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탐색전
8강전 2번째 경기는 가우리 길드의 철갑기마대와 블루라이언스의 시합이었다.
유한은 관중석에 앉아 옌스가 귀련이 만든 엄청난 무구들을 과연 어떤 수단으로 극복할지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빰 빠라 빰빰빰~~!
나팔 소리와 함께 양쪽 진영의 선수들이 앞으로 나왔다.
철갑기마대는 어제와 별다른 차이점이 없는 반면 블루라이언스들은 달랐다.
저마다 자신의 몸통 반만 한 무기들을 들고 나온 것이다.
배틀 헤머, 배틀 엑스, 오함마, 철퇴 등등.
하나같이 크고 둔중한 무기들이었다.
"호! 옌스 자식. 꽤 괜찮은 생각을 했는데?"
게세르 용병단과의 싸움에서 보았듯 귀련이 만들어 준 철갑기마대의 갑옷은 왠만한 공격은 퉁겨 낼 정도로 튼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곳에 칼질 몇 번 한다고 타겯이 들어가겟는가.
그래서 옌스는 생각한 것은 날은 무드지만 대신 일격필살의 깅능이 있는 중(重)병기들이었다.
배틀 해머나 오함마로 찍어 버리면 아무리 두껍고 단단한 갑옷이라도 부서져 버릴 테니까.
"크하하하! 이번 시합은 우리가 이긴다!"
시작을 알리는 폭죽이 터지자 옌스는 철갑기마대 중앙에 공을 쳐 넣고 말을 달려갔다.
그의 뒤로 블루 라이언스들은 기세 좋게 무기를 휘두르며 쫓아갔다.
상대가 귀련의 무구를 착용했다지만 그들은 승리를 확신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양 팀이 충돌하자마자 줄줄이 낙마하는 것은 철갑기마대가 아닌 블루 라이언스들이었다.
난전 상황에서 옌스와 그의 친구들은 엄청난 괴력으로 중병 기들을 휘둘렀지만,
귀련의 무구가 달리 유명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조금씩 타격을 입긴 했지만, 블루 라이언스들의 무구를 튕겨 내거나 빗겨 냈고,
그 이후에 이어진 철갑기마대의 반격에 블루 라이언스들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크억! 이럴 수가!"
옌스의 두 눈이 불신으로 부릅떠졌다.
강대의 갑옷에 작렬했던 자신의 필살일격이 거짓말처럼 미끄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역시 갑옷 모양이 저런 이유를 이제 알겠어!'
갑옷의 삐죽삐죽한 모양새는 멋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경사진 장갑판은 무기의 충격력을 다른 방향으로 흘려버리고 있었다.
힘이 집중되지 않으니 화살이건 철퇴건 제 위력이 발휘되지 않는 것이다.
거기다 슬레이트 지붕처럼 울룩불룩한 철판은 보통 평평한 천판보다도 강도가 더 강한 듯했다.
'철판을 일일이 저렇게 구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겠는걸.'
유한은 경기보다 귀련의 무구를 파악하는 데 더 신경을 쏟았다.
어차피 블루 라이언스가 승리할 가능성은 없어 보였고, 그리 되면 4강에서 레드 타이거 용병대는 철갑기마대와 맞붙어야 했다.
옌스 녀석을 응원하느니 상대의 단점을 찾는 것에 주력하는 것이 나았다.
"으아아! 이 몸이 지다니!"
시합은 3:2로 철갑기마대의 승리로 끝났다.
옌스는 홀로 분전하여 2골을 넣었지만, 철갑기마대들은 블루 라이언스에 다가와 경의를 표했다.
"옌스님이십니까? 귀하 같은 숨은 고수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직 소속이 없으시면 우리 가우리 길드에............"
"시끄럿! 누구 약 올리는 거냐!"
옌스는 철갑기마대의 대장 협부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경기장을 나갔다.
그의 뒤를 풀죽은 기색의 동료들이 따랐다.
"잘 가라, 새파란 애송이들아!"
"크크크! 우승한다더니 꼴 좋~다."
나가는 동안 그들은 레드 타이거들에세 야유와 비웃음을 들어야 했다.
