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05 지포 라이터
찌뿌듯한 몸을 풀기 위해 찾은 극기도장.
탈의실에서 도복을 갈아입던 유한은 점퍼 주머니에서 무언가 떨어지자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해커가 떨어뜨린 레어 아이템 지포라이터.
잃어버리지 않게, 뭔가 실마리를 찾기 위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것.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 될 물건이다.
'근데 이제 놈을 어떻게 찾는다?'
지포라이터를 개조한 길용이라는 사람도 사 간 해커의 이름을 모른다고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단서가 끊긴 것일까?
'이미 지문은 뭉개졌을 테고…….'
하도 만지작거려서 지문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냥 처음부터 경찰에 갖다 줄 것을.
그랬다면 혼자 설치는 것보다 소득이 있지 않았을까?
당시 해커는 유한과 술래잡기를 하는 동시에 드림맥스 본사 데이터를 털고 있었다.
사건이 사건인 만큼, 드림맥스와 경찰에서 큰 관심을 보였을 수 있다. 아마 이 같은 단서가 있다는 걸 알면, 그 부사장이란 사람은 무척 기뻐했을 것이다.
'아니, 그 인간은 고생 좀 해야 돼.'
유한은 정경욱이 비밀로 해 달라고 요구했던 것을 떠올렸다.
감히 하늘 같은 고객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다니!
지금쯤 본사 해킹 문제로 사장에게 한창 박살 나고 있을지 모른다. 그걸 생각하니 기분이 즐거워져 큰 단서가 될지도 모를 지포라이터를 제공할 의사가 더더욱 사라졌다.
'크크큭, 피똥 좀 싸 보라지.'
자신이 해커를 찾는다고 했던 고생을 드림맥스도 겪어 봐야 마땅했다.
그렇게 유한이 지포라이터를 보며 웃고 있을 때였다.
휙!
갑자기 옆에서 뭔가 어른거리더니 지포라이터를 채 가는 것이 아닌가.
"유한이 너 담배 피웠냐?"
고개를 돌리자 곽대발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의 눈동자엔 불량 청소년을 계도하겠다는 의지가 가득 깃들어 있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벌써부터 담배질이냐? 청소년기에 담배 많이 피우면 키가 안 자라는 걸 몰라?"
"아니, 그게 아니라……."
"시끄러! 이건 압수야."
곽대발이 지포라이터를 가져가려고 하자 유한은 후다닥 달려들었다.
"저한테 중요한 물건이에요! 돌려주세요."
도망치던 해커가 회수하려 했을 만큼 귀중한 물건이다.
한 번 허탕을 치긴 했어도 해커를 찾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텐대, 그런 물건을 곽대발에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
"돌려 달라고요!"
"어허! 이놈의 자식! 너 맞을래?"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곽대발은 이미 유한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한은 굴하지 않고 그의 도복 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그동안 배워 놓은 가락이 있는지라, 유한은 곽대발의 주막이 두렵지 않았다.
"곽 사범.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관장 송태수가 탈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왜 시끄러운가 했더니 유한과 곽대발이 라이터를 가운데 두고 다투고 있었다.
"관장님, 유한이 자식이 담배를 피웁니다.!"
"저한텐 소중한 지포라이터라고요!"
송태수는 엎치락뒤치락하는 두 사람을 떼어 내고 지포라이터를 압수했다. 곽대발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담배를 피운다고 남의 라이터를 뺏으면 쓰나."
유한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뺏으려면 담배도 뺏어야지 얼른 뒤져서 압수하도록."
"앗! 그렇군요. 근원을 뿌리 뽑아야……."
"뭐가 그런 건데요!"
유한은 이번에는 송태수에게 달려들었다.
곽대발에게 그랬던 것처럼 도복 자락을 붙들고 늘어졌지만, 극기도 창시자에게 그렇게 덤빈 것은 뿅망치를 들고 탱크에게 달려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놈의 자식이 어디 어른에게!"
"크엑!"
송태수의 큼지막한 주먹에 맞은 유한은 탈의실 반대편 벽까지 날아가 부딪혔다. 가볍게 유한을 제압한 송태수는 지포라이터의 뚜껌을 열고 부싯돌을 튕겨 보았다.
"어디 보자, 쓸 만한가?"
쓸 만하면 예연가인 장인어른께 상납할까 생각 중인 송태수였다.
그런데 아무리 부싯돌을 튕겨도 불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저 불꽃만 튀길 뿐.
"기름이 없는 모양이군."
송태수는 지포라이터를 케이스에서 뽑았다. 그런데 안에 라이터 기름을 채울 곳이 없었다. 기름통 대신 다른 물건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뭐야? 이거 라이터가 아닌가?"
