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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블라덱을 만난 유한은 집에 오자마자 곧바로 게임에 접속했다.
선택한 캐릭터는 대장장이 지그.
일주일간의 칩거를 깨고 그가 다시 아르페디아 세계에 등장하는 것이다.
지그가 된 유한은 천천히 눈을 떠 주변을 살펴보앗다.
마지막으로 로그아웃을 한 자신의 대장간 개인 작업실이 보였다. 떠날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일주일 동안 휴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장간 주변에는 여전히 유저들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일주일 전 리저드맨과 친구 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며 수많은 유저들이 아우성을 칠 때보다는 적었다.
유한이 접속하지 않자 기다리다 지쳐 가 버린 것이다.
그나마 있는 유저들도 대장간 앞에 만든 리지스의 상점에서 아이템을 구입하고 있었다.
그런 유저들 틈에는 특이한 이들이 둘 있었다. 게임 분위기에 맞지 않게 방송 카메라를 든 남자와 마이크를 든 사이버 캐릭터 미루였다.
"젠장, 아직도야?"
방송국에서는 여전히 리저드맨 사태에 대해 인터뷰하려는 모양이다. 하긴, 길드전에서 그 난리를 쳐 놨으니 며칠 가지고 관심이 식을 리 없다.
"하긴 언제까지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어떻게 할지 결정을 지은 유한은 대장간 문을 열고 나왔다.
그의 등장에 유저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던 미루와 카메라맨이 그에게 달려왔다.
"와! 지그 님이다!"
"리저드맨과 친구 되는 거 좀 가르쳐 주세요!"
"여기서 일주일을 꼬박 기다렸다구요!"
아우성치는 유저들을 내버려 둔 채 유한은 버추얼 에이지 팀과 만났다. 일일이 대답해 주기보다는 인터뷰 한 번으로 끝내려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유한은 커다란 투구를 꺼내더니 뒤집어썼다.
"저, 지그 님. 시청자 여러분께 얼굴을 보여 주실 순 없습니까?"
"죄송하지만 초상권을 보호해야겠습니다."
"이미 지그 님의 얼굴은 알려졌습니다만?"
공중 요새 때 이미 유한의 얼굴은 방송을 탔다. 미루는 그 점을 지적했지만, 유한은 고개를 지었다.
"그때는 제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이번 인터뷰 영상은 그때와 달리 상당수 유저들에게 알려질 것이라는 게 유한의 판단이었다.
리저드 대군이 등장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만큼 많은 유저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을 터.
나중엔 다 알게 되겠지만 유한은 최소한 자신의 얼굴이 팔리는 것은 막고 싶었다. 게임에선 어쩔 수 없겠지만, 옌스처럼 현실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지면 여러모로 피곤해진다.
"알겠습니다. 대신 인터뷰에선, 리저드맨과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는 알려 주실 거죠?"
"물론입니다."
스크린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버추얼 에이지 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의 상인 여자애처럼 돈을 요구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럼 녹화를 시작하겠습니다."
카메라맨의 신호와 함께 사이버 캐릭터 미루가 앞으로 나와 인사했다.
"전국의 버추얼 에이지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의 귀염둥이 미루입니다. 제가 오늘 드디어 리저드 히어로의 친구, 대장장이 지그 님을 만났습니다."
"안녕하세요, 지그입니다."
유한은 카메라를 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하지만 시커먼 투구를 쓰고 있어 꼭 시위를 하는 듯했다.
"많은 유저들이 궁금해 하고 있는데요, 대체 리저드와 친구가 된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뭐 별거 없습니다. 우연히 플레임 마운트에 갔다가 리저드맨들이랑 접촉했고, 그들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던 것을 가르쳐 줬을 뿐이지요."
"절실하게 필요로 하던 것 말입니까?"
"예, 지금은 그리 절실하지 않은 것 같다군요."
주변에서 인터뷰를 지켜보던 유저들은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유한이 자세히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리저드맨을 꼬실 방법이 사라진 탓이었다.
리저드맨들에게 절실했던 것, 그것은 바로 철제 무구였을 것이다. 예전과 달리 리저드맨들이 철기로 무장하고, 그들과 접촉한 유한의 직업이 대장장이인 걸 생각하면 쉽게 얻을 수 있는 답이다.
