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불꽃 대결 (94/143)

Chapter 08 불꽃 대결

불꽃 대결

청해도에서 돌아온 유한은 블랙 아이언을 양산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빳다. 리지스가 주문을 왕창 받아 놓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유한은 블랙 아이언의 부품을 생산하고, 그것을 조립하느라 정신없었다.

"조립 다 했다! 베르디, 이번엔 네 차례야."

"맡겨만 주세요, 브라더."

조립이 완료된 블랙 아이언에 베르디가 강신술 스킬을 써서 영혼을 불어넣었다. 블랙 아이언이 눈을 번쩍 뜨더니 유한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난 너를 만든 주인이다. 내 명령을 따라라."

"예, 주인님.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블래과 달리 양산품들은 별다른 사고가 없었다. 이번에 완성된 녀석도 순순히 유한의 말에 복종했다.

-블랙 아이언을 완성하셨습니다. 매우 충성스러워 보입니다.

 스킬 경험치 250을 얻었습니다.

또 한 대의 블랙 아이언을 완성한 유한은 어느 정도 실력이 올랐나 궁금해졌다.

그래서 상태창을 열었다.

[상태창]

이름: 지그

칭호: 오우거 헌터, 드워프의 조수, 공중 요새의 발견자, 리저드의 친구, 고대 드워프 유적의 발견자, 미케니아의 은인, 신종 제작자, 사장, 엔지니어, 죽음의 상인, 노력가, 헤븐즈 게이트의 발견자

직업: 대장장이

레벨: 165

체력(HP): 1,900/1,900

스테미나: 1,700/1,700

마나(MP): 110/110

힘: 165 민첩성: 120

인내심: 142+10(투사의 슈즈)

지식: 103+15(기술관의 관복)

행운: 110 솜씨: 215+15(기술관의 관복)

명성: 23,000

공격력: 185+186(마이티 소드+와이어 건틀렛+투사의 슈즈)

방어력: 165+118(투사의 슈즈+기술관의 관복+와이어 건틀렛+동지의 목걸이)

경험치: 5,000/28,000

돈: 2,580,000골드

[습득 스킬]

장작 패기 스킬 2랭크

벌못 스킬 5랭크

채굴 스킬 2랭크

채석 스킬 4랭크

제련 스킬 2랭크

생산 스킬 2랭크

합금 스킬 3랭크

정밀 조립 스킬 2랭크

수리 스킬 2랭크

주물 스킬 3랭크

도발 스킬 9랭크

쇼크 웨이브 7랭크

선동 스킬 8랭크

수리 성공률 79%

[히든 스킬]

그레인 스킬 2랭크

암 브레이크 스킬 3랭크

[공장 기계 스킬]

선박 가공 스킬 6랭크

용접 스킬 7랭크

절단 스킬 7랭크

천공 스킬 7랭크

압력 가공 스킬 6랭크

'생각보다 많이 올랐군.'

블랙 아이언을 게속해서 만들다 보니 스탯뿐만 아니라 스킬들도 전반적으로 1단계씩 올라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한이 일반 무구 생산이나 유저들을 상대로 한 무기 수리에 완전히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고객 관리 차원에서 틈틈이 핸드메이드(Handmade) 지그표 무구를 생산하기도 했고, 일정 시간에 맞춰 단골들에게 수리를 해 주기도 했다.

"지그 님, 그 소식 들었어요?"

한창 바스타드 소리를 수리하고 있는데, 입이 간질간질했던 검의 주인이 말을 걸었다.

"뭘요?"

유한이 대꾸하자 상대는 입에 침을 튀겨 가며 말했다.

"그 일본 유술가 있잖아요? 카즈만가, 가자미인가 하는 녀석. 그 녀석 이번에 길포드 꼰대한테 걸려 아주 박살이 았답니다."

"그래요?"

간만에 길포드가 한 건 한 모양이다.

다 유한이 약을 올려놓을 탓이었지만, 뒷사정을 모르는 그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겨들었다.

"어제 제 친구가 직접 싸우는 장면을 보고 동영상으로 녹화했는데요. 정말 가관도 아니었대요. 나중에 일본 녀석이 살려 달라고 싹싹 빌었다고 해요."

진짜 죽는 것도 아닌데, 살려 달라고 싹싹 빌 정도였다면 길포드가 어지간히 괴롭힌게 아닌 모양이다.

"나중에 공식 홈페이지 가서 동영상 한번 보세요."

"그러죠."

유한이 다시 작업에 집중하려고 할 때 개인 작업실 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 놀란 유한은 하마터면 망치를 미끄러트려 바스타드 소드를 부숴 먹을 뻔했다.

문을 부수다시피 열고 들어온 사람은 옌스인 줄 알았는데, 리지스였다.

"지그야, 큰일 났어!"

"왜? 드림맥스가 망한데?"

"그게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던 리지스는 다급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발리안의 철공소가 망했어!"

유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르페디아에서 내로라할 정도로 돈이 많은 녀석이 아닌가.

더구나 요새 레기온인지 뭔지를 거대 길드들에 팔면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다고 들었건만.

"그 폭탄 테러범 있잖아. 그놈이 이번엔 발리안의 철공소를 죄다 날려 버렸대."

"진짜냐?"

"그래, 공식 홈페이지에서 지금 스샷이 떴는데 난리도 아니야."

폭탄 테러라는 무시무시한 사태가 벌어졌음에 불구하고, 리지스는 씩 웃고 있었다.

