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1 데보라의 자취
데보라의 자취
- 마녀 데보라의 유적을 발견하셨습니다.
-명성이 1,500 올랐습니다.
마녀 데보라.
300여 년 전, 용사 카웬에게 패한 뒤 홀연히 사라진 그녀가 이런 망망대해의 무인도에 왔을 줄이야!
'하긴 데보라가 마지막으로 간 곳이 카잔 공국이었지.'
유한은 표재훈, 아니 로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바니우스 3세의 의뢰로 데보라의 행방을 추적하던
로키는 카잔 공국 남쪽에서 그녀의 마지막 흔적이 남은
던전율 탐사했다. 그는 거기서 발견한 볼랙 아이언의 나
머지 설계도를 유한에게 넘겨주었다.
카잔 반도는 아르페디아 대록 동쪽 끝의 땅.
데보라는 거기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녀가 아르페디아 대륙올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카잔 공국에 남은 흔적이나 공중 요새에서 미케니아의 지식을 훔쳐 도망친 사례를 보면, 이후에 자신의 세력을 재건하려 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돌연 바다로 나가 버렸을까? 그리고 어쩌다 무인도의 이상한 땅속 유적에서 생을 마감한(?) 것인지?
뭔가 사정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스토리상 어떤 목적과 의도가 있기에 게임 제작자는 데보라를 이곳으로 끌고 왔을 것이다.
유한은 그 비밀을 밝혀내고 싶었다.
그것이 과거 바츠로서 데보라 던전을 최초 발견하고, 지그로서 데보라의 유산을 접수한 자신의 권리이자 책임이라 여겼다.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이라도?"
유한은 방 안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다 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싶어 고개를 들었더니, 데보라 양 옆에 기립해 있던 블랙 아이언들의 눈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어라? 아까도 저랬나?'
조금 전과는 뭔가 달랐다.
들고 있는 창이 약간 기울어진 것 같았고, 기계 특유의 금속 마찰음이 놈들의 몸에서 들렸다.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유한은 슬그머니 허리에 차고 있던 마이티 소드에 손을 가져갔다.
"침입자……."
"침입자에게 죽음을."
블랙 아이언들의 입에서 음산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블랙에 비하면 흐리고 어눌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유한은 점차 활발해지는 그들의 움직임에서 의도를 완전히 확인했다. 블랙 아이언들을 그에게 다가오면서 창을 휘둘렀다.
"죽어라, 침입자!"
유한은 서둘러 블랙 아이언들이 휘두르는 창날을 피해냈다.
쾅!
큰 소리와 함께 2자루의 창날이 벽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었따. 블랙 아이언들은 곧장 창을 뽑아 내 투창 포즈를 잡았따.
'앞으로 튀어나가!'
찰나의 순간, 유한의 마음속에 사라아 있는 바츠가 다급하게 외쳤다. 피할까 하고 주춤하던 유한은 곧장 몸응 낮추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래, 투창의 투척 각도는……!'
도망치면 죽는다.
오히려 투척 각도 안으로 파고들면 공격을 피하는 것은 물론이고, 반격을 날릴 수도 있다.
유한은 바츠 시절에 쌓아 놓은 전투 감각을 믿었다.
그 전투 감각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2자루의 창은 유한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 차례 바닥으 구르며 돌진한 유한의 눈에 블랙 아이언의 다리가보였다. 그는 자신의 히든 스킬인, 용사 카웬이 남겨 준 필살기를 날렸다.
"암 브레이크!"
콰직!
블랙 아이언의 무릎 관절을 감싸고 있던 강철 장갑이 찌그러졌다. 아쉽지만 반격의 성과는 그 정도였다.
유한은 더 나은 성과를 올리기보다 재빨리 피하는 것을 선택했따. 그는 상대가 둘이라는 점을 잊지 않았다.
"이크!"
유한은 다른 블랙 아이언이 내리찍는 발을 피해 물러났다.
첫째도 조심, 둘째도 조심.
쓸만한 히든 스킬이 있다 해도 그는 자신이 전투 직종의 유저가 아니라는 점을 잊지 않았다.
