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추락하는 공중 요새 >
(1)
유한은 힘차게 버튼을 눌렀다.
곧 엄청난 굉음이 터지며 폭발의 진동이 공중 요새를 뒤흔들 것이다.
하지만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몇 번이고 연거푸 눌렀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어? 도대체 왜?"
"으하하핫! 너에게 그것을 준 놈들이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나 보구나."
광소를 터트린 이바니우스 3세는 한껏 비웃음을 띠었다.
"그 원격 마법 폭탄은 애초에 우리 미케니아인들이 만든 것이다. 격발장치의 신호를 마나 흐름을 통해 폭탄으로 전달해 터트리는 방식이지. 꽤 편리하긴 하지만, 마법사가 마나 흐름을 차단하면 사용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다시 말해서 송신을 막고 있다는 소리다.
분명 마나 흐름을 차단하고 있는 것은 이바니우스 3세일 것이다. 키메라와 마도사들의 왕이니 그 정도는 일도 아닐 터.
"분명 너에게 그것을 준 놈들은 우리 노예였던 드워프들이렸다?"
그랬다.
심문을 끝낸 다음, 드워프 부족장들이 유한에게 보여준 것은 원격 마법 폭탄만이 아니었다. 과거 일곱 드워프 부족이 미케니아의 지배를 받을 때의 역사도 보여 주었다.
유한은 아바란 평원에 살던 검은 수염 일족이 전멸당한 기록을 다시 보았고, 살아남은 여섯 부족의 드워프들이 미케니아 왕국에서 탈출해 먼 북쪽 땅까지 도망쳐 온 기록도 보았다.
미케니아 왕국에서 간신히 탈출한 드워프들이 단결하여 만든 나라가 바로 노스아크였던 것이다.
"웃기는 일이로다. 감히 종놈들이 훔쳐간 상전의 장난감으로 상전을 해치라 시켰다니."
'제길, 이제 어쩌지?'
회심의 한 방으로 준비했던 마법 폭탄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당황하는 유한에게 오펜이 다가와서 낮게 말했다.
"왕의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리게 만들어야 해요.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마나 흐름의 차단도 풀릴 겁니다."
하지만 무슨 수로 왕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린단 말인가.
왕에게 직접 공격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왕과 유한 일행의 사이에는 키메라들이 늘어서 있었다. 활도 마법 공격도 중간에 막히고 말 터.
"뭐 하느냐. 얼른 저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국왕의 명령에 라이칸과 키메라들이 다시 일행에게로 달려들었다.
유한이 여전히 방법을 찾아 고민하고 있는데, 라스트모히칸과 놈의 똘마니들이 앞으로 나갔다.
틈을 만들어 주려는 것인가 싶었는데, 그런 기특한 일을 할 정도로 착한 놈들이 아니었다.
"우린 아니에요! 그냥 저놈들 따라왔다가 그만..."
"미케니아 만세! 이바니우스 3세 폐하 만만세!"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세 녀석은 배신을 때렸다. 빈손으로 두 손을 번쩍 들고 키메라들에게 달려갔다.
"저것들이!"
"놔둬, 그보다..."
발끈한 유한이 나서려는 것을 로키가 막았다. 그는 유한의 귀에 뭔가 나지막하게 말하고 비곗덩어리의 뒤를 쫓아갔다.
"어리석은 천민 놈들, 그런다고 네놈들을 살려 둘 성싶으냐?"
국왕이 명한 것은 놈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기억하는 라이칸은 주저 없이 검을 찔러 넣었다. 깜짝 놀란 비곗덩어리가 물러나려 했지만, 오히려 앞으로 떠밀려 나갔다.
"켁!"
비곗덩어리를 라이칸에게 떠민 것은 로키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유한쪽을 돌아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뛰어!"
좀 전에 로키가 말한 것이 떠올랐다.
유한은 곧장 앞으로 달렸다.
한쪽 무릎을 꿇은 로키의 어깨를 밟고, 칼에 찔린 비곗덩어리의 등을 밟은 다음, 단숨에 라이칸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무방비 상태로 있던 이바니우스 3세에게 곧장 검을 찔러 넣었다.
