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메이커의 공습 >
(1)
업데이트가 되고 닷새 정도 시간이 지났다.
유저들이 새로운 업데이트에 흥분해서 돌아다니는 사이, 유한은 묵묵히 대장간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송코가 업데이트 된 거 확인하러 안 가냐고 물었지만, 당장 플레이에 변화가 생기는 것도 아니라 그냥 자신의 일에 몰두하기로 했다.
유한은 그동안 손을 놓았던 생산과 합금, 주물 스킬의 수련에 힘을 쏟았고, 틈틈이 자물쇠나 시계 같은 것을 만들며 정밀 조립 스킬도 올려 나갔다.
철공소를 지을 수 있는 기본 능력과 데보라의 가디언인 블랙 아이언을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을 맞추기 위함이다.
더구나 그동안 자의 반 타의 반 태만했던 덕분에 지그표 무구의 질이 떨어졌다는 평이 들려서 생산 활동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성기사의 갑옷을 만들었습니다. 다소 품질이 떨어져 보입니다. 스킬 경험치 35를 얻었습니다.
"아아! 젠장, 이번에도 실패인가?"
유한은 들고 있던 장도리로 머리를 긁적였다.
나름대로 잘 만들어 보려고 노력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성기사의 갑옷은 B급의 무구였기 때문이다.
유한은 요새 B급 무구 생산에 도전하고 있었다.
생산 스킬이 4랭크로 오르면서 B급 무구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기존의 D급, C급 무구만 만드는 것으론 충분한 스킬 경험치를 얻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실력이 올라간 만큼 더 높은 경지에 도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리지스나 골드러시 상인 연합을 통해 재료도 공급받고 있었기에 B급 무구를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
문제는 B급 무구가 지금까지 D, C급의 무구들과 달리 만들기가 어렵다는 것.
지금 유한이 만들고 있는 성기사의 갑옷은 크롬 합금을 사용해야 하는데다가 모양도 복잡하고 손댈 곳이 많아 만드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그나마 제작할 때 그레인 스킬을 사용하니 망정이지, 그냥 만들었다면 품질이 형편없었을 것이다.
유한은 그냥 어설프게 완성한 갑옷을 두들겨 부수고 고로 속에 녹여 버렸다. 적당한 값에 처분할 수도 있지만, 질이 떨어진 물건을 판다는 소리는 듣기가 싫었다.
-크롬 합금을 5개 얻었습니다.
-스킬 경험치 80을 얻었습니다.
-합금 스킬이 6랭크로 올랐습니다.
-솜씨가 3 올랐습니다.
-수리 성공률이 70%로 올랐습니다. 솜씨가 오른 만큼 당신의 수리 성공률도 계속 올라갑니다.
운이 좋았는지 솜씨가 오르며 수리 성공률도 함께 올랐다.
필요한 만큼 크롬 합금을 끌어 모은 유한은 다시 성기사의 갑옷 생산에 도전했다.
합금괴를 두들겨 펴고, 잘라서 모양을 만들고, 열처리를 하여 강도를 강화시키고 리벳과 철사를 끼워서 파트별로 조립했다.
거기다 성기사의 갑옷인 만큼 화려한 장식도 빠질 수 없었다.
그렇게 또 한차례 땀을 쏙 뺀 결과가 안내창으로 나타났다.
-성기사의 갑옷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전투에 사용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입니다.
-스킬 경험치 90을 얻었습니다.
-생산 스킬이 3랭크로 올랐습니다.
-힘이 1 올랐습니다.
-솜씨가 2 올랐습니다.
"나이스!"
갑옷이 온전하게 완성되자 유한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몇 번 실패하고 나름대로 요령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그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
성기사의 갑옷 완성도는 장갑의 두께 때문에 있었다. 급소 부분을 두껍게 함으로서 방어 효과를 높여야 하는 것이다. 그저 매끈하게 홈 없이 만든다고 잘 만든 것이 아닌 것이다.
물론 장갑 두께 배분을 적절하게 맞추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만큼의 숙련도를 쌓아야 하고, 그러다 보면 자연히 랭크와 솜씨가 오르게 되어 있다.
"크하핫! 이제 B급 무구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유한은 아르페디아 온라인 최고의 대장장이가 아니다. 그레인 스킬이라는 남보다 유리한 스킬을 가졌을 뿐 노력하지 않으면 성장도 더디고 랭크도 올릴 수 없다.
