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3. 섭외
1
유한 일행의 부축을 받고 하이엘프들이 세계수 밖으로 나오자, 엘프들은 난리가 났다.
"도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게……."
장로의 물음에 유한은 자신들이 보고 겪은 것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미케니아 일당의 음모와 정령들의 궐기, 그리고 미케니아 일당의 도주 등등.
"아아, 그런 일이!"
수많은 정령들이 정령계를 지키다 산화했다는 말에 장로는 굵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바람의 무녀님은? 무녀님은 무사하신가."
"정령들과 마기로 오염된 정령계를 정화하고 계십니다."
"아아, 어리석은 우리들 때문에……."
문제의 쇠기둥 키메라가 나타났을 때, 서둘러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후회하고 있을 틈은 없다.
장로는 서둘러 엘프들을 보내 정령계의 정화를 돕도록 하고, 부상당한 하이엘프들을 치료하도록 했다. 또 엘프 마법사들에게 지시해 세계수 주변에 이중 삼중의 결계를 만들도록 했다.
이 같은 참담한 일은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엘프들에게 모든 일을 지시한 장로는 다시 유한 일행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들에게 큰 은혜를 입었군."
"그런 인사를 받을 자격 없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군. 미케니아의 왕이 도망쳤다고 했지."
근심 어린 얼굴을 하던 장로는 일행을 바라보며 부탁했다.
"그를 반드시 꺾어 주게. 또 어디선가 음모를 꾸밀지 모르네. 그의 야망이 꺾이지 않는 한, 이 아르페디아 대륙은 편안치 않을 것이야."
장로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말소리가 들리며 퀘스트 안내창이 떠올랐다.
- 연계 퀘스트를 받으셨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유한은 안내창에 적힌 퀘스트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미케니아 잔당의 섬멸]
- 간악한 미케니아의 잔당들 때문에 정령계가 큰 위기를 맞을 뻔했다.
엘프의 장로는 또다시 그들이 준동할 것을 우려하여 악의 뿌리가 완전히 뽑혀지기를 바라고 있다.
그대 용사여, 되살아난 과거의 망령들에게서 대륙을 지키지 않겠는가?
조건: 이바니우스 3세의 처단.
그런데 퀘스트는 유한 혼자만이 받은 것이 아니었다. 정령계에서 미케니아 일당들과 싸운 일행들 모두에게 떴다.
파티원 모두는 흔쾌히 연계 퀘스트를 수락했다.
보상도 기대되었지만, 그들은 얼음 궁전 때부터 미케니아와 관련되어 있었다. 자신들이 뿌린 씨는 자신들이 거둬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걱정 마십시오. 그놈들은 반드시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오오, 꼭 부탁하네."
장로의 기대 어린 얼굴을 뒤로 하고 일행은 세계수를 떠났다.
그들은 일단 엘프 마을로 나와서 숨을 돌리고 장비를 정비한 뒤 로그아웃을 할 생각이었다.
현실의 시계 바늘은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잇었다.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시간이 많이 늦었다.
오늘 플레이는 일단 이 정도에서 마쳐야 했다.
"지그 오빠,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뭔데, 에이린?"
에이린은 유한을 빤하게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아까 미케니아 국왕이 도망가고 나서 주웠던 게 뭐예요?"
"그거?"
유한은 인벤토리에서 좀 전에 주웠던 것을 꺼냈다. 황금과 보석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장신구였다.
유한은 이것이 이바니우스 3세가 흘렸기에 미케니아의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여기고 아이템 정보를 확인하다 깜짝 놀랐다.
[반크의 열쇠]
- 고대 아르페디아 대륙을 최초로 통일했던 황제 테라칸의 가신 반크가 남긴 열쇠. 이 열쇠를 가진 자는 테라칸의 보물에 한반 다가설 수 있다.
반크의 열쇠는 지난번 그로지아 왕국 배틀 폴로 대회에 걸렸던 상품이었다.
