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마녀등장 (89/143)

chapter 03 마녀 등장

마녀등장

무인도의 소유권을 둘러싼 전쟁이 끝났다.

섬의 이름은 최가장이 원한 대로 청해도로 정식 등재되었다. 패배한 오와리 번 유저들은 씁쓸한 마음으로 공지 창을 바라보았다.

섬 쟁탈전은 최가장 길드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섬의 이름은 '청해도' 가 되었습니다. 이제 청해도에서 PK를 저지르면 제재를 받게 됩니다.

쟁탈전은 끝났지만, 상당수 일본 유저들이 청해도에 남았다.

청해도의 소유권을 가진 최가장은 그들을 축출하지 않았다. 한국 유저들과 마찬가지로 공평하게 통행세를 받을 뿐, 섬에서 사냥을 하든 탐사를 하든 내버려 두었다.

"젠장, 내가 이런 결과를 보려고 싸운 건 아닌데!"

일본 유저들은 죄다 쫓겨날 거라 생각한 옌스는 그렇게 투덜거렸다.

그러나 유한은 최가장이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길드전에는 막대한 돈과 아이템이 소모되고, 유저들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는다,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이 섬은 더욱더 그렇다.

"괜히 민족적인 감정을 앞세워 분란을 자초하면 제이, 제삼의 분정이 일어나. 그럴 때마다 적잖은 출혈을 감수 할 걸 생각하면 최가장에서 잘 처신히는 거지. 최대한 분란을 피하는 것이 섬의 지배권을 공고히 히는 데도 더 큰 도음이 되고."

"아무튼 은비 누님 공연 안 해 주기만 해 봐라!"

길드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유저들이 아직 섬을 떠나지 않은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최가장이 떡밥으로 던진 아이돌 은비의 공연과 팬 사인회.

소문을 들었는지, 일본 유저들도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었다. 얼마 전 일본에서 데뷔한 은비의 앨범이 불티나게 팔린 덕분이다.

유한은 상당수 투항병이 발생한 데는 그런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정말 공연을 해 줄 건지는 직접 물어보면 알겠군."

유한은 최가장의 길드원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단순한 맴버들이 아닌지. 그들 속에는 워터 워리어스 단장이라는 스코필드도 있었고, 길드장인 최강현도 끼여 있었다.

유한의 앞으로 걸어온 최강현은 호의적인 미소를 띠며 악수를 청했다.

"지그 님이시죠?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아, 예. 반갑습니다."

최강현은 지나칠 정도로 유한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늦게 인사드려 죄송하군요. 지그 님의 명성을 생각하면 제가 더 일찍 찾아왔어야 했는데."

정중하지만 상업적이고 계산적인 멘트.

그러나 게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거대 길드의 장이 자신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단지 그게 중요한 거래 때문이라 해도 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귀하께서 보유하신 저 검둥이를 저희 길드에 팔지 않으시렵니까?"

최강현은 저쪽에 유저들에게 둘러싸인 블랙을 가리켰다.

놈의 활약을 유심히 지켜본 모양이다.

하긴 훨씬 작은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거대 골렘류를 능가하는 막강파워에 절벽을 기어오를 정도로 뛰어난 움직임을 가졌는데, 욕심이 생기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것 이다.

최강현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블랙을 팔 수는 없었다.

블랙은 그야말로 사기 유닛. 다시 만든다 해도 저것과 똑같은 놈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저 녀석은 비매품입니다. 대신 제가 블랙 아이언을 또 만들면 제일 먼저 최가장에 팔겠습니다."

"그럼 저걸 양산할 계획이란 말씀입니까?"

"지그 철공소에서 한창 준비 중이랍니다."

유한의 대답에 최강현을 포함 최가장 길드의 수뇌들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눈앞의 녀석과 같은 성능이라면 좋다. 하지만 양산품이 그리 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가치가 뛰어난 아이템이나 무구일수록 똑같이 만드는게 얼마나 힘든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냥 저 녀석을 파시면 안 됩니까?"

