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 (56/143)

Chapter 01

초대받지 않은 손님

                          1

"난 지금 너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통화는 거기까지였다.

해커는 전화를 끊어 버렸고,놈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 유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실례합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유한이 나가려고 하자 손석진이 붙잡았다.

오랫동안 게임 개발에 미쳐 산 그라 해도 눈치가 없진 않았다.

자신과 한창 대화를 나누다 갑자기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얼굴이

벌개져 뛰쳐나가려고한다.

당연히 그에게 문제가 발생했음을 직감했다.

"아,그게…."

유한은 뿌리치려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여기는 드림맥스 본사인데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아르페디아 온라인

을 만든 원개발자다.

그의 힘을 빌리면 해커를 잡는 게 한층 쉬울것이다.

"절 해킹한 해커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바츠를 해킹한 자에게서 전화가 왔다고요?"

손석진은 놀란 듯 눈을 동그렇게 떳다.

"제가 얼마 전부터 해커를 쫓고 있었는데,이 망할 놈이 지금 자기가

저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고……."

"그게 정말인가?"

유한의 말을 불쑥 자르고 나타난 사람은 드림맥스 부사장 정경욱이었다.

그는 손석진을 찾아왔다가 유한과 그의 대화를 본의가 아니게 엿듣게 되었다.

바츠를 해킹한 해커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단다.

이것이 뜻하는바가 무엇일까?

손석진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부사장님,바츠를 해킹한 해커가 지금 본사 안에 있습니다.

그것도 이 행사장에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허허,자네 말이 사실이면 간을 아주 분식점에 팔아버린 놈이군"

정경옥은 기가 막혀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해킹당한 상대를 놀리기 위한 장난 전화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경욱은 그 장난 전화를 결코 가볍게 넘길수 없었다.

해킹범이 유한과 술래잡기만 하란 법은 없으니까.

그는바로 본사 경비실의 책임자에게 연락했다.

휴대폰을 꺼내 일련번호를 누르자 정경욱의 눈앞에 홀로그램 영상이 떠올랐다.

본사 안에서 이용되는 단거리 화상 통신 이었다.

"지금 당장 본사 건물 전체를 통제하고 폐쇄시키도록."

[무슨 일입니까? 지금 파티중인거 아닙니까?]

"군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지금부터 개미 새끼 한마리 빠져나가선 안되고,

소란이 일어도 안돼. 무슨 말인지 알겠나?" 

경비 책임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일이 터진것이 틀림없다. 부사장이 저러는 것을보면 다급한

사안이고, 더불어 외부인에게 알려져서 좋을게 없는 일이다.

경비 책임자에게 지시를 하달한 정 부사장은 연이어 고객상당실과

홍보실을 연결했다.

"부사장이다. 오늘 리셉션에 초대한 유저 이백명의 데이터를 지금 즉시 조사해봐."

"오늘 리셉션에 초청된 사람들 명단을 확보해. 기자고 연예인이고 업계사람들이고 가릴것없이 전부."

이런 일련의 지시사항들은 1분도 안되는 시간에 모두다 이루어졌다.

재빠르고 과감한 지시에 유한은 감탄을하지않을수가없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기도했다.

이곳은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개발하고 관리하는 드림맥스의 심장부다.

자신과의 술래잡기 외에 해커가 '다른 장난'을 친다면 상황은 심각해지는것이다.

"리셉션은 이대로 중지되는 겁니까?"

손석진이 물었다.

"아니.예정되로 진행될거야. 끝나려면 아직 시간이있어. 다들 웃고 즐길 동안에 해결하면돼."

가급적이면 소란없이 조용히, 그리고 빨리 끝내야 한다.

언론사 기자들까지 온 상황에서 자칫 일이 잘못되거나 보여지게되면 큰 망신을 당할 수 있었다.

어디 망신뿐이랴,자칙하면 금전적,시간적,신용적 손실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정 부사장은 유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휴대폰 좀 빌려 주겠니?"

"예."

유한은 속으로 궁시렁대며 정경욱에게 휴대폰을 넘겨주었다.

드림맥스가 해커 색출에 서두르는것이 반갑기는 했지만,

그리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진작 자신이 해킹당했을 때 손을 썻다면 오늘 같은 난리법석은 부리지 않아도 될것아닌가?

아마 해커가 본사안이 아닌 밖에 있다고 했으면 신경도 안썻을것이다.

