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4 상처받은 자
상처받은자
유한과 옌스가 남쪽 요새의 부두를 떠날쯤.
아르페디아 대륙에서 1척의 무역선이 당도했다.
그러나 배는 섬을 앞에 두고 멈춰 섰다.
한참을 지나도 배가 움직이지 않자 기다리다 지친 승객 한 명이 선장에 게다가와 항의했다.
"왜 섬이 바로 코앞인데 배를 멈춘 거예요?"
"죄송합니다. 길드의 지시라 어쩔 수 없습니다."
선장은 시아라는 궁수 소녀에게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지금 섬에 정박하려는 배들마다 족족 사고가 나서, 원인이 밝혀질 때까지 입항을 금지하고 있다고.
선장 앞에서 물러난 채린은 선실로 와서 얀과 베르디에게 들은 걸 전했다.
"그래서 마냥 기다려야 한다는 거예요?"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까."
"방법이 하나 있다면요?"
얀은 씩 웃으며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바로 일희용 기구였다. 찬드라 대륙에 없는 유용한 이동 아이템이라 사 둔 것인데, 정말 제대로 도움이 될 듯했다.
"이야, 유현이 너 준비성 좋다."
"아무렴요. 막무가내로 길을 떠나는 누구랑은 다르죠."
얀의 말에 안색이 굳은 채린이 일회용 기구를 움켜쥐었다.
"막무가내로 길 떠나는 사람이 이 기구 찢어 볼까?"
"미쳤어요?"
"그래, 나 미쳤다.어쩔래?"
잠시 소란 끝에 채린 일행은 갑판에 올라 기구를 띄웠다.
정원이 남아 두 사람을 호의로 더 태운 그들은 남쪽 요새의 부두에 기구를 내렸다.
"자, 이제 도착했으니 지그를 찾자."
채린이 청해도에 온 것은 유한을 찾기 위함이었다.
유한을 잡아 오라는 리지스의 부탁 때문은 아니다.
유한이 없으니 흥이 나지 않았다. 일상이 심심했다. 게임에서라도 그 바보의 얼굴을 보고 떠드는 즐거음으로 사는데, 녀석은 혼자 망망대해의 섬으로 가 버렸다.
그리고 그 섬에서 아이돌 은비를 만나 시시덕거렸다.
"만나면 옆구리에 한 방 날려 줘야지."
"그 전에 잠시 구경 좀 하는 건 어때요?"
베르디가 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르페디아 대륙과 다른 신기한 풍물이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흠, 일본 쪽 대륙에서 온 아이템인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됐다고 들었는데, 상당히 번화하네요."
시장에는 한국과 일본의 상인 유저들이 자리를 잡고 자기 대륙의 특산품들을 팔고 있었다.
"플로나의 열매 팝니다. 아르페디아 최고의 영약입니 다. HP, MP, 스테미나 다 회복해 줍니다!"
"후소 대륙 무구 팔아요. 아르페디아 거랑 교환도 해줍니다."
"이 마법 스크롤만 있으면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마법을 쓸 수 있습니다!"
"행운의 고양이 인형 단돈 오 골드에 팝니다."
단시간에 시장이 번화하게 된 것은 청해도에 있는 유저들의 왕성한 플레이 때문이다.
한국 유저 건 일본 유저 건, 길드전으로 상실한 경험치와 아이템을 만회한다고 바빴다. 그런 그들의 플레이를 지원하고,이윤을 얻기 위해 두 대륙의 상인 유저들이 물려든 것이다.
"제기랄, 저리 비켜!"
시장 한구석이 갑자기 시끄러웠다.
부활 포인트가 있는 곳이었는데, 덩치 큰 유저가 식식 거리며 사람들을 밀치고 나왔다.
그를 본 채린 일행은 깜짝 놀랐다.
"어머, 저거 옌스 아냐!"
"우리 형더러 바츠라고 부르는 정신 나간 녀석이요?"
얀도 옌스를 알고 있었다. 유한의 철공소에 눌러 박고 지낸 덕분이다.
그러나 알고만 있을 뿐 친하진 않다.