"하하, 그건 곤란합니다. 저건 시제품이라 재료도 희귀 한 게 들어갔고 공정 또한……."

"얼마를 부르시든 상관없습니다. 우린 저 녀석을 반드시 사고 싶습니다."

아이템으로 치면 유니크, 아니 그 이상이다.

그간 최강현은 해양 진출에 내내 매달려 있었지만, 그도 베레타-마노스 간의 전쟁을 여러 동영상을 통해 지켜 보았다.

그 전쟁에서 발군의 활약을 보인 것이 저런 거대 병기 였다.

그러나 대장장이 지그가 만든 저 블랙 아이언은 특별했다.

다른 거대 병기들보다 작음에도 힘은 더 강했고, 스피드와 기동성도 가공할 만한 수준이었다. 거기다 황금빛 기운을 뿜어내 소환귀를 소멸시키는 독특한 능력까지.

'저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해.'

백만 골드든 이백만 골드든 부르는 대로 쳐줄 생각이었다.

길드가 보유한 액수로 모자라면 현질을 해서라도, 아니 직접 당사자를 오프라인에서 만나 현금으로 찔러 줄 용의도 있었다.

그리나 그런 제의를 해도 유한은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다.

"안 판다니깐요. 저 녀석은 팔고 싶어도 팔 수가 없습니다."

"섬을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는 것보단 파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어쭈, 이것 봐라?'

최강현은 지금 은근히 협박을 해 오고 있었다.

확실히 그의 협박은 먹힐 만했다. 블랙이 이 섬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최가장이 보유한 범선이 있었기 때문.

만약 최가장에서 배를 내주지 않으면 블랙은 꼼짝없이 이 섬에 묶여 있어야 한다. 물론 싸워서 배를 빼앗을 수도 있지만, 유한은 항해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무했다.

"섭섭하게 해 드리진 않겠습니다. 충분한 값을 치를 테니……."

"뭐가 이리 시끄러워?"

최강현이 은근히 어르고 달래려 할 때 블랙이 다가왔다.

아까부터 몇몇 유저들이 성가시게 굴어서 그런지, 목소리가 다소 짜증스럽고 신경질적이었다.

홈칫!

랭커인 최강현과 스코필드를 제외한 최가장 일동은 자신들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4m가 넘는 강철 거구와 번득이는 붉은 는빛은 평범한 사람의 기를 죽여 놓기에 충분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이 사람들이 널 좀 사고 싶어 하잖아."

"나를 사겠다고?"

블랙의 붉은 눈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난 거절했는데 자꾸 조르는 거 있지? 저 사람들, 널 내 노예쯤으로 생긱하는 모양이야."

유한은 일부러 블랙의 속을 긁었다.

최강현이 협박만 하지 않았어도 그리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블랙은 노예라는 단어에 발끈했는지, 육중한 다리를 들더니 크게 바닥을 굴렀다.

쿠웅!

땅에 거미줄처럼 금이 가고, 주변 나무들의 이파리가 몽땅 떨어졌다. 엄청난 진동에 최가장 일동의 심장은 발바닥까지 떨어졌다가 튀어 올라왔다.

- 강력한 충격파를 맞았습니다.HP가 200떨어졌습니다.

  30초 동안 스턴 상태 유지됩니다.

저렙이었다면 단숨에 죽고 말았을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 당장 죽게 될 것 같았다. 블랙이 찍을 듯이 주먹을 치켜들었으니까.

랭커라도 과연 저 일격을 견뎌 낼 수 있을까?

"이놈들이 감히 날 뮐로 보고 그따위 망동을!"

블랙은 정말 기분이 나빴다.

한때 대륙을 제패했던 뇌제였던 만큼 그의 영혼은 긍지와 자부심이 드높았다. 그런데 이 눈앞의 비리비리해 보이는 인간들이 감히 자신을 노예 취급하다니!