'데이터가 확 털렸으면 좋겠다.'

이런 괘씸한 생각이 드는것은 왜인지.

그러나 그것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이 해킹되면 자칫 지금의 지그에게도 문제가 생길수 있으니까.

"근데 제 휴대폰은 뭐 하시려고요?"

"번호 추적을 해보려고."

막 유한의 휴대폰을 받아든 정경욱의 옆에 홀로그램영상이 하나 떠올랐다. 

경비실에서 온 화살 통신이었다.

[부사장님.초청자 한 사람이 없습니다.]

"없다니?"

커다랗게 확대된 홀로그램 화면에는오늘 본사로 들어온

사람들의수와 지금 연회실에있는 사람들의수가 동시에 떠올랐다.

경비 직원이 말한대로 한 사람이 모자랐다.

"누군지 확인할 수 있나?"

정경욱의 말에 출입 때 CCTV에 찍힌 초청자들의 사진과 현재 연회실의

CCTV에 찍힌 초청자들의 사진들이 대조되고 겹쳐졌다.

한참 겹쳐지다가 단 한사람만이 남았다.

주걱턱과 가는 눈매가 인상적인, 30대 후반의 중년 사내였다.

"누군지 알 수 있나?"

[한민족 일보 문화부 유세창 기자입니다.]

출입시 제시된 신상 정보가 홀로그램 화면에 떠올랐다.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던 정경욱은 홍보실을 연결했다.

유세창이란 기자에 대해서 보다 확실히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얼마 지나지않아 홍보실에서 연락이 왔다.

한민족 일보 문화부에 유세창이라는 기자가 있다면서

신문사 홈페이지에 실린 프로필과 사진을 보내왔다.

"이건!"

닮긴 했지만 다른 사람.

언뜻 봐서는 동일 인물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표정이나 분위기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놈이 해커인가?'

유한은 유세창,아니 유세창 기자라고 꾸며 대고 들어온 해커의 면상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과연 해킹같은 음흉한 짓을 할 만큼 교활한 인상이었다.

비슷하게 생겨도 눈빛과 표정에 특종에 대한 열정이 느껴지는 유세창 기자와는 완전히 달랐다.

"당장 이놈을 찾아내! 어디서 수작을 부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역시 정경욱은 유한보다 드림맥스에 피해가 올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염려 마십시오. 최종 동선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드림맥스 본사에는 보안을 위해서 요소요소에 감시 카메라를 숨겨 두었다.

카메라들에 녹화된 정보를 추적하면 해커의 움직임이나 소재는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수한 시스템을 능가하는 두뇌를 가진 사람이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삼층 자재 창고에 있을겁니다."

손석진은 그렇게 말했다.

어떻게 확신하느냐는듯,유한과 정경욱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는 곧장 해답을 일러주었다.

"거긴 이번 리셉션 때문에 임시 폐쇄된 구역입니다.

카메라 수도 적어서 감시가 소훌한 쪽은 거기가 유일하지요.

아마 삼층을 벗어나지 못햇다면 분명…."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유한은 번개같이 튀어나갔다.

정경욱이나 손석진이 말릴 틈은 전혀 없었다.

"이런,이런! 우리 경비 직원들을 보내면 되는 일인데."

"놔둬 보죠. 당사자에게 맡기는것도 좋은 방법 아니겠습니까?"

손석진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대체 어떤 놈이지?'

오늘 손석진이 유한을 위해 준비한 이벤트는 대화를 나누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뿐이 었다면 벌써 따로 만났을테니까.

유한의 행동 패턴을 알아보기 위해 한 가지 더 준비한 것이 있었는데 뜬금없이 나타난 이로 인해 중단되었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훼방 놓은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그의 눈빛이 전에 없이 싸늘했다.

                            2

"자재 창고가 어디에요?"

휴개실을 뛰쳐나간 유한은 근처에 있는 드림맥스 직원을 붙들고 위치를 물었다.

어찌나 다급하고 맹렬했던지,직원은 엉겁결에 대답을 해 주고 말았다.

"자재 창고는 저쪽 복도 끝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고마워요!"

"근데 거긴 폐쇄된 구역이야!"

직원은 뒤늦게 유한을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유한은 그의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알려주는 방향으로 달려간 유한은 통로 중간을 가로막은 칸막이들을 떠밀어 버리곤 자재 창고 앞에 당도했다.