라이칸이 다급하게 돌아섰지만, 이미 유한을 막기엔 늦었다.
유한과 로키가 즉흥적으로 결행한 이 공격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이제 화룡점정을 찍으면!
"하찮은 놈!"
"으아악!"
이바니우스 3세가 바람의 날개를 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순간 그에게 돌격하던 유한의 몸이 둥실 떠오르더니 라이칸의 머리를 지나 동료들에게 날아갔다.
쿠당탕탕!
"크으으윽!"
안타깝게도 기습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더욱 최악인 것은 격발장치를 떨어트리고 왔다는 것이다.
"후후후, 도박에 실패했구나."
라이칸은 격발장치를 주워 왕에게 공손히 바쳤다.
격발장치를 받아 든 이바니우스 3세는 양천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핫! 대장장이여! 이제 무엇으로 짐을 막겠느냐?"
'큭! 상황이 재미없게 되었네.'
비장의 한 수마저 빼앗겨 버리자 유한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지그 오빠, 좋은 수 없어?
-없어. 열심히 튈 준비나 해.
에이린의 귓속말에 그렇게 대답한 유한이 엉덩이를 뒤로 빼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뒤편의 테라스를 통해 시커먼 무언가가 뛰어 들어오더니 그대로 이바니우스 3세의 손목을 그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크악!"
잘려진 이바니우스 3세의 손에서 격발장치가 떨어졌다. 이를 시커먼 인영이 주워 유한에게 던졌다.
격발장치를 받은 유한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자, 괴인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해? 얼른 눌러!"
"예, 옌스?"
시커먼 인영은 바로 옌스였다.
어떻게 아바란 왕국에 있어야 할 녀석이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분명 녀석은 자신이 떠나올 때까지만 해도 어디론가 떠나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는데.
"눌러 버리라니까!"
그렇다. 지금은 그걸 따지고 있을 시간이 아니다.
이바니우스 3세는 손이 잘린 고통에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라이칸과 키메라들은 갑자기 난입하여 맹공을 퍼붓는 옌스를 상대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찌잉!
유한이 격발장치의 버튼을 누른 순간, 이전과 다른 날카로운 신호음이 들렸다.
이바니우스 3세가 차단하던 마나 흐름이 풀린 것이다. 곧이어 엄청난 굉음과 진동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쿠쿵! 쿠쿠쿠쿵!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이 울리고 벽에 거미줄처럼 금이 갔다.
맹렬한 진동이 뒤흔들고 지나간 후, 바닥이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었다. 그리고 공중 요새가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드워프 부족장들의 부탁>) 퀘스트를 성공했습니다.
-공중 요새가 추락합니다. 서둘러 탈출하십시오.
"자, 얼른 탈출하자!"
"서둘러! 이 요새는 지금 북해 위에 떠 있어!"
옌스의 말에 모두들 황급하게 왕궁을 빠져나갔다.
빙하가 떠다니는 북해 바다에 몸을 넣는 것만으로도 즉사다. 아니, 차라리 죽으면 다행이지만, 꽁꽁 얼어서 가사(假死) 상태가 되면 누가 풀어 주기 전까지 계속 얼음 바다를 떠다녀야 한다.
누구도 북해 바다를 떠다니는 동태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비곗덩어리나 똘마니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라이칸의 칼에 찔리긴 했지만, 비곗덩어리는 아직 살아 있었다.
"가, 같이 가요!"
"닥쳐, 이 배신자!"
녀석들은 유한 일행의 뒤를 허둥지둥 쫓아갔다.
장내에 남은 것은 이바니우스 3세와 여전히 혼란 상태에서 회복되지 못한 키메라들뿐이었다.
"크아아악! 이 저주받을 대장장이 놈! 잡히면 천참만륙을 내 주리라!"
이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이는 이바니우스 3세의 고함만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2)
"야, 옌스. 너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냐?"
유한은 달리는 와중에도 궁금해 하며 물었다.