친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여친도 없는 바보 고릴라와 가까이 해서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바보 바이러스에 감염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여! 이게 누구야. 시아 누님이잖아?"
사람들을 밀치고 나오던 옌스는 채린을 보고 강아지처럼 달려왔다. 에이린이 같이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런 거지만, 슬프게도 에이린은 보이지 않았다.
"잘 있었니, 옌스. 지그는 어디 있어?"
"아! 지금 그 때문에 서두르는 중이우."
시무룩하던 옌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가디언 있잖수. 그 블랙이란 녀석. 우리가 좀 무시했다고 삐져서 공격을 해 오는 거야. 그래서 그만 동굴에 떨어지고 말았는데……."
수직 동굴 밑에서 헤매고 있는데 갑자기 위에서 돌무더 기가 쏟아져 그만 죽고 말았단다.
"블랙 녀석. 바츠를 죽일지도 몰라. 아니,벌써 죽였는 지도 모르지."
"바보야, 죽었으면 부활 포인트에 나타나야지."
"뭐?"
얀의 말에 발끈한 옌스는 참마도를 손에 들었다. 당장이 라도 얀을 쪼갤 기세였지만, 채린의 만류에 그만두었다.
"지금 싸울 때가 아니잖아. 옌스, 너 지그에게 귓말 보내 봤어?"
"좀 전에 보냈는데 응답을 하지 않던걸. 로그아웃 한 것 같진 않은데……."
채린은 일단 수직 동굴로 가 보기로 했다.
부랴부랴 도착한 수직 동굴의 입구에는 블랙 아이언의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발자국과 유한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발자국도 있었다.
"이건 뭐지? 옌스, 네 발자국 아냐?"
"내 발은 이렇게 작지 않다고."
"여자 발자국 같은데요."
베르디의 말대로 여자 발자국이었다. 그러나 옌스는 사고 당시에 여자는 없었다고 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군."
여기서 본인이란 유한을 가리킨다.
얀의 말에 옌스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비웃고 나섰다.
"명청한 자식. 본인이 없는데 어떻게 물어본다는 거야?"
"여기 없으면 찾아가면 되지."
"뭐?"
너무나 침착한 얀의 응답에 옌스는 무안할 지경이었다.
"잠깐 로그아웃 할 테니까 다들 기다리고 있어."
게임에선 몰라도 현실에선 형의 위치를 알고 있다.
당장 로그아웃을 하고 캡술을 나온 얀, 아니 유현은 곧장 2층 유한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암흑, 매우 짙은 암흑.
유한은 밑도 끝도 없는 그 공간에 멍하니 서 있었다.
"여긴 어디야?"
처음엔 데보라의 공격을 받고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망했다는 말이 들려오지도, 부활 포인트로 이동되지도 않았다. 아마 아직 죽지는 않은 듯.
한참을 헤매던 유한은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는 팻말을 하나 발견했다. 팻말에는 ‘무의식의 방' 이라는 굵직한 글자가 적혀 있었고, 그 아래로 설명이 쭉 이어졌다.
이곳은 당신의 내면 속의 공간입니다.
평소에 이곳에 올 방법은 없지만, 게임을 하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기절하면 일정 확률로 들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선 외부와의 소통이 불가능합니다. 귓속말도 쪽지도 받거나 쓸 수 없습니다.
이 고요한 공간에서 잠시 사색하며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 보시기바랍니다.
*게임 시간으로 3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깨어납니다
'컥! 세 시간이나!’
이곳이 어디인지 몰라도 3시간이나 갇혀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유한은 기겁을 했다. 당장 깨어나서 데보라와 사생결단 내도 부족할 판에 기절해 있어야 하다니.
'어딘가에 출구가 있을 거야.’
유한은 출구를 찾아 부지런히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저 멀리 빛이 보이는 것을 보고 달려갔다.
그러나 빛의 주인공은 아까 봤던 팻말이었다.
"아놔, 분명 똑바로 앞만 보고 걸었는데 이게 왜 나와?"
짜증이 확 치민 유한은 낮게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뭔가 싶어 귀를 기울여 보니 누군가가 캡슐을 두들기고 있었다.
'헉, 어머닌가?'