그의 눈에서 살기가 뻗어나왔다.

"아니요! 오해입니다. 저희는 단지 당신을 닮은 양산형을 사겠다고 했을 뿐입니다."

위기의 순간, 최강현이 총알같이 변명을 내뱉었다. 스턴이 걸려 몸은 움직일 수 없지만, 다행히 입은 열렸다.

청해도에 있는 부하들을 동원하면 블랙 아이언과 저 대장장이 녀석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피해가 막심할 것이고 원하는 결과를 얻지도 못할 터.

좋게 해결하자 마음먹은 최강현의 변명이 통했는지, 블랙이 치켜든 주먹을 슬그머니 내렸다.

"정말이냐?"

"물론입니다! 서로 간의 의사 전달에 문제가 있었을 뿐입니다."

최강현은 재빨리 유한에게 애원의 눈빛을 보냈다.

더 이상 조르지 않을 테니 원만하게 넘어가자고.

'약삭빠른 녀석이군.'

유한은 재빨리 상황을 수습하는 최강현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아르페디아 10대 길드의 하나라지만, 최가장 길드의 역사는 다른 거대 길드에 비해 짧다. 최강현이 랭커로 그 이름을 드날린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섬 쟁탈전 이후의 조치도 그렇고, 아무래도 처세술이 뛰어난 인물인 듯했다.

이런 녀석과 완전히 등을 지게 되면 적장게 괴로올 터.

유한은 이 정도 선에서 그치고 화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들었나 봐."

"흠……."

블랙은 미심쩍인 눈빛으로 최강현을 보다가 등을 돌렸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최가장 일동에게 유한은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그럼 양산형 판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뉘 볼까요?"

그렇게 거래 이야기가 원만히 끝나자 유한은 은근술쩍 최강현에게 한 가지 물어보았다.

"그런데 은비 씨랑 댁은 어떤 사이입니까?"

도대체 어떤 관계이기에 그 초절정 인기 아이돌 스타를 이곳에 불러온다 운운한단 말인가.

그것은 유한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유저들의 공통된 관심사였다.

"그걸 내가 말해 줘야 하는 이유라도?"

"만약 당신이 거짓말을 한 거라면, 굉장히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테니까요."

근처에서 대화를 들었는지, 유저들이 잔똑 몰려와 있었다.

그들의 심상찮은 기세에 잠시 머뭇거리던 최강현은 사실을 실토했다.

"그게 실은 은비는 내 여친……."

순간, 옌스를 비롯한 수많은 남성 유저들이 최강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최가장 길드원들 역시 마찬가지.

"이 색히 거짓말하지 마라!"

"어디서 죽으려고 구라를!"

"아무리 길드장이라도 은비 누님을 모욕하는 건 용서 못해!"

퍽퍽퍽퍽!

분노와 질투에 눈먼 이들은 그 누구도 진실을 믿어 주지 않았다.

아니, 진실을 인정하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크아악! 왜 이래? 사실이라니깐!"

그날 최가장 길드는 하마터면 해체될 뻔했다

이틀 후, 청해도에 천사가 강림했다.

최가장 길드에서 약속한 대로 아이돌 은비가 정말 나타난 것이다.

비록 게임 내 바드 캐릭터의 모습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유저들은 만족하고 또 열광했다.

"여러분, 득템하시고 고렙되세요!"

섬의 개활지에 준비된 무대에서 은비가 라이브 공연을 시작하자, 섬에 있던 모든 남자 유저들이 개활지로 달려 왔다.

"우왕! 은비 누나 알라뷰!"

"好きです~!"

국적 불문하고 팬들은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여 주었다.

게임상의 이 라이브 공연으로 인해 최가장 길드의 명성은 더욱더 높아졌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유저들의 눈을 확 뜨게 하는 동영상이 공식 홈페이지와 각 공략 사이트에 올라왔다.