지그와 동업하는 그녀의 입장에서 발리안의 철공소는 경쟁 대상이었다. 그것이 이번에 홀랑 날아갔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쏜가.

유한도 잠시 로그아웃을하고 나와 공식 홈페이지를 보았다.

게시글을 보니, 스샷에 처참하게 불타고 무너진 철공소와 정신 줄을 놓고 있는 발리안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 아래로 유저들이 리플이 이어졌다.

-잎흔겅듀: 아이고 우리 발리안님 불쌍해서 어쩌냐.ㅠㅠ

-팅커벨: 아놔, 프로인 이 시키 누가 좀 잡아 족쳐여!

-니그랏토: 드림맥스 유저를 다 죽일 것이다.

-한배달쥬신: 허무의 종족 꼴라짱에 대해 아십니까?

-폴커: 윗분들 화제에 집중합시데이.

"어때? 보고 왔어?"

유한이 재접속하자 리지스가 냉큼 말을 건넸다.

그러나 유한이 좋아할 거라 생각한 그녀의 예상과 달리 유한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발리안 녀석 불쌍한걸."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돈 많으니까 금방 재건할 거야."

"인마, 그건 돈이 문제가 아니야."

유한은 같은 대장장이었기에, 아니 당해 본 적이 있기에 지금 발리안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공들여 쌓은 탑이 누군가의 잔인한 폭력과 유희에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아마 발리안의 지금 심정은 바츠를 해킹당했을 적 자신의 심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우린 지금의 회기를 살려야 해. 발리안 철공소에 거대 병기를 주문했던 길드들이 주문을 취소하고 있다니까 이틈에 우리 블랙 아이언을……."

"으아악! 도망쳐!"

갑자기 들려온 비명이 리지스의 말을 묻어 버렸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가스톤이 이곳에 광산 마을을 세운 뒤로는 근방에 몬스터가 얼씬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필드 보스라도 기어들어 왔나?'

그런 유한의 생각은 갑자기 들려온 폭음에 사라져 버렸다.

쾅! 콰쾅!

유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곧장 밖으로 달려 나가 보니, 옌스와 철공소 단골들이 누군가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그들과 대치하고 있는 자는 프로인.

유한도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켜라, 너희들을 상대하러 온 것이 아니다."

"닥쳐! 이 알 카에다 같은 자식! 넌 오늘 내 손에 죽을줄 알아!"

옌스가 성난 고릴라처럼 펄펄 뛰었다.

마침 채린을 찾아왔던 에이린이 폭탄 파편에 맞았다. 살짝 스쳐서 피가 난 정도였지만, 그조차도 절대 용납할수 없는 옌스였다.

"사이좋게 반 동강 내 주마, 대ㅡ!"

타앙

ㅡ!

옌스가 미처 스킬을 쓰기도 전에 프로인이 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옌스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누구냐? 누가 날 방해했나?"

프로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고함을 질렀다.

처음 그는 옌스의 머리를 쏠 셈이었다. 헤드샷으로 한방에 죽일 속셈. 그러나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누군가 자신에게 돌을 던졌고, 덕분에 총알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내가 했다. 당신이 프로인인가?"

유한이 앞으로 나서자, 프로인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네가 바로 대장장이 지그로군."

프로인은 대장장이 차림 덕분에 유한을 알아보았다.

그저 실력만 좋은 대장장인 줄 알았는데, 직접 보니 그게 아니었다. 남들관느 다른 베짱이 넘쳤다. 지금까지 만난 대장장이치고 이런 놈은 없었다.

"용건이 뭐요?"

"나는 웨스턴 최고의 대장장이다. 나와 한번 실력을 겨뤄 보지 않겠나?"

프로인은 상대의 대답 여하에 따라 행동에 나설 생각이었다.

만약 거절한다면 이 녀석에게도 화염지옥을 보여 줄 셈이었다. 발리안에게 그랬던 것처럼.

"좋습니다. 어디 한번 겨뤄 보죠."

"이봐, 후손!"

블랙이 뒤에서 펄쩍 뛰었다.

눈앞의 정체불명의 상대는 상당히 사이한 기운을 흘리는 자였다. 그런 자가 과연 제대로 실력을 겨루려 하겠는가?

"지그 님, 안돼요. 저놈 굉장한 악질이라고요!"

"네,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단골들이 소리를 질렀지만, 유한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의외라는 눈빛을 보이는 프로인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근데 당신 나와 겨룰 만한 실력이 되는지 모르겠군."

한마디로 실력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소리.

프로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은 웨스턴 최고의 대장장이다. 자신에게 이런 망언을 하는 녀석은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다.

무섭게 유한을 쏘아보던 프로인은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

"큰소리 칠 정도인지 어디 한번 볼까?"

그리하여 유한은 웨스턴 최고의 대장장이와 맞붙게 되었다.

아르페디아의 모든 대장장이들을 대표해서 말이다.

대결을 하기로 한 유한과 프로인은 장소를 옮겼다.

바로 연못이 있는 숲 속의 공터였다. 유한은 일꾼들을 시켜 그곳에 2개의 고로와 모루 등 작업 도구를 가져다 놓도록 했다.

"굳이 이곳을 택한 이유라도 있나?"

프로인이 궁금해 물었다.

처음 대결 장소를 따로 잡자고 한 건 유한이었다. 장소는 아무 곳이나 상관없었던 프로인은 동의해 주었고.

"내 철공소에선 당신이 불리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또 뭐가 문제지?"

