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 10권
1.과거와의 싸움
"소개하마! 짐의 검이 된 광전사 바츠니라!"
이바니우스 3세의 선언에 유한 일행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녀석을 바라보았다.
바츠라니, 어쨰서 해킹되어 사라진 바츠가 NPC의 부하가 되어 나타날 수 있는가?
모두 놀라고 당황하는 가이, 바츠가 마법진 밖으로 빠져나왔다.
한때 게임을 떠들썩하게 했던 광전사의 위풍당당한 모습.
부황한 바츠를 보고 유한 일행은 또 다른 충격과 놀람을 맛봤다.
그이유는 바로.......
"청동 바츠?"
그런 이름이 붙어 있는 녀석은 바로 그로지아 왕국에있는 바츠의 무덤에서 사라진 동상이었다.
자신을 전혀 닮지 않았다고 유한이 투덜거렸었던.
'그런데 저건 뭐지?'
유한은 동상에게서 예전에 없던 것을 보았다.
미간에 음침한 빛을 흘리는 흑수정이 박혀 있었는데 동상이 움직일 때마다 검게 빛났다.
"아쉽게도 육신은 얻지 못했지만, 그보다 더 좋은 청동으로 된 몽뚱이를 얻었지. 그래서 짐은 비전의 마법으로 갑옷에 있는 바츠의 사념을 모아 그를 부활시킨 것이니라."
다시 말해, 이바니우스 3세는 바츠의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을 입혀 노흔 동상을 부하로 삼았다고 자랑하고 있는것이다.
그 어이없는 짓에 모두들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동상이라는 거잖아."
"에이, 진짜 바츠라도 나오는 중 알고 깜짝 놀랐네. 근데 저렇게 할 수도 있는 거에요?"
에이린의 물음에 오펜이 대답했다.
"지간 대규마 업데이트 이후에 숙련도 높은 장비로 이상한 소환 마법을 쓰는 마법사들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헤에, 그럼 그거 새로 나온 히든 스킬......"
에이린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청동 바츠가 공격을 하려고 자세를 잡는 것을 본 것이다.
그녀는 재빨리 방어 태세를 취했으나 청동 바츠의 스피드는 에이린의 예상을 초월했다.
"떨어져!"
"까악!"
유한이 다급하게 에이린의 뒤춤을 잡고 끌어당겼다.
돌진해 온 청동 바츠의 검이 에이린의 몸을 아슬아슬게 스쳐 지나갔다.
"몰러서! 가까이 다가가지 마!"
유한의 경고에 정신을 차린 일행은 거리를 벌린 채 전투 준비를 했다.
에이린을 구해 낸 유한도 재빨리 청동 바츠에게서 물러났다.
"후후후,청동상이라고 우습게 영기지 마라. 바츠의 사념이 조종하니 살아생전의 그와 다를 바가 없음이야"
이바니우스 3세는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는 5명의 마도사들을 지목해 명령을 내렸다.
"너희는 청동 바츠와 함께 역적들을 포박해 오도록 해라. 짐은 먼저 바람의 무녀를 찾으러 가겟다."
지금 이바니우스 3세에게 있어 아르네스를 찾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은 없었다.
직접 역적들을 치죄하고 싶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아르네스가 다른 곳에 숨어 버리기 전에 서둘러 붙잡아야 한다.
"기다려! 거기 서지 못해?"
유한은 달려가 이바니우스 3세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청동 바츠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유한과 청동 바츠의 거리는 겨우 세 걸음 남짓.
이바니우스 3세의 말이 사실이면 서둘러 물러나는게 당연했지만, 유한은 오히려 한 걸음 더 내딛었다.
어쩐지 오기가 생겼고, 분기가 끓어올라 한 마디 쏘아붙였다.
"비켜"
친구들은 유한의 이런 언행에 기겁했다.
"지그야, 조심해!"
"오빠 혼자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고요!"
꼭 사워 봐야 강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청동 바츠는 바츠의 화신이 아니더라도 정말 강하게 느껴졌다.
이제 지그는 죽었구나.
다들 그렇게 생각했지만, 청동 바츠는 오히려 검을 아래 떨어트리며 공격 자세를 풀었다.
"훗!"
'웃어?'
예전에 바츠였을 때도 이런식으로 웃었다.
하수가 분명한 상대가 겁먹지 않고 당당하게 대들 때.
이렇게 코웃음을 치곤 했다.
청동 바츠는 비록 외모는 닮지 않았지만, 바츠의 버릇까지 고스란히 따라 할 줄 알았다.