"폭풍 같은 스피드와 대지를 진동시키는 힘! 차세대 전장의 주인공은 이제 지그표 블랙 아이언입니다!"

동영상에서 아이돌 스타 은비가 블랙 아이언이라 불리는 강철 인형 병기의 위용을 소개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광고를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거기에는 게임 내의 뒷거래가 있었다.

유한은 최가장 길드에 판매할 블랙 아이언의 가격을 50% 깎아 주는 대신, 길드장과 연줄이 있는 은비의 광고 동영상 출현을 요쳥했다.

길드장 최강현은 난색을 보였지만, 블랙 아이언에 흥미를 보인 은비 쪽에서 흔쾌히 출연에 동의했다.

덕분에 유한은 땡전 한 푼 안 들이고 대한민국 최고의 아이돌인 은비를 섭외해 광고 동영상을 제작할 수 있었다. 은비의 매니저가 안다면 펄펄 뛸 일이겠지만. 유한은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굉장하다! 정말 굉장해!"

은비도 은비였지만, 유저들은 수십 수백의 적국을 날려 버리고, 거대 도깨비를 소멸시키고, 절벽까지 기어오르는 블랙 아이언의 성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식 홈페이지의 게시판에 광고 동영상을 본 유저들의 감평이 줄을 이었다.

-빌리안:여려분, 허위 광고에 주의합시다.

-막시무스:산다! 두 개 산다!

-yam:저리 강한 건 다 내 귀여운 여친 덕분.

-인민의별:빈익빈 부익부를 유발하는 게임은 반성하라!

-라스트모히칸:지그 이 ㅅㅂ색히야!

채린도 집에서 문제의 동영상을 보았다.

이미 블랙에 대해서 대강 알고 있던 그녀는 블랙의 성능보다 아이돌 스타 은비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가창력은 몰라도 외모나 몸매에선 은비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채린이었다.

은비에게 악감정은 없다.

문제는 제작자랍시고 동영상에 같이 출연한 유한이었다. 아이돌에게 관심도 없다는 녀석이 은비를 보고 헬렐렐하고 있었다.

직접 보고 나니 마음이 달라진 것인지?

아무튼 유한의 그런 모습을 보자니 채린은 뭔가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채린의 입이 주전자처럼 뛰어나올 쯤. 유한은 쏟아지는 쪽지를 보며 기쁨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수많은 유저들이 가격을 물어보고 있었고. 제법 이름있는 길드들도 판매를 요청해 왔다. 매입할 자금은 없는지, 길드전 때 잠깐 빌려 주면 안 되는지 부탁하는 이들도 있었다.

- 뭐 하는 거야! 볼일 다 마쳤으면 당장 돌아와! 지금 사람들이 철공소로 몰려와서 블랙 아이언을 만들어 달라고 난리란 말이야!

유한이 며칠 동안 섬에 뭉그적거리고 있자 철공소에 있는 리지스가 이런 쪽지를 보내 왔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안 봐도 비디오다.

그러나 유한은 바로 되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대신 자신이 돌아가는 즉시 조립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갈리에게 말해 블랙 아이언의 부품을 충분히 생산해 놓으라고 했다.

물론 추신으로 자신이 청해도에 남은 사정도 대강 밝혔다.

'이 섬엔 데보라가 찾던 뭔가가 있어. 그걸 찾고 떠나야 해.'

뭔지 모르지만, 남의 손에 넘겼다간 후회하게 될 것만 같았다.

더구나 그것은 현재 유한이 가진 신의 광물과 연관이 있었다. 대체 그게 무엇이기에 신의 광물을 정제한 스타레이가 필요하다고 했을까?

부지런히 섬을 돌아다니던 유한은 발걸음을 뚝 멈췄다.

천천히 그를 따라오던 블랙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근처에 적이나 몬스터의 낌새가 느껴지지 않는데 어째서?

