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괴짜 광부 (53/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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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메이커 작전이 먹혔는지 무구 판매량이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역시 드워프 제련 방식으로 만든 무구라 경쟁력이 있었던 것이다.

 거래처로부터 한몫 단단히 챙겼는지 리지스는 연방 싱글벙글해 다녔고 유한도 대장장이 지그의 인지도가 높아짐에 만족했다.

 하지만, 무구가 잘 팔린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무구 생산량이 증가함에 따라 들어가는 재료의 양도 많아지고 다양해진 것이다.

 "그러니까 크롬이 많이 필요하다고요?"

 "예, 앞으로 성기사의 갑옷을 더 생산하려면 꼭 필요합니다."

 "구리는 왜 이렇게 많이 필요한 거죠?"

 "바이론 신전에서 청동제기 백 세트를 주문받았는데 이를 만들려면 더 필요합니다."

 NPC 대장장이들은 유한에게 찾아와 더 많은 재료를 구해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유한은 근처 광맥에서 철광석과 크롬광석을 캐 오고 리지스로부터 각종 광물을 매입하며 버텼지만, 안정적인 공급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언제까지 혼자서 채굴을 하고 재료를 돈으로 살 수는 없었다.

 자신이 딛고 있는 이 노다지가 묻혀 있는 땅을 이용해야 한다.

 '슬슬 광산을 개발해 볼까?'

 시작은 철광산과 크롬광산 정도로.

 일단 광맥은 봐 놨고, 돈도 무구를 만들면서 충분히 벌어 놓았다.

 문제는 인력을 확보하는 일이다.

 자신이 중소 길드의 장이라도 되면 별 문제가 없다. 길드원들에게 광부 부캐를 만들라고 해서, 하루에 30분 혹은 1시간씩 교대로 광 좀 캐달라고 하면 되니까.

 그러나 유한은 일개 대장장이일 뿐, 아는 동료들이라곤 고작 7명 정도디.

 '레드 타이거 용병대... 도 무리려나?'

 그 아저씨들에게 부캐 만들어 삽질 좀 해달라 했다간 오히려 삽자루로 두들겨 맞을 수 있다.

 그것도 현실에서.

 작업장 돌리는 인간들은 일명 '칭칭'이라 불리는 중국인 유저를 고용해서 삽질을 시키지만, 중국인을 부리려면 현금을 줘야 한다.

 물론 그 현금은 광석을 팔아서 번 골드를 현거래 사이트에서 돈으로 바꿔도 되지만, 유한은 그 정도로 막장 운영을 하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중국말 할 줄도 모른다.

 "결국 NPC밖에 없나?"

 유저보다 효율이 좀 떨어지긴 해도 NPC 광부를 고용하는 방법이 최선인 듯했다.

 하지만 NPC를 고용하는 것도 힘들다. 예전에 파부치에게 NPC 대장장이들을 영입했을 때처럼, 인력을 구하는 것은 친분 있는 전문가에게 부탁해야 하는데, 이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친밀도도 높아야 하지만, 인력 고용과 관련된 미끼나 보상을 주어야 한다. 파부치에게 초열탄 제조 비법을 알려 주었던 것처럼.

 그래서 작업장 운영자들은 NPC보다 칭칭을 선호한다. 일도 그쪽이 더 잘하고 인력 확보가 수월하기에.

 "뭐 그건 천천히 알아보기로 하고, 일단 토지 매입부터 해야겠다."

 토지 매입.

 이번 업데이트된 것들 중의 하나인데, 개인이 골드를 지불하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이전까지는 길드만이 영지라 불리는 토지를 소유하고 그 안에 상점과 집을 짓는 유저들에게 세금을 받았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개인도 가능해졌다.

 물론 제한은 있었다. 이미 소유자가 있는 땅, 예를 들어 길드 소유의 영지는 매입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매입에 한도가 있다는 점이다.

 유한은 대장간이 있는 계곡을 사들이기로 결정했다.

 남바린 성을 되찾은 소울리버 길드는 자신에게 아무런 딴지도 걸지 않고 있다지만, 크롬광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또 어떤 태도를 보일지 모른다.

 그래서 유한은 귀찮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토지를 매입하려는 것이다.

 토지를 가진 유저는 '자유민'으로 간주되어 영주의 간섭이 배제되어 농사를 짓든 광을 캐든, 제 땅에서 무엇을 하든 그건 토지 소유자의 마음대로다.

 "이런 건 빨리빨리 해 놓는 게 좋겠지?"

 유한은 근처 영지에서 말을 빌려 타고 벨파스로 갔다.

 벨파스는 아바란 왕국의 왕도로 국왕의 직할령이다.

 왕도 밖은 영주들의 영지전으로 싸움이 끊일 새가 없지만, 왕도는 조용했다.

 일단 아바란 왕국 내전이 영주들의 세력 다툼이고, 왕권은 약하다는 설정임으로 왕도는 전화에 휘말리지 않았다.

 그러나 난세의 국가답게 수도는 활기가 없었다.

 유일하게 시끄럽고 활기찬 곳은 국토 관리국뿐.

 토지의 매매를 전담하는 이 기관 앞에는 부유한 차림을 한 유저들이 와글거렸다.

 '뭔 사람이 이렇게 많지? 아바란에도 살 땅이 그리 많나?'

 바르카스나 브로딘 같은 안정된 국가의 토지는 서로 매입을 하려고 난리들이다.

