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9 엘프 숲의 위기
엘프 숲의 위기
테러리스트 프로인을 이겨 다시 한 번 명성을 드날린 유한은 지금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따.
그 이유는 골드러시 상인 연합의 딜론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자신들에게도 블랙 아이언의 판매권을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안돼! 못해! 죽어도 그럴 수 없어!"
하지만 유한에게서 먼저 판매권을 따낸 리지스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버티자 협상이 꼬여 버렸다.
현재 블랙 아이언은 꽤 비싼 값에 거대 길드와 고렙 유저들에게 판매되고 있었기에 골드러시 상인 연합에서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이권이었다.
"리지스 양, 그렇게 고집을 부리면 곤란해요. 우리 골드러시 상인 연합이 지그 님과 계약한 바가 있다는 걸 모르십니까?"
"그래, 매주 생산한 물목의 일부를 넘겨주는 건 너도 알잖아."
"그건 무구 이야기 아닌가요? 블랙 아이언은 해당 사항이 안 되니 양보할 수 없어요."
"블랙 아이언이 어디 무기가 아니랍니까? 리지스 양, 어느 정도 선에서 양보해 주세요."
"제가 지그랑 같이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절대 양보 못해요! 아저씬 지그가 블랙 아이언 만들 때 보태 준 것도 없잖아요!"
"정말 이럴 겁니까!"
"정말 이럴 겁니다. 왜요, 한 대 치시게요?"
두 사람의 실랑이가 신경전을 넘어 다툼으로 빈지려 하자 유한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어휴, 좀 그만들 하세요! 자꾸 싸우면 나 이제 블랙 아이언 안 만듭니다!"
유한이 그리 엄포하자 리지스와 딜론이 조용해졌다.
잠시 후, 리지스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따.
"9:1로 양보하겠어요, 지그가 열 대 생산되면 한 대는 아저씨가 갖고 가세요."
"혼자 다 먹으려단 체해요, 리지스 양, 5:5로 하지요."
"8:2에서 더 이상 양보 안 해 줘요!"
"허허, 리지스 양, '상계의 샛별' 이라는 칭호에 어울리지 않게 통이 좁군요."
유한은 밀고 당기는 두 사람을 사무실에 내버려 두고 나왔다.
"하여튼 상인 유저들이란……."
유한은 상인 캐릭터로 플레이 안 하기를 잘했다 여겼다.
고개를 저은 그가 공방으로 들어가 작업에 매진하려 할때였다. 채린이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지그야, 손님들이 왔어. 널 꼭만났으면 하던데?"
그 말을 듣고 유한은 응접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요즘 친목을 다지자며 중소 길드의 길드장들이나 유명 랭커들이 곧잘 찾아오곤 했다. 이번에도 그런 류의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어라? 이 사람들은…….'
바퀴벌레 같은 모양의 화려한 갑옷을 걸친 중년 남자와 그의 부하들로 보이는 유저들.
바로 후소 대륙에서 온 일본인 유저들이었다.
"당신이 검은 거인을 만든다는 사람이오?"
말은 건 것은 중년 남자의 옆에 있던 사무라이였다.
유한은 히로시라는 이름의 이 사무라이와는 만난 적이 있었다. 처음 청해도에 와서 멋모르고 일본 요새까지 갔다가 그가 이끄는 수색대와 딱 마주쳤었던 것이다.
그러나 히로시는 유한을 기억 못하는 듯했다.
"그런데요?"
"이분은 나의 주군이신 오와리 번의 영주 오다 장군이시오."
오다가 유한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오와리 번은 최가장 길드와 싸웠던 일본 쪽 길드.
이들이 아르페디아 대륙에 온 이유는 블랙 아이언 때문이다.
"우리 주군께선 귀하의 검은 거인을 구입하길 원하시오."
"아하하, 그래요?"
사실 블랙 아이언의 위력을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블랙과 싸워 본 일본 유저들이다.
그들은 아르페디아 대륙의 거대 병기가 여러 대 있다면 후소 대륙의 통일이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을 구입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온 것이다.
'자신들을 박살 낸 병기를 사겠다고 나설 줄이야.'
하지만 팔고 싶어도 이미 공급을 못 댈 정도로 주문이 밀린 상태. 유한은 난처한 얼굴로 사정을 설명했다.
"다른 대장장이들도 거대 병기를 만드는데 그쪽으로 가서 물어보시죠."