밤늦게까지 게임을 한다고 혼나는 건 아닌지.
유한은 얼른 로그아웃을 하고 캡슐 뚜껑을 열었다. 적벽가처럼 긴 잔소리를 각오했건만, 눈에 보이는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라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동생이었다.
"너였냐?"
유한의 눈썹이 꿈틀했다.
감히 이 형님의 게임 플레이를 방해하다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어디 있긴 인마, 여기 있지."
"그게 아니라 게임 속 어디 있냐고?"
유현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채린과 함께 청해도에 와서 형을 찾았지만, 도무지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알 수 없더라는 것.
유한은 채린이 섬에 왔다는 말을 듣고 기뻤지만, 이내 난색했다. 대답할 말이 궁했기 때문이다.
"글쎄, 나도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사방이 시커 멓고, 그나마 하나 있는 팻말에 무의식의 방이라고 적혀 있는데 당최 나갈 방법을 모르겠어."
"아! 무의식의 방?"
유현이 뭔가 아는 듯한 반응을 보이자 유한은 재빨리 물었다.
"너 혹시 아냐?"
"게임하면서 몇 번 가 봤어."
몇 번 가 봤다?
동생 성격에 시간을 꼭꼭 다 채우고 나오진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그곳을 탈출할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물어보니 유현은 힌트를 가르쳐 주었다.
"중요한 건 팻말의 마지막 문구야. 사색하며 인생을 되돌아보라는 대목이 탈출 열쇠지."
"그게 열쇠라고?"
유한은 어리벙벙하기만 했다.
갑자기 철학 수업도 아니고, 사색하며 인생을 되돌아보라니.
유한은 좀 더 자세한 답을 원했지만, 유현은 짓궂은 표정으로 자기 할 말만 하고 나가 버렸다.
"무의식의 방에서 돌아오면 현재 위치를 가르쳐 줘. 우리가 찾아갈 테니까."
'제길, 좀 친절히 가르쳐 주면 덧나기라도 하나?'
투덜거리던 유한은 일단 다시 게임에 접속했다.
여전히 캐릭터 지그는 무의식의 방에 있었다. 답을 찾지 못하면 이곳에서 꼬박 3시간을 채워야 할지 모른다.
"사색하며 인생을 되돌아보라고……."
팻말의 문구를 되씹으며 유한은 장고를 거듭했다.
실제로 사색에 잠겨 옛일을 되돌아보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일, 슬펐던 일, 기뻤던 일. 생각나는 것들은 다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없었다.
"아악! 해도 안 되잖아!"
혹시 유현이 거짓말을 한 건아닐까.
그러나 동생이 불친절하지만 거짓말을 할 놈은 아니었다. 놈이 말한 힌트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힌트가 탈출의 열쇠라면 게임 시스템과 연관이 있을 터…….
"아! 이제야 알겠군!"
뭔가 생각이 떠오른 유한은 기능창을 열어 '스크린샷 감상' 을 눌렀다.
그러자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오르더니 그동안 대장장이 지그로 플레이하면서 찍어 놓았던 스크린샷들이 슬라이드처럼 지나갔다.
웨스트를 받고 랑켈산에 간 것부터 시작해, 데보라 던전의 숨겨진 보상방을 찾은 일, 푸른 새벽 길드와의 싸움, 학생 혁명 당시의 영광스런 순간등이 차례로 지나갔다.
그리고 블랙의 활약으로 무인도 쟁탈전에서 승리를 거둔 장면이 마지막으로 지나가자, 어둡던 공간이 환하게 밝아졌다.
'아, 성공인가?'
눈부신 빛에 어지러음을 느끼던 유한은 눈을 꼭 감았다.
잠시 후 감았던 눈을 떠 보니, 어두운 동굴 속에 누워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유한의 앞에 동료들의 귓속말이 쏟아졌다.
-지그야, 지금 어디 있니?
-바츠! 살아 있으면 응답을 해라!
-브라더, 어디에요?
유한은 곧장 귓속말을 보냈다.
-여기 동굴 이야.
-동굴? 어디 있는 동굴인데?
