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검정고시 퀘스트 (5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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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중 요새를 추락시킨 지 며칠이 지났다.

 노스아크에서 돌아온 유한은 대장간에서 생산과 스킬 수련에 힘썼다. 생산은 돈을 벌기 위함이고, 스킬 수련은 가디언을 제작하기 위함이다.

 가디언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합금 스킬이 5랭크, 정밀 조립 스킬이 3랭크 이상이 되어야 했다.

 현재 그의 합금 스킬은 6랭크, 정밀 조립 스킬은 7랭크였다.

 "제길, 앞으로 갈 길이 멀구나."

 그렇게 불철주야 게임에 몰두하던 유한에게 위기가 닥쳤다.

 주말이라 부모님과 함께 아침을 먹을 때였다.

 "시험이 얼마 안 남았지?"

 "예?"

 아버지의 물음에 유한은 국을 뜨려다 말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검정고시 시험 말이다. 어떻게 된 것이 자기가 공부하는 시험 날짜도 몰라? 너 공부는 하고 다니냐?"

 "아! 그게..."

 아버지의 추궁에 유한은 답이 궁해졌다. 요즘 이래저래 게임을 하느라고 공부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시간이 남아도 극기도장으로 달려가 땀을 빼기에 바빴다.

 유한이 머뭇거리자 강영후는 자신의 아내를 나무랐다.

 "애가 이 지경이 되도록 당신은 집에 있으면서 도대체 뭘 한 거야?"

 "제가 뭐 공부하지 말라 그랬나요? 공부해라 잔소리해도 관짝에 들어가 놀기만 하던데요."

 "에잇!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놈의 캡슐인지 버추얼 시뮬레이터인지를 당장 버려야지."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진짜 캡슐을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행동하자 유한은 아버지를 붙잡고 늘어졌다.

 "으악! 안 돼요. 그게 얼마짜린데... 그리고 저 공부하고 있다니까요. 고시 학원도 한 번도 안 빠지고 나가고 있어요."

 사실 한 번도 안 빠진 것은 아니다. 두어 번 빼먹기도 했고, 요즘에는 거의 건성으로 다니고 있었다.

 하긴, 머릿속이 아르페디아 온라인 생각으로 가득 찼으니 공부가 될리 만무하다.

 "공부를 하고 있다는 놈이 시험이 코앞에 다가와도 몰라? 너 시험 날자는 기억하고 있긴 한 거냐?"

 "아, 알아요. 10월 19일이잖아요. 조금 전에는 아직 잠이 덜 깨서 생각이 안 났어요."

 간신히 날짜가 생각났다.

 원래 1년에 2번 치던 검정고시는 제작년에 개정되어 3번으로 바뀌었다.

 2월, 6월, 10월로.

 유한도 이 날짜를 알고 있었고, 10월 시험에 원서도 넣어 놓았지만, 요즘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다.

 "그래,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잔소리 좀 해야겠다. 너 요즘 성적이 자꾸 떨어지고 있던데 그래 가지고 대학에 가겠냐? 아니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이라도 하겠어?"

 유한이 다니는 학원에서 매달 치르는 모의시험이 있는데 그 성적이 자꾸 떨어지는 걸 아버지께서 아신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솔직히 학교를 자퇴할 때 부모님께 1년 안에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 보이겠다고 큰소리를 쳤었다. 그런데 벌써 1년이 지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당장 캡슐을 내다 버려야지!"

 "아버지 제발 그것만은..."

 유한은 아버지를 붙들고 빌고 또 빌었다.

 캡슐이 아까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 게임을 통해 이제야 사람들을 사귀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그만두어야 하는 게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오냐, 네가 그리 간청하니, 이번 시험에서 평균 80점을 넘으면 캡슐을 버리지 않으마."

 '으악 그것은!'

 저번 달에 친 유한의 모의고사 성적이 평균 63점이다. 검정고시 합격점인 60점에 턱걸이하는 수준인 것이다.

 그런데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17점을 더 올리라니.

 이것은 대장장이로 드래곤을 잡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만약 그의 입에서 '불가'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아버지는 정말 캡슐을 내다 버릴 테니까.

 평소에 털털한 성격의 아버지였지만, 한번 한다고 다짐을 하면 꼭 하시는 분이었다.

 "하, 할게요. 반드시 80점을 넘어 보이겠습니다."

 결국 유한은 울며 겨자 먹기로 약조를 하고 말았다.

 유한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공부를 하러 올라가자, 강영후는 부인을 바라보며 찡긋 윙크를 했다.

 "여보, 나 잘했지?"

 "후후후, 배우로 나서도 되겠어요."

 사실 주말 아침의 소란은 부부의 철저한 계획하에 일어난 일이었다.

 유한이 계속 공부는 안 하고 게임에 정신이 팔려 있자, 보다 못한 어머니 김 여사가 이 같은 질책성 이벤트를 계획한 것이다.

 각본은 엄마가 썼고, 주연은 아버지가 했다는 걸 유한은 절대 모를 것이다.

 "근데 평균 80점은 심하지 않았어요?"

