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형제는 용감했다
뒷세계에서 근성 있는 깍두기로 불리는 덕근이파 두목 김덕근은 요즘 바짝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메모리를 회수할 기회가 좀처럼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딩 녀석이 혼자인 것 같으면 항상 주위에 이상한 놈들이 어슬렁거렸고, 그렇지 않으면 집, 학원, 도장이었다.
'제길. 의뢰인 자식은 그런 것도 모르고 히스테리를 부리는 판이니.....'
메모리를 가져오면 의뢰금의 2배를 준다던 의뢰인이 이젠 매일같이 전화를 해서 짜증을 부렸다.
오늘은 거의 반 협박으로 나왔다.
이틀 내로 가져오지 않으면 거래를 없던 걸로 하겠다던가.
'그냥 확 덮쳐버려?'
그 이상한 놈들이 경찰 같지는 않으니까 일단 일을 저지르고 볼까 싶었다.
덕근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사무실 문이 벌컼 열리더니 졸개인 도끼가 뛰어 들어왔다.
"형님! 온답니다요!"
"오다니, 뭘?"
"형님들이 고딩 놈을 잡아 오고 있답니다!"
덕근은 벌떡 일어났다. 얼굴엔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상한 놈들 때문에 기회가 없었는데, 부하 놈들이 기회를 잡아 한 번에 성공시킨 모양이다.
"근데 메뚜기, 아니 메모리는?"
"뒤져 봤는데 그건 없다던데요?"
"이런!"
좋다가 말았다.
뭐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없으면 나오도록 족치면 그만이니까.
"여기 말고 옛날 사무실로 오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형님"
덕근이파의 옛날 사무실.
그곳은 철거 직전의 빈 창고였다. 건방진 고딩 놈을 갈구기엔 아주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제길, 갑자기 뭐야?'
정신을 차린 유한은 천천히 눈을 떳다.
낡고 어둡고 곰팡이 냄새 나는 창고.
자신을 보며 웃는 웬 네모난 아저씨가 보이고, 주변에 새까만 양복들이 늘어서 있었다. 저마다 회칼이랑 쇠파이프를 들고 있는게 무척 살벌해 보였다.
'조폭?'
조폭들이 맞았다. 자세히 보자 낯익은 얼굴들도 두엇정도 보였다. 그랬다. 분명 한강다리에서 물 먹였던 이들이다.
'제길, 갑자기 장르가 바뀌었군.'
방금까지 하이틴 드라마였는데, 조폭 영화로 뒤바뀌었다.
사방에 조폭투성이였다. 그야마로 완전 포위된 상태. 도망갈 틈이라곤 전혀 없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이게 웬 날벼락인지?
"메모리는?"
눈앞에서 히죽거리던 네모난 사내가 물었다.
나머지 덩치들은 잠자코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아마 이들의 두목인 듯했다.
"무슨 소릴 하시는지...."
퍽!
유한이 능청을 떨자 사내가 가차 없이 주먹으로 뺨을 날렸다.고개가 획 돌아가는 것이 주먹이 상당히 매웠다.
사내는 유한의 멱살을 잡으며 으르렁거렸다.
"이 고삐리 새끼가 죽고싶나. 바로 말 안해? 한강 바닥에 처박히고 싶어?"
조폭가 양아치의 차이는 조폭은 실제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거고, 양아치는 협박만 한다는 것이다.
유한은 눈앞의 사내가 정말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사내에게선 살기가 풀풀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 마디 더 하겠는데, 저번에 니가 지포라이터를 한강물에 던진 바람에 우리 애들이 무척 고생을 했다. 그래서 너한테 맺힌 감정들이 많은데, 난 자극하지 않는게 좋을 것다."
'지독한 새끼들, 그걸 진짜 건졌냐?'
던진 게 가짜라는 걸 알았으니 이렇게 자신을 잡아 왔을 터.
결국 유한은 사실대로 말했다. 일단 살아야 도망을 가던, 탈출을 하던 할 것 아닌가.
"집에 있어요."
"당장 전화해."
덕근은 핸드폰을 내밀었다. 아마 번호를 누르라는 듯.
유한이 번호를 누르자, 잠시 신호가 가고 저쪽에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젊은 소년의 목소리.
바로 유한의 동생 유현이었다. 그리스마스이브에 여친과 데이트를 한답시고 일찍 집을 나갔던 녀석이 마침 동아와 있었던 모양이다.
"강유한이 집이죠?"
"그런데요?"