 유한은 아바란은 그렇지 않을 줄 알았다. 오래 전부터 영지들의 세력 확장이 이루어졌던 나라라서 노른자위 땅은 남아 있지 않으니까.

 '일단 사 놓고 보자는 건가? 하긴 군중 심리란 것도 있으니까.'

 그런데 유저들 중에 자신처럼 케이트 산맥에 땅을 사려는 이들이 많았다. 자신이 광산 때문에 와서 그런지 몰라도, 이 사람들도 다 광맥을 선점하려고 그런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토지를 매입하려면 관련 서류를 작성해 주시고, 매매를 하시려면 저쪽 창구에 가서 문의하십시오."

 유한은 NPC 관리가 주는 서류를 받았다.

 이름을 적고, 매입하고자 하는 땅의 위치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관리에게 제출했다.

 유한이 작성한 서류를 슥 훑어본 관리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귀하가 원하시는 토지는 땅값이 저렴하긴 하지만, 몬스터가 출현하는 지역입니다. 현재 우리 왕국은 귀하의 토지를 지켜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건 이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세요."

 "그리고 귀하는 바르카스 국적의 외국인이니 매입금과 토지세는 두 배로 내셔야 합니다. 그것도 괜찮겠습니까?"

 "...어떻게 안 될까요?"

 "그럼 귀화를 하십시오. 원하시면 제가 이 자리에서 직접 처리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유한은 잠시 생각하다가 국적을 바꾸기로 했다.

 무역로 퀘스트에서처럼, 국적을 바꾸면 일부 퀘스트를 수행할 수 없게 될지 모르지만, 그건 그때 가서 손을 쓰면 되는 문제다.

 "토지 매입금은 87,500 골드입니다. 12,500 골드 (본문에서는 12,500백 골드 라고 표기되었음.) 더 내시면 소유 토지 북쪽의 산과 숲에 대한 소유권도 가질 수 있으신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럼 그것도 포함해서 주세요."

 더 지르라는 NPC에 낚여 버렸지만, 어차피 돈은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장래를 보고 미리 사 놓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았다.

 "근데 이거 영주가 뺏고 그러진 못하는 거죠?"

 "귀하가 매입하신 땅의 소유는 국왕 폐하께서 소유를 인정하신 겁니다. 아무리 왕실의 힘이 약하다 하나, 이를 무시하는 건 왕실의 권위를 모욕한 것, 그럼 해당 영주는 공공의 적이 될 뿐입니다."

 짧게 말해 안심하라는 것이다.

 몬스터보다 인간을 더 경계해야 할 유한의 입장에선 이러한 보호 설정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토지세는 왕실의 특별세를 합쳐 매월 1,150 골드입니다. 세금만 제대로 내시면 귀하의 땅은 영구히 소유가 가능합니다."

 유한은 왕가의 인장이 찍혀진 토지 계약서를 건네받았다.

 이로서 광산을 개발할 1차적인 준비는 모두 끝났다.

 (2)

  

 비록 영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유한도 땅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당당하게 광산 개발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로 생각했던 인력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아까운 시간을 쪼개 광물 상인 혹은 광산 십장 NPC를 찾아가 이야기를 해 봤지만,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돈을 원하는 것 같아 돈도 좀 줘 보고, 술이나 기타 좋아할 만한 아이템으로 꼬셔 봤지만,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매번 '이쪽도 사람이 부족해서' 따위의 대사나 읊조릴 뿐이었다.

 "쳇! 오늘도 실패로군."

 유한이 투덜거리며 대장간에 돌아왔을 때였다.

 "지그야, 손님이 찾아와서 기다리는데?"

 "손님이요?"

 송코의 말에 유한은 손님이란 사람을 만나러 갔다.

 또 어떤 상인이 무구나 아이템을 주문하러 온 것이려니 생각했는데, 찾아온 손님은 전혀 상인 같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가스톤이라는 초로의 노인.

 NPC인가 했는데 유저였다.

 그는 고급스런 복장에 손에는 드래곤의 머리가 금으로 장식된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로브만 덮어쓰면 딱 마법사였다.

 "자네가 이 대장간의 주인이 맞나?"

 "그렇습니다만?"

 대체 이 할아버지가 뭘 주문하려는 것일까.

 궁금해 하는 유한의 귀에 가스톤의 말이 들려왔다.

 "자네가 이곳을 샀다는 말을 듣고 왔네, 나에게 이 대장간, 아니 계곡 전체를 모두 팔게."

 이게 무슨 소리인가.

 대체 매입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팔라는 건지?

 "외지고 험한 곳이나 내 인심이 후하니 값은 넉넉하게 쳐 주지. 어떤가? 이십만 골드 정도면 되겠나?"

 가스톤은 보란 듯이 20만 골드에 해당하는 수표를 꺼내 흔들었다. 그 오만한 모습에 유한의 마음이 울컥했다.

 '아놔, 이 영감탱이는 도대체 뭐야?'

 유한에게 있어 이곳은 자신의 거점이다.

 해커를 잡기 위해 차린 곳이며, 대장장이 지그로서 명성을 쌓으며 꿈을 키워 가고 있는 곳이다. 누구에게 팔고 자시고 할 계제가 못 된다.

 "싫은데요."

 유한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이 영감을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가스톤은 유한의 팔을 잡고 끈질기게 매달렸다.

 "나한테 팔라니까, 후하게 쳐 준다 하지 않았나."

 "후하게 쳐 주든 말든 팔 생각이 없는데요."