채린이 금방 달려올 것처럼, 총알같이 대답했다.
_위치는 나도 어딘지 모르겠어.
-지도에 안 나와 있어?
-지금 지도 없거든.
인벤토리가 털렸다. 그것도 동전 하나 남겨 두지 않고.
'도대체 언놈이 내 인벤을 턴 거야?'
투덜거리던 유한은 동굴 한쪽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자신의 가방과 소지품들을 보았다.
반색을 하며 가방을 향해 손을 내밀던 그는 따끔한 전격을 맛보곤 뒤로 물러났다.
"뭐, 뭐야?"
"널 가둬 놓은 나의 마법이다."
목소리의 주인이 어듬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다운 용모에 차가운 눈빛을 가진 여인.
블랙 아이언과 함께 유한을 공격했던 마녀 데보라였다.
유한은 흠짓하며 허리춤에 손올 가져갔다. 그러나 손에 쥐어져야 할 검이 그 자리에 없었다.
'그렇지, 좀 전에 던져 버렸지.'
정신을 잃기 전 데보라를 향해 다급하게 공격하다 보니 그리 되었다. 물론 던지지 않았더라도 지금 상황이면 빼앗겼을 테지만.
'그래도 아직 카드는 한 장 남아 있어.'
왼팔엔 아직 와이어 건틀렛이 끼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데보라와 싸우는 것은 무리.
자칫 이마저 빼앗길 수 있기에 유한은 괜히 건틀렛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데보라가 눈치를 채서 좋을 것은 없을 테니까.
일단은 기다렸다가 상대의 빈틈을 공격해야 한다.
"부두에서 배를 침몰시킨 게 당신인가?"
"내가 갖고 있던 수중 목인병을 이용했지."
그 어뢰 같은 것이 데보라의 작품이었던 모양이다.
"다 네놈이 배를 타고 떠나려 했기 때문이다."
"내가?"
유한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섬을 따나려 한건 자신이 아니라 옌스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배웅하러 갔을 뿐인데, 데보라가 오해하는 바람에 애꿎은 사람들만 피해를 입었다.
"네놈에게 반드시 받아 내야 할 것이 있었다. 덕분에 생각보다 일을 서두를 수 있게 되었지. 그 점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데보라가 스태프를 휘두르자. 허공이 갈라지면서 돌이 하나 튀어나왔다. 그것을 본 유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났다.
"그건 내 운석이잖아!"
"호호호, 이젠 내 것이다."
데보라가 연이어 스태프를 휘두르자 갈라진 공간의 틈 에서 실험 기구들과 제련 장비들, 그리고 작업용으로 보이는 목인병들이 나타났다.
"설마! 스타레이를 제련할 셈인가?"
"호오, 스타레이에 대해서 알고 있나? 하긴 알고 있으니 들고 다닌 거겠지."
데보라는 운석의 일부를 떼 내 목인병에게 건네주었다.
작업용 목인병이 운석을 가루로 만들어 바치자, 데보라는 그 가루를 광천수에 넣어 결정을 생성시켰다. 그리고 그 결정을 고로에 넣어 스타레이를 제련해 냈다.
'귀련 누님과 작업 과정이 똑같다!'
설마 하던 유한은 데보라가 정말 스타레이를 제련해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건 드워프들의 비전인데, 어떻게?"
"드워프들의 비전을 강탈한 마도사들의 지식을 홈쳤지."
그 말에 유한은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데보라가 미케니아의 지식을 홈쳐 갔다고 이바니우스 3세가 투덜거렸던 일이.
"그런데 네놈이 어떻게 그 사실을 알지?"
"……."
"과연 평범한 대장장이가 아니구나. 네놈은 용사 카웬 과도 연관이 있겠지?"
유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팬히 입을 잘못 놀려 귀찮아지는 것은 싫었기 때문.
그다지 궁금하진 않았던지, 데보라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완성된 스타레이에 있었다.
그녀는 식어서 반투명한 은빛으로 빛나는 스타레이를 감상하며 연방 미소를 지었다.
"그걸로 뭘 하려는 거지?"
