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블랙의 신위 (88/143)

chapter 02 블랙의 신위

블랙의 신위

척!척!척!

육중한 발소리와 함께 섬 중앙의 개활지에 한일 양측의 유저들이 모여들었다.

이전의 소규모 교전 때와는 다른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개활지에서 조금 떨어진 중립 지역에는 전투의 공정한 진행을 위해 드림맥스의 GM들이 나와 있었고, 한일 양국의 게임 전문 채널에서도 MC들을 파견했다.

이번 전투는 사상 최초의 국가 간 길드전이었고, 한일 전이라는 흥행요소도 있었다.

"응?"

막 녹화 준비를 하던 버추얼 에이지의 MC 이정민은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뒤쪽 숲 속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 그러십니까, 이정민 씨?" 

근처에 있던 GM의 물음에 이정민은 곧장 답했다. 

"숲 속에 원가 있는 것 같아서요. 혹시 유저들이 복병을 숨겨 둔 건 아닌지……." 

"하하핫,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쪽은 중립 지역입니다." 

항의나 기권같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중립 지역에 유저가 접근할 수 없다. 다가온 유저들도 GM의 허락이 있어야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저의 전투 포진은 불가능합니다. 뭔 가 있다면 그건 유저가 아닐 겁니다." 

"그럼 몬스터겠군요."

"뭐 그럴지도요. 하지만 우릴 공격하진 않을 겁니다.” 

이정민에게 그렇게 답해 준 GM은 뒤를 슬찍 돌아보며 씩 웃었다. 그는 지금 이 싸움을 지켜보는 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오늘 싸움으로 이 섬의 분쟁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일본 유저들을 이끌고 있는 오다는 맨 앞쪽에 서서 일장 연설을 했다.

그는 '다이묘’ 칭호를 가진 후소 대륙의 영주 유저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세력가였다. 거기다 가장 먼저 원양 항해에 도전했던 선구자이기도 했다.

이 무인도는 오다가 발견한 섬들 중에 제일 큰 섬이었다.

아르페디아 대륙 진출을 노리는 그는 중간 지점에 해당 이 섬을 반드시 점령하려 애썼다.

"이번에야말로 한국 녀석들에게 우리 오와리 번의, 그리고 후소의 힘을 보여 주자!"

"와아아!"

최가장과의 싸움을 위해 오다는 자신이 지배하는 번의 유저들은 물론, 동맹 관계의 번들과 고레벨의 유저들을 초청했다.

'큰 배가 더 많았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오다는 자신의 전력\을 모두 동원하지 못했다.

먼 항해가 가능한 배는 얼마 안 되었고, 그렇게 해서 실어 나를 수 있는 유저들에 한계가 있었던 탓이다.

그러나 그런 사정은 상대인 최가장도 마찬가지였고, 삼 천의 유저들도 나름 정예들이었기에 크게 아쉬울 것은 없었다.

"적들이 돌격해 오면 선두 진영은 물러선다. 이때 후방 의 부대들은 재빨리 좌우 측면으로 이동, 적을 포위한다." 

오다의 지시에 그의 가신 격인 유저 카타케는 머릿속에 전투상황을 그려나갔다.

"적을 끌어들인 뒤, 측면을 감싸 포위해 섬멸하는 작전 인겁니까?"

"우리 쪽의 숫자가 많으니 가능한 전법이지, 흐흐흐." 

오디는 승리를확신하고있었다. 

처음엔 최가장이 아르페디아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대 길드라는 이야기를 듣고 신중하게 대응했다.

그러나 몇 번 교전해 본 결과. 상대가 개인 능력은 뛰어 나지만 집단전 능력은 자기네보다 떨어지는 수준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아르페디아와 후소의 문화적, 시스템적인 차이 때문이다.

모힘과 탐험이 중요시되는 아르페디아 대륙과 달리, 일본의 전국시대를 고스란히 옮긴 듯한 후소 대륙은 각 번국 간의 전투와 약탈이 빈번했다.

밤낮으로 전쟁을 즐기는 일본 유저들 쪽이 집단전 능력 이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 녀석들 개개인의 레벨이 높다 해도 이기는 건 우리 일본 유저들이다."

오다가 생각하는 일본 유저들은 흙이고, 한국 유저들은 모래였다.

흙은 뭉쳐서 도자기처럼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모래는 아무리 뭉치려 해도 몽쳐지지 않는다.

뭉쳐지지 않는 모래를 뿌려 봤자 도자기는 깨지지 않는다.

"하지만 적이 궁수와 마법사들올 대거 증원했다는 소문입니다. 우리 쪽 피해가 만만찮을 겁니다." 

"걱정 마라. 거기에 대해서도 손을 써 놓았으니까."

"손을 쓰다니요?"

카타케의 물음에 오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좀 이따 보면 알 것이다." 

오다는 승리를 99% 확신했다. 

그만큼 그의 준비는 철저했다. 

다만 1% 찝찝한 일이 하나 있다면…….

"좀 전에 실종된 수색대는 아직도 연락이 없나?"

"녀석들과 친분이 있는 놈들의 말로는 메신저에서도 사라졌답니다. 아무래도 로그아웃을 한 모양입니다."

대전투를 앞에 두고 로그아웃을 한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오다가 아는 히로시는 그런 녀석이 아니었다. 실력이 높진 않지만, 번에 대한 충성심과 의욕만은 랭커 못지않았다. 