의문의 물건은 메모리 전용 접속 단자였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던 유한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해커의 라이터에 저런 비밀이 있을 줄이야!
이제 왜 해커가 떨어트린 지포라이터를 회수해 가려고 악을 썼는지 알 것 같았다. 해커의 라이터는 지포라이터로 위장한 휴대용 메모리였던 것이다.
유한은 라이터에 감춰진 비밀을 알게 돼 기뻤다. 이제 담배 피운다는 누명도 벗을 수 있을 것이다.
"곽 사범이 오버했구먼, 이거 라이터가 아니야."
"야동이 들어 있을지 모릅니다!"
곽대발은 유한에게 사과를 하기는커녕 다른 가능성이 있다고 몰아세웠다.
그 말에 송태수가 또 한 번 눈을 부릅떴다.
얼마 전, 채린이가 유한의 대장간에 자릴 펴고 지내는 것 같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거기다 채린이 유한이랑 드림맥스 리셉션에 같이 갔었다며 자랑을 하기도 했다.
둘이 가까이 지내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유한이 놈이 메모리에 야동을 넣고 다닌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설마……."
"니가 내일의 태양을 보고 싶지 않나 보구나!"
송태수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근거 없는 오해라고요! 확인해 보면 되잖아요!"
유한도 확인하고 싶었다. 곽대발이 씌운 누명을 벗고 싶기도 했지만, 해커의 메모리 안에 뭐가 들었는지 정말 궁금했다.
"오냐, 그래 확인해 보자!"
사무실로 달려간 송태수는 컴퓨터 메모리를 꽂았다.
유한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고, 곽대발도 따라 들어왔다.
"오! 뜬다, 떠!"
컴퓨터는 메모리에 있는 폴더를 읽어 냈다.
송태수는 그중 '내 파일' 이란 폴더를 클릭했다.
-패스워드를 입력하십시오.
"뭐야, 이거?"
폴더를 여는 데 패스워드를 입력하라니.
과연 해커다운 행동이었다.
폴더의 패스워드 입력은 라이터가 분실되거나 남의 손에 들어갔을 때를 대비한 최후의 수였을 것이다.
과연 폴더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짐작은 가지만 확신을 할 수 없었다.
"수상하군!"
"무척 수상합니다."
"수상할 수밖에요."
해커에서 입수한 것이니까.
유한은 그렇게 생각해 대꾸한 것이지만, 사정을 모르는 송태수와 곽대발의 생각은 달랐다.
"비번이 뭐야?"
"예?"
"비번이 뭐냐고! 빨리 말 안 해?"
"그,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네 거잖아."
송태수와 곽대발, 두 사람은 지포라이터 메모리는 유한의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비번을 입력하면 폴더 안에 있는 적나라한 파일들이 나타날 것이라 확신했다.
유한에게 참으로 답답하고 억울한 일이었다.
"얼른 말 안 해?"
"크엑! 내 게 아니라고요!"
"이놈이 어디서 거짓부렁을!"
지포라이터의 비밀을 캐어 낸 뜻 깊은 날, 유한은 딱 안 죽을 만큼 얻어맞았다.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게임이 아니라 명성은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야동 보유자'의 불명예 스러운 칭호를 얻은 것 같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유한은 간신히 돌려받은 기포라이터 메모리를 노려보며 고민, 또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열지?'
유한은 컴퓨터에 박식한 편이 아니다. 그는 여느 사람들처럼 인터넷을 검색하고, 워드를 치거나 동영상이나 그림을 살짝 편집할 수 있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해커가 폴더에 걸어 놓은 락(Lock)을 풀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이걸 풀 수 있을까.
고민하던 유한은 무릎을 탁 쳤다. 뒤늦게 머릿속에 한 녀석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그래, 그 녀석이라면!'
이이제이(以夷製夷).
해커엔 해커로 대응해야 하는 것이 옳다.
이걸 풀 만한 존재를 떠올린 유한은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빈 병과 폐지가 어지러이 널려 있는 창고 안.
덩치가 큰 녀석과 작고 왜소한 청년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음모가 깃든 눈빛을 번쩍이는 청년은 덩치를 바라보며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좀 있다가 들어오는 녀석을 손봐 주면 된다?"
"그래, 불을 꺼 둘 테니까 녀석이 들어오자마자 밟아버려."
"훗! 그런 거야 내 전공이니까 문제는 없는데, 보수는?"
커다란 덩치의 물음에 왜소한 청년, 블라덱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 일대에서는 알아주는 싸움꾼인 이녀석을 움직이려면 적당할 만큼의 돈을 찔러 주어야 한다.
"오십 만원. 놈을 확실히 손본 뒤에 지급하지."
"훗! 좋아. 놈이 빨리 왔으면 좋겠군."