더구나 상대는 데보라가 만든 강철의 전투 병기다. 그것도 4m의 거구에 막강한 파워를 가졌고, 둘이 함께 공격을 해 오고 있었다.
'그래도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은 아니야.'
300여 년 만에 움직인 때문인지, 블랙 아이언들의 움직임은 시원찮았따. 하긴 오랫동안 방치되었기에 부품에 녹이 슬고 이끼가 끼엇을 것이다.
그러나 게속 움직이다 보면 나아질 수도 있기에, 서둘러 제압하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도 좋았다.
유한은 블랙 아이언들의 공격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한 방이라도 맞았다간 뼈도 못 추릴 것이 당연할 것이기에, 녀석들의 동작을 보고, 공격을 예상해 몸을 피했다.
물론 대놓고 물러서는 것은 멍청한 짓이므로 두 녀석의 다리 사이를 오가며 교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블랙 아이언들은 유한을 때리거나 잡으려다가 자신들끼리 뒤엉키고 상잔하는 일이 잦아졌다.
"침입자를……!"
"이크!"
돌아서 피하는 유한을 보고, 블랙 아이언 하나가 허리를 돌리며 주먹을 내려쳤다. 이대로 맞으면 피가 반 이상 닳을 상황.
그러나 녀석의 주먹은 허공에서 거짓말처럼 멈춰 섰다. 손목 관절을 휘감은 강철 와이어 탓이었다.
"나이스! 드디어 꼼짝없이 걸렸군."
유한은 와이어에 엉켜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블랙 아이언들을 보며 쾌재를 불렀다.
그는 단순히 블랙 아이언들 사이로 생쥐같이 도망만 다닌 것이 아니었다. 건틀렛에서 와이어를 줄줄 뽑아내서 블랙 아이언들의 관절과 몸통, 사지를 뒤엉키게 만든 것 이다.
유한을 잡는 데 급급했던 블랙 아이언들은 가느다란 강 철선이 자신들의 사지를 결박하는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나중에 끊어 버리려고 애를 썼지만, 쉽지가 않았다 드워프 갈리가 제조한 텅스텐 와이어는 무척이나 질겼고, 끌어당길수록 와이어가 파고든 관절과 마디의 틈새에 손상을 줄뿐이었다.
"자, 이제 해체 작업을 해 볼까나?"
능글맞은 표정을 지은 유한은 망치와 집게를 들고 꼼짝 못하는 블랙 아이언들에게 다가갔다.
일단 더 날뛰지 못하도록 가슴의 장갑을 듣어내 동력원 인 심장을 꺼냈다. 그러자 바동거리던 블랙 아이언들의 눈에서 빛이 사라지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데보라의 블랙 아이언들을처치했습니다.
- 경험치 4,500올 얻었습니다.
안내창 덕분에 유한은 블랙 아이언이 완전히 정지했다 는 것을 알았다. 그는 각종 공구들을 꺼내서 본격적인 해체 작업을 시작했다.
"찝,생각보다 쓸만한 게없네."
데보라가 만든 블랙 아이언은 기대 이하였다.
심장과 마력 컨트롤러를 제외한 대부분의 부품이 녹슬 거나 낡아 빠진 상태였다. 움직임이 시원찮았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던 것.
더구나 유한의 교란에 말려서 서로 치고받다가 부서지고 으깨진 부품들도 있었다.
"그래도 블랙의 예비 부품으로 쓸 수 있을 테니까……."
유한은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부품만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방 안올 뒤지며 데보라의 유물을 찾아보았다.
"이쪽 벽이 수상하군.”
유한은 숨겨진 방이나 장소를 찾다가 한쪽에 멈춰 섰다.
망치로 두들겼는데, 단상 뒤쪽의 벽에서 맑게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벽 너머에 빈 공간이 있다는 중거였다.
유한은 곧장 곡괭이를 꺼내 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러나 벽에는 흔한 균열 하나 없었고, 그레인 스킬로 쓸어 봐도 완벽할 정도로 하나의 암석 덩어리로 되어 있 었다.