"후후후, 이 몸을 왕따시킬 수 있을 줄 알았나?"
"인마! 그게 아니라 어떻게 왔냐고!"
"당연히 미행했지."
"큭!"
역시 그랬던 모양이다.
옌스는 공중 요새가 부양하는 혼란스런 상황에 은근슬쩍 왕궁 안으로 숨어들었다.
평상시라면 키메라들이 빈틈없이 지키고 있어 어림없는 이야기지만 유저들과 전투를 치르면서 성의 경비에 구멍이 뚫렸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옌스가 왔다면 리지스도 따라왔을 가능성이 높잖아!'
아니, 리지스가 먼저 옌스를 불러 미행하자고 했을 수도 있다. 그녀는 자신이 공중 요새로 가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옌스는 유한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놀렸다.
"바츠, 누님이 자신을 소외시켰다고 굉장히 섭섭해 하던에 각오해야 할 거다."
"제길! 자기가 둘이서 갔다 오라 해 놓고 뭔 소리야!"
"둘이만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아무한테도 이야기 안하려 했던 건 누구였더라?"
"크윽, 이 자식! 다 엿들었구나!"
분통해 하며 달려가던 유한은 발걸음을 딱 멈추었다.
앞쪽 공간이 일렁인다 싶더니, 3명의 마도사들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들은 강해 보이는 전투용 키메라들을 거느린 채 유한일행의 앞길을 막았다.
"멈춰라, 이 역적 놈들!"
"닥쳐! 네놈들을 상대할 틈은 없다!"
옌스가 곧장 어깨를 들이밀며 앞으로 맹렬히 뛰어나갔다. 그의 주특기인 대쉬 공격이었지만, 마도사들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흥, 멍청한 놈. 아이스 그라운드(Ice Ground)!"
"헛!"
바닥이 얼음판처럼 미끌미끌해졌다. 그 위에서 허둥거리던 옌스는 볼링공처럼 키메라들에게 돌진했다. 옌스와 부딪친 키메라들은 사방으로 나뒹굴었다.
스트라이크!
"미케니아의 전투 마도사를 우습게보지 마라. 파이어 레인(Fire Rain)!"
"다들 물러나요! 마나 실드(Mana Shield)!" (아... 영어 쓰기 진짜 귀찮다. 젠장;)
마도사들이 만든 불비가 일행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오펜이 다급하게 방어하지 않았다면 모두 통구이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후후후, 잘 막았다만 다음 공격도 막을 수 있을까?"
"아차! 더블 캐스팅(Double Casting)이었나!"
더블 캐스팅.
두 가지 마법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고위 마도사의 능력.
처음에 날린 파이어 레인은 기만에 불과했다. 그들의 진짜 공격은 왼손에 준비되어 있었다.
"야! 배신자! 니 도끼 얼른 던져!"
"뭐라고요?"
"닥치고 얼른 던져 인마! 여기서 죽고 싶어?"
유한의 윽박질에 머뭇거리던 라스트모히칸은 마도사를 향하여 자신의 애병 오크니스 엑스를 던졌다.
"부메랑 엑스(Boomerang Axe)!"
도끼 투척 스킬을 펼쳤지만, 과연 마도사들에게 통할지 장담할 수는 없었다.
"괜히 따라온 거 아냐?"
"간다! 장작 패기 검법!"
비곗덩어리가 도끼를 던진 것과 동시에 유한이 앞으로 달렸다.
막 공격 마법을 날리려던 마도사들은 비웃음을 지었다. 도끼에 시선을 돌리게 만들고 빈틈을 노려보려는 술책이겠지만, 그런 뻔한 공격에 당할 자신들이 아니다.
마도사 셋 중 한 사람의 손이 유한을 향하여 펼쳐졌다.
그가 막 공격 마법을 펼치려는 순간.
"암 브레이크!"
유한의 필살기가 오크니스 엑스에 작렬했다.
"아아악! 내 도끼가!"
"헉!"
공중에서 산산조각 난 도끼 파편 수십 개가 마도사들을 덮쳤다.
