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6 밸런타인데이에 생긴 일
밸런타인 데이에 생긴 일
"크으! 아침인가?"
유한은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저께 늦게까지 게임을 해서, 어제는 비교적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부모님의 눈빛이 요사이 심상찮아진 탓이다. 이럴 땐 살짝 패턴을 바꾸는 게 좋다.
일찍 잔 덕분인지 오늘은 일찍 일어났다. 도장에서 배운 체조로 몸을 푼 유한은 세수를 하고, 가족들과 아침 식사를 먹었다.
"쯧쯧쯧, 이래서야 원."
"왜 그래요?"
식사 중에 신문을 보던 유한의 아버지가 연방 혀를 찼다.
그는 사회면에 실린 기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들이 말이야, 해킹으로 은행 돈을 빼내려다 죄다 잡혔다는군."
"어머나! 부모들이 도대체 뭘 가르쳤는지, 쯧쯧쯧."
"사람이 근면하게 일해서 벌 생각을 해야지."
해킹 범죄 이야기가 나오자 자연히 자신이찾고 있는 해커가 절로 떠올랐다.
바츠를 해킹한 녀석.
일전에 만났던 허진태는 그 해커가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개발자 손석진일 거라 했고, 그걸 알고 싶으면 전설적인 해커 조커에 대해서 알아보라고 말했다.
유한은 틈틈이 조커란 해커에 대해 알아봤지만 도저히 그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허진태의 말대로 그와 손석진이 연관이 있긴 한 것인지?
'좀 더 확실히 물어봐야겠어.'
그렇게 마음먹은 유한은 서울 구치소로 허진태를 찾아갔다. 이번엔 통닭 1마리를 미리 사 들고 갔다.
"어서 와. 어때? 조커에 대해선 찾아봤나?"
예전에 봤을 때보다도 초췌해진 허진태였지만, 눈빛은 팔팔하게 살아 있었다.
"도저히 조커가 누군지 알 수 없더군. 도대체 손석진씨가 내 바츠를 해킹했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뭐지? 날 놀리려는 거냐?"
"그럴 리가 있나. 난 그저 그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라 생각해서 언급했을 뿐. 앞서 말했지만 드림맥스 보안 프로그램을 뚫을 고수는……."
"은거기인이라도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숨은 실력자가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가능성에 대해서 허진태는 고개를 저었다.
"난 이 바닥에서 알 만한 놈들은 다 알고 있어. 은거기인 같은 건 없다."
거기에서 잠시 대화를 끊었던 허진태는 뭔가 곰곰이 생각해 보는 듯 턱을 쓰다듬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일단 손석진이 조커라는 사실부터 확실히 알려 주도록 하지. 그럼 너도 내 말을 믿게 될 테니까."
"어떤 방식으로 알려 주겠다는 거지?"
유한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묻자 허진태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와 그놈이 다녔던 대학교를 가르쳐 주지. 그곳 컴퓨터 공학과에 '레볼루션(Revolution)' 이란 해킹 동아리가 있는데, 거기 가면 과거 손석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야."
유한은 허진태의 두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거짓말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좋아. 이번에도 허탕을 치면 다시는 널 만나러 오지 않겠다. 해킹범은 나 혼자 잡겠어."
"뭐 그러던가."
유한은 허진태에게서 손석진이 다녔던 대학교의 이름과 위치를 알아내고는 구치소를 나왔다.
"여기가 신라 대학교인가?"
유한은 대학 캠퍼스에 들어와 연방 두리번거렸다.
의외로 손석진은 그리 좋은 대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천재 개발자란 화려한 수식어가 붙기에, 최소한 란국 최고의 명문 대학이나 해외 유학파 정도는 될 거라 생각했는데.
'허진태, 그 인간 설마 거짓말을 한 건…….'
미심쩍긴 했지만, 유한은 일단 레볼류션이란 해킹 동아리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래서 가까이 있던 대학생에게 말을 건넸다.
"말 좀 묻겠습니다. 레볼루션이란 동아리가……."
"뭐?"
유한은 묻다가 말았따. 담배를 뻑뻑 피워 대고 있는 대학생 형님이 사납게 부라려 보았기 때문이다.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그의 몸에서 칙칙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뭐야? 여친한테 차였나?'
잠시 주저하던 유한은 용기를 내어 말을 붙였다.