"당신이 내 철공소를 날려 버릴지 모르니까."

"크크큭, 그렇군."

프로인은 이 영악한 코리안 꼬마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음을 알았다. 사실 여차하면 철공소를 박살 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철공소와 제법 거리가 있는 이곳에 자릴 잡았다.

뭐 상관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깟 철공소쯤은 언제든 박살 낼 수 있으니까.

"그래, 무엇으로 나랑 대결할 텐가?"

"장소는 내가 잡았으니, 종목은 아저씨가 정하죠."

'흥, 뭐든지 자신 있다는 건가?'

유한의 오만함이 거슬렀지만, 프로인은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코를 납작하게 해 준 다음 불지옥을 경험하게 해줘도 늦지 않으니까.

"좋다. 그럼 대결은 제련으로 하자. 제련이야말로 대장장이의 기본이니까."

"제련 좋죠. 재료는 철입니까?"

"그래, 가장 우수한 강철을 만드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프로인은 강철 제련에 자신이 있었다.

질 좋은 강철을 만드는 일은 건 스미스에게 가장 중요한 일.

강철의 질이 좋아야 총신의 화약의 폭발력을 충분히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 스미스들은 일반 대장장이들보다 강하고 순도 높은 강철을 만들어 낸다.

'난 그런 건 스미스 중에서도 최고다, 애송아.'

프로인은 먼저 작업을 시작하는 유한을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그는 여유 있게 제련을 시작했다. 작업 도구는 웨스턴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프로인은 빈고로에 숯을 다져 넣고 철광석을 넣은 다음 땔감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유한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풀무질을 하기 시작했다.

"와! 시작했다. 시작했어."

근처 수풀 속에는 대결을 지켜보려 온 유저들이 있었다.

유한의 친구들은 물론이고, 단골과 소문을 듣고 온 구경꾼들로 북적였다.

물론 폭탄마의 악명 덕분에 감히 접근을 시도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내기를 하는 이들은 있었지만.

"누가 이길까?"

"지그 님이 이기는 데 백 골드."

"하지만 상대는 유럽 서버 최고의 대장장이라고 들었어. 귀련 님 정도의 실력자가 아닐까?"

"그러거나 말거나 지그 님이 이겨!"

모두들 유한이 이기기를 바랐다. 이겨서 저 폭탄마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주기를.

"구경꾼이 꽤 많이 몰려왔군.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톡톡히 누리겠는걸."

프로인은 잠시 풀무질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열심히 풀무질을 하고 있던 유한은 그에게 퉁명스럽게 답했다.

"댁이 게으름을 피는 이점이 더 클 것 같은데요."

"후후후, 걱정 마라. 풀무만 죽어라 밀고 당긴다고 좋은 철이 얻어지는 건 아니니까."

프로인은 인벤에서 뭔가를 보란 듯이 꺼내 들었다.

기름종이에 곱게 싸인 검은 가루, 그것은 바로 그에게 폭탄마의 악명을 떨치게 해 준 화약이었다.

"그걸로 뭘 어쩌시려고? 비겁하게 날 암살하려고요?"

"그럴 리가. 화약은 평화적인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지."

그러면서 프로인은 화약 가루를 고로 속으로 집어 던졌다.

화약 가루가 던져질 때마다 고로의 불꽃이 거세게 타올랐다.

"철을 제련하는 덴 높은 온도가 필요하다. 이렇게 화약을 뿌려 주면 손쉽게 고온의 불꽃을 일으킬 수 있지."

"그게 당신 비법인가요?"

"웨스턴에 건 스미스들은 대부분 알고 있지만, 중요한건 화약 재료의 비율이다. 작업 용도의 화약을 제작하려면 재료의 비유을 잘 맞춰야 하거든, 그렇지 않으면……."

"뻥! 폭발이라 이거군요."

프로인이 자신하고 화약을 던지는 걸 봐서 제련에 적합한 화약의 재료 비율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유한이 덤덤히 바라보고 있자 프로인은 입맛을 다셨다.

"뭐야, 좀 부러운 표정을 지을 줄 알았는데……."

"왜 그래야 하죠? 나도 비슷한 게 있는데."

유한은 피식 웃으며 고로에 초열탄을 집어넣었다. 둥그런 초열탄이 들어가기 무섭게 유한의 고로 불꽃도 거세게 피어올랐다.

"훗, 이건 예상 밖인데."

"나도 화약을 그런 식으로 쓸 줄은 생각 못했습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유한은 적잖게 긴장했다. 초열탄으로 가볍게 이길 줄 알았는데, 상대에게 그런 비법이 있었을 줄은.

'그래도 내가 이긴다!'

휴안은 갈리가 가르쳐 준 드워프의 기술을 믿었다.

제아무리 웨스턴 건 스미스들의 기술이 뛰어나다 한들, 강철의 종족인 드워프의 제련 기술보단 뛰어나지 않을 것이다.

"슬슬 철이 흘러나오는군."

유한과 프로인은 재빨리 흘러나오는 철을 틀에 받아 식히고, 그렇게 생산된 철들을 다시 한 번 제련해 강철로 만들어 냈다.

얼마 후, 두 사람이 만든 강철이 벌겋게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강철은 차차 식어 가며 둔한 빛을 발했다. 불순물이 거의 없는 극상의 강철이었다.

"잘 만들었군요."

"너도 대단하군. 근데 심사는 누가 하지?"

"적합한 사람이 있죠. 갈리 님!"