"자신들의 절실한 것을 들어줘서 그런지, 리저드맨들은 저를 신이 보낸 사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랑 그때 갔던 제 동료만 특별할 대접을 해 주고 있지요."
"그럼 그때 길드전에 나타낫던 오만의 리저드맨 증원군은 유니크 이벤트의 결과라는 말씀입니까?"
"예, 그런 셈이죠."
유저들의 실망감은 전염병처럼 빠르게 번져 갔다.
유니크 이벤트라면 절대 되돌릴 수도, 다른 누군가가 경험할 수도 없는 이벤트다.
"와! 굉장한 대박을 잡으셨군요."
"후후, 지옥 같은 플레임 마운트에서 한 달 가까이 고생한 대가지요."
아르페디아 온라인에는 선구자들을 위한 혜택이 있었다. 공개되지 않은 지역이나 던전을 찾아내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다.
유저들은 설마 활동하기 어려운 환경이라 모두가 꺼려했던 플레임 마운트에 그런 혜택이 주어지는 유니크 이벤트가 숨겨져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플레임 마운트에는 왜 가셨나요?"
"그게... 사나이라면 한번 가 볼 만한 곳이라 추천을 받아섭니다."
"누구에게요?"
"폭풍의 길포드라고, 여러분도 잘 아시는 분일 겁니다."
유한의 대답에 주위에서 인터뷰를 지켜보던 유저들 사이에 술렁거림이 있었다.
"폭풍의 길포드!"
"역시 지그와 레드 타이거 용병대는 보통 관계가 아니었어!"
길드전에 나선 것도 그렇고, 지금 대답한 것도 그렇고 유저들이 충분히 오해할 만했다.
유한은 인터뷰 중 플레임 마운트에 드래곤 하트를 구하러 갔다는 이야기는 쏙 뺐다.
그랬다간 베르겐 참사 당시에 피해를 입은 유저들이 메카 드래곤과 연관된 것을 알고 유한에게 책임과 보상을 물으려 할 테니까.
"보다 적극적으로 게임을 하다 보면 저 같은 행운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청자 여러분도 숨겨진 유니크를 찾아보십시오. 어쩌면 굉장히 가까운 곳에 있을지 모릅니다."
"오, 유저 분들의 의욕을 불끈 일으키는 말이시군요."
미루는 그렇게 말했지만, 유한의 말은 유저들에게 위로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유니크 이벤트가 개나 소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제가 리저드맨들과 알고 지낸다고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분들이나 길드들이 있는데요, 전 자신의 어려움은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한은 은근히 그런 쪽지들을 보낸 이들을 타이르듯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타이르는 말로만 끝나서는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 자꾸 귀찮게 하는 분이나 길드에게는 제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이벤트를 직접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리저드맨 오만 마리와 싸울 수 있는 이벤트 말이지요."
다시 말해 날 귀찮게 하면 리저드맨으로 몽땅 밟아 버릴 거란 협박이었다.
유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하자 유저들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특히 청탁을 목적으로 그를 기다렸던 이들은 재빨리 유한의 곁에서 물러났다.
동영상으로 봤던 푸른새벽 길드의 참사를 자신들이 겪고 싶지는 않았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지그 님, 그럼 즐거운 게임 하십시오."
"넵, 안녕히 가십시오."
인터뷰를 마친 미루는 빛을 뿌리며 사라졌다.
유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리저드맨의 리자도 언급하는 유저들이 없었다. 다가온 유저들도 그저 수리나 해 달라고 온 이들뿐.
이제 귀찮은 일은 없어졌다.
남은 것은 게임을 즐기면서, 다시 해커를 찾는 일뿐이다.
(2)
인터뷰를 끝낸 유한은 NPC 대장장이들을 찾아갔다.
오너가 기약 없이 휴점을 선언한 덕분에, 그동안 NPC 대장장이들은 숙소에서 빈둥거리며 지내고 있었다.
"앗! 지그 님 오셨습니까?"
"모두 잘 지냈어요? 이런, 못 본 사이에 살들이 쪘네."
