠오른 유한은 곧장 왼손을 펼쳤다. 그러자 왼팔에 끼고 있던 건틀렛에서 와이어가 날아가 옌스의 목을 빙글빙글 감았다.
"켁! 뭐, 뭐야?"
옌스가 낚이자 유한은 서둘러 녀석을 안개통로 밖으로 끌어 당겼다. 어리둥절해 하는 옌스를 놔두고 유한은 이번엔 오펜에게 와이어를 날렸다.
그렇게 유한은 낚시 구조법을 통해 동료들을 모두 구출해 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리둥절해 하는 일행에게 로키가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일행은 블랙을 노려 보았따. 그러나 블랙은 자신에겐 잘못이 없다는 듯 뻔뻔함으로 일관했다.
"아무튼, 이 환상 마법진의 통로를 어떻게 빠져나가죠?"
에이린의 말에 유한은 블랙을 바라보았다. 어서 알고 있는 것을 털어 놓으라는듯.
"짐은 이곳에 환상 마법진이 설치되었다는 것만 알뿐. 파훼법은 모른다."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이실직고 하라고."
"어허, 모른다니까."
블랙의 비협조의 일행은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았다. 모두의 시선이 유한이 신고 있는 투사의 슈즈로 모여들었다.
"반크의 열쇠를 썻으니까 이번엔 투사의 슈즈 차례겠지?"
"글쎄, 내가 이걸 신고 들어갔지만 너희랑 똑같이 환각에 빠졌는데."
"뭔가 다른 비밀이 있는 건가?"
"숨겨진 우회로 같은게 있지 않을까?"
로키의 의견에 모두들 근처의 벽과 바닥을 훑어보며 비밀 통로를 찾았다. 그러다 오펜이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일행을 불렀다.
"여기 좀 봐!"
"왜 ? 뭔데?"
모두들 오펜이 있는 곳으로 우르르 몰려갔따. 오펜은 벽면에 적힌 시구절을 가리켰다.
투사의 발걸음을 따르는 자, 테라칸 페하의 곁으로 가리라.
예전에 이곳을 찾아온 미케니아 일당들이 발견했던 시구 였다.
"이게 뭔 뜻이지? 투사의 발걸음을 따르라고?"
일행은 머리를 맞대고 시구를 풀이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체 투사가 누구죠?"
"이계에서 온 말년 용사 파일런이야. 예전에 테라칸의 신하였대."
유한은 투사의 슈즈에 적힌 설명과 예전에 블랙이 자신에게 파일런의 후예 운운했던것을 떠올렸다.
분명 투사의 슈즈에는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했다. 그 비밀 이란게 바로 이 통로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그럼, 파일런의 발걸음을 따라가라는 소리인데 파일런이 어디로 간줄알고 따라가라는 거죠?"
"상대를 따라가려면 그의 발자국을 찾는것이 먼저지."
유한은 안개 통로의 바닥을 유심히 살폈다.
자세히 보니 바닥에 발자국 같은것이 찍혀 있었다. 좀전에는 유심히 살펴보지 않아 있는 줄도 몰랐다.
"내가 먼저 가 보지."
침착한 로키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유한이 발견한 발자국을 따라 걸었지만, 결국 어느순간 환상 마법진에 걸려 길을 헤맸다.
낚시로 로키를 구조한 유한은 이번엔 자신이 가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투사의 슈즈를 신은 자신이라야 안개통로를 통과할 수 있을것 같았다.
'조심, 조심."
유한은 천천히 바닥의발자국에 자신이 신은 투사의 슈즈를 가져다 댔다.
투사의 슈즈가 발자국을 딱 맞게 덮어 버리자, 묘한 울림 소리가 들리며 주변의 안개가 그에게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역시 신발 주인이 직접 나서는게 답이었군.'
유한은 계속 발자국을 밟으며 앞으로 나갔다. 계속해서 안개는 물러났고, 마침내 유한이 건너편 문을 활짝 열어 젖히자 안개는 통로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됐어! 이젠 괜찮을 거야."
