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지그 철강 조합 (101/143)

 지그 철강 조합

1

어둠 속에서 과거의 악연이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유한은 그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해커를 쫓는 데, 손석진의 정체를 캐내는 데 만 계속 신경을 기울였다.

'한동안은 의심받지 않도록 조심해야겠군.'

집으로 돌아온 유한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게임에 접속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로그아웃을 했던 장소에 동료들은 아무도 없고 블랙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이제 온 거냐, 후손."

"딴 애들은?"

"기다리고 있었는데 니가 오지 않아서 다들 먼저 가 버렸다."

"으악! 맞다!"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유한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정령계를 구한 다음 날, 아니 그날 밤.

다시 모인 유한 일행은 아리엘의 오르골을 먼저 찾기로 결정했다. 블랙이 이바니우스 3세를 먼저 없애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유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놈은 어차피 우리 쪽으로 접근하게 되어 있어."

"어째서 말이냐?"

"네가 말했잖아. 그 자식이 반크의 열쇠를 흘리고 펄쩍 뛰었다고, 분명 열쇠가 나한테 있다는 걸 알고 접근해 올거야."

미케니아의 국왕은 바로 그때 때려잡으면 된다는 게 유한의 주장이었고, 동료들도 거기에 동의했다. 사실 어디갔는지 알 수 없는 악당을 쫓기보다 보물찾기를 즐기고 싶은 그들이었다.

그래서 유한 일행은 아리엘의 오르골을 찾기로 했고, 엘프의 숲에서 그로지아의 왕도 슈탈린으로 왔다.

반크의 열쇠와 투사의 슈즈를 모두 그로지아 왕궁에서 보관하고 있었으니, 아리엘의 오르골도 왕궁 보물 창고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일행은 슈탈린에서 관련 정보를 모으다가 시간이 늦어지자 모두 접속을 종료했다.

그런데 유한은 여기서 중대 실수를 했다.

TV 토론회에 참석하느라 내일 늦을 거란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으으, 모두들 화가 났을 거야."

유한은 서둘러 동료들에게 사과의 쪽지를 보냈다. 모두들 접속하고 있었고, 열심히 아리엘의 오르골에 대한 정보를 찾는 중이었다.

모두에게서 답장이 곧장 날아왔다.

- 에이린:헤헤헤, 괜찮아요. 에이린도 지각했거든요.

- 오펜:늦으면 늦는다고 말을 하지 그랬어.

- 로키:사나이가 약속 시간을 지켜야지.

- 시아:너 TV나오는 거 봤어. 말 잘하던데?

다행이 모두들 그리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서둘러 합류한 유한은 동료들이 알아낸 정보를 전해 들었다.

"왕립 대학 교수에게 들었는데, 예전에 고대 유적을 발굴하면서 세 가지 보물을 발견했대."

발굴된 유물은 학자들이 제대로 조사하기 전에 탐욕스런 왕립 학술원장의 손에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학술원장은 그 세 가지 보물을 왕실에 진상했다고.

"엄청난 비밀을 가진 보물일지도 모르는데 배틀 폴로 경기 대회의 상품으로 걸려서 무척 실망했다고 하더라."

그게 바로 반크의 열쇠다.

"그럼 아리엘의 오르골은?"

"배틀 폴로 경기가 있기 전에 없어졌데요."

에이린의 말에 유한은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것도 도난당한 거야?"

"아뇨, 그로지아의 공주가 바르카스의 왕자에게 시집 갈 때 혼수품으로 끼여 갔데요."

"켁!"

그로지아에서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일단은 아리엘의 오르골이 바르카스 왕실로 넘어갔다는 정보를 얻었다는 데 만족하기로 했다.

사실 일이 너무 쉽게 되어도 재미없는 법.

어려운 만큼 오기가 생기고, 그 결실을 얻었을 때 느끼는 기분도 더 달콤하다.

"문제는 바르카스 왕실에서 어떻게 오르골을 빼내느냐는 건데……."

명성치는 왕궁에 출입할 수 있을 만큼 쌓아 놓았다.

하지만 출입이 가능하다고 해서 함부로 왕실의 물건을 반출할 수는 없다. 까딱 잘못하다간 '왕실의 적' 칭호를 받고 수배 퀘스트에 내걸려 다른 유저를 즐겁게 해 주고 말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보물을 가진 NPC를 설득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주 NPC를 어떻게 구워삶지?'

일단 바르카스에 시집갔다는 그로지아의 공주에 대한 정보부터 모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유한이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쪽지가 왔습니다. 빨리 확인하세요.>

효과음이 울리며 안내창이 불쑥 떠올랐다.

