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방문자
처얼썩! 철썩!
방파제에 부서지는 새하얀 포말.
그리고 그 너머로 끝을 알 수 없는 바다.
사방에 갈매기들의 울음소리와 배 만드는 소음이 울려 퍼지는 이곳은 카잔 공국 남쪽의 항구 바니아스였다.
동쪽 연안 무역의 중심지인 이곳의 부두에는 배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엄데이트 이휴 바니아스는 대양으로 나가는 통로가 되면서 그 규모가 훨씬 더 커졌다.
이전보다 큰 조선소가 들어서고, 드나드는 배들의 크기도 커졌다.
당연히 유저들의 왕래도 많아졌다.
다소 위험은 있지만, 바다 저 멀리에 있을 신대륙에 대한 환상은 많은 유저들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여기서 신대륙으로 가는 배를 타는 건가?"
2명의 남자가 부두로 나왔다.
쓸데없이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의 이름은 제르스였고, 그에 못지 않게 치장한 마법사 청년의 이름은 알덴이었다.
여성들에 대한 지나친 껄떡임과 대쉬로 악명을 자자하게 떨쳤던 그들이 멀리 이곳까지 온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신대륙으로 가기 위함이었다.
"근데 우릴 배에 태워 주는 길드가 있으려나?"
"걱정 마, 크라켄이나 서펀트의 습격이 잦은 지역을 통과하려면 전투원이 하나라도 더 필요할 테니까."
제르스가 자신만만해 했지만, 알덴은 우려를 떨칠 수 없었다.
"근데 꼭 배를 타야 하냐? 여자를 꼬시는 건 다른 데서 해도 되잖아. 괜히 물에 빠져서 아이템만 날렸다간....."
"마!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쟁취할 수 있는 법이야!"
그렇게 쏘아붙인 제르스는 은근한 투로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생각해 봐라. 일단 망망대해로 나가면 활동 범위가 배 안이 고작이야. 한 마디로 부딪칠 일이 많아진다는 거지. 그만큼 아가씨들과 돈독해질 수 있는 기회라고."
"그렇군!"
제르스가 신대륙으로 가려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항해 도중에 건수를 올리는 것.
"흐흐, 그리고 잘돼서 신대륙에 도착하기만 해 봐. 유저라곤 하나도 없고 몹만 버글거릴 그곳에서 과연 누굴 의지하겠어?"
"그렇구나!"
두 사람은 가 보지도 못한 신대륙을 상상했다.
그들이 상상하는 신대륙은 원시인 NPC가 날뛰는 미개한 황무지였따.
거기서 여린 여성 유저들을 보호하며 점수를 따 내고 오프라인에서의 만남까지 이어 보자는 게 그들의 계획.
그러나 그들의 생각대로 잘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원양 항해에 성공하고 돌아온 탐험대도 겨우 무인도 정도만 발견했을 뿐이다.
아직까지 대륙이라 할만한 큰 땅덩이에 도달한 이들은 없었다.
원양 항해에 전력투구를 하고 있는 최가장 길드에서 섬대륙 근방 섬에 도달했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지는 좀 더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
"되도록이면 큰 배를 타는 것이 좋겠지?"
"당연하지. 생존 확률이 그만큼 올라가니까."
두 사람은 부지런히 부두를 오가며 배들을 살펴보았다.
되도록 크고 튼튼한 배, 그리고 예쁜 여성 유저들도 많이 탄 배를 찾았다.
"어, 제로스. 저길 좀 봐."
"저기 뭘?"
알덴이 바다 저편을 가리켰다.
수평선 너머로 배가 1척 다가오고 있었따.
멀리 탐험을 떠났던 배가 귀한하는 것일까?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생각했었다.
제르스도 알덴도, 부두에 있는 다른 유저들도.
그러나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배를 본 사람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특이한 양식의 선박이 항구로 접근하고 있었따.
"저게 뭐야?"
"저렇게 생긴 배도 있었나?"
상자처럼 네모난 모양, 누런색의 부챗살같이 펼쳐진 돛.
예전에 홍콩에 놀러간 적이 있는 제르스는 저것이 중국의 전통 선박이라는 것을 알았다.
뭐라던가..... 저런 배를 정크선이라고 하던가?
모두가 웅성이고 스크린샷을 찍어 대는 가운데, 배는 천천히 부두에 정박했다.
곧바로 큼지막한 닻은 내린 배에서 일련의 사람들이 갑판 위로 모습을 내밀며 손을 흔들어 댔다.
'NPC인가?'
제르스나 알덴은 물론 부두에 있던 유저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보트를 타고 접근하는 그들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Hello!"
"Nice to meet you!"
"허거걱!"
보트에서 내려 부두에 올라온 이들.
그들은 한 번도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본 적이 없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몽뚱그려 말하자면, 그야말로 오리엔탈스러웠다.
여자들의 차림새도 그랬고, 남자들이 걸친 무구도 마찬가이였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그들의 외모였다.
'양놈들이잖아!'
옷은 동양풍인데, 사람은 서양인이었다.
제르스는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그들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캐릭터를 만든다고 염색했던 자신의 금발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금발 머리 소녀, 레게 머리를 늘어트린 큰 키의 흑인과 붉은 피부의 매부리코 사내.
그들이 입에서 내뱉는 말들은 그야말로 '외국어'였다.
알아들을 순 없어도 영어라는 것은 알 것 같았다.
"외국인도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하던가?"
"한 놈 있떠. 스코필드라고."
"응, 그 자식 랭커지. 한국말도 절라 잘해."
"그 녀석 말고도 찾아보면 꽤 있지 아마?"