현재 아르페디아에서는 유한과 발리안 말고도 거대 병기를 만드는 자들이 있었다.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철십자 길드와 같은 거대 길드들.
하지만 지금은 그들 외에도 몇몇 대장장이들이 거대 병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발리안이란 사람의 철공소에 이미 들렀다 오는 길이오. 하지만 거긴 당분간 생산 계획이 없다고 하더군."
발리안의 철공소는 아직 프로인에게 입은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리고 다른 곳의 거대 병기들은 이제 겨우 걸음마 수준이라 주군께서 성에 안 차 하시오."
다른 대장장이들에도 안 가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블랙의 뛰어난 위력에 매료가 된 오와리 번의 수뇌들은 프로토 타입의 거대 병기들이 양에 찰 리가 없었다.
거대 길드들이 자신들이 만든 거대 병기를 판매하면 또 모르겠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대륙 제패를 위해 절대 거대 병기를 매물로 내놓지 않았다.
결국 유한은 일본 유저들에게 블랙 아이언을 판매하기로 했다.
"뭐 인수 시기가 늦어져도 상관없다면 제가 판매하죠."
"잘 부탁하오."
일본 유저들이 돌아가자, 곁에서 이야기를 들었던 채린이 걱정스런 눈빛을 보았다.
"지그야, 지금만으로도 벅차지 않아?"
현재 1달에 지그 철공소가 생산할 수 있는 양은 10여기 정도. 그런데 주문은 벌써 30기 넘게 들어와 있었다.
"뭐, 그럼 철공소를 증축하면 되지."
어차피 블랙 아이언을 양산하면서 전용 공방을 따로 만들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밀린 주문을 소화한다고 증축할 여유가 없었는데 이참에 일을 벌리면 된다.
"송코 형, 교수님한테 말 좀 전해 줘요."
"알았어."
먼저 지그 철공소를 지은 아비지라면 튼튼하고 효율적인 공방을 만들어 줄 것이다.
"날 찾았나?"
다음 날, 아비지가 송코의 연락을 받고 왔다.
안경 쓴 노신사는 여전히 노련한 건축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철공소 옆에 새로운 공방을 하나 차리려고 하는데, 시간 되세요?"
"나야 뭐 일거리를 준다니 고마울 뿐이지. 언제 시작할까?"
"지금 당장 시작해 주세요."
그렇게 아비지에게 블랙 아이언 전용 공방의 설계를 맡긴 유한은 그 안을 채울 각종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 노스아크로 떠났다.
드워프표 공작 기계와 설비들은 꽤 비쌌지만 블랙 아이언 판매로 벌어들이는 돈이 꽤 되었기에 과감히 투자하기로 했다.
"여긴 여전하네."
좁은 길을 중앙에 두고 좌우로 공업사들이 붙어 있었다.
예전에는 찾는 사람이 없어 썰렁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동안 스킬과 랭크를 올리고 돈을 축적한 대장장이들이 드워프 기계를 구입하기 위해 모여든 것이다.
"헤, 나도 분발해야겠는걸?"
몇 달 전 대규모 패치가 이뤄진 뒤, 생잔직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그중에서도 대장장이들의 활약이 눈부셨는데, 그 덕분에 철공소 짓는 조건을 달성한 대장장이들이 부쩍 늘었다.
"어소 오게."
유한이 공업사로 들어가자 구센도르프가 반겼다. 과거신의 광물 퀘스트를 완수한 후 그와 친밀도가 높아졌다.
"요새 장사가 잘되나 봅니다."
"하! 그래 봤자 대부분 가격만 물어보고 돌아가는 수준이지."
아무래도 기계 구입 대가로 100만 골드를 선뜻 낼 수 있는 유저가 아직 많지 않은 모양.
"그래, 무슨 일로 왔나?"
"당연히 기계 구입 때문에 왔죠. 제가 필요한 장비입니다."
유한은 예전에 구입했던 5가지 공작 기계를 포함해, 갈리가 블랙 아이언을 양산하는 데 유용할 거라 추천한 장비들의 이름을 적은 쪽지를 보여 주었다.
"흐음, 이 중에는 몇 가지는 여기 있고, 나머지는 나도 만들어야 하네, 며칠 걸릴 것 같은 데 기다려 주겠나?"
"저도 바쁘니 다 만들면 지그 철공소로 보내 주십시오."