단순한 모션이 이렇다면, 보유한 스킬이나 능력은 물어보나 마나일 터.
'제기랄,왜 이딴 게 나오는 거야!'
유한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렇지 않아도 바츠가 해킹당해 짜증났는데, 이렇게 대놓고 짝퉁을 등장시켯으니 화가 나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도대체 드림맥스는 유저를 뭐라 생각하는 거지!'
적어도 유저에세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아니면.......
유한은 불연 듯 오만하게 웃고 있는 허진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바츠를 해킹한 것이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개발자 손석진이라 주장했다.
그럼 바츠가 해킹된 것도, 청동 바츠가 나오게 된 것도 다 그의 농간이란 말인가.
정말 손석진이 범인인가?
하지만 리셉션 파티 때 걸려 온 전화는 무엇이란 말인가?
분명 끄때 손석진은 자신의 눈앞에 있었고, 해커는 전화를 해서 멋대로 떠들어 댔다.
캉!
유한은 격렬하게 울리는 쇳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자신에게 공격을 날렸던 것인지, 청동 바츠가 뒤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멍하니 뭐 하는 것냐, 후손, 죽을 뻔하지 않았나?"
청동 바츠의 공격을 막은 것은 블랙이었다.
꽤 강력한 공격이었는지, 블랙의 오른팔 장갑에 깊은 검상이 남아 있었다.
유저의 공격에도 잔기스밖에 나지 않던 녀석이었는데
청동 바츠는 재차 공격을 하려는지 자세를 바꾸었다.
"물러나라, 저 청동 조각은 내가 처리하겟다."
'그래, 나중에 생각하자.'
머릿속이 복잡하지만, 유한은 일단 싸움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 싸움을 끝내고 모든 것을 확실히 알아보기로 했다.
청동 바츠를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누가 진짜 해킹범인인지.
"허. 바츠와 바츠가 만나다니!"
화면을 들여다보던 게임 관리실의 드림맥스 직원들은 입을 딱 벌렸다.
과거의 바츠였던 유한과 그의 바츠 시절 데이터를 이식 받은 청동 바츠가 마주치는 진충경이 벌어진 것이다.
부하 직원들처럼 멍하니 입 벌리고 있던 정경욱은 옆에서 가느다랗게 미소 짓고 있는 손석진에게로 눈을 돌렸다.
청동 바츠의 등장.
이 같은 깜짝 이벤트를 생각해 낼 사람은 원개발자인 손석진밖에 없었다.
"자네 설마..... 저 상황을 유발하려고 히든 스킬 '인커네이션(Incarnation)'을 만든 건가?"
사라진 고대 흑바법으로 설정된 인커네이션.
그것은 버려지는 무구를 재활용하자는 취지에서 개발된 스킬이었다.
숙련도가 높으면 무구의 공격력과 방어력이 향상된다 그러나 랭크가 낮거나 내구가 거의 바닥일 때는 전투에서 계속 사용하기 어렵다.
그새서 드림맥스는 숙련도가 쌓인 만큼 무구에 사용자의 사념이 깃들었다고 설명하고, 이 사념을 이용해 무구를 우래 사용한 캐릭터의 화신을 불러내는 히든 스킬을 만들었다.
화신의 능력은 마법사의 스킬 랭크에 따라 원캐릭의 30%에서 90%까지 능력을 낼 수 있었다.
이는 특별한 퀘스트를 수행한 흑마법사들에게 주어지는 히든 스킬이지만, 이바니우스 3세도 사용할 수 있게끔 패치되었다.
이바니우스 3세는 설정상 고대 마도 문명의 지배자이기 때문이다.
"의도는 했지만, 정말 저런 광경이 벌어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유저가 알세인의 퀘스트를 수행한다면, 그저 '바츠가 부활했다!'고 화들짝 놀라는 것에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바츠 유저였던 유한이 퀘스트를 맡으면서 이렇게 기가 막힌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데이터를 복제했다지만, 너무 똑같은 거 아닌가?"
보통 인커네이션으로 소환된 화신은 스텟과 스킬만 같은 짝퉁일 뿐이다.
그러나 저 청동 바츠는 예사롭지 않았다.
전투 패턴이나 행동 양식까지 거의 같은 것이다.
유한이 적잖게 놀란 것이 바로 그 증거.
"저 녀석은 이벤트용이라 신경을 좀 썻습니다. 바츠의 데이터를 연구해서 집어넣지요."
"그걸 어디서 구했는데?"
유저가 게임을 하면 플레이 정보가 데이터베이스에 자동으로 쌓인다.