 원래 김 여사가 구상한 퀘스트(?) 충족 조건은 평균 70점이었다. 그런데 연기에 몰입한 남편이 10점이나 더 올려 버린 것이다.

 "괜찮아, 유한이 녀석 학교에 다닐 때도 그 정도는 했잖아."

 "학교 다닐 때랑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래야 정신을 바짝 차리지."

 하지만 너무 심했던 것은 아닌지.

 여전히 게임에 빠져 있는 아들놈이지만, 어머니 김 여사는 예전과 다른 이들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검정고시 학원에 갈 때가 아니면 두문불출, 아니 캡슐불출하던 녀석이 요즘은 무술 배운다고 도장에도 다녔고, 가끔 단장을 하고 외출하기도 했다.

 표정도 예전에 비해 많이 밝아졌다. 이전엔 늘 어두운 인상이었고 잘 웃지도 않았는데.

 '지금 와서 캡슐을 버리면 안 좋은 거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약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일단은 아들놈의 성적이 더 떨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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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방에 들어온 유한은 시계를 보았다. 9시였다.

 오늘부터 캡슐을 사수하러 죽을 둥 살 둥 공부해야 하니 대장간에서 오전 10시에 만나기로 한 채린과의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아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채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은 게임에 접속하지 않은 모양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맑고 발랄한 목소리. 그러나 거기에 응답하는 유한의 목소리는 무겁고 침울했다.

 "채린아, 나 유한인데. 한동안 게임 못할 거 같다."

 "뭐? 왜?"

 유한의 폭탄선언에 채린이 깜짝 놀라 물었다. 유한은 오늘 아침 식사 시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 줬다.

 "사실 요새 내가 공부를 안 해서... 시험 잘못 치면 아버지가 캡슐 내다 버리신대."

 사정을 다 설명하자 채린이 쯧쯧 혀를 찼다.

 "어휴, 그러게 평소에 공부 좀 해 놓을 것이지."

 "그런 말을 하는 댁은 어떠십니까?"

 유한이 달리 공부를 안 했겠는가?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동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동료들 중에는 채린도 포함되었다.

 "나? 호호호, 난 나쁘지도 좋지도..."

 채린도 성적이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실은 성적이 지난번보다 떨어져 담임선생님께 꾸중도 들었다.

 적당히 말을 얼버무리던 채린은 뭔가 번쩍 떠오른 게 있었는지 재빨리 말을 이어 갔다.

 "참! 나도 다음 주에 중간고사가 있는데 같이 공부할래? 같이 공부하면 모르는 것도 서로 가르쳐 줄 수 있고 좋잖아."

 "그건 그렇지만..."

 유한은 내심 망설여졌다.

 같이 공부하면 자신이 학교를 그만둔 게 뽀록난다. 그는 아직 채린에게 퇴학생이란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유한이 미처 반대하기도 전에 채린이 자기 할말만 하고 전화를 냉큼 끊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주소는 옛날 그대로지? 지금 당장 갈 테니까 이따가 봐."

 "채린아! 야, 송채린!"

 유한이 전화기를 붙들고 불러 보았지만, 들려오는 것은 뚜뚜거리는 신호음뿐.

 전화기를 내려놓는 유한의 눈살이 찌푸러졌다.

 자신이 퇴학생인 걸 알면 과연 채린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싫은 내색을 할까, 아님 동정 어린 눈빛을 지을까?

 보통 사람이라면 이유 불문하고 꺼리는 내색을 하겠지만, 마음씨 착한 채린은 안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한동안 상념에 빠져 있던 유한이 화들짝 놀랐다.

 "아참, 이게 아니지!"

 지금 그에겐 고민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채린이가 집에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책상 위에 뽀얗게 쌓인 먼지와 아무렇게나 구겨져 나뒹구는 옷가지들, 수북하게 쌓이다 못해 넘쳐 버린 휴지통, 거기에 방바닥에 머리카락과 함께 굴러가는 먼지 뭉치.

 유한의 방은 그야말로 거지가 "내 집일세" 하고 반길 만한 상태였다.

 "으악! 바쁘다 바빠!"

 유한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청소 도구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다, 청소기를 민다, 휴지통을 비운다, 걸레로 닦는다 야단법석을 떨었다.

 "웬일이니? 내일 우주에서 소행성이라도 떨어진다던?"

 뒤에서 어머니가 나타나 물었다.

 "아놔, 비꼬지 말고 좀 도와주세요!"

 "이 녀석아, 네 방이니 네가 청소를 해야지."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유한은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

 '제길! 너무 일러!'

 적당히 치우고, 닦고, 밀어 넣었지만 아직 방은 완벽하다고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도 유한은 최후의 1초까지 닦고 또 닦았다.

 "누구세요?"

 김 여사는 인터폰을 받았다.

 누가 찾아왔나 싶어 인터폰의 화면을 봤더니, 단정하게 옷을 입은 예쁜 여자애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저 채린이에요. 혹시 기억나세요?"

 "어머, 꽃가게 채린이?"