"곧 올 거야. 올 때가 됐어."
몇 시까지 갈 거니 아지트에서 기다리라고.
그냥 들이쳤으면 자신이 아무런 준비도 못했을 텐데. 이렇게 기회를 주다니 멍청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다.
끼이익!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블라덱은 재빨리 전원 스위치를 내렸다. 창문도 미리 가려 놓았기에 창고 안은 암흑천지나 다름이 없었다.
"야, 블라덱. 불은 왜 끈 거냐?"
방문자는 바로 유한이였다.
유한이 아는 해커는 블라덱이었다. 그를 통해 메모리의 락을 풀고 해커 추적에 대한 성과도 들을 겸해서 찾아온 것이다.
"크크크! 감히 형님의 존함을 막 부르다니, 역시 싸가지를 밥 말아 먹은 녀석이로군."
"너 뭐 잘못 먹었냐? 당장 불 안켜?"
유한은 갑자기 블라덱이 반항적으로 나오자 어리둥절했다.
저번에 자신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뒤로는 고분고분 하더니 오늘은 갑자기 태도가 확 변했다.
"흥, 그동안 내가 너 따위가 무서워서 기었는 줄 아냐? 그냥 네놈한테 조금 미안해서 협조했을 뿐이야."
"이게 진짜 돌았나! 야! 너 빨리 불 안 켜면 맞는다?"
유한의 인내심이 서서히 바닥나려 할 때였다. 블라덱이 갑자기 고함을 빽 질렀다.
"어이, 불곰! 놈을 확 조져 버려!"
"누가 불곰이라는 거냐!"
블라덱의 외침에 호응이라도 하듯 유한의 앞에 갑자기 시커먼 덩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두 팔을 뻗어 유한을 붙잡아 번쩍 들더니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쾅!
"크윽!"
난데없는 일격에 유한은 정신이 아찔했다.
방심한 것도 있지만, 상대의 실력도 강해 보였다. 전광석화 처럼 나타나 자신을 들어 던진 것을 보면 말이다.
"어느 놈의 새끼가……."
유한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려고 하자 덩치는 유한의 다리를 잡아 그대로 던져버렸다.
한 손으로 사람을 집어던지다니, 정말 힘 하나는 장사였다.
쿠웅!
다행히 폐지 더미에 떨어졌지만, 충격이 없지는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정신 줄을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한은 곽대발의 살인 킥을 맞고도 버텨 냈다. 어제 송태수에게 억울하게 두들겨 맞고도 무사히 생존하지 않았는가?
이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후후후, 눈앞에 별이 빙글빙글 돌 거다."
덩치가 빈정거리더니 유한의 뒤춤을 잡았다.
그런데 뭔가 가벼웠다. 이상하게 생각하던 덩치는 오른쪽 무릎을 강력하게 얻어맞고 신음을 흘렸다.
"두 번은 몰라도 세번은 안 통해!"
유한은 또다시 덩치에게 잡히자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버렸다. 그리고 곧장 몸을 돌려 상대의 다리를 걷어찼다.
어두워서 실루엣만 보였지만, 덩치는 상체 근육을 꽤나 단련시킨 듯했다.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집어던지는 걸 보면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러나 잘 단련된 상체와 달리 하체는 다소 약해 보였다. 그래서 무릎에 들어간 발차기도 효과가 있었다.
"이 자식이!"
불격의 일격을 당한 덩치는 버럭 화를 내면서 달려들었다.
유한은 덩치가 내민 손을 피한 뒤 녀석의 측면으로 비스듬히 빠져나가며 또 한 번 로우 킥을 날렸다.
퍽!
발차기가 작렬하자 덩치의 몸이 휘청거렸다. 유한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달아 덩치ㅡ이 다리를 노려 발차기를 날렸다.
다리는 사람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아무릭 건장한 상대라도 다리에 충격을 받으면 얼마 버티지 못한다. 하체 수련을 게을리 한 사람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제길! 오십 만원 갖곤 안 돼! 백 만원은 받아야겠어!"
그러나 덩치는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유한의 발차기를 껑충 뛰어 피하더니, 순식간에 그에게 달려들어 허리를 붙잡았다.
'이크!'
이대로 들리면 끝장이다.
유한은 덩치의 정수리를 팔꿈치로 찍었다. 제대로 타격이 갔는지, 허리를 잡고 있던 덩치의 손이 느슨해졌다.
그러나 힘이 약해졌다 뿐이지 덩치는 아직 유한을 잡고 있었다. 그녀석은 들기를 포기한 듯 뒤로 유한을 밀쳤다. 넘어지는 것 역시 끝장임을 알고 있는 유한은 다리를 뒤로 빼고 버텼다.