전무한 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떼거지로 뭉쳐 다니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지금 부두에 올라온 녀석들만 해도 10명은 족히 되었고, 아직도 많은 수가 타고 온 배에 머물고 있는 듯했따.
이상한 배, 이상한 차림새, 거기다 외국인.
그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Hey, you. Are you NPC?"
"뭐? 내가 NPC냐고?"
제르스가 자신에게 말을 건넨 백인 청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밖에 백인 청년은 제르스에게 여러 것을 물어 댔지만, 영어 수업에 졸기만 했던 제르스가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부두에서 제법 영어 좀 한다는 유저들도 있었지만, 이 쇼킹한 상황에 당황해 제 역할을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본토 발음이라는 게 장난 아니었다.
"Where am I?"
"There're a lot of koreans!"
"Call him, Yarn. quickly!"
답답한 건 저쪽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당최 말이 통하지 않으니 짜증을 내고 배에서 빨리 누구를 불러 오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런데 그사이 일이 하나 터졌다.
알덴이 어설프게 영어를 내뱉으며 히스페닉계 여자에게 껄덕거리다가 밀쳐진 것이다.
그를 민 것은 그녀의 남친으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그는 영어인지 어디 말인지 몰라도, 욕이 분명한 말을 마구 내뱉으며 커다란 손바닥으로 알덴의 어깨를 툭툭 밀었다.
"야야, 그만해. 그만! 쏘리, 쏘리."
제르스가 말린다고 나섰다.
그러나 끼어든 그에 대해서도 화가 났던지 남자는 제르스에게도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Son of a bitch!"
순간 제르스의 눈빛이 바뀌었다.
아무리 영어가 짧아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있었따.
"뭐? 야, 방금 뭐라고 했어?"
"Kiata lavoko puto!"(궁금해서 검색해보니, 개놈아 닥쳐,,뭐 이런뜻이라내요?ㅋ)
"한국말로 해, 자식아! 여긴 This is 대- 한민국이다!"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제르스는 상대를 발로 걷어찼다.
가슴을 발에 차인 남자는 비틀거리다가 부두 아래 바닷물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남자의 동료들이 눈을 치켜뜨더니 제르스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Drop dead!"
"오냐, 새끼들아 한판 붙어 보자!"
역사적인 만남은 불행하게도 유혈 사태로 이어졌다.
덕분에 사람들은 구경할 수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공격 스킬과 마법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는 직업군을.
상황이 진정된 후 오해를 풀자, 외국인들은 슬그머니 다시 부두 주변을 돌아다녔다.
여전히 당혹함을 감추지 못하는 그들은 자신이 본 것들을 동료들에게 서로 이야기해 주었다.
다들 모두 놀라고 기가 막히는 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여기가 신대륙이 아니란 말이야?"
아까 제르스에게 차여 물에 빠졌던 사내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젠장, 사방에 한국 놈들 천지야! NPC에게 말을 건네도 한국말을 해. 간판이고 책이고 적힌 글도 모두 한글이야!"
도무지 읽고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없었따.
아이템 설명조차 한글로 나왔다.
"그럼 결론은 하나겠군."
한쪽에서 내륙 쪽을 바라보고 있던 소년이 말문을 열었다.
"얀(Yarn)! 넌 뭔가 알고 있지?"
동료들은 그가 뭔가 알 거라고 생각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동양인인 얀은 유일하게 이 부두에 있는 사람들과 말이 통하는 녀석이었따.
게다가 이 녀석은 누구보다 먼저 신대륙을 목격한 최초의 발견자이기도 했다.
"내가 이 대륙을 보고 따 낸 칭호가 뭔지 알아?"
다들 궁금하다는 듯 얀을 바라보았따.
"아르페디아의 발견자다."
"뭐라고!"
다들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페디아라니, 그들이 알기로 아르페디아는 그들이 현재 즐기고 있는 '레전드 오브 프론티어'의 기초가 되는 게임이 아닌가.
한국에서 서비스 중인.
"다시 말해 이 대륙의 이름은 아르페디아란 거지."
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서비스 중인 게임의 이름이 언급되자 혹시 했지만, 정말 그럴 줄이야.
신대륙, 신대륙, 그렇게 강조하더니 음흉한 게임사에 모두 속은 것이다.
"자, 잠깐. 얀, 그럼 우리가 지금까지 했던 게임이 아르페디아 온라인과 같은 거라는 소리야?"
"그런 것 같아. 한마디로 우린 변경(Frontier)에 있었던 셈이고 이제 본 대륙에 들어왔단 소리지."
"오 마이 갓! 믿을 수 없어!"
"틀림없어. 저번에 대규모 업데이트할 때 꾸물거린 이유가 뭐겠어? 전부 이것 때문이야."
국가별로 각기 다른 이름으로 서비스되던 게임이 하나로 통합되었따.
그렇지 않으면 북미에서 레전드 오브 프론티어를 즐기고 있던 자신들이 한국인들이 우글우글한 대륙으로 올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이젠 어쩌지? 본 대륙으로 돌아가서 보고해야 하나?"
"젠장, 이거 완전히 난리 나겠는걸."
다들 사태의 심각성을 논하고 있을 때였다.
일행에서 빠져나온 얀은 천천히 마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얀, 어디가?"
베르디라는 이름의 금발 머리 소녀가 얀을 쫓아갔다.
그녀의 부름에 얀은 발걸음을 늦추긴 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여기가 아르페디아가 맞다면 찾아야 할 것이 있어."
"찾다니, 뭐? 아이템?"
궁금해 하는 베르디의 얼굴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은 얀은 대답해 주었다.
"우리 형."
(대장장이 지그 8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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