 "허허, 도대체 얼마를 받으려고 그러나? 삼십만? 아니면 사십만?"

 "아, 얼마를 부른데도 싫다니까요!"

 "아, 얼마든 낼 테니까 팔라니까!"

 어찌나 끈질기게 구는지, 결국 유한의 성질이 폭발했다.

 될 수 있으면 어른을 상대로 목청을 높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억지를 쓰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봐요, 영감님! 도대체 목적이 뭐요? 뭣 때문에 안 팔겠다는 땅을 끝까지 팔라고 생떼를 쓰는 거냐고요?"

 유한이 삐딱하게 나오자 노인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허허, 이놈이 예의를 중금속에 비벼 먹었나, 노인이 게임을 좀 하겠다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퇴짜를 놓아?"

 "참나! 노인이면 노인답게 골방에서 에뮬 게임이나 하라고요. 갤러그, 보글보글, 슈퍼마리오 이런 거!"

 "아니 이놈이 정말 버섯처럼 쳐 밟히고 싶나!"

 두 사람의 분위기가 갈수록 험악해졌다.

 주위의 유저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싸움 구경을 놓칠 수는 없었다.

 막 유한과 가스톤 노인과의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려는 그때, 끼어든 사람이 있었다.

 "어! 가스톤 할아버지!"

 "아니 넌 리지스가 아니냐?"

 중간에 나타난 사람은 바로 리지스였다.

 두 사람은 마치 반가운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다는 듯 손을 마주잡으며 좋아했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래, 넌 레벨이 오른 만큼 더 예뻐진 것 같구나."

 "꺄악! 할아버지도 참!"

 가스톤은 리지스의 엉덩이를 슬쩍 쓰다듬었다.

 남들이 보면 성희롱이라고 경악할 만한 일이었지만, 리지스는 너그럽게 싱긋 웃으며 넘어갔다.

 아니, 그냥 넘어간 것은 아니다.

 "호호호, 천 골드 주세요."

 "엥? 예전엔 백 골드였잖느냐?"

 "그때보다 레벨이 열 배 더 올랐으니까, 당연히 요금도 올랐어요."

 "거 원 참, 녀석도."

 가스톤은 별말 없이 1,000골드짜리 수표를 내주었다.

 잠시 소외되었던 유한은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야, 리지스. 너 이 색골 할아범이랑 아는 사이냐?"

 "응, 내가 초보 시절 때 이것저것 도와주신 분이야."

 그 도움이 왠지 순수했을 것 같진 않았다. 아까 영감이 나잇값도 못하고 했던 짓을 생각하면 말이다.

 '색골 영감, 망할 영감 같으니라고!'

 "리지스야. 이 버르장머리 없는 대장장이 놈은 대체 누구냐?"

 "호호호, 제 남친이요."

 "너 죽을래!"

 유한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떨어졌다. 채린이 접속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며.

 "뭐 보시면 알겠지만 그건 아니고요, 그냥 동업자에요."

 "그래? 그럼 네가 동업자 좀 설득해 보거라. 여기 땅을 좀 팔라고 말이다."

 "닥쳐, 색골 할아범. 난 안 판다고 했을 텐데!"

 "어허, 이놈이 자꾸! 넌 집에 어른도 안 계시냐!"

 "댁처럼 나잇값 못하는 어른은 없거든요!"

 또다시 으르렁거리며 싸우려는 두 사람을 리지스가 진정시켰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여기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합치 않았다.

 세 사람이 유한의 개인 작업실에 자리를 잡고 앉자, 리지스는 무엇 때문에 가스톤이 여기 땅을 사려는지부터 물었다.

 "나야 당연히 광을 캐려는 거지."

 "광을 캐다니? 할아범이 광부라도 되슈?"

 광부라고 보기에는 복장이 너무 화려했다.

 차라리 마법사라고 할 것이지.

 "가스톤 할아버지 광부 맞아. 그냥 광부가 아니라 카잔 공국에서 다섯 개의 광산을 운영하고 있는 광산왕(鑛山王)이셔."

 "광산왕?"

 가스톤의 차림새를 보면 전혀 광부 같지 않았다. 뭐 광산왕이라 불릴 정도니, 그만큼 갑부라선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광산을 찾다가 노다지를 보고 왔는데, 이놈이 땅을 절대 안 판다지 뭐냐."

 "새로운 광산요? 할아버지네 광산 광맥이 말랐어요?"

 리지스는 그동안 가스톤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녀는 업데이트 이후에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느라 바빴고, 아바란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었기에, 멀리 동쪽 반도에 자리잡고 있는 카잔 공국의 일들은 모르고 있었다.

 "아니, 광맥은 멀쩡하지만, 뺏겼다."

 "뺏기다니요?"

 "광산을 기웃거리는 놈이 있기에 혼 좀 냈더니 철십자 길드가 싸움을 걸었단다. 그래서 광산은 물론 그 주위의 땅까지 모두 빼앗겨 버렸어."

 "세상에 그런 일이..."

 흔한 것은 아니지만,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탐나는 성이나 광산이 있으면 먼저 시비를 걸고 이를 빌미로 싸움을 건다.

 "그런데 철십자 길드가 겨우 광산 몇 개를 뺏고자 할아버지께 싸움을 걸었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리지스는 슬금슬금 자신의 엉덩이를 쓰다듬는 가스톤의 손을 치우며 물었다.

 이는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작은 길드도 아니고 아르페디아 대륙을 대표하는 최고의 길드가 그런 일을 저릴렀다는 것은 명성에 치명적이었다.