유한은 곧장 도착한 쪽지를 살펴보았다. 쪽지를 보낸 사람은 리지스였다.

지그 사장 보아라.

철공소 확장이 다 끝났다. 건물도 완공되고 노스아크에서 주문된 공작기계들도 도착했어.

그런데 사장이 놀러 다니니 일꾼들이 자꾸 농땡이를 부리고, 난쟁이 영감은 자꾸 쓸데없는 걸 만드네. 거기다 요새 블랙아이언을 주문한 길드들은 얼른 납품해 달라고 난리고.

딴말 안할게.

너 빨리 안 오면 철공소에 불 지르고 공작기계는 포포 밥으로 줘 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라.

- 동업자의 농땡이에 화가 난 리지스가.

"이 자식이!"

붉으락푸르락하는 유한을 보고 채린이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인데 그러니?"

"아, 글쎄 리지스 녀석이……."

유한이 리지스에게서 온 쪽지 내용을 이야기하자 채린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럴 만하네, 뭐. 네가 농땡이를 부린 것도 사실이잖아."

"그건 퀘스트 때문에 불가항력이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퀘스트 중이 아니다. 테라칸 황제의 보물에 넋을 잃어 철공소가 어떻게 돌아가느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야 한다.

리지스가 정말 철공소를 어쩌진 않겠지만, 일꾼들이 농땡이를 부리고, 갈리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건 문제가 있었다.

"아무래도 난 일단 철공소로 가 봐야 할 것 같으니까, 너희들이 바르카스에서 가서 계속 정보를 모아 줘."

"알았어. 걱정 말고 일하고 있어."

동료들은 바르카스 왕국으로 떠나고, 유한은 소환한 짐마차를 타고 케이트 산맥에 있는 자신의 철공소로 돌아갔다.

2

산을 넘고 물을 건너기를 여러 번.

부지런히 짐마차를 몬 유한은 마침내 철공소에 당도했다.

"늦어서 미안."

유한이 인사하자 리지스가 째려보며 말했다.

"흥! 나를 쏙 빼놓고 너희들끼리 놀러가서 재미있었니?"

"놀러 간 게 아니라 엘프의 숲에 퀘스트를 수행하러 간거야."

"시끄러! 그게 그거지!"

리지스는 자신만 빼놓은 게 분했는지 펄쩍 뛰었다. 유한은 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를 다독였다.

"미안, 다음에는 너도 꼭 데려갈게."

"쳇, 뭐 나름 성과가 있느니 용서는 해 주지."

"성과?"

유한은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설마 리지스가 자신이 득템한 것을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알고 있을지 모른다. 채린과 리지스는 무척 친하니까.

왕따한 것을 용서해 줄 테니 바츠의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을 내놓으라고 하면 어쩌지?

그러나 리지스가 말한 성과는 유한의 예상과 달랐다.

"이봐요, 미남 오빠. 노닥거리지 말고 이리 와 봐요."

리지스는 한쪽에서 여성 유저들에게 둘러싸인 NPC를 불렀다.

유한은 누군가 싶어 봤다가 깜짝 놀랐다. 문제의 NPC는 엘프의 숲 대장장이 알세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지그 님."

"아니, 댁이 왜 이곳에?"

"이번 일로 제 실력이 한참 모자란다는 것을 알아서요. 인간사회에 나와서 좀 더 수준 높은 기술을 배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알세인은 유한 일행이 떠난 뒤에 곧장 숲을 나와 유한의 철공소로 온 것이다.

그는 유한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무래도 믿을 만한 인간 대장장이는 지그 님밖에 없어서…….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일하면서 배우게 해 주세요."

그래도 댁이 여기 있으면 엘프 분들이 곤란한 거 아닙니까?"

알세인은 엘프의 숲에 있는 유일한 대장장이.

그가 이런 식으로 덜렁 나오게 되면 엘프들보다도 유저들이 이만저만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엘프의 마을에서 무구 수리를 못 받을 테니까.

"괜찮습니다. 이미 장로님과 여러 형제자매들의 허락을 받았으니까요."

'그래, 드림맥스에서 알아서 하겠지.'

새로운 대장장이 NPC를 박아 넣든지 어떻든지 할 것이다.

유한은 절대 알세인의 청을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안그래도 유저든 NPC든 실력 있는 대장장장이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알세인이 얼마나 실력이 있을지 모르지만, 굴러들어온 호박을 차 버릴 필요는 없다.

"좋습니다. 허락하지요. 대신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당연하지요, 지그 님. 아니, 이제 사장님이라 불러야 겠군요."