마도사들이 주춤하는 사이, 파편 사이를 교묘히 파고든 유한의 포이즌 세이버가 선두에 선 마도사의 목을 베었다.
-경험치 700을 얻었습니다.
-마도사의 반지를 얻었습니다.
"파워샷!"
"커억!"
연이어 틈을 노리고 날아든 채린의 화살이 또 다른 마도사의 머리에 꽂히고, 로키가 마지막 마도사를 향해 돌진했다.
"체, 체인 라이트..."
"늦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마도사가 철퇴를 맞고 날아갔다.
하나같이 강한 마도사들이었지만, 유한의 재치에 허를 찔려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전멸했다.
로키가 키메라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마도사들이 데려온 키메라는 이미 옌스가 모두 정리해 버린 뒤였다.
"엥? 벌써 다 처리했어?"
"그건 이쪽에서 하고 싶은 말이다."
"젠장, 마도사 놈에게 한 방 날렸어야 했는데."
그러나 그렇게 아쉬워할 틈은 없었다. 공중 요새는 계속 추락하고 있었고, 이번엔 뒤에서 라이칸이 키메라들을 거느리고 쫓아왔다.
"뛰어! 성문이 바로 코앞이야!"
"아이고, 내 도끼가..."
"형, 얼른 가자고요!"
비곗덩어리는 애병을 잃은 충격에 반쯤 정신을 놓았다. 녀석의 동생들은 그런 그를 질질 끌고 성문 밖으로 나갔다.
모두가 왕궁에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유한은 곡괭이로 성문 양쪽의 기둥을 후려쳤다.
안 그래도 폭발로 인해 금이 갔던 기둥은 그 일격에 완전히 무너져 버려 라이칸과 키메라들은 한동안 유한 일행을 쫓을 수 없게 되었다.
"근데 나오긴 나왔는데 공중 요새에서 탈출은 어떻게 하지?"
"구난 보트, 아니 기구 같은 거 없어?"
그런 건 없는 듯했다. 있다면 부활한 공중 요새의 주인들이 이렇게 우왕좌왕하며 패닉에 빠져 있진 않았을 테니까.
"걱정 마, 우리에겐 오펜이 있잖아. 오펜의 부유 마법이라면 모두 탈출이 가능할 거야."
"오! 그렇군."
유한의 말에 다들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유일하게 오펜만이 웃지 않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내 능력으로는 한 명밖에 못 데려갑니다. 마법진을 그리면 되긴 하지만 시간이 너무 걸려서..."
결국 다 함께 탈출할 수 없다는 소리다.
"크아악! 그런 건 미리 말했어야지!"
"묻지도 않았잖아요."
오펜을 믿었기에 유한은 주저 없이 폭발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불가능하다니, 모두의 얼굴에 절망감이 맴돌았다.
"그럼 모두 여기서 죽는 거야?"
"오펜과 한 사람은 살겠지."
에이린도 살 수 있을 것이다. 독돌이를 타고 가면 되니까.
하지만 나머진 모두 공중 요새를 빠져나가지 못해 죽게 될 것이다. 아니면 동태처럼 북해 바다를 둥둥 떠다니거나.
상황이 이렇게 되니 나름대로 유한 일행을 쫓아왔던 라스트모히칸은 입에 거품을 물 지경이 되었다.
"뭐야! 남의 도끼까지 작살내 놓고 탈출 방법이 없다고?"
"나도 있는 줄 알았다, 인마!"
"시끄러, 새꺄! 어쩔 거야! 어쩔 거냐고!"
"몰라 인마! 배신할 땐 언제고 왜 엉겨 붙어서 지랄이야?"
"살려 줘! 내 도끼 물어 줘! 드래곤 엑스 달란 말이야!"
비곗덩어리의 난동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짜증 난 유한이 검에 손을 가져가려는 그때, 비곗덩어리의 머리 위로 큼지막한 수정이 떨어진 것이다.
"케엑!"
그리고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
"어휴, 좀 더 절체절명의 순간에 등장하려고 했더니만."
(3)
"리지스!"