그는 최고가 되기 위해 계속 노력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스텟창이나 한번 볼까?"
<상태창>
-이름: 지그
-칭호: 오우거 헌터, 드워프의 조수, 공중 요새의 발견자, 리저드맨의 친구, 고대 드워프 유적이 발견자, 미케니아의 은인
-직업: 대장장이
-레벨: 103
-체력(HP): 800/800
-스테미나: 550/550
-마나(MP): 50/50
-힘: 100
-민첩성: 80+10(바람의 부츠)
-인내심: 85
-지식: 52+15(기술관의 관복)
-행운: 75
-솜씨: 145+15(기술관의 관복)
-명성: 9,200
-공격력: 125+102(포이즌 세이버+와이어 건틀렛)
-방어력: 85+105(바람의 부츠+기술관의 관복+와이어 건틀렛+동지의 목걸이)
-경험치: 2,500/12.000
-돈: 452,000골드
<습득 스킬>
-장작 패기 스킬 4랭크
-벌목 스킬 7랭크
-채굴 스킬 4랭크
-채석 스킬 6랭크
-제련 스킬 3랭크
-생산 스킬 3랭크
-합금 스킬 6랭크
-정밀 조립 스킬 7랭크
-수리 스킬 3랭크
-주물 스킬 8랭크
-도발 스킬 9랭크
-수리 성공률 70%
<히든 스킬>
-그레인 스킬 3랭크
-암 브레이크 스킬 5랭크
'오오오!'
예전부터 드워프의 철 생산을 부지런히 해 놓아선지 제련 스킬도 한 단계 올랐고, 수리 스킬도 더 높아졌다.
검정고시 합격 이후 게임할 시간이 늘어나고, 대장간에서 부지런히 일만 한 덕분이다.
유한이 기분 좋게 스텟창을 쓸어 보다가 주물 스킬에 가서 인상이 구겨지고 있었다.
주물 스킬은 늦게 배운 만큼 랭크가 낮았다. 그나마 1랭크 오른 것도 요새 무구 생산에 주물을 응용한 데 힘입은 바가 컸다.
주물 스킬을 익힐 때도 예상했지만, 주물은 무기의 생산 시간을 단축시켜 대량 생산을 가능케 해 주었다.
"지그님, 사용하던 거푸집이 깨졌습니다요."
"그래요?"
옆에 있던 NPC 대장장이가 깨진 거푸집을 보여 주었다. 롱소드의 칼날을 만들던 거푸집이었다.
별로 만들기 어려운 거푸집도 아니었다. 미리 만들어 놓은 롱소드 칼날을 점토판에 대고 찍으면 된다.
유한은 그렇게 만든 점토 거푸집에 철괴를 녹인 쇳물을 부었다. 쇳물이 식으며 칼날이 만들어지자 듣기 좋은 효과음과 함께 안내창이 떠올랐다.
-롱소드 칼날을 주조했습니다.
-스킬 경험치를 12 얻었습니다.
-주물 스킬을 다양하게 이용하면 스킬 경험치와 랭크를 빨리 올릴 수 있습니다.
주물은 스킬 경험치를 많이 주지 않았다.
랭크가 낮은 것도 다 그 때문.
유한은 칼날이나 도끼날, 무구의 장식 등등 주물이 가능한 것들은 모두 주물로 만들어 봤지만, 스킬 경험치를 만족할 만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매번 다양하게 이용해 보라는 잔소리가 뒤따랐다.
'무구를 생산하는데 이용하는 건 다양하지 않다는 건가?'
아무튼 적은 경험치와 별개로 주물 스킬은 굉장히 유용했다.
망치로 두들겨 모양을 만들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제작 시간이 많이 절약되었다.
거기다 거푸집만 깨지지 않으면 몇 번이고 같은 제품을 만들 수 있었고, 경험치도 계속 얻을 수 있었다. 또 자신이 만든 거푸집을 NPC 대장장이에게 사용하도록 해서 대량 생산을 유도할 수 있었다.
덕분에 D급, C급의 무구들은 지금의 2배로 주문이 들어온다 해도 소화할 수 있을 듯했다.
"이제 대장간을 넘어선 수준인데..."
유한은 부지런히 일하는 대장장이들을 바라보았다.