"알겠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
이곳에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기에, 유한은 일단 값부터 치렀다.
모두 150만 골드가 들었지만, 주머니에 그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그럼, 이만."
공업사를 나선 유한은 남문으로 향했다.
증축을 하면 일꾼도 더 뽑아야 한다. 바르카스 왕국이 나 카잔 공국에 들려 NPC 일꾼을 모집할 생각이었다.
'기왕이면 대장장이 유저를 고용해 봐?'
발리안이 그런 식으로 재미를 봤다고 들었다. 지금 유한의 공방에도 저번에 짝퉁을 만들자 잡혀 온 휴이란 녀석과 그 일당이 일하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던 녀석들은 이 기회에 스킬 랭크나 올려 보자 마음먹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요즘은 NPC일꾼들보다 일을 더 열심히 했다.
'하지만 블랙 아이언을 같이 만들 정도면 실력도 있고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할 텐데…….'
아쉽게도 그런 대장장이는 흔치 않았다. 베레타에서 거대 골렘을 만들다 친해진 이들도 있었지만, 다들 자신의 갈 길을 가 버렸다.
고민하면 거리를 걷전 유한은 베르겐 남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란을 보았다.
"이게 누군가? 고귀하신 숲의 백성께서 여긴 어인 일인가?"
"드워프님들께 부탁할 일이 있어 그럽니다. 제발 들여 보내 주세요."
"부탁? 웃기고 있네. 뭔 개수작인지 몰라도 썩 꺼져!"
성문을 지키던 드워프 병사들은 애원하는 상대를 떠밀어 버렸다. 뒤로 넘어지면서 후드가 벗겨진 그를 본 유한과 여러 유저들이 깜짝 놀랐다.
상대는 뾰족귀의 엘프였기 때문이다.
"엘프가 여기까지 웬일이래?"
"그러게. 정신 나간 엘프인가 보다."
"남자 엘프잖아. 여자 엘프면 좋았을걸."
엘프는 설정상 드워프와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따. 사는 곳도 아르페디아 대륙의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었다.
유한은 문제의 엘프를 알아보았다.
예전에 엘프의 숲에 갔을 때 만났던 엘프 대장장이 알세인이었다. 동네에서 쫓겨날 뻔했던 것을 유한이 구해준 일도 있었다.
그런 그가 여기까진 어인 일인지?
"어이, 이봐요!"
유한의 부름에 알세인이 고개를 돌렸다. 유한을 알아본 그는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지그 님 아니십니까?"
"반갑네요. 여긴 웬일인가요?"
유한이 목적을 묻자 알세인의 환한 얼굴이 침울하게 변했다.
"그게 좀……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제련하다 숲을 홀랑 태워 먹었나?'
그러나 그건 아닌 듯했다. 좀 전에 알세인은 드워프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고 했다. 드워프와 앙숙인 엘프가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것인지.
"일단 뜨끈한 거라도 먹으며 이갸기하죠."
옷을 두껍게 입고 이지만 알세인은 몹시 추위를 타는지 귀와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래선 말도 잘 나오지 않을 듯.
마침 남문 밖에 요리사 유저가 열어 놓은 포장마차가 있어, 유한은 그곳으로 알세인을 데리고 갔다.
"캬아! 좋군요."
"추위에 콩나물국이 최고죠."
뜨겁고 얼큰한 국물에 속이 풀렸던지, 알세인은 자초지종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우리 엘프의 숲에 신성한 세계수가 있다는 건 아시지요?"
"직접 가서 봤습니다."
채린의 퀘스트 때문에 따라갔다가 좋은 구경을 했었다.
"그 신성한 세계수가 지금 고사되어 가고 있습니다."
"예? 말라 간다고요?"
이유는 어느 날 갑자기 세계수 앞에 박힌 쇠기둥 때문이란다.
언제 누가 와서 그 쇠기둥을 박아 놓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면 엘프들은 그 쇠기둥을 그냥 내버려 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쇠기둥이 박힌 후로 세계수가 시들어 가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이 쇳덩이가 지맥을 막고 세계수에 흡수되어야 할 양분과 마나를 빨아당기고 있더란다.
'아니, 무슨 쇳덩이가 양분이랑 마나를 처먹어?'
지가 무슨 생명체도 아니고.
판타지를 기반으로 한 게임이다 보니 별별 일이 있을거라 여겼지만, 이런 괴사는 처음.