김덕근의 물음에 유현이 대답했다.
"내가 유한이를 보호하고 있는데, 이 녀석을 살리려면...."
철컥!
덕근이 미처 용건을 말하기도 전에 유현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순간 창고 안에 찾아온 정적.
그 누구도 유현이 그렇게 전화를 끊어 버릴 줄은 몰랐다. 형인 유한조차도.
"뭐야 이거!"
덕근을 짜증을 내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미 저장된 번호가 리다이얼되면서 신호가 갔다.
다시 유현이 전화를 받자 덕근은 목소리를 높였다.
"좀 전의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 모양인데, 우린 지금 강유한을 납치....."
철컥!
또다시 전화를 끊어 버리는 유현이었다.
"크아악! 뭐 이딴 자식이 다 있어!"
제대로 불 받은 덕근을 핸드폰을 내팽개쳐 버렸다.
움찔한 유한은 고개를 숙였다. 망할 동생 놈 때문에 자칮 맞아 죽겠 생겼다.
도끼가 휴대폰을 얼룬 주워서 식식거리는 덕근에게 바쳤다.
"형님, 진정(본문에는 전정)하시고 다시 한 번 전화를....."
"네가 해, 임마!"
할 수 없이 도끼가 전화를 하게 되었다.
유현이 3번째로 전호를 받았다.
"여보세요?"
"우린 네 형을 납치한 사람들이다. 형을 무사히 돌려받고 싶으면.....야 끊지 마!"
유현이 또 전화를 끊으려 하자 도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형 바궈 줄 테니까 잘 들어!"
그렇게 말한 도끼는 핸드폰을 바로 유한에게 건넸다.
유한은 떨떠름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나다."
"어? 진짜 형이야?"
"그래, 이 자식아! 형이 납치되었다고 하는데, 용건도 안 들어 보고 끊으면 어떡해!"
덕근만큼이나 화가 나 있던 유한은 결국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하나뿐인 동생이 이런 매정한 놈이라니.
"믿어져야 말이지. 내 귀염둥이 여친이라면 모를까 형 같은 게임 폐인을 납치하는 또라이들도 있나 해서."
"뭐 또라이? 죽을래, 인마!"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있던 덕근이 화를 내며 휴대폰을 앗아 들었다.
"형을 납치한 분이 아저씬가요?"
"그래! 나다, 인마!"
"취향 참 독특하시네. 아저씨 변태입니까?"
"크아악! 이눔의 시키가 진짜!"
덕근은 진짜 미치고 펄쩍 뛸 지경이었다.
개무시를 당한 것도 모자라 이젠 변태 취급이다.
곁에서 구경하던 조폭들은 어이가 없었다. 자기 두목을 저렇게 열 받게 하는 녀석이 있다니.
김덕근이 뒷목을 움켜쥐며 물러나자, 도끼가 유한에게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야, 얼른 니 동생한테 메모리 갖고 오라고 해. 지금 당장!"
아무래도 동생은 이곳에 오면 조폭 두목에게 맞아 죽지 싶었다.
그러나 당장 자신의 목숨이 간당간당한 유한으로선, 동생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유형아, 내 책상 서랍에 지포라이터 있을 거다. 그거 메모리니까 당장 가져와, 여기 위치는....."
유한은 도끼에게 물어 이곳의 위치를 말해 주었다.
"형, 그런데 정말 납치당한 거 맞아? 혹시 장난 아냐?"
"인마, 이게 지금 장난하는 걸로.....!"
유한이 핸드폰에다 대고 빽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간신히 진정한 덕근이 휴대폰을 다시 휙 낚아채 갔다.
"한 시간 내로 지포라이터를 가져오지 않으면 네 형은 용궁 구경을 하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
할 말을 마치고 덕근은 전화를 끊었다.
형이란 놈도 물론이지만, 동생 놈도 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는 그였다.
한 30분쯤 갇혀 있었을까?
갑자기 창고의 문이 열리더니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를 본 유한의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떠졌다.
"너, 너 이 자식!"
방금 들어온 것은 드림맥스의 리셉션 파티 때 봤던 해커였다.
찾을 때는 어디에 숨었는지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더니 이렇게 쉽게 만나게 될 줄이야.
유한은 자리에서 벌덕 일어나 해커에게 가려고 했다. 하지만 조폭틀이 그를 붙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덕근이파에 메모리 회수를 의뢰한 해커는 덕근의 연락을 받고 이렇게 달려온 것이다.
"메모리는?"
"곧 올 거요."