수정덩이로 라스트모히칸을 응징하며 나타난 것은 리지스였다. 모두의 앞에서 씽긋 미소를 지은 그녀는 메고 있던 가방에서 커다란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이건?"
"일회용 기구. 혹시나 해서 준비해 왔는데 다행이다, 그치?"
"오오오!"
리지스는 기구에 연결된 끈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압축되어 있던 헬륨이 풍선에 스며들며 기구가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둥실 떠올랐다.
"됐어! 이젠 살았다!"
"얼른 타요, 형!"
언제 깨어났는지 머리에 붕대를 감은 비곗덩어리와 똘마니 동생들이 반색하며 달려들었다.
그런 그들을 리지스가 가로막았다.
"어딜 함부로 타려고! 타고 싶으면 돈을 내! 돈을!"
"뭐라는 거야! 이 발육부진이! 돈 없으니까 저리 비켜!"
비곗덩어리는 하면 안 되는 말을 하고 말았다. 동전 3개가 무섭게 비곗덩어리 일당의 이마빡에 날아가 꽂혔다.
리지스는 아까 던졌던 수정을 기구에 옮겨 실으며 말했다.
"이 기구는 오 인승인데 지금은 네 명밖에 탈 수 없어. 그래서 자력으로 탈출 가능한 사람은 제외하겠어."
"그 수정 내다 버리면 한 명 더 탈 수 있지 않을까?"
"흥, 바랄 걸 바라야지."
지금 리지스가 부둥켜안고 있는 것은 유한이 동력로에서 본 적이 있는 수정 기둥의 일부였다. 바로 공중 요새의 주 동력원이던.
"그거 어디서 난 거야?"
"바닥에서 뭔가 로켓처럼 튀어 나오기에 가 보니 이게 있더라고."
폭발의 여파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하여간 돈 냄새는 귀신같이 맡는 녀석이라니까.'
아무튼 수정을 포기하라고 설득할 수는 없을 듯했다. 설득될 리지스도 아니고, 어차피 모두 다 탈출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오펜은 시아를 챙겨 줘. 에이린은 독돌이를 타고, 나랑 로키 형은 리지스하고 옌스랑 같이 기구를 탈게."
"잠깐! 우린 버려두려고?"
비곗덩어리 일당이 거세게 항의했다.
모두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울 공간도 없는데다가 친하지도 않은 녀석들이다. 더구나 배신까지 했던 녀석들.
다들 무정하게 나오니 비곗덩어리 일당도 어쩔 수 없었다.
"제길! 이렇게 되면 길동무라도 하나 잡아 놔야겠어!"
"꺄악! 왜 이래요? 놔요!"
라스트모히칸은 근처에 있던 에이린을 덥석 붙들었다. 그 모습을 본 옌스가 검을 뽑아 들었다. 감히 더러운 손으로 귀여운 에이린을 붙들다니! (이뿨~ ㅋㅋㅋ;;)
"너 이자식 죽고 싶냐!"
"그래, 죽여 봐. 죽여 보라니까!"
라스트모히칸은 치사하게 에이린을 방패로 내세웠다.
덕분에 옌스는 검을 내리칠 수가 없었다. 유한이 말리고 나선 덕분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만 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기구 보고 사람들이 몰려오는 거 안 보여?"
유한의 말대로 주변으로 공중 요새의 주민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빨리 떠나지 않으면 군중들에게 붙들려 탈출에 실패하고 말 것이다. 여기서 시간을 끌 때가 아니었다.
"어이, 돼지비계. 내가 네 길동무가 되겠다. 그러니 에이린은 풀어 줘."
"지그야!"
채린이 펄쩍 뛰었지만, 유한은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넌 나한테 감정이 있을 거 아냐. 너도 사내새끼라면 여자애 붙들고 징징거리는 짓은 하지 마."
"...알았다."
라스트모히칸은 에이린을 놓아 주었다.
그가 생각해 봐도 확실히 길동무로는 대장장이가 제격이었다. 저놈이 꼬셔서 이번 일에 말려들었고, 저놈 덕분에 애병을 잃고 이렇게 북해 바다의 동태가 되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섰다.