"뭘 꾸물거리는 거야! 얼은 없애 버리란 말이야!"
계속 엎치락뒤치락, 두 사람이 밀고 당기며 싸우고 있자 ㅂㄹ라덱은 애가 타서 죽을 지경이었다.
덩치 놈이 이기면 그나마 낫지만, 만약 유한이 이기게 되면?
그런 결과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덩치가 이길 거라 생각하고 오만방자한 모습을 다 보였지 않은가.
'제길, 구경만 하고 있어선 안 되겠어.'
블라덱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덩치가 유한을 잡고 있을 때 지원 공격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각목이나 쇠파이프 같은 몽둥이를 찾았지만, 어두워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전원을 다시 올려야 할 듯했다.
팟!
창고 안에 환하게 불빛이 들어왔다.
어둠에 익숙해진 상태에서 갑자기 빛을 보게 되자 눈이 무척 부셨다.
유한은 물론이요, 덩치도 공격을 중단했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뒤로 물러섰다.
"잠깐, 스톱!"
"알았다. 치사하게 공격하기 없기다."
두 사람은 떨어져서 시력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하하하, 나랑 비등하게 싸울 수 있는 놈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제길, 나도 너같이 무식한 놈이랑 싸우게 될 줄 ……."
유한은 말을 하다 말았다.
눈부심이 사라지며 주위 사물이 구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는데, 정말 엉뚱한 인간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설마 죽어라 싸웠던 상대가 이놈일 줄이야!"
"에, 옌스?"
"넌……바츠?"
눈앞의 덩치는 다름 아닌 옌스였다. 저번에 코스튬 페스티벌에서 실물을 본 적이 있기에 확실했다.
"니가 왜 여기 있어?"
"처리해야 될 놈이 너였냐?"
어이없다는 듯,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사이 몽둥이를 찾은 블라덱은 팔뚝을 걷어붙이며 유한에게 다가왔다.
"강유한 이 자식!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기세등등하게 다가왔던 블라덱은 옌스가 유한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자 버럭 소리르 질렀다.
"야, 고경덕! 뭐 하는 거야? 저 자식 붙들지 않고!"
"미안하지만 응이 좀 깨졌수."
"뭐? 이유가 뭐야!"
"푸하하하핫!"
유한은 어리둥절해 하는 블라덱을 보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손봐 주기 위해 용병을 고용한 것 같은데, 하필이면 그게 고경덕, 옌스였다니.
"바츠는 나랑 아는 사이다."
"아, 아는 사이?"
그저 아는 정도가 아니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서로 협력하는 사이, 즉 동료다.
'킁, 제법인데?'
고경덕은 예전부터 바츠와 캐릭터로 승부를 내겠다며 다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현피를 먼저 뜨게 될 줄이야.
하지만 실망스럽지 않았다.
북성 기계공고 최고의 싸움꾼인 자신과 대등하게 싸울 정도로 한가락하지 않는가.
"후후후, 역시 바츠 유저답군."
유한은 고경덕이 자신과 더 이상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고경덕에겐 볼일이 끝난 셈.
이제 즐라덱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할 일만 남았다.
"감히 용병을 고용했겠다?"
"아, 아니그게 아니고……. 야 경덕아, 뭐 하는 거야! 빨리 저놈을 박살 내란 말이야!"
유한을 향해 뭐라 변명을 하려던 블라덱은 고경덕을 향해 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고경덕은 고개를 내저을 뿐이다.
"미안, 형씨. 이놈은 나랑 동료라서."
"야, 불곰 너……!"
이렇게 배신을 때리는 것이 어디 있는가!
안 그래도 웬만한 조폭과 싸워도 지지 않을 거라는 고경덕만 믿고 다른 친구들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유한이 다가올수록, 블라덱의 얼굴은 점점 새파랗게 변했다.
"일단 좀 맞고 시작해야겠지?"
유한이 주먹을 뿌드득거리며 다가오자 블라덱은 애써 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 오늘 컨디션도 안 좋을 텐데 그냥 대화로 풀면 안될까?"
"아냐, 컨디션은 문제없어. 누구 덕분에 몸이 다 풀렸거든."
유한은 블라덱을 구석에 몰아놓고 마구 두들겨 팼다.
이런 녀석은 어설프게 때려서는 안된다. 하이에나 근성을 갖고 있음으로 확실히 상대가 어떤지 각인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같은 일이 또다시 반복될 터.
다시는 잔꾀를 부리지 못하도록 철저히 밟아 놔야 한다.
"크아악!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 테니 제발 용서해줘!"
"안 돼! 이 정도는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고."
"우악! 케에에엑!"
무려 1시간에 걸쳐 두들겨 패는 유한이었다.