당연하게도, 옌스는 펄쩍 뛰었다.
"이 망할 꼰대들! 이 몸이랑 현피 뜨고 싶나!"
"어이거, 이놈아 그럼 누가 무서워할 줄 알고?"
"한강 굴다리 밑으로 나와라. 형이 십 초 안에 달려가 주마."
계속된 야유에 옌스는 펄펄 뛰었다.
당장이라도 레드 타이거 용병대와 한판 뜰 기세였지만, 경기 진행을 맡은 그로지아의 NPC 기사들이 그를 경기장 밖으로 몰아냈다.
'후후. 수고했다, 옌스'
유한은 옌스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녀석과 블루 라이언스가 선전해 준 덕분에 귀련의 갑옷을 분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난 유한은 4강전 준비를 하러 갔다.
8강전 두 시합이 남아 있었지만, 김필중이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지그야, 이번에는 뭐 만들 거냐?"
경기장 입구에서 마주친 유한에게 물었다.
에르젠 방패가 제법 쓸모 있었기에 이번에는 어떤 것으로 철갑기마대를 상대할지 내심 기대가 되었다.
"글쎄요, 일단 철갑기마대의 방어구를 뚫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을 것 같네요"
유한이 생각하는 철갑기마대 갑옷의 방어력은 최소 300.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보다는 못하지만, 블루 라이언스들의 무지막지한 망치, 도끼질에 부서지지 않은 것을 보면 A급 무구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A급 무구를 만들어야 하겠네?"
"이론대로 하자면 그렇죠, 하지만......."
문제는 유한의 생산 스킬이 아직 A급 무구를 만들 만큼 높지 않다는 데 있었다.
거기다 문제의 갑옷은 명장 귀련의 무구가 아닌가.
보통 A급 무구들 이상의 방어력과 성능이 있다고 봐야했다.
유한의 얼굴이 굳자 자칼이 피식 웃었다.
"짜식!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라. 키 안 자랄라. 넌 네가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 나머지는 이 사법과 형님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
자칼이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부담을 덜어 주는 듯한 그의 말에 유한은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럼, 좀 있다 보자."
자칼은 다시 경기를 관전하러 갔다.
숙소의 간이 대장간으로 돌아가면서 유한은 귀련의 갑옷을 이길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뭘 만들어야 방어력 300의 갑옷을 뚫을 수 있을까?'
귀련의 갑옷이 무적이 아닌 이상 계속해서 두들기면 부술 수 있다.
그러나 이건 전투나 사냥이 아니라 시합.
한두 방에 격파해야 의미가 있다.
랜스? 모닝스타? 클레이모어?
그런 무기들은 아니었다.
이미 옌스가 깨진 것도 봤고, 그 자신이 대장장이기에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도대체 오우거의 일격도 거뜬히 막아 낼 것 같은 갑옷의 요철과 곡면 처리는 어떻게 한 거야?'
그 기술만 알 수 있다면 생산 스킬이 한 단계 더 오른 것과 같은 효과가 있을 것이다.
'나중에 귀련을 한번 만나러 가 봐야겠어.'
그와 잘 아는 파우린에게 받은 단검도 있으니, 찾아 가면 만나 줄 것이다.
물론 그런다고 귀련이 자신의 비법을 가르쳐 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야야! 당겨! 월척이다, 월척!"
경기장에서 숙소로 돌아가면서 다리를 하나 건너야 하는데 유한은 강을 건너다 낚시꾼 유저들이 소리 지르는 것을 들었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에는 낚시만 전문적으로 하는 직업이 있었다.
물고기를 잡아 돈을 벌고, 스킬을 올리는 직업이었는데, 낚시를 좋아하는 유저들이 더러 선택해서 하고 있었다.
몇몇 낚시꾼 유저들이 강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물고기를 낚아 올린 유저는 즉석에서 고기를 굽거나 매운탕을 끓여 먹기도 했고, 시장에 팔러 가기도 했다.
그리고
"으라차!"
제법 덩치가 큰 아저씨 유저가 강가에서 커다란 투망을 집어던졌다.