혹시 대전투를 앞두고 한국 녀석들이 수작을 벌인 것은 아닌지?

그러나 그런 생각에도 무리가 있다. 

분명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오다는 거기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적과의 전투에 집중할 시간이다. 

"자. 오너라! 모래들아!"

오다의 호기 있는 외침이 한국 진영까지 울려 퍼졌다.

"저 바퀴벌레 대장이 뭐라는 거야?" 

한국 유저들은 일본 유저들을 바퀴벌레라 불렀다. 

투구의 뿔과 여러 가지 장식이 달린 일본 전통의 갑옷이 멀리서 볼 때 마치 바퀴벌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뭐라고 했는지는 나중에 잡아 놓고 물어보죠." 

이렇게 말한 것은 유한이었다.

적이 3배가 넘었지만. 아무도 유한의 말올 얼토당토않게 여기지 않았다.

쪽수에서 뒤지고, 획기적인 작전도 없었지만, 한국 유저들의 사기는 드높았다. 아무도 패배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흐흐흐, 이기면 은비를 본다!" 

"완소 은비 누님! 완소 은비 누님!" 

"내가 일등으로 싸인 받아야지!"

최가장이 던진 떡밥은 대단했다.

유저들은 사기가 드높다 못해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침까지 질질 흘리고 있었다

-마치 사악한 마법에 걸린 악의 군단 같구나.

수풀 속에 대기해 있던 블랙은 한국 유저들의 상태를 살피다가 유한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여봐라, 후손. 혹시 사악한 건 너의들 쪽이 아니나?

-무슨 소리! 나쁜 건 저기 일본 놈들이야.

-그다지 나빠 보이지 않는걸?

진영이 잘 정돈된 것을 보니 군율이 엄하고 훈련이 잘된 것 같았다. 거기다 잔뜩 흥분한 이쪽에 비해 차분하기 그지없다.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기야. 저놈들은 남의 섬을 제 거 라고 우기는 놈들이라고.

_흐음…….

-더구나 놈들이 섬만 뺏고 말까? 나중엔 아르페디아 대륙까지 집어삼키러 올걸?

지금 유한은 그저 현실에 비춰 말했을 뿐이다.

허나 아르페디아를 노린다는 그의 말은 블랙의 마음을 바로잡기에 충분했다.

-으음, 바다로부터 오는 침략자들이란 말이나? 그럼 절대 용서 할수없지!

때마침 공격을 준비하라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로이 보강된 신관들이 선두의 유저들에게 아낌없이 버프를 퍼부어 주었고, 마법사들은 주문을 외우며 공격 마법을 준비했다.

궁수들은 미리 화살을 자신의 발 앞에 꽂아 두었고, 선두의 기사와 전사들은 창칼을 움켜쥐고 돌격 명령을 기다렸다.

"전군 돌격하라!"

"우와아아아!"

길드장 최강현의 명령에 한국 유저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적진으로 돌격했다. 성난 들소같이 돌진하는 그들의 기세는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었다.

"모래들이 날아오는군. 장창 부대 앞으로!"

오다의 명령에 긴 창을 든 창술가들이 전면에 나섰다.

그러자 한국 진영 후방에서 날아온 마법과 화살들이 그들에게 떨어졌다.

일본 유저들은 당황하지 않고, 뒤에 있던 유저가 쓰러진 자의 빈자리를 메워 나갔다. 그리고 음양술사들이 주술을 외워 부상자를 치유하고 적의 마법을 중화시켰다.

"발사!”

명령이 떨어지자 후방의 궁술가들이 돌격하는 한국 유저들에게 화살을 퍼부어 댔다.

수많은 한국 유저들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지만, 그들은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발악하듯이 함성을 지르며 일본 진영을 향하여 달려갔다.

"몽땅 다 죽여 없애!"

"완소 은비 누님을 위하여!"

진정 버서커가 따로 없었다.

일본 진영 선두에 선 창술가들과 거세게 달려 들어온 한국 유저들이 격돌했다. 

쿵! 과작!

양측 유저들이 충돌하며 방패와 창, 갑옷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먼저 밀리면 지는 힘과 힘의 대결이었다.

잠시 팽팽하게 전투가 벌어지더니 일본 유저들이 슬슬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이에 힘을 얻은 한국 유저들이 더욱 강하게 밀고 들어 갔다.

"이때다! 청색 깃발을 올려라!" 오다의 명령에 기수를 맡은 창술가가 청색 깃발을 흔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한국 진영에서 쏟아지던 화살과 마법 공격의 일부가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크악! 어째서?"

"빌어먹을 자식들아! 아군한테 쏘면 어떻게 해!"

지원 공격의 일부가 돌격하는 한국 유저들의 등 뒤로 떨어졌다.

일부였다고 하지만 한국 유저들은 크게 당황했다. 모든 신경을 앞에 있는 적에게 기율이고 있는 마당에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으니!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최가장 소속의 마법사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좀 전에 한국 유저의 등판에 희살을 날린 궁수 유저가 피식 웃었다.

"아, 미안. 손이 미끄러져서……."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병신, 보고도 몰라? 지금 우린 배신 때린 거야, 배신!"

"크아악! 이놈들 당장 다 죽여 버려!"

한국 진영 후방에서 말다틈이 시작되더니 곧 궁수와 마 법사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한국 측의 공격은 전후방을 통틀어 무뎌지고 말았다. 그 틈을 타서 일본 진영 후방의 사무라이들과 궁술가들이 측면으로 이동했다.