유한의 부름에 수풀 속에서 갈리가 걸어 나왔다. 폭탄마가 뭔지 몰라도 조수가 대결을 한다니 구경 나왔던 것이다.

갈리를 본 프로인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번득였다.

"드워프인가?"

"웨스턴에도 있습니까?"

"아니, 아르페디아에 와서 처음 봤지. 철의 종족이라는 이야기를 익히 들었다. 그러면 심사 위원으로 제격이겠군."

그리하여 갈리가 심사 위원이 되었다.

그는 두 사람이 제련한 강철을 유심히 살펴보고 또 망치로 두들겨 보았다. 심지어 냄새를 맡거나 혀를 데 보기도 했다.

"어뜨뜨뜨뜨ㅡ"

아직 덜 식은 강철에 혀를 대다니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프로인은 그 꼴이 우스웠는지 피식 웃었다.

"웃지 마, 이놈아! 난 공정한 심사를 하려는 거란 말이다!"

"그럼 공정하게 판결을 내 보시지."

프로인의 말에 갈리는 유한의 손을 들어 주었다.

"지그의 승리다."

"아싸!"

좋아하는 유한과 달리 프로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갈리가 별로 고민하지 않고 유한의 승리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설마 동료라고 편든 건 아니겠지?"

"날 뭘로 보는 거냐! 난 붉은 수염 일족의 갈리다! 내가 이런 일에 공정성을 잃을 것 같나!"

그렇게 일갈한 갈리는 곧장 유한이 승리한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둘 다 강도와 연성에 별 차이 없지만, 프로인 자네가 만든 강철은 황 성분이 많더군."

프로인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제련에서 인과 황의 비율을 얼마나 낮추느냐에 따라서 철의 질이 좌우되기 때문.

'제길, 그렇군. 화약을 써서…….'

곰곰이 생각해 본 프로인은 자신이 패배한 이유를 알았다.

고로의 온도를 높이려고 화약 가루를 집어넣었는데, 그것이 강철의 순도에 영향을 끼쳤던 모양이다. 화약에 들어가는 중요 재료 중 하나가 바로 황이었으니까.

"크윽, 질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는데."

"나도 질 거라곤 생각 안 했습니다. 자, 볼일 다 끝마치셨으면 이제 그만 가시죠."

유한의 당당한 언사에 프로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제련이 비록 기본이라지만 겨우 그것만으로 대장장이의 실력을 알아본다는 게 말이 되나? 다른 스킬로도 겨뤄 봐야지."

"음, 삼세판이라 그거죠,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그렇게 합의를 본 유한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두 번째 시함을 치르기로 했다.

두 번째 시합은 합금 대결이었다. 제련 다음으로 대장장이에게 중요한 기술이 바로 합금이었기 때문.

공평하게 주어진 재료들을 가지고 최고의 니켈 합금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승자가 되기로 했다.

치이익! 치익!

화르륵

ㅡ!

유한은 지금까지 읶힌 모든 합금 노하우를 동원해 나름 최고의 니켈 합금을 만들어 냈고, 프로인도 웨스턴에서 쌓은 합금 기술을 총동원해서 시합에 임했다.

얼마 후 두 사람이 만든 합금이 갈리의 앞으로 제출되었다.

한번 쓱 둘러본 갈리는 볼 것도 없다는 듯, 프로인의 손을 들어 주었ㅋ다.

"프로인 승!"

"후후후, 역시."

분하지만, 유한도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인의 니켈 합금은 자신이 봐도 훌륭했다.

'합금 스킬 3랭크 정도론 무리였나?'

프로인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유럽 서버 최고의 대장장이라 일컬으니 적어도 1랭크 이상은 될 것이다.

제련은 나름 갈리에게 배운 비법이 있어서 이길 수 있었지만 합금에는 그런 게 없었다.

이러다가 마지막 한 판도 져서 역전패 당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결과가 못마땅하지는 않나?"

"내가 댁인 줄 압니까?"

진 건 진 거다. 깨끗이 승복하고 다음 시합에 집중하는게 낫다. 아직은 1:1 상황이니까.

"후후후, 그럼 기권하는 건 어때?"

'아윽! 한 판 이겼다고 아주 기가 살았구만!'

유한은 속에서 분기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절대로 지고 싶지 않았다. 수풀속에서 유저들이 응원을 보내 주고 있었고, 아르페디아의 모든 유저들이 프로인의 콧대를 꺾기를 원하지 않는가.

"세 번째 시합은 생산 대결로 하겠다."

시합 종목이 결정되자 갈리는 두 사람에게 똑같은 양, 똑같은 질의 강철괴와 합금을 나줘 주었다.

"만들어야 할 것은 방패. 자신의 모든 노하우를 동원해서 최고의 방패를 만들어라. 크기는 가로세로 30cm를 넘어선 안 되고, 두께는 1cm를 넘어선 안 된다. 이 점을 반드시 지키도록."

갈리의 말이 끝나자 프로인은 대결이 완전히 끝났다는듯,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건 스미스라면서요. 방패도 자신 있습니까?"

유한은 내심 불안했는지 프로인을 떠보았다.

"물론이지. 뛰어난 건 스미스는 방탄 실드도 만든다."

'오, 마이 갓!'

유한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총알도 막는 방패를 만드는 작자에게 이길 수 있을까. 더구나 적의 수준은 웨스턴 최고의 대장장이. 무력뿐만 아니라 실력에서도 단연 톱으로 꼽히는 상대다.