"왜 그러는 거냐? 뭔가 발견한 거냐?"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아서."

"이상하다니 뭐가?"

유한은 눈앞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를 가리켰다.

"저걸 봐. 저건 추운 지방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침엽수야. 그리고 저건 열대 지방에 자생하는 바나나 나무고."

"흐음……."

그 말을 듣고서야 블랙도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전쟁한다고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 몰랐는데, 청해도에는 열대 지방에선 볼 수 없는 나무들이 드문드문 자라고 있었다.

'실수일까. 아님 의도적으로 꾸며 놓은 걸까.'

유한은 게임사가 무슨 뜻으로 이래 놓았을지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수일 확률은 적었다. 가상현실이라지만, 아르페디아 온라인은 첨단 기ㅏ술을 동원해 최대한 실감 나는 환경으로 꾸민 게임이 아닌가.

의도적이라면 왜 그렇게 했는지 조사를 해 봐야 한다.

수상한 것을 뒤지다 득템하는 게임이 바로 아르페디아 온라인이니까.

'만약 버그라면 그것도 나름 땡잡은 거야.'

버그를 신고하는 유저에게는 드림맥스의 포상이 뒤따른다. 물론 실수한 관계자는 괴로울 테지만 유한이 알바 아니다.

유한은 확실한 증거를 잡기 위해서 섬을 면밀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헉! 이봐, 후손! 저기 봐라, 바위가 움직인다!"

"거북이잖아."

커다란 육지 거북이 느릿느릿하게 숲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녀석은 사람을 보고도 도망가지 않고, 숲 속에 핀 꽃을 따먹으며 배를 채웠다.

유한은 육지 거북을 뒤로하고 계속 앞으로 나갔다.

그의 발걸음은 섬의 동쪽 해안 지대에 이르렀다. 검은 바위로 된 해안에는 수많은 동물과 몬스터들이 즐비했다.

개중에는 레벨 165의 코모도 도마뱁도 있었다.

아르페디아 남부의 밀림과 해안 지역에 등장하는 놈들인데, 독니를 가진 포악한 선공 몬스터였다.

"퀴이이이!"

"조심해라, 후손! 이놈들 무척 강하다!"

"아, 그럼 팔짱만 끼지 말고 도와주던가!"

유한은 공격해 오는 코모도 도마뱀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어찌나 비늘이 딱딱한지 검을 내려치니 맑은 쇳소리가 들릴 지경이다. 그러나 놈은 '생물' 이 분명하기에 암 브레이크 같은 스킬은 통하지 않았다.

"뒤져! 쇼크 웨이브!"

유한은 코모도 도마뱀을 두들기며 쇼크 웨이브 스킬을 썼다.

소리를 울릴 도구만 있으면 발동 가능한 공격 스킬 쇼크 웨이브.

끼이이이익!

귀를 찢어 버릴 것만 같은 소리가 퍼지자, 코모도 도마뱀들이 대혼란에 빠졌다. 아마 귓속의 신경 조직이 파괴되어 방향감을 상실한 모양.

유한은 그 틈을 노려 녀석들의 비늘 안쪽이나 눈, 주둥이 속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경험치 720을 얻었습니다.

-코모도의 비늘을 얻었습니다.

-레벨 160이 되었습니다.

 솜씨가 3 올랐습니다.

"헉헉, 에구 힘들어라."

5마리의 코모도 도마뱀을 쓰러트린 뒤에야 유한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때까지 블랙은 옆에서 팔짱을 낀채 지켜보고만 있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 왜 도와주지 않은 거야?"

"위험하면 도와주려고 했지. 그러나 잘 싸우더군."

'이런 불량 가디언 같으니라고!'

잠시 투털거리던 유한은 다시 한 번 해안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해안에는 유저들이 꽤 많았다. 최가장이 청해도를 완전히 장악하자, 아르페디아 대륙에서 적지 않은 유저들이 몰려온 것이다.