유한은 일단 알세인에게 다른 NPC 대장장이들과 함께 무구를 생산하도록 지시했다. 싹싹한 알세인은 곧장 작업장으로 달려갔다.

"어때? 앞으로 여성 유저들이 구름같이 몰려올 것 같지 않아?"

리지스가 알세인의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대장장이는 실력이 중요한 거야."

"흥, 늘씬한 여자 엘프 대장장이라도 그런 소리를 했을까?"

유한은 리지스의 빈정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는 송코쪽을 바라보며 궁금한 것을 물었다.

"송코 형, 철공소 증축은 다 했다면서요?"

리지스가 보낸 쪽지에는 증축이 완료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응, 교수님이 완벽하게 해 놓고 가셨어. 노스아크에서 배달된 공작기계들도 다설치했고."

"그래요? 예전과 그리 달라진 것 같지가 않은데요."

"하하하, 입구 정면에서 보니까 그런 거야."

송코는 유한을 철공소 뒤편으로 데리고 갔다. 측면으로 돌아가자 그제야 증축된 철공소의 위용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우와! 멋지다."

새로 증측된 철공소 건물의 외벽에는 블랙아이언의 투구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심플하면서도 강인한 도안이 유한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저건 우리 교수님의 서비스야."

"제가 정말 고마워하더라고 전해 주세요."

유한은 새로운 철공소 안을 둘러보았다.

리지스의 말과 다르게, 일꾼들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중간 중간 잡담을 하긴 하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공작기계에 대한 일꾼들의 반응도 많이 나아졌다. 젊은 일꾼들뿐만 아니라 제법 나이 있는 일꾼들도 이리저리 공작기계를 다루며 무구 생산에 이용하고 있었다.

"어디 농땡이를 부린다는 거야? 리지스 녀석 엄살은."

"하하, 그래야 네가 기겁하고 온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갈리도 딱히 쓸대없는 것을 만들지는 않았다. 새로이 증축한 블랙아이언 전용 공방의 한 자리를 차지해서 블랙아이언의 부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다만 문제가 뭔고 하니…….

"흠, 역시 인간보다 드워프를 형상으로 한 병기가 멋있어!"

지금 갈리가 만드는 블랙아이언은 드워프처럼 생겼다.

크기가 조금 작지만 체형이 옆으로 떡 벌어지고 장갑이 두꺼웠다. 좋게 말하면 다부져 보였고, 나쁘게 말하면 땅딸보 같았다.

"스승님, 지금 뭐 하십니까?"

"오, 지그 돌아왔느냐? 보아라. 내가 블랙아이언을 한층 더 개량시켰다. 이제 조금만 더 개량하면 드래곤도 때려잡을 수 있을 게야."

하지만 이건 개량된 게 아니라 퇴보된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만들면 어떻합니까? 원형하고 다르잖아요."

블랙아이언을 주문한 사람들은 블랙의 균형감 있고 위풍당당한 모습에 반했다. 양산형이 원판인 블랙보다 파워가 떨어져도 반품이나 불만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 다 그때문.

하지만 이런 땅딸보 블랙아이언을 만들어 줬다간 당장 불만이 치솟을 게 뻔하다.

"걱정 마라. 내 이론상 원형보다 이 녀석이 훨씬 더 강하다."

"그저 이론일 뿐이겠죠."

"시험해 보면 알 게 될 게다."

"하나 마나 뻔하죠! 블랙아이언에 들어가는 건 인간의 영혼이란 말입니다. 드워프 몸통에 사람 혼이 들어가면 참 잘 움직이겠습니다."

"그, 그건……. 드워프의 혼을 불러오면 되지 않겠느냐?"

"그게 엿장수 맘대로 됩니까? 뭐 불러온다고 쳐요. 불러온 드워프의 혼이 어지간히 말을 잘 듣겠네요."

드워프는 대체로 기가 드세고 자존심이 센 종족이다.

오죽했으면 고대 미케니아의 마도사들도 완전히 굴복 시키지 못했을 정도.

그런 종족의 영혼이 들어간 블랙아이언은 보나 마나다.

말도 안 듣고 제멋대로 날뛸 것이 뻔하다. 그런 물건을 대체 어디가 쓰겠는가?

"크윽! 성능은 훨씬 더 강한데……."

"징징 거리지 마십쇼. 갈리 님이 헛짓하느라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되었다고요."

유한은 팔을 걷어붙이고 블랙아이언 생산 작업을 시작했다.

주문이 밀려 있다. 언제까지 납품하겠다는 약속은 안했지만, 그래도 지지부진 늦어진다면 고객들의 원성이 높아질 것이다.

- 블랙아이언의 구동부를 완성했습니다.