"아니, 대체 어째서?"

카타케는 한국 측이 동족상잔을 벌이는 상황올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마치 광전사가 된 듯 밀어붙였는데, 갑자기 내분이라니!

오다를 바라보자 그는 이 상황을 예상, 아니 준비해 두었다는 듯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며칠 전에 한국 쪽 공략 사이트와 게임 카페들을 뒤지며 최가장과 경쟁 관계인 길드들을 조사했지. 그리고……."

오다는 그 길드장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최가장을 치는 데 협력해 주면 보상을 하겠다고 말이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네 길드원들의 부캐를 최가장의 지원병으로 보냈다. 그리고 미리 약조한 대로 청색 깃발이 올라오자 이반 행위를 시작한 것이다. "밀어붙여라! 한국 녀석들은 이제 모조리 전멸이다."

오다는 쓰러지는 한국 유저들을 보며 쾌재를 불렀다.

상황은 작전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한국 측의 예봉은 꺾였고, 돌격해 온 기사와 전사들은 우왕좌왕 혼란에 빠졌다.

이제 측면에서의포위가 완성되면 독 안에 든 쥐처럼 한국 유저들을 사냥할 수 있을 것이다.

"크하하핫! 이제 이 섬은 우리 오와리 번의 것이 될 것 이다!"

[아아,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갑자기 한국 유저들이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한 몸으로 뭉쳐 싸워도 이길까 말까 할 전투를 내분으로 망쳐 놓았습니다!]

중립 지역에서 이정민이 마이크에 침을 뒤겨 가며 고함을 질렀다. 사이버 캐릭터 미루도 옆에서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이대로 "가면 한국 측의 패배가 확실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보았을까? 미루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 그런데, 이정민 씨. 저건 뭐죠?]

[뭐 말입니까?]

[저기 수풀 속에서 갑자기 등장한…….]

일본 유저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날 것 같던 상황이 갑자기 돌변했다. 한국 진영의 뒤에 있던 수풀에서 거대한 존재가 일어나더니 전쟁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새, 새로 나온 거대 병기일까요?]

[최가장이 이런 거대 병기를 보유했다는 말은 못 들었는 데요.]

최근 들어 몇몇 길드와 대장장이들이 거대 병기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가장에서 거대 병기를 만들었다는 말은 없었다.

미루와 이정민이 블랙의 정체에 대해 의논을 나누는 사이, 일본 유저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았다.

"으악! 저게 뭐냐!”

"괴, 괴물이다!"

블랙이 팔을 휘두르자 선두에 있던 칭술가들이 하늘로 날려 갔다. 볼링공에 맞은 핀처럼 사방으로 튕겨 날아가는 그들의 모습에 오다와 여러 부장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건 도대체?"

블랙은 손에 든 통나무를 사정없이 휘두르며 일본 진영을 짓이겨 나갔다.

"감히 아르페디아를 침공하려 들다니! 한 놈도 용서치 않겠다!"

"와아!"

블랙의 가세에 한국 유저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자세한 정체는 몰랐지만, 지난 베레타-마노스 전쟁 때 쓰였던 거대 병기의 일종일 것이라 생각했다.

적이라면 몰라도 아군으로서 일본 진영을 다져 주는데 이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

"여러분, 이땝니다! 다시 밀어붙여요!"

"전투는 이제부터라고!"

블랙과 함께 달려온 유한과 옌스가 유저들을 독려했다.

유한은 한국 측이 불리해질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한국 측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던 건 의외지만, 오히려 그런 위기 상황이 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블랙의 막강할 위력을 선보일 기회가!

"가자! 저게 우리 편이면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

"하마터면 은비 누나 못 보는 줄 알았네."

한국 유저들은 모두 블랙의 뒤를 따르며 열심히 창칼을 휘둘렀다.

덕분에 일본 진영 중앙부는 완전히 짓밟혔고. 측면에서의 포위도 중단되었다. 잘못하다가는 부대가 양분될 판이기 때문이다.

반란도 진압되었는지, 한국 측의 혼란도 많이 가라앉았다.

애초에 이반을 획책한 녀석들은 숫자가 적은 데다 부캐라 레벨도 낮았다.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진압이 어렵진 않았다.

물론 그 '약간의 시간' 을 일본 측은 기회로 잡지 못했다.

다 저기 날뛰는 시커먼 괴물 때문이다.

"막아! 저 괴물 딱지를 쓰러트려라!"

오다의 명령에 백여 명의 창술가와 사무라이들이 블랙에게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어딜 감히!"

쿵!

적군이 개미 떼처럼 몰려오자, 블랙은 크게 발을 굴렀다.

- 충격에 빠졌습니다. 30초간 몸올 움직일 수 없습니다.

스턴 상태에 빠져 꼼짝달싹도 못하는 일본 유저들의 머리 위로 통나무가 날아들었다. 블랙은 마치 추수라도 하는 것처럼 일본 유저들을 사정없이 쓰러트렸다.

치고 밟고 날려 버리는 것이 완전 블랙의 독무대였다. 

"이것은 예상에 없던 것인데!"

오다는 한국 측에 저런 막강한 병기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위용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마치 양 떼에 뛰어든 사자처럼 보였다.

후소 대륙에도 덩치가 큰 나무 인형이나 쇠 인형이 있었지만, 저 정도의 위력은 갖고 있지 않았다.