"그러니까 이 메모리의 폴더에 락이 걸려 있다는 거야?"
마치 단풍이 든 것처럼 울긋불긋한 얼굴이 된 블라덱은 유한에게서 지포라이터 메모리를 넘겨받았다.
신명나게 두들겨 맞을 때는 죽고 싶었지만, 지포라이터로 위장된 메모리를 보고는 눈을 반짝 빛냈다.
"이거 개조품인가? 우와, 감쪽같은데?"
"닥치고 해제나 하시지."
"알았어,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주먹은 좀 내려 줘."
블라덱은 컴푸터에 메모리를 꽂았다.
도장에서처럼 컴퓨터는 메모리를 인식했고, 폴더를 클릭하자 패스워드를 입력하라는 안내창이 떴다.
"어때? 락을 풀 수 있겠어?"
"걱정 마, 이런 걸 푸는 게 내 전공이니까."
언제 쳐맞았냐는 듯 블라덱은 자신만만하게 작업에 들어갔다. 역시 해커는 해커다운 일을 할 때 가장 힘이 나는 모양이다.
블라덱은 컴퓨터 옆에 있는 상자에서 메모리 칩들을 뒤적이더니그중의 한 개를 꽂아 넣었더. 키보드를 몇 번 두들기자 락을 해제하는 프로그램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이, 바츠. 저 메모리 안에 든 게 뭐야?"
지금까지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고경덕이 다가와 물었다.
"매우 중요한 단서."
"단서?"
"더 이상은 알면 다쳐."
유한의 짧은 대답에 고경덕은 입을 다물었다. 왠지 물어도 쉽게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삐이이이이--!
갑자기 컴퓨터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잘 돌아가던 해킹 프로그램이 뚝 멈췄고, 이내 화면은 공포의 푸른색으로 물들며 수천수만 개의 숫자와 문자응 토해 내기 시작했다.
"으악! 안 돼!"
뭐가 잘못된 모양.
블라덱은 정신없이 키보드를 두들기며, 네트워크로 연결된 다른 컴퓨터를 이용해 또 다른 프로그램을 가동시켰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드 안의 파일은 남김없이 파괴도었고, 네트워크로 연결된 다른 컴퓨터의 상태도 이상해졌다.
결국 블라덱은 메인 컴퓨터에 연결된 케이블을 절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떻게 된 거야?"
유한이 묻자 블라덱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비정상적으로 락을 해제하면 해당 컴퓨터를 공격하는 프로그램이 들어 있었나 봐."
"바이러스가 들어 있다고?"
"제길, 누군지 몰라도 보통 실력이 아냐."
블라덱은 분통을 터트렸다. 컴퓨터가 부셔진 것보다 자시느이 실력으로 락을 해제 못했다는 게 더 화가 났다.
"그럼 못하는 거야?"
"지금은, 하지만 곧 방법을 찾을 테니까 시간을 좀 줘"
블라덱은 노트북에 메모리를 꽂고 안에 든 파일을 복사했다. 통째로 복사해서 분석하려 했는데, 그런 시도도 용납되지 않았다. 복사하는 데도 패스워드를 입력하라 했기때문.
"쳇, 까다롭게 구는군."
"됐어, 그만 하고 돌려줘."
유한은 메모리를 도로 회수했다.
처음엔 블라덱에게 맡겨 놓을까 생각도 해 봤지만, 중요한 단서를 못 믿을 놈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왜? 내 실력을 못 믿는 거야?"
"아니, 나중에 다시 찾아올 테니까 그동안 락을 풀 방법을 찾아 봐, 그리고 바츠를 해킹한 놈은 추적해 봤어?"
"미안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가 없어. 그런데 이상한 소문을 들었어."
"소문?"
"누가 바츠가 쓰던 칼을 사용하고 있대."
분명 플레임 소드를 말하는 것이리라.
바츠의 대표 장비 중 하나였으니까.
플레임 소드는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화염의 신전 퀘스트를 수행해야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검이다. 유니크 아이템은 아니지만, 게임에서 몇 자루 없는 상급 레어 품목에 속했다.
"믿을 만한 이야기야?"
"글쎄, 그게 정말 바츠가 쓰던 것인지, 아닌 다른 플레임 소드를 보고 착각한 것인지 몰라도 조사해 볼 가치는 있지 않겠어?"
"소유자가 누군지는 모르고?"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어, 나이는 십 대 후반에 생긴건 금발에 날라리 같다던가?"
그동안 블라덱이 보내 온 정보 중에서 제일 나았다.
물론 유한이 실제로 해커와 맞닥트려 싸우고 얻어 낸 단서에 비하면 신뢰성이나 관심도가 낮았지만.