우승팀에게 부상으로 수여되는데, 어처구니없게도 도난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 반크의 열쇠를 훔쳐 간 것은 꽤 실력 있는 마도사들이라고 했는데…….
'제길, 그게 미케니아 놈들이었던 거야.'
아무튼 반크의 열쇠는 원래 받기로 했던 유한의 손으로 돌아왔다, 동료들은 유한이 보여 준 아이템 정보를 보고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어, 테라칸 황제라면 바로 블랙이잖아."
"그러게. 그럼 이건 블랙이 생전에 숨겨 둔 보물의 단서?"
"헤헤헤, 황제의 보물이라……. 블랙 님한테 한번 물어봐야겠네요."
안 그래도 유한도 그럴 생각이었다.
문제는 블랙의 행방이 아직도 오리무중이라는 것이다. 엘프의 숲에서 해매고 있다는 귓속말을 마지막으로.
- 어디 있어, 이 깡통! 당장 응답해!
유한은 싸우느라 바빠서 보내지 못한 귓속말을 블랙에게 날렸다. 답장은 바로 날아왔다.
- 엇! 살아 있었나, 후손. 대체 어떻게ㅡㅡ.
- 닥치고 어디 있는지 말씀하시지요, 테라칸 황제 폐하!
- 엘프 마을에 있다. 전에 만났던 기사와 함께 있다.
유한 일행은 서둘러 엘프 마을로 달려갔다.
블랙은 알세인의 대장간에서 기름칠을 하는 중이었다. 태평하게 관절에 기름칠을 하고 있는 블랙의 옆에는 로키가 서 있었다.
"무사했구나, 너희들."
"예, 로키 형. 정령들 덕분이었어요. 저 깡통이 중간에 없어지지만 않았다면 그런 희생도 없었을 텐데."
유한이 째려보자 블랙은 펄쩍 뛰었다.
-잘림-
하리라곤 생각도 못했어. 자고로 악의 수장이라면 당당히 자웅을 겨뤄야 하거늘."
"그건 네 생각이고……."
현실은 냉정하다 쏘아붙이려던 유한은 블랙에게서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치졸한 술수를 쓴 덕분에 천벌을 받았지. 좀 전에 놈은 나에게 수하를 모두 잃고 쥐새끼처럼 도주했다."
"뭐? 이바니우스 3세랑 만났어?"
"그래, 끝장 낼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연계 퀘스트가 발동된 이유가 그 때문인가?'
만약 이바니우스 3세가 죽었다면 게임 시스템이 알아서 스토리 진행을 거기서 중단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죽지 않고 도망쳤기에 연계 퀘스트가 발동된 것.
"그건 그렇고, 너 이거 뭔지 알아?"
유한은 반크의 열쇠를 블랙에게 보여 주었다.
정의의 사도답게 쾌활하던 블랙의 얼굴이 열쇠를 보던 순간 침울하게 변했다.
"왜 그래?"
"이것은……. 내 무덤을 열 수 잇는 열쇠다."
"무덤이라면 테라칸 황제의 무덤?"
"그래, 생전에 반크가 무덤 축조를 끝냈다며 보여 주었지."
에이린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왜 살아 있는데도 무덤을 만든 거에요?"
"아리엘이 권했다. 가난한 백성들에게 일거리를 주자면서."
"이집트 피라미드 같은 거로군."
어느 정도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공공 근로 산업이라지만, 블랙, 아니 테라칸은 자신의 무덤이 생전에 만들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따.
무덤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반크의 열쇠만으로 능묘를 열 수는 없어. 능묘를 열려면 짐의 충실한 세 가신이 남긴 단서인 '반크의 열쇠'와 '투사의 슈즈', 그리고 '아리엘의 오르골'이 있어야 하지."
"엥? 투사의 슈즈? 그건 나한테 있는데."
유한은 자신이 신고 있는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군바리 워커, 딱 그렇게 생겼는데 이게 황제 테라칸의 무덤을 여는 단서였다니!