유한의 말에 대장장이들은 빙그레 웃었다.
"하하, 곧 근육이 될 살이지요."
잠시 환담이 오가는데, NPC 대장장이 중 하나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그의 앞으로 나왔다.
"아까 지그 님에게 소포가 왔습니다. 뭔지 몰라도 꽤 무겁던데요?"
"아, 그거. 열지 말고 내 개인 작업실로 옮겨 놔요."
상자는 블라덱이 보낸 것이다.
놈에게서 돌려받은 바츠의 아이템이 그 안에 잔뜩 들어 있었다.
NPC 대장장이들은 충실히 그의 명령을 따랐다.
개인 작업실에서 유한은 상자 속의 든 바츠의 무구들을 모두 꺼내 살펴보았다. 블라덱이 수작을 부려 몇 개 빠지지 않았나 하나하나 확인했다.
"이것 참 감회가 새로운걸?"
블라덱을 윽박질러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골라낼 때는 돌려받겠다는 생각 외에 다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직접 이렇게 예전의 자신의 아이템을 만져 보자 머릿속에 다른 것들이 떠올랐다.
바로 이 무구들을 썼을 때 경험했던 바츠의 기억이다.
이 도끼는 어느 필드에서 얻었던 것이고, 이 검으로 100마리째 트롤의 목을 베었더라는 등의 기억.
아무것도 없었을 때에는 그런 기억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결국 이 바츠의 아이템들이 열쇠인 셈이었다. 지워진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뭐 좋지 않은 기억도 같이 있지만 말이야.'
지금 유한이 쥔 '원령의 검'은 퇴학된 다음 날 하루 종일 캡슐에 처박혀 몬스터를 상대로 미친 듯이 휘둘렀던 검이다.
본래 상점표의 검이었지만, 리치라든가, 좀비 나이트, 자이언트 스켈레톤 같은 중상 급 언데드들을 죽이다 보니 그렇게 변해 버렸다.
무엇을 얼마나 죽였는지, 어떤 조건을 맞춰서 검이 그렇게 된 건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는 그저 울분을 토하고 풀어 버리고 싶었을 뿐이다.
유한은 쓴웃음을 짓다가 원령의 검을 상자 안에 도로 넣었다.
일단은 이 무구들을 고이 모셔 두기로 했다. 추억 어린 바츠의 장비기는 하지만, 착용 조건이 맞지 않는 것들도 많았고, 직업상 사용하기엔 너무 튀는 것들도 있었다.
하나같이 C급 최상에서 B급의 무구들로, 개중엔 흔하지 않은 레어 품목도 있다. 누구나 탐을 낼 만한 무구들이니 잘 보관해 두어야 한다.
일단 유한은 상자에 자물쇠를 채우고 개인 작업실 바닥 아래 묻었다.
'나중에 쓸 일이 있으면 꺼내야지.'
그러나 되도록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앞으로 자신이 쓸 무기는 스스로 만들어도 충분하니까.
거기다 바츠와 지그는 다르다.
다른 캐릭터만큼이나 플레이 스타일도, 대인 관계도 모두 다르다.
그래선지 바츠가 썼던 것은 지그가 쓰기에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대장간 문 열고 일합시다!"
일련의 작업을 끝낸 유한은 NPC 대장장이들에게 대장간 개점을 지시했다.
대장장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작업장으로 달려가 고로에 불을 지피고 쇠를 뜨겁게 달구었다. 조용하던 숲 속에 망치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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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대장간 열렸네!"
밖에서 낯익은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채린이 유한의 개인 작업실에 불쑥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거라선지 정말 반갑기 그지없었다.
"안녕, 시아야. 그동안 잘 지냈어?"
"응, 난 별일 없었어."
유한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채린도 손을 들어 올렸다.
유한은 그것을 인사라고 생각했다. 채린의 주먹이 자신의 뺨을 질풍같이 후려갈기기 전까지.
"크엑! 뭐, 뭐야!"
"리지스가 너 접속한 거 보면 한 대 때려 주라고 하더라."
악의는 없었다는 듯, 채린은 사내아이처럼 씩 웃었다.