'대체 뭔 수로 방탄 실드를 능가하는 제품을 만들지?'

총알도 막는 방패에 견줄 물건이 있을까.

유한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손바닥을 마주쳤다. 무적의 방어구를 떠올리다 보니 생각나느 게 있었다.

그는 갈리가 준 강철괴 중 일부를 고로에 넣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주물 틀을 가져와서 진흙을 퍼 담고, 나무를 깎아 모형을 만들었다.

"훗, 주물 스킬을 이용해 방패를 제작하려는 건가?"

옆에서 프로인이 비웃었지만, 유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완성된 주무 틀에 쇳물을 부어 뭔가를 만들어 냈다.

"저게 뭐지? 방패의 일부분인가?"

"두께 1cm를 넘지 말라고 했는데 너무 두꺼운걸."

"그런데 왜 합금은 사용하지 않는 거야?"

채린을 비롯한 친구들은 유한이 이상한 것을 만드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프로인은 열심히 강철괴와 합금을 달구고 두들겨 방패 모양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유한은 아직 방패 같은 것은 만들지도 않았다.

프로인도 유한의 그런 행동이 의문스러웠는지 말을 건냈다.

"꽤 꾸물대는군. 대체 뭘 만들려는 거지?"

"연장이 하나 더 필요해서 그걸 만드는 중입니다."

그래서 아까운 시간과 재료를 쪼개 주물 작업을 했던 것이다.

얼마 후, 유한이 원하던 연장이 만들어졌다. 연장이 만들어지자 유한은 서둘러 남은 강철괴와 합금을 달구고 두들겨 열심히 강판을 만들어 냈다.

"좋아! 이제 이 연장을 쓸 차례다!"

'대체 무슨 연장인 거야?'

대장장이로서 흥미가 생긴 프로인은 잠시 손을 놓고 유한의 작업을 훔쳐보려 했다. 그러나 유한이 등을 지고 작업을 하는 통에 자세하게 볼 수가 없었다.

뭔가 일반 망치 소리와 다른 둔탁한 소리가 연달아 들려올 뿐.

"시간 됐자. 완성품을 제출해!"

갈리가 망치를 두들기며 외치자, 유한과 프로인이 냉큼 완성한 방패를 내놓았다.

프로인의 방패는 직사각형 모양에 가장자리가 살짝 휘어진 방패였고, 유한의 방패는 둥그렇고 불록한 모양의 라운드 실드였다.

"그게 방탄 실드입니까?"

"그래, 그에 비하면 네 방패는 너무 평범한 것 같군."

유한은 포로인의 조소를 무시해 버렸다.

갈리는 먼저 줄자를 꺼내 두 방패의 크기를 검사해 보았다.

"흠, 크기나 두께는 양쪽 모두 어기지 않았군."

모두 치수가 30cm 미만에 두께도 1cm를 넘지 않았다. 프로인은 시간이 남아돌았는지, 표면에 얇게 음각을 파서 멋진 야생마의 문양을 새겨 넣기도 했다.

그러나 드워프인 갈리는 인간의 예술 따윈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두 방패를 들었다 놨다. 이리저리 두들겨 보다가 말했다.

"방어력 테스트를 해 봐야겠군."

직접 테스트를 해 보지 않는 이상 강도를 정확히 측정할 수 없었던 모양.

"그러면 이걸로 하지."

프로인이 인벤에서 부싯돌 권총 2자루를 꺼냈다. 흠칫 놀라는 유한을 보고 그는 비웃음을 지었다.

"놀라지 마라. 이건 빈총이야. 아직 장전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주머니에서 돌돌 말린 기름종이 뭉치 2개를 꺼냈다. 그 안엔 화약과 총알이 함께 들어 있었다.

프로인은 먼저 총구에 화약을 붓고 기름종이에 돌돌 만 총알을 넣었다. 잘 들어가지 않는지, 권총 아래에 꽂혀 있던 쇠막대기로 눌러서 쑤셔 넣었다.

'대발 사부 말대로구나.'

유한은 장전 과정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예전에 곽대발에게 들었던 대로 구식 총을 장전이 느렸다. 아니, 과정이 많아 몹시 불편해 보였다. 장전 작업이 끝난 다음에도 화약 접시에 또 한 번 곱게 간 화약을 붓는등 시간이 걸렸다.

"화약 량과 총알은 똑같다. 고로 위력은 동일하지. 같은 거리에 방패를 놓고 쏘아 보면 누구의 것이 더 좋은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갈리는 30m 정도 떨어진 나무에 2개의 방패를 걸어 두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프로인은 먼저 자신의 방패를 겨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알은 멋지게 방패에 틀어 박혔다.

'뭐야, 튕겨 내지도 못했잖아?'

프로인이 하도 자신만만해 하기에 방패에 기스도 나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러나 총알엔 장사가 없는 모양.

프로인은 권총을 바꿔 들고 이번에는 유한의 방패에 총탄을 날렸다.

타앙!

이번에도 총알은 방패에 명중했다.

"자, 그럼 방패의 상태를 볼까?"

갈리가 방패를 갖고 와서 탄흔을 살펴보았다.

먼저 본 것은  프로인의 방탄 실드였다. 멀리서 봤을 때는 몰랐는데, 총알은 방패를 반 정도 뚫고 박혀 있었다.

"이게 내 방탄 실드의 위력이지. 좀 더 거리가 멀면 이런 식으로 박히지도 않아."