안에서는 뭔가 타자 같은것을 열심히 두들기는 소리가났다.

유한이 문을 열려고 문고리를 돌렸지만, 덜컥이기만 할뿐이었다.

"흥! 잠갔다 이거지?"

뒤로 물러난 유한은 문으로 달려가 어깨를 강하게 부딛쳤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유한은 곧장 자재 창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안에는 자재 창고란 이름답게 인쇄용 종이와 의자,책상과 가구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그리고 창고 구석 바닥에는 넷북 크기의 미니 노트북 하나가 놓여있었다.

노트북으로 무슨 작업을 했는지 몰라도,화면에는 해킹 프로그램으로 의심되는것이 떠있었고,

주변에는 해킹에 사용한듯한 수상한 전자 장비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방금 전가지만해도 해커가 여기서 무언가를 했다는증거였다.

'이놈은 대체 어디로?'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던 유한은 번개같은 뒤차기를 날렸다.

비품들 틈에서 살짝 빠져나오려던 해커가 유한의 발차기를맞고 벌렁자빠졌다.

우당탕!

해커는 누군가 창고로 들어오려하자,교묘히 비품들속으로 숨었다.

마침 작업은 거의다 끝났고, 훔쳐낸 정보도 메모리에 옮겨 담은후였다.

창고로 들이친 상대가 앞쪽에 신경을 쓸 틈에 빠져나가려 했는데,그만 들통 나고말앗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군.'

주변을 둘러보다 바닥에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보지못했다면 꼼짝없이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복수는커녕 또다시 놈에게 농락당했을터.

"어딜 도망가! 넌 오늘 내 손에 죽었어!"

해커가 일어나려 하자 유한은 녀석이 쓰던 노트북을 냅다 집어던졌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노트북을 받아든 해커는 유한이 무섭게 달려드는것을 보았다.

"제기랄!"

해커의 소매 속에서 칼 한자루가 튀어나왔다.

달려들던 유한은 순간 놀라서 멈추려 했지만, 이미 피하기는 늦었다.

해커가 들이면 나이프가 그의 북부로 찔러들어온것이다.

푹!

이번에 놀란것은 해커였다.

분명히 칼을 제대로 찔렀다고 생각했는데, 뭔가에 부딪쳐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이런! 하필이면 벨트에!'

회심의 일격이라고 날린 것이 벨트의 버클에 막혔다.

해커는 다른곳을 찌르려고 했지만, 유한의 발차기가 더 빨랐다.

"이 개자식! 어디다 칼질을!"

"크악!"

가슴에 강하게 얻어맞은 해커가 주르륵 밀려났다.

손에 들린 나이프는 발차기를 맞을때 떨어트려 버렸다.

그러나 그것보다 그를 더 심각하게 만든건 애지중지하던 지포라이터도 흘렸다는 점이다.

놀란 해커는 지포라이터를 회수하려 했지만,유한이 휘두른 주먹에 물러나야만했다.

"크윽,제기랄!"

"괞찮습니까?"

유한을 노려보며 이를갈던 해커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움찔 놀랐다.

드림맥스 경비 직원들이었다.

한창 잘나가는 게임회사답게 경비직원들은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강해보였다.

유한과 그들 사이에 포위되어 어쩔줄 몰라하던 해커는 곧바로 돌아서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와장창!

두꺼운 유리가 부서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해커의 몸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미친!"

빌딩 3층에서 뛰어내리다니 제정신인가?

놀란 유한은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쓰러진 해커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것이 보였다.

본사 앞에있는 화단으로 떨어진 덕분인지 크게 다친것같진 않았다.

간신히 몸을 추스른 해커는 쩔둑거리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그는 유한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도망친다! 일층에 당장 연락해!"

연락받은 1층의 경비직원들이 곧장 해커를 쫓았지만, 잡는데는 실패했다.

갑자기 새까만 스포츠카 한대가 달려오더니 해커를 태우고가버린 덕분이었다.

"젠장!"

3층에서 지켜보고있던 유한은 분한 마음에 발을 굴렀다.

다잡은 녀석을 눈앞에서 놓쳐 버리다니!

분해 하던 유한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발에 뭔가 밟힌다 싶어 봤더니 해커가 떨어트리고 간 지포라이터가 있었다.