공중에 쫙 펼쳐지며 날아간 투망은 물속에 있는 수십 마리 물고기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묵직한 그물을 잡아당기는 아저씨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물론, 주변에 경쟁자인 다른 낚시꾼들은 펄쩍 뛰었다.
"아와, 님아 매너요"
"그렇게 싹쓸이해 가면 우린 뭐 잡으라고?"
주변의 유저들이 뭐라던 간에 문제의 비매너 유저는 또다시 투망을 강에 던져 많은 고기를 끌어 올렸다.
그물에 끌려 올라온 것에는 물고기만 있는 게 아니라 녹슨 투고나 부러진 칼따위도 있었다.
심드렁하게 싹쓸이 조업을 보고 있던 유한은 그물에서 투구와 칼이 나오는 것을 보고 눈동자를 빛냈다.
"그렇지! 그러면 되겠네!"
갑자기 유한이 박수를 치며 좋아하자 길 가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NPC와 유저들은 웬 미친 녀석인가 하고 유한을 바라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춤을 추며 숙소의 간이 대장간으로 달려갔다.
생각난 것이다.
귀련의 갑옷을 걸친 철갑기마대를 물리칠 무기가.
레드 타이거 용병대가 숙소로 돌아왔을 때, 유한은 콧노래를 부르며 열심히 무구를 만들고 있었다.
"노가다 노가다 강츄~ 노가다 노가다 강츄~"
멋대로 가사를 고쳐 부르던 유한은 고로에서 흘러내리는 쇳물을 받아 냈다.
-크롬 합금을 1개 만들었습니다.
스킬 경험치를 35 얻었습니다.
-합금 스킬이 5랭크로 올랐습니다.
솜씨가 1 올랐습니다.
인내심이 1 올랐습니다.
"나이스"
무구를 만들며 관현 합금을 제작하던 유한은 반갑게 떠오른 안내 창에 번쩍 손을 치켜들었다.
곧이어 안내창이 하나 더 떠올랐다.
-제련, 생산, 주물, 합금스킬이 모두 5랭크 이상이 되었습니다.
철공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업이 발전한 나라에 가서 관련 장비를 매입하고 새로운 스킬을 배우도록 하십시오.
이제 철공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하고자 하는 목표에 조건을 맞췄다 생각하니 절로 덩실덩실 춤이 추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철갑기마대를 격파할 방법들이 생각난 상황에 겹경사가 터진 것이다.
"이야, 표정이 아까하고 딴판인데, 뭐 좋은 방법이라도 생각났냐?"
"물론이죠! 이게 철갑기마대를 격파할 무깁니다!"
유한은 시제품으로 만든 것을 자칼과 레드 타이거 용병대원들에게 보여 주었다.
난생처음 보는 무기.
이게 뭔가, 정말 무기가 맞나 싶었던 레드 타이거들은 이내 탄성을 내질렀다.
전투 경험이 풍부한 그들은 유한이 만들 무기를 보고 대충 어떻게 사용할지 개념을 잡은 것이다.
"이대로도 가능하지만, 좀 더 개량할 여지가 있더라고요."
"그래, 내가 생각해도 이것만으론 좀 부족할 것 같아 보여."
철갑기마대의 허를 찌르는 기가 막힌 무기임에는 틀림없지만, 자칼의 눈에는 2% 부족해 보였다.
이미 거기에 대한 보완을 염두에 둔 유한은 자칼에게 쪽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이게 뭐냐?"
"그걸 좀 많이 구해 주세요. 되도록 강한 걸로요."
자칼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지금 유한이 구해 달라는 아이템은 쉽게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비싸거나 희귀한 것은 아니고, 그다지 쓸모가 없어서 거래 자체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품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승리에 꼭 필요하다면 어떻게든 구해서 유한에게 가져다주어야 한다.
"알았다. 이걸 구해 주면 되는 거지?"
"예, 그런데 8강전 남은 두 시합은 어떻게 됐어요?"
김필중이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고 싶진 않아 나왔지만, 결과는 궁금했다.
어느 정도 예상되긴 했지만 말이다.