 옛날의 채린을 기억하는 김 여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선머슴 같던 애가 어떻게 이렇게 바뀔 수 있는 건지.

 '이 녀석이 왜 설치나 했더니.'

 김 여사는 유한이 평소답지 않게 오버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못난 아들놈도 사내자식이다. 옛날 친구가, 그것도 이렇게 예쁘게 변한 채린이 찾아온다니 허둥지둥 댔을 수밖에.

 김 여사는 대문과 현관문을 열어 채린을 맞아들였다. 인터폰 화면이 아닌 실물이 더 예쁜 듯했다.

 "와, 아주머니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호호, 그렇니? 채린이는 정말 많이 예뻐졌구나."

 변하지 않았다는 소리는 늙지 않았다는 의미.

 기분이 좋아진 김 여사는 옛날에 채린이 야구공으로 창문을 깬 일이라든가, 아끼던 도자기를 떨어트렸던 일 같은 것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유한이는요?"

 "아, 그 녀석? 잠시 거실 소파에 앉아 있으렴."

 김 여사는 아들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어 주기로 했다. 매일 게임만 해서 속을 태우는 자식이지만 그래도 자식 사랑은 부모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유한이랑 언제 다시 만나게 된 거니?"

 "여름이 되기 전인데 길 가다 우연히 만났어요."

 어머니가 시간을 벌어 준 덕분에 유한은 어느 정도 만족한 수준까지 방을 치우고 채린을 만나러 나올 수 있었다.

 "왔어?"

 "응, 청소할 게 꽤 많았나 봐."

 "큭!"

 채린은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씩 웃었다.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던 유한은 대충 얼버무렸다.

 "주위 환경이 깨끗해야 공부할 때 집중도 잘될거 아냐. 얼른 올라가자."

 "알았어, 아주머니. 그럼 유한이 방에서 공부하다 갈게요."

 "오, 그래. 얼마든지 하고 가려무나."

 김 여사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놀러 왔으면 점잖게 타이를까 했는데, 이런 착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덕분에 아들놈이 정신을 차릴지도 모른다. 안 하던 청소도 다하는 걸 보면 말이다.

 "호호호, 이럴 게 아니지."

 그녀는 아들과 채린을 위해서 과일이라도 깎아야겠다고 생각했다.

 (2)

 책상 위에 두 사람의 책과 교재가 올라왔다. 유한의 것을 본 채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3학년 과목이잖아. 너 이것도 공부하고 있어?"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유한은 뭐라고 말해 줘야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사실대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거든."

 "검정고시? 왜?"

 채린의 눈이 휘둥그레져 물었다.

 "나 작년에 학교 관뒀어. 사정이 좀 있어서."

 순간 의기소침해지는 유한이었다.

 '나에게 실망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채린이 손을 들어 유한의 어깨를 쾅쾅 두들겼다.

 "자식 힘내! 그런 것 갖고 기죽을 거 없어. 고등학교를 나와야 대학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 그리고 검정고시를 통해서도 좋은 대학교에 갈 수 있으니까 열심히 해."

 "으, 응. 고맙다."

 결국 채린은 유한을 격려해 줬다. 괜한 걱정으로 갈팡질팡했던 게 우습게 여겨졌다.

 '역시 채린이는 좋은 녀석이야.'

 의욕이 무럭무럭 솟구친 유한은 온 정신을 집중하며 기운차게 공부했다. 그런 유한에게 자극을 받은 채린도 시험 범위를 학습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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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호호, 공부하느라 힘들지?"

 1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김 여사가 과일과 음료수를 갖고 유한의 방에 들어왔다.

 사이좋게 공부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방문을 열었는데, 눈앞의 광경은 그녀의 예상이랑 영 딴판이었다.

 "으으으..."

 "진짜 모르겠다."

 김 여사는 책상 바닥에 머리를 박고 좌절하는 소년 소녀를 보았다.

 농땡이를 부른 흔적은 없었다. 척 봐도 이건 공부하다가 주화입마에 빠진 상태였으니까.

 "공부가 잘 안 되는 모양이구나."

 "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한이나 채린 둘 다 공부를 못했으니까.

 유한은 학교 다닐 때는 그래도 반 석차 10~15등 사이를 유지했는데, 퇴학당하고 난 다음 1년간을 거의 허송세월로 보내다시피 해서 학업 성취도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채린의 경우는 골목대장 시절부터 공부와는 별 인연이 없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거기다 요새 게임까지 하니 그나마 안 좋은 성적도 미끄러지고 있는 판이었다.

 "호호호, 아줌마가 좀 가르쳐 줄까?"

 "그래 주시겠어요?"

 채린은 풀다 포기한 수학 문제를 김 여사에게 보여 주었다.

 김 여사는 마치 메두사라도 본 듯 잠시 돌이 되었다가 조용히 방을 나갔다. 분명 자신도 저만한 시절에 풀었던 것인데 왜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지.

 애들에게 공부하라 윽박지른 것이 부끄러웠다.

 "안 되겠어! 공부 잘하는 애를 불러야겠어."

 "아는 녀석이 있어?"

 "김준수."

 "응? 그게 누군데?"