그러면서 덕근을 눈짓으로 유한을 가리켰다. 그제야 유한을 발견한 해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넌?"
"이 빌어먹을 자식아! 그래 내 캐릭터 날려 먹으니까 좋더냐? 그리고 전화를 해 놀려 먹으니 좋아?"
"이놈이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해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당장 바츠 살려 내! 내 케릭터 살려 내라고, 이 개자식아!"
유한은 당장이라도 해커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주변의 조폭들이 그를 붙잡았지만, 유한이 힘들 쓰자 질질 끌려갔다.
"얌전히 있어!"
"컥!"
보다 못한 덕근이 손날로 유한의 뒷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유한은 정신을 차렸다. 슬그머니 눈을 떠 보니 자신은 묶인 채로 꿇려져 있었다. 하긴 그 난리를 쳤는데 묶어 놓지 않는다면 더 이상할 것이다.
'유현이 녀석은 아직 오지 않았나?'
아직 약속 시간이 되지 않은 모양. 조폭들의 얼굴엔 여유가 있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든 유한을 보고 도끼가 으름장을 놓았다
.
"한 번만 더 날뛰면 당장 죽여 버릴 거니까 알아서 해라잉?"
협박을 하든 말든 유한은 해커 자식만 노려볼 뿐이다.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해커는 코웃음을 쳤다. 그 모습을 본 유한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이 자식! 니가 날 이렇게 만들고 무사할 것 같냐?'
당장이라도 저 뻔뻔한 면상을 뭉개 주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을 묶인 몸. 지금 상태론 밧줄을 풀 방법이 없었다.
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갑자기 밖에서 신호가 왔다. 그리고 창고 문이 열리더니 조폭의 안내를 받은 유현이 들어왔다.
덕근은 유현을 노려보았다.
운동 좀 하는지 제법 튼튼해 보이는 녀석이다. 면상과 눈빛은 건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니가 동생이냐? 좀 늦었구나."
"차가 막혀서요. 근데 우리 형은?"
"저기."
유현은 덕근이 눈짓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유한이 묶여서 꿇려 있었다.
"제가 왔으니 이제 우리 형 풀어 주시죠.
"
"그 전에 나한테 줘야 할 것이 있을 텐데?"
"먼저 우리 형을 풀어 주세요."
당당한 유현의 모습에 덕근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싫다면?"
"그럼, 이거 부숴 버릴까요?"
유현이 지포라이터, 아니 그 케이스 속에 든 메모리 장치를 거내 들었다. 손에 쥐고 엄지손가락으로 누르는 것을 보니 진짜 부숴 버릴 기세였다.
상황을 심각하게 지켜보던 해커가 덕근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는 연방 고개를 저었다.
일단 져 주라는 뜻이다. 일단은.
덕근은 짜증이 났지만, 도끼에게 유한을 풀어 주라는 눈짓을 보냈다.
풀려난 유한은 해커 쪽을 노려보다가 일단 동생이 있는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가온 유한을 보며 유현이 말을 건넸다.
"형 다친 데 없어?"
"개념 없는 동생 덕에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뭐 그 정돈 금방 낫겠네."
"그래, 자식아. 니가 내 속 긁은 게 어제오늘 일이냐?"
두 형제가 서로의 안부(?)를 물을 때 덕근이 끼어들면 말했다.
"자, 이제 지포라이터를 돌려주실까?"
덕근이 유한을 먼저 풀어 준 데에는 두 고딩 놈들이 도망쳐도 잡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출입문과 창문쪽은 부하들이 막아선 상태.
두 놈이 아무리 날뛴다 해도 연장을 든 부하들을 뿌리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받아요."
유현은 메모리를 던졌다.
조심스럽게 받아 든 덕근은 곧장 해커에게 건네다.
해커는 얼른 자신이 가져온 넷북에 메모리를 연결해 내용물을 살폈다. 내용물에 별 이상이 없는지, 그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그덕였다.
그런 해커의 모습을 보던 덕근은 고개를 돌려 유한 형제를 바라봤다. 이제 이 망할 형제 놈들을 작살 낼 시간이다.
"너희들 각오는 돼 있겠지?
"
"무슨 각오요?"
"뭐긴 뭐야, 죽을 각오지. 우리 얼굴을 본 놈들을 살려 둘 거라 생각했냐?"
덕근의 으름장에도 불구하고 유현은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아니, 그는 코웃음 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혀를 차고 있었다.