20분 정도 벽을 때리던 유한은 결국 포기해 버렸다. 벽은 마치 무슨 마법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파편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부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는 건 아닐까?'
이리저리 들러보던 유한은 데보라가 앉아 있는 나무 의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한참 의자를 노려보던 유한은 의자를 한번 밀어 보았다.
끼익ㅡ! 으지직ㅡ!
나무 긁히는 소리와 얼음 조각이 부서지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그러나 의자는 심지라도 박힌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혹시 의자에 앉아 있는 마녀를 일으켜야 히는 건가?
단생각을 하던 유한은 그만 발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덕분에 힘이 비틀려 똑바로 밀던 것올 비스듬하게 밀었다.
끼익一쿵! 쿠쿵!
그런데 의자가 빙글 돌아가더니, 데보라의 시신이 벽을 마주 보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단상 뒤의 벽이 거짓말처 럼 천천히 열리더니 시커먼통로가 나타났다.
"아, 의자를 미는 게 아니라돌리는 거였군.”
의자가 꿈찍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된 유한은 머쏙하 게 웃다가 어두운 통로 저편으로 걸어갔다.
통로는 그리 길지 않았다.
얼마쯤 걸어가자 청동으로 장식된 돌문이 나왔고,그것을 밀고 들어가자 작은 방이 나왔다.
방 안의 서가에는 책들이 가득했고, 침대 옆에 있는 책 장에도 책과 색이 바랜 종이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헉, 이런."
책 한 권을 빼서 보려던 유한은 낭패 어린 표정을 짓고 말았다. 많이 낡은 데다 냉기에 얼어붙어 있던 책은 그가 펼치자마자, 과자처럼 부서져 버린 것이다.
대부분의 책과 종이들이 다 그런 상태였다. 얼어붙어서 페이지가 펼쳐지지 않거나, 바스라지는.
그러나 유한은 개중에 가장 은전한 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책상 서랍 안에 있던 것이었는데,그것을 손에 들자 효과음과 함께 안내창이 떠올랐다.
- 마녀데보라의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일기장이라고?"
흥미가 생긴 유한은 곧장 패이지를 펼쳤다. 그러나 환하게 밝았던 유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가장 온전한 상태라지만, 책으로서의 상태만 그러할 뿐, 기록은 그렇지 못했다. 페이지 곳곳의 잉크가 오래돼 흐리거나 번져 있어 안 그래도 악필인 데보라의 일기는 읽기가 무척 어려웠다.
"어디 보자,이건 좀 읽을 수 있군."
유한은 드문드문 읽을 수 있는 구문들올 찾아 살펴보았다.
신성력 3977년 6월 3일.
카잔의 산골에서 광부이 발견했다는 기록읕 입수했다.
그 안에는 고대 마도 문명과 그 문명이 만들었던 도구들의 제조법이 적혀 있었다.대륙이 발칵뒤집힐 일이다.
늙은 마법사들의 놀란 눈빛이 눈에 선하다.
신성력 3978년 1월 28일.
반년간의내연구성과를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다. 시제품을 보고도 다들 고개를 돌렸다. 마법학계의 늙은이들은 노예의 딸년이 고대 문명의 이기를 재현해 낸 일이 망에 들지 않는모양이다.
신성력 3978님 3월 7일.
보이드 노턴이 이번 대륙 마법 총회에서 내 고대 문명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다들 차기 노턴의 탑주가 큰일읕 해냈다고 난리다.
그러나 공동 연구자로 올라가기로 약속된 내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이제 나를 모르는 사람 대하듯 행동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만읕 사랑한다 속삭이던 사람이…….
나는 이젠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아니 할수만 있다면 이 더러운 세상을 끝장…….
일기장의 앞쪽에는 평범한 마법사였올 적의 데보라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왜 그녀가 인형 군단을 만들어 대륙을 휘몰아쳤는지 이해할 수 있을 듯한 내용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이후 연인의 배신에 분노한 데보라는 방황 끝에 록스턴 산속에서 고대의 병기 생산 시설을 발견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목인병과 골렘 등의 인형 병기를 만들어 전쟁을 일으켰다.