'그래, 이놈이면 적격이지!'
공중 요새가 바다에 추락할 때까지 실컷 두들겨 패 주리라. 그리고 약점을 잡아서 현실의 이름과 집 주소를 내뱉게 만들어 내내 괴롭혀 줄 것이다.
'크크, 넌 이제 죽었어. 인마.;
얼마 후, 유한을 제외한 일행은 추락하는 공중 요새를 떠났다.
먼저 오펜이 시아를 데려가고, 에이린은 독돌이를 타고 재빨리 빠져나갔다. 곧이어 리지스와 옌스, 로키가 탄 기구도 하늘로 날아올랐다.
"살려 줘! 우리고 데려가 달라고!"
"겨우 살아났는데 또 죽을 순 없단 말이야!"
공중 요새의 주민들은 떠나는 기구를 보며 아우성을 쳤다. 우는 사람, 애원하는 사람, 저주와 욕설을 퍼붓는 사람 등등 주민 NPC들은 저마다 다양한 행동을 했다.
이 같은 멸망의 순간, 공중 요새에 남겨진 유저들은 한탄도 발악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싶어 했다.
'어차피 진짜 죽는 것도 아닌데.'
비곗덩어리 일당은 손마디를 꺾으며 유한에게 다가갔다.
유한은 멍하니 떠나는 기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 이제 끝나는 순간까지 주먹의 대화나 나눠 볼까?"
"싫다."
"네가 싫다고 내가 안 때릴 줄 아냐!"
그러나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유한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비곗덩어리가 주먹을 날리기 직전 유한은 하늘의 기구를 향해 건틀렛의 와이어를 쏘았다.
피--잉!
기구에 탄 옌스가 와이어를 낚아챘고 유한은 유유히 와이어를 타고 기구에 올라탔다.
비곗덩어리와 똘마니 동생들은 한순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저 대장장이 녀석이 하늘을 날 수 있었을까.
뭐 그보다 중요한 것은 유한이 탈출했다는 것이다.
"너, 너, 너 이새끼!"
"잘 있어라, 머리에 비계만 가득 찬 놈아."
"크아악! 이 자식 안 내려와? 당장 내려와! 죽여 버리겠어!"
"캬캬캬! 너라면 내려가겠냐?"
유한은 펄펄 뛰는 비곗덩어리들을 감상하며 유유히 공중 요새를 떠났다.
이윽고 차가운 북해 바다에 떨어진 공중 요새는 두 동강이 나며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하얀 물거품이 일어난 것도 잠시, 부활했던 미케니아의 유산은 3명의 불행한 유저를 길동무로 삼아 심해로 깊숙이 가라앉았다.
(4)
"끝난 건가?"
"예, 공중 요새가 북해로 추락했습니다."
게임 관리실에서 지그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던 정경욱 부사장은 눈을 껌벅거리더니 뒤에 있던 손석진을 바라보았다.
"저거 좀 싱겁지 않나?"
"어떤 점이 말입니까?"
"그러니까 마도사들의 왕인 미케니아 국왕이 제대로 활약도 못한 채 사라졌고, 기후 조절기라는 것도 선보이지 못했잖아."
정경욱은 그 꿈을 채 펼치지 못한 악당에 대해서 동정심이 일었다. 지그 녀석이 깽판만 안 쳤으면, 아르페디아 대륙은 어둠과 공포의 시대로 접어들었을 텐데.
물론 게임 분위기가 너무 암울하게 흘러가면 그에 상응하는 퀘스트가 발동하게 되어 있었다.
"국왕이 제대로 활약을 하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응? 이유라니?"
귀가 솔깃해 하는 정경욱을 바라보며 손석진은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대마왕이 처음부터 힘 다 쓰는 거 봤습니까?"
"호오! 그렇군."
말뜻을 이해한 정경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석진의 말대로라면 아직 볼만한 것이 남아 있었다.
공중 요새에서 무사히 탈출한 유한 일행은 곧장 베르겐으로 향했다.