'아무래도 천천히 알아봐야겠군.'
급한 길도 돌아가라고 했다. 조바심을 내서는 될 일도 안 되는 법이고 일을 급하게 진행하다간 중간에 중요한 힌트를 놓칠 수도 있었다.
웃기게도 그렇게 찬찬히 알아보는 것은 게임을 통해 배웠다. 얼마 전에 끝냈던 헬리오스 신전의 종 퀘스트를 통해서.
블라덱의 아지트에서 볼일을 마친 유한은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고경덕이 그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처음엔 이 스토커 같은 놈이 자신에게 볼일이 있나 싶어는데, 경덕이 유한을 따라온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가는 길이 같을 뿐이라나.
"난 또…… 네가 우리 집까지 쳐들어오는 건 아닌 가 했다."
"훗, 미소녀의 저택이라면 몰라도 뭐 하러 냄새나는 사내놈의 집을."
그렇게 피식거리던 고경덕은 살짝 눈빛을 바꾸더니 은근히 말했다.
"사실은 수상한 놈이 쫓아오고 있어서 우회하려는 거야."
고경덕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한 20미터 뒤에 있던 남자가 헛기침을 하며 돌아서는 것이 보였다.
평범한 척하고 있었지만, 옷차림이나 눈빛이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너 무슨 죄 지었냐?"
"그건 아니고 …… 일단 모른 척해. 도망쳐 버릴지 모르니까."
"대체 누군데?"
"나도 모르지. 확실한 건 창고에서 나왔을 때부터 따라왔다는 거야."
"재주도 좋군. 미행당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후후, 워낙에 이 몸의 뒤통수를 노리는 놈들이 많아서 말이야."
고경덕은 뒤통수 감각이 예민한 편이었다.
양아치들과 곧잘 충돌하는 그는 기습을 당하는 일이 잦았다. 정면 승부에서 그를 상대할 자신이 없는 놈들이 길목에서 버티거나 몰래 따라와선 한 방 갈기고 도망가곤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며 뒤통수가 수차례 터지자, 감각이 남다르게 변하게 되었다.
"일단 모른 척하고 같이 좀 가 줘."
인적 드문 곳에서 잡아서 어떤 놈인지 족쳐 보자는 것이 경덕의 작전.
유한은 녀석의 작전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고경덕이 자신을 졸졸 따라오자 어쩔 수 없이 한패가 되고 말았다.
"젠장,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그냥 잡아서 줘패!"
"안 돼. 내가 잘못 짚었을 수도 있잖아, 좀 더 확인해야해."
사내는 줄기차게 그들의 뒤를 따라왔다. 잠시 걸음을 멈췄을 때는 그도 멈췄고, 두 사람이 가게에서 물건을 볼 때는 맞은편 가게에서 뭔가 사는 척했다.
가면 갈수록 미행은 은밀해졌다. 멀어지는 척하면서도 어느새 근처에 와 있곤 했다.
"참 끈질긴 인간이네."
"제길! 더 이상은 안 되겠어. 이렇게 뒤통수가 근지러워서야!"
두 사람은 네거리에서 왼쪽 코너로 꺽어 들어갔다.
경덕은 근처에 세워진 간판 뒤에 숨었고. 유한은 가로수에 몸을 바짝 기댔다. 거들 생각은 없었고, 고경덕이 추적자를 어찌 처리하나 두고 볼 생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추적자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조금만 더 있으면 코너를 돌아올 것이다.
"너 뭐 하는 새끼야!"
고경덕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추적자가 깜짝 놀라 나동그라지게 만들 셈이었는데, 정작 놀란 것은 여학생들이었다. 그것도 모르는 여자애들이 아니라 괸장히 낮익은 얼굴들.
둘 중에 유한이 너무나 잘 아는 여고생이 버럭 화를 내면서 고경덕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왜 고함을 지르는 거야!"
"컥! 시아 누님이 왜?"
분명히 추적자가 튀어나와야 할 상황에 왜 채린이 나오는 것인지?"
"히잉, 옌스 오빠가 나한테 욕했어."
채린의 옆에 있던 소녀가 울먹거렸다.
"잘한다. 여자애나 울리고."
"시끄러, 바츠! 미안, 이 오빠는 너희를 놀라게 하려던게 아니라 ……."
고경덕은 울먹이는 소녀를 달래려고 애썼다.
실물은 처음 보지만, 귀여운 차림새와 말투 덕분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공중 요새를 같이 추락시키고, 광렙도 함께 했었던 신관 에이린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본의 아니게 울리고 말았다.
"어휴, 너흴 놀래 주려고 했다가 우리가 놀라 버렸으니 ……."
채린의 이야기에 따르면 상황은 이랬다.