알세인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없애려고 했지만, 워낙에 크고 무거운 쇠기둥이라 뽑아낼 수도 없었고, 마법도 정령술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정령들은 접근하기를 거부했습니다."
"흐음……."
"장로님께선 자세한 원인을 파악할 겸, 쇠기둥의 성분을 분석코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대장장이인 제가 조사를 해 봤습니다만, 그 쇠기둥은 전혀 모르는 금속이었습니다."
"에르젠이나 오리하르콘 같은 거 아닙니까?"
"지그 님, 저도 그 정도는 알아볼 안목은 있습니다."
그래서 알세인은 전문가에게 문의할까 해서 노스아크에 찾아왔다. 기왕이면 드워프를 한 사람 초빙해 갈 생각이었지만, 문전 박대를 당하고 말았다고.
"이렇게 만나 것도 인연인데 지그 님이 좀 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알세인은 갑자기 유한의 손을 덥석 잡았다."예? 내가요?"
"숲 속에 있다지만, 지그 님의 명성은 익히 듣고 있습니다. 커다란 기계인형도 만들고 그랬다면서요?"
요즘 유한의 명성은 꽤 많이 올라갔다. 유저들뿐만 아니라 NPC들에게도 그런 모양이다. 하긴 2만이 넘는 명성치는 게임 내에서 제법 이름을 떨칠 만했다.
"하지만 난 지금 바빠서……."
"부탁드립니다! 이건 세상의 운명이 달린 일입니다!"
알세인이 또 한 번 간곡의 청한 순간, 유한의 눈앞에 오랜만에 퀘스트 안내창이 떠올랐다.
[세계수의 위기]
-신성한 세계수가 정체불명의 쇠기둥 때문에 말라 가고 있다.
덕분에 엘프들은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다. 세계수가 죽으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예언이 있기 때문.
세계수를 고사시키는 쇠기둥을 제거하고 엘프들의 근심을 없
애 주도록 하자.
*옵션: 퀘스트를 수행하느 동안 엘프들의 전폭적인 협조를 받
을 수 있습니다.
'이걸 수락해, 아님 말어?'
지금 철공소 증축을 하고 있는데다가, 생산해야 할 블랙 아이언들도 밀려 있다.
그러나 세상의 운명이 달렸다는 알세이의 말이나, 안내창의 멸망 운운하는 대목에서 유한의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설마 이 퀘스트 안 했다가 세계가 멸망, 아니 드림맥스가 게임 서비스를 중단하기까지야 하겠느냐만, 이만큼 중대한 사안이라면 보상도 크지 않겠는가.
'에라이! 일단 하고 보자.'
유한은 퀘스트를 수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그는 모험을 하는 대장장이. 모험을 하면서 실력 높여 가는 괴짜 대장장이다. 이번 퀘스트도 지그의 성장에 뭔가 큰 도움을 줄지 모른다.
더구나 블랙 아이언의 주문을 받긴 했지만, 언제까지 납품하겠다고 날짜를 못 박은 것도 아니다.
그리고 철공소에는 혼자서 메카 드래곤 같은 거작을 만드는 위대한 분도 계시지 않은가. 급하면 그에게 부탁하면 된다.
리지스야 펄펄 뛰겠지만 살짝 무시하면 그만.
"알았습니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퀘스트를 수락한 유한은 송코에게 쪽지를 보내 철공소의 증축을 부탁했다.
그리고 채린을 비롯해 몇몇의 동료들에게 쪽지를 보냈따.
세계의 멸망 운운하는 퀘스트다. 엘프들이 전폭 협조한다고 했지만, 유한의 직감으론 동료들의 힘이 더 필요할것 같았다.
모든 준비를 마친 유한은 알세인과 함께 남쪽의 엘프의 숲으로 향했다. 예상보다 거대한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지금 유한은 그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쾅!
게임 관리실에 분에 찬 발 울림 소리가 울려 푸졌다. 부사장 정경욱을 떨리는 손끝으로 스크린에 비치는 지그를 가리켰다.
"저, 저 자식. 지그 놈은 왜 또 끼어든 거야?"
청해도에서 데보라의 재림 스토리가 실패한 후 정경욱은 엘프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엘프의 숲에서 뭔가 새로운 시나리오가 움트고 있었기 때문.
"그게…… 당장 확인해 보겠습니다."