30명의 NPC 대장장이들은 조를 나눠 분업을 하고 있었다. 제련을 하는 조, 거푸집에 쇳물을 붓는 조, 주조된 칼날이나 도끼날을 담금질하고 연마하는 조, 칼날에 자루를 끼우고 장식과 마무리를 하는 조 등등.
작업을 분업화하고 지루하지 않게 번갈아가며 맡기자 생산은 빨라지고, 제품의 질이 좋아졌다.
이렇게 지그 대장간은 평범한 대장간이 아닌, 공장처럼 변해 가고 있었다.
'문제는 철공소를 건설하는 조건이란 말이야.'
유한은 토르 신에게 들었던 철공소릐 증축 조건을 떠올렸다.
제철소보다는 낮은 조건이지만, 철공소를 건설하려면 제련과 생산, 합금과 주물 스킬이 5랭크 이상이어야 한다. 거기다 종업원은 50명 이상.
일꾼이야 어떻게 더 구하면 될 것이고, 제련과 생산은 이미 조건을 충족했다. 합금은 조금만 더 올리면 맞출 수 있지만, 문제는 역시 주물이었다.
적은 스킬 경험치 때문에 랭크 업(Up)에 발목이 잡혀서, 철공소 단계로 올라가는 데도 차질을 빚고 있었다.
"주물 스킬을 부쩍부쩍 올릴 방법을 찾아야 해."
공략 사이트를 한번 뒤져 봐야 할 것 같았다.
주물이 중상 급 대장장이의 전유물이라 공개되어 있는 팁(Tip)과 정보는 적겠지만, 혼자서 삽질을 하며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2)
"나 갔다 왔어."
유한이 주물 스킬의 랭크 업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상행을 갔던 리지스가 돌아왔다.
"수고했어, 주문은?"
"여기 정리해서 적어 놨어."
유한은 리지스가 정리해 온 주문 목록을 보았다.
주문량이 늘지 않을까 했는데, 그다지 변동이 없었다. 오히려 조금 줄어들기까지 했다.
'무구 수요가 감소했나?'
다들 새 업데이트를 알아보고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덕분에 난세의 국가인 아바란 왕국에서도 길드전이 주춤해진 상태였다. 전쟁이 없으면 무구의 수요량이 적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주문이 줄어든 이유에 대해서 유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리지스가 눈앞에 흔드는 포션을 보기 전까지는.
"지그 너, 이런 거 본 적 없지?"
"포션 아냐? '박하수'?"
"요새 큰 마을이나 도시에 새로 생긴 상점들에서 팔더라."
유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박하수는 유명 제약 회사의 강장 드링크로, 유한의 아버지가 코흘리개 때부터 존재했던 상품이다.
문제는 현실에서 유명한 이 드링크가 왜 가상현실 게임, 그것도 판타지 세계에 나타났느냐는 점이다.
방이나 라벨은 꽤 엔틱하게 변형되어 있었고, 제품의 효과도 게임 아이템답게 맞춰져 있었다.
(=박하수=)
-설명: HP를 30% 회복시켜준다. 단맛이 느껴져 음료수로 복용하기도 한다. 남용하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으니 주의하자.
품질도 일반 포션에 비해 향상되어 있었다. 값이 비슷하거나 박하수 쪽이 조금 더 비싸다면 박하수를 선택하지 않을까.
"왜 이런 게 생긴 거야?"
"후후, 지그 너 업데이트 이후 마을에 나가 봤어?"
"아니, 대장간에서 일만 했는데."
"어휴, 내 그럴 줄 알았어."
유한은 그동안 열심히 생산 활동을 하고 스킬 수련만 했다. 사냥이나 퀘스트는 자제했다.
그것은 철공소, 나중에는 제철소까지 지을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물론 최고의 대장장이가 되어 보자는 목표 때문이기도 했고.
"이 포션만 그런 게 아냐. 지금 NPC가 파는 제품들 중에 이런 것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어."
그러면서 리지스는 가방에서 셔츠 하나를 꺼내 보였다. 거기엔 태연스럽게도 해외 유명 상표가 척 붙어 있었다.
그저 평범한 무명 셔츠임에도 불구하고 상표가 장식처럼 붙어 있으니 이미지가 확 달라 보였다.
"이, 이건 설마?"
"내 생각엔 드림맥스가 게임 요금을 내리게 된 이유가 이것 때문이 아닌가 싶어."