질문을 던지던 유한은 데보라의 광기 어린 눈빛을 보고 흠칫 놀랐다. 지난번 유치장에서 만났던 허진태의 눈빛과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 더러운 세상을 끝장낼 것이다."
"이런 밥통!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니야!"
유한은 데보라가 세상을 끝장내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게임인 세상. 어떻게 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보다 그가 궁금한 것은 스타레이를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지였다. 구센도르프가 가르쳐 주지 않아 도무지 용법을 알수 없었는데, 데보라에게서 혹시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구체적인 걸 듣고 싶은 거냐? 난 이걸 이용해 점잖은 척, 깨끗한 척, 고귀한 척하는 쓰레기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다. 세상은 내 손에 의해 다시 태어나는 거야."
'에휴, 물은 내가 잘못이다.’
고개를 가로젓던 유한은 데보라를 쏘아보았다.
"기왕이면 잘난 척, 위대한 척, 상처받은 척하는 골동품도 없애 버리지?"
유한의 비아냥에 데보라의 눈빛이 살벌하게 빛났다.
방금 전 그의 말은 데보라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걸 알았는지 데보라는 유한을 잡아먹을 듯이 살기를 뿜어냈다.
단순한 게임 내 비주얼일 뿐이지만, 유한은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살기에 억눌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유한은 부지런히 입을 놀렸다.
"세, 세상 너무 삐딱하게 보지 마라, 데보라, 불우했던만큼 세상에 증오를 가지는 건 당연해. 그건 나도 이해할수 있어. 하지만…… 크아악!"
유한은 말을 잇다 말고 바닥을 뒹굴었다. 데보라의 전격 마법이 그에게 작렬한 것이다.
어찌나 강력했던지, 온몸에서 타는 냄새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HP도 많이 닳았다.
- 치명적인 일격을 당했습니다. 쇼크로 20초 동안 움직일 수 없습니다.
-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어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젠장! 나도 알고 있어!'
죽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위안거리는 있었다.
무지막지한 전격 마법 덕분에 자신을 가두고 있던 마법이 사라진 점이다.
"오호호홋! 어린놈이 건방진 소리를 하는구나. 이해를 한다고? 일기장 몇 장 홈쳐보고 남의 인생을 이해하겠다니, 네놈도 카웬이랑 다를 바가 없어."
데보라는 살기등등하게 다가와서 말을 이어 나갔다.
"카웬 그놈도 그랬다. 나에 대한 소문 몇 조각을 듣고서 날 이해한다고 말했지. 그러면서 하는 짓은 매번 내 앞길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 잘난 척하지 마라. 난 너 같은 위선자가 제일 역겹다."
"그럼 스스로도 역겨우시겠군."
유한의 대꾸에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트린 데보라는 하얀 전격이 맴도는 수정 스태프를 유한에게 들이밀었다.
그러나 그녀가 마법을 쏘는 것보다 유한이 말을 퍼붓는 것이 더 빨랐다.
"데보라,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 잘난 척하는 건 너도 똑같다. 네 주변만 보고 세상이 어떻다 함부로 재단하지마!"
"닥쳐라!"
앙칼지게 고함쳤지만, 그녀의 스태프는 떨리고 있었다.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의미.
HP가 바닥에 떨어진 유한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망설이면 죽음뿐이다.
오히려기세를 더욱 북돋았다.
"네놈이 뭘 안다고 지껄여? 네놈이 뭘 안다고……."
"세상의 천대에 상처받고, 실연과 배신에 절망했겠지. 당신에게 남은 건 증오와 불신뿐 아닌가?"
유한은 천대나 실연의 아픔은 물라도 배신과 짓밟힌 약자의 아픔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학교의 비리를 폭로했단 이유로 괴롭힘을 당했지만, 아무도 자신을 보호해 주지 않았다. 선생들은(을이라고되있네요..) 물론 친구라 믿있던 녀석들까지 시험 답안 몇 개에 등을 돌렸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유한은 세상올 증오하고 사람들을 믿지 않게 되었다.
유한은 혼자만의 세계에 몰두했고, 광전사 바츠를 만들어 냈다. 독불장군 바츠는 무시무시하게 강했다. 혼자 레드 드래곤 카세라스도 때려잡았을 정도니까.