 "나도 그게 이상해서 조사를 했지. 그랬더니 내가 소유한 광산 중 하나에서 나온 이상한 것 때문이라는구나."

 "이상한 거요? 대체 뭐가 나왔는데요?"

 "글쎄, 로봇 같은 거였는데... 팔다리가 다 부서진 그게 무슨 대단한 것이라고 그랬는지."

 설마 광산이 아니라 던전이었던 것일까.

 유한은 가스톤의 이야기가 왠지 귀에 솔깃했다. 마녀 데보라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난번 로키는 공중 요새 재건 퀘스트를 받았을 때, 데보라의 행방을 추적하는 임무를 맡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찾았다는 데보라의 흔적은 카잔 반도 끝에 있었다.

 그런데 카잔 공국에 있다는 가스톤의 광산에서 로봇 같은 게 나왔다면 그것은 설마?

 "아무튼 새 광산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이곳으로 왔지. 케이트 산맥은 개발되지 않은 광맥이 많으니까 말이다."

 가스톤은 한동안 케이트 산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유망한 광맥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여러 곳을 둘러보다가 최종적으로 광산을 만들기로 결정한 곳이 바로 이 계곡이라고.

 "케이트 산맥을 샅샅이 뒤졌지만 이 근방만큼 광맥이 실한 곳은 없더구나. 그래서 내가 이곳을 사려고 하는 게다."

 "예? 이곳의 광맥이 실하다고요?"

 "그래, 여긴 철 광맥과 구리 광맥, 그리고..."

 "크롬 광맥도 있지요."

 유한은 왜 가스톤이 이유 불문하고 땅을 팔라 했는지 알았다.

 유망한 자원이 있다면, 땅 주인에게 그것을 숨기고 거래를 해야 싸게 매입할 수 있는 법.

 실제 크롬 광맥이 있다는 게 공개되면 10만 골드인 유한의 땅은 100만 골드도 넘게 거래될 것이다. 크롬이란 그만한 가치를 가지는 광석이니까.

 "네놈도 알고 있었던 거냐?" 

 "할아범이야말로 무슨 수로 광맥을 찾은 겁니까?"

 유한이 새로 찾은 것은 겨우 크롬 광맥 하나뿐, 그것도 포포의 도움 덕분이다.

 그런데 이 영감은 2개의 광맥을 더 찾아냈다.

 "허허, 알고 싶으냐?"

 알고 싶은 게 당연했다.

 대장장이와 광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그런 광석을 손쉽게 찾는 스킬을 알게, 아니 익히게 된다면 재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된다.

 아니, 광맥을 소개해 주고 돈만 받아도 큰 벌이가 될 것이다.

 "따라 오너라, 가르쳐 줄 테니까."

 가스톤이 앞장서서 가자, 유한은 곧장 그의 뒤를 따라갔다.

 맘에 안 드는 영감이지만, 뭔가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허리를 굽혀 줄 마음이 있었다.

 (3)

  

 가스톤은 대장간을 나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는 지팡이로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다, 바로 저기에 크롬 광맥이 있지."

 그가 가리킨 곳은 얼마 전에 포포가 크롬 광맥을 발견한 곳이었다. 바로 유한이 광산을 만들려는 예정지인 것이다.

 "그런데 구리 광맥은 어디 있어요?"

 같이 따라온 리지스가 물었다.

 유한도 그게 궁금했다. 철과 크롬 광맥은 그렇다 쳐도 그는 이 주변에서 구리를 채굴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잘난 척 뻥친 거 아닙니까?"

 "허허, 이놈이 사람을 어떻게 보고. 오냐, 내 곧 구리 광맥을 찾아 보이마."

 가스톤은 지팡이를 짚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한곳에서 뚝 멈춰 섰다.

 날카로운 눈매로 땅 밑을 내려다보던 그는 지팡이를 쥐고 살짝 비틀었다. 그러자 드래곤 머리 장식의 입 부분에서 길고 날카로운 날이 뉘어나왔다.

 "헉! 뭡니까, 그 지팡이는?"

 "광산왕의 칭호를 얻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레어 아이템이다."

 가스톤은 변형된 지팡이로 땅을 마구 파헤치기 시작했다.

 광산왕의 칭호를 갖고 있다더니, 과연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순식간에 깊이 10미터는 족히 될 구덩이를 파내는 것이 아닌가. 전생에 두더쥐였다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옛다. 구리 광석."

 구덩이에서 나온 가스톤은 유한에게 채굴한 구리 광석을 던져 주었다. 척 봐도 구리의 순도가 높아 보이는 광석을 유한은 직접 확인해 보았다.

 (=구리 광석=)

 -설명: 구리가 함유된 광석이다. 제련을 하면 동괴를 얻을 수 있다.

 유한은 직접 구덩이 아래로 내려가 광맥을 채굴해 보았다.

 가스톤이 건네준 것과 다르지 않은 높은 순도의 구리 광석들이 연달아 채굴되었다.

 "대단하네요! 대체 어떻게 알아내신 거에요?"

 "훗, 지금 내 눈은 엑스레이와 똑같다. 이 아래 뭐가 있는지, 네가 인벤에 뭘 가지고 있는지도 다 알 수 있지."

 "정말입니까?"

 "당연히 거짓말이지."

 "크윽!"

 유한을 놀려 먹은 가스톤은 웃음을 지은 후에 제대로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부지런히 광부 일을 한 덕분에 (-자원 탐사-)라는 히든 스킬을 익혔지. 땅속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있는 건 다 그 때문이다."