"아쉬람 길드와 철십자 길드가 4강에 올라왔다."
"예? 아쉬람 길드가요?"
유한은 살짝 놀랐다.
아쉬람 길드의 상대가 아르페디아 온라인 10대 길드의 하나인 최가장 길드였기 때문이다.
근래에 경주 최씨 종친회원들을 중심으로 결속한 최가장은 랭커 최강현과 스코필드 등을 중심으로 급성장한 길드였다.
그들이 보여 주는 끈끈한 협력 플레이는 이미 동영상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들이 중소 길드에 불과한 아쉬람 길드에 패하다니.
"어떻게 된 겁니까?"
"시합 도중에 갑자기 최가장 길드의 말들이 마구 날뛰더구나. 자세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자칼은 거기서 잠시 말을 끊었다.
누군가 수작을 부렸을 거란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확신도 없는 상황에서 함부로 말을 하자니 좀 그랬다.
"그리고 귀환한 바츠 말인데......."
"바츠가 왜요?"
유한은 바츠에 관한 말이 나오자 귀를 번쩍 열고 자칼을 쳐다보았다.
"지난번과는 달리 오늘은 교체 멤버로 나오더라. 물론 나와서 죄다 쓸어 버렸지. 실력이야 저번처럼 막강했지만, 어쩐지 조금 힘이 떨어져 보이더라고."
그리고 자칭 바츠는 상대의 주축 멤버들을 쓸어버리기 무섭게 교체해 나갔다고 한다.
관중들은 그의 실력을 좀 더 보기를 원했지만,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저번 경기와 묘한 공통점이 있는 게 , 녀석이 플레이 한건 8~9분 정도라는 거야. 그리고 경기가 끝나지 않은 상대인데도 서둘러 경기장을 나갔어. 그건 16강전 흑표기와의 시합 때도 그랬지."
"흐음......."
"거기서 녀석은 투구를 제외한 장비는 출전 직전에 장비하더라고."
자칼이 말한 이상한 점은 별것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한은 무도로 단련된 자칼의 예리한 눈초리에 무시할 수 없는 날카로움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혹 그게 김필중의 사기스런 능력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어떻게 놈이 그런 사기적인 능력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그 비밀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놈이 바츠를 사칭한 사기꾼임을 만인에게 알릴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지금쯤이면 철십자 길드 녀석들도 숙소로 돌아왔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유한은 잠시 일손을 놓고 철십자 길드의 숙소로 찾아갔다.
철십자 길드의 숙소 앞은 여전히 유저들로 바글바글했다.
모두 전설과 같은 광전사 바츠를 보고자 하는 유저들이었다.
무심하게도 철십자 길드는 여전히 문과 창문을 꼭꼭 닫아 놓고 있었다.
심지어 숙소 주변에 길드 원들을 풀어 유저들의 접근을 가로막기도 했다.
"젠장, 너무하는 거 아냐? 얼굴에 금칠이라도 해 뒀나........"
"뭔가 더 신비해질 것 같아서 저러는 거겠지."
바츠와 유저들이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바츠 재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러다가 이미지 나빠지게군.'
바츠의 이미지는 외로운 늑대.
바츠는 다른 유저와 어울리지 않고 외길을 걷는 전사였고, 자신을 귀찮게 하는 사람은 용서치 않는 캐릭터다.
차라리 처음부터 이런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한껏 으스대 놓고는 코앞에 얼굴 한 번 안 보이는 몰염치한 짓은 하지 않았다.
'가만히 둬선 안 되겠어.'
유한이 군중들 헤치며 철십자 길드 숙소로 다가갈 때였다.
갑자기 커다란 손이 그를 붙들어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녀석이 유한의 눈에 들어왔다.
"뭐 하는 거야? 작살내러 가는 거라면 이 몸이 돕지"
"옌스……."
순간 유한의 머리에 번쩍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처음엔 단순히 유저들을 선동해서 김필중을 끌어낼 생각이었는데, 보다 놈들을 당황스럽게 만들 계책이 생각난 것이다.