그러나 아이템을 제외하고 드림맥스 서버의 바츠 관련 정보는 일 년 전에 해킹당해 지워지지 않았던가.
"...... 미흡하지만 바츠의 동영상들을 보고 재현했습니다."
"음, 그랬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공식 홈페이지를 비롯해, 인터넷의 여러사이트에는 바츠 동영상들이 남아 있었다.
손석진은 그걸 연구해서 적용한 모양이다.
"애 좀 썻겟구먼."
"하지만 성격까지 제대로 재현되었는지는 모르겟습니다."
손석진은 그 점에 대해서는 자신 없다는 투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자신 없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정경욱은 다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석진이 공을 들인 '짝퉁'이 얼마나 활약을 해줄지 기대가 되었다.
"소울 크래쉬(Soul crash)!"
"어딜 감히! 카이저 실드!"
청동 바츠가 오러가 듬뿍 담긴 공격을 날리자 곧장 블랙이 가로막았다.
연이어 블랙이 발을 크게 구르며 스턴을 유도하자, 청동 바츠는 땅에서 뛰어올라 사가운 검격을 내리쳤다.
이에 블랙은 육중한 철권을 날리며 응전했다.
일진일퇴의 용호상박.
블랙은 광전사 바츠의 능력을 복제한 괴물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 실력을 보였다.
오히려 힘에 이써서 압도하는 면모를 보여 주었다.
청동 바츠도 그 점을 인식했는지, 우월한 스피드를 이용해 전투를 전개하고, 블랙을 상대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유한 일행과 마케니아 마도사들은 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마냥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심해, 마도사들이 언제 싸움에 끼어들지 몰라."
"알고있어, 저쪽도 분명 우리처럼 생각하고 있겟지?"
채린의 망대로 미케니아 마도사들 역시 호시탐탐 한 수거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막상막하의 대결은 누군가의 개입에 따라 전세가 한쪽으로 확 기울어 버릴 수 있다.
그래서 유한 일행과 마도사들은 기회를 엿보며 서로를 견제하는 걸 게을리 하지 않았다.
블랙과 청동 바츠의 팽팽한 접전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청동 바츠가 검을 양손으로 쥔 채 기묘한 자세를 취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유한이 다급하게 외쳤다.
"물러나! BB어택이야!"
"뭐어?"
자세를 낮춘 상대에게서 뜨거운 열기가 일렁인다 싶더니, 시뻘건 불꽃이 눈앞에서 번득였다.
"크윽!"
블랙은 다급하게 피했지만, 양쪽 무릎의 장갑을 잘리고 말았다.
그는 적잖게 놀랐다.
갑자기 상대의 검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싶더니 공격력이 배나 강해졌다.
강철 합금으로 된 장갑을 밀랍처럼 녹여 버리는 위력이라니!
"브, 블레이즈 블레이드(Blaze Blade)다!"
채린과 에이린, 오펜은 깜짝 놀랐다.
언젠가 동영상으로 한 번 정도 본 적이 있는 장면이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방금 전 청동 바츠가 쓴 스킬은 오직 살아생전(?)의 바츠만이 익혔다고 알려진 유니크 스킬이었다.
유한은 이 스킬을 앞의 알파벳을 따서 bb어택이라 줄여서 부르곤 했다.
광룡 키세라스의 최후 숨통을 끊을 때도 바로 이 스킬을 사용했었다.
설마 청동 바츠가 이마저 쓸 줄이야!
그러나 유한은 그저 경악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공격해! 지금이 기화야!"
비록 충격은 컷지만 치명상을 입은 것은 아니다.
번쩍 정신을 차린 블랙은 검을 늘어트리고 있는 청동 바츠에게 달려들었다.
쿵!
몸통에 회심의 일격을 맞은 청동 바츠는 뒤로 벌렁 나자빠져볐다.
'공격력은 강하지만 마지막에 빈틈이 생기지'
바츠였던 유한은 블레이즈 블레이드의 단점을 잘 알고있었다.
그래서 옛난에도 되도록 결정적인 순간에만 사용했다.
아마 청동 바츠는 블랙이 피할거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블레이즈 블레이드를 쓰면서 그 뒤로 생각지 않았기 때문.
이것은 인공지능의 한꼐였다.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주마!"
상황을 역전시킨 블랙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대로 쓰러진 청동 바츠를 밟아 부서트리려 했다.
"리볼빙 파이어!"
마지막 순간, 미케도니아 마도사들이 끼어들었다.
그들은 마법을 연사하여 공중에 떠 있는 블랙을 밀어냈다.