"아놔, 그 기집애가!"
"네가 투덜거려선 안 되지. 네가 잠수하는 바람에 리지스가 무척 고생했단 말이야. 드워프 철이 모자라 계약한 무기들의 납품을 보류하거나 미룬다고 쫓아다닌 것은 물론이고, 브로인 성의 무기점도 문을 닫아야 했다고."
"아..."
유한은 일단 몰려드는 유저들을 피한다고 바빠서 그 일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제야 리지스에 대해서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리지스 녀석은 어딜 간 거야?"
"다이노스 왕국에 식량과 아이템을 팔러 갔어."
"다이노스 왕국? 그런 나라도 있었나?"
유한은 아르페디아 대륙의 국가들은 다 외고 있었다.
그런데 다이노스 왕국이라는 나라는 처음 들어 보았다.
혹시 그사이 업데이트하고 새로 생겨난 나라라도 되는지?
"아, 넌 일주일 동안 접속 안 했으니 몰랐겠구나. 다이노스 왕국은 얼마 전에 리저드맨들이 세운 나라야."
"엥? 리저드맨들이 나라를 세웠다고?"
채린의 말에 따르면 지난번에 유한을 도우러 왔던 리저드 족장, 아니 리저드 히어로가 다시 키예프 공국으로 돌아가 리저드맨들의 나라를 만들었다고 한다.
"아니, 걔들은 머리가 좀 둔할 텐데 무슨 수로 건국을?"
"인간들의 체제를 보고 흉내 낸 모양이야."
이 역시 드림맥스의 농간인가.
인간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보다 못해 방해하려고 나선.
어쨌거나 플레임 마운트에서 키예프 공국의 서쪽 땅까지 넓은 사막과 초원, 그리고 서남쪽의 습지가 모두 리저드맨들의 영역이 되었다고 한다.
땅 크기로 치면 웬만한 인간 나라들보다도 컸다.
'리저드 족장 전직 한번 화려하게 하는구나.'
일개 부족의 족장이었다가 리저드맨들의 영웅이 되더니, 이제는 리저드 킹이 되었다.
물론 족장이나 리저드맨들이 이렇게 출세한 것은 다 유한이 철기 제작 기술을 전수해 준 덕분이다. 그들은 정말 유한에게 감사해야 한다.
"지그 네가 돌아와서 기뻐. 안 그래도 활 수리를 어디서 받아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거든."
"그것 때문에 기쁜 거냐? 내가 수리를 못 했으면 별로 기쁘지 않았겠네."
유한이 섭섭하다는 투로 말하자 채린은 깔깔 웃으며 전방 유한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휴, 자식, 삐쳤니? 농담이야, 농담. 설마 수리 때문에 그러겠어?
하지만 채린이 내놓은 바람의 활은 농담 같지 않은 상태였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내구가 거의 다 떨어져 있었으니까.
"참나,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너 없는 사이 반 친구들이랑 사냥을 갔거든. 센 몹들이 많아서 정신없이 활을 쏘다 보니 이렇게 되었어."
"레벨 많이 올렸겠다."
"응, 근데 별로 재미있지는 않았어."
지겹게 사냥만 한 것만은 아니다. 수다도 떨고, 돌발 퀘스트도 했지만 채린은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왠지 지루한 느낌.
유한이나 녀석의 동료들과 함께 할 때는 그렇지 않았다. 항상 스릴과 재미가 있었다.
대장간에거 무기 판매를 도우며 시간을 보낼 때조차도 지루하다는 기분은 털끝만치도 느낀 적이 없었다.
"잘 고쳐야 돼. 내구 일씩 닳을 때마다 열 방이다."
"야, 니가 무슨 깡패냐?"
"후훗, 위기가 있어야 재미도 있는 법이라고!"
돌발적인 위기(?) 상황.
협박 때문인지 황당함 때문인지, 유한의 손은 살짝 떨렸다.
-바람의 활을 수리하셨습니다. 내구가 온전히 수리되었습니다.
-스킬경험치를 65 얻었습니다.
그러나 일주일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그레인 스킬의 지원을 받는 유한의 실력은 예전 그대로였다.