주워서 살펴보니 꽤 고급이었다. 은으로 도금이 된 표면에는 도깨비 문양의 장식이 새겨져 잇었다.

대량 생상된것이 아니라 개인이 제조한 물건인지,G.Y 라고 찍힌 제작자의 이니셜도 있었다.

"훗,레어 아이템인가?"

도망가면서도 되찾으려고했던 물건이다.

희소성이 있는 물건이라면 그 주인을 찾는데 요긴하게 써먹을수 있는법.

그렇게 판단한 유한은 해커의 지포라이터를 품속에 단단히 챙겼다.

놈을 잡는 단서가 될 물건이니 함부로 다룰수는 없었다.

                                       3

유한이 해커와 싸우고 있을때,정경욱과 손석진은 개발실에서 회사의 중요 데이터를 살펴보고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갈리 없다고 생각해서 개발 내역의 유출이나 게임 데이터베이스의 이상 유무를

확인해 보고 있는것이다.

"아르페디아 온라인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합니다."

"다행이군."

정경욱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가장 걱정하던것이 그 부분이었다. 만약 해커로인해 게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면 금전적 피해는

둘째치고 회사의 신뢰가 엄청 추락했을 것이다.

"그 외 서비스되고 있는 다른 게임들의 데이터도 무사합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것이……."

"뭔데? 뭐가 문제야?"

"차세대 가상현실 시스템의 정보가 일부 유출되었습니다."

정경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차세대 가상현실 시스템은 현재의 캡슐보다 진보적인 기술이 적용될 예정이었다.

통신,가전제품에서 세계 굴지의 실력을 자랑하는 호성 전자와 의학 분야에서 신기술을 보유한 주식회사 

메티스와협력하여 개발한지 벌써 3년하고 7개월.

이게 실용화되면 또다시 세상에 정치풍파를 일으킬 것인데, 일부지만 시스템 데이터가 외부로 유출되었다니!

'역시 장난이 아니라 도둑질을 하러 들어왔던 건가!'

놈은 단순한 해커가 아닌 산업스파이였다.

그냥 데이터만 훔쳐 가는것으로도 모자라 회사 보안의 신용성에 흠집까지 입히려 했다.

바츠 유저에게 도발적인 전화를 한 것은 드림맥스를 해킹했다는 증인을 남기려는 수작일 것이다. 

자기 시스템을 해킹당한 일이 외부로 알려지면 회사로서는 분명 대망신 이니까.

'바츠가 해킹된 것은 이번일의 전조였던 건가?'

그런데 정경욱은 한 가지 이해가 안되는 점이 있었다.

"근데 차세대 가상현실 시스템의 개발은 대외비밀인데 대체 어떻게……."

"오성이나 메티스쪽에서 정보가 유출되었는지 모르죠. 개발자들의 회식 자리에서 충분히 흘러나올 가능성이 있지않습니까?"

손석직의 말은 정경욱에게 

'드림맥스 내에서 흘러나갔을 가능성이 있다.'

는 식으로 들렷다.

외부로 성과가 알려지지 않은채 묵묵히 개방에 열중인 팀원들에게 회식비를 찔러 준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더구나 정경욱 스스로 그 돈을 챙겨주거나 카드를 긁어 주지않았던가.

누군지 모르지만, 회사 내부에 해커의 협력자가 있었을것이다.

지금 정경욱이 바라보는 홀로그램 화면에는 3층 자재 창고에서 발견된 해킹 관련 장비들이 비춰지고 있었다.

저런것들은 절대 방문자가 들고 들어올 수 없는 물건들이다.

입구의 검문 시스템에 걸리게 되어있으니까.

분명 내통한 인사가 비정상적인 경로로 반입시켜 준비해 둔 것이 틀림없다.

정말이지,아주 단단히 준비해 두었다.

외부에서 접속했다간 차단을 당할까 싶어 리셉션 파티에 묻어 들어와 사내에서 해킹을 시도했으니까.

또 인터넷 회선으로 해킹 데이터를 전송하는 대신 대용량 메모리를 이용햇는지, 해커의 노트북에는 전송 케이블이 이어져 있었다.

"허허, 우리 회사가 이렇게 허망하게 털릴 줄이야."

"세상에 완벽한 방패는 없는 셈이니까요."