 "자원 탐사 스킬요?"

 금과 은, 철과 동, 니켈과 크롬 등의 특수 금속들.

 대개 이런 것들이 광산에서 나온다고, 유저들은 이런 금속이나 값비싼 보석의 채굴에 전력을 다한다.

 그러나 아르페디아 온라인에는 그런 광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석탄이나 석회석, 활석 같은 것들도 나오고, 암염(巖鹽)이나 유황 등 요리나 마법 재료들도 채굴된다.

 히든 스킬 자원 탐사는 이런 비주류 광물들도 부지런히 채굴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이었다.

 말 그대로 자원을 탐사하는 데 무척 유용한 스킬.

 가스톤은 그것을 익혀 두고 있었던 것이다.

 '흠, 역시 노력하는 자에겐 그에 걸맞은 보답이 있다는 건가?'

 이래서 아르페디아 온라인이 재밌다.

 "자원 탐사 스킬을 쓰면 마치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발밑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는데, 이 떨림의 고저를 구분하면 광맥의 종류도 확실히 알 수 있지."

 "할아버지, 저도 떨리는데요? 혹시 저도 자원 탐사 스킬을 익힌 걸까요?"

 구경하던 리지스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러나 발의 진동은 그녀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유한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가스톤이 설명한 자원 탐사 스킬과 관련이 없는 듯했다. 진동은 점점 크게 느껴졌고, 지독한 악취도 풍겨 왔다.

 "이건 자원 탐사람 상관이 없어!"

 가스톤은 지팡이를 고쳐 잡고서 악취가 풍겨 오는 쪽으로 돌아섰다.

 앞쪽에 있는 나무가 부러진다 싶더니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뭔가 커다란 세 덩어리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낫다.

 "오, 오우거!"

 땅을 울리며 나타난 것은 오우거였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3마리로 수컷, 암컷 오우거와 그 새끼로 보이는 가족이었다.

 눈앞의 사람들을 본 오우거 부부는 곧장 손에 든 몽둥이를 치켜들고 울부짖었다.

 "쿠어어어어어!"

 (4)

 -(-오우거의 포효-)가 발동되었습니다.

 -5초간 동작 불능 상태에 빠집니다.

 "큭!"

 "이, 이런 전투 준비도 하기 전에!"

 원래 대장간이 위치한 계곡의 몬스터는 유한이 자리를 잡으면서 한번 청소한 적이 있었다.

 그 뒤로는 물건을 사러 온 유저들이 보이는 족족 잡아서 더 이상 몬스터가 접근하지 않았다. 그런데 코볼트나 오크도 아니고 오우거가 버젓이 돌아다니다니!

 분명 북쪽의 네메시스 산맥에서 내려온 놈이 분명했다.

 허나 지금은 그럼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벌써 수컷 오우거가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서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꺄아악!"

 오우거의 포효 때문에 몸이 굳은 리지스는 비명을 지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이미 레벨 100이 넘었지만, 거대한 덩치의 오우거가 주는 위압감은 쉽게 떨쳐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장작 패기!"

 "크릉?"

 리지스를 내려치려던 오우거의 몽둥이가 2개로 쪼개졌다. 연이어 가스톤을 공격하려던 암컷 오우거의 몽둥이도 동강 났다.

 재빠르게 동료들을 구원한 것은 유한이었다.

 그는 오우거가 나타난 즉시 칭호를 '오우거 헌터'로 바꾸었다. 오우거를 잡을 정도로 강한 자가 되자 오우거의 포효도 그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덤벼 봐! 이 덩어리들아!"

 수컷 오우거가 맨주먹으로 유한에게 달려들었다.

 유한은 번개같이 품속에서 망치를 꺼내 던지곤 그것을 포이즌 세이버로 후려쳤다.

 "암 브레이크!"

 "꾸어억!"

 망치의 파편들이 수컷 오우거의 얼굴을 덮쳤다.

 암 브레이크의 여파로 양쪽 눈을 상실한 수컷 오우거가 비틀거리자, 유한은 옆으로 빠져나가며 녀석의 옆구리를 깊게 찔렀다.

 -오우거가 중독되었습니다. 5초당 HP가 30씩 닳습니다.

 유한은 수컷 오우거의 중독을 확인하고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순간, 암컷 오우거의 손이 그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컥!"

 "지그야!"

 몸이 풀렸는지 리지스가 달려왔다.

 "괜찮아?"

 "안 괜찮아. 크윽, 빌어먹을!"

 암컷 오우거의 따귀는 강렬했다. 순식간에 HP가 절반으로 뚝 떨어졌으니까. 이렇게 당한 이상 저 오우거를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제물로 만들 것이다.

 "그런데 영감님은?"

 그제야 생각났는지 유한이 가스톤을 찾았다.

 그런데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오우거 포효에서 벗어난 가스톤이 지팡이를 들고 암컴 오우거를 몰아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파! 발파! 발파!"

 가스톤이 지팡이를 한 번 내려칠 때마다 땅거죽이 쩍쩍 갈라졌다. 아니 갈라진 정도가 아니었다. 마치 폭탄이 터지듯 뻥뻥 터져 나갔다.

 "뭐, 뭐야? 영감님 저렇게 강했어?"

 "혼자 다섯 개의 광산을 가지고 있을 정도인걸. 광산 근처에 어슬렁거리는 몬스터들을 모두 저렇게 혼내서 쫓아 버린대."