 "우리 학교 전교 일등."

 그녀는 다짜고짜 전화를 걸더니 김준수를 불러냈다. 어디까지 오라고 하더니 마중 나간다며 휙 나갔다가 잠시 후에 문제의 인물을 데려왔다.

 누군가 해서 봤더니, 낯익은 인상이었다.

 자세히 상대의 얼굴을 뜯어 본 유한은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오펜이었구나!'

 채린이 반 친구인 마법사 오펜이 바로 그였다.

 "지그 님이죠? 김준수라고 합니다."

 "아, 강유한입니다."

 같이 게임을 하긴 했지만 두 사람 다 오프에서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임에서 오펜에게 반말을 하던 유한도 실제로 만나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지그 님은 실물이 더 나은 것 같네요. 체격도 좋고."

 "그게 요새 운동 좀 해서... 편하게 말해요. 우리가 뭐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하하하, 그럴까...요?"

 서로 동갑이라는 것도 알지만, 오프에서의 만남은 생소하고 어색했다. 계속 말을 주고받다 보면 괜찮아질지 모르겠지만.

 "자자, 인사는 그 정도로 하고, 얼른 우리 공부 좀 봐줘."

 "채린아, 나 오늘 학원 펑크 내고 온 거다."

 "알았어! 나중에 내가 한턱 쏠게."

 다소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오펜, 아니 김준수는 스터디 파티(Study Party)의 리더가 되었다.

 그는 역시 전교 1등다웠다.

 유한과 채린이 묻는 것을 한 치의 막힘도 없이 술술 풀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어찌나 쉽게 설명해 주는지 유한과 채린은 딱 한 번만 들어도 이해를 할 정도였다.

 "우와, 이러니까 되게 쉬운걸?"

 아까까지만 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이라 생각했던 문제들이 술술 풀렸다.

 "역시 반장이 최고라니까. 선생님들보다 훨씬 나아."

 "하하, 그건 과찬이야."

 "근데 나랑 채린이 때문에 학원도 못 가고 공부도 못하게 돼서 준수에게 미안한걸."

 "괜찮아. 가르쳐 주다 보니 나도 많은 도움이 되는걸. 복습도 되고."

 준수는 참 성격도 좋았다.

 학교 다닐 적에 봤었던 우등생이란 녀석들은 뭔가 거리감이나 교만함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유한은 준수에게선 그런 점을 느끼지 못했다.

 그게 같이 게임을 하고 친하게 지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또 모른 것이 있으면 준수에게 물어봐야지.'

 시험 기간이 얼마 안 남은 상황이다. 준수의 도움이 절실했디. 80점 고지에 올라서지 못하면 사람 좋은 준수는 물론이고, 채린과도 멀어지게 될 것이다.

 "근데 조금만 쉬었다 하면 안 될까? 계속 앉아서 공부만 했더니 허리가 아파서 그래."

 "나도 화장실 가고 싶은데..."

 "그럼 십 분만 쉴까?"

 유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채린과 준수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들어 보니 아르페디아 온라인 이야기였다.

 "그래서 네 생각에는 전사의 시대가 지고 생산직 시대가 온단 말이지?"

 "응, 조금씩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대규모 업데이트 후 게임에 일대 변화가 올 거야."

 "그럼 나 생산직으로 바꿀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다만 지금까지 홀대받던 생산직들이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는 거지 전사 직종이 전멸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업데이트라...'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대대적인 패치와 업데이트가 단행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확한 일자는 드림맥스에서 공개하지 않고 있었지만, 올 가을이 지나기 전에는 적용될 것이 유력하다고.

 유한이 자리에 앉자 채린이 생각났다는 듯 그에게 말했다.

 "아참! 지수가 너한테 전하라는 말이 있더라."

 "뭔데?"

 "대장간 근처에서 크롬 광맥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한번 확인하러 오래."

 "뭐? 크롬!"

 크롬 광맥이란다.

 철광맥 하나만 발견해도 만세를 부를 상황인데, 그 몇배의 가치를 지닌 크롬 광맥을 발견했다는 것은...

 지금 대륙에 존재하는 크롬 광산은 10개가 넘지 않았다. 

 "도, 도대체 어떻게 발견했다는데?"

 리지스는 상인이다.

 광산을 살 수는 있어도 발견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유한이 모르는 사이에 광부나 대장장이를 고용해 광맥을 찾고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 발견된 장소가 대장간 근처라잖은가.

 그렇다면 유한이 모를 리가 없었다.

 "글쎄, 궁금하면 직접 만나서 물어봐."

 역시 그 수밖에는 없을 듯했다.

 "자자, 여러분. 십 분이 지났으니까 공부를 합시다."

 그 뒤로 유한은 참고서와 문제집을 붙들고 공부를 했지만, 처음만큼 집중이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크롬 광맥이라는 단어가 연방 번쩍거렸고, 어서 공부를 끝마치고 게임에 접속해 보자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3)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유한이 밤이 되어서야 접속하자, 리지스가 발끈해 소리를 질렀다.