'모래 속에 차돌이 들어있었구나!'

그 차돌이 도자기 같은 일본 진영을 두들겨 부수고 있었다.

덕분에 계획했던 포위 섬멸전이 소용없게 되었다.

진영은 전방부터 빠르게 분쇄되고 있었고,

한국 유저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전투를 난전 상태로 몰아갔다.

이렇게 되니 전세는 자연히 한국 쪽으로 기울어졌다.

"저걸 쓰러트릴 방안이 없나?"

오다가 날뛰는 블랙을 바라보며 말하자, 카타케가 서둘러 방법을 제시했다.

"음양사 나루토가 '그것’을 소환한다면……."

나루토는 후소 대륙의 음양사들 중에서도 소환 스킬이 1랭크에 이른 고수다. 그는 오와리 번의 음양사 전단장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음양사 나루토의 그것이 무엇임을 잘 아는 오다 는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그건안돼."

"그 수밖에 없습니다! 이대로 있다간 패배하고 밥니 다!"

패배라는 단어가 언급되자 오다의 마음도 흔들렸다.

예상외의 전력이 나타났다지만,상대보다 3배나 많은 군세를 가지고도 지면 이만저만 망신이 아니다.

후소 대륙의 경쟁자들이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비웃을 것이다.

'하긴, 진영도 다 깨져 버렸으니까.'

아군의 피해가 걱정되지만 일단 승리를 챙기는 것이 먼저다.

그리 생각한 오다는 카타캐의 방안을 받아들였다.

"알겠다, 나루토에게 얼른 소환하라 이르도록."

"크크크, 역시 강하다니까."

전투 지역에 달려온 유한은 연방 블랙의 곁을 맴돌았다.

그는 지금 기능창의 영상 녹화를 이용해 블랙의 활약을 동영상 파일로 저장하고 있었다.

이렇게 저장한 동영상을 공식 홈페이지나 공략 사이트에 올려 블랙 아이언의 위력을 선전할 생각이다.

물론 목적은 원활한 판매를 위해서다.

그래서 유한은 블랙의 활약을 빼놓지 않고 담았다.

일본 유저들을 쓸어버리는 모습과 화살에 맞아도 고떡 없는 모습, 그리고 일본 측 음양사가 외뿔의 거대한 붉은 귀신을 소환하는 모습까지.

"헉! 저 자식들 저런 게있었나?"

유한은 촬영을 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도깨비같이 생긴 녀석은 대체 무엇인지?

그는 몰랐지만, 저 도깨비는 후소 대륙의 '오니' 라는 소환귀였다. 일반적인 소환귀와 달리, 오니는 음양사의 레벨이 높을수록 덩치도 크고 전투력도 강해지는 '발전 형' 타입이었다.

지금 오니의 크기는 블랙보다 더 커 보였다.

아무튼 이 거대한 덩치의 오니가 소환되자, 근처에 있던 일본 유저들은 기겁을 하고 물리섰다.

"도망쳐! 휘말리면 죽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창 전투 중에 저걸 불러내다니……."

강력한 힘을 가진 오니였지만, 일단 전투에 들어가면 적이건 아군이건 가리지 않고 쓸어버린다.

그만큼 녀석은 흉폭한 소환귀였다.

"흥, 감히 잡귀 따위로 짐을 막겠다고?"

블랙은 들고 있던 통나무를 오니에게 던졌다.

오니는 날아오던 통나무를 주먹으로 후려쳐 다른 곳으로 날려 보냈다. 덕분에 애꿎은 일본 유저 수십 명이 통나무에 얻어맞고 장렬히 전사했다.

'헉, 엄청 세다!’

유한이 보니 저 도깨비는 단순한 잡귀 같지 않았다.

힘도 센 데다가 블랙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클 정도로 체격도 좋았다. 거기다 뿔과 송곳니가 날카로운 면상은 무척 무시무시하게 생겼다.

덕분에 정체는 몰라도 한국 유저들도 슬금슬금 물러서고 있었다.

"캬오오오오!"

오니가 괴성을 지르며 블랙에게 달려들었다.

블랙은 오니가 거세게 휘두르는 주먹올 쳐 내며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뒤이어 블랙의 펀치와 킥이 오니에게 연달아 쏟아졌다.

"오오, 역시!"

유한은 쾌재를 불렀다.

힘과 덩치는 몰라도 싸움 실력은 블랙이 한 수 위였다.

그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현재 블랙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전설 속의 뇌제 테리칸이 아닌가.

아르페디아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영웅답게 테리칸의 무예는 현란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오니도 만만하지 않았다. 녀석은 얻어맞으면서도 어깨를 들이밀어 블랙을 밀었다. 기술이 안 되니 힘으로 상대하겠다는 심산.

쿠당탕!

뒤로 넘어진 블랙은 벌떡 일어나 눈을 부라렸다.

"이놈, 감히 짐에게 흙먼지를 마시게 했겠다!"

오니가 달려들자, 블랙은 피하지 않고 녀석의 두 팔을 잡았다. 그리고 곧장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뿌드득! 카카카캉!

블랙의 관절에서 위힘한 소리들이 연달아 들렸다.

유한은 저러다 블랙이 부서지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한 수 위의 체격만큼이나 오니는 강해 보였다.

그런데 블랙이 오니에게 밀린다 싶던 바로 그때,

"하앗! 카이저 소울(Kaiser SoulM)!"