"레볼루션이란 컴퓨터 동아리를 찾는데 혹시 아세요?"
"몰라, 여긴 미술학부다."
담배꽁초를 짓밟아 끈 대학생은 획 하니 돌아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쳇! 좀 친절히 가르쳐 주면 덧나나.'
투덜거리며 유한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아직 2월이라 대학 캠퍼스에는 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2월이 끝나고 개학을 해야 학생들이 우글거릴 것이다.
그나마 보이는 사람들도 표정이 어둡고 신경질적이어서 말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말을 붙여도 무시하고 그냥가기 일쑤.
'이거 다들 왜 이래? 오늘이 무슨 날인가?'
연이어 낭패를 당한 유한은 맞은편에서 오던 커플과 마주쳤다.
"아잉, 선배도 참."
"하핫, 뭐 그걸 갖고 그래?"
다른 대학생들과 달리 그들은 무척이나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표정도 밝았다. 마치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한쌍의 바퀴벌레 같았다.
대체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유한은 궁금했지만, 일단 레볼루션 동아리의 위치부터 물어보았다. 그 커플은 흔쾌히 길을 가르쳐 주었다.
"전자전기공학부는 저리로 쭉 가면 돼. 네가 말하는 동아리도 그쪽에 있을 거야."
"고맙습니다."
친절한 커플 덕분에 유한은 컴퓨터 공학과가 있는 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컴퓨터 공학과 건물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동아리 레볼루션 방 앞은 술병과 각종 쓰레기로 어지러웠다.
'블라덱 녀석 소굴과 비슷하군. 해킹하는 작자들은 다이런가?'
아무튼 유한은 동아리 방문을 두들겨 보았다.
몇 번 두들기지 않아, 머리가 더부룩한 대학생이 문을 열고 나왔다.
"응? 넌 누구냐? 무슨 일이야?"
낯선 이의 방문이 탐탁지 않았던지, 그는 경계의 눈빛을 보였다. 밖에서 봤던 솔로들처럼, 어딘가 칙칙한 기운을 흘리고 있기도 했다.
"저 그게…… 삼월에 입학할 신입생인데요. 이곳 동아리가 유명하다고 해서요."
"아! 그래?"
후배가 될 병아리가 왔다니, 더벅머리 대학생의 눈빛이 달라졌다. 유한은 급조한 변명이 먹힌 것에 안도했다.
"미리 구경 온 거냐? 하하, 이럴 거면 정리 좀 해 놓을걸 그랬네."
"다른 사람은 없어요?"
"뭐 방학인데다 애인 만난다고 다들 시내로 뛰쳐나갔어."
따로 말은 안 했지만, 더벅머리는 '애인이 없는 나는 동아리방이나 지키고 있다' 는 듯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와. 제대로 구경할 게 있을까 모르겠지만."
더벅머리의 말에 유한은 동아리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말한 대로 동아리 방에는 그리 대단한 것들은 없었다.
해킹 동아리답게 책상 위에는 낡은 컴퓨터와 정체를 알수 없는 전자 장비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한쪽 벽에는 진열장과 사진들이 잔뜩 붙어 있을 뿐.
유한은 벽으로 다가가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역대 동아리 회원들의 사진 같았는데, 낯익은 인물이 한 사람 보였다. 유한이 그를 유심히 바라보자, 더벅머리가 자랑하듯이 말했다.
"저 사람 누군지 아니? 손석진 선배님이야.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만든 천재 개발자시지."
'헐, 진짜였잖아!'
혹시 허진태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닌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유한은 사진을 좀 더 훑어보았다. 2019년 여름 MT 사진이라는 적혀 있는 사진에는 손석진이 누군가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상대는 다소 귀찮다는 눈빛.
"저기, 손석진 개발자님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죠?"
더벅머리가 쓱 다가와 보더니 말했다.
"허진태 선배야."
"예에?"
사진 속의 허진태는 지금의 허진태와 용모가 달랐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그가 성형을 했다는 것을 모르는 유한은 크게 놀랄 따름이었다.
"허진태 선배는 졸업 후 크래커로 활동했다 하던데,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됬어. 손석진 선배와 맞먹는 천재였다고 하던데 안타까운 일이지."
이로서 허진태가 손석진과 같이 공부를 했다는 말은 진실로 판명되었다.
그렇다면 손석진이 조커였다는 말도 사실이 아닐지?