욕구의 분출을 느꼈고, 파괴의 쾌감을 즐겼다.
그러나 그뿐.
보다 가치 있고 '소중한 것' 은 얻을 수 없었다.
아니, 찾을 수도 없었다.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으니까.
증오와 불신이라는 벽에 막혀 한치 앞도 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더 이상 바츠가 아니기에, 지그로서 다른 즐거움을 맛보고 있기에 유한은 알 수 있었다.
"불쌍한 사람이야야,데보라 당신은……."
드림맥스 본사 7층 게임 관리실.
이곳에서 드림맥스 직원들은 데보라와 대장장이 지그의 대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그들에게 있어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마녀 데보라라는 최고의 히든 피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느냐 마느냐가 이 일전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뭐 하는 거야? 빨리 죽여 버렷!"
부사장 정경욱은 불만스럽고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살짝 한 방만 때려도 저 지그란 녀석이 죽을 텐데, 데보라는 결정타를 날리지 않고 있었다.
얼른 지그를 쓰러트려야 데보라가 스타레이로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 아르페디아는 물론 온 게임 세상을 뒤흔들 것이고 유저들은 새로운 시나리오와 투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아까부터 벌어지는 거라곤 말싸움뿐.
정경욱이 짜증내고 있는 것과 달리, 손석진은 흐뭇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자…… 다음엔 뭐라고 할 텐가, 강유한 군!'
누군가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유한은 데보라 반응과 행동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체력이 바닥나 스쳐도 사망인 상태다.
상대의 감정을 흔들어 놓음으로써, 최대한 상황을 유리 하게 만들어야 한다.
'할 수 있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어!'
말만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 믿었다. 데보라와 비슷한 상황을 겪어 봤기에, 상대의 기분이나 반응을 파악 할 수 있었다.
"뭐라고 했느냐? 잘못 들었다. 다시 말해 보겠나?"
"당신이 불쌍하다고."
말을 마친 동시에, 유한은 재빨리 옆으로 물러섰다.
역시 예상대로 데보라의 전격 마법이 떨어졌다.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은 눈앞에 있는 이를 데보라가 아닌 바츠라 여겼기 때문이다. 바츠 역시 그 상황에선 살수를 날렸을 테니까.
그리고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내지 않았을 터.
유한은 재빨리 바닥을 뒹굴며 연이어 떨어지는 전격을 피해 냈다. 아슬아슬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다지 길지 않았지만, 유한에겐 아주 오랜 시간처럼 느껴졌다.
"미꾸라지 같은 놈! 입만 살아서 제멋대로 나불대는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걸 어쩌나! 당신이 불쌍한 건 사실 인걸."
데보라의 공격이 멈췄다.
유한은 멈출 거라 예상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뭐라고 지낄이는지 입단 들어 보고 싶어 할 테니까.
유한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데보라 당신은 당신을 천대한 자들을 미워하지? 그들이 다스리고 만든 세상이 싫은 거지?"
"그래, 그래서 뒤집어엎으려는 거다!"
"그래서 불쌍하다는 거야, 그들과 똑같으니까."
"뭐라고?"
데보라는 '이놈이 뭔 소릴 하냐' 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인간들과 자신이 똑같다니.
"출생 때문에 사람을 천대하고, 천대받았다고 세상에 증오심을 품고……. 달라 보여도 똑같아. 자기 기준과 감정만을 잣대로 해서 세상을 보고 있으니까."
"……!"
"독같이 이기적이야. 난 그래서 당신이 불쌍하다는 거야, 데보라. 당신은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대상과 다를바가 없으니까."
데보라는 입을 벌리고도 아무런 말을 못했다. 방금 전유한이 한 말이 엄청난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과 똑같다고?'
유한은 사시나무처럼 떠는 데보라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그들과 똑같아지지 마. 아픔을 안다면 남들이 상처 입을 짓을 하지 마."
증오로 세상을 흔들지 마라.
유한은 몰랐지만, 자신이 마음속으로 하고 있는 말을 손석진도 함께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증오가 남길 수 있는 건 증오뿐이야."