기합을 토하는 블랙의 눈이 번득인다 싶더니, 그의 몸 에서 강렬한 황금빛 기운이 퍼져 나왔다. 테라칸 황제의 혼이 블랙 아이언에 깃들 때 보였던 바로 그 빛이었다.

"크아아아아!"

강렬한 황금빛 기운에 오니의 몸이 녹아내렸다.

양초처럼 녹아내리던 오니는 황금빛 기운이 맴도는 블랙의 주먹을 맞고 완전히 소멸했다.

"우와아이아!"

"이럴수가!"

환호하는 한국 유저들과 반대로 일본 유저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나름 상황을 역전시켜 줄 거라 생각했던 존재가 저리 허무하게 당하고 말다니.

"후퇴하라!전군 후퇴하라!"

최후의 카드조차 실패로 끝나자 오다는 퇴각명령을 내렸다.

허둥지둥 달아나는 일본 유저들을 보며 한국 유저들은 연방 만세를 불렀다. 승리의 최대 공신인 블랙은 그들 가운데 서서 늠름한 자태를 마음껏 뽐냈다.

"놀랍군. 놀라워."

중립 지역 뒤쪽의 숲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데보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연방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설계한 블랙 아이언을 다른 이가 지니고 있을 줄이야.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렇게 될 만도 했다. 카웬에게 지고 나서 몸을 피하고 옮겨 다니느라 제대로 수습을 못한 자료가 있었으니까.

타인이 자신의 분실물을 수거해서 제작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블랙 아인언이 가진 힘이다.

지금 전장에 나타난 저 블랙 아이언은 자신이 만든 블랙 아이언들보다 배는 강력한 힘을 자랑했고, 깃들어 있는 혼령도 범상치 않았다.

어떻게 저런 것이 가능했을까.

그것도 의문이지만, 데보라로서는 한 가지 더 의문스러운 것이 있었다.

"저 블랙 아이언의 주인이 신의 광물올 가지고 있다?"

데보라는 블랙 아이언의 이상 여부를 살피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복장으로 보아하니 대장장이 같았다.

그 소년은 바로 유한이었다.

그녀가 유한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이유는 손에 들고 있는 운석 탐지기 때문이다.

인챈트 된 수정과 자석, 복잡한 기계장치로 만들어진 이 탐지기는 고대 미케니아 마도사들이 제작한 것이었다. 데보라가 공중 요새에서 여러 가지 지식과 함께 홈쳐 낸 아티펙트 중의 하나였다.

손바닥만 한 탐지기는 근방에 운석이 있으면 작은 진동 과 함께 수정에 운석의 위치가 비춰지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수정은 유한민을 계속 비추고 있었다.

"계획을 바꿔야겠군."

원래는 혼란스러운 틈을 타 섬을 빠져나가 신의 광물올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신의 광물이 섬에 있다면 굳이 섬을 떠날 필요는 없다.

동면의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300년 정도 뒤에야 운석이 하나 떨어질 것이란 계산이 나와서 그리 했던 것이 아닌가.

일단 목표는 신의 광물을 얻고 거기서 스타레이를 정제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이 섬에 있는 유적을 통해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

원하던 열망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데보라가 스타레이를 탈취하기 위해 나서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수풀이 갈라지더니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넌 누구냐!"

데보라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상대가 일전에 자신을 적대시한 일본 수색대와 한편이 아닌가 의심했다.

"후후후! 지금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되지."

"무슨 소리냐?"

상대방의 느긋한 목소리에 왠지 데보라는 기분이 나빠 졌다.

마법 한 방이면 간단히 죽여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약해 보였는데, 왠지 그를 거역해선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나가 뵈야 사기가 오른 유저들의 경험치만 채워 줄뿐이다. 나중에 충분히 준비해서 오너라."

"건방진!"

데보라는 상대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 기분이 무척 나빠졌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 목을 비틀어 버리려고 했다.

마법사 같아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기나 방어구를 착용한 것도 아니다. 맨손으로도 쉽게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이, 이익!"

필사적으로 육체에 명령을 내려 보았지만, 그녀의 몸은 전혀 따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걸 보았는지 상대는 피식 웃었다.

"넌 절대 날 거역할 수 없다. 그러니 돌아가라."

상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성스런 빛을 본 순간, 데보라는 자신의 적의가 눈 녹듯이 사라짐을 느꼈다.

자신의 마음까지 바꿔 버리는 절대적인 존재.

데보라는 그의 앞에서 머뭇거리다 발걸음을 돌렸다. 감히 겨룰 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 서둘러서 좋을 건 없어.'

자신이 만든 블랙 아이언보다 강력한 블랙 아이언을 소유한 녀석이다. 정면 승부를 벌이려다가 자칫 낭패를 당하는 것은 이쪽일 터.

그녀는 일단 거리를 두며 틈을 노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그래야 사건이 더 재밌어지지."

데보라가 수풀 속으로 사라지자 사내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바로 GM으로 분장한 손석진이었다.

참패를 당하고 후퇴한 일본 측은 전열을 재정비했다.

오다는 병력을 재편하고 새로 작전을 짜서 반격을 도모할 계획이었지만.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아니. 왜 이리 많이 줄어든 거야?"

병력이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게임이니 진짜 죽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활 포인트에서 되살아난 유저들의 상당수가 복귀하지 않았다. 그나마 죽지 않고 생존한 유저들도 하나 둘 이탈하고 있었다.