"손석직 개발자님도 해커로 유명했다던데 정말입니까?"
유한이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을 은근슬쩍 묻자 더벅머리는 지저분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너 그 이야기 어디서 들었냐? 손석진선배님이 해커로 활동한 것은 대학 다닐 때 잠깐이었는데. 한 일 년 정도 활동하다 그만두었다던가?"
'빙고!'
유한의 눈 깊은 곳에서 빛이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허진태의 말이 진실이라면, 정말 손석진이 바츠를 해킹했을지도 모르기 때문.
그러나 아직 확신할 수는 없다.
좀 더 제대로 된 증거를 찾아야 한다.
"혹시 손석진 개발자님이 해커로 활동할 때 별명이나 닉네임을 쓰진 않았어요?"
"썼지. 'J' 라고 아마추어 해커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했단다."
조커란 이름이 나오길 내심 기대했는데. 엉뚱한 이름이 나왔다. 유한은 실망했다. 하지만,
'가만, 조커도 첫 글자가 J로 시작하잖아.'
그리고 보니 J가 조커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혹시 조커라는 이름으로는 안 불렸어요?"
"조커? 푸하하핫!"
갑자기 더벅머리가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그는 유한을 향해 엉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말이야,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몰라도 한참 잘못 짚었어."
"잘못 짚었다고요?"
"그래. 손석진 선배님이 해커로서 좀 능력이 있긴 했지만, 조커와는 비교가 안 되지. 조커는 말이야 한국 최고, 아니 어쩌면 세계 최고일지도……."
그러면서 더벅머리는 조커에 대해 일장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블라덱이 그에게 해 준 거랑 비슷했다. 결론은 손석진은 조커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 아닌가?'
실력이 늘었을 수도 있고, 실력을 감추었을 수도 있다.
허진태의 말이 줄줄이 진실로 드러나다 보니, 더벅머리의 말이 왠지 믿겨지지가 않았다.
물론 아직 명확한 증거는 없다.
손석진이 조커라는 확실한 증거가.
유한이 생각에 잠긴 사이, 더벅머리가 진열장에서 검은 바탕의 서류 파일을 끄집어냈다.
"너 이게 뭔지 알아?"
"뭔데요?"
"손석진 선배가 졸업 작품으로 만든 게임의 설정집이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기본 설정과 흡사해."
그 말에 흥미를 느낀 유한은 서류를 열고 파일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페이지마다 글과 그림들, 알고리즘 등이 상세히 정리되어 있었다.
'지도도 있네.'
지도 주변에는 낙서 같은 그림들이 그러져 있었다. 하나같이 우승꽝스러운 모습으로 춤을 추고 있는 광대들의 모습.
유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조……커?'
조커라는 언급은 없지만, 유한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쩐지 다른 캐릭터들보다 이 광대가 더욱 더 눈에 들어왔다.
허진태의 말, 손석진의 대학 시절 별명 J, 설정집의 조커.
정말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삐리리리ㅡ!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꺼내 보니 채린의 번호가 액정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유한은 냉큼 전화를 받았다. 안 받으면 나중에 죽는다.
"여보세요, 채린이?"
"응, 나야. 저녁에 시간 있니?"
"시간? 시간이야 많지."
도장에 가야 하지만 채린이 놀러 가자고 하면 살짝 빠질 의향이 있었다. 왜 안 왔느냐고 하면 아팠다거나 공부하느라 바빳다고 하면 그만.
"그럼 다섯 시에 강남역 앞에서 만나. 너저분하게 나오면 날려 버릴 거다."
"오케이, 알았어."
유한은 흐뭇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좀 남지만 집에 들렀다가 나름 준비하고 나가려면 모자랄지도 모르겠다.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그래, 그러렴."
어쩐지 더벅머리의 말투가 차가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한은 곧장 인사를 하고 동아리방을 나갔다.
"좋~ 겠다. 이런 날 여친 만나는 놈은."
무적의 솔로부대원이었던 더벅머리는 투덜거리며 손석진의 설성집을 제자리에 꽂아 넣었다.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강남역으로 나가자 채린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채린아, 많이 기다렸어?"
"아니, 나도 금방 왔어."
"그런데 무슨 일이야, 갑자기 다 불러내고?"
유한의 물음에 채린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따.
"어휴, 너도 참.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몰라?"