유한의 말대로 일행이 지나가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유한이 트랩을 풀면서 환상 마법진이 소멸된 것이다.
어렵게 2차 관문을 통과한 일행은 앞으로 계속 전진해 나갔다.
3
환상 마법진이 걸린 통로를 지나니 이번에는 제법 넓은 통로가 나타났다.
"이 통로만 지나면 시신이 안치된 방이 나올 거다."
블랙의 설명에 일행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통로 마지막에 와서 그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따. 묘실로 통하는 문을 엄청난 괴물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르르르ㅡ!
낮게 으르렁 거리며 눈을 번뜩이는 괴수는 지옥의 수문장이라 불리는 켈베로스였다.
황소만 한 덩치에 머리가 셋, 꼬리가 다섯 개인 켈베로스는 흉악한 기운이 가득한 눈으로 낯선 칩입자들을 노려 보았다.
"오오, 삼돌아!"
잔뜩 경계하는 일행과 달리, 블랙은 헤어진 가족이라도 만난 듯 반가이 두팔을 벌리며 뛰어 나갔다.
하지만, 켈베로스는 반가이 달려온 블랙을 머리로 받아 버렸다. 어찌나 강하게 들이 받았는지, 블랙은 공중에 붕 떠서 반대편 벽까지 날아갔다.
쿠웅!
블랙이 벽에 처박히자 유한이 황급히 달려갔다.
"야, 블랙 너 괜찮냐?"
"크윽, 등쪽 장갑이 깨졌지만, 뭐 그럭저럭."
벽에 부딪친 쪽이 부서졌기에 유한은 그 자리서 수리에 들어갔다. 부서진 장갑을 떼 내고 예비용으로 인벤에 보관하고 있던 장갑을 대신 끼워 넣었다.
"그런데, 너 저 괴물이랑 아는 사이냐?"
"저 녀석은 생전에 짐과 아리엘이 기르던 강아지였다."
"강아지?"
블랙의 말에 일행은 전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켈베로스를 바라보았다.
흉악한 눈빛에 강철이라도 뜯어발길것 같은 이빨, 그리고 발톱은 어떤가? 저기에 걸리면 블랙의 단단한 몸뚱이라도 버텨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강아지라고 하긴 좀 큰 것 같은데 ?"
"원래는 저렇게 크지 않았다."
블랙의 설명에 따르면 대륙을 통일하던 중 악신(惡神)'카르마'를 믿는 사교 집단을 퇴치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빛의 성녀인 아리엘이 카르마의 대신전 지하에서 작고 앙증맞은 녀석을 발견했단다.
"다들 삼돌이를 죽이라 했지만, 아리엘이 반대했다. 어찌 되었건 생명을 함부로 해치는 건 옳지 못하다면서……."
그래서 블랙, 아니 테라칸은 황궁에서 켈베로스를 키웠고, 켈베로스도 자신을 길러 준 테라칸과 아리엘을 몹시 따랐다고 한다.
"근데 왜 이름이 삼돌이예요?"
"머리가 셋이니까."
"극악의 작명 센스로군."
문제는 켈베로스가 일행을 곱게 보내 주겠냐는 것이다.
자신을 키워 준 주인의 시신을 이때까지 지키고 있는 충성스런 녀석이 정체 불명의 칩입자를 고이 들여보내 줄리 만무했다.
"블랙이 한번 더 설득하면 되지 않을까?"
"무리야 , 새로운 몸을 얻은 블랙을 녀석이 알아보겠어?"
유한의 지적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봤다면 처음부터 박치기를 날리진 않았을 것이다.
"흥! 설득이 안 된다면 해치울 수밖에!"
그렇게 말하며 나선것은 옌스였다. 그는 기다란 참마도를 쥐고 켈베로스에게 다가갔다. 아니 돌격해갔다.
"그만둬!"