스킬 경험치 150을 얻었습니다.

- 블랙아이언을 만들었습니다.

균형감이 뛰어나 한층 더 나은 성능이 나올 것 같습니다.

* 영혼을 빙의시키면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블랙아이언들이 속속 만들어졌다.

옆에서 갈리가 핵심 장치들을 만들어 줘서 그 속도는 혼자 일할 때보다 배는 빨라졌다.

완성된 블랙아이언들은 창고로 차곡차곡 옮겨졌다. 나중에 베르디에게 부탁해 한꺼번에 영혼을 빙의시켜 납품할 생각이었다.

유한은 블랙아이언을 만드는 중에도 다른 무구 생산에 소홀하지 않았다. 그는 자주 무구 공방에 들러 생산 과정을 점검하고 일꾼들은 독려했다.

나날이 사업은 번창하고 주머니에 돈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철공소 영업이 잘되어 가고 있을 때, 유한에게 또 한 번 전환기를 맞이할 일이 발생했다.

3

"지그야, 손님 찾아왔어."

유한이 철공소에 복귀한 며칠 후, 리지스가 뒤에 사람들을 주렁주렁 달고서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벨파스에서 온 쿠퍼입니다."

"전 오고타이라고 합니다."

"난 칼틴의 카루라."

모두 이름을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현재 아바란 왕국에서 나름 명성을 떨치고 있는 대장장이 유저들이었다.

이들은 유한처럼 길드에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대장간을 운영하며 질 좋은 무구를 생산하고 있었다.

"다들 어쩐 일입니까?"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 하지요."

쿠퍼의 말대로 지금 유한이 있는 무구 공방은 일꾼들의 망치 소리와 풀무질 소리로 대화를 주고받기가 불편했다.

유한은 그들을 자신의 집무실로 데리고 갔다.

넓은 집무실 안의 가구와 집기들은 예술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모두 유한이 돈을 주고 산 것은 아니다. 얼마 전에 어느 길드가 돈이 부족하다며 블랙아이언의 대금을 길드장의 컬렉션으로 지불하게 해 달라고 사정해서 벌어진 결과였다.

그런 뒷사정을 모르는 대장장이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원망 어린 눈빛을 유한에게 던지던 그들은 소파에 앉아 말문을 열었다.

"저희가 지그님을 찾아온 이유는 한 가지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부탁이라뇨?"

"그것이……."

요즘 아바란 왕국의 대장장이 유저들은 파산하기 일보 직전이라고한다. 그 이유는 지그 철공소가 왕국 내의 무기 시장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희도 양산 무구의 품질은 지그 철공소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만, 문제는 물량입니다. 그쪽에서 푸는 물량이 적지 않은데다 가격까지 싸니 우리들이 불리한 상황입니다."

"거기다 저기 리지스 님이 어찌나 악착같이 영업을 하는지 저희가 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장사는 그렇다 치고 뭔가 팔아서 재료를 확보해야 스킬 랭크를 높일 수 있는데, 요새는 계속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제발 좀 같이 먹고 살자고요!"

모두들 유한에게 통사정했다.

이들이 이렇게 자존심까지 내던지고 애걸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지그 철공소의 영업이 잘되고 있다는 뜻이리라. 문제는 대장장이 유저들을 이대로 나 몰라라 할 수 없다는 것.

그들도 나름 아바란 왕국에서 구축해 놓은 인맥이 있을텐데 이들과 완전히 척을 지게 되면 유한에게 귀찮은 일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비록 게임이지만 지그 철공소는 대기업 아닙니까? 저희 같은 중소기업도 먹고 살 수 있도록 사정 좀 봐주세요."

그렇다. 이건 게임이다.

유한이 뭘 하든 자유였으며, 독과점을 제한하는 현실의 공정거래법과 같은 규칙도 없다. 더구나 게임 내 아바란 왕국의 배경은 난세 그 자체고, 약육강식의 환경이다.

그냥 이대로 경쟁자를 죄다 눌러 버려도 상관없다.

하지만 유한은 동네에서 작은 마트를 하는 아버지를 떠올리니 매정하게 내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잘만 이용하면 골치 아픈 몇 가지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그야 잠깐 나 좀……."

유한이 곰곰히 생각하자, 리지스가 그를 불러서 집무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어쩔 생각이야?"

"너라면 어떻게 할 건데?"

유한이 되묻자 리지스는 당연하다는 듯 응답했다.

"거절해야지. 경쟁자들을 떨쳐 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잖아."

평소 아르페디아 대륙의 상권을 장악하겠다고 노래를 부르던 그녀였다. 유한의 경쟁자들이 망하게 생겼다고 하자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난 아니라고 봐."