"나이스, 지그! 아주 잘했어!"
칭찬과 함께 채린이 날린 주먹이 유한의 옆구리에 꽂혔다.
"컥! 잘 고쳤는데 왜 때리냐?"
"작업 재개 축하빵."
그러면서 채린은 개구쟁이처럼 혀를 날름거렸다.
괜한 이유를 만들어 후려 패다니.
그래도 유한은 채린이 밉지 않았다. 그저 좀 더 일찍 접속을 할 걸 그랬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다.
(3)
유한의 복귀와 함께, 대장간은 다시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미뤄진 주문들도 하나하나 완료해 나가고, 소문을 듣고 찾아온 유저들은 다시 무기를 매입하고 수리를 요청했다.
더 이상 리저드맨과 사귀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조르는 사람은 없었다. 인터뷰 내용이 방송을 타고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유한은 하루하루 평화롭고 바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유저와는 전혀 관계없는, NPC 상인이 찾아와 주문을 요청한 것이다.
"자물쇠를 백 개 만들어 달라고요?"
"이 근방에서 지그 대장간에 대한 평이 좋더군요."
유한의 명성이 올랐다는 증거다.
안 그러면 유저가 아닌 NPC가 산속에 있는 그의 대장간에 찾아올 리 없다.
그러나 유한은 상인 NPC에 말에 살짝 실망했다. 그동안 지그표 무구가 꽤 먼 곳까지 팔려 나가고 호평을 받아서, 극찬까지는 아니라도 평이 좋다 이상의 소리는 들을 줄 알았다.
그러나 유저는 몰라도 NPC들의 반응은 아직 그 정도인 모양이다.
하긴, 어찌 보면 그럴 수도 있었다. 유한이 지금가지 만든 무구는 대부분 유저들에게 팔렸지 NPC들에게 사용된 적은 없으니까.
"아바란은 원래부터 치안이 안 좋았습니다만, 요즘은 도둑들이 더 극성을 부리는지라 자물쇠 수요가 크게 늘었습니다."
"그래서 저더러 만들어 달라는 거로군요."
"평이 좋은 대장장이인 만큼 자물쇠도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런 건 NPC 대장장이에게나 주문할 것이지.
정중히 거절하려던 유한은 낯익은 효과음을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창이 하나 펼쳐졌다.
(<상인 홉스의 주문>)
-아바란 각지에 도둑들이 횡행하여 자물쇠 수요가 커졌다고 합니다. 대장장이로서 명성과 실력을 올릴 좋은 기회다. 홉스에게 자물쇠 100개를 만들어 주지 않겠는가?
*퀘스트 기한은 게임 시간으로 일주일입니다.
'실력을 올릴 좋은 기회라...'
퀘스트 창을 본 유한은 생각을 바꿨다.
요사이 무구만 만드는 터라 정밀 조립 스킬에 대한 수련을 소홀히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아직도 8랭크에 머물러 있었다.
조금만 더 올리면 7랭크고 그렇게 되면 공중 요새 퀘스트도 완수할 수 있다.
"좋습니다. 그 주문 받아들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자물쇠 부속은 놋쇠로 만들어 주세요. 쇠로 된 것들은 쉽게 녹이 슬어 고장이 잘 나니까요."
"그렇게 하죠."
주문 퀘스트를 받아들인 유한은 곧장 자물쇠 제작에 들어갔다.
우선 관련된 설계도를 구해서 구조와 조립 방법을 숙지한 다음, 합금 스킬로 충분한 양의 놋쇠괴를 제련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놋쇠괴를 다듬고 두들겨 가며 자물쇠 부품들은 만들었다.
"내부 장치들은 이 정도면 됐고, 다음은 스프링인가?"
일일이 조그만 장치들을 만들고 조립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더구나 100개의 자물쇠 실린더 내부와 이에 맞는 열쇠를 모두 제각각 다르게 만들어야 하기에 더욱 신경을 써야 했다.
-쿠쿵! 자물쇠 제작에 실패했습니다.
-스킬 경험치를 5 얻었습니다.
"캬악! 이 쪼그만 녀석이!"