정경욱은 손석진을 서운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떠나지 않고 계속 회사에 남아 주었다면 보안이 이렇게 헐렁하지 않았을 것이다. 손석진은 보안 프로그램 인스펙터를

개발할 정도로 보안 프로그램 분야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자니까.

"덕분에 용의자 범위를 좁힐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 회사의 보안을 뚫을 만한 실력자는 흔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만한 실력자들의 뒤에는 그들의 실력을 사는

기관이나 기업이 있지요."

그 말에 정경욱의 얼굴에 화색이 돌앗다.

해커가 훔쳐간 데이터를 되찾을 수 있다면 이번 일은 무사히 넘어갈 수 있다.

"의심가는 곳 이있나?"

"샹화(想華)소프트, 중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내로라는 해커들과 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정경욱의 얼굴 근육이 꿈틀했다.

샹화 소프트는 샹화 그룹 휘하에 있는 중국 최고의 게임사로, 전 세계 게임 업체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했다.

잘나가는 게임이 있으면 그들의 빵빵한 자본력으로 흡수해 버리거나 홀랑 베껴서 서비스를 하곤 했다.

현재 샹화 소프트는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흡사하게 베낀 '은영전기(恩靈轉記)' 라는 게임을 주력으로 서비스하고 있었다.

물론 급하게 베껴 만든 게임이라 아르페디아 온라인만큼의 완성도는 없었다.

'하긴, 그쪽이 제일 의심되는군.'

샹화 소프트가 게임 관련 업체이기 대문에 손석진이 용의선상 1순위에 올려놓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전부터 샹화 소프트는 드림맥스에 불편한 접근을 자주 했었다.

게임을 베끼는 것은 물론 개발자나 기술자를 스카웃해 가는 식으로.

"일단 조사해 봐야 알겟지만, 내부 청소부터 해야 될듯합니다."

"물론이지."

드림맥스 내부의 암세포들을 적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같은 일이 몇번이고 반복될 것이다.

"그나저나 우리 용감한 바츠 유저님은 어찌 되셧나?"

"해커를 거의 잡을 뻔했다는군요."

화면에 빈손으로 돌아노는 유한의 모습이 보였다.

정경욱과 손석진은 다시 3층으로 내려가 유한을 만났다.

아쉬움이 역력해 보이는 눈빛이었지만, 그래도 당장 해커를 잡아 달라고 조를것 같지는 않았다.

"다친데는 없습니까?"

"큰일 날 뻔하긴 했지만 무사히 넘겼어요."

유한은 벨트 버클을 어루만졌다. 금속으로 된 버클에는 칼에 긁힌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무사하다니 다행이군."

안도하는 정경욱의 얼굴에 살짝 후회의 감정이 깃들었다.

바츠가 해킹되었다고 했을 때 문제를 감지해야만 했다.

유저의 책임이 아닌 내부에 이상이 있을 수 있다고, 오만하지 않고 좀더 확실히 캐보았다면 이런일이 벌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삐리리리리-!

정경욱이 유한에게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자신의 휴대폰인가 해서 살펴봤던 정경욱은 유한의 휴대폰임을 곧 알게되었다.

'해커인가?'

정경욱에게 전화를 돌려받은 유한은 그리 생각했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채린이었다.

"뭐하는 거니? 그렇게 할 이야기가 많아?"

"미,미안. 그리 오래 걸렸나?"

"얼른와.리셉션이 거의 다 끝나 간단 말이야. 지금 은비 언니가 유저들이랑 같이 사진 찍어주고있어.

늦으면 우리만 못찍게 될거야."

"알았어. 금방 갈게."

자신이랑 같이 사진을 찍겠다고 기다리는 채린을 생각 하자니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해커는 놓쳐 버렸지만, 그걸 계속 아쉬워하고 분해할 필요는 없다.

놈을 추적할 아이템을 하나 건졌으니까.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나 보군요. 기회가 되면 다음에 만나서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손석진은 정말 유한에 대해 많을것을 알고 싶었다. 그는 바츠시절부터 자신이 만든 게임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유저였으니까.

"그럼,다음을 기대하겠습니다."

손석진과 악수를 하고 돌아서는 유한을 부사장인 정경욱이 붙잡았다.

"오늘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해주게."

부탁이 아닌 명령조의 말투.

정경욱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경우 무슨 짓이라도 불사할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죠."