"하지만 아리엘의 오르골은 없지. 단서가 아나라도 없으면 능묘는 못 연다. 그런데 후손, 반크의 열쇠는 대체 어디서 얻은 거냐?"
"미케니아의 왕이 흘리고 가던데?"
"그놈이 갖고 있었다고? 그럼 혹시 그놈이 노린건……."
블랙은 말을 하려다 말았다. 잔뜩 귀를 기울이고 있는 유한 일행을 보았기 때문이다.
"무덤에 특별히 중요한 거라도 있어?"
"아니, 뭐……. 그저 놈이 짐의 부장품을 사악한 데 사용하려 한 게 아닌가 싶어서."
유한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블랙이 우물쭈물하는 것을 보자니 뭔가 대단한 것이 능묘에 있는 모양이다.
"예상보다 부장품이 꽤 많나 본데요?"
"대륙을 통일한 황제라잖아."
"우리 한번 가 볼까?"
보물에 눈이 어두운 일행은 테라칸의 능묘를 발견하고 싶은 욕심이 무럭무럭 생겼다.
그러나 그런 뜻을 본인 앞에서 드러낸 것이 문제였다. 블랙은 붉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엄중 경고 했다.
"이봐, 너희들 괜한 욕심은 부리지 않는 게 좋아. 망자의 안식을 깨트렸다간 저주를 받을 테니까!"
블랙은 오버액션까지 취하며 강조했지만, 유한 일행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되살아난 망자의 저주 따위 있을 리 만무하니까.
"아무튼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다시 보도록 하자."
미케니아의 왕을 쫓을지, 아리엘의 오르골을 찾을지는 다시 만나서 결정하기로 했다.
일행은 그렇게 하기로 약조하고 게임에서 로그아웃했다.
2
유한은 침대에 누웠지만, 잠들지 못했다. 이상할 정도로 의식이 말똥말똥했다. 미케니아와의 일전으로 잠시 잊고 있었던 일이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건 다름 아닌 해킹 문제.
"손석진이 바로 조커야."
"그놈이 바츠를 해킹했을 거다."
게임 속에서 싸웠던 청동 바츠의 모습이 아른아른 떠오르며 허진태의 말이 계속해서 귓속을 맴돌았다.
'설마 그런 이벤트 때문에 드림맥스에서 바츠를 해킹한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건 비약이 너무 큰 것 같았다.
드림맥스는 고객에게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는 게임회사다.
그런 그들에게 고객을 상대로 뻘짓을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드러나면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칠 것이고, 회사의 평판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
'회사가 아니라 개인이 그랬을 수도 있지.'
개발자인 손석진이 모종의 의도를 가지고 회사도 모르게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손석진을 범인으로 치자니, 리셉션 파티 때 해커에게서 온 전화가 문제였다. 그가 해커가 맞는다면 자신을 앞에 앉혀 두고 그런 전화를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아냐, 만약 공범이 있다면…….'
손석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허진태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고, 게임 내에서 묘한 이벤트를 겪고 나니 의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바츠를 지운 이유 말이냐? 이런 강한 캐릭터를 키우는 사람이 실제로 어떤 인간인지 궁금해서 말이다."
"너라는 인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지더군."
"나랑 내기하지 않겠나? 나에게 이기면 네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되 찾을 수 있다."
예전에 해커가 전화해서 했던 말들도 떠올랐다.
해커가 게임사의 개발자라면 잃어버린 소중한 것, 그러니깐 캐릭터 바츠를 되돌려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잃어버린 소중한 것이 캐릭터라는 보장은 있을까?
그냥 떠본다고 그런 소릴 지껄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과연 바츠가 내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이 맞기나 한가?'
유한은 그런 생각도 들었따.
지금 와서 바츠와 지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한다면, 자신은 지그를 선택할 것이다.
바츠는 명성과 아이템 말고는 없지만, 지그는 그보다 많은 것들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게임만이 아닌 현실에서도.
"아우, 제길! 왜 이리 생각할 게 많은 거야?"
유한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아침 7시, 창문으로 밝은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이것저것 생각한다고 한숨도 못 잤다.