자물쇠는 겉만 보고는 알 수 없었다. 완성을 하더라도 열쇠를 꽂아 돌려 보고 잘되는가 안 되는가 최종적인 확인을 거쳐야 했다.
실패한 것들은 고정 리벳을 빼고 뭐가 잘못된 것인지 확인해 고쳐서 새로 만들어야 했다.
-쓸만한 자물쇠를 만들었습니다.
-스킬 경험치를 40 얻었습니다.
-단순한 자물쇠를 만들었습니다. 오크도 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킬 경험치를 12 얻었습니다.
-정교한 자물쇠를 만들었습니다. 도둑이 절망할 듯합니다.
-스킬 경험치를 65 얻었습니다.
만들다 보니 잘된 것도 있고, 못된 것들도 있었다.
유한은 '헐거운', '단순한', '불량한'이란 말이 붙은 자물쇠는 폐기하고, '튼튼한', '정교한', '쓸만한'이란 말이 붙은 자물쇠는 납품용으로 골라 놓았다.
불량품을 납품했다간 욕을 먹고 명성도 깎인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자물쇠 100개를 만든다고 하지만, 그보다 몇 배는 많은 자물쇠를 만들고 뜯고 버리기를 되풀이해야 할 판이다.
다 정밀 조립 스킬의 랭크가 낮은 탓이었고, 지금까지 무구 생산에 유용하게 활용했던 그레인 스킬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오로지 노력과 인내심만이 필요할 뿐이다.
"뭐 그래도 하다 보니 요령은 알겠군."
만들면 만들수록 품질도 나아지고 작업 속도도 빨라졌다.
실패할 때마다 뜯고 나아지고 작업 속도도 빨라졌다.
실패할 때마다 뜯고 조립하길 되풀이하다 보니, 자연스레 머리와 손이 알아서 척척 움직였다.
"좋았어! 앞으로 삼십 개만 더 만들면..."
유한은 완성된 자물쇠를 놓아두려다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방금 전까지 납품용으로 선별해 놓은 자물쇠는 모두 69개, 헤아리기 쉽게 10개씩 차례로 줄을 맞춰 놓았는데, 절반 정도가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자물쇠가 발이 달려 도망을 가진 않았을 것이고, 땅으로 꺼지거나 하늘로 솟았을 리도 없다.
그렇다면?
"범인은 이 안에 있다!"
유한은 금방 범인을 잡을 수 있었다.
슬그머니 출입문으로 빠져나가려던 포포와 눈이 딱 마주쳤기 때문이다.
"삐잇!"
"이 망할 놈의 닭둘기 쉐이가!"
사실 닭둘기라 칭함은 옳지 않았다. 요사이 빠른 성장을 보이는 포포는 개만 한 덩치로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덩어리만 커졌을 뿐. 생긴 것이나 하는 짓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녀석은 유한이 홧김에 집어 던진 장도리에 옆구리를 얻어맞고 후다닥 달아났다.
"어이구, 두(頭)야. 어째 하루 종일 쳐먹고도 또 먹냐그래?"
정체불명의 불가사리 생물 포포.
녀석은 이제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공식 홈페이지에도 소개되었다. 대장간에 들른 유저들이 쇠를 먹는 포포를 보고 신기해서 제보를 한 덕분이다.
유저들이 신기하고 귀엽다며 쇳조각이나 고철이 된 무기를 던져 준 덕분에 포포는 나날이 덩치를 키워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덩치가 커진 만큼 간덩이도 커졌는지, 녀석은 예전보다도 더 무구 훔쳐 먹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것도 비싸고 질 좋은 것들만 골라서.
"리지스 녀석, 자기가 키우기로 했으면 관리도 좀 잘하지."
투덜거리던 유한은 빗장으로 문을 꼭 닫아 잠갔다.
그렇게 며칠 더 작업에 집중한 끝에 소실한 분량도 채울 수 있었고, 나머지 주문량도 채워 넣을 수 있었다.
"에고, 드디어 이게 마지막인가?"
유한은 마지막으로 만든 자물쇠가 제대로 작동하길 바라며 열쇠를 끼워 돌려 보았다. 그러자 안내창이 뜨기를...