"오늘? 빨간 날은 아닌데……아, 그렇구나!"
갑자기 얼굴이 환해지는 유한이었다.
2월 14일.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였다.
어쩐지 오늘따라 외로운 남자들이 어둠의 오라를 뿜고 다닌다 했다.
'설마 채린이가 나한테 초콜릿을 주려고?'
유한의 마음속에 있는 바츠는 쓸데없는 망상이라 비웃었지만, 그 비웃음은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을 보는 순간 사라졌다.
"자, 받아. 몸에 좋은 초콜릿이야."
"우와! 고마워, 잘 먹을게."
유한은 곧장 포장을 풀고 초콜릿을 먹었다.
"맛있다, 정말 맜있어!"
농도 99%의 카카오 초콜릿이었지만, 그는 쓴맛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아니, 달콤했다. 이런 단맛은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고맙다, 채린아. 나 발렌타인 초콜릿은 태어나서 첨받아 봤어.'
'그, 그렇게 맜있나?'
채린은 내심 놀랐다. 장난 반으로 선물해 줬는데 이렇게 맛있게 먹다니.
반쯤 장난인 자신과 다르게 유한은 진심인 모양.
어쩐지 미안했고, 또 나름 기분이 좋았다.
"이거 화이트 데이 때 톡톡히 갚아야겠는걸."
"당장 갚아. 나 배고프니까."
"그래? 그럼 저기 스파게티 잘하는 집 있는데, 거기 갈래?"
"으음…… 피자도 같이 해? 피자도 먹고 싶은데."
"그럼. 근데 너 그거까지 먹으면 살찔걸. 굴러다녀야 할지 몰라."
"뭐야!"
"아하하, 농담이야, 농담!"
두 사람은 마치 주위의 솔로들을 약 올리는 듯, 행복 바이러스를 잔뜩 뿌리며 지나갔다.
발란타인 데이 저녁 시내 한복판.
당연히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누군가와 몸을 부딪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툭!
"앗, 죄송합니다."
채린과 함께 깨를 볶아 대던 유한은 어깨를 부딪치자마자 바로 사과했다. 오늘같이 좋은 날 괜히 얼굴 붉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좋게 사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딪친 상대는 눈알을 부라렸다.
"이런~ 썅! 앞 잘 보고 다녀!"
"새끼가 여친 있다고 유세 떠나?"
덩치가 큰 비곗덩어리가 입술을 실룩이자, 뒤의 다섯명의 똘마니들도 따라서 저마다 한 마디씩 욕설을 주절거렸다.
한눈에 봐도 건수를 찾아 나온 양아치들.
상대해서 좋을 게 없다 여긴 유한과 채린은 서둘러 그들을 지나쳐 가려 했다. 그런데,
"잠깐, 너 왠지 낯이 익은데?"
비곗덩어리가 유한의 어깨를 붙잡고 늘어졌다.
놈의 손을 뿌리치려 고개를 돌렸던 유한도 녀석이 낯설지 않음을 느꼈다. 이놈은 바로 자신과 악연이 있는 라스트모히칸이었다.
마침 똘마니 중 하나가 유한의 얼굴을 알아봤는지 고함을 질렀다.
"형! 이 자식 공중 요새에서 우릴 물 먹인 새끼예요."
"뭬야? 그 대장장이 새끼라고?"
비곗덩어리의 눈이 뒤집어졌다. 그는 유한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새끼, 잘 만났다!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지 모르지?"
"지금 보는 사람들도 많은데 좋은 말로 하지."
유한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비곗덩어리의 언성은 더 높아졌다.
"닥쳐! 너 때문에 내 캐릭이 지금도 북해에 동태 꼴로 떠다니고 있단 말이다!"
공중 요새가 차가운 북해에 처박히는 바람에 비곗덩어리의 캐릭터 라스트모히칸과 두 똘마니들은 지금도 가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를 깨어나게 하려면 누군가 찾아와 구조해 줘야 하는데, 문제는 반쯤 얼음으로 덥혀 있는 북해를 항해하는 배가 잘 없다는 점이다.
"따라와, 새꺄. 넌 오늘 아주……."
"따라갈 테니까 이것 좀 놓고 말하지."
유한은 자신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는 비곗덩어리의 손을 잡고 슬쩍 비틀었다.
비곗덩어리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화가 나서 그런것은 아니고 아팠기 때문이다. 놈이 손을 치우자 속절없이 어깨에서 손을 떼야 했다.