"치잇, 방해를 하다니!"
바닥을 구른 블랙은 몸을 일으켯다.
그러나 무릅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억지로 움직이려 하니, 끼긱거리며 부서질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이런! 장갑만 잘렸던 게 아니었나?'
아무래도 방금 전 청동 바츠의 일격에 무릎 관절이 타격을 입었던 모양이다.
그 와중에 다시 뛰고 착지하는 등, 무리하게 움직이다 보니 상태가 더 심해졌던 것.
블랙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이, 청동 바츠가 일어섰다.
HP가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별로 타격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이대로 청동 바츠가 공격을 해 온다면 블랙은 소멸될지도 모른다
"누가 끼어들라고 했지?"
그러나 청동 바츠는 블랙이 아닌 미케니아 마도사들을 돌아보았다.
"그야 네놈이 위험해 보였으니까."
"큭, 우리가 도와준 걸 고마워해라."
마도사들은 오만한 모습으로 비릿하게 웃었다.
그러자 청동 바츠의 미산에 있는 흑수정이 번뜩였다.
그는 몸을 낮추고 양손으로 검을 잡았다.
설마 하던 마법사들의 눈앞으로 초열의 검기가 날아들었다.
"끄아악!"
순식간에 마도사 셋이 운명을 달리했다.
새까맣게 타 버린 세 마도사의 몸이 모래 탑처럼 허물어졌다.
비명은 블레이즈 블레이드 공격을 간신히 피한 마도사들이 지른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
살아남은 두 마도사는 무척 당황했다.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내 싸움을 방해했으니 죽어야지."
청동 바츠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방해하다니? 우린 너를 도운 거다!"
"쓰레기들에게 도움을 청한 적 없다."
"쓰레기라니! 우린 네놈을 되살린 은인이다!"
"감히 창조주에게 그런 망발을 하다니!"
마도사들이 펄펄 뛰었지만, 날아오는 것은 싸늘한 칼날.
나머지 두 마도사들도 순식간에 베어 버린 청동 바츠는 차갑게 내뱉었다.
"언제 살려 달랬나?"
블랙은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방금 일어난 상황을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영문을 모르겟군. 왜 같은 편을 죽였지?"
블랙의 중얼거림에 그의 상태를 살피러 온 오펜과 에이린이 설명을 해 주었다.
"자기 싸움에 끼어들었다고 화내는 거에요. 생전의 바츠는 남이 자신을 도와주는 것도 싫어했거든요"
"저런 걸 전문 용어로 '바츠스럽다'고 하죠"
"흐음, 다시 말해 성격이 지랄 같다는 거로군"
블랙의 평가에 유한은 울컥했다.
그리고 그 말이 그리 틀리지 않다는 점에 더 화가 났다.
바츠가 저런 건 다 학림고에서 당한 일때문이었다.
사람을 믿을 수 없었고, 강한 힘을 갖게 되자 다른 이들과의 교류가 필요 없다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바츠가 사라지면서, 유한은 또 다르게 변했다.
아이템을 추적해서 해커를 찾자며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대장장이를 하게 되었고, 그 결과 가시 사람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함꼐하는 것이 더 즐겁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과도 만나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지그야."
채린의 부름에 유한은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리자 걱정스런 눈빛을 한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너 오늘 좀 이상해. 평소보다 더 많이 흥분한 것 같고, 제대로 게임에 집중하지도 못하고. 무슨 일이 있는 거야?"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려던 유한은 그 말을 집어삼키고 대신 다른 말을 내뱉었다.
"나중에, 나중에 말해 줄게."
왠지 그녀에게만큼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채린에게 사실을 말해 주기로 했다.
언젠가, 이 모든 일이 다 정리되면.
블랙의 부상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저 무릎 관절에 있는 부품들이 조금 부서진 줄만 알았는데, 불꽃의 검기에 녹아 버린 것도 있고, 이가 빠지고 위어 버린 톱니바퀴도 있었다.
고치기 위해서는 꺠어진 부품들을 갈아 끼워야 했다.
유한의 인벤토리에는 블랙의 예비 부품이 있었지만 수리할 시간이 없었다.
어느새 같은 편을 해치운 청동 바츠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놈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나 보군."
비아냥거리는 청동 바츠에게 오펜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미안한데, 고칠 때까지 좀 기다려 주면 안 될까요?"
"내가 왜 너희 사정을 봐줘야 하지?"
오펜은 얄짤없다는 말이 이 경우에 쓰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 날수는 없었다.