가상현실 속에서의 상품 광고.
이번 방식의 선전은 예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게임 분위기와 걸맞지 않은 광고 이미지를 남발해 유저들의 원성을 사고, 게임의 평판을 떨어트리기만 했다.
그러나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등장한 이 현실의 메이커들은 달랐다. 전혀 아르페디아라는 배경 세계와 위화감이 없었다. 상표나 라벨, 제품 형태가 세계관에 걸맞게 맞춰져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깜빡 속을 정도로.
"그러니까 이렇게 상품 광고를 하는 대신에 유저들 요금을 깎아 준 거다?"
"그래, 아마 업데이트 이전부터 관련 기업들과 협상이 다 된 모양이야. 바로 이렇게 제품들이 하나하나 등장하는 것을 보면 말이지."
리지스의 말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기업 상표가 붙은 제품들의 품질과 디자인은 꽤 좋은 편이라고.
가격이야 다소 비싸지만, 골드 좀 갖고 있다는 유저들은 그런 거 안 따질 것이다. 특히 현실에서 돈이 없어 명품을 사지 못했던 사람들은 환장할 것이다.
이렇게 고급 상품들이 나타나 유저들의 흥미와 소비 심리를 자극하는 가운데 피해를 입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단사나 약사 유저들은 꽤 당황하는 듯했어. 자기네가 만든 제품이 순식간에 상점표 수준으로 전락했으니까."
'설마 혹시 무구에도?'
그렇다면 큰일이다.
품질과 디자인에서 유저가 만든 것을 능가하고 가격마저 착하다면 대장장이 유저들의 수입은 크게 줄어든다. 아니, 설 자리조차 없어질지 모른다.
'아뿔싸, 당했다!'
드림맥스가 왜 잘나가는 게임의 요금을 인하하는지 의아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이제 너도 대책을 세워야 해. 내가 공연히 이런 거 구경시켜 주려고 사온 건 아니란 말이야."
리지스도 사태의 심각성을 예상하고 있었다.
유한의 무구가 리어커표 식칼로 전락해서, 팔리지 않으면 자신의 수입도 급감한다.
"드림맥스 이 자식들! 생산직을 우대한다더니 다 헛소리였잖아!"
"그렇게 투덜거리지 말고 대책을 모색해 보라니까. 투덜거린다고 이미 업데이트된 게 바뀌진 않는단 말이야."
리지스의 말대로였다.
이미 요금까지 인하하고 광고 유치를 한 드림맥스가 순순히 물러날 리 없다. 다른 게 아닌 돈이 걸린 문제니 말이다.
유저의 요금을 인하할 정도로 기업들의 광고를 게임 속에 유치했다면 분명 인하한 액수 이상의 이득이 있다는 소리다. 생산직 유저들이 촛불시워를 한다 해도 눈도 깜짝 안 할 것이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유한은 머리를 굴리며 방법을 찾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했다. 분명 이 위기를 이겨 낼 방법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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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곧 기회인 법이야."
드림맥스 대회의실.
그 자리에서 부사장 정경욱은 이렇게 말했다.
생산직 유저들이 불평을 쏟아 낸다는 상담실장의 이야기에 그가 한 말은 그뿐이었다. 그 말의 주체가 드림맥스인지 유저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태도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는 이번 광고 프로젝트를 철회할 생각이 없었다.
"유저들을 못살게 굴면 역효과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회의 중에 누군가 우려 섞인 투로 말했지만, 정 부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기업들은 지나치게 게임에 개입하지 않도록 제약을 해 놓았잖아. 거기다 요금도 깎아 줬으니 불만은 곧 수그러들 거야."
확실히 요금 인하의 위력은 대단했다.
대부분의 유저들이 드림맥스의 용단에 지지와 환호를 보냈고, 생산직 유저들의 불평은 소수라 치부될 뿐이다.
"그들의 불만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야. 노력 여하에 따라 이전보다 더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도록 손을 써 두었으니까 유저들은 꿋꿋이 극복해 낼 거야."
기업들이 유저들을 핍박하거나 게임머니를 긁어모으기 위해 가담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자사의 홍보와 제품의 선전일 뿐, 선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현실 제품과 유사한 상품들을 내놓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드림맥스에서도 원치 않는 일이다. 그래서 유저들의 생산 시스템을 조금 손보기도 했다.