'크윽, 이 자식을 그냥!'
그냥 여기서 한 대 후려갈길까 싶었지만, 놈의 말대로 보는 사람이 많았다. 주위에서 똘마니들도 눈치를 주고 있었다.
비곗덩어리는 등을 돌려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갔다.
똘마니들은 유한과 채린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포위하고 골목으로 유도했다.
도망갈 생각이 없었던 유한은 순순히 녀석을 따라갔다.
채린은 영문을 몰랐지만, 일단 지켜보자는 생각에 유한과 함께 갔다.
그렇게 인적이 드문 골목 깊숙한 곳에 들어서자 비곗덩어리는 본색을 드러냈다. 녀석은 유한의 멱살을 움켜잡고선 살찐 곰처럼 으르렁댔다.
"딴말 안 한다. 당장 보상해!"
"보상? 무슨 보상?"
"내가 힘들여 키운 캐릭터를 니가 망쳐 놓았으니 당연히 보상을 해야지?"
대충 놈의 속셈이 보였다. 유한을 호구로 여기고 둔과 아이템을 잔뜩 뜯어낼 생각인 것이다.
하긴 유한은 아르페디아에서도 꽤 잘나가는 캐릭터니까.
"싫다면 어쩔 건데?"
유한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비곗덩어리는 한쪽으로 물러선 채린을 힐끔거리더니 음흉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럼 네 여친이 몸으로 갚는 수밖에."
이번엔 유한의 표정이 틀어졌다. 칭얼대는 꼴을 보고 적당히 손봐 줄 생각이었는데, 적당히 봐줘선 안 될 듯했다.
놈에 대한 처우는 완전히 결정 났다.
"뭐야, 꼬라보면 어쩔……."
을러대던 비곗덩어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옆구리에 강력한 충격이 전해졌다. 하필이면 비계도 두껍지 않은 부분에.
"꺼윽!"
멱살을 놓은 비곗덩어리의 몸이 뒤로 비틀거렸다.
"돼지 새끼. 넌 오늘 죽었다고 복창해라."
큰소리를 아니지만,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고꾸라진 비곗덩어리의 얼굴로 유한의 발차기가 날아갔다.
"이, 이게 우리 형을!"
처음에 똘마니들은 갑자기 상황이 돌변해서 무슨 일이 터진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비곗덩어리가 쌍코피가 터진 채 벌렁 나자빠지자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덤벼들었다.
"그래 와라. 몽땅 작살내 줄 테니까."
안 그래도 이놈들 다시 만나면 진득하게 손봐 줄 생각이었다.
채린과 다시 만났던 날, 이놈들에게 얻어맞고 얼마나 추레한 모습을 보였던가. 그때 굴욕을 몽땅 다 갚아 줄 생각이었다.
일부러 놈들을 따라 골목 안으로 들어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유한은 가장 앞서 달려드는 똘마니에게 하이킥을 날렸다.
"크엑!"
제일 앞에 있던 녀석이 벌렁 쓰러지자, 뒤따르던 녀석들이 주춤하고 멈춰 섰다. 그러자 유한은 놈들 틈을 번개 같이 빠져나가며 주먹을 날렸다.
"치잇! 뭐 하는 거야! 잡아서 족쳐야지!"
간신히 몸을 일으킨 비곗덩어리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때부터 5:1의 싸움이 벌어졌다.
다소 부담스러운 숫자이기는 했지만, 조폭이 아니라 대부분 그저 눈깔에 힘만 주고 다니는 양아치들이라 별로 힘들지 않았다.
유한은 곽대발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랐다. 한 번 때릴때 뇌가 울릴 때까지 후려쳐야 겁을 먹고 덤벼들지 않는다는 것.
과연 사부의 가르침은 위대했다.
몇 대 후려 맞은 똘마니들은 지레 겁을 먹고 몸을 피했고, 오직 비곗덩어리만 식식거리며 덤벼들었다.
"이 새끼 잡히기만 하면……!"
일단 바닥에 쓰러트린 뒤 체중으로 깔아뭉개고 주먹을 퍼붓겠다는 게 비곗덩어리의 생각이었다.
"안 잡히겠다면 어쩔 건데?"
그러나 유한의 허리를 잡으러 접근하던 그는 유한이 들이민 무릎차기에 맞고 또 한 번 나자빠졌다.