한 말을 다 했다.
유한은 개심까지는 아니지만, 데보라가 엉뚱한 짓은 하지 않기를 바랐다.
설득이 통했는지 데보라는 수정 스태프의 끝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허탈한 웃음을 짓다가 광기에 젖은 웃음을 내뱉었다.
"오호호, 오호호호호훗!"
'이, 이게 미쳤나?'
한참을 웃던 데보라는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알겠다. 이제 알겠어. 날 이해한다 했던 카웬이 나에게 칼을 들이밀었던 이유를……."
유한은 슬그머니 자세를 낮췄다. 데보라의 스태프에 다시 전격이 맴돌고 있었다.
"흘러간 시간을 돌이킬 수 없듯, 이미 엇나간 나를 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지. 엇나간 가지는 자를 수밖에."
다음 순간. 데보라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흘리며 스태프를 들이밀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잘려 나갈 내가 아니다!"
데보라의 스태프에서 강력한 전격이 터져 나왔다.
동굴 안을 환하게 만들 정도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강력한 마법 공격이었다.
'그게 어떻게 그런 소리가 되냐고!'
유한은 자신의 말을 오해한 데보라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일단 살기 위해서 피하고 볼 일이다.
그러다 무엇을 발견했는지 우뚝 멈추어 섰다.
"블랙!"
유한은 다급히 불량 가디언을 찾았다.
자시을 무시했다고 삐져서 어디론가 가 버린 블랙. 녀석이 지금 동굴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 큰 몸집으로 어찌나 살금살금 접근하는지 데보라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
유한은 방금 전에야 비로소 녀석이 온 것을 알았다.
"카이저 실드(Kaiser Shield)!"
번개같이 튀어나온 블랙은 황금빛 기운을 모아 방패로 만들었다. 블랙이 데보라의 전격 공격을 막아 내자, 유한은 그의 다리 사이로 뛰어나가며 컨틀렛의 와이어를 날렸다.
쉬이익ㅡ!
와이어 끝에 달린 추가 데보라의 손을 후려쳐 수정 스태프를 떨어트렸다.
"이게 끝은 아니지!"
유한은 왼팔을 휘둘러 와이어의 궤적을 바꾸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춤을 추던 와이어는 뱀처럼 데보라의 목을 휘감았다.
"끄으윽!"
숨통이 막히는지 데보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보스 급 몬스터인 마녀 데보라.
그녀의 주특기는 마법과 인형 병기 소환이다.
그녀에게 수정 스태프가 쥐어져 있다면, 목이 막히지 않아 주문을 원 없이 외울 수 있었다면, 블랙이 가세했다 한들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데보라는 방심하다 블랙에게 공격이 가로막혔고, 당황하는 틈을 노린 유한에 의해 마법을 봉쇄당했다.
"이, 이놈이!"
데보라는 자신의 목을 휘감은 와이어를 풀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이미 강철 와이어는 살 속에 단단히 파고든 상태였고, 연약한 마법사의 힘으로는 와이어를 끊어 낼 수 없었다.
데보라의 얼굴이 벌겋다 못해 터지려고 했다.
그 모습에 유한은 흠칫 놀랐지만, 곧 마음을 가라앉혔다. 여기서 자그마한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데보라가 아닌 자신이 죽을 것이니까.
'엇나간 가지도 태양을 보고 꽃을 피울 수 있을 텐데.'
허나 빛을 거부한 데보라는 마지막까지 증오를 선택했다.
결국 유한은 엇나간 가지를 잘라 냈다. 데보라의 눈자위가 뒤집어지고, 그녀의 HP가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쿵!
마지막까지 발버둥 치던 데보라의 몸이 쓰러졌다.
그리고 씁쓸한 표정을 짓는 유한의 눈앞에 승리를 알리는 안내창이 떠올랐다.
- 마녀 데보라를 쓰러트렸습니다.
- 경험치 8,000을 얻었습니다.
- 스타레이를 얻었습니다.
"거 봐라. 내가 뭐랬나? 악의 세력이 있다고 했잖아."
유한이 안내창을 지우자, 블랙이 다가와 우쭐거렸다.