"부사장님 말대로 오히려 유저들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뭐 아직은 처음이니 금방 효과가 나타나지 않겠지만 말이죠."
손석진의 말이었다.
이 광고 프로젝트는 그가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효과와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했다.
오히려 이런 외부의 유입을 역으로 잘 이용하면 유저들의 경쟁을 유도하여 생산품의 품질을 올릴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원양항해는 어찌 된 건가?"
"이제 겨우 몇몇 유저와 길드에서 배를 띄워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들이 신대륙에 도달할 가능성은?"
"첫 항해니까 많이 어려울 겁니다. 항로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데다가 해양 몬스터와 폭풍우라는 난관이 있으니까요."
"후후후, 난파 가능성이 높다 이거군."
"그걸 이겨 내고 신대륙에 간다면 굉장히 놀라겠지요."
회의의 주제는 원양항해로 넘어갔다. 어떻게 하면 유저를 더 놀라게 만들까 떠들고 토의하다 보니 금세 회의 시간이 모두 지나갔다.
회의가 끝나자 손석진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의 자리에는 '주동자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두꺼운 파일이 놓여 있었다. 꺼풀을 한 장 넘기자 열심히 망치질을 하는 유저의 사진이 나타났다.
주동자 중 한 명이다. 근래 일어난 게임 내 사건 중에 가장 큰 사건을 저지른 녀석이었다.
"지그라..."
"그 친구, 조만간에 만날 수 있을 거다."
언제 왔는지 옆에 정경욱 부사장이 서 있었다.
손석진이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정 부사장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며칠 후에 업데이트 축하 리셉션을 거하게 열기로 했거든, 유저들도 다수 참가하게 되지."
초청자 명단에 슬쩍 끼워 넣겠다는 의미.
"계획이 잡혔습니까? 잘됐군요."
드디어 녀석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한 번 대장장이 지그를 내려다보는 손석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3)
"아놔, 누가 내 욕을 하나 귀가 왜 이리 가렵지?"
유한은 귀를 슬쩍 후벼 팠다.
그는 지금 환경의 변화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겸, 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찾을 겸해서 남바린 성내를 거닐고 있었다.
실제 그의 귀를 가렵게 한 범인은 드림맥스의 정 부사장과 손석진이었지만, 유한은 푸른새벽 길드 놈들일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지난 길드전 이후 푸른새벽 길드가 몰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나섰다가 리저드맨 군단에 무참하게 밟혀 버린 뒤, 길드원 다수가 보유한 무구와 아이템을 상실했다. 이는 길드 전력의 약화를 불러왔고, 주변 지역의 길드들의 침공을 야기했다.
덕분에 아바란 왕국 북동부 지역의 패자였던 푸른새벽 길드는 이리저리 많은 영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길드원들도 적잖게 이탈해 버렸다.
유한 파티에 의해 한순간에 허물어진 남바린 성도 소울리버 길드에서 다시 점령했는데, 유한과 채린이 재건된 남바린 성을 태평하게 거닐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와! 지그야, 저 가방 좀 봐! 너무 예쁘지 않아?"
유한과 함께 남바린 성에 온 채린은 어느 가게 진열창을 바라보며 연방 눈을 반짝였다. 가죽으로 된 파우치백이었는데, 예쁘기도 하지만, 허리에 찰 수 있게 되어 있어 무척 편하고 실용적으로 보였다.
유한은 가벙은 건성으로 보고 가게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아스콰이어-
국내 유명 패션 브랜드가 게임 세계에 와서 떡하니 장사를 하고 있었다. 게임의 배경 세계와 위화감이 없으면서도 기존의 아이템들보다 세련되고 예쁜 디자인의 상품들을 내놓고서.
"저거 가지고 싶어?"
"아니, 그냥 예뻐서 본 거야."
유한은 단번에 그 말이 거짓말임을 알 수 있었다. 아쉬움이 짙은 저 눈동자는 어릴 때 친구의 장난감을 바라보던 눈빛과 다르지 않았다.
"빼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봐. 갖고 싶으면 내가 사 줄 테니까."
"괜찮대두, 가방은 지금 쓰는 것으로 충분해."
"이그, 내숭은 적당히 떨고 사 줄 테니까 그냥 따라와."
"괜찮다니까!"