유한은 울컥했지만 일단 허락했다. 여기서 싫다고 하면 아예 이런저런 핑계를 붙여 붙잡아 두려고

할지 모르니까.

하지만 비밀 엄수에 대한 결심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었다.

드림맥스에 대한 악감정이 그의 마음속에서 더 커졌으니까.

유한이 비밀 엄수를 약속하고 연회실로 돌아가자 정경욱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직 연회실 안에 있는 초청객들은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비록 산업 스파이를 놓쳤지만, 사건이 밖으로 불거져 나가는 것은 막았다.

"일단 마무리는 됐고, 이젠 청소를 해야겠구먼."

"그전에 유리창부터 얼른 갈아 끼워야 합니다."

손석진은 방금 전송되어진 따끈따끈한 영상을 정경욱에게 보여 주었다.

해커가 도망치면서 뻥 뚫어 놓은 구멍.

그것을 바라보는 정경욱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깨진 유리창이 뻥 뚫려버린 드림맥스의 보안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제길,오늘 전부 야근이야!"

                                   4

리셉션 파티에서 돌아온 유한은 지포라이터의 출처를 조사해 보았다.

일단 수재(手載) 지포라이터를 전시하는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둘러본 다음,

관련 판매업체쪽의 홈페이지들을 순례했다.

"똑같이 생긴건 없네."

홈페이지나 블로그에 올라온 사진들을 모두 다 살펴봤지만 해커가 떨어트리고간

도깨비 문양의 지포라이터는 없었다. G.Y 라는 제작자의 이니셜도 조사해 봤지만, 역시 소득은 없었다.

"이거 무슨 유니크 아이템이라도 되나?"

게임이라면 기뻐했을 테지만, 현실에서는 답답하기만했다.

투덜거리던 유한은 지포라이터와 관련된 공예 동호회 홈페이지의 채팅방에 들어가 보았다.

마침 세 사람이 즐겁게 정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곰돌이K군 : 하이요

-텍사스전기톱 : 어서 53

-용접달인 :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분이네요.

-Zig : 안녕하세요, 뭐좀 여쭐것이 있어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유한은 휴대폰 카메라로 찍은 지포라이터 사진을 채팅방에 올려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Zig : 저거랑 같은 물건을 보신적 있으신가요?

-곰돌이K군 : 오오, 세공이 멋지구리 하군요.

-텍사스전기톱 : 헐~ 저런건 처음 보는 듯.

-용접달인 : G.Y? 이니셜도 못보던 거네요.

유한은 어깨가 축 늘어졌다.

흔한 물건이 아니라지만, 꽤 비싸 보이고 잘만든 물건이기에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줄 알았다.

물론 여기있는 사람들이 전문가가 아니라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실망감이 적지 않았다.

'그냥 경찰에 보내서 지문이나 조사해 달라고 할까?'

유한이 다른 방법을 궁리 중 일때 대화방에 한 사람이 더 들어왔다.

<초합금 님이 들어오셧습니다.>

-곰돌이K군 : 오오! 합금형 어서 와요.

-텍사스전기톱 : )△(/반갑슴!

-용접달인 : 합금님 격조하셧습니다.

-초합금 : 미안,작품 만드느라 바빠서.

초합금.

뭔가 분위기가 범상치 않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다들 그에게 굽신모드 였는데, 유한도 곧 그 이유를 알수있었다.

이 홈페이지에 올라온 지포라이터 사진의 절반 이상이 그가 올린것이었다.

그것도 직접 제작한 것이라면서.

-용접달인 : 합금님,이런 라이터 보신적 있어요?

-텍사스전기톱 : 저기 Zig라는 님이 보여줬3.

용접달인은 좀 전에 유한이 올린 사진을 초합금에게 보여 주었다.

과연 이 사람은 뭔가 알고 있을까.

놀랍게도 초합금은 해커의 지포라이터에 대해서, 아니 지포라이터의 제작자가 누군지 알고 있는듯했다.

-초합금 : G.Y ? 이거 길용이 꺼네.

-Zig : 길용이가 누굽니까?

-초합금 : 휴대폰 튜닝해주는 녀석입니다. 근데 지포라이터까지 손댄적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곰돌이K군 : 숨은 고수로군요.

-텍사스전기톱 : 아니,그보다 영역 침해인듯.

G.Y 이니셜의 주인은 휴대폰 튜닝의 전문가라고 한다.