정경욱의 불타는 눈을 본 직원을 재빨리 데이터를 모으고 개발실과 연락해 유한이 퀘스트를 받아들이게 된 경위를 조사했다.
"문제의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답니다. 첫째로 알세인과 호감도가 높은 것. 둘째로 상급 대장장이일 것."
"그게 왜 하필 지그냐고!"
원래 이 퀘스트는 되도록 여성 대장장이 유저들이 수행하게끔 만들어졌다. 그래서 잘생기고 갑빠 좋은 엘프 꽃미남을 등장시켰다.
여성 유저들이 드워프에게 타박받는 알세인을 구해 주고, 그로 인해 알세인의 호감도를 높이고 퀘스트를받아 세상을 구원하는.
그런데 엉뚱한 놈이 떡밥을 가로채고 말았다.
"사실 알세인이 지그에게 퀘스트를 안 줄 수도 있었지만, 콩나물국에 호감도가 50 상승한 것 때문에 조건이 충족되고 말았습니다."
"아, 진짜 저 자식 하필이면 이때 노스아크에 와 가지곤……."
정말 온갖 맛있는 퀘스트는 다 먹는 놈이다.
아니, 일단 퀘스트가 날아오면 무조건 집어먹고 보는 놈이다. 자칫 퀘스트에 실패해 손해를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건지.
"아주 난 놈이지요. 지그로 플레이하면서 한 번도 안 죽었습니다."
"조금만 더 플레이 하면 '신의 아들' 이 될 겁니다."
산의 아들은 오랫동안 플레하면서 1번도 죽지 않는 유저에게 주어지는 영광스런 칭호다. 이와 반대로 너무 잘 죽는 유저는 '어둠의 자식' 이라는 암울한 칭호를 얻는다.
"중간에 한 번 죽지 않았나? 티쳐스 선생한테 말이야."
"그건 부캐였을 때고, 지그는 한 번도 안 죽었습니다."
참 얄미운 녀석이다. 어째 게임을 하면서 한 번도 안 죽을 수가 있나.
심술이 난 정격욱은 직원에게 일렀다.
"언제 비 오는 날에 저 자식 머리 위에 커다란 벼락을 한번 떨어트려 봐. 그걸 맞고 안 죽나 보자."
"크크큭. 알겠습니다."
게임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게 드림맥스의 신조였지만, 정격욱이나 직원들도 사람이었다.
그들도 집에 가면 자사의 게임을 즐기는 한 명의 유저다.
'하지만 그들은 평범한 수준의 플레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레벨 업이나 퀘스트도 힘들게 하고, 그 과정에서 몬스터에 당해 죽거나, 퀘스트에 실패했다고 NPC에게 타박을 듣기도 했다.
그래서 게임 잘하는 녀석들을 보면 질투심이 느껴지곤 했다.
"남쪽으로 가고 있지? 그래, 빨리빨리 가거라."
정경욱은 아르페디아 남쪽에서 북상하는 먹구름을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정경욱의 소원대로 유한은 남쪽에서 비를 만났다.
천둥 번개를 울리며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며 유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필 비가 오고 난리야."
"비가 와야 초목도 자라는 법입니다."
"엘프다운 멋진 말이네요. 하지만 덕분에 마차는 기고 있단 말입니다."
엘프의 숲으로 향하는 그로지아의 초원길은 제대로 포장되어 있지 않았다. 비가 오니 길이 질척거렸고, 덕분에 짐마차는 속도가 나지 않았다. 아니, 얼마쯤 가다 아예 멈춰 버렸다.
"어휴, 완전히 빠졌군."
마차에서 내린 유한은 뒷바퀴가 완전히 침몰 상태에 놓인 것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이대로 짐마차를 소환 해제할까.'
걸어가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창에 허우적거리는 짐마차보단 빨리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일입니까, 제가 도와 드릴까요?"
뒤에서 말을 탄 기사 유저가 나타났따.
유한은 그를 알아보았다. 분명 귀련의 갑옷을 입고 출전했던 가우리 길드의 철갑기마대 리더 협루나느 사람이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어차피 소환 해제하면……."
그러나 사람 좋아 보이는 협부의 유한이 괜찮다는데 도움을 주려 했다.
사실 단순히 호의로 도움을 주려는 건 아니다.
협부는 유한을 알고 있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마주칠 거라곤 생각 못했지만.