유한이 만든 라운드 실드도 총알이 박혀 있었다. 프로인의 방탄 실드만큼 방어력이 우수했던 것.

"이거 예상외로군. 그럼 이번은 무승부인가?"

"아니, 지그의 승리다."

갈리의 판정에 프로인은 발끈하고 언성을 높였다.

"어째서? 두 방패의 방어력은 똑같잖나!"

갈리는 프로인에게 두 방패를 건네주었다. 양손에 방패를 하나씩 들어 본 프로인은 흠칫 놀랐다. 유한이 만든 라운드 실드가 자신의 방패보다 훨씬 가벼웠다.

"어, 어째서? 이건 말도 안돼!"

프로인이 봤을 때 두 방패의 두께는 똑같았다. 똑같은 재료를 사용했는데 어째서 지그란 놈의 방패가 훨씬 더 가벼운 걸까.

'설마!'

프로인은 지그가 작업했던 모루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방패를 만들고 남은 재료들이 남아 있었다. 유한이 남긴 재료의 양은 프로인이 남긴 양과 비슷했다.

아니, 연장을 하나 더 만들었으니 자신보다 더 적은 양의 재료를 쓴 셈이다. 더 적은 재료를 썼으니 가벼운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어떻게 방어력을 높인 것일까?

"이건 사기야!"

"사기가 아닙니다. 남다른 비법이 있을 뿐."

유한은 라운드 실드에 박힌 총알을 빼냈다. 프로인은 총알이 박혀 깨진 자리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강판의 내부 구조를 본 프로인은 깜짝 놀랐다.

"이게 뭐야? 언제 이렇게 철판을 구겨서!"

프로인이 본 것은 주름 철판이었다.

유한은 라운드 실드를 만들 때 주름 철판을 사용했다.

주름 철판은 귀련이 배를 폴로 대회 당시 가우리 길드에 만들어 준 갑옷의 소재로, 화살과 중병기의 타격을 튕겨 낼 정도로 위력이 좋았다.

유한은 그 제작법을  귀련을 찾아갈 때 배웠다.

방패 제작 전에 주물로 만든 연장은 바로 그 주름 철판을 만드는 특수 연장이었다.

"그런가. 이게 방어력과 경량화를 높인 원인인가?"

프로인의 말에 유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뿐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만든 주름 철판에 유한은 즉석에서 자신의 지식을 가미했다.

2개의 알반 철판 사이에 주름 철판을 끼워 넣어 골판지 구조를 만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강도가 같은 두께의 철판보다 훨씬 강해질 거라 믿었다.

그런 강판 3개를 겹쳐 만든 방패가 '지그표 방탄 실드'.

성능은 나타난 바와 같았다.

'멍청하게…… 지금까지 이걸 까먹고 있었다니.'

유한은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귀련에게서이 철판 제작 기술을 배웠을 때만 해도 널리 사용하자 했었는데.

뭐 이제부터라도 널리 사용하면 될 것이다.

"이번 대결은 2:1로 지그의 승리다."

갈리의 판정 선언에 유한은 물론이고, 구경하던 이들도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대장장이 지그 만세!"

"만만세!"

제멋대로 날뛰던 폭탄마의 콧대가 납작해졌다.

숲 속에 대장장이 지그의 이름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대단하구나. 조수야. 나도 네가 이길 줄 몰랐다."

갈리의 축하에 유한의 어깨가 으쓱했다.

웨스턴 최고라는 대장장이를 쓰러트렸다. 그것도 순수하게 대장장이 스킬을 겨뤄서 말이다.

'사실 남들 덕이 컸지.'

제련 시합은 갈리가 가르쳐 준 초열탄 덕분에 이길 수 있었다. 그리고 생산 시합은 최고의 명장 귀련의 주름 철판 덕분에 승리했다.

그들에게 배운 바가 있었기에, 프로인에게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히든 피스들을 얻어 낸 것은 다 그만큼 유한이 모험을 하고 사람들을 사귄 덕분.

대장장이라고 마냥 대장간에 들어앉아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크크크, 이거야 원. 이렇게 망신을 당할 줄은 몰랐는걸."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있던 프로인이 갑자기 웃었다.

그의 기묘한 웃음에 모두의 환호성이 뚝 그쳤다. 경계심이 생긴 것이다. 저 미친 폭탄마가 무슨 짓을 할지 알수 없었기에.

"지그라고 했나? 너 정말 대단하군. 솔직히 귀련 말고는 날 패배하게 만들 녀석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찾아보면 많을 텐데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승부를 받아 주지 않더군."

그런 건방진 녀석들에게 폭탄 맛을 보여 줬다. 유한도 거절했으면 같은 꼴로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거야 댁이 인덕이 없어서겠죠."

"말조심해라, 꼬마야. 발리안 이전에 네가 먼저 날아갈수 있었다."

사실 프로인은 이전에 유한의 철공소를 찾아왔었다. 그러나 마침 유한이 청해도에 가 있었던 덕분에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너그러웠기에 네 철공소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거다."

"당사자 앞에서 부실 속셈은 아니었습니까?"

정곡을 찔린 프로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유한의 말이 맞았다. 당사자 앞에서 그가 가진 것을 파괴하면 몇 배의 쾌감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잠시 말을 끊었던 프로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웨스턴 최고의 건 스미스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 뭔지 아느냐?"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요."

유한은 퉁명스럽게 답했다.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느 정도 예상기 갔기 때문이다. 역시 프로인은 유한이 예상한 답을 내뱉었다.