블랙의 만류는 이미 늦었다. 대쉬스킬로 전환한 옌스는 순식간에 켈베로스의 코앞까지다가갔다.
켈베로스는 맹렬히 돌진해온 적을 보고 흠칫 놀랐다.
아니, 놀란것은 가운데 머리 하나 뿐이다. 남은 좌우 두개의 머리들이 주둥이를 쩍 벌리더니 지옥의 푸른 불꽃을 뿜어댔다.
"크아아악!"
"옌스!"
푸른 불꽃에 휘감긴 옌스가 일행이 있는 곳 까지 굴러왔다.
에이린이 서둘러 힐을 뿌렸지만, 이미 옌스는 사망한 뒤였다.
- 크윽! 이몸이 일격에 죽다니.
죽어서 말을 할 수 없었던 옌스는 비주얼 키보드를 두들겨 가며 원통함을 호소했다.
시체가 사라지면 되살아 나겠지만 ,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부활포인트가 3일 거리에 있는 마을이라는 게 문제 였다.
즉, 부활하면 3일, 현재시간으로는 하루를 열나게 달려와야 무덤에 올수 있었다.
-미안하다, 에이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구나. ㅠㅠ
"헤헤, 괜찮아요 최소한 켈베로스가 무척 강하다는 건 알았으니까요."
에이린은 옌스를 위로하며 신성력을 전개했다.
"레져렉션(Resurrection)!"
기도를 하는 에이린에게서 흘러나온 성스러운 빛이 죽은 옌스의 몸을 감쌋다. 오색 찬란한 빛들이 옌스에게 스며든다 싶더니 그의 HP와 MP, 스테미나가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그리고 죽었던 옌스가 벌떡 일으켰다.
"우와, 에이린 너 이제 부활도 할수 있는 거니?"
리지스가 감탄하자 에이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헤헷, 저도 이제 하이 프리스트 라구요."
하이 프리스트 칭호를 얻으면서 그에 걸맞은 스킬도 습득한 에이린 이었다. 덕분에 옌스는 달리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좋았어! 이번에야말로 저 똥개를 해치우겠다!"
기세 좋게 뛰쳐 나가던 옌스는 유한이 내건 발에 걸려 넘어졌다.
벌떡 일어난 옌스가 유한의 멱살을 잡았다.
"크윽! 무슨 짓이냐, 바츠!"
"너 바보냐? 랭커를 일격에 죽이는 괴물에게 또 덤벼들게."
그랬다. 이제 옌스는 랭커급이 아닌 진짜 랭커였다.
아르페디아 100 순위에 손꼽히는 강자인 것이다. 그런 강자가 켈베로스의 화염 브레스 한 방에 죽었다.
"훗, 그건 이 몸이 방심을 해서……."
"에이린, 이번에 옌스 또 죽으면 살려 주지 마라."
"넵넵. 어차피 랭크가 낮아서 하루에 한 번 밖에 못 써요."
이렇게 되자 옌스는 포기하고 깨끗이 물러났다.
나름 에이린이 또 살려 줄 거라 믿고 덤비려 했는데, 레저렉션 스킬에 그런 제약이 있었다니.
"그나저나 저 녀석 문 앞에서 떡 버티고 나오질 않는군."
"그러게요."
켈베로스는 마치 묘실의 문을 지키는것이 잣니의 숙명이라는 듯. 멀리 떨어진 일행은 노려보기만 하고 덤비진 않았다.
유한일행의 입장에선 천만다행이었다.
저 흉폭한 지옥의 투견이 덤벼 들었으면. 곧장 게임 오버 상황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저 똥개 레벨이 얼마나 될까?"
"한 250정도? 아님 300?"
동료들의 의견에 유한은 고개를 저었다.
"레벨을 떠나서 켈베로스는 게임 시스템상 '무적'의 기능이 있을거야. 랭커라도 쓰러트릴 수 없게 말이야."