학교를 마치고 에이린과 만나서 쇼핑을 하고 있다가 유한과 옌스가 함께 가고 있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몰래 따라가 놀래 주려고 했는데, 그만 발각이 되고 말았다고.
"누님, 혹시 이상한 아저씨가 우릴 쫓아오는 거 못 봤어?"
"아저씨? 아! 중간에 마주친 사람이 있긴 있었지."
"맞아요. 내 어깨를 확 치고 갔어요. 사과도 안 하고."
추적자는 뭔가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하고 도망친 모양이다. 참 눈치가 빠른 인간이다. 덕분에 고경덕만 물먹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여기 무슨 일이야? 나랑 유하처럼 쇼핑이라도 하고 있었던 거야?"
"뭐 우린 그저…… 근데 에이린 본명이 유하였어?"
"소유하에요. 옌스 오빠 본명은 뭐에요?"
"아, 난 고…… 종수."
경덕이란 이름을 대려다 얼은 다른 이름으로 둘러댔다. 옌스는 평소 자신의 이름이 촌스럽다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거짓말은 오래가지 못했다.
"경덕아, 왜 부모님이 주신 이름을 바꾸고 그러냐."
"바츠 너!"
"여기 바츠가 어디 있냐? 난 강유한이라고."
"웃기지 마! 너 바츠 맞잖아!"
둘이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보며 채린과 유하는 깔깔 웃었다. 좀 전의 다소 어색했던 분위기는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게임 속에서 어울리던 분위기 그대로였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조용한데 가서 이야기하는 건 어때?"
"그래요. 유하는 목이 말라요~."
네 사람은 사이좋게 길 건너편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그런 그들을 멀리서 바라보는 사내가 있었다.
조금 전까지 유한과 고경덕의 뒤를 쫓아다녔던 자였다. 여전히 두 사람을 추적하고 있던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며 자리를 옮겼다.
마치 진짜 추적은 이제부터라는 듯, 그의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카페에서 생과일 쥬스를 마신 뒤 유한은 친구들과 헤어졌다.
집으로 가던 유한은 그 자리에서 잠시 멈칫했다. 옷가게의 쇼윈도에 자신의 뒤에 있는 사람이 흐릿하게 비쳤는데, 상당히 낯익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까 고경덕을 쫓아왔던 남자로 재빨리 몸을 돌리긴 했지만, 이미 유한의 눈에 띈 뒤였다.
'옌스 녀석을 쫓던게 아니었나?'
고경덕의 말로는 블라덱의 본거지에서부터 쫓아왔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을 쫓고 있는 거라면 무엇 때문일까.
죄 지은 것이라곤 없었고, 양아치나 조폭과 다툰 적도 없다. 게임에서도 현피를 뜰 만한 일은 한 적이 없었는데.
'설마 …… 잃어버린 메모리 때문에?'
해커가 사람을 시켜 자신을 추적하고 있는 중이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때 딱 맞게 스포츠카가 나타나 놈을 태우고 도망친 것을 생각하면 놈은 혼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지포라이터를 주워 갔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때 현장에는 드림맥스 경비직원들뿐이었다. 그들은 유한이 지포라이터를 줍는 것을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자, 잠깐! 만약에…….'
유한은 생각을 집중해 가능성을 추론해 보았다.
보안이 철저한 드림맥스 본사에 침입해 해킹을 시도했다는 것은, 뭐가 믿을 구석이 있다는 소리다.
만약 드림맥스 내부에 해커와 내통한 사람이 있다면?
그게 혹시 경비직원이라면?
내통한 경비직원으로부터 현장에 있던 학생이 뭘 주워가더라는 말을 들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해커가 자신의 분실물을 유한이 주워 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당연히 잃어버린 메모리를 되찾으려 시도할 것이다.
'제길, 처음부터 날 쫒는 거였어!'
유한은 눈치 채지 못한 척하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일부러 복잡한 곳을 골라 가며 추적자를 따돌리려 했는데, 계획을 수정했다 . 상대가 집요하다는 게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근처의 노점을 구경하는 척하며 다가갔다
액세서리를 파는 노젬에는 벨트 버클과 반지, 목걸이등의 여러 가지 금속 제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거 얼마죠?"
"팔천 원인데 칠천 원에 드리죠."
유한은 구입한 액세서리를 주머니에 넣고 다시 걸었다.
느긋하게 두 손을 점퍼 주머니 안에 넣고 있던 유한은 한순간 총알같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갑자기 유한이 뛰자 추적하던 남자는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휴대폰으로 동료들에게 연락을 했다.
"목표물이 뛴다! B조 추적에 나서라!"
[알았다, C조는 예상 루트에 대기하라.]