"바로 나보다 실력이 좋은 대장장이들을 없애 왔기 때문이다."

저격을 하기도 하고, 폭탄을 던져 공방을 날려 버리고도 하면서.

그런 식으로 유럽의 실력 있는 대장장이 유저들을 줄줄이 접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이젠 아르페디아의 대장장이들을 접게 만드시겠다?"

"잘 아는군. 넌 역시 영리한 꼬마야."

프로인은 곧장 총을 꺼내 유한을 향해 겨냥했다. 그리고 막 방아쇠를 당기려 할 때, 뭔가 날아와 총에 부딪쳐 터졌다.

그것은 물풍선이었다. 그 물풍선을 던진 사람은 다름아닌 유한.

"화약은 물에 젖으면 소용없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이 자식이!"

프로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렇게 빨리 대응을 할 줄은 몰랐다. 보통 유저들은 총을 겨누면 얼어서 꿈쩍도 못하거나 도망치기 바빴는데.

물론 아무것도 모르고 마주쳤다면 유한도 그랬겠지만, 그에겐 조언을 해 준 사람이 있었다.

"상대가 총을 들었다고 절대 쫄면 안돼. 폭음과 연기에 놀라지 말고 냉정하게 대응할 수 있어야 상대를 쓰러트릴 수 있다."

존경하는 대발 사부는 그리 말씀하셨다.

그래서 유한은 쫄지 않았고, 냉정하게 대응했다.

맨 먼저 한 것이 상대의 약점을 간파하는 것. 상대가 가진 힘의 원천이나 다름없는 것을 봉쇄하는 일이다.

"총이 흠뻑 젖은 것 같은데 발사가 될지 모르겠네요."

"망할 자식!"

프로인은 곧바로 인벤에서 다른 총을 꺼냈다. 하지만, 그가 총을 꺼내는 족족 유한이 물풍선을 꺼내 던져 적셔 버렸다.

폭탄마가 날뛴다는 동영상을 보고 나름 대응 방안으로 미리 만들어 둔 것인데 예상보다 효과가 좋았다.

물풍선에 맞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피하는 프로인의 모습이란.

"잡아라!"

"이 기회에 아주 아작을 내 놔야 해!"

프로인이 총을 들고도 아무 짓도 못하는 걸 본 유저들은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여기서 놈을 잡아 한국 유저들의 복수도 하고, 명성도 높일 속셈이었다.

"제길, 꽁무늬를 빼는 것도 오랜만이군."

프로인은 일단 등을 돌려 달아났다. 그리고 쫓아오는 유저들에게 폭탄을 선물했다.

툭! 데구르르!

폭탄이 굴러오자 유저들은 멈칫했다. 하지만 이미 유한이 하는 것을 본 바가 있기에 유저들은 재빨리 대응했따.

"운디네여, 심지를 꺼 버려라!"

정령술사 유저가 불러낸 운디네가 가볍게 폭탄을 무력화시켰다. 프로인은 연속으로 폭탄을 던졌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결국 프로인은 폭탄만 낭비하고 도주해야 했다.

"프로인 이 자식 어디 갔어?"

"저쪽으로 간 것 같은데."

도망치다 수풀 속에 몸을 숨긴 프로인은 유한을 향해 이를 갈았다.

"날 이 지경에 빠트리다니, 톡톡히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유저들을 따돌리기 위해 대부분의 폭탄을 써 버렸다. 다행히 화약과 총알은 충분히 남아 있어 재빨리 인벤토리에 든 총을 재장전했다.

그의 인벤토리에는 다해서 50자루의 총이 들어 있었다.

잠시 후 주위가 좀 조용해진다 싶자 그는 철공소를 향해 살금살금 걸음을 옳겼다. 망할 코리안 꼬마의 철공소를 날려 줄 생각이었다. 놈이 보고 발악하도록.

"어딜 그리 가십니까?"

그런데 프로인의 앞에 유한이 불쑥 나타났다.

프로인이 철공소를 노릴 거라 예상하고 먼저 지름길로와서 길목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프로인은 방아쇠를 다익려 했지만, 유한의 행동이 더 빨랐다. 손바닥으로 쳐서 총구를 하늘로 들어 올린 뒤 팔꿈치로 프로인의 얼굴을 찍어 버렸다.

"크윽!"

프로인은 곧장 근접전에 유리한 권총으로 바꿔 쥐었다.

그러나 그사이 유한은 사라지고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프로인은 오른쪽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거기냐?"

곧장 그쪽으로 총을 쏴 됐지만, 아무것도 맞지 않았따.

이번엔 다른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프로인은 다시 총을 쏘았지만 잡힌 것은 지나가던 오크였다.

"크아악! 어디 있느냐, 이 쥐새끼 같은 놈아!"

프로인은 사방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빨리 철공소로 달려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또 어디서 튀어나와 기습을 할지 모르기에.

한참을 난사한 후 뒤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려오자 프로인은 그쪽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총성이 울리지 않았다. 장전한 총을 다쏘고도 몰랐던 탓이다.

당황하는 프로인에게 유한의 빈정거리른 말소리가 들려왔다.

"다 쐈습니까? 큰일이네요. 장전하는 데 시간이 걸릴텐데."

유한은 한자리에 계속 숨어 있었다. 그저 돌을 던지며 소리를 유발했을 뿐.