"왜?"

유한의 말에 리지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바란 왕국의 무기 시장을 독점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있는 데 그게 아니라니.

"블랙아이언이 얼마나 잘 팔리는지 너도 알지?"

"당연하지. 대박이잖아."

현재 거대 병기 생산 판매는 지그 철공소가 선두에 있었다.

라이벌인 발리안의 철공소는 여전히 복구에 힘을 쓰고 있었고, 몇몇 대장장이들이 만든 거대 병기들은 생산도 느리고 성능도 다소 미흡했다.

또 생산 능력을 가진 거대 길드들은 길드의 전력을 축적할 뿐, 여전히 판매에는 미온적인 입장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지그 철공소의 블랙아이언이 각광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기본으로 한 달은 기다려야 할 정도로 주문량도 폭주하고 있었다.

"우리 주력 사업은 이제 블랙아이언 쪽으로 넘어왔어. 수익 면에 있어서도 양산 무구는 블랙아이언에 상대가 안돼."

"하긴 그렇지."

양산 무구 수백 수천 점을 팔아야 벌 돈을 블랙아이언은 단 한 대 파는 것으로 얻고 있었다.

블랙아이언 생산은 유한과 갈리만 전담하고, 무구 생산은 철공소 일꾼들이 매진하는데도 그런 수익 차이가 나는 것이다.

"무구 생산을 계속하고 블랙아이언까지 만들기엔 일손이 모자라. 아니, 무구 생산하는 일손과 비용이 아깝다는게 맞겠지."

믿고 맡길 수 있는 일꾼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 지금 수익이 떨어지는 일에 많은 일꾼과 재료를 투입하는 것은 손해다.

무구 생산을 하는 일꾼들을 교육시켜 블랙아이언 제조에 투입하면 생산속도도 빨라지고, 수익은 훨씬 더 커질 것이다.

그것은 철공소가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됨을 의미했다.

"앞으로 거대 병기 시장이 커지면 완제품 판매는 물론이고, 부품 판매나 수리 영업도 할 수 있어. 제품도 계속 개량될 것니까 나중에 신제품을 개발, 판매 하는 일로 이어지겠지."

"그래서 무구 생산을 포기하겠다는 거야? 우리 종자 사업이었잖아."

"고래가 되려면 큰 바다에 나가야 하는 법이야. 언제까지 냇가에서 촐랑거릴 순 없다고."

리지스는 더 반박하지 못했다.

유한의 말이 맞았다. 아르페디아의 상권을 장악할 자신이 언제까지 무구 판매 같은 작은 일에 매달려 쫓아다닐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우릴 이만큼 키워 준 사업인데 그만두기는 섭섭한걸."

"아무튼 나한테 생각이 있으니까 맡겨 줘."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둘이 다시 집무실로 들어오자 초조하게 기다리던 대장장이 유저들이 그들을 바라봤다.

유한은 자리에 앉아 잠시 분위기를 잡다가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전 무구 생산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순간 응접실 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기껏 같이 좀 살자고 했는데, 그걸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대장장이 유저들의 얼굴이 험악해지고, 리지스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방금 전만 해도 유한은 무구 생산을 가만 둘 것처럼 말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혼자만 살겠다는 겁니까? 우린 다 게임 접고요?"

"그건 아닙니다. 무구 생산을 포기하지 않는 대신 생산량을 차차 줄일 계획입니다."

유한은 현재 지그 철공소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며, 수익성이 떨어지는 무구 생산에 더 매달릴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험악해졌던 대장장이들의 인상이 풀렸다.

"앞으로 우리 철공소는 물량을 줄이는 대신 무구의 질을 높이는데 전념할 겁니다. 저가의 양산 무구들도 철공소를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서만 소량 생산 할 거고요."

생산량을 점차 줄이고 그 공백은 다른 대장장이 유저들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지그 님."

"역시 아르페디아를 대표하는 대장장이시군요!"

유한의 대승적인 결정에 대장장이 유저들은 연방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그러나 유한이 마냥 호의만 베푸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세 가지 조건이요?"

"전 앞으로 '지그 철강 조합'이라는 길드를 만들 생각입니다. 길드원들은 당연히 대장장이 분들이 주축이 될 겁니다. 첫 번째 조건은 바로 여러분들이 제가 만드는 길드에 가입하는 겁니다."

유한은 바란 왕국의 대장장이 유저들을 아예 동료로 만들어 버리기로 했다.

그러면 필요할 때 일손도 쉽게 구할 수 있고, 철공소의 생산량을 높여 아르페디아뿐만 아니라 다른 대륙의 무기 시장에도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길드 가입이라……."