 유한과 리지스는 동료다. 그리고 동업자이기도 하다.

 유한이 만든 물건 중 반은 골드러시 상인 연합에서 가져가지만, 나머지 반은 리지스가 자신의 상점을 통해 판매한다.

 덕분에 유한이 놀면 리지스도 손해를 보게 된다.

 "사정이 있었어. 잘못하면 너나 나나 망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겼다고."

 "뭐라고?"

 망한다는 소리가 상인에겐 가장 무서운 소리.

 리지스는 무슨 일인가 물어봤지만, 유한은 그저 한동안 직접 무구를 생산할 수 없을 거라는 말만 했다.

 "드워프의 철은 충분히 만들어 놓을 테니까, NPC 대장장이들이 만든 무구를 팔도록 해. 한동안 주문은 더 늘리지 말고."

 "너 또 어디 퀘스트하러 가는 거야?"

 "그래, 현실에서 강제 퀘스트가 하나 떴다."

 리지스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유한이 평소 같지 않게 심각해 보이거니와, 대충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요새 학교마다 중간고사 시즌이니 그와 관련된 일일 것이다.

 "그런데, 크롬 광맥을 발견했다면서?"

 "아, 그거?"

 리지스가 시큰둥하게 반응하자 유한은 김이 쭉 빠졌다.

 '혹시 별거 아닌 건가?'

 광석 몇 개 발견한 것을 광맥이라 착각한 건 아닐까?

 실제 광산을 만들려고 광맥을 찾을 때 그런 삽질을 많이 한다. 기껏 찾은 광맥도 채굴량이 시원치 않으면 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번에 크롬 광맥이라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닌지.

 하지만 그건 유한만의 착각이었다.

 "따라와."

 리지스가 앞장서 숲 속으로 들어갔다.

 유한은 얼떨결에 그녀를 따라갔는데 지그 대장간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야."

 그녀가 가리킨 곳은 어느 바위 옆이었다. 흙을 팠다가 다시 덮은 흔적을 빼면 특별한 것이 없었다.

 "어제 포포가 하루 종일 보이지 않기에 찾으러 다녔는데..."

 리지스의 이야기는 이랬다.

 포포를 찾아 인근의 숲 속을 뒤지고 다닌 리지스.

 그녀는 이곳에서 땅을 파헤치는 포포를 발견하게 되었다.

 덩치가 커진 이후에는 자주 주위를 파헤치고 다녔기에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는데, 포포가 입에서 뭔가를 우물거리는 것을 보았다.

 뭘 또 훔쳐 먹나 싶어 억지로 빼앗아 살펴봤더니 바로 크롬 광석이었단다.

 "허! 설마?"

 유한이 믿겨 하지 않자 리지스는 땅속을 가리켰다.

 "나도 처음에는 안 믿었어. 하지만, 땅을 파니까 계속 크롬 광석이 나오는 거야."

 이곳이 크롬 광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난 그녀는 서둘러 흙을 덮어 버리고는 유한을 찾았다. 그러나 유한이 마침 접속해 있지 않았기에 대신 채린에게 말을 전했다.

 "근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광맥이 있더라도, 산출량이 얼마나 될까 의심스럽더라고."

 광산은 땅을 파는 비용 이상의 소득이 나와야 수익을 올릴 수 있다. 광석 몇 개에 혹해서 삽질하다 실패하면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니다.

 "참나, 그걸 걱정한 거냐?"

 "투자는 신중히 생각해야 하는 법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크롬 광석을 획득한 것만 해도 행운이었다.

 그리고 산출량이 얼마 안 된다 해도 지그 대장간에서 쓸 정도만 나와 주면 충분한 게 아닌지.

 유한은 인벤에서 삽과 곡괭이를 꺼내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들어가자 평범한 돌과 다른 광석이 튀어나왔다.

 유한은 발치에 떨어진 광석을 주워 정보를 살펴보았다.

 -(=크롬 광석=)

 -설명: 크롬이 함유된 광석이다. 제련을 하면 크롬괴를 얻을 수 있다.

 유한은 즉각 이곳이 크롬 광맥인지, 아님 그냥 크롬 덩어리가 하나 묻혀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로 했다.

 얼마쯤 흙을 파고 나니 거대한 암반이 나타났다. 유한은 곡괭이로 바꿔 들고 채굴 스킬로 암반을 파기 시작했다.

 "채굴! 채굴!"

 파고 들어갈 때마다 크롬 광석들이 그의 발치에 나뒹굴었다. 깊숙하게 파면 팔수록 나타나는 광석의 크롬 함유량이 높아 갔다.

 이 정도면 크롬 광맥이거나 최소한 광맥에 닿아 있는 것이 확실했고, 채굴량도 적지 않을 듯했다.

 "포포 이 자식! 네가 드디어 밥값을 했구나!"

 유한은 리지스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온 포포를 와락 끌어안았다.

 "삐잇! 삐잇!"

 숨이 막히는지 바동거리는 녀석을 놓아 준 그는 리지스에게 물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직 너와 나뿐이야."

 "잘했어. 괜히 소문나 봤자 똥파리만 날릴 테니까."