블랙은 파티에 있어 최강의 무력.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마음을 돌리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이번엔 에이린이 나섰다. 그녀는 애교를 잔뜩섞어서 다시 한 번 애원했다.
"에잉, 바츠 오빠는 강하잖아요. 그만큼 강한 상대랑 싸우는 게 좋죠? 그러니까 지그 오빠가 블랙 님을 고칠떄까지 잠깐, 아주 잠깐만 기다려....."
"닥쳐. 싸울 수 없으면 징징거리지 말고 죽어."
에이린은 크게 실망했다.
바츠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듣긴 했지만, 저리 매정할 줄은 몰랐다.
자신의 정성 어린 애교 공세까지 무시하다니!
"아, 진짜 왕재수네요. 오리지널 바츠도 저럴까요?"
"오리지널을 충실히 재현한 거라면 같겟지."
"저런 왕재수 좋다는 사람들이 있는 게 신기해요"
"바츠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냥 그의 무위에 반한 것뿐이야."
오펜의 평가는 냉정했다.
덕분에 유한은 왜 바츠가 해킹되어 사라졌을 때, 사람들이 그리 아쉬워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지그가 없어진다고 하면 사람들이 아쉬워할까?'
채란과 여러 친구들은 분명 안타까워 할 것이고, 철공소의 단골들도 펄쩍 뛸것이다.
다만 경쟁자인 발리안은 축배를 들지도.
"이봐, 쓰레기들. 죽기 전에 실컷 떠들었나?"
"누가 쓰레기에요! 우리가 쓰레기면 댁은 잡동사니 고철이에요! 댁 같은 고철은 우리 지그 오빠가 녹여서 재활용해 줄 테니 기대하라고요!"
청동 바츠의 비아냥거림에 에이린이 앙칼지게 대꾸했다.
에이린이 유한에게 기대하는 이유는 이판사판이라서가 아니다.
다 전례가 있기 때문.
그녀가 아는 지그는 금속과 돌, 나무로 된 몬스터들을 암 브레이크라는 히든 스킬과 생산 스킬로 해치우는 기인 유저였다.
그렇기에 청동 바츠도 유한이 해치워 줄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믿고 싶다는 게 맞을지도.
"누가 날 박살 낸다고?"
"내가."
청동 바츠의 물음에 유한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에이린이 말하지 않더라도 그는 청동 바츠와 싸울 생각이었다.
자신과 닮지 않은 청동상이 자신인 척하는 게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지그야, 너 미쳤어?"
"후손, 아직 인생을 포기하긴 이르다."
채린과 블랙이 말렸지만, 유한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죽으려고 나서는 것은 아니니까. 내가 틈을 만들 테니까 오펜이랑 같이 공격해. 그리고 에이린."
"네, 지그 오빠."
"MP 다 털어서 나한테 버프 걸어라, 나 혼자서는 저놈한테 죽었다 깨어나도 못 이겨."
"알았어요. 블레스! 귀글리! 스트랭스! 디바인 프로텍션!......."
연달아 쏟아지는 신성력 스킬에 유한의 스탯과 전투력이 부쩍 올랐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강화했다 해도 청동 바츠의 전투력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
하지만.
'해 보는 거다. 이놈이 정말 바츠의 복제품이라면, 그리고 놈의 약점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
승산은 있다.
그리고 옆에는 자신을 지원해 줄 동료들도 있다.
자신감에 차 자신을 노려보는 유한이 기가 막혔던지, 청동 바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죽을 준비는 다 끝냈나?"
"그래, 널 죽일 준비가 다 끝났다."
유한의 말이 끝나자, 청동바츠가 그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한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유한의 뒤에서 나타났다.
"바, 방금 그건 대쉬?"
동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같은 대쉬지만, 청동 바츠의 대쉬는 동력왕 옌스보다 훨씬 더 매서웠다.
어느새 강했는지 지그가 바닥에 드러누워 있을 정도.
"하, 대단하군. 그걸 피했나?"
그런데 대쉬가 성공하지 않았는지 청동 바츠가 혀를 차며 돌아섰다.
유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씩 웃었다.
"이걸로 확실해졌어."
"뭐가 말이냐?"
"너는 날 죽일 수 없다."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청동 바츠의 미간에 박힌 검은 흑수정이 흉하게 번득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한은 말을 마저 했다.
"왜냐고? 넌 불량품이니까."
"웃기는 놈이군. 운 좋게 한 번 피한 것 가지고 우쭐대다니."
"그럼 한 번 더 해 봐. 또다시 피해 줄 테니까."