"안 그래도 철갑기마대에게 지고 나서 기분도 저기압인데, 철십자 놈들에게 화풀이라도 해야지 안 되겠어."
"어이, 깽판 치기 전에 내가 하자는 대로 해 볼래?"
"어떤?"
유한은 귓속말로 옌스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지시했다.
옌스는 귓속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확 가서 박살내면 될 걸 뭘 그리 빙글빙글 복잡하게 하라는 건지.
"꼭 그렇게 해야 되냐?"
"사나이의 싸움에는 명분이 필요한 법이다."
왠지 그 말이 멋지게 들린 옌스는 시킨 대로 하기로 했다.
그는 유저들을 헤치고 철십자 길드의 숙소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숙소를 지키는 철십자 길드원이 검을 내밀려 그를 가로 막았다.
"물러 나지죠. 우린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이 자식이 죽으려고!'
옌스는 검을 즨 손에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아직 날뛸 때가 아니다.
유한의 말대로 명분이 필요했다.
"아, 난 수상한 사람이 아니다. 여기 바츠 유저가 있다면서?"
"그렇습니다만."
"난 바츠 침구다. 녀석을 만나러 왔으니 비켜라."
"바츠 님의 친구시라고요?"
철십자 길드 원들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거짓말 말고 가십쇼. 바츠님은 친구가 없습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지 모르십니까?"
"훗, 안다. 아르페디아의 외로운 늑대. 하지만 그건 게임에서만 그럴 뿐이잖나."
"그럼, 혹시.......?"
"철이 더러 친구인 종수가 왔다고 해라. 그럼 알 거다."
정말 바츠의 오프라인 친구인가?
옌스의 이야기를 들은 철십자 길드원들은 그렇게 오해했다.
여유 있는 옌스의 표정을 보자니 더욱 그 이야기가 진심으로 느껴졌다.
당혹감을 느낀 그들은 김필중에게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길드 원 한 명을 숙소 안으로 들여보냈다.
유저들 속에 끼여 있던 유한은 그것을 보고 씨익 웃었다.
'크크크! 자, 이제 어떻게 할 거냐?'
김필중 그 녀석이 바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놈은 바츠 유저가 누군지도 모른다.
바츠의 오프라인 친구에 대해서는 알 턱이 없다.
가짜의 입장에서 진짜의 친구가 왔다니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다음 길필중이 보일 반응은 과연 어떨까?
만약 놈이 대범하게 옌스를 불러들인다면, 철십자 길드의 비밀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된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케이지의 능력을 순식간에 뻥튀기했는지 말이다.
'반대로 놈이 만남을 거부한다 해도 상관은 없어.'
그때는 또 다른 방식으로 철십자 길드를 물 먹일 수 있다.
패전의 스트레스를 풀어야 할 옌스 입장에선 이쪽을 더 좋아할 것이다.
"우와, 진짜 바츠 님이랑 친구예요?"
숙소 앞에 모여 있던 유저들이 옌스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봤다.
"바츠와는 매일 만나고 있지."
사실을 말하는 옌스는 하나 꺼릴 것이 없었다.
"우와! 그랬구나. 님도 깡 세던 걸요. 배틀 폴로 경기에서 님이 플레이 하는 거 봤어요."
"후훗, 바츠의 친구라면 그 정도는 돼야지."
"과연! 근데 왜 같이 플레이 안 하셨어요?"
"하하, 그놈 성격이 좀 지랄 같아서…….,"
옌스가 밖에서 유저들과 떠드는 사이, 유한의 예상대로 철십자 길드는 완전히 발칵 뒤집혔다.
다른 누구보다 놀라고 당황한 것은 김필중이었다.
그는 고독한 늑대 바츠에게 친구가 있을 줄은 몰랐고, 더욱이 그 친구가 이렇게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바츠가 해킹당한 이후로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이 없어 아주 게임을 접어 버린 걸로 알았는데.
"어떻게 하죠?"
"제길, 그냥 적당히 핑계를 대서 보내 버려."
가짜란 게 들통 나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김필중의 말을 들은 길드 원들은 도로 밖으로 나가 옌스에게 곤란하다는 투로 이야기했다.