 유한은 힘들게 판 광산을 도로 묻어 버리고, 채굴한 크롬 광석도 모두 주워 담았다. 나중에 알아볼 수 있게끔 근처 나무에 표시만 해 두었다.

 크롬과 같은 희귀 금속의 광산은 대부분 거대 길드가 소유하고 있다.

 소문이 나면 푸른새벽 길드보다 더 강한 길드들이 마수를 뻗어 올 것이다.

 유한은 한동안 비밀로 하기로 했다.

 거대 길드로부터 광맥을 지킬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분란을 일으킬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눈앞에 다가온 검정고시 퀘스트를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크롬 광산 개발은 이후에 생각해 볼 문제였다.

 (4)

 10월 19일 운명의 날.

 태양은 떠올랐고, 유한은 비장하게 시험장으로 향했다.

 아버지에게 강제 퀘스트를 받은 이후, 그는 최선을 다했다. 손을 놓았던 교재를 탐독하고, 검정고시 학원에서 예상 문제라고 집어 주는 것들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게임하는 시간도 최대한 줄였다. 아니, 심지어 게임을 하면서도 공부를 했다. 어떻게 했느냐 하면...

 "지그야, 그거 뭐야?"

 "공부할 거. 교재를 복사해서 가지고 왔어."

 "교재를 복사했다고? 야, 너 그거 불법인 거 몰라?"

 "괜찮아, 나만 볼 건데 뭐."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다가 신고당했단 말이야."

 "내가 정리한 건데도?"

 유한은 교재 내용이나 문제들을 발췌해서 텍스트 파일로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텍스트 파일을 게임에서 불러와 읽을 수 있는 한 권의 책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게임을 하면서 틈날 때마다 보았다.

 사실 이렇게 하는 건 오펜에게서 배운 것이다.

 오펜이 들고 다니는 마법서는 무늬만 마법서일 뿐, 그 안에는 문학 해설이라든지, 영어 문법이라든지, 국사표 등 그가 정리한 학습 자료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렇게 안 하던 공부를 했다. 덕분에 3일 전 학원 모의고사 때 점수가 껑충 뛰어오르긴 했지만...

 '으아아아악! 평균 10점을 어떻게 더 채우냐고요!'

 그래서 시험 전날, 유한은 만들고야 말았다.

 이게 들켰다간 실격은 물론이요 앞으로 3년 동안 관련 국가고시는 엄금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캡슐을 사수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했다.

 '신이여 저를 도와주소서.'

 유한은 가는 내내 두근거리는 심장을 쉬이 가라앉힐 수 없었다. 대장장이 지그의 운명이 걸린 시험이기도 하지만, 고사장이 생소하게도 대학교로 배정된 탓이다.

 난생처음 대학교에 와 본 것이기에, 유한은 한참 동안 캠퍼스 안을 두리번거리고 해매야 했다.

 '휴, 다행히 제 시간에는 들어왔군.'

 유한은 한림대 강의실에 들어와서 자기 자리를 찾았다. 수험 번호부터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자리도 별로였다. 구석이나 창문 쪽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필이면 중간 자리였다.

 '그래도 벽이 될 사람이 있다면!'

 그러나 유한의 기대는 무참하게 짓밟혔다.

 좌우 옆 자리는 체격이 작은 범생이와 할머니였고, 앞자리의 날라리는 시험에 관심도 없는지, 그냥 엎드려 잠만 잤다. 뒷자리의 수험생은 아예 오지도 않았다.

 '오 마이 갓! 저를 버리시나이까!'

 절망하고 있는 유한이었지만 신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자 2명의 시험 감독관이 들어왔다.

 유한은 시험 감독관 중의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유한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왜 웃는 거지? 설마 내가 뭘 하려는지 알고 있는 건가?'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했다.

 내심 찔려 하는 그의 곁으로 좀 전의 감독관이 지나가면서 한 마디를 흘렸다.

 "요새 무구의 질이 좀 떨어진다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군."

 ",,,!"

 목소리를 듣고 유한은 그가 누군지 알았다.

 차림새가 틀리고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어서 몰랐는데, 시험 감독관은 바로 딜론이었다. 골드러시 상인 연합의 발덴 지부장인.

 유한의 입이 헤벌쭉하게 벌어졌다.

 그가 그렇게 좋아하거나 말거나 딜론은 수험생들과 시간을 체크하고는 칠판이 있는 단상으로 올라가 이렇게 말했다.

 "시험 감독관인 황세용입니다. 다들 이미 알고 있으시겠지만,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부정행위는 일제 용납되지 않습니다. 부디 삼 년 동안 후회하실 일을 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잠시 후, 시험이 시작되었다.

 문제지와 답안지를 받아 든 유한은 그동안 자신이 공부한 것의 120%를 짜내며 문제를 풀었다.

 다행히 1교시 국어 시험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과목이기도 하기에 유한은 품속에 넣어 둔 놈을 꺼내지 않고도 충분히 문제를 풀 수 있었다.

 "부정행위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부정행위를 한 자는 바로 답안지를 뺏고 시험장에서 쫓아내겠습니다."