채린은 한사코 사양했지만, 유한의 손길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상점 안으로 들어오자, 세련된 차림을 한 NPC 점장이 깍듯하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찾으시는 게 있습니까?"
"저기 저 가방이요."
"아, 저 파우치백 말씀이십니까? 저건 여성용인데... 여친 분에게 선물이라도 하실 건가요?"
가게 주인은 유한의 옆에 서 있는 채린을 슬쩍 바라보며 은근한 눈빛과 미소를 보였다. 이번의 업데이트 때문인지 몰라도 예전 NPC 상인들보다도 표정이 더 풍부해진 듯했다.
이러다 NPC 인공지능이 유저들 머리 위에 올라가고 말지.
"예, 뭐... 물건이나 좀 보여 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색깔은 이대로도 괜찮으신지? 여기 카탈로그를 보면 아시겠지만, 총 5가지 색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럼 연두색으로 주세요."
연두색이 채린의 현재 차림과 잘 어울릴 듯싶었다. 채린도 그쪽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창고로 갔던 NPC 가게 주인은 연두색 파우치백을 가지고 나왔다.
(=아스콰이어 파우치백 라이트 그린=)
-설명: 여행하는 여성을 위한 안성맞춤의 가방, 화장품이나 악세사리, 기타 소형의 아이템을 넣어 두기에 적당하다.
*부가 기능: 스내칭(Snatching) 스킬에 대한 방어력이 50% 증가한다.
생긴 대로 인벤은 그리 넓지 않지만, 예쁘면서도 야무지게 생긴 데다 도적 계열 직업군의 날치기를 막아 주는 기능도 있었다. 이런 기능은 이전의 가방들에는 없었던 것이다.
예전의 가방들은 그저 인벤의 크기만 컸을 뿐.
"가격은 일만 칠천 골드 되겠습니다."
"엑!"
유한과 채린은 화들짝 놀랐다. 손바닥 만 한 가방이 1만 7천 골드나 하다니, 특별한 부가 기능이 있다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1만 7천 골드면 쓸 만한 가방 10개는 사고도 남았다.
"꽤... 비싸군요."
"후훗, 저희 제품이 럭셔리한 만큼 좀 비쌉니다. 하지만 가치를 알아 주시는 분은 값을 따지지 않지요."
명품 브랜드답다고 할까.
그동안 벌어 놓은 돈이 많기에 못 살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충격이었다.
국내 유명 브랜드가 이 정도인데, 해외 유명 브랜드는 또 얼마나 받아먹을까.
해외 유명 브랜드도 이번에 드림맥스와 제휴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그야, 됐어. 나 그냥 이거 필요 없으니까..."
"일만 칠천 골드 맞죠?"
"지그야!"
"괜찮아, 나 돈 많아."
"그래도 그렇지..."
채린이 뭐라거나 말거나 유한은 가방 값을 지불했다. 돈을 받아 든 주인은 여느 가게와 다르게 영수증까지 떼어 주었다.
상점 밖으로 나올 때까지 가방을 품에 꼭 쥐고 있던 채린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고마워, 두고두고 잘 쓸게."
'뭐,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까진 없는데.'
유한은 그저 사 주고 싶어서 사 준 것뿐이다. 설사 10배는 더 비쌌더라도 채린이 갖고 싶어 한다면 기꺼이 사줬을 것이다.
"잘 어울리네."
"헤헷, 그래?"
궁수인 채린과 파우치백은 매우 잘 어울렸다.
유한은 채린의 가느다란 허리에 매여 있는 파우치백보다 살짝 얼굴을 붉힌 채 환하게 웃는 채린의 모습이 더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메이커 상점들이 많지 않네."
남바린 영지를 한 바퀴 돌았는데 생각보다 메이커 상점들이 많지 않았다. 리지스에게서 말을 들었을 때는 메이커 상점들이 대대적으로 공습해 온 줄 알았는데.
"바르카스 왕국 같이 안정된 국가에는 더 많으려나?"
"아직 초창기라서 그럴 거야. 시간이 지나면 점점 많아 지겠지."
채린의 말대로 대규모 업데이트가 된 지 아직 일주일이 넘지 않았다. 드림맥스와 사전에 계약한 회사도 있겠지만, 지금 한창 협의 중이거나 이곳에 진출하려고 저울질하는 회사들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메이커 상점들이 적다 해도 관심을 보이는 유저들은 많다는 것이다.