"이래서 대한민국 조폭들은 안 된다니까. 신의가 없는데 어떻게 세계로 진출할 수 있을까."
"시끄럿! 진출할 마음 전혀 없거든!"
덕근이 회칼을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유한은 재빨리 동생 앞으로 나오면서 발차기를 날렸다. 시원하게 뻗어간 옆차기가 덕근의 배에 정확히 꽂혔다.
"컥!"
"혀, 형님!"
놀란 졸개들이 덕근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덕근은 아프기도 아팠지만, 쪽팔림이 더했다. 그의 얼굴은 토마토 만큼이나 새빨갛게 변했다.
'제길, 방심했다.'
"동생아, 너는 대체 간덩이 어디 내던졌냐?"
"그러는 형은 안드로메다에 팔았나?"
"자식아,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조폭을 약 올려!"
"그러시는 누구는 발로 찼지 아마?"
형제가 태평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보자니 덕근의 이성은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조져 버렸!"
하늘 같은 형님의 명령에 조폭들이 일제히 형제에게 달려들었다. 유현은 잽싸게 모서리 쪽으로 튀었고,유한은 달려드는 조폭들을 뿌리치고 때려눕혔다.
"형, 눈 감아."
구석으로 도망쳤던 유형이 외쳤다. 그러나 마침
회칼을 피하기 바빴던 유한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뭐라고?"
"눈 감으라고!"
쨍그랑!
유현이 고함을 지르는 그 순간, 창문을 개고 둥그런 물체가 안으로 들어왔다. 조폭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굴러 온 그것은 번적하더니 사방으로 강렬한 섬광을 내뿜었다.
"크아악!"
"으악!"
강렬한 빛에 갑자기 눈이 멀어 버린 조폭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당한 것은 조폭들뿐만 아니었다.유한도 눈을 부여잡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눈 감으랬잖아! 바보 형아!"
"제길, 누가 이럴 줄 알았냐?"
그때였다.
창고 문이 꽝 하고 열리더니 드림맥스 경비 직원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전부 제압해!"
손석진의 명령에 경비 직원들은 아직 시력이 마비돼 움직일 수 없는 조폭들을 마구 잡아들였다. 간혹 저항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럴라치면 전기 충격기와 삼단봉이 무자비하게 떨어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거냐?"
시력이 약간 회복된 유한의 눈에 조폭들이 박살 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실 내가 좀 늦은 데는 이유가 있어."
유현은 이곳으로 오는 도중 일단의 인물들과 만났다고 한다.
그들은 바로 손석진과 드림맥스의 경비 직원들이었다.
유현에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한 그들은 시간에 맞춰 섬광한을 터트릴 테니 구석으로 피해 있으라 했다. 그 뒤는 자신들이 해결하겠다고.
"제길!"
한쪽 구석에 있던 해커가 제압하러 온 경비 직원에게 넷북을 집어던졌다.
그는 섬광탄에 다하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당당한 유현을 의심하고 있던 그는 유현의 외침에 곧장 손으로 눈을 가렸다. 무엇인가 불길한 상황이 벌어질 거라 예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반갑지 않은 녀석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저, 저자식이!"
유한으 창고 뒷문으로 해커가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아직 완전히 시력이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곧장 놈을 쫓아갔다.
창고 뒤는 철거 직전의 허름한 동네 골목이었다.
해커는 꼬불꼬불한 골목 안으로 달아났다. 그는 악귀같이 달려오는 유한을 보고 이를 갈았다.
'제길, 피할 곳이.....'
해커는 어느 집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동네가 재개발 추진 중이라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그는 빈 방으로 들어가 숨을 돌렸다.
밖에선 유한이 악을 쓰며 찾는 소리가 들렸다. 쉽게 찾지는 못할 것이다. 좀 전의 골목에서 살짝 따돌렸고, 빈집도 한두 곳이 아니니까.
해커는 여기서 숨을 돌렸다가 유한이 사라지면 달아날 생각이었다.
삐리리리리ㅡ!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누가 전화를 했나 보니 덕근이었다. 아까 두들려 맞고 있던데 어떻게 탈출을 했던 것일까?
"여보세요?"
"나다."
낯익은 목소리에 해커는 움찔했다. 머뭇거리던 그에게 상대방의 말이 계속 흘러나왔다.
"역시 진태 너였군. 목소리를 들어보니 확실히 알겠어."
해커는 여전히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대방에게서는 계속 말이 이어졌다.
"뭐, 내가 만든 보안 프로그램을 깰 만한 실력자는 허진태 너뿐이니까. 그래도 얼굴까지 성형했을 줄은 몰랐다."