유한의 자신감에 청동 바츠는 살벌한 기운을 띄며 다가왔다.
유한은 청동 바츠의 발걸음을 속으로 헤아렸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셋까지 헤아렷을 때 청동 바츠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눈으로 따르지 못할 정도로 고속 기동을 한것이다.
'칼을 아래로 찌르겟지.'
앞에서 대쉬를 누워 피하며 '떡밥'을 던져 놓았기에 상대의 공격 방향을 정해 둘 수 있었다.
유한은 옆으로 몸을 피하며 검을 휘둘렀다.
펑!
맹렬한 폭음과 함께 유한이 들고 있던 마이티 소드가 뚝 부러졌다.
청동 바츠가 입고 있는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의 독특한 방어 기능 때문이다.
그러나 당황하는 쪽은 유한이 아니라 청동 바츠였다.
두 번쨰 공격도 실패로 끝났을 뿐 아니라, 상대는 한술더 꺼서 반격까지 했다.
그것은 단순히 운이 좋아서 피한것이 아니라는 소리.
"이 자식이!"
"말했지, 넌 불량품이라고."
청동 바츠가 불량품이 된 이유는 너무 잘 만들어져서다.
왁벽하게 만들었는데고 불량품이다?
보통은 그 반대라 칭하겟지만, 이번만은 아니었다.
스킬의 공격 패턴과 사전 동작 하나까지도 똑같이 복제했기에, 유한은 한 수 앞서 상대의 행동을 읽는 것이 가능했다.
거기다 청동 바츠를 도발시켜 특정한 스킬을 쓰도록 유도했다.
이러니 제아무리 전투력이 월등해도 청동 바츠는 미리알고 피하는 유한을 적중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까불고 있군, 너도 순식간에 재로 만들어 줄까?"
"호, 블레이즈 블레이드? 그거 지금 사용할 수 없을 텐데."
유한의 말에 청동 바츠는 움찔 놀랐다.
슬쩍 겁을 줘 보려고 한 말인데, 오히려 상대는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않은가.
'후후! 블레이즈 블레이드를 사용하느라 소모한MP와 스테미나를 충전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걸리지.'
게임상에 완벽한 스킬을 없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고 어느 것이든 한계가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스킬을 익힌 존재가 무적의 먼치킨이 될 테니까.
유니크 스킬인 블레이즈 블레이드도 그런 점에선 마찬가지였다.
"넌 대체 뭐냐? 어떻게 내 필살기의 비밀을 알고 있지?"
"글쎄, 너 같은 불량품은 들어도 이해 못할걸?"
빠득!
청동 바츠가 이를 가는 동시에, 미간에 박힌 흑수정에서 진득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단단히 화가 났다는 증거다.
분명 강력한 공격력을 가진 스킬로 덤벼들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유한의 예상이 빗나갓다.
청동 바츠는 동진하며 검을 횡으로 휘두르려는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제길, 소울 크래쉬인가.'
좀 더 화려한 공격 스킬을 쑬 줄 알았는데, 청동 바츠는 의외로 빠르고 단순한 소울 크래쉬를 선택했다.
이번엔 미처 스킬을 유도할 시간이 없었다.
쩌엉~!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유한의 눈앞에서 청동 바츠의 검이 멈춰 섰다.
에이린이 버프로 걸어 준 디바인 프로텍션 덕분이다.
신성력으로 대상자에게 강력한 방어막을 선사하는 디바인 프로텍션은 바츠의 검으로부터 유한을 지켜 주었다.
그러나 청동 바츠의 공격이 워낙 강했던 탓에, 디바인 프로텍션은 단 한 번밖에 방어하지 못했다.
하지만 유한에게 있어 방어는 그 한 번으로 충분했다.
"암 브레이크!"
청동 바츠가 잠시 멈춘 틈을 타서 그는 반격을 날렸다.
"이 느려 터진 자식이!"
한 번 유한에게 반격을 당한 바 있던 청동 바츠는 이번엔 방심하지 않았다.
청동 바츠는 다리 쪽으로 날오오는 암 브레이크를 가볍게 피하고는 곧장 반격으로 전환했다.
번개같이 몸을 돌린 그는 앞으로 달려들며 검을 찔러 넣었다.
빠각!
"지그야!"
모두들 유한이 청동 바츠의 검에 찔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검은 유한의 옆구리를 스쳣을 뿐이고, 오히려 유한이 검 손잡이 밑 부분으로 청동 바츠의 머리를 내리쳤다.
정확리 미간에 박힌 흑수정을 얻어 맞은 청동 바츠는 머리를 움켜잡으며 처절한 비명을 터트렸다.