 가스톤이 곡괭이를 가져다 대는 것은 흙이든, 바위든, 나무든 뭐든지 터져 나갔다.

 유한이 가스톤의 기술에 놀라 잠시 머뭇거리고 있을 때, 수컷 오우거가 가스톤의 등 뒤로 접근했다. 눈이 보이지 않자 소리와 냄새로 시각을 대신한 것이다.

 "위험해요 영감님!"

 유한은 그 자리에서 건틀렛 와이어를 발사했다.

 멋진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 와이어는 막 가스톤을 후려치려던 수컷 오우거의 손목을 붙들었다.

 "발파!"

 "크어어어엉!"

 가스톤의 지팡이가 암컷 오우거의 머리에 작렬했다. 막강한 위력의 발파는 순식간에 암컷 오우거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좋아, 이제 남은 놈은 하나뿐이다."

 수컷 오우거는 유한이 날린 와이어에 붙들린 상태였고, 포이즌 세이버의 독 때문에 HP도 많이 깎여 있었다.

 이제 제대로 한 방 날리기만 하면 끝장을 낼 수 있었다.

 "백 블로우!"

 그런데 언제 다가갔는지 리지스가 커다란 가방으로 놈의 몸통을 인정사정없이 후려갈겼다.

 평상시라면 피를 좀 깍고 말았을 테지만, 독 때문에 놈의 체력이 바닥난 상태라 리지스의 공격은 크리티컬을 터트렸다.

  

 -경험치 800을 얻었습니다.

 -오우거의 근육을 얻었습니다.

  

 -명성이 100 상승했습니다.

  

 -(+오우거 헌터+)의 칭호를 얻으셨습니다.

 "얏호! 이겼다!"

 리지스는 자신의 앞에 떠오르는 안내창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물론, 그녀를 바라보는 유한의 눈길은 곱지 않았다.

 "야, 내가 다 잡은 걸 뺏기냐?"

 "흥, 너도 전에 그랬잖아."

 유한의 항의에 리지스는 혀를 쏙 내밀었다.

 스콜피언 퀸의 둥지에서 있었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독한 것!'

 남은 것은 새끼 오우거뿐.

 그러나 부모가 모두 죽자 새끼는 겁을 집어먹고 도망쳐 버렸다. 유한은 이를 쫓아가려는 리지스를 붙들었다.

 "놔둬, 새끼는 잡아 봐야 경험치 얼마 주지도 않아."

 그렇게 리지스를 말린 유한은 가스톤 쪽을 돌아보았다.

 "영감님 제법 강하십니다?"

 "하하하, 게임에 나이 개념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지."

 늙은 사람도 게임에 접속하면 젊은 사람과 똑같은 힘을 지닌다. 늙었다고 근력이 떨어지고 힘이 처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캐릭터의 능력은 유저가 게임을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로 차이가 날분이다.

 "그런데 그 발파라는 기술은 뭡니까?"

 "허허, 발파 말이냐?"

 가스톤은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유한을 향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발파 기술을 가르쳐 주면 대장간을 팔 테냐?"

 "크아아악! 안 판다고 몇 번이나 말씀 드렸잖아요!"

 "후후후, 농담이고. 내 발파 스킬에 대해 가르쳐 주마."

 그러면서 그는 광부의 고위 스킬 발파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유한도 익히고 있는 거지만 광부가 되면 기본적으로 채굴, 채석 기술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훌륭한 광부가 될 수 없는 법.

 그래서 그는 고단한 노력 끝에 채석의 1랭크에 도달하고, 그로 인해 받은 퀘스트를 수행해 상위 스킬인 발파 스킬을 익히게 되었다고 한다.

 "발파 스킬을 발동하게 되면 채굴이나 채석보다 훨씬 크고 많은 양의 바위를 단번에 깨트릴 수 있지. 그리고 네가 봤듯이 전투에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즉, 발파는 광부들에게 있어 꼭 필요한 기술이었다.

 "혹시 저도 발파 기술을 익힐 수 있을까요?"

 유한도 채석 스킬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그 상위인 발파 스킬이 탐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안 돼. 넌 광부가 아니라 관련 퀘스트를 받을 수 없어."

 '쳇, 좋다가 말았네.'

 발파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 가스톤은 다른 쪽으로 주제를 돌렸다. 유한이 또 인상을 쓸 이야기로.

 "좀 전에 못한 이야기를 마저 하도록 하지, 정말 이 땅을 내게 팔 생각이 없나?"

 "휴우, 정말 끈질기시네. 그렇게 광물이 탐나세요? 리지스에게 들으니까 돈도 많은 것 같은데요."

 "내가 이 땅을 원하는 것은 돈을 벌자는 욕심 때문이 아니야. 그저 광물을 캐고 싶어서일 뿐이지."

 그것은 가스톤이 광부를 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실제로 젊은 시절 탄광에서 청춘을 보냈다.

 다들 힘들다고 기피한 일을 했던 이유는 가정 사정이 어려웠던 탓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탄가루를 마실 필요가 없어졌음에도 그는 계속 탄광에서 일했다.

 고유가 시대, 연탄 한 장에 밝은 미소를 띤 소년 소녀 가장들이나 독거노인들의 모습은 그의 가슴을 훈훈하게 했다. 그것이 얼굴에 주름이 질 때까지 계속 탄광에서 땀을 흘리게끔 만들었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발달해서 더 이상 연탄도 필요없고 화석연료도 때지 않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때 그들의 미소는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우연히 손자 놈의 캡슐에 들어갔다가 추억의 미소를 다시 볼 기회를 얻었다. 기운찼던 젊은 시절로 돌아갈 기회도.