"우리 번은 이 싸움에서 빠질랍니다"

동맹 관계인 작은 번의 영주가 이탈을 선언하자 오다는 펄적 뛰었다.

"뭐라고? 이유가 뭐요?"

"뭐긴 뭐겠습니까. 오니도 못 쓰러트리는 괴물이랑 어떻게 싸웁니까?"

원인은 그것이었다.

블랙 때문에 상당수 일본 유저들이 전의를 상실했다.

상대가 블랙이 아닌, 평범한 블랙 아이언이었다면, 그들도 그렇게까지 기가 꺽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블랙은 블랙 아이언의 탈을 쓴 테라칸 황제다.

그 자체의 무력도 대단하지만 생전 테라칸 황제가 구사하던 몇 가지 스킬도 사용할 수 있었다.

"이건 완전 괴물이잖아!"

몇몇 유저들이 '드림맥스가 한국에만 좋은 걸 줬다' 며 분통을 터트렸지만, 단지 그뿐. 그 분노가 전의로 이어지 지는 않았다. 오히려 저런 상대와 싸우길 거부하고 있었다.

"한심하긴! 강한 만큼 쓰러트릴 가치가 있다는 걸 모르니?"

오다와 그의 부장인 카타케는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고 애썼다.

"아, 그러니까 뭘로 쓰러트리냐고요?"

"이가 없으면 잇몸. 불타는 정신력으로……."

"이게 무슨 태평양 전쟁이냐? 죽창으로 탱크에 돌격하게. 너 극우 히키코모리지?"

설득은 쉽지 않았다.

오다의 오와리 빈에 소속된 유저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일본 유저들이 이탈을 선언했다.

이 같은 그들의 태도에 오다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절대로 이탈은 용납 못해! 우리 오와리 번을 배신하는 놈들에겐 절대 배를 내주지 마라!"

모두들 오와리 번의 배를 타고 이 섬에 왔다.

아무리 게임이라도 걸어서 바다를 건너갈 방법 같은 건 없다. 오다는 그리 생각하고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그러나…….

"멋대로 하슈. 아저씨. 배가 어디 오와리 번에만 있나."

"뭐라고? 네놈들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

"한국 진영으로."

"커억!"

항복한다며 이탈하는 놈들을 보자니, 오다는 혈압이 올라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한 번 깨진 항아리를 복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일본 유저들은 강자의 편에 서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야 자신이 편하고, 전투에서 경험치와 아이템을 잃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젠 어떻게 하지요?"

카타케의 말에 오디는 남아 있는 자기 번의 유저을 살펴보았다. 오와리 번 유저들은 대다수가 그대로 남았다. 번의 영주를 배신하면 명성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 시스템 덕분에 이탈이 적었다.

"이 인원으로 야전을 치루는 것은 무리다. 그러니 일단은 성으로 돌아간다."

오다는 수성전으로 버티면서 본토의 증원군을 기다리기로 했다.

자신은 후소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다이묘.

더 많은 중원군과 고래벨 유저들올 끌어올 재력은 충분 했다. 현실에 실제 존재하는 '오와리 그룹’으로부터 자금 지원도 받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 참패하여 오와리의 명성이 떨어지면 그 자금 지원은 위힘해진다.

그럼 게임은 물론이고 실생활에도 애로 사항이 꽃핀다.

"서둘러라! 언제 한국 놈들이 올지 모른다!"

전투 종료 후, 개활지에 진을 친 최가장 길드는 배신자들의 색출에 나섰다.

한참 배신자들을 골라내고 있는데 또 다른 일이 생겼다.

갑자기 적진에서 투항병들이 몰려온 것이다. 간혹 한두명씩 항복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렇게 떼로 항복해 오는 경우는 전무했다.

그래서 몰려오는 투항병을 선별하고 관리하느라, 일본측 본거지에 대한 공격은 다소 늦춰지게 되었다.

"저 녀석들 가짜로 항복하고 뒤통수치려는 거 아냐?"

옌스는 또 한 무리의 일본 유저들이 백기를 흔들며 오는 것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천성적으로 배신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는 죄다 박살내면 그만이지."

유한은 별문제 없다는 투로 말했다.

적을 압도하는 병기가 있는데, 그런 일을 왜 걱정한단 말인가.

물론 그 병기를 관리하는 것을 게을리 해선 안 된다.

유한은 블랙을 눕혀 놓고 각 부분을 세심하게 점검했다. 오니와 싸우면서 뭔가 고장이 나지 않았나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これが 馬巨人!"

"すごい!"

뭔가 시끄럽다 싶어서 주변을 둘러봤더니, 투항한 일본 유저들이 잔똑 몰려와 떠들고 있었다.

자신들올 패퇴시킨 존재가 무척이나 신기하게 보인 모양.

"저리 가! 다들 꺼져! 이건 일급 기밀 병기란 말이다!"

유한이 손을 휘휘 저으며 일본 유저들을 쫓아냈다. 그러나 물러나려는 이들은 적었고, 슬쩍 유한을 피해 블랙을 만져 보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눋이 감히 짐의 육체를!"

블랙이 일어나자 일본 유저들은 도망을 쳤다.

뒤늦게 달려온 최가장 길드원들은 남은 일본 유저들올 해산시키고 주변을 통제했다.

"상태가 어떻습니까?"

길드원들을 이끌고 온 외국인이 유한에게 말을 건넸다.

백금발에 파란 눈이 인상적이었다.