골드 좀 있어 보이는 유저들은 저마다 가게에서 한 보따리씩 물건을 사고 나왔다. 흥미 반 욕구 반인 듯했다.
"어쨌든 그들이 최대한 늦게 들어왔으면 좋겠어. 저 메이커 공세를 이겨 낼 만한 방법을 찾을 때까지."
한 번만 더 둘러보고 가자 싶던 유한의 눈에 거리 한편에 좌판을 깐 상인이 보였다.
여러 가지 아이템을 파는 행상이었는데, 적잖은 유저들이 그가 파는 것을 살펴보고 있었다. 유한이나 채린도 흥미가 생겨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자, 이건 브로딘 왕국에서 날리고 있는 대장장이 '발리안'이 만든 칠흑의 단검이고, 이건 베레타 공화국에 사는 생산 스킬 1랭커 '귀련'이 만든 레이피어 입니다. 그리고 또 이건..."
손님들의 시선이 집중된 곳은 무구 쪽이었다.
고렙 대장장이들이 만든 듯한 무구는 척 봐도 상당히 품질이 좋았다. 가격이 다소 비싼 것이 흠이지만, 다들 그만한 가치는 되어 보였다.
'어라, 저건?'
유한이 무구의 품질보다 더 관심을 가진 것은 무구들의 표면에 새겨진 문양들이었다.
무구를 보다 돋보이게 해 주는 그 문양을 자세히 살펴 보니 일련의 문자와 그림을 도안하여 만든 이니셜과 문장들이었다.
저 무구를 만든 상급 대장장이들은 저렇게 자신들이 만든 것에 선명하게 표시를 해 놓았다. 마치 다른 대장장이가 만든 것과 철저히 차별을 두겠다는 듯.
저러니 정말 당당한 유명 브랜드 제품같아 보였다.
'그렇군! 그래서 저렇게.'
유한은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리지스의 이야기를 듣고 당황해서 갈팡질팡했는데, 의외로 답은 간단했다.
꿀리지 않을 만큼 멋진 메이커를 만들면 되는 것이다.
'나참, 왜 그걸 생각하지 못해 가지곤...'
사실 이전에도 생산품에 이런 식의 흔적을 남기는 유저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공명심에 이름자를 적거나 대충 표시를 했을 뿐, 이렇게 공을 들이진 않았다.
그러나 현실의 유명 메이커들이 들어오면서 입장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자신의 무구를 애용해 준 유저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보다 멋지고 선명한 문장을 만듬으로써, 스스로 메이커가 되는 데 도전하는 것이다.
"왜 그래? 방법을 찾았어?"
유한의 표정이 밟아지자 옆에 있던 채린이 물었다.
"응! 선배 대장장이들 덕분이지."
유한은 당장 돌아와서 브랜드를 만들었다.
개인 작업실에서 여러 가지 이니셜과 문장을 그려 보며 고심했다.
그러나 맘에 차는 것들이 없었다.
멋지다 싶으면 상품 이미지와 맞지 않았고, 상품 이미지를 살리자니 또 멋이 없어졌다.
"으음, 이런 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면 안 돼."
유한은 현실의 유명 메이커들을 떠올려 보았다.
정말 간단했지만, 그것으로도 그 상품이 어느 회사 건지 사람들의 머리에 각인을 시키지 않았던가.
유한은 쉽고 간단하지만 한 번 보면 잘 잊히지 않는 것으로 하기로 했다.
그 결과 나온 문양은 이러했다.
Z
캐릭터명 지그(Zig)의 영문 앞 글자를 이용한 무늬였다.
강철을 연상시키도록, 단순하면서도 굵고 날카롭게 도안했다.
간단명료했지만, 유한은 풍분히 만족했다. 이 정도라면 지그표 무구임을 충분히 각인하고도 남을 것 같으니까.
"뭐야, 이게? 설마 고전 애니 마징가의 Z?"
"마스크 오브 조로겠지."
"후훗, 어린애도 아니고 Z라니..."
애써 만든 문장을 보며 동료들이 다들 한 마디씩 쑥덕거렸다.
"시꺼! 누가 뭐래도 난 이걸로 할 거야!"
아무도 유한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날 이후, 지그 대장간에서 나오는 무구들은 모두 선명한 Z자가 찍혀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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