"밥 먹고 학원이나 가야지."
머릿속에 엉켜 버린 생각의 실타래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포기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성급하게 잡아당겨서도 곤란하다. 조바심은 나지만 유한은 엉킨 매듭을 천천히 풀기로 했다.
너무 하나에 매달려서는 다른 것을 보지 못한다.
그것은 유한이 바츠를 경험해 보고, 이후에 깨달은 교훈이었다.
"후아암!"
꾸벅거리며 학원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던 유한은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눈에 익진 않지만, 한 번쯤 본 적이 있는 번호였다. 누군가 싶어 휴대폰을 열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유한 군이지요?"
"그런데요?"
"드림맥스의 손석진입니다. 유한군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내일 오후 여섯 시에 본사로 와 줄 수 있겠습니까?"
유한은 바로 확답을 주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단번에 거절했을 텐데, 허진태의 이야기와 청동 바츠 사건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다.
"강유한 군?"
'그래. 일단 직접 만나서 물어보자. 그럼 뭔가 나오는 게 있겠지'
어떨 때는 변화구보다 직구가 더 잘 먹힌다. 지지부진한 해커 색출의 돌파구가 될지도
.
"알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본사로 가죠."
"고맙습니다. 그럼 내일 만납시다."
통화는 거기까지였다.
정면 승부로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해커를 잡을 구체적인 작전은 세워 두지 않았다. 내일 오후 6시까지 그 점에 대해 완벽하게 준비를 해 두어야 한다.
3
이튿날.
유한은 드림맥스 본사로 가기 전에 블라덱의 아지트에 들렀다. 행여 뭔가 좋은 소식이라도 있나 싶어서다.
평소 유한이 오면 쩔쩔매던 블라덱은 오늘따라 표정이 훤했다.
"어서 와,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좋은 소식이 두 가지 있어."
"그게 뭔데?"
좋은 소식이라면 혹시 해커를 찾은 걸까.
유한은 잔뜩 기대에 찬 눈으로 블라덱을 바라보았다.
"하나는 네가 저번에 보여 줬던 지포라이터 속의 파일 보호 프로그램이 누가 만든 건지 알아냈어. 크래커 세계에서 악명을 떨치던 진태무쌍이란 자의 것이지."
"……."
유한의 표정이 의외로 뚱하자 블라덱은 서둘러 다음을 말했다.
"두 번째는 바츠의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의 행방을 알아냈어. 일설에 따르면 현재 그걸 소유한 자는 유저가 아닌 NPC일 가능성이 높다더군. 이건 얼마 전 내가 드림맥스에 연줄이 닿은 사람을 통해 알아낸 정말 대단한 정보야."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다더니.
유한은 자기도 모르게 블라덱의 뺨에 주먹을 날리고 말았다.
퍼억!
"아얏! 무슨 짓이야! 남은 힘들게 좋은 소식을 얻었구먼!"
"시끄러, 밥통! 진태무쌍, 허진ㅌ채 그 작자는 이미 경찰에 체포되었고 NPC에게 있다는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은 이젠 내가 갖고 있어."
"그, 그건……."
블라덱은 울상을 지었다. 유한에게 맞은 사실보다 자신이 최신 정보라고 알고 있던 정보를 해커도 아닌 녀석이 먼저 알고 있다는 게 너무나 충격이었다.
"흐흐흑! 그래, 난 쓸모없는 밥통이야."
"어이. 그렇다고 너무 좌절하지 말라고."
블라덱이 훌쩍이자 어쩐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 유한이 그를 다독였다. 그리고 블라덱에게 지금까지 얻은 정보를 이야기해 주었다.
"지금 내가 바츠를 해킹한 범인으로 의심하고 있는 사람은 손석진이야."
"손석진? 드림맥스 개발자잖아. 그 사람이 왜?"
블라덱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자세한 건 몰라. 근데 허진태가 말하길 그 사람이 왕년에 조커였대."