그들은 바위 해안 이곳저곳에서 사냥을 하거나, 귀여운 동물들을 먹이로 꾀어냈다.

"이리 와, 이리 와."

"아앙~ 너무 귀엽다!"

유한은 여성 유저들이 테이밍하고 있는 동물을 보았다.

하얗고 검은 뚱뚱한 몸통. 길쭉한 부리 앙증맞은 날개를 퍼덕이며 뒤뚱거리는 녀석은 바로 펭귄이었다.

"아니, 펭귄이 어째서 더운 지방에!"

펭귄은 북극이나 남극 같은 추운 곳에 사는 녀석이 아닌가.

경악하는 유한을 비웃기라도 하듯, 누군가의 말소리가 뒤따랐다.

"후훗, 뭘 모르는군. 펭귄은 더운데 살기도 한다고."

어느 틈에 따라왔는지, 뒤에 옌스가 서 있었다. 한 손엔 생선이 가득 든 양동이를 들고서.

"더운 데도 펭귄이 산다고?"

"못 믿겠거든 로그아웃하고 갈라파고스 펭귄이라고 검색해 봐. 갈라파고스 퓅귄은 더운 데서 살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버그는 아니란 뜻.

"근데 너도 펭귄 테이밍하러 왔냐?"

"그야 꽤 비싸게 거래되니까."

"여자애 꼬시려고 잡으려는 건 아니고?"

"……시꺼."

유한이 옌스를 무안 주고 있을 때, 블랙은 천천히 해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눈빛이 심각한 게 뭔가 고민하고 있는 듯.

그러다 그는손바닥에 주먹을 내리쳤다.

"알겠군. 이제야 알겠어. 왜 섬이 이모양인지!"

"왜 이런지 알겠다고?"

유한이 다가와 물었다.

블랙은 자신 있는 투로 말했다.

"이 섬에 알 수 없는 악의 세력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 놈들이 사술로 이 섬의 환경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다!"

"……."

정의의 용사답게 말하는 블랙에게 유한은 어떤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봐라, 저것이 증거다. 저런 괴상한 키메라를 본 적이 있나?"

블랙이 가리키는 것은 이구아나였다.

징그러운 생김새와 달리 온순하기 짝이 없는 녀석들은 물끄러미 블랙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무슨 죄가 있냐는 듯.

"시아한테 펭귄 선물하면 좋아할까?"

"이구아나를 선물해 보는 건 어때? 나름 귀여우니까."

유한과 옌스를 블랙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들의 냉정한 행동에 블랙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 내 말을 무시하는 거냐!"

유한은 블랙이 펄펄 뛰건 말건상관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근처 수풀 속에서 데보라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동쪽 해안에서 펭귄을 테이밍하는 데 성공한 유한 일행은 남쪽의 요새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쟁도 끝났고 펭귄도 손에 넣은 옌스는 더 이상 이 섬에서 볼 일이 없었다. 그는 아르페디아 대륙으로 돌아가기로 했고, 유한은 녀석을 배웅하기 위해 같이 남쪽 요새로 왔다.

청해도 남쪽의 요새는 원래 일본 요새였던 곳이다.

최가장이 접수한 뒤로 그 주변에는 시장과 선착장이 만들어졌다. 매일 아르페디아와 후소 대륙으로 떠나려는 유저들이 이곳에서 배를 탔다.

"블랙 녀석은 어디 간 거야?"

"몰라, 아까부터 안 보이던데."

악의 세력, 키메라를 운운할 때 무시했더니 단단히 삐져 버린 모양이다. 오면서부터 천천히 거리를 벌리더니 요새로 와서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하여간 별난 놈이라니까. 양산품은 그렇게 만들지 마라."

"나도 알아, 인마."

두 사람이 떠들면서 부두로 나왔을 때였다.