-튼튼한 자물쇠를 만들었습니다. 금고를 든든히 지켜 줄 것 같습니다.
-스킬 경험치를 70 얻었습니다.
-정밀 조립 스킬이 7랭크로 올랐습니다.
-솜씨가 1 올랐습니다.
-인내심이 3 올랐습니다.
"앗싸! 드디어 7랭크다!"
이제 공중 요새 퀘스트를 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다.
대형 톱니바퀴와 제어장치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뭐가 7랭크로 올랐는데?"
유한은 깜짝 놀랐다.
송코가 창문으로 작업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뭔가 숨기는 것은 없었지만, 갑자기 말을 거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형, 기척이라도 좀 하세요!"
"아아, 미안. 뭐 하나 싶어서."
송코는 유한이 한쪽에 모아 놓은 100개의 자물쇠와 실패해서 수북하게 버려진 자물쇠 조각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제 다 만든 거야?"
"간신히요."
"그랬구나. 리지스가 너 아직까지 자물쇠 만드나 살펴 보고 오라고 해서 말이야."
유한이 돈 되는 무구는 만들지 않고 개인 작업실에 틀어박혀 자물쇠랑 씨름하고 있자, 리지스가 답답했던 모양이다.
드워프의 철 때문에 NPC 대장장이들도 꽤 좋은 무구를 만들지만, 유한이 만든 것에 비하면 떨어지는 품질이었다.
그래서 같은 지그 대장간 무구라도, 유한이 직접 만든 것은 더 비싸게 팔렸다.
그렇기에 리지스 입장에선 유한이 일을 안 할수록 손해였다.
"벌써 끝냈을 것을, 그놈의 닭둘기가 중간에 얌얌쩝쩝을 하는 바람에 늦어 버렸지 뭡니까."
"하하하, 좀 봐줘. 포포도 제 밥벌이는 하고 있잖아."
"뭐 그렇긴 하지만..."
사실 포포가 밥, 아니 쇠만 축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녀석은 그 불가사리한 능력과 희귀한 존재성 덕분에 사람을, 특히 여성 유저들을 불러 모으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딱히 무기를 구할 일이 없는 유저들도 놈을 구경하러 왔다가 기념품을 겸해서 무구를 사 가지고 가곤 했던 것이다. 그중에는 (본문에서는 개중에서 라고 표기되었음.) 사료(?) 주고 키우라며, 돈을 주거나 철괴나 고철을 놓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쇠를 먹는 포포, 녀석은 어느새 지그 대장간의 마스코트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지그 님, 자물쇠는 다 만드셨습니까?"
"아, 방금 다 끝냈습니다."
마침 주어진 기한이 다 되어 NPC 상인 홉스가 물건을 수령받기 위해 찾아왔다. 그는 자물쇠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확인해 보더니 몹시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오오, 역시 믿고 맡긴 보람이 있군요. 하나같이 질이 좋아요. 이만하면 좋은 가격에 팔 수 있겠습니다."
-(<상인 홉스의 주문>)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경험치 600을 얻었습니다.
-4,500 골드를 얻었습니다.
-명성이 100 올랐습니다.
주문 퀘스트치곤 후하지만, 그동안 유한이 고생한 데 비하면 썩 좋은 보상은 아니었다.
유한은 그저 정밀 조립 스킬을 올린 데 만족하기로 했다.
"이렇게 자물쇠를 잘 만드시니 다른 걸 부탁해도 되겠군요. 이번엔 도어 핸들(Door Handle)을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도어 핸들이요?"
도어 핸들은 잠금장치가 달린 문손잡이를 말한다.
역시나 주문 퀘스트였는지 관련 창이 떠올랐다.
자물쇠보다 제작이 어려운지 수효는 50개 정도, 보상이 좀 더 낫겠다 싶었지만, 유한은 이 주문 퀘스트를 받지 않았다.
정밀 조립 스킬이 7랭크로 올랐는지 이제 공중 요새 퀘스트를 수행하고 싶어진 것이다.
"죄송하지만 그 주문은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요새 일이 꽤 많아서요."
"그렇습니까? 이거 아쉬운 일이군요."