그 이야기는 여러 유저들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인형술사 데보라의 난.
용사 카웬의 등장.
그리고 데보라의 패배.
패자로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데보라의 이야기가 일기장에 쭉 이어졌다.
신성력 3981년 8월 19일.
용사에게 패한 마녀가 먼 남쪽 나라로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내가 있는 노스아크 북북까지 들려왔다.
그나저나 은거지러 삼은 이 얼음 궁전은 원가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그 비밀이 재기를 위한 발판이 되었으면 좋겠다.
신성력 3982년 9월 7일.
미에니아의 공중요새에서 꽤 많은 고대의 기록과 지식들을 입수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내 눈물 휘둥그렇게 만드는 것도 있었다.
이바니우스3세의 배려에 감사한다. 하지만 난 그의 계략과 술수에 놀아날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다.
공중 요새에서 고대의 지식을 입수한 데보라는 자신이 고대문명의 기록올 발견한 카잔 공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한동안 카잔 각지에 머물며 뭔가를 조사한 데보라는 배를 마련해 먼 바다로 나갔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바로 이 무인도였다.
일기장에는 데보라가 무인도에서 뭔가를 계속 찾는 듯 한 기록들이 쭉 적혀 있었다. 그러나 후반부는 기록의 훼손이 심해 당최 무엇을 찾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유한의 눈에 확 띄는 문장이 있었다.
……하늘이 베푸는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열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스타레이가 필요…….
'스타레이라고?'
스타레이는 율리아 계곡에서 얻은 신의 광물인 운석을 정제하여 얻은 금속이다.
운석을 획득한 유한이나, 그것을 정제한 귀련이나 그 쓰임새를 전혀 몰랐다. 드워프 구센도르프가 알고 있는 듯했는데, 자세한 사항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그때 안 사실이라곤 단순히 무구를 제작하는 데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타레이의 정확한 용도는 무엇인가?
"일단 나머지는 나가서 알아봐야겠군."
유한은 작은 방에서 원래의 방으로 되돌아왔다.
부서진 블랙 아이언들의 잔해는 그대로였고, 얼어붙은 상태로 의자에 앉아 있는 데보라도 변한 점이 없었다.
"열망이라……. 스타레이로 댁이 이루려던 열망이 뭡니까?"
유한은 문득 데보라에게 물었다.
그러나 꽁꽁 얼어 있는 데보라는 아무런 응답도 해 주지 않았다.
하긴 살아 있다면 블랙 아이언들이 날뛸 때나 의자를 밀 때 깨어났을 터.
한참을 기다려도 그녀는 아무런 반옹이 없었다.
냉동된 상태로 오매불망 하늘이 베푸는 기회를 기다리다 그대로 이승을 하직한 모양.
혹시 데보라가 깨어나지 않올까 적정 반, 기대 반 하던 유한은 결국 실밍하고 발걸음올 돌렸다.
"쩝, 밖에 일본 녀석들이 없어야 할 텐데."
유한은 방 안의 은도가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 한 채 나가 버렸다.
그가 떠난 뒤에도 방 안 온도는 점차 올라갔고. 냉기는 사라지고 성애는 녹아내렸다.
빠직_빠지직.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얼어붙어 있던 데보라의 손끝이 조금씩 움직였다. 하얀 얼굴에 보기 좋은 혈색이 돌고 도롬한 입술 사이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굳게 감겨 있던 눈동자가 떠졌다.
유한은 건를랫의 와이어를 이용해 수직 동굴올 빠져 나왔다.
그는 혹시 주변에 있을지 모를 일본 유저들올 조심하면서 최가장의 요새로 되돌아왔다. 요새에는 막 전투를 준비 중인 유저들이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중에 끼여 있던 옌스가 유한을 보고 다기왔다.
"어이, 대체 어딜 자꾸 쏘다니는 거야?"
옌스의 표정에는 불만이 기득했다.
유한은 이 섬에 와서 전투에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고, 병장기 제조나 수리도 게을리했다. 더구나 이미 섬 안으로 옮겨 놓은 블랙도 대기 상태로 내버려 두었다.