 유한이 문제를 풀고 있는 동안, 감독관 황세용은 부지런히 강의실을 돌면서 계속 부정행위 금지를 강보하고 다녔다.

 1교시는 그렇게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2교시 수학도 어렵긴 해도 준수와 공부한 것이 있어 만족할 수준으로 끝냈다.

 하지만, 3교시 영어 시험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영어는 항상 모의고사에서 성적을 팍팍 갉아먹던 주범.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긴 했지만, 영어 시험지는 아무리 봐도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잉크였다.

 '캡슐을 지키려면...'

 아이템 컨닝 페이퍼를 사용할 때였다.

 유한은 일단 감시 몬스터 감독관의 인식 범위를 계산했다.

 그리곤 컨닝 페이퍼를 슬그머니 꺼내려는데, 그만 딜론, 아니 황세용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부정행위는 안 됩니다."

 아까부터 녹음기처럼 되풀이되던 대사를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놀란 유한은 품속에 있던 컨닝 페이퍼에서 재빨리 손을 뺏다.

 '제길, 좀 봐달라고요!'

 지지리 복도 없었다.

 처음 딜론을 만났을 때만 해도 적당히 눈감아 줄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정도(正道)를 걸었고, 유한이 애처로운 눈빛을 보아도 싹 무시해 버렸다.

 이후 유한은 몇 번 더 컨닝 페이퍼를 만지작거렸지만, 그때마다 딜론이 눈을 번득이는 바람에 꺼내는 것을 포기했다. 게임에서 보았던 협력자의 눈빛은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크아아! 망했다.'

 그러나 사람이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마침 왼쪽에 범생이스런 녀석이 앉아 있었는데, 아주 막힘없이 문제를 풀고 있었다.

 '옳거니!'

 유한은 녀석의 답안지를 훔쳐보기로 했다.

 또 다른 컨닝용 아이템 손목시계를 이용하면 되었다.

 그의 손목시계는 표면이 검은색이라, 거울처럼 풍경이 반사되어 비치곤 했다. 각도를 잘만 맞추면 범생이가 몇번에 체크하는지 대충 알수 있었다.

 슬쩍 시계를 들여다본 유한이 답을 체크하려던 순가.

 "부정행위는 안 됩니다."

 언제 다가왔는지 딜론이 옆에 서 있었다.

 유한은 들켰나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곳에 표기를 하고 말았다. 범생이가 체크한 것은 1번이었는데 자신은 그만 2번에 체크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신이 엉뚱한 곳에 표기한 바람에, 딜론이 컨니이라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휴우!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유한은 다시 컨닝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가 시계를 들여다볼 적이면 딜론이 나타나서 예의 대사를 내뱉으며 답안지를 살펴보곤 했다.

 그래서 유한은 컨닝한 문제 상당수를 엉뚱한 곳에 표기하고 말았다. 의심을 안 받기 위해선 범생이가 체크한 답과 틀린 곳을 찍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이게 다 틀린다면 영어는 전멸이었고, 평균 80점을 만드는 것도 수포로 들아간다.

 '크으윽! 너무 밉다, 미워!'

 어떻게 된 것이 자신의 근처만 맴도는 딜론이 정말 미웠다.

 딩동댕동!

 시험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자 유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딜론을 쫓아갔다. 화장실 근처에서 그를 붙잡은 유한은 다짜고짜 항의부터 했다.

 "아주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좀 봐주면 안 됩니까?"

 "허허, 내가 그럴 입장이 아니란 걸 알잖아요."

 시험 감독관이 컨닝을 방조해서야 되겠는가.

 "아니 그럼 차라리 아는 척을 하질 말던가요!"

 "반가운 얼굴을 봤는데 어찌 모르는 척을 하겠습니까."

 "어쨌거나 난 끝장이라고요! 아저씨 때문에 망하게 생겼단 말입니다!"

 "어허, 그깟 컨닝 못했다고 망하기까지야."

 "모르니까 그리 말할 수 있는 거라고요! 이 시험에 캡슐과 제 게임 인생이 걸려 있단 말입니다! 앞으로 제가 무기를 못 만들게 되면 모두 딜론 님 때문임을 아십쇼."

 유한은 괜히 아무 잘못도 없는 그에게 화풀이를 하고는 강의실로 돌아가 버렸다.

 "뭔가, 황 강사?"

 마침 다가온 동료 감독관이 딜론에게 물었다.

 딜론, 아니 한림대 경제학과 전임 강사인 황세용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그래?"

 동료는 강의실로 들어가는 유한을 슬쩍 바라보다가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근데 자네 요새도 게임하나?"

 가상현실 게임은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었다. 그것은 대학교 강사인 황세용도 다를 바 없었다.

 "뭐, 재미있으니까."

 현실에서 자본이 없어 포기했던 사업도 즐겨 볼 수 있었다. 또 그와 관련해 게임 내 인플레이션이나 독과점 현상, 유통 과정 등을 현실과 비교해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럼 밑에 데리고 있는 애들 조심하라 이르게. 요새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그들이 진출한 모양이야."