채린은 찰스턴 공방전 당시 방패로 써먹은 버추얼 에이지 방송팀의 MC 이정민을 떠올렸다.
당시 이정민은 화살이건 창칼이건 마법이건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던 극강의 탱커(Tanker)였다.
"하지만, 그러면 저 문을 아무도 통과하지 못하잖아."
그럼 던전으로서의 의미가 없다.
"아니,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그걸 알아내는 것이 이번 관문의 과제겠지."
유한의 말에 오펜이 신화적이며 정석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켈베로스를 벌꿀과 겨자 가루를 반죽해서 만든 떡으로 잠재웠다고 하는데, 이 방법을 써 보면 어떨까?"
"하지만, 벌꿀과 겨자 가루가 어디 있다고요?"
"걱정마, 나한테 비슷한게 있으니까."
리지스가 인벤을 뒤지더니 꿀과 초코렛 케이크, 그리고 수면제를 끄집어냈다.
"드래곤도 잠재울수 있다는 초강력 수면제야 이거라면 저 녀석도 정신없이 골아 떨어질걸."
"리지스 언니는 별 걸 다 갖고 다니네요."
"후후후, 나 상인인 거 몰라?"
리지스는 초코렛 케이크 속에 수면제를 넣은 뒤, 겉에 꿀을 듬뿍 부어 냄새를 없앴다. 그리고 켈베로스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케이크를 휙 던져주고는 총알같이 돌아왔다.
"크릉?"
눈앞에 달콤한 냄새가 나며 먹을 것이 있자 켈베로스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래, 먹어라! 먹는거야!'
유한을 비롯해 모두가 바짝 긴장한 채로 켈베로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켈베로스는 초코렛 케이크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앞발로 초콜렛 케이크를 툭 쳐서 일행에게로 던져 버렸다.
"우리 삼돌이는 남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는다."
"교육 참 잘 시키셨네요."
칭찬이 아닌 칭찬
아무튼 신화에서의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또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이를테면…….
"아리엘의 오르골을 사용해 볼까?"
묘실을 여는 세가지 열쇠중 하나가 아닌가.
하지만 감미로운 음악을 들려주는 아리엘의 오르골이 저 흉폭한 켈베로스까지 잠재워 줄지는 의문 이었다.
"한번 해보자. 남은 방법은 이것 뿐이잖아."
채린의 설득에 유한은 인벤토리에서 아리엘의 오르골을 꺼내 태엽을 돌렸다. 그리고 그것을 켈베로스 가까운 곳에 두었다.
태엽이 풀리면서 아름다우면서도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일전에 한 번 들어 보았지만, 다시들어도 기분이 편안해지는 음악이었다.
"크르르?"
켈베로스가 반응을 보였다.
놈은 오르골 상자를 향해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터벅터벅 다가왔다. 그리고…….
"아우우우우ㅡ!"
녀석은 세 개의 머리를 쳐들고 마치 늑대처럼 울부 짖었다.
잠이 들기는 커녕 이상 반응을 보이자 일행은 깜짝 놀랐다. 오히려 켈베로스를 더 자극 시킨 것은 아닌지?
하지만 그런것은 아니었다.
"울고 있어요."
에이린의 말대로 켈베로스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방금 전의 흉악한 모습은 간데 없었다.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는 녀석의 눈빛은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오르골 소리를 들으며 울던 켈베로스는 스르륵 배를 깔고 드러눕기 시작했다.
"앗! 통한다!"
"쉬잇! 조용히."
리지스가 기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드러누운 켈베로스는 계속 오르골 음악을 감상하더니 어느 순간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러자 일행은 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묘실의 문으로 다가갔다.
"진짜 잠든건가?"
"옌스 너 죽을래!"
일행은 잠이 든 켈베로스를 쿡쿡 찌르는 옌스를 보고 기겁했다. 하지만 옌스가 아무리 건들고 찔러대도 켈베로스는 깨어나지 않았다.