"당신은……."

"워터 워리어스(Water Warriors) 기사단장인 스코필드요."

"아!"

유한도 스코필드에 대해서 대강 알고 있었다.

그는 꽤 유명한 외국인 유저였다. 의국 서버가 통합되기 전에 한국에서 게임을 시작해서 랭커 78순위에 오른 실력자였다.

한국에 사는 사람답게 한국어도 무척 유창했다.

"어딘가 크게 고장 난 건 아니겠지요?"

아직 큰 싸음이 한 번 더 남아 있는 최가장 길드는 블랙의 상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블랙이 소문의 골렘 병기들보다 작아서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방금 전의 엄청난 활약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괜찮아요. 저도 염려되서 살펴봤지만, 그리 크게 고장 난 건 없더군요. 그저 관절에 톱니바퀴 몇 개가 어긋난 정도?"

"다행이군요. 그리고 말입니다……."

스코필드가 은근한 투로 뭔가 말하려 하자 유한이 그의 말을 막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거래 이야긴 싸음을 끝내고 천천히 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스코필드도 유한의 태도에 만족했다.

혹시 판매 의사가 없으면 어쩌나 우려했지만, 다행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럼 내일 전투가 끝난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유한이나 최가장이나 일단 서로의 의사를 안 것에서 끝냈다.

스코필드가 돌아가자 유한은 데보라의 은거지에서 노획한 블랙 아이언의 부품들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짐마차도 소환해 짐칸에 든 고로에 불을 지폈다.

"어이, 바츠. 지금뭐하는거야"

옌스가 다가와 물었다.

실은 블랙이 보기와 달리 크게 고장 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옌스의 우려와 달리 블랙의 상태가 심각해서 유한이 팔을 걷어붙인 건 아니었다.

"내일 전투 좀 날로 먹어 보려고."

"뭐어?"

유한의 계획을 모르는 옌스로서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대체 바츠 녀석이 무슨 꿍꿍이인지?

섬의 남쪽에 있는 일본 측 근거지는 방어가 매우 견고 했다.

성벽은 이중, 두꺼운 성문 앞에는 돌격을 저지할 목적 의 목책들이 잔뜩 들어서 있었다. 거기다 중앙의 천수각과 망루들은 적진을 살피거나 활을 쏘기에 무척 유리해 보였다.

"성도 잘 지었지만. 부지부터가 명당이네."

유한은 성이 자리 잡은 돌산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해안 가까이의 돌산은 성문이 위치한 북쪽을 제외하고 모든 곳이 높고 가파른 절벽이었다.

점령이 불가능하진 않지만,공격 측도 피해가 상당히 클 것 같았다.

"공격하라! 돌격 부대 앞으로!"

"발리스타 발사 준비! 발사!"

명령이 떨어지자, 전사와 기사 유저들이 방패와 사다리를 들고 성문으로 달려갔다. 용감히 달려드는 그들에게로 일본 유저들이 화살을 날렸고, 한국 진영에서도 엄호 사격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공격! 공격!"

기사들이 방패로 회살을 막는 사이. 전사들은 성문에 도끼를 투척했다. 그러자 그들의 뒤를 따르던 도적 유저들이 날렵하게 내달리며 성문에 박힌 도끼를 밟고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오, 작전 좋은데!"

유한은 성벽 위에 을라간 도적들이 암기를 던지며 성문을 장악하려 드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도적들 틈에는 닌자 유저들도 있었다. 기사들과 전사들 틈에도 창술가와 사무라이들이 섞여 공격에 힘을 보태 주었다.

바로 어제 최가장 측에 투항했던 일본 유저들이었다.

"이 배신자놈들아!"

천수각 위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오다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한국 놈들에게 항복한 것도 모자라 아예 칼을 이쪽으로 겨눌줄이야.

강한 편에 붙어 손해 본 경험치와 아이템올 충당하자는 수작이겠지만 좀 너무하지 않는가.

"성문 쪽에 병력을 집중시켜라! 어서!"

이미 전 병력이 성문이 있는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절벽이 있는 방향으로는 적들이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막아라! 절대 기어오르게 만들지 마라!"

"이 자식들! 조국을 배신하니 좋냐?"

"게임인데 좀 배신하면 어때?"

성문 앞에서 한 치와 양보도 없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었다.

그사이 남쪽에선 시커면 녀석을 필두로 몇 명의 유저들 이 절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문제의 시커먼 녀석은 바로 블랙이었다.

무거운 쇳덩이가 능숙하게 절벽을 기어오르는 것을 보고 최가장 길드원들은 연방 탄성을 내뱉었다.

"힘만 센 줄 알았는데, 저 정도까지 움직일 줄이야"

블랙은 지금 공개된 그 어떤 거대 병기들도 보여 주지 못한 민첩한 음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어!위험해!"

길드원 하나가 다급하게 외쳐 댔다.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북쪽 성벽 위에 갑자기 오니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일본 측은 병력을 북쪽으로 돌리긴 했지만. 경계병까지

완전히 철수한 것은 아니었다' 급보를 듣고 달려은 음양사가 오니를 소환했고, 소환된 오니는 바위를 들어 블랙에게 떨어트렸다.

"으라차차, 채석!"

블랙의 어깨에 타고 있던 유한은 떨어지는 바위를 노려 곡괭이를 휘둘렀다.

무모했지만 어차피 이판사판.

- 대리석 1개를 얻었습니다.