 그는 뼛속까지 광부였던 것이다.

 "난 그저 내가 캐낸 광물로 사람들이 흡족해 한다면 그것으로 족해. 돈은 그저 부수적인 것일 뿐이야."

 가스톤의 이야기를 들은 유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문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유한은 도저히 이 찰거머리 같은 노인을 떨쳐 버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차라리 뗄 수 없다면 포용해 버리는 것은 어떨까?

 "뭔가?"

 "할아버지께 땅을 팔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제게 소중한 곳이라서요. 그 대신 이곳의 광물을 채굴할 수 있는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여기서 난 광물은 제가 다 쓰겠습니다."

 "음, 좋다!"

 가스톤이 원하는 것은 광산 그 자체가 아니다. 

 다시 광물을 캘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뿐, 그런 면에서 보면 유한이 한 제안은 제법 그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그럼 두 사람, 바로 계약서를 쓰는 게 어때요?"

 리지스가 가방에서 전자 문서를 꺼내더니 계약서를 작성했다. 내용을 슥 읽어 본 가스톤은 주저 없이 사인을 했다. 유한도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 보고 서명했다.

 "하하하, 그럼 앞으로 자네와 나는 이웃사촌이네."

 "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유한은 또 다른 동료를 받아들였다.

 (5)

  

 "잘됐네, 지그 너 요새 힘이 부쳐 보이던데."

 뒤늦게 접속해서 이야기를 들은 채린이 축하해 주었다.

 대장장이라는 직업 때문이라지만, 매일 대장간에서 일만 하는 유한이 딱해 보였다.

 대장간 일만 하면 그나마 나았다. 연료를 확보해야 한다며 나무를 하고, 모자라는 광물을 채우기 위해 곡괭이를 들고 광맥을 파헤치기도 했다.

 1인 3역.

 대장간이 작았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돌파구가 필요한 때에 잘된 거지. 이제 숨을 좀 돌릴 수 있게 되었어."

 "그래? 근데 그 할아버지 믿을 만 해?"

 채린의 물음에 유한은 계약서를 작성한 직후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치 신난다는 듯이 구리 광맥을 파헤치던 모습.

 그것은 진정으로 땅을 파고 광을 캐는 일에 기뻐하는 순수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더 봐야 알겠지만, 오랫동안 한 우물만 파서인지 사심은 없어 보이더라."

 "그래? 나도 한번 인사드리러 가 볼까?"

 "인사하러 가는 건 좋은데 너무 접근하지 마. 네 엉덩이 만지려고 할지도 모르니까."

 "으윽!"

 채린이 질색했다. 

 가스톤은 단순하고 주책 맞은 면이 있긴 하지만, 뒷통수를 때릴 만한 사람으로 안 보였다.

 유한이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배신이다.

 과거 학교를 그만둘 때 친구들과 선생님한테 배신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쉽게 사람을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불신으로 똘똘 뭉쳐 키워진 캐릭터가 바로 광전사 바츠.

 그러나 지금의 지그는 다르다.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주변에 믿고 함께 즐길 수 있는 동료들이 늘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건 지금 눈앞에 있는 채린이다. 채린이는 예전과 다름없이 어울려 준 친구였고, 그것은 자신이 자퇴생이라는 걸 알았음에도 변치 않았다.

 오히려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검정고시 시험을 잘 치게 된 것도 다 채린이 덕분인지도.

 "아, 그리고 너한테 말해 준다는 걸 까먹었는데, 나 이번 검정고시 시험에..."

 "알고 있어, 합격한 거지?"

 "엥? 어떻게 알았어?"

 "바보야, 전에 니 입으로 그랬잖아. 시험 잘못 치면 게임 못하게 될 거라고, 이렇게 신나서 게임을 하는데 그걸 모르겠니?"

 "하하하, 그랬나?"

 "아무튼 축하해, 강유한."

 한동안 유한은 채린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망치질을 해야 했지만, 유한은 채린과 이야기하며 보내는 시간이 조금도 아깝게 생각되지 않았다.

 "아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어디 갈 데라도 있는 거야?"

 "응, 그게... 운동할 시간이거든. 좀 있다가 또 보자."

 슬쩍 시계를 본 유한은 채린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로그아웃했다.

 도장에 갈 시간이었다.

 검정고시 시험을 친 이후로 유한은 다시 열심히 도장을 다니고 있었다. 그동안 게임에 공부에, 수련을 좀 등한시했는데 그걸 이참에 만회하려고 한 것이다.

 자신이 수련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제는 자신이 친구인 채린이를 지켜 주자 결심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절대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도장에 도착한 유한은 기운차게 인사를 하며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 안이 썰렁했다. 오늘이 휴일이라 평소보다 많은 수련생들이 땀과 기합을 내지르고 있어야 하건만, 도장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아직 아무도 안 왔나?"

 유한이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가려고 할 때였다.

 휴게실에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서 가 봤더니 다들 그곳에 모여 있었다.

 "여, 유한이 왔나?"

 유한이 안으로 들어가자 곽대발이 아는 척을 했다.

 "사범님, 다들 여기 모여서 뭐 하세요?"

 "응, 길드전 한다기에 그거 구경하고 있다. 아주 박터지게 싸우고 있으니까 너도 한번 봐라."  