"블랙은 놔뒀다가 국 끓여 먹을 거야?"
"오냐. 이 형님은 가장 화려한 순간에 끓여 드실 참이다"
시시한 싸움에는 절대 블랙을 투입하고 싶지 않은 유한 이었다. 그래서 일본 유저들에게 쫓길 때도 블랙을 부르지 않았다.
"그럼 이번 전투에 끓여 드셔야겠구먼. 지금 후소 대륙 에서 일본 쪽의 중원군이 잔똑 도착했으니까."
"증원군? 얼마나 되는데?"
"척후병 말로는 삼천은 족히 넘을 거라더라. 지금 우리 쪽수보다세배는더 많아"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질.
일진일퇴를 벌이면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일본 쪽도 마찬가지다. 분명 질적으로도 레벨이 높은 유저들로 채웠을 터.
멋들어지게 천수각을 지을 정도로 재력이 있는 놈들이니, 분명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좋았어. 이번 전투에 블랙을 투입한다."
숫자나 질적으로 우세한 적군올 물리치면, 유저들에게 블랙 아이언의 위력을 널리 알릴 수 있다. 그리 되면 양산형 블랙 아이언의 판매도 쉬워질 것이다.
"제발 그래 주라. 이번에 일본 녀석들을 섬에서 몰아내면 특별 보너스를 준다고 최가장의 길드장이 발표했으니까."
유한의 결정이 자칫 번복되는 게 두려웠던지, 옌스는 덩치답지 않게 싹싹 빌며 애원했다.
평소 그럴 녀석이 아니라 의아했다.
"뭐 좋은 아이템이라도 주냐?"
"그런 사소한 게 아냐."
옌스는 품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펼쳐 보였다. 두루마리에는 류트를 든 어여쁜 소녀가 그려져 있었다.
엘프를 능가하는 아름다운 외모에 잘빠진 팔등신 몸매.
"이거 어디서 본 얼굴인데?"
유한의 물음에 옌스는 두 눈이 몽롱해졌다.
"당연하지. 나의 우상 은비 누님이시다.”
"엥? 그 유명한 아이돌?"
은비라면 유한도 알고 있었다. 드림맥스 리셉션 파티에 왔었고, 채린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드림맥스 측 발표에 의하면 파티에 참석한 연예인들은 틈틈이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하는사람들이라고 했다. 초특급 아이돌인 은비도 아르패디아 은라인을 즐긴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래. 은비 누님의 게임 내 캐릭터다. 캐릭터 이름은 금영."
이제야 이해했던지 유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모르는 것이 하나 남았다.
"근데 그거랑 특별 보너스랑 무슨 상관인데?"
"실은 길드장인 최강현이 은비 누님이랑 아는 사이래. 뭐 남친이라는 소문도 있던데 그건 좀 헛소문 같고……."
옌스의 설명에 의하면 이번에 일본 유저들과의 싸움에서 이기면 은비가 게임 내 캐릭터로 접속해서 특별 공연과 팬 사인회를 해주기로 했단다.
이것은 최가장 길드장이 내놓은 특단의 조치라고.
"구라 아냐?"
유한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요새 연예계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아이돌 스타가 뭐가 아쉬워 이곳에 오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이런저런 행사로 스케줄이 빡빡할 텐데.
"최강현이 장담했어. 거대 길드의 길드장이 허튼 소리를 했다간 위신이 바닥에 처박힌다는 거 물라?"
하긴 그런 거짓말올 함부로 할 리가 없다.
만약 진짜로 거짓말을 했다면 최강현은 게임은 물론, 현실에서도 옌스에게 살아남기 어려올 것이다.
아니, 분노하는 것은 엔스뿐만이 아닐 것이다.
섬을 몽땅 태워 먹고도 남을 정도로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남자 유저들에게 처절히 응징당하고 말 것이다. 최악의 경우 최가장 길드가 해체될 수도.
'아무튼 정말 은비가 온다면.'
유한은 유명 아이돌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은비가 온다면 꼭 만나고 싶었고,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일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선 다음 전투에서 눈에 확 듸는 활약을 해야 한다. 자신이, 그리고 블랙이 말이다.