갑자기 사람들의 고함과 비명이 들려왔다. 모두들 바다에 떠 있는, 아니 가라앉고 있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저게 왜 저래?"

"몰라요. 갑자기 꽝 하고 기울어지더니……."

"아무튼 사람부터 구하고 봐!"

최가장 길드원들이 보트를 타고 선원들을 구조하러 갔다.

서두르긴 했지만, 모든 선원들을 구조하지는 못했다.

배 안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선원 유저들은 부활 포인트에서 투덜거리며 나타났다.

"어째서 멀쩡한 배가 침몰한 거야?"

소식을 듣고 부두에 달려온 최강현은 펄펄 뛰었다. 배1척 만드는 데 들어간 돈과 재료, 시간이 얼마던가?

침몰한 배의 선장이 자신이 목격한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갑자기 어뢰 같은게 물살을 가르며 와서 부딪쳤는데……."

"어뢰? 판타지 게임에 어뢰가 왜 나오나?"

"혹시 알아요? 다른 대륙에 비슷한 게 있는지."

아무튼 배가 가라앉은 덕분에 엔스를 비롯해 섬을 떠나 려던 유저들은 잠시 발이 묶이게 되었다.

최가장에선 서둘러 다른 배를 준비하였다.

그렇게 임시 정기선이 부두로 접근할 때였다. 뭔가 물살을 가르며 쏜살같이 다가왔다.

"벼, 변침하라!"

임시 정기선이 서둘러 방향을 틀었다. 가까스로 피해 냈지만, 배를 스쳐 간 그것은 방향을 틀더니 다시 다가와 부딪쳤다.

쿵!

배가 크게 들썩이더니 한쪽이 기울면서 가라앉기 시작 했다.

"선창이 침수 중입니다!"

"망할! 얼른 목수들 보내서 터진 곳을 막아!"

선장은 선원들을 향해 악을 썼다.

목수들은 부서진 부위를 수리하고, 선원들은 부지런히 물을 퍼냈다. 덕분에 임시 정기선은 가까스로 침몰은 면했다.

그러나 항해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봤어? 또 똑같은 일이벌어졌어."

선착장에 모여 있는 유저들이 웅성거렸다. 좀 전의 사고도 그렇고, 지금 사고도 자연 재해가 아닌 걸로 보였다.

"대채 이유가 뭐지?"

"바다 몬스터의 소행이 아닐까?"

사고 원인을 찾는다고 골몰하던 사이, 또 사고가 터졌다.

이번엔 후소 대륙에서 오던 무역선이 피해를 입었다. 유저 30여 명이 긴급히 구원을 받았지만, 배에 실린 아이템을 건지지는 못했다.

"사고 원인이 밝혀질 때까지 잠시 운항을 중단합니다."

최가장 길드의 이 같은 공고에 옌스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얼른 아르페디아 대륙으로 돌아가 팽권을 에이린에게 선물해주려고 했건만.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좀 전까지는 안 그랬잖아!"

"섬에 주인이 생기고 나서 뭔가 바뀐 거겠지."

유한은 필필 뛰는 옌스를 다독였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은 도미노와 같다. 게임의 시나리오가 하나 시작되면, 그 뒤에 이어진 시나리오들이 등장하고, 관련된 설정들이 등장한다.

섬에 주인이 생기자 이를 노리는 몬스터나 다른 세력이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아놔, 드림맥스 진짜 사람 환장하게 만드네!"

"니가 환장할 게 뭐 있냐? 배 잃은 최가장이나 아이템 날린 일본 유저들이라면 또 물라."

유한은 부두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어이, 바츠 어디가?"

"확인해 불 게 있어서."

만약 배를 공격한 놈들이 유저가 아닌 몬스터나 NPC 라면?

유한의 머릿속에는 유력한 후보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혹시 데보라가…….'

죽은 것으로만 알았던 데보라가 실은 죽지 않았다면?