호기심이 생겼는지 리지스나 채린이 툭툭 건드려 봐도 마찬가지. 그녀들은 켈베로스의 상태를 유심히 살펴보다 깜짝 놀랐다.
"이 녀석 죽었잖아."
"그, 그러게"
숨을 쉬지 않았다. 심장도 멈춰진 상태.
방금 전까지 흉폭하게 날뛰던 녀석이 어째서 오르골 소리를 듣고 영원한 수면에 빠져 버린 것일까
다행스럽기도 하지만 어이없는 상황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름 원인을 알고있던것은 블랙뿐이었다.
"사실 그 오르골의 음악은 아리엘이 녀석에게 불러주던 자장가 소리지."
"……."
"오랜 세월 녀석은 이 자리를 지켜 왔을거다. 아리엘이 없는 기나긴 세월을, 참으로 힘들게……."
익숙한 자장가를 다시 듣게 되자 감정이 북받쳤을 것이다. 그리움 앞에 무너진 감정은 켈베로스의 영혼을 그리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이끌었던 것.
영원한 안식의 세계에서 아리엘을 만났는지 켈베로스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정말 수고 많았다. 나중에 저세상에서 보자꾸나."
블랙은 음악이 멈춘 오르골을 켈베로스의 품에 안겨주었다.
그 모습을 유한 일행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채린과 에이린, 리지스의 눈에는 눈물 방울이 글썽글썽 했다.
"크흐흑! 불쌍한 삼돌이."
"옌스 넌 왜 우냐?"
"슬프니까!"
"사내자식이 질질 짜기는."
그렇게 말하는 유한도 슬그머니 눈물을 훔쳤다.
묘실의 문 쪽으로 돌아선 유한은 오랫동안 닫혀있던 문을 활짝 열었다.
-테라칸 황제의 묘실을 열었습니다.
-명성이 2,000 올랐습니다.
드디어 테라칸의 묘실이 열렸다.
그러나 유한은 안내창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는 물론이고 모두가 문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4
황제의 시신이 안치된 방은 화려한 궁전을 방불케 했다.
광장이라 해도 손색없을 거대한 대전은 대리석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었고, 사방에 온갖 금은 보화들이 깔려 있었다.
그 엄청난 양의 보물들을 보고 유한일행은 눈을 감지도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침착한 로키도 이순간만은 넋을 완전히 빼놓고 있었다.
"우와아아!"
"어느 정도 예상을 했지만 이건……."
"상상을 초월 하는거 란게 이런거군요."
대전 중앙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관이 안치되어 있었고, 양옆으로 또 다른 보물이 보관된 창고인지 방인지 문이 여럿 있었다.
"블랙, 너 아주 부자였구나."
"흥! 짐을 뭘로보고."
하긴, 테라칸 황제는 아르페디아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자다 그의 발아래 대륙의 모든 나라들이 굴복했으니, 진상된 보물만도 커다란 창고를 몇 개는 채우고 남을 것이다. 어쩌면 여기 있는 것은 생전에 소유했던 것의 일부에 불과할지도.
'어라, 저건?"
유한은 관 뒤의 단상위에 있는 옥좌를 보았다.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옥좌에는 위풍당당한 황금갑옷을 입은 시신이 앉아 있었다. 시신은 번개모양의 기괴한 황금 지팡이를 쥐고 대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게 블랙 너냐?"
"그래, 짐의 시신을 짐이 직접 보자니 기분이 참 그렇군."
"그럼 중앙의 황금관속에 있는건 누구고?"
"나의 충실한 신하이자 사랑스런 반려인 아리엘이다."
그말에 황금관의 뚜껑을 열어보려던 리지스는 재빨리 손을 뗏다. 아무리 블랙이 보물을 양보하겠다 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에 손대는 건 용서치 않을 것이다.
'뭐, 다른 것도 많으니까.'
사방에 깔린게 금은 보화다.