하늘색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데보라는 엉망으로 어지럽혀진 방안을 둘러보았다.
자신올 호위하던 블랙 아이언들은 무참하게 해체돼 나뒹굴고 있었고 비밀 통로 너머의 방은 멋대로 어질러진 상태.
"침입자가 있었나?"
처음에 데보라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동면 마법은 남의 도움이 있어야 해제할 수 있기 때문 이다. 오히려 누군가 찾아와 바위를 깨트려 온도를 바꿔 주기를 기다렸다.
문제는 그 임무를 마치고 죽어 줘야 할 침입자가 오히려 블랙 아이언들을 쓰러트렸다는 점이다.
거기다 비밀의 방으로 통하는 통로도 열었고, 일기장까지 홈쳐 갔다.
대체 어떤 놈일까.
침입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거기다 발자국들 이 동일한 것을 봐서 들어온 지는 단 한 명.
데보라는 발걸음을 돌려 부서진 블랙 아이언들을 살펴 보았다. 그리고 은신처의 통로를 막아 놓았던 바위의 상태도 파악했다.
덕분에 침입자의 정체를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미세한 균열에 치명적인 일격을 퍼부었군. 이런 재주 를 갖고 있는 것은 아마도……."
데보라의 얼굴이 굳어졌다.
돌이건 강철이건 이런 식으로 박살내는 자는 그녀가 알기에 단 한 명뿐이다.
세상을 뒤집어엎으려 했던 자신을 가로막은 남자.
떠들기 좋아하는 세상 인간들은 그를 용사라 칭송했다.
용사 카웬이 자신을 쫓아 이 섬까지 찾아온 것일까?
"나와라, 클락(Clock)!"
데보라가 스태프를 살짝 휘두르며 외치자 공간이 갈라 지며 목인병 하나가 걸어 나왔다.
그녀가 마련한 이旗) 공간에서 대기하고 있던 목인병 의 몸통은 시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시계는 시간뿐만 아 니라, 연도와 날짜까지 알려 주게끔 되어 있었다.
"삼백 년이 넘게 홀렸군."
그렇다면 침입자는 카웬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분명 카웬과 연관이 있을 터.
그놈은 자신의 일기장을 갖고 갔다. 자신이 이 섬에서 무엇을 찾으려 했는지 적어 놓은 일기장을.
물론 가장 중요한 정보는 빼놓았기에 쉽게 찾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논란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고, 모험자랍 시고 떠돌아다니는 무리들이 들어와 헤집고 다닐 게 분명하다.
데보라는 일단 동굴 밖으로 나갔다.
깊숙한 수직 동굴이지만, 부유 마법을 알고 있는 그녀
에게는 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삼백 년이 지났어도 노턴의 탑은 남아 있겠지?"
노턴의 탑, 혹은 노턴 마탑으로 불리는 곳.
먼 고대부터 존재했던 그곳은 진귀한 고대 마법을 계승, 연구하고 있었다. 데보라는 예전에 그 탑을 이어받을 남자에게서 부유 마법을 배웠다.
그녀는 진정으로 그를 사랑했지만, 그가 사랑한 대상은 데보라가 아닌 그녀가 가진 고대 문명의 연구 기록이었다.
"뿌득! 새로운 힘을 얻으면 그 알량한 마탑부터 없애 버리겠다."
300여 년 전엔 카웬의 방해로 이루지 못했지만, 이번엔 기필코 말살하겠다며 다짐했다.
흔적은 물론 탑이 존재했다는 기록이나 소문까지. 노턴 의 탑에서 마법을 배운 마법사는 물론, 그 탑을 아는 자들 까지모두 없애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손에 넣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을 기다리기 위해 위험을 각오하고 300여 년의 동면에 들어갔었으니까.
"누구냐?"
동굴 밖을 빠져나간 데보라는 일마 가지 않아 일련의 무리에 포위당했다.
데보라는 그들에 적의를 보이는 한편, 호기심을 느꼈다.