"헉! 그게 진짜야?"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가능성은 높아."
유한의 말에 블라덱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군. 내가 지금까지 난다 긴다 하는 회사들 서버를 다 열어 봤지만, 드림맥스는 실패했어. 접근하다 인생 종칠 뻔한 적도 있었지."
"네 실력이 낮은 건 아니고?"
잠시 블라덱의 실력을 폄하한 유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다소 늦긴 했지만, 이 녀석도 나름 관련 있는 정보를 얻어내고 있었다.
버리기 보단 이용하는 편이 좋았다.
"손석진에 대한 정보를 모아 줘. 바츠가 해킹될 전후로 그가 무얼 햇는지, 그리고 언제 어디에 있었는지……."
"알았어."
블라덱에게 일을 지시한 유한은 드림맥스 본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유한이 본사 앞에 나타나자 손석진이 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또 만나서 반갑습니다, 강유한 군."
"잘 지내셨어요?"
두 사람은 악수를 주고받았다.
유한은 눈앞의 상대가 해커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반갑게 인사하기가 꺼려졌다. 그러나, 아직 확실한 것은 없고, 맞다 해도 내심을 드러내서는 곤란하다.
"자, 일단 차에 타시죠."
손석진은 미리 대기해 잇는 차에 유한을 태웠다.
이미 차에는 부사장 정경욱이 한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
"여어, 평화의 사자 지그 군이 아닌가. 반갑구먼."
"아, 예. 안녕하세요. 근데 지금 어디 멀리 가는 겁니까?"
손석진까지 차에 오르자 앞좌석의 기사는 곧장 시동을 걸었다.
"일단 부사장님이 쏘는 근사한 저녁을 먹고 방송국으로 갈 겁니다."
"방송국이요? 거긴 왜요?"
"MBS 생방송 시사 토론회에 나가야 하거든요."
손석진의 대답에 유한은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경욱이 말을 이어 나갔다.
"주제가 '가상현실 게임 문화 이대로 좋은가'인데, 자네가 우리 쪽 패널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게 되었네."
"에에엑!"
유한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냥 본사에서 손석진을 만나는 줄로만 알았는데, 갑자기 방송 출현이라니, 그것도 생방송 시사 토론회의 패널이라니!
예상치 못한 사태에 하루 꼬박 구상한 준비들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왜 접니까? 전 일개 유저일 뿐인데요?"
유한은 가기 싫어 항변했다.
"그야 일개 유저의 의견이 필요하니까."
"크악! 대한민국 천만여 유저 중에 왜 하필 저냐고요!"
자신은 패널로 참가할 만큼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말을 조리 있게 할 자신도 없다.
더구나 생방이라지 않는가.
까닥 실수하면 대망신이고 대중의 조롱거리가 된다.
"안돼요. 전 자신 없습니다. 딴 사람 구해서 가세요."
"무슨 일인지 몰라도 도와준다고 하셨잖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강유한 군이 가서 제일 말을 잘한 것 같아서 추천한 겁니다."
'커억! 이 작자가!'
이럴 줄 알았으면 조사고 뭐고 안 만났을 터인데.
유한은 드림맥스 측이 일부러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이러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저번에 블랙에게 드림맥스가 진정한 악의 배후라는 식으로 말해 준 적이 있는데 그걸 본 것은 아닌지?
"그래도 제가 끝까지 싫다고 하면 어쩔 겁니까?"
"아르페디아 온라인 일 년 무료 이용권을 줄 건데도?"
정경욱이 입가에 짓궃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런 거에 안 넘어갑니다."
"신형 캡슐이 나오면 자네에게 꽁짜로 지급하지."
"그래도 싫거든요!"
'허어, 이 녀석이!'
유한이 여간해서 넘어오지 않자 손석진이 대신 나섰다.
"원하는 걸 말해 보세요. 유한 군이 생방송에 출연하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겠습니다."
그 말에 흥분을 가라앉힌 유한은 손석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불쑥 말을 던졌다.
"그럼 바츠를 복구시켜 주세요."