다들 길드에 예속된 상태가 아니라 유한의 요구는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두 번째 조건은 여러분들이 우리 지그 철공소에서 제련되는 철을 사서 무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말에 세 사람은 다시 인상을 찡그렸다.

"결국 우리더러 종속이 되라는 겁니까."

제련된 쳘을 사 쓰라는 것은 족쇄나 다름없었다. 지그 철공소가 멋대로 철의 양을 줄이고, 가격을 높이면 그들은 손을 쓸 수가 없으니까.

"제가 원하는 건 동맹입니다. 여러분들을 종속시킬 욕심이 있었다면 이전에 아바란의 철 시장을 장악했을 겁니다."

"음……."

"아시는지 모르지만, 지그 철공소에서 제련된 철은 다른 철보다 순도가 뛰어납니다. 양산 무구의 질이 좋았던 것도 다 그 때문이지요."

초열탄으로 제련하는 드워프의 철.

그것이 유한을 지금에 이르게 한 기반이다. 우수한 철로 만든 무기로 시장을 석권했고, 그렇게 쌓은 부로 여러 재료들을 사들여 랭크를 손쉽게 올려 갔다.

"이미 유저들은 우리 철공소의 값싸고 우수한 제품에 매료된 상태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시장을 양보한다고 해서 유저들의 마음까지 바꿔 놓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건 그렇군요."

자신들이 만든 무구가 품질 면에서 크게 뒤지지 않는다고 해도 약간의 손색은 있었다.

"제가 제공하는 철에 여러분의 실력이 더해지면 훨씬 더 좋은 무구가 만들어질 거라 봅니다만?"

대장장이들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쪽이 더 이득이다. 지그 철공소에서 적정 수준의 가격으로 양질의 철을 제공해 준다면 말이다.

다들 수긍하는 눈빛을 보이자 유한은 바로 세 번째 조건을 제시했다.

"세 번째는 지그 철강 조합에 가입한 분들은 자기 대장간 간판에 조합의 문장을 걸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저희가 제공하는 철로 만든 무구에는 'Iron of ZIG' 라고 명시해 주십시오."

'확실히 그러면 지그 철공소의 명성에 기댈 수 있겠군.'

자존심은 좀 상하지만 이미 그것을 내버리고 온 그들이었다. 대장장이 유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한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모두 수락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우린 같은 식구가 된 겁니다."

리지스는 유한이 대장장이들과 악수하는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왠지 자신만 손해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아쉬워 하는 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아, 참. 앞으로 판매가 걱정되면 여기 리지스 사장과 상의하십시오. 재고 없이 깨끗이 정리해 줄 겁니다."

"그래요! 저에게 맡겨 주세요!"

그렇게 리지스는 계속 무구 판매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유한은 무구 독점 생산이라는 패를 버렸지만, 철공소의  효율적인 운용과 대장장이 유저들과의 동맹이라는 귀중한 패를 얻었다.

그것은 그가 또 한 단계 도약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4

마노스 제국 황궁.

얼마 전 리트만은 황궁 수문장으로 임명되었다.

철십자 길드의 아이언사이드 기사단원으로서, 그리고 마노스 제국의 신민으로 지난 전쟁에서 여러 차례 공훈을 세운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우두커니 대문을 지켜야 하는 일이 맘에 들지 않았다.

임무는 내팽개친 리트만은 단짝인 유나를 만나서 잡담에 열중했다.

"들었어? 지그 자식이 길드를 만들었다더군."

"알아. 대장장이 길드라지."

"가서 확 박살 내 버릴까?"

"기왕이면 그 녀석 가디언도 고철로 만들고 말이야."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다.

실제로 실행할 용기가 그들에게 없었다. 마음속으로 지그를 천 갈래, 만 갈래 찢어 죽이는 그들이지만, 실제로 만나면 눈을 피해야 할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놈의 힘이 뭔지.

마음이 우울해진 그들은 은근히 화제를 돌렸다.

"남쪽엔 왜구들이 득실득실한다지?"

"후소 대륙에서 온 일본유저들? 하긴 그 때문에 온 나라가 난리더라고."

현재 마노스 제국 남부는 약탈과 침범을 일삼는 일본 유저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철십자 길드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곤 있지만, 치고 빠지는 해적들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바다는 최가장 길드 놈들이 꽉 쥐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최가장 놈들은 일부러 일본 애들이 설치게 놔두는거야. 마노스 제국이 아닌 우리 길드를 곤란하게 만들려는 속셈이라고."