처음 보는 복장에 처음 듣는 이상한 언어. 운 좋게도 이방인들 중의 한 명은 아르페디아의 말올 할 줄 알았다.
'이 여자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수색 중에 마주친 NPC 여성.
히로시가 알기론 이 섬에는 NPC가 없었다. 괜히 무인도가 아닌 것이다.
물론 유저들이 데리고 왔을 가능성은 있다. 친근한 NPC와 행동을 같이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러나 차림새로 볼 때 이 NPC는 후소 대륙 출신이 아니다.
"누구냐?한국 유저를 따라왔나?"
"나는 데보라. 날 따르게 할 사람은 이 세상에 나 자신 뿐.”
말을 마친 데보라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몇몇 일본 유저들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렸다. 그만큼 데보라는 아름답고 매력적이었지만, 눈빛은 살기로 이글 거렸다.
누구보다 먼저 살기를 감지한 히로시는 검을 고쳐 잡고 물러섰다.
"정신 차려! 그 여자에서 떨어져!"
그러나 때늦은 경고였다.
창칼을 슬쩍 내리고 데보라에게 다가가던 일본 유저들은 싸늘한 주문을 들었다.
"나오너라, 메두사.”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데보라 양옆의 공간이 찢어지더니, 몬스터 메두사 2마리가 튀어나왔다.
메두사는 아르페디아 대륙의 몬스터. 당연히 일본 유저 들은 지금까지 메두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으악!”
"이, 이건 뭐야!"
한국 랭커들마저 치를 떨게 만드는 아르페디아 최강의 흉물은 면역성이 전무한 일본 유저들을 삽시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억지로 눈을 뜨고 있던 히로시는 메두사가 자신의 코앞 까지 다가온 것을 보고 정신올 잃었다. 그리고 얼마 후 상냥한 여성의 말소리를 들었다.
<히로시 님의 심적 상태가 불안정하여 게임에서 강제로 접속을 종료하겠습니다.〉
유저를 보호하기 위한 자동 프로그램이 발동되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캡슐에서 벌떡 일어나려던 히로시는 그만 뚜껑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허둥지둥 캡술을 열고 나온 히로시는 거올을 보고 놀랬다.
자신의 머리카락이 몽땅 곤두서 있었다. 그만큼 아까 그 괴물을 보고 놀랐다는 증거다.
"제기랄, 면상을 본 것만으로 이렇게 되었다는거야?"
고작 가상 세계의 이미지였을 뿐이지 않는가.
히로시는 메두사의 얼굴을 떠올리려다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을 만큼 징그럽고 흉악한 몰골 이었다. 후소 대륙에도 흉한 요괴들이 많지만, 메두사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삐리리ㅡ!
히로시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책상 위의 휴대폰이 울렸다. 받아 보니 좀 전에 같이 수색을 하고 있었던 학교 후배였다.
어찌나 놀랐는지, 후배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시, 시바 선배! 아까 우리가 본 게 대체 뭡니까?"
"아마 한국 쪽 요괴가 아닐까?”
"그런 게 우글거리면 난 아르페디아 대륙엔 절대 안 갈 겁니다! 죽어도 안 가요! 차라리 게임 접을랍니다!"
후배는 그렇게 발악하며 전화를 끊었다.
설마 우글거리기나 할까. 정말 우글거린다면…….
메두사가 우글우글한 대륙을 상상하던 히로시는 좀 전 에 저녁으로 먹었던 청국장이 역류함을 느꼈다.
"끄응,절대 상상해선 안돼!"
이무른 저런 괴물이 있다는, 그 괴물올 소환하는 NPC 가 나타났다는 정보를 얼른 상부에 보고해야 했다.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아 캡술에 다시 들어갔다.
<컨디션이 평상시와 다릅니다. 안정을 취한 후에 접속 하시기 바랍니다.>
<최소 6시간이 지나야 접속이 가능합니다.>
"쳇!"
강제 종료가 되었던 덕분에, 히로시의 재접속은 6시간 뒤로 미뤄졌다.
그날을 시작으로 메두사의 악명은 한국을 뛰어넘어 세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