"이거 죄송합니다. 지금 바츠 님이 잠시 로그아웃을 하셔서요."
"그게 무슨 개소리냐? 내 메신저에는 분명 접속되어 있다고 되어 있는데"
"예에?"
길드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것은 주변의 다른 길드 원들이나, 창문 틈으로 상황을 살피던 아이언사이드 기사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지금 옌스가 뻥을 치고 있다고는 생각하니 못했다.
자신들 스스로 남에게 거짓말하는 상황이었기에, 남의 말을 의심하기보다 자신들의 거짓말이 들통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길! 진짜 바츠라도 찾아오는 날엔…….'
모든 것이 끝이다.
"잠깐만 기다려라. 내가 녀석에게 귓속말을 보낼 테니까."
'아. 안 돼.'
손을 쓰기는 이미 늦었다.
잠시 후, 옌스의 표정이 싹 달라졌다.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철십자 길드원의 멱살을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켁! 왜 , 왜 이러십니까?"
"이 자식아, 내 친구는 지금 랑스에 있다는데 저 안에 있는 바츠란 자식은 대체 누구냐?"
"그, 그게……."
"오호라, 너희들 지금 사칭하고 있구나. 그렇지?"
옌스의 한 마디는 장내에 엄청난 충격을 불어 왔다.
숙소 앞에 모였던 유저들은 저마다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바츠가 가짜라고?"
"설마! 그렇게 엄청난 무위는 바츠가 아니면 낼 수 없을걸."
"하지만 저 옌스란 유저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는데? 거짓말을 해서 얻을 데 없자나. 금방 뽀록날 걸 왜?"
슬쩍 유저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옌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제대로 약발만 치면 된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나였군. 이 자식들, 감히 내 친구를 사칭해서 사기를 치려고 해?"
"그, 그게 아니고!"
"안이고 밖이고 간에 너흰 오늘 내 손에 죽었다!"
옌스는 멱살을 잡은 길드 원을 집어던진 뒤 헤비 소드를 꺼내 들었다.
유한이 하라는 대로 다 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패전의 스트레스를 풀 시간이었다.
"아악! 싸움이다!"
"피, 피해!"
옌스가 검을 들자 주변의 유저들이 황급히 물러섰다.
이미 옌스의 실력을 배틀 폴로 대회에서 본 사람들이 많았다.
싸움에 휘말리면 지금 하늘로 날아가는 철십자 길드원의 꼴처럼 되고 말 것이다.
"잔챙이 말고 올챙이들 까지 다 튀어 나와!"
옌스가 순식간에 일반 길드 원들을 해치우자 숙소 안에서 아이언사이드 기사단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일이 이미 터지고 말았지만, 그중 몇 명은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 보려고 애를 썼다.
"너 이 자식! 가우리 길드에 지고 왜 우리한테 시비냐!"
"닥쳐, 난 그저 사기 친 놈들을 작살내고 싶을 뿐이다."
"거, 거짓말 마라! 괜히 시비를 걸고 싶어 그런 거지!"
"우릴 모함하려는 수작을 모를 것 같으냐!"
철십자 길드 원들은 필사적으로 항변해 봤지만, 주변 유저들의 얼굴에 서서히 의구심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없었다.
"억울하면 바츠를 불러라! 불러서 나를 작살내 보란 말이다, 하하핫!"
"치잇! 네깟 놈을 상대로 바츠님이 나올 것 같으냐?"
방금 그 말을 한 철십자 길드원은 옌스의 대쉬에 맞고 구석에 날아가 처박혔다.
"흥, 이 몸을 작살내 보고 그리 말해 보시지."
옌스가 마음껏 날뛰는데도 김필중은 나서지 않았다.
지금 후유증으로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그가 나섰다가는 박살만 날것이고, 그럼 가짜라는 확신만 심어줄 뿐이다.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유한은 내심 미소를 지었다.
비록 케이지의 비밀을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유저들에게 바츠가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심어 놓는데 성공했다.
이제 조금만 더 놈을 파헤치면 만천하에 정체를 까발리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네가 나락에 떨어지는 건 금방이다. 김필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