'헤에, 유한이 잘 싸우네.'
채린은 한쪽에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릴 때 허약하던 녀석이고, 다시 만났을 때도 깡패들에게 맞고 있었는데 언제 저리 실력이 늘었는지?
상황에 따라 거들어 주려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을 듯 했다.
그런데 가만히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채린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유한의 사납고 거친 공격 패턴이 어딘가 상당히 낯익었던 것이다.
'설마…….'
잠시 생각에 잠겼던 채린은 비곗덩어리가 허겁지겁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제길, 이대로 계속 맞을까 봐.'
덤비는 족족 유한에게 깨진 비곗덩어리는 작전을 바꾸었다.
그는 한쪽에서 멀뚱히 구경하고 있던 채린에게 달려가 팔로 목을 감아 인질로 삼았다.
"이 빌어먹을 새끼. 당장 무릎 꿇어!"
비곗덩어리는 놈이 의외로 고수이기는 하지만, 일단 여친을 잡은 이상 끝이라 생각했다. 똘마니들도 그리 생각했는지 몸을 사리고 있다가 다시 유한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똘마니들에게 유한은 거침없이 주먹과 발차기를 날렸다.
"이것들이 돌았나."
"야, 인마! 미친 건 너야!"
비곗덩어리는 분해서 빽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여친이 인질로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주저 없이 자신의 부하들을 두들겨 팰 수 있단 말인가.
똘마니들은 잘근잘근 밟아 버린 유한은 비곗덩어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서늘한 눈빛에 비곗덩어리는 흠칫 뒤로 한발 물러났다.
"야, 너희 후회하기 전에 그 손 놔라."
"후회?"
"채린아, 언제까지 약한 척할 거야."
유한의 말에 채린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땐, 왕자님이 구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공주님이 더 먼치킨이잖아."
비곗덩어리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들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악!"
그러나 다음 순간, 비곗덩어리는 엄청 매섭고 아린 고통에 채린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채린이 부츠 굽으로 그의 발을 인정사정없이 찍었던 것이다.
정확히 새끼발가락에 찍혔던 비곗덩어리는 껑충껑충 뛰다가 채린이 날린 따귀를 맞고 옆으로 쓰러졌다.
설마 이 연약해 보이는 여자가 이렇게 강할 줄이야.
"야, 너 어떻게 죽여 줄까?"
유한은 뺨에 벌건 낙인이 찍힌 비곗덩어리를 발로 툭툭 던드리며 물었다. 교활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비곗덩어리는 바로 무릎을 꿇고, 파리처럼 싹싹 빌었다.
"혀, 형님! 제발 한 번만 용서를……."
"왜? 보상하라며?"
"나보고 몸으로 갚으라고도 했어."
채린이 다가와 한 마디 보태자, 비곗덩어리는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아까 그 싸대기는 정말 아팠다. 이빨이 다 흔들거릴 정도로.
'무슨 계집애가 손이…….'
그러나 행동은 생각과 달랐다.
"제가 순간 쳐 돌았나 봅니다. 감히 어떻게 누님에게……."
"난 너같이 징그러운 동생 없거든!"
찌ㅡ악!
이번엔 반대편 볼에 불이 붙었다.
잠시 광할한 우주를 경험했던 비곗덩어리는 손을 호호 불고 있는 유한을 보았다. 계집애만 그런 게 아니라 이 자식도 손이 보통 매운 게 아니었다.
"보상을 받기 싫다면 보상해야지."
비곗덩어리는 무슨 말인가 싶어 눞을 휘둥그렇게 떴다.
"남들 기분 좋은 날, 분위기 망치고 땀 빼게 만들었으니 보상을 해야잖아, 안 그러냐?"
"그, 그렇습니다."
만약 아니라고 하면 그 자리서 작살이 날 것 같았다. 그리서 비곗덩어리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후, 그럼 보상을 받아 볼까?"
"저, 근데 가진 건 이것밖에……."
비곗덩어리가 쭈빗거리며 돈을 내밀자 유한은 냅다 주먹을 날렸다.
"짜시강, 누가 돈 달래! 몸으로 갚차, 몸으로!"
"크에에엑!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날 골목 안에서 1시간이나 개 잡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플들의 아름다운 날에 심술을 부리려던 솔로는 그렇게 무참하게 응징을 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