 "길드전요?"

 길드전이라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벌어지는 아르페디아 대륙이다. 거기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길드전을 밥먹듯이 참여한 레드 타이거들.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볼 내용이라면 분명 심상치 않은 것일 거다.

 "도대체 누구와 누가 붙는 건데요?"

 "다크나이트와 B.O.B(Best Of Best) 길드 연합군이랑 철십자 길드."

 과연 관심을 두고 볼 만한 싸움이었다. 게임 내 3, 5위 길드 연합과 1위 길드가 전투를 벌이는 것이니까.

 "왜 싸우는 건데요?"

 길드전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영지를 뺏겼다거나, 아니면 상대 길드가 이쪽 길드를 모욕했다거나.

 "얼마 전에 철십자 애새끼들이 노인네 소일거리 하는 광산을 빼앗았거든. 그러자 다크나이트 애들하고 B.O.B 애들이 경로사상이다 뭐다라며 길드전을 선포한 거지. 뭐, 실제론 경로사상은 핑계고 광산에서 나왔다는 이상한 것 때문이라나 봐."

 '노인네 소일거리 하는 광산을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유한의 머릿속에는 가스톤의 이야기가 스쳐 지나갔다. 자기 광산에 로봇 같은 게 나왔는데 그 때문에 광산을 빼앗겼다고 했었다.

 '그럼 이번 길드전은 그 광산을 놓고?'

 유한도 한쪽에 앉아서 길드전을 지켜보았다.

 전세는 다크나이트&B.O.B 측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다크나이트 길드가 자랑하는 흑표기(黑杓驥)들이 철십자 길드의 진영을 짓밟았고, B.O.B 길드의 마법사와 성직자들이 연방 지원 마법과 버프를 퍼부어 댔다.

 그러나 철십자 길드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베히모스와 랭커들을 주축으로 몇 차례나 전력을 추스르며 끈질기게 싸웠다.

 특히 레어 아이템으로 중무장한 베히모스는 자기 앞에 달려드는 상대편 기사나 전사들을 가차 없이 쓰러트렸다.

 그 어떤 랭커도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듯, 압도적인 실력을 보였다.

 "베히모스 자식 잘 싸우는데."

 "저게 뭐가 잘 싸워? 게임 랭킹 4위가 지기 길드 발리는 것도 구원 못하냐?"

 "애가 아직 어리잖아. 저거 봐, 저거. 몸 사리면서 싸우고 있잖아. 조금만 더 치고 나가면 앞에 거치적거리는 놈들을 죄다 치워 버렸을 텐데 말이야."

 "에휴, 4위 랭킹이 아깝다."

 유한의 눈에는 베히모스가 잘 싸우는 것으로 보이는데, 레드 타이거들에겐 그렇게 안 보인 모양이다.

 다들 자기라면 그냥 닥치고 돌격했을 거라는 둥, 흑표기들을 죄다 밀어 버렸을 거라는 둥 떠들어 댔다.

 "어이구, 전열이 무너진다. 이제 끝장나겠구먼."

 "게임 오... 어!"

 거의 철십자 길드가 끝장나려 할 때였다.

 갑자기 땅속에서 뭔가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더니 다크나이트와 B.O.B 길드 연합군을 덮쳤다. 동시에 전열을 재빠르게 수습한 철십자 길드가 재반격에 나섰다.

 철십자 길드의 회생에 장내 아나운서가 입에 거품을 물고 고함을 질렀다.

 "저게 뭐야?"

 "아니, 어디서 저런걸?"

 다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지켜보았다.

 갑자기 나타나 전세를 송두리째 바꿔 버린 그것.

 그것은 거대 목인병이었다.

 유한이 목인병이라 단정할 수 있었던 것은 놈의 생김새가 얼음 궁전에서 봤던 신형 목인병이랑 붕어빵이었기 때문이다.

 마녀 데보라의 유산임이 분명한 녀석들은 크기가 10미터가 넘었고, 전투력도 훨씬 막강한 듯했다. 거기다 그 숫자는 무려 20마리나 되었다.

 녀석들은 길드 연합군을 완전히 묵사발로 만들어 버렸다.

 막판에 다 이겼다고 방심하고 있던 길드 연합군은 허를 찔려 도미노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1위 길드라는 놈들이 진짜 별걸 다 가지고 있구먼."

 "이건 도마뱀 러시 이상의 충격인데?"

 싸움은 회심의 병기를 이용해 반격에 성공한 철십자 길드의 승리로 끝났다. 다크나이트와 B.O.B 연합군은 무수한 시체와 아이템들을 떨어트리고 패퇴했다.

 '영감님 말로는 팔다리가 다 부서졌다던데 대체 어떻게 고친거지?'

 유한은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반격의 리플레이 화면을 계속해서 보았다. 처음엔 거대 목인병이라는 충격 때문에였지만, 두 번째는 기계적인 흥미 때문이었다.

 거대 목인병의 검은 나무로 되어 있었지만 속은 톱니바퀴와 와이어로 연결된 기계였다.

 철십자 길드에는 마녀 데보라의 유산을 고칠 수 있는 실력자가 있다는 것인가?

 '아니 그보다... 저 관절의 움직임은?'

 분명히 겉은 목인병이지만, 저 저돌적인 움직임은 목인병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거대 목인병의 새로운 특징일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관절의 움직임이 낯익었다.

 '어디서 보았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억지로 생각하려 하면 할수록 더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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