원래 지포라이터는 다루지 않던 사람이니 지포라이터쪽으로 파고 들어갔던 유한이 그를 찾을 수 있을리

만무 했다. 초합금이라는 사람이 알고 있었던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길용이라…….'

유한은 휴대폰 튜닝쪽으로 조사해 보았다.

길용은 그방면에서 유명했던지 찾는것이 어렵지 않았다.

이니셜도 지포라이터에 새겨진것과 똑같았다.

'좋았어! 홍대 근처라 이거지?'

길용의 홈페이지에는 그가 작업하는 공방의 위치가 약도로 표시되어 있었다.

유한은 그 약도를 인쇄해 두었다.

'내일 한번 찾아가 봐야지.'

지금은 밤이 늦어서 곤란하다.

마음은 초조했지만,일단 내일을 기약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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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자 유한은 곧바로 홍대쪽으로 갔다.

약도를 보고,근처 사람들에게 물어본 덕분에 길용의 공방을 찾아가는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거참 가게 이름도."

내 멋대로 니 멋대로

그것이 길용의 공방 이름이었다. 설마 홈페이지 이름을 그대로 쓸 줄은 몰랐다.

'그래도 장사는잘되는 모양이네.'

오전부터 그의 가게앞에는 여대생들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가 개조한휴대폰 껍질들은 소녀 취향이나 여성 취향의 것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어서 옵쇼!"

공방안으로 들어가자 작업용 앞치마를 걸친 남자가 유한을 맞았다. 그가 바로 길용이었다.

20대 중반의 길용은 무척이나 유쾌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뭘 사시렵니까? 아님 개조하시렵니까? 휴대폰 기종은 어떻게되세요?"

"그보다 이 지포라이터 때문에 찾아왔는데요."

유한은 해커의 지포라이터를 길용에게 쑥 내밀었다.

라이터를 본 길용의 눈빛이 삽시간에 달라졌다.

"이건 예전에 심심풀이로 만든건데……대체 이걸 어디서 손에 넣으신겁니까?"

"우연히 얻게 되었는데요. 혹시 사간사람을 기억하세요?"

"글쎄요, 꽤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지 길용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은 생각나지 않겠다 싶어 유한은 어제 봤던 해커의 인상을 설명해 주었다.

"주걱턱에 가는 눈매라……글쌔요,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긴 한데."

"혹시 그 사람 이름을 아세요?"

"이름이요? 단골도 아닌데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겟습니까."

하루에도 수백명의 손님들이 들락거리는 가게다. 단골이 아니면 이름을 알기란 쉽지 않다.

거기다 머리위에 이름이 뜨는 게임이라면 모를까, 현실에선 얼굴만 보고 누군지 알 수 없다.

'바보같이… 괞히 헛걸음을 했잖아.'

가상현실 게임을 오래하면 현실감각이 없어진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어쨋거나 유한이 얻은 소득이라곤 '해커가 여기서 지포라이터를 샀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해커를 잡는 데는 그다지 도움을 될 것 같지 않았다.

유한이 빈손으로 공방을 나가는 순간,길용의휴대폰이 울렸다.

삐리리리리-!

"참나, 오늘만 다섯통째로군."

길용은 투덜거리며 휴대폰을 받았다. 이상한 번호로 연락한 상대는 똑같은 질문을 5번째 되풀이하고 있었다.

"당신이 개조한 지포라이터를 들고 온 사람이 있나?"

"그래요,있어요.대체 뭐가 궁금해서 사람을 귀찮게하는 겁니까?"

5번째 만에 원하는 답을얻은 상대방은 전화를 끊지않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경찰이던가? 아님 회사원 같은 사람이었나?"

"학생 같던데?"

"학생? 설마…그놈이?"

"그놈이라니?대체 누굴 말하는 겁니까?"

전화는 거기에서 끊겼다. 마치 용건이 다 끝났다는듯.

"뭐야,이거."

뚝 끊겨진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던 길용은 가게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유한을 찾았지만, 이미 유한은 사라진 뒤였다.

'이야기해 줄 걸 그랬나?'

비록 이름은 모르지만 전화는 왔다고.

한참을 밖에서 서성이던 길용은 도로 공방으로 들어갔다.

도음을 줄 기회는 이미 날아가 버렸다.

지금 할 수 있는건 좀 전에 찾아온 소년에게 아무 일 없기를 바라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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