 "그들이라 하면?"

 "자네가 예상한 그게 맞아."

 황세용의 안색이 굳어졌다. 몇 해 전, 다른 가상현실 게임에서 날뛰었던 '그들'에 대해서 떠올랐기 때문이다.

 "티쳐스(Teachers)라..."

 (5)

 '크으윽! 난 끝났어.'

 시험을 마친 다음, 유한은 힘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3교시 영어 시험과 4교시 과학을 죽 쑨 뒤로 이를 만회하기 위해 문제를 풀긴 했지만 평균 80점을 못 넘을 것 같아서다.

 척척 문제를 풀어 가던 옆자리의 범생이와 품속의 컨닝 페이퍼를 생각하면 할수록 속이 쓰리는 그였다.

 "어서 와라. 시험 잘 쳤니?"

 유한은 반가이 맞아 주는 어머니께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며 냉장고에 있던 냉수를 들이켰다. 그러나 답답한 속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어때? 문제가 어렵거나 하진 않았어?"

 "뭐 그럭저럭요."

 어머니가 내내 옆에서 시험에 대해 물었지만, 유한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이에 김 여사는 아들이 시험을 잘 못 쳤음을 알았다.

 저녁 식사 후 유한은 인터넷에 올라온 해답들을 보며 따로 표기해 온 시험 답안을 맞춰 보았다.

 '다른 과목들은 그럭저럭 쳤는데...'

 문제는 영어와 과학이다.

 이 과목들은 마지막까지 해답을 맞춰 보지 않았다. 얼마나 점수가 개판으로 나올까 겁이 났기 때문.

 '아놔! 정말 너무한 거 아냐? 좀 봐주면 댁도 좋고 나도 좋을 텐데!'

 유한은 딜론이 조금만 융통성을 발휘해 주었다면 이리 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다른 교실에서 시험 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시험관이 적당히 봐줘서 컨닝도 하고 했다는데 말이다.

 '캡슐이 없어지면 다 딜론 때문이야.'

 그렇게 그를 원망하며 유한은 두 과목의 해답을 비교해 보았다.

 불길하게도 영어 1번 문제부터 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유한이 컨닝하다가 실패해서 찍을 문제가 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내 이럴 줄 알았지. ㅎㅎ 반전!)

 정답이라 나온 것은 범생이가 찍은 답이 아니라, 바로 유한이 얼떨결에 찍은 답이 아닌가.

 "어? 이, 이거?"

 그리고 그 뒤로도 계속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

 얼떨결에 찍은 것들이었지만 상당수가 정답이었다. 범생이가 자신 있게 체크한 답을 따랐었다간 전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사실 옆 자리의 범생이 녀석은 생긴 것만 범생이었던 모양이다. 영어뿐만 아니라 유한이 컨닝을 시도했던 과학 과목도 범생이가 체크한 답은 오답인 것이 숱하게 많았다.

 '75점...'

 지뢰 과목들의 점수가 80점을 넘지 못했지만, 국어나 사회, 국사 등 평소 잘하던 과목들에서 85점 넘게 선방을 하면서 평균점을 끌어올렸다. 거기다 예전 같으면 지뢰였을 수학도 80점으로 크게 선전했다.

 -축하합니다. 검정고시 퀘스트를 완수하셨습니다.

 -(+고졸 학력자+)의 칭호를 얻었습니다.

 -최종 평균 점수는 82점입니다. 캡슐을 수호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팡파르와 함께 눈앞에 이런 창이 떠오르는 듯했다.

 "우와아! 합격이다!"

 유한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펄쩍펄쩍 뛰었다. 그는 얼굴을 활짝 펴고 거실로 내려가 어머니에게 점수를 자랑했다.

 "뭐야? 성적이 잘 나온 거니?"

 "예! 평균 82점 먹었어요!"

 "어머나, 정말?"

 "진짜라니깐요! 나중에 점수가 발표되면 보세요."

 아들이 저리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는 걸 봐선 거짓이 아닌 모양. 내심 걱정했던 김 여사는 유한의 선전에 크게 기뻐했다.

 더 이상 아들놈은 고교 중퇴생이 아니었다. 그리고 한다면 하는 장한 자식이었다.

 "유한이 합격했다면서?"

 진짜로 연락을 받은 아버지는 서둘러 가게를 닫고 집으로 달려왔다. 검정고시에 합격한 아들 녀석을 축하해 주기 위해 통닭과 피자 따위를 사 들고서.

 "허허! 이 녀석, 게임만 하는 줄 알았더니..."

 "훗, 게임하면서도 공부를 한다고요."

 기분 좋게 검정고시 퀘스트를 완료한 유한은 보상으로 얻은 통닭 다리를 뜯으며 연방 으쓱거렸다.

 그날 유한은 캡슐을 사수했다.

 < 6. 검정고시 퀘스트 >>>

 (뭐 이런 경우가!!!! 제가 쓰면서 가장 생각을 많이 했던 챕터랄까요. 무지 길기는 했지만요. ㅋㄷㅋ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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