- 스킬 경험치를 55 얻었습니다.

"앗싸! 성공!"

곡괭이에 맞은 바위가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떨어지는 바위를 그레인 스킬로 살펴보며 두들겨 부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기적적으로 성공시키고 말았다.

"자식, 굿(Good)이다!"

"오, 역시 파일런의 후예답구나."

같이 벼랑을 오르던 옌스와 블랙이 칭찬해 주었다.

어깨가 으쓱한 유한은 자신 있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흥! 얼마든지 떨어트려 보라고!"

그런 유한의 마음에 응했는지, 오니는 좀 전보다 3배는 더 큰 바위를 손에 들었다.

"크악! 그건 반칙이야! 스톱!"

유한이 악을 쓰건 말건 오니는 바위를 집어 던지기 위해 번적 치켜들었다.

"우오오! 플라잉 롤링 대쉬!"

위기 상황에 옌스가 눈을 번쩍이며 대쉬 스킬을 가동했다.

공중제비를 돌면서 절벽을 단숨에 뛰어올라 간 옌스는 참마도를 휘둘러 오니의 얼굴을 베었다.

"크아아악!"

얼굴이 크게 베인 오니는 뒤로 벌렁 자빠지며 바위를 떨어트렸다.

"이놈이!"

경계병들이 옌스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옌스가 대쉬를 쓰며 돌진한 순간, 그들의 몸은 양분되었다. 단숨에 경계병들을 베어 버린 옌스는 음양사 나루토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남은 건 너뿐이지?"

위기의 상황임에 불구하고 나루토는 침착했다.

그가 침착한 이유가 무엇인지 옌스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가 서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바위가 날아와 박혔다.

공격해 온 것은 좀 전에 쓰러트렸던 오니였다.

녀석은 자신의 일굴을 밴 옌스에게로 사납게 덤벼들었다.

"흥 멍청이."

엔스는 덤벼드는 오니에게 비웃음을 던졌다.

돌덩이와 같던 오니의 주먹이 그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블랙이 녀석의 팔을 붙잡은 덕분이다. 녀석은 옌스에게 신경 쓰느라 블랙이 절벽을 다 기어오른지도 몰랐다.

"잡귀 녀석, 당장사라지거라!"

블랙이 황금빛 기운이 맴도는 철권을 오니에게 날렸다.

뇌제의 기운이 깃든 강력한 철권은 일격에 오니를 소멸 시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음양사 나루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어딜 가려고?"

유한이 도주하는 나루토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루토가 손을 모아 수인을 맺으려 하자, 유한은 지체 없이 검을 날렸다.

음양사에 대해서 잘 몰라도, 상대가 섣부른 행동을 하도록 내버려 둬선 안 된다는 건 바츠 때부터 알고 있었다.

"크윽!"

음양사는 마법사와 같이 근접 전투력이 빈약했다. 순식간에 목이 짤린 나루토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절명했다.

"자! 이제 우릴 막을 놈들은 없다!"

유한은 성문 쪽에 있는 최가장 길드원에게 '그것' 을 준비하도록 귓속말을 보냈다.

"영주님, 큰일 났습니다!"

카타케가 천수각 위로 달려와 다급히 상황을 보고했다.

그러나 그가 따로 말할 필요는 없었다. 오다 역시 모두 보고 있었다. 남쪽에서 절벽을 타고 적의 별동대, 그것도 개활지에서 날뛰었던 검은 쇳덩이가 들어와 날뛰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거기다 북쪽 성문 앞에는 또 다른 녀석들이 출현했다.

"큭! 하나뿐이 아니었단 말인가!"

오다는 성문 앞쪽의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블랙 아이언 두 기를 보고 좌절했다.

안 그래도 하나가 이미 성안에 들어와 날뛰는데 둘이 더 달려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근근이 버티던 성문은 단숨에 박살 날 것이고. 그 뒤로는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주군, 이제 어찌해야합니까?"

상황이 불리했지만, 카타케의 눈빛은 적의로 힐할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책으로 보았던 최후의 항전이니, 옥쇄니 하는 단어들! 떠올렸다. 그것이 시무라이다운 아름다운 최후라 여겼다.

"백기 올려."

"예? 무슨 그런 말씀을……."

"항복하라고! 고작 무인도 하나 때문에 다 잃을 수는 없어!"

빨리 항복해야 한다. 그래야 번에 소속된 유저들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여기서 고집을 부리다 번민들의 신망을 잃으면 본토에 있는 번을 유지할 수 없다.

'본거지만 유지하면 재기는 얼마든지 가능해!'

승패병기상사(勝敗兵家常事).

오늘의 패배는 내일의 전진을 위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오다는 다음에 더 착실한 준비를 해서 다시 이 섬을 도모하기로 했다.

"와! 우리가 이겼다!"

천수각 꼭대기에 백기가 올라오자, 한국 유저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성내에 들어와 블랙과 함께 날뛰고 있던 유한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나름 예상은 했지만, 이리 쉽게 낚여 줄 지는 몰랐다.

"생각보다 심하게 주눅 든 모양이군."

뒤늦게 나타난 2대가 그냥 철판과 부품을 끼워 맞춘 껍데기라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무튼 싸움은 끝났다.

사상 첫 국가 길드전 겸 한일전은 한국 측 최가장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의 최고 공신은 대장장이 지그가 만든 블랙이었다.

"대장장이 지그 만세!"

"블랙 아이언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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