프로인이 총을 다 쏜 것을 확인하자 유한은 곧장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프로인이 소매 속에서 아주 작은 총을 꺼내 드는 게 아닌가.

"애송이 녀석! 너 같은 놈 때문에 이런 걸 남겨 뒀다!"

그러나 프로인 회심의 일격은 유한이 들이민 방패에 가로막혔다. 좀 전에 만들었던 지그표 방탄 실드였다. 지근거리였지만, 총이 작은 만큼 위력도 형편없었다.

"또 남은 거 있습니까?"

"망할!"

급한 마음에 화약을 꺼내 재장전하려던 프로인은 물벼락을 맞고 쓰러졌다.

돌아보니 시커먼 로봇 같은 게 물통을 들고 서 있었다. 그의 뒤로는 살기등등한 유저들이 잔뜩 진을 친 상태였다.

다들 엉뚱한 곳에서 프로인을 찾고 있다가 총소리를 듣고 이리로 달려온 것이다.

"내 손을 더럽히기 싫으니, 그대들이 알아서 하도록."

블랙이 비켜서자, 유저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몰매를 가하기 시작했다. 발길질을 하고 무기를 휘둘렀다.

퍽퍽퍽!

프로인은 장전은 커녕 반항할 틈도 없이 죽었다.

프론인이 죽어서 사라지자, 유저들은 이번엔 근처 부활 포인트로 달려가서 기다렸다.

잠시 후 그가 부활하자 인정사정없이 밟아 댔다.

"크아악! 그만 해라, 코리안들아!"

"그만 하긴 뭘 그만 해, 짜식아!"

그런 식으로 프로인은 죽고 또 죽었다. PK가 되어 머더러가 되는 유저들이 속출했지만, 아무도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다구리가 계속되자 프로인은 접속을 끊었다가 한참 뒤에 다시 접속했다. 악바리같이 공격하던 놈들은 보이지 않았다.

'흥, 근성 없는 코리안들.'

그러나 참을성 없는 한국인 유저들은 부활 포인트를 아주 깊숙이 파헤쳐 놓고 갔다.

이 구덩이에서 프로인이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누, 누구 없어? GM! GM 소환!"

그러나 무정하게도 아무도 우지 않았고, 모니터로 상황을 지켜보던 GM 조차도 그를 무시해 버렸다.

그렇게 웨스턴 최고의 대장장이자, 최악의 테러리스트 프로인은 머나먼 아르페디아 대륙에서 캐릭터를 접어야할 위기에 빠졌다.

마노스 제국의 철십자 길드 사무실.

그곳에서 베히모스는 부하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러니까 프로인과 카즈마가 실패했다고?"

"예. 카즈마는 폭풍의 길포드한테 박살 났고, 프로인은 대장장이 지그한테 졌다고 합니다."

"쳇, 멍청한 자식들."

베히모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신대륙이 연결되고 갑작스레 두 유저가 나타나 아르페디아에 깽판을 놓기 시작한 데는 철십자 길드, 정확히 말해서는 베히모스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었다.

철십작 길드는 아르페디아 대륙을 잘 모르는 두 유저에게 랭커들의 위치와 실력 좋은 대장장이들의 명단과 소재지를 쪽지로 알려 주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카즈마와 프로인은 이 정보를 매우 감사히 이용했다.

"좀 아쉽기는 하지만, 제 잘났다고 날뛰던 녀석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놓았으니 된 거 아닙니까?"

찰스턴 공방전에서 유저들의 단합된 힘을 뼈저리게 느낀 베히모스와 철십자 길드는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해외 유저를 이용했다.

그중에서도 베레타 공화국에 거대 골렘을 만들어 준 대장장이 녀석들을 내버려 둘 수 업었다. 복수도 복수지만, 앞으로 놈들이 거대 병기르를 만들어 팔면 철십자 길드의 행보에 지대한 방해가 될 테니까.

"지그 놈의 명성만 올려 주다니. 바보 같은 프로인 자식."

베히모스는 프로인을 잘근잘근 씹어 대다가, 다음으로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런데, 그 미케니아 녀석들은 아직 찾지 못했나?"

뇌제의 무덤에서 놈들과 충돌한 후 철십자 길드의 회수대와 미케니아의 잔당들은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었다.

대륙을 제패할 힘을 얻기 위해서는 뇌제의 홀이 필요했고, 뇌제의 무덤을 열기 위해서는 놈들이 빼앗가 간 반크의 열쇠가 꼭 필요했다.

"그, 그게 회수대의 보고로는 엘프의 숲 근방에서 놈들의 종적을 놓쳤다고 합니다."

"엘프의 숲 근방이라고?"

베히모스는 오만 인상을 찌푸렸다.

만약 놈들이 엘프의 숲에 들어갔으면 추적하기가 곤란해진다. 엘프으 ㅣ숲은 아무나 들여보내 주지 않는다. 정령과 친화도가 있는 유저들만 들여보내 주는 것이다.

철십자 기륻에는 정령 친화도가 높은 길드원이 몇 안된다.

놈들이 엘프의 숲으로 들어가지 못했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놈들을 잡으라고 해! 한 날 내로 뇌제의 홀을 가져오지 않으면 길드에서 모두 추방시켜 버린다고 전하도록."

"알겠습니다."

부하는 서둘러 회수대의 대장에게 쪽지를 보내 베히모스의 명령을 전달했다.

"제길! 내 주위에는 하나같이 병신들뿐이군."

방 안에 혼자 남게 되자 베히모스는 분통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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