유한은 부활한 그녀가 섬에 들어온 유저들에게 위해를 끼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녀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요새를 떠나 수직 동굴에 도착한 유한은 아래로 내려가 데보라의 은거지를 조사했다. 처음 발견했을 때와 달리 은거지는 아늑하고 따스했다, 그리고.

'데보라가 없다!'

그녀의 시신이 있던 자리는 물만 흥건할 뿐 텅 비어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역시 그녀가 살아났거나 누군가에 의해 옮겨졌다는 것.

일단 그녀의 흔적을 추적해야 했다.

유한이 다급히 수직 동굴을 빠져나오자 시커먼 얼굴이 불쑥 앞을 가로막았다.

"그 밑에 뭐가있어?"

"헉! 놀랬잖아, 인마!"

얼굴의 주인은 옌스였다. 이 스토커 기질이 있는 녀석 이 어느 틈에 또 따라온 모양이다.

"아, 미안. 근데 밑에 대체 뭐가 있는 거야? 보물이라도 숨겨져 있어?"

"물라. 그보다……."

적당히 대꾸해 주려던 유한은 근처 풀숲이 바스락거리 는 것을 보고 재빨리 검을 뽑아 들었다.

몬스터일까, 아님 근방을 지나는 유저일까.

그것도 아니면 동굴에서 사라진 데보라?

잔뜩 긴장하고 있던 유한은 시커먼 몸뚱이를 보고 맥을 탁풀었다.

블랙이었다.

뭘 하다 왔는지, 녀석의 몸뚱이는 기름 때로 번질번질 했다.

"너였나? 대체 어딜 그렇게 쏘다녔던 거야?"

그러나 여전히 뼈진 마음이 풀리지 않았는지, 블랙은 유한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않았다.

'전설의 뇌제 테라칸이었다는 놈이 원 속이 이리 좁아?'

유한이 구시렁거리건 말건, 녀석은 유한을 밀치고 옌스 쪽으로 쿵쿵 걸어갔다.

"왜? 나한테 볼일 있냐. 블랙?"

옌스를 노려보는 블랙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와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화를 내면 사방에 살기를 뻗치고 천지를 진동시키는 녀석인데, 지금은 그냥 싸늘하기만 하다.

가만히 블랙을 살펴보던 유한이 무얼 발견했는지 다급하게 소리쳤다.

"옌스, 얼른 피해!"

"뭐?"

"이 바보야 빨리 피하라니까!"

그러나 유한의 경고는 늦었다.

블랙이 번개같이 주먹을 후려치자. 옌스는 무지막지한 힘에 밀려서 수직 동굴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무리 랭커인 그라 해도 블랙이 전력으로 휘두른 주먹에 정통으로 맞고 떨어진 이상 죽거나 빈사 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이 자식이!"

유한의 강력한 암 브레이크에 블랙 아이언이 휘청했다.

유한은 쉴 틈을 주지 않고 녀석의 관절 틈을 노려 암 브레이크를 연달아 날렸다. 그가 이렇게 무자비하게 두들겨 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놈은 블랙이 아니잖아!'

갑자기 나타난 블랙 아이언은 블랙이 아니었다.

생긴 게 비슷해 블랙인 줄 알았는데, 동작이라든지 분위기가달랐다.

'제길, 좀 더 빨리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그가 연속으로 암 브래이크를 날릴 때 뒤에서 얼음장 같은 씨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법이구나,카웬의 후인(後A)."

말을 건넨 상대가 누군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번개같이 돌아서며 검을 던진 유한의 눈에 아름답고 살벌한 마녀 데보라의 얼굴이 보였다.

아쉽게도 그가 던진 검은 그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유한은 데보라의 수정 스태프가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환한 빛이 쏟아진다 싶더니,이내 짙은 암흑이 그를 둘러쌌다.

안간힘을 써 봤지만, 유한은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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