지금 해커 허진태의 얼굴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드림맥스 본사에 침입하기 위해 어느 신문 기자의 얼굴을 베껴서 성형했던 것이다. 이미 자신의 얼굴은 알 만한 자들은 다 알고 있으니까.
"아직도 이런 짓을 하고 있을 줄은....."
"흥! 이런짓? 그래도 손석진 니가 하는 한심한 짓보다야 낫지."
가만히 있던 진태가 입을 열었다.
덕근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한 것은 아까 창고에서 봤던 손석진이었다. 그는 손석진과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아까운 재주를 망상 세계를 만드는 데 쓰고 있다니..... 난 너 같은 몽상가를 보면 구역질이 나. 그런다고 엿 같은 세상이 달라지나? 그 가상세계가 진짜 세상이 될 것 같냐고, 멍청아?"
"최소한..... 사람들이 달라지는 데 도움이 될 거라 믿고 있다."
"크크크! 개소리 마! 그딴 식으로 세상은 안 변해! 바꾸려면 모조리 박살 내고 부숴 버려야지!"
비슷하게 불우한 생활을 했었고, 같이 공부를 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방향은 전혀 달랐다. 한 사람은 언제나 바라고 굼꾸던 세상을 만들려고 했고, 한 사람은 세상을 어지러트리는 데 전력을 다했다.
"진태 네가 말하는 식으로도 세상은 안변해. 그리고 넌 틀렸어. 그저 세상을 탓하며 네 욕심만 채우고 있을 뿐이지."정곡을 찔린 허진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다, 닥쳐!"
"세상은 생각한 것보다 밝고 아름다워. 난 내가 선택한 길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해. 너같이 어둠만 보는 사람도 얼마든지 별할 수 있다는 사례가 바로 내 눈앞에 있으니까."
"뭐라고?"
통화는 거기까지였다. 손석진 쪽에서 먼저 끊어 버린 것이다.
허진태도 계속 통화를 할 겨를이 없었다.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유한이 들어온 것이다.
'아차, 전화벨 소리!'
진태의 생각대로 유한은 전화벨 소리를 듣고 찾아왔다. 재개발 중인 텅 빈 동네에 희미하게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는 과연 누구의 것이겠는가.
'손석진, 이 망할 자식!'
"어딜 가! 거기 안 서?"
진태가 창문을 뛰어내려 도망치자 유한도 곧장 따라왔다.
급하게 쫓느라 착지를 잘못해서 다리를 살짝 삐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츠를 날려 버린 해커 놈을 잡을 수 있다면 다리가 부러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헉헉! 너 이 자식. 왜 날 못 잡아먹어서 난리냐?"
진태를 뒤를 돌아보며 빽 소리를 질렀다.
그는 정말 억울했다.
철천지원수를 진 것도 아닌데, 숱하게 많은 조폭들을 놔두고 왜 하필 자신을 쫓아온다 말인가.
그때 드림맥스 본사에서도 그랬다. 그냥 다짜고짜 덤벼들었다.
"나더러 널 잡으라고 한 건 바로 너잖아!"
"뭐? 내가 언제?"
"흥, 이젠 그것도 발뺌할 생각이냐?"
허진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릏이었다. 도대체 자신만 죽어라고 쫓아오는 것만도 화가 나는데 아까부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따지고 드니.....
결국 해커 허진태는 골목 끝에서 유한에게 잡히고 말았다. 유한은 마치 다이빙을 하듯 몸을 날려 진태를 붙잡았다.
쿠당탕탕!
두 사람은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바닥을 뒹굴었고, 그 와중에 진태가 지니고 있던 지포라이터 메모리가 골목 바닥에 내다 굴렀다.
그러나 진태는 그걸 미처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유한의 주먹이 마구잡이로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크아악! 이 빌어먹을 고딩 새끼가!"
"화낼 사람은 이쪽이거든!"
두 사람은 볼썽사납게 골목 바닥을 뒹굴려 일명 개싸움을 벌였다. 엎치락뒤치락 그들의 싸움은 경비 직원들이 달려와 말릴 때가지 계속되었다.
"실장님, 산업스파이 일당을 모두 잡았습니다."
상황이 정리되자 경비 책임자가 손석진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드림맥스는 처음부터 유한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유한이 산업스파이가 흘리 메모리 장치를 주워 갔기 때문이다.