그는 뭐라고 쏘아붙일 수가 없었다.
나름 사실이었고, 이 녀석 덕분에 막판 위기를 넘기고 역전을 이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따질 건 따져야 했다.
"어딜 갔았어, 이 깡통!"
"무엄하다! 감히 짐에게 발길질을 하다니!"
사실 블랙은 멀리 가지 않았단다. 보이지 않을 만큼만 떨어져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고.
"너 그럼 내가 납치되는 걸 보고도 가만히 있었다는 거야!"
"악의 세력의 존재를 네가 실감하기를 바랐다."
'아놔, 뭐 이런 게 다 있냐?'
유니크고 뭐고 해체해 버릴까.
유한은 간신히 그런 욕구를 참아 내고는, 가방과 아이템들을 회수했다. 물론 데보라가 떨어트린 스타레이를 회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어라, 이게 왜 저러지?"
"뭔데 그러냐?"
유한은 스타레이를 줍다가 데보라의 시신이 급격히 말라 가는 것을 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이 비쩍 마른다 싶더니, 딱딱하게 마른 가죽이 부서지고 양상한 백골이 드러났다. 그것은 팔다리도 마찬가지였다.
번쩍!
눈알이 빠진 검은 해골에서 요사스런 푸른빛이 번득였다.
"물러서라, 후손! 마녀의 사술이다!"
블랙이 말하지 않아도 유한은 허겁지겁 물러나고 있었다.
앙상한 백골이 천천히 일어났다.
불그스름한 빛을 띤 수정 스태프를 집어 든 데보라의 이름이 바뀌었다. '마녀 데보라' 에서 '리치 데보라' 로.
"리치? 아니 어떻게 리치 상태로?"
유한은 현재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을때 주문 하나 내뱉지 못하고 죽었던 데보라였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수로 리치가 되었던 말인가.
"크크크, 그게 다 미케니아 놈들 덕분이지."
리치가 되어 그런지 데보라의 목소리를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쇠에 쇠를 긁듯 듣기 거북했다.
그런데 미케니아 덕분이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죽음을 두려워 한 미케니아의 마도사들은 육신이 사망 상태에 이르렀을 때 저절로 리치가 되는 마법을 만들어 냈다."
미케니아의 지식을 훔치면서 그 마법도 알게 된 모양이다. 데보라의 설명이 뒤이어졌다.
"피가 식으면 몸에 새긴 마법진이 자동으로 발동하지. 간편하긴 하지만 심각한 약점이 있어서 놈들은 저희가 만들어 놓고도 사용하지 않았다."
"저기…… 그 약점이 뭔데?"
유한은 스스로 멍청하다 여기면서도 한 번 물어보았다.
그러나 게임 설정상, 리치가 된 사정은 이야기해 줘도 약점을 비밀로 하는 모양이다. 데보라는 유한의 물음에 답하기는 커녕 이를 갈며 분노를 터트렸다.
"감히 날 이런 흉물로 만들었겠다! 내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말겠다. 아니,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마!"
'아니, 왜 나한테 화내고 지랄이야?'
만든 놈들은 쓰지 않는 마법을 사용한 사람 잘못이 아닌가.
그러나 증오에 휩싸인 데보라는 그것을 몰랐다. 모든것이 세상 탓이라 생각했고, 눈앞에 있는 대장장이 놈 때문이라 여겼다.
리치가 되면서 그런 증오심은 더욱더 짙어졌다.
데보라는 수정 스태프를 거세게 휘둘렀다.
"나와라, 나의 군단이여!"
공간이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스톤 골렘과 리빙아머, 여러 종류의 목인병들이 줄줄이 튀어나왔다.
쏟아지는 인형 군단을 보며 유한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쉽게 죽더라 했지."
데보라는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NPC.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죽여도 이런 식으로 되살아나 덤빌 줄은 몰랐다.
'뭐, 한 번 더 싸우라면 싸워야지.'
물러설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최강의 가디언과 함께 잇지 않은가.
게다가 포션을 마셔 체력도 회복해 놓았다.
유한은 인벤에서 도끼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돌진해오는 목인병들에게 덤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