"크아아악!"
흑수정은 바츠의 사념이 모인 곳으로, 청동 바츠를 움직이는 중추였다.
그래서인지 다른 곳을 타격했을 때보다 반응이 격렬했다.
'성공이다! 역시 미간의 흑수정이 약점이었군.'
"크으으! 이놈이 감히!"
유한은 멧돼지처럼 흥분해 달려드는 청동 바츠를 피해 집중적으로 흑수정만 노리고 공격했다.
"암 브레이크!"
몇 차례 이어진 유한의 반격에 청동 바츠의 HP가 뚝떨어졌다.
블래과 싸워도 별로 닳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3분의 1이 떨어져 있었다.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는 흑수정은 아직까지는 멀쩡했지만, 청동 바츠의 머리에는 굵고 가는 금들이 생겨났다.
또 한 번 제대로 타격한다면 아주 끝장낼 수 있을지도.
비틀거리는 청동 바츠에 유한은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죽어랏!"
그런데 청동 바츠의 움직임이 갑자기 돌변했다.
반동강 난 유한의 검을 후려쳐 버린 그는 유한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이놈! 잡히고도 피할 수 있나 보자."
유한이 지금까지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바람에 수세에 처했다고 생각하는 청동 바츠였다.
"멍청아, 난 잡히러 온 게 아니라 잡으러 온 거야."
"뭐?"
유한은 청동 바츠의 다리를 노려 건틀렛의 와이어를 쏘았다.
와이어는 다리를 휘감아 묶었고, 유한은 몸을 숙이며 동료들에게 외쳤다.
"이때다, 모두 공격해!"
초조하게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동료들이 드디러 가세했다.
"파워 샷!"
"매직 애로우!"
"세인트 레이(Saint Ray)!"
유한이 틈을 만들자, 가장 먼저 채린이 화살을 날려 정동 바츠의 손에서 검을 날려 버렸다.
그리고 연이어 오펜과 에이린의 공격이 놈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청동 바츠는 쏟아지는 공격을 피하려 했지만, 와이어가 휘감긴 다리로는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거기다 유한까지 멱살로 잡은 팔을 붙들고 늘어지자 더욱 더 운신하기가 어려워졌다.
"이거 풀어! 당장 안 놔!"
당황한 청동 바츠는 유한을 마구 때렸다.
월등한 스탯에 청동 주먹이 더해지자 여느 무기 못지않은 살벌한 데미지가 나왔다.
주먹이 한 번 닿을 때마다 유한의 HP가 뚝뚝 떨어졌다.
- 체력이 300 닳았습니다.
- 체력이 250 닳았습니다. 생명이 휘험합니다. 서둘러 치료하십시오.
'커억, 이런 막무가내 공격이 더 위험하구나!'
공격스킬이라면 나름 예상해 피할 수 있는데 이건 당최 어떻게 막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유한은 쓰러지지 않았다.
HP가 떨어지면 에이린이 그때그때 힐을 퍼부어 주었기 때문.
덕분에 살벌한 주먹세례에도 불구하고, 유한은 청동 바츠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자식들, 비겁하게 여럿이서......"
"네 존재 자체가 비겁이야!"
HP가 많이 닳은 청동 바츠는 지금까지와 달리 주먹을 하늘 높이 번쩍 치켜들었다.
유한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쳐 일격에 끝장낼 생각이었다.
"버스터 샷!"
그러나 바로 그때, 채린이 날린 회심의 화살이 그의 미간에 박혀 들었다.
또 한 번 흑수정에 강력한 공격이 떨어지자, 금이 간 머리가 쩍 갈라졌다.
머리통이 반쯤 떨어져 나갔지만, 청동 바츠는 아직 살아 있었다.
"제길, 이대로 죽을 수는."
허나 청동 바츠에게는 힐을 써 줄 성직자도, 엄호해 줄 마법사도 없었다.
그나마 있는 동료들도 제 손으로 모두 없애 버렸다.
"나는, 나는 위대한 광전사 바츠......"
"짝퉁 주제에 시끄럽다!"
울부짓는 청동 바츠에게 유한이 헤등 박치기를 선사했다.
그의 머리는 정확히 이마를 가격했고, 흑수정을 산산조각으로 부숴 버렸다.
"안돼에에에! 나는 바츠란 말이다!"
부서진 흑수정이 증발하기 시작했다.
이바니우스 3세가 봉인한 바츠의 사념이 흩어지는 것이다.