베히모스나 길드장인 노벨이 마노스 제국에서 요직을 맡고 있기에, 철십자 길드도 제국의 일에 이리저리 참여하고 있었다. 전쟁은 물론, 치안이나 생산에 관련된 일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길드가 최가장하고 원수진 일이 있었던가?"

"케이지 녀석이 배틀 폴로 대회에서 벌였던 수작이 들켰는지도 모르지. 아님 저번 무인도 쟁탈전에 소수 파견된 우리 뒤치기 부대의 정체를 알았다거나……."

"여왕이 해군을 양성하고 있어서일 수도 있겠군."

신대륙에 대한 정보가 속속 올라오자, 미네르바 여제는 신대륙 선점을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앞으로 해상 전력이 필요하기에 베히모스도 그녀의 뜻을 막지는 않았다.

"그런데 리트만, 너 이렇게 계속 농땡이 부려도 괜찮아?"

"차라리 잘렸으면 좋겠다. 좌천돼서 남쪽에 가면 이렇게 심심하진 않을 거 아니야?"

그 때문에 리트만은 태만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남쪽으로 가서 쪽바리들 화끈하게 작살내면서 광렙에 득템을 하고 싶은데 말이야."

멀뚱히 대문만 지키는 임무 퀘스트는 경험치나 보상을 얼마 주지 않는다. 물론 일을 잘하면 승진이 되기도 하지만 리트만이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아무튼 여긴 심심해 죽겠어. 누가 황궁에 안 쳐들어오나?"

그런데 그의 바람이 하늘에 통했던지 갑자기 황궁 정문쪽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쾅!

깜짝 놀란 라트만은 손에 창을 뒤고 곧장 정문으로 달려갔다. 이미 정문은 처참하게 박살 나 있었고, 그곳을 지키던 병사들과 기사들은 모두 죽었다.

이 모든 일을 저지른 원흉이 천천히 황궁 안으로 들어왔다.

온몽에 검은 마기를 휘감은 적을 본 리트만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오만하고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는 상대는 실력이나 레벨이 무척 높아 보였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리트만의 외침에 상대는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리트만은 상대를 감싸고 있는 마기가 수백 개의 검은 화살로 변하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그 수백 개의 화살이 노릴 상대는 뻔했다.

예상대로 검은 화살의 비는 그에게 쏟아졌다.

"크아아!"

리트만은 미친 듯이 검은 화살을 막고 피했다.

그러나 치명상은 피하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HP바가 달랑달랑한 그에게 상대가 다가왔다.

"제법이구나. 꽤 쓸만한 실력이야."

오만한 미소를 잔뜩 머금은 상대는 날카로운 눈으로 리트만을 내려 보며 말했다.

"묻겠다. 여기가 미네르바라는 계집이 사는 소굴이 맞느냐?"

황궁은 발칵 뒤집혔다.

정문을 돌파한 침입자가 황궁 안으로 들어와 홀연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침입자와 조우한 수문장 리트만의 보고에 근위 기사들과 황궁 마법사들은 여제가 있는 방을 철통같이 지켰다.

침입자의 기습에 철저히 대비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침입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그냥 가 버린 것은 아닐까.

다들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침입자는 엉뚱한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그대가 베히모스인가?"

"내가 베히모스요. 그러는 당신은?"

막 게임에 접속한 베히모스는 갑자기 나타나 말을 건 상대를 경계했다.

"짐은 미케니아의 지존 이바니우스 3세라고 한다."

이바니우스 3세.

정령계에서 유한 일행에게 패하고 도주했던 그가 이곳 마노스 제국의 황궁에 모습을 드러냈다.

상대가 정체를 밝히자 베히모스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했더니 지난번 우리 회수대를 전멸시킨 패거리의 두령이시군."

그는 슬쩍 허리춤에 찬 칼에 손을 가져갔다. 이대로 놈을 잡아 경험치와 아이템을 얻을 생각이었다.

그러자 이바니우스 3세가 손사래를 쳤다.

"그만둬라. 짐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싸우러 온 게 아니라고? 그런 사람이 황궁 정문을 박살 내 놓나?"

방금 접속했지만, 베히모스는 대강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황궁 요소에 흩어져 있는 길드원들이 계속 귓속말을 보내 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와 조용히 대화를 하자면 어쩔 수 없었다. 여제의 목을 따러 온 것처럼 굴어야 멍청한 것들이 죄다 그 계집에게로 달려갈 게 아닌가."

"하!"

베히모스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눈앞에 있는 이 NPC는 미네르바 따위와는 상대도 안될 정도로 간교한 지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 그 말을 믿어 보지. 싸우러 온 게 아니면 목적이 뭐요?"