거기다 대전 양옆에 있는 방안에는 보물들이 종류별로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한쪽 방에는 금괴와 은괴들이 가득했고, 또 다른 방에는 온갖 보석과 진주로 된 장신구로 가득했다. 화려한 의상과 공단으로 가득한 방도 있었고, 진귀한 고대의 무구로 채워진 방도 있었다.
그 밖에 뛰어난 장인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예술품과 도자기, 값비싼 향신료와 약재들도 가득했다. 마법서와 갖가지 고서가 가득 찬 방은 오펜을 즐겁게 만들었다.
"이게 좋을까? 아님 저게 좋을까?"
"뭘 망설여? 어차피 다 가져갈건데."
"일단은 구경부터 하자고요."
채린과 리지스 에이린은 마치 쇼핑이라도 하는것처럼 갖가지 화려한 의상들을 골라보고 또 입어 보았다.
여자애들이 깔깔 대는 사이, 남자들은 고대 무구가 진열된 방을 살펴보고 있었다. 옌스와 로키는 전투 직종이었기에 그쪽으로 관심이 많았고, 유한도 대장장이 였기에 관심을 두는건 당연했다.
"전부 바츠 네가 만든 것보다 좋아 보이는걸?"
"옌스 너 다음부터 수리 안 해 준다?"
"치사하게 그러기냐?"
유한은 무기고 안의 무구들을 찬찬히 살펴 보았다.
그러던 그는 이 보물창고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하나 발견했다. 쇠로된 자루에 금박을 입힌 작은 망치, 측 장도리였다.
별다른 장식도 없고, 금박이 되어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특이할만한 점도 없었다.
나무 자루가 아니라 오래 쥐기도 불편했고, 무게 균형도 별로라 작업 도구로도 쓸모 있어 보이지 않았다.
"뭐야, 왜 이런물건을 여기다?"
"앗! 그건……."
무기고로 동정을 살피러온 블랙은 유한의 손에 들린 장도리를 보고 감짝 놀랐다.
"이게 뭔데?"
"그, 그건 좀 쪽팔리는 물건이야."
"쪽팔리다니?"
잠시 말하길 주저하던 블랙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옛날에 내가 호두를 까먹을때 쓰던 것이지."
"껍직 깨는 용도였냐?"
정말 딱 그 정도에 걸맞은 도구 같았다, 꼴에 황제가 쓰던 거라고 금박을 씌운 모양이고.
유한은 이것으로 호두를 까먹는 황제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위엄있는 황금 갑옷을 걸치고 조그만 장도리로 호두를 툭툭 때리는 테라칸을 생각하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과연 쪽팔려 할 만한 물건이다.
"이걸 왜 여기다 둔 거지?"
"하하, 그래도 생전에 짐이 쓰던 거니까 챙겨 둔 걸 거다."
"저승에서도 호두를 까먹으란 건가? 꼼꼼한 신하들이네."
"그런 물건은 내버려 두고 딴 걸 찾아봐. 여긴 진귀한 무기들이 꽤 많은……."
유한에게 친절히 권하던 블랙은 갑자기 뒤로 홱 돌아섰다.
무기고에서 대전으로 쏜살같이 튀어나가는 그의 모습이 뭔가 심상찮아 보였다.
로키가 블랙을 따라 곧장 무기고를 나갔고, 옌스도 그 뒤를 따랐다. 유한도 손에 쥔 장도리를 내버릴 틈없이 뒤 따라 나왔다.
"크크크, 고맙구나. 문을 죄다 열어 줘서."
대전으로 나온 블랙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옥좌를 바라보았다.
옥좌에 있는 테라칸의 시신은 단상 아래로 내팽겨져 있었고, 그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었다.
"저, 저놈은!"
마기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그는 바로 이바니우스 3세 였다.
그는 테라칸 황제의 시신이 갖고 있던 번개 모양의 지팡이를 움켜쥐고 연방 광소를 내뱉었다.
"음하하하핫! 드디어 손에 들어왔도다! 황제 테라칸의 보물, 뇌제의 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