'조금이라도 점수를 따 두는게 좋겠지.'
지금 모르는 척 호의를 베풀어 두면,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줄 수 있다. 그럼 나중에 길드가 블랙 아이언을 매입할 때 도움이 될 것이고.
협부는 들고 있전 장착을 진득거리는 땅에 박아 놓은뒤 유한의 마차를 들어 올렸다.
우르릉ㅡ콰쾅!
"으악!"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유한과 알세인, 협부는 놀라서 고개를 푹 숙였다. 리얼한 아르페디아 온라인은 번개 하나도 예사롭지 않았다.
"다, 다친 사람 없습니까?"
"없습니다."
협부의 말에 유한과 알세인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다만 땅에 박아 놓았던 장창만이 처참하게 박살 났다.
"이게 피뢰침이 되었던 모양이군."
"아아, 천만다행입니다."
유한과 협부가 안도하는 동안, 드림맥스 게임 관리실의 정경욱은 좌절했다. 같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직원 하나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신의 아들 맞구먼."
이런 사악한 뒷공작을 전혀 알지 못하는 유한은 마차를 소환 해제하고 비와 번개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느닷없이 번개에 맞아 죽을 뻔하다니……"
"이게 이 게임의 매력 아닙니까. 조금만 더 가면 비를 피할 곳이 있으니 거기로 가시죠."
벼락 덕분에 유한에게 크게 점수를 딴 협부가 대꾸했다.
그의 말대로 얼마 가지 않아 비를 피할 곳이 나왔다. 그 장소는 다름이 아닌 광전사 바츠의 무덤.
그곳은 예전에 유한이 왔을 때와 다르게 또 다르게 변해 있었다.
무덤 주위의 풍경을 본 유한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이것들이 아주 테마 파크로 만들었구먼!'
바츠의 무덤은 완전한 관광지가 되어 곳곳에 기념품을파는 가게들과 유저들의 편의 시설들이 들어서 있었다.
"자자, 플래임 소드 레플리카를 매우 싸게 팝니다."
"광룡 카세라스 인형 사세요."
"잠시 후 소극장에서 '광룡을 무찌른 영웅' 공연이 있습니다."
드림맥스의 수작인지, 유저들의 행각인지 몰라도 유한은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꼭 죽은 자신을 이용해 먹는것 같아서.
'카세라스' 라는 이름의 찻집에서 잠시 비를 피하던 유한은 협부에게 물었다.
"협부 님은 이곳에 웬일입니까?"
"여기 바츠의 무덤에서 벌어진 일 떄문에 왔습니다."
"왜 안 좋은 일이라도?"
"같이 가 보시겠습니까?"
의아하게 느껴졌던 유환은 협부와 함께 바츠의 무덤에가 보았다. 다행이 비가 그쳐 많은 유저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협부의 말이 맞는지, 유저들의 표정은 의문으로 가득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무덤 가까이 가 본 유한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여기 동상이 어디로 갔죠?"
카세라스와 대치하는 바츠의 동상이 분명 비석 뒤에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건 모릅니다. 며칠 전 유저들이 뜸한 새벽에 시간에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로지아 왕실에선 도난을 의심하고 있는데 이게 유저의 짓읹, 아님 NPC의 짓인지……."
그것도 의문이지만, 커다란 동상을 대체 무슨 수로 들고 갔는지도 의문이다란다.
뭐 마법이라는 사기스런 힘이 존재하는 게임 세상이니 훔쳐 가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을지도.
"바츠의 동상은 조각가 우트 님의 작품입니다. 요새 갑부 유저들 사이에서 우트 님의 작품이 고가에 거래되고 있으니, 돈을 노린 자의 소행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무튼 협부는 그로지아 왕실로부터 바츠의 동상을 되찾으라는 퀘스트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바츠의 무덤으로 온 것이라고.
'하여간 이놈의 게임…… 별별 일이 다 생겨요.'
벼락이 떨어지지 않나, 죽은(?) 캐릭터의 무덤이 만들어지지 않나, 거기다 동상의 도난까지.
협부나 다른 유저들과 달리 유한이 이번 일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미 수행하고 있는 퀘스트도 있는데 다가, 바츠와 전혀 닮지 않은 동상 따위 어찌 되든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비가 그치자 유한은 다시 알세인과 함께 엘프의 숲으로 향했다. 이미 동료들이 도착해 있다고 하니 서둘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