"짐은 얼마 전 역적들의 손에 수하를 다 잃었다. 아무리 짐이 강하다 하나 뒤를 받쳐 주는 버팀목이 없으면 곤란하지."

"그래서 우릴 버팀목으로 삼으시겠다?"

"잠시 동안만 협력하자는 게 짐의 조건이다. 물론 짐의 행보는 은밀히 할 것이다. 그대가 짐의 뜻을 들어준다면 짐도 그대가 원하는 일을 들어주지."

"구체적으로 어떤?"

베히모스의 물음에 이바니우스 3세는 집무실 한편에 놓인 거대 목인병 모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를테면, 짐은 저까짓 물건보다 더 뛰어나고 강한 거대 키메라의 제조법을 그대에게 일러 줄 수도 있다. 지금 그대들에게 필요한 건 적국에 대항할 병기가 아닌가?"

그것은 사실이었다.

갈리가 사라진 뒤로 철십자 길드는 거대 목인병을 유지할 능력을 잃어버렸고, 지금 가동 가능한 상태에 있는 기체는 단 3기에 불과했다.

거대 병기 전력을 증강 중인 다른 길드들에 비해 불리한 입장.

거대 병기 관련 기술을 빼오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고는 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런데 훨씬 강력한 키메라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니.

베히모스 입장에선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짐에게도 귀가 있다. 그대에게 야심이 있다는건 익히 들어 알고 있어. 길드의 수장보다 더 뛰어난 실력으로 부하들을 지도하고, 여제의 신임을 얻어 국정을 좌우한다지?"

"……."

"그대가 노리는 게 무엇인지 잘 안다. 이 제국의 황좌겠지. 그러려면 여제 계집이 순순히 물러나야 하겠는데 그게 힘이 들지? 짐의 말이 맞는가?"

'대단한 NPC로군.'

일개 NPC가 유저의 속마음까지 알아내다니 그저 드림맥스의 인공지능이 가공하단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흡족한 미소를 띤 그는 보다 공손하고 은근한 태도로 이바니우스 3세를 대했다.

"정말 절 제위에 올려놓으실 수 있습니까?"

"흐흐흐, 짐은 마도 문명의 지존이었다. 계집년 하나 세뇌하는 것은 일도 아니지."

이바니우스 3세가 정말 그렇게만 해 준다면 굳이 반역을 일으키지 않고도 황제의 자리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노스 제국의 강력한 힘을 이용해 대륙의 패권을 노려 볼 수도 있다. 잘하면 다른 대륙으로의 진출을 모색할 수 있을지도.

"우리의 동맹기간은 언제까집니까?"

"짐이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을 때까지다. 그대가 잘만 협조해 주면 보물을 획득 후, 그대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 줄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베히모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이바니우스 3세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단번에 간파했다. 저번에 테라칸의 무덤에서 회수대가 전멸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분명 미케니아의 왕은 뇌제의 홀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 이바니우스 3세의 제안을 수락하시겠습니까?

그때 효과음과 함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베히모스는 수락하기 전에 퀘스트 관련 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혹여 속임수라도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바니우스 3세와의 동맹]

- 부하들을 모두 잃은 이바니우스 3세는 지금 곤궁에 처해 있다. 이바니우스 3세를 도우면 당신과 당신의 길드에 적지않은 도움을 줄 것이다.

그와 동맹을 맺어 대륙 제패에 도전해 보지 않겠는가?

* 보상

1. 거대 키메라 제조법 획득.

2. 마노스 제국의 제위.

'수락해야지. 날 황제로 만들어 준다는데 말이야.'

잘만하면 이 퀘스트를 통해 지지부진한 철십자 길드의 현 상황을 타파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베히모스는 이바니우스 3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NPC 따위에게 아부를 떤다는 게 고까웠지만, 보상을 받을 수만 있다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의향이 있었다.

"기꺼이 폐하의 버팀목이 되겠습니다."

"후후후, 청을 받아 줘서 고맙구나."

그러나 베히모스는 뇌제의 홀을 절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얻을 건 다 얻은 다음 이바니우스 3세를 없애고 뇌제의 홀을 빼앗을 것이다.

지금은 잠시 상대를 이용하는 것뿐.

하지만 그것은 이바니우스 3세도 마찬가지였다.

반크의 열쇠를 되찾고, 투사의 슈즈를 획득하기 위해 대륙 최강의 힘을 가진 철십자 길드를 이용하겠다는 게 그의 계락이었다.

보상?

그건 그대 가서 생각해 볼 일이다.

서로의 본심을 숨긴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으며 웃었다.

그리하여 철십자 길드와 미케니아 국왕의 짧은 동맹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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