유한은 인도 옆 도로로 달려오는 까만 스포츠카를 보았다. 해커를 태웠던 차였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차가 들어올 수 없는 골목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런데 골목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 달려가는 그의 어깨를 확 잡았다.
"야야, 어딜 가냐. 물건은 놓고 가야지."
옌스보다는 못했지만 제법 덩치가 당당한 사내였다. 마치 친한 친구에게 말하듯 했지만, 유한의 어깨를 집는 손에는 힘이 가득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유한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컥!"
팔꿈치로 상대의 옆구리를 가격한 유한은 서둘러 그의 손에서 벗어나 앞으로 달렸다. 더 이상 가로막는 사람은 없었지만, 쫓아오는 사람이 하나에서 셋으로 늘었다.
셋 다 짧은 머리에 깍두기 스타일이였다.
"거기 서!"
"도둑 잡아라! 소매치기 잡아라!"
유한이 잘 도망가자 세 녀석은 거짓말을 해서 유한을 붙들려고 했다. 그러나 대다수 행인들은 냉정했고, 그나마 정의로운(?) 시민들은 유한에게 떠밀려 넘어졌다.
"젠장! 좀 서라고!"
"무슨 고삐리 새끼가 저렇게 잘 뛰어?"
세 추적자는 유한의 지치지 않은 지구력에 이가 갈릴 지경이였다, 마치 마라톤을 하듯 뛰어가고 있지 않은가.
유한이 극기도장에서 체력 단련을 했다는 걸, 알 리 없는 그들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헉헉! 제발 좀 서라!"
"A조, B조 새끼들은 뭐 하는 거야!"
유한을 쫓는 C조 추적자들은 정말 입에서 거품이 나올 지경이 되었다.
복잡한 거리레서 빠져나온 유한은 강남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한강의 다리 위를 지나던 유한은 천천히 발걸음을 늦추며 몸을 돌렸다.
C조 추적자들도 발걸음을 늦췄다.
비 오듯이 땀을 흘리는 그들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 서려 있었다. 웬만하면 라이터만 뺏고 끝내려고 했는데, 지금은 저 고삐리 자식을 반쯤 죽여 놓지 않으면 분이 안풀릴 것 같았다.
"젠장, 더럽게 끈질기네."
세 사람이 천천히 다가오자, 유한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지포라이터를 꺼내 들어 뚜껑을 열어 보였다.
"찾는 게 이거 맞습니까?"
"그래, 맞으니까 얼른 내놔!"
"쳐 죽이기 전에 안 내놓냐?
사내들이 유한을 무섭게 을러댔다. 그들의 눈은 유한이 들고 있는 도깨비 문양이 새겨진 지포라이터에 집중되어 있었다.
'꿀꺽! 저걸 가져가면…….'
의뢰인은 엄청난 보상을 약속했다. 그들이 몇 년을 열심히 자릿세를 삥 뜯어도 모으기 힘든.
"알았어요, 들릴게여. 저도 오래 살고 싶거든요."
유한은 순순히 사내들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포기하는 듯하자 사내들은 긴장을 풀었다. 그렇게 유한이 그들 앞 3미터까지 다가갔을 때였다.
"자. 가져가세요."
"으악, 안 돼!"
지포리이터가 하늘을 날았다. 우아하게 짧은 비행을 끝낸 은색의 지포라이터는 시퍼런 한강물로 떨어졌다.
"이런 빌어먹을 고딩 새끼가!"
"뭐 해, 얼른 건져 내!"
눈앞에 유한이 있음에도, 그들은 두들겨 패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엄청난 노다지나 다름없는 물건을 건져 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풍덩! 풍덩!
그들은 앞 다투어 다리 아래로 몸을 날렸다.
"하핫! 추운데 고생 많이 하십쇼!"
유한은 얄밉게도 다리 아래의 세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유한은 유일한 단서를 버린 것이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던져 버린 것은 가짜였으니까.
'바보들, 내가 진짜를 던졌을까 봐?'
주머니 안에는 메모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유한은 좀 전 악세사리 노점에서 7,000원을 주고 지포 라이터를 하나 샀다.
그 뒤 주머니 속에서 살그머니 두 라이터의 내용물을 바꿔치기했다.
사실 껍데기만 버릴 수도 있었지만, 알맹이가 빼 놓았을 수 있다는 의혹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크크, 어디 한번 싸늘한 강바닥을 실컷 뒤져 보슈.'
땀빼고 7,000원을 날렸지만, 그래도 악당들에게 골탕을 먹였으니 되었다.
"이 고삐리 새끼! 잡히면 죽여 버린다아아아아!"
한강에서 허우적거리던 세 사람은 악다구니를 썼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의 고함을 들어줄 사람은 이미 멀리 가 버리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