손석진은 곧장 응답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유한은 쏘아 대듯 말을 날려 보냇다.
"왜요? 뭐든지 들어준다면서요? 바츠가 다시 게임에 나타나면 곤란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무덤까지 만들어놓아서요? 아님 청동 쪼가리 몬스터로 복제했기 때문입니까?"
"유한 군, 그건……."
손석진이 다소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유한은 언성을 높였다.
"혹시 이벤트 같은 걸로 써먹으려고 남의 캐릭터를 지운 거 아닙니까? 회사 서버니까 멋대로 주물럭거릴 수 있었을 테니까요."
"이봐, 강 군. 억측이 너무 심하잖아!"
유한의 말을 들은 정경욱이 펄쩍 뛰었다.
청동 바츠 이벤트를 만든 것은 바츠가 해킹되고 한참 후의 일이다. 계획적이라니 말도 되지 않는다. 고작 이벤트 하나 만들고자 유저의 소중한 캐릭터를 지울 리는 없지 않는가.
물론 당사자 입장에선 별의 별 생각이 다 들겠지만.
"유한 군이 바츠의 복구를 원한다면 들어줄 수 있습니다. 데이터만 같은 짝퉁을 만들어서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대답했던 손석진은 잠시 말은 끊었다가 이어 갔다.
"지금 유한 군에게 바츠가 필요한가요?"
"……."
"지그로 즐기는 플레이가 재미없습니까? 예전의 광전사를 플레이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은 건ㄱ요? 그렇다면 바츠를 복구시켜 주지요."
유한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예전으로 돌아간다. 광전사 바츠였던 때로.
다시 주변과 벽을 쌓고 혼자만의 플레이와 광렙으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유한 군이 이전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면 우리는 유한 군을 시사 토론회에 데리고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츠가 아닌 지그를 즐기는 유한 군을 부른 거니까요."
외로운 광전사 바츠에서 만인의 사랑을 받는 대장장이 지그로. 그 변화한 모습 때문에 손석진은 유한을 꼭 데리고 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분명 변하면서 뭔가 개달은 바가 있을 테니까.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닙니다."
"그럼 왜 바츠를 복구해 달라고 한 거죠?"
'댁을 한번 떠보려고요.'
유한은 이 말을 혀끝까지 뱉었다가 도로 집어삼켰다.
솔직히 바츠에 대한 미련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해커에 대한 복수심만 있을 뿐.
그가 바츠를 복구해 달라 운운한 것은 손석진의 허를 찌르기 위해서였다. 그가 정말 해커라면 당황하거나 뭔가 반응을 보일 거라 싶었다.
그러나 손석진의 얼굴 표정에 큰 변화가 없었다.
'이 이상 자극하는 건 위험해.'
자신의 무례한 언사 때문에 드림맥스나 손석진에 대한 접근이 차단되면 큰일이다. 확신을 얻기 전에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다.
그래서 유한은 머릿속에 재빨리 정리한 말로 응답했다.
"그냥 아쉬운 생각이 들어서요. 청동 바츠를 보고 느낀건데, 내가 바츠였을 때 다른 사람들과 친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그렇군요. 단지 옛날이 그리워서는 아니란 말이군요."
"그리고 아깝기도 하잖아요. 랭커 캐릭터를 키우는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당연한 말입니다."
유한은 다시 여기서 손석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만약 그가 이런 자신의 뜻을 알고 흔쾌히 바츠를 복구 시켜주겠다고 하면, 그는 해커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손석진은 엉뚱한 말을 했따.
"지난 일이 아쉽다면 앞으로 아쉬워 할 일을 하지 않으면 되지요. 유한 군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손석진의 눈빛은 어린 아이처럼 맑았다.
음울하기만 한 허진태의 눈빛과는 완전히 달랐다.
의도하는 대답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유한은 그가 해커라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그에 대한 의심은 남아 있었다.
자신에 대해 알고 싶다던 해커의 말과 자신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손석진이 뭔가 연관이 있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