동료들이 휴식을 취하는 사이, 유한은 노스아크의 여섯 드워프 부족장들을 만나러 갔다.
전날 퀘스트를 주었던 부족장들은 공중 요새를 북해에 침몰시켰다는 그의 말에 크게 기뻐했다.
"이제 검은 수염 일족의 한도 풀렸을 게야."
부족장들의 치하가 이어지는 가운데 유한의 눈앞에 안내창이 불쑥불쑥 솟구쳤다.
-명성이 1,200 올랐습니다.
-경험치 3,500을 얻었습니다.
-(=사면장=)을 얻었습니다.
'엥? 뭐야 이거?'
유한은 드워프의 악적을 물리쳐 줬으니, 거창한 보상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손에 들어온 아이템이라곤 딸랑 사면장 하나뿐. 사면장에는 '메카 드래곤 사건의 공범인 지그의 죄를 사면한다'라고만 달랑 적혀 있었다.
덕분에 이제부터 아무 문제없이 노스아크를 들락거릴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못마땅한 생각은 영 지워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하나 물어볼 것이 있는데?"
"뭘 말입니까?"
보잘 것 없는 보상 덕분에 유한은 다소 심드렁한 투로 대꾸했다.
"미케니아의 왕은 죽었는가?"
"공중 요새가 추락했으니 당연히 죽었겠지요."
"확인하지 않았다 그 말이로군."
방금 말을 한 것은 부족장들이 아니었다.
다른 제 3자의 목소리였다.
보안이 철통같은 이곳에 타인이 발을 딛다니!
유한은 물론, 여섯 부족장들도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하얀 모피에 금붙이를 주렁주렁 매단 붉은 눈의 청년이 서 있었다.
유한은 그를 본 적이 있었다. 분명 메카 드래곤 사건 때였다.
"당신은...?"
"아, 안듀라스 님!"
화이트 드래곤 안듀라스.
여섯 부족장들의 안색이 싹 달라졌다. 그들은 곧장 안듀라스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예전에 지은 죄가 있어 그를 대하기가 더 어려웠다.
"그렇게 떨 필요 없다. 난 너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온 거니까."
고맙다니.
오만방자한 드래곤이 할 만한 말이 아니었다.
물론 거기에는 다 사정이 있었다.
"너희도 알 것이다. 오랜 옛날 미케니아를 멸하기 위해서 신께서 우리 드래곤에게 거병하라 하신 것을."
유한도 알고 있었다. 얼음 궁전의 벽화에서 보았으니까.
"미케니아를 멸하는 것은 우리 드래곤들의 사명. 너희가 그 일을 대신 해 줬으니 고맙다는 말을 하러 온 것이다."
"그렇습니까."
"허나, 마무리가 시원찮은 것이 흠이야."
안듀라스는 유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말해 보라 인간이여, 망령으로 오랜 세월을 숨어 지낸 그들이 이번에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하느냐?"
분명 공중 요새는 추락했다.
그러나 국왕이나 그를 따르는 마도사들의 최후를 확인한 것은 아니다. 뭔가 수를 써서 탈출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거기다 유저들의 말에 따르면 새로운 공중 요새가 존재할 가능성도 있다고 했으니...
"그런 류의 악당은 바퀴벌레처럼 끈질기지 않습니까."
"후후후, 네 말이 맞다."
고개를 끄덕인 안듀라스는 이 방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억하고 있으라는 듯이 말을 이어 나갔다.
"기억해라,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
"그러니 대비를 해라. 지금보다 더욱 실력을 높여야 놈들과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말한 안듀라스는 유유히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 말이 유한의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어쩌면 더 큰 싸움의 방아쇠를 당긴 것인지도 모른다. 안듀라스의 말대로 분명 다음번에 만나는 이바니우스 3세는 폭탄 하나로 끝낼 수 없을 것이다.
'그때는 다른 것으로 상대해야겠지.'
이미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인벤토리 깊숙한 곳에 박아 둔 설계도가 다음번 승리의 열쇠가 될지도.
마녀의 유산으로 부활한 고대의 망령들을 상대한다면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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