나중에 CCTV에 녹화된 화면을 보고 그 사실을 안 정경욱은 당장 메모리를 회수하라 지시했지만, 손석진이 말렸다.
마침 그에게 좋은 방법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산업스파이 일당이 유한에게 접근하기를 기다려 일망타진하는 것이었고 그 계획은 지금 성공했다.
"모두 안전 가옥으로 압송하세요."
"예? 경찰에 넘기시는 게 아닙니까?"
"회사 털렸다고 광고할 일 있습니까? 놈들을 경찰에 넘기는 것은 철저히 입을 막은 뒤입니다. 그런데 메모리 장치는 회수했습니까?"
손석진의 물음에 경비 책임자는 골목에서 회수한 메모리를 건네주었다.
"잘했습니다. 이걸로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요."
"할 일이 남다니요?"
"두고 보면 압니다."
경비 책임자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손석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중국 상해.
이곳에 샹화 소프트의 본사가 있었다.
"사장님!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사장실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얍삽하게 생긴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심드렁한 얼굴로 새로운 먹이가 없나 인터넷 이곳저곳을 뒤지던 사장의 눈이 번적하고 빛났다.
"차세대 가상현실 시스템을 말인가?"
"그렇습니다. 드림맥스가 개발하고 있던 그겁니다. 우리가 고용한 해커가 한국 지사고 시스템이 저장된 메모리와 패스워드를 보내 줬답니다."
그리고 샹화 소프트 한국 지사장은 곧바로 본사 개발실에 파일을 전송해 주었고.
"허허허! 띵하오! 수고했어, 부사장!"
"뭘요, 사장님이 다 계획하신 일 아닙니까."
서로를 치하한 두 사람은 한국 지사에서 보낸 파일을 보기 위해 개발실로 달려갔다.
정말 오랫동안 공들인 작업이었다.
은영전기라고, 드림맥스의 히트작 아르페디아 온나인을 베껴서 서비스했지만, 그 결과는 신통찮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드림맥스가 개발하고 있다는 차세대 가상현실 시스템을 슬쩍해 보자는 것이다.
정보에 따르면 차세대 가상현실 시스템은 현재보다도 더 실감나는 상황을 유저에게 선보여 줄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을 기반으로 차기 신작을 만들면 시장 점유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샹화 소프트는 드림맥스의 개발실 직원을 스카웃해 보려고도 했고, 외부에서 해커를 동원해 해킹도 시도해 봤다. 하지만 둘 다 실패했다.
마지막 방법으로 한국의 해커를 고용해 드림맥스 내부에서의 해킹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위험도와 실패 확률이 높았지만, 작전은 멋들어지게 성공했다.
"자, 어디 한번 볼까?"
사장의 말에 직원이 다운받은 파일을 열어 스크린에 띄웠다.
그런데, 나와야 할 자료는 나오지 않고 낯선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저희 드림맥스의 데이터를 훔쳐 내시느라 무척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사내는 유창한 중국어로 인사를 했다.
그를 본 사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게임 업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치고 저 사내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저, 저 작자는 드림맥스 개발실장 손석진이잖아! 왜 나오라는 데이터는 안 나오고 저자가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 글쎄요. 저도 잘....."
사장의 물음에 부사장은 식은담만 뻘뻘 흘렸다.
그로서도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손석진은 계속해서 말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전 드림맥스의 개발실장 손석진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의 노고에 작은 선물을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부디 사양치 마시고 받아 주시길."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갑자기 화면이 팟 하고 꺼졌다.
순간 두 사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때 갑자기 파란 화면이 뜨더니 무수히 많은 숫자들이 배열되기 시작했다.
"으악!"
비명을 지른 것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직원이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컴퓨터가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럼 끄면 되잖아."
부사장의 말에 직원은 울상을 지었다.
"이미 늦었습니다. 메인 서버로 바이러스가 침투하고 있습니다."
개발실 컴퓨터는 회사 메인 서버와 연결되어 있었다.
물론 몇 겹의 보안 프로그램들이 있었지만, 바이러스는 마치 비웃듯이 보안 프로그램을 해제해 버리고 있었다.
메인 서버는 그 자체로 샹화 소프트의 심장.
이곳에 샹화 소프트에서 서비스하는 게임들의 데이터가 모두 저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바이러스가 침투한다면?
"안 돼! 당장 막아! 회선을 끊어!"
사장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지만, 이미 손을 스는 것은 늦어 버렸다.
직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샹화 소프트의 메인 서버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그날로 샹화 소프트에서 서비스하는 모든 게임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