사념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마지막까지 울부짖던 청동 바츠가 그 자리에 무릎을 끓고 주저않았다.
마치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 경험치 9,000을 얻었습니다.
-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을 얻었습니다.
- 펜릴 소드(Fenrir Sword)를 얻었습니다.
청동 바츠를 쓰러트리고, 유한은 바츠 때 입고 있던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과 청동바츠가 휘둘러 대던 검을 얻었다.
전사와 기사 캐릭터 전용인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은 착용할 수 없지만, 펜릴 소드는 유한도 사용이 가능했다.
[펜릴 소드]
공격 : 150
내구 : 130
설명 : 검신에 늑대 문장이 새겨져 있는 명검. 명검이 높은 자에게나 어울릴 것 같다.
부수효과 : 착용하면 민첩성이 25 증가한다.
사용제한 : 명성이 20,000이상의 유저만 장비 가능.
'마이티 소드가 부러졌는데 마침 잘됐군.'
검을 장비한 유한은 서둘러 인벤토리에서 블랙의 관절부품들을 꺼대 수리하기 시작했다.
청동 바츠 때문에 적잖은 시간이 지체되었다.
서둘러 수리를 마치고 마케니아 일당을 추적해야 한다.
유한이 블랙을 수리하는 사이, 동료들은 부서진 청동 바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놀랐어, 바츠가 이런 식으로 등장한 것도 그렇지만, 지그가 해치울 줄이야."
"네. 저도 큰소리치긴 했지만 정말 지그 오빠가 해낼줄은 몰랐어요."
이기긴 했지만, 모두 기분이 얼떨떨한 모양이다.
하긴 블랙과 호각을 이룰 정도로 강했던 청동 바츠가 유한에겐 전혀 맥을 추지 못했으니.
"분명 레벨과 스탯, 스킬 모두 지그 오빠가 낮았을 텐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혹시 스피드 핵이나 불법 프로그램을 사용한 건 아닐까?"
채린의 물음에 오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드림맥스가 가만두지 않았을걸. 그리고 지그의 움직임은 분명 정상이었어."
그는 뒤에서 유한과 청동 바츠의 전투를 면밀히 지켜보았다.
청동 바츠를 앞에 두고도 유한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몰론 적잖게 긴장은 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절망감이나 두려움, 초조한 기색은 느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당당할 수가 있었을까.
'분명 지그는 청동 바츠의 움직임을 사전에 알고 있었어.'
그래서 월등히 강한 상대를 앞에 두고도 기가 꺽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상대를 농락하고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건 단순히 선전했다거나 대등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쩐지 전투를 '지배'했다는 느낌이었어.'
오펜의 생각이 맞았다.
예전에 바츠였던 유한에게 있어, 자신과 똑같은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어렵지만 불가능하지 않은 일리었으니까/
청동 바츠와의 승부는 바로 그런 '경험'이 변수가 되었고, 경험릏 바탕으로 전투를 지배했다.
하지만 유한 스스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츠가 해킹당해 사라진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 간다.
그런 과거 캐릭터가 동작 패턴과 움직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자신이 놀라웠다.
'그만큼 바츠가 나에게 중요했던건가?'
그건 단순히 드래곤을 홀로 잡았거나, 50위권의 랭커 캐릭터라 아까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다.
솔직히 아깝다는 생각도 예전보다는 덜했다.
친구들의 애원을 거절하고 조롱하는 청동 바츠를 보았을 때, 자신의 손으로 없애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꼇으니까.
예전에 자신이 그런 캐릭터였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인걸. 넌 정말 그랬어.'
마음속의 바츠가 얄밉게 속삭였다.
홀로 수많은 적과 싸우고,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도 칼을 휘두르며,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고 섭섭한 말을 마구 내뱉었다.
그것은 현실에서 겪은 불합이하고 억울한 일 때문이었다.
하지만 꼭 현실에서 겪은 불합리하고 억울한 일 때문이었다면 훨씬 더 일찍....
'제기랄, 모르겟어!'
유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과거의 행보에 대해 후회감은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바츠를 없애 버린 해커에 대한 감정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좋았든 나빳든, 어쨋서나 바츠는 자신의 일부다.
그걸 멋대로 주물럭거린 놈은 용서할 수 없었다.
놈이 어떤 뜻을 가지고 그런 일을 벌였다 해도 분명 거기에 대한 책임은 물을 것이다.
"다 고쳤어. 얼른 마케이나 일당을 쫓아가자."
그리고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방향은 스스로 정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친구들과 게임을 즐길 것이고, 마케니아 일당의 악행을 막아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