서운한 표정을 지은 홉스는 유한에게 명함을 하나 건네주고 갔다. 나중에 일거리가 필요하면 연락하라면서.
"좋아, 이제 슬슬 준비해 볼까?"
"무슨 준비?"
유한이 주먹을 불끈 쥐자, 송코가 옆에서 물었다. 혼잣말을 한다고 내뱉었던 것을 들은 모양이다.
"자, 자물쇠 만든다고 대장간 일을 못했으니까, 이제 일 좀 하려고요."
"그럼 수고해."
유한의 내심을 모르는 송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볼일을 보러 갔다.
사실 말해 줘도 상관없는 일이다. 예전에 받았던 퀘스트를 이제 수행하러 가겠다고 하면 누가 말리겠는가, 말릴 사람도 없을뿐더러 권한도 없다.
'하지만 이걸 이야기하면 들러붙는 녀석들이 나오겠지.'
리지스는 돈 냄새가 난다며 덥석 끼어들 것이고 옌스는 바츠가 가는 곳으면 나도 간다며 따라올 게 틀림없다.
송코야 괜찮지만, 리지스의 머슴과 다름없으니 말하는 즉시 그녀의 귀에 들어가게 될 터.
유한은 송코는 몰라도 리지스와 옌스를 데리고 가고 싶진 않았다. 그 둘은 각자의 영역에서 나무랄 데 없는 능력을 지녔지만, 스토커 기질도 다분했기 때문이다.
스토킹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껄끄러운 일이었다. 그 때문에 이번만은 놔두고 가고 싶었다.
'아무튼 가기 전에 준비를 해 놓아야겠어.'
유한은 여행 준비를 하는 동시에, 초열탄이라든가 드워프의 철을 충분히 만들어 놓았다.
자신이 자릴 비운 동안에도 대장간에서 NPC 대장장이들이 무구 생산을 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유한은 그렇게 준비를 하면서 옛 동지들, 공중 요새 퀘스트 멤버들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각자 퀘스트 진행이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었는가 알아보기 위해서.
-언제든지 불러요. 이미 부유 마법을 다 배우고 친구들이랑 레벨업을 하는 중이니까.
-헤헷! 오늘 로므나 유적에서 성수를 떴어요! 에이린은 언제든 출격 가능 lㅇ.ㅇl
-데보라가 마지막 흔적을 남긴 던전을 조사하는 중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로키가 아직 덜 끝난 모양이다. 그러나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좋아, 이제 채린이에게만 말하면 돼.'
채린은 이미 바람의 돌을 손에 넣었다. 그래서 유한의 무구 판매를 돕거나 리지스의 상행에 호위로 나서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유한은 상점 옆에서 무구 판매를 하고 있는 채린을 불러다가 공중 요새 퀘스트를 완수하러 가자고 이야기했다.
"우리만 가는 거야?"
"응, 이번은 우리만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무한테도 이야기 안 했어."
"왜? 같이 가면 좋잖아."
"공중 요새 퀘스트에 상관없는 사람들까지 굳이 갈 필요 있겠어? 게다가 다들 바쁘잖아."
유한의 말대로 리지스는 아바란 왕국에서 자신의 상권을 구축하느라 요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옌스는 무엇을 하는지 며칠간 대장간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냥 우리끼리 갔다 오자."
유한의 말에 채린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리지스에게 말해 놓고 가는 게 좋겠어."
"시, 시아야!"
유한은 말리고 싶었다.
리지스라면 분명 아무리 바빠도 돈줄 1호를 혼자 보낼 수 없다며 따라간다고 할 게 분명했기 때문.
하지만 유한은 채린을 막을 수 없었다. 이미 붙들기도 전에 그녀는 리지스 앞에 달려가 있었다.
'크윽, 돈벌레는 어쩔 수 없이 데려가야 하나?'
유한은 체념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의외로 리지스는 채린의 설명을 듣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잘 다녀와. 대신 레어 아이템 건지면 내 몫도 떼 놓고."
'이, 이상해! 리지스 녀석이 맞나?'
뒤에서 지켜보던 유한은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혹시 리지스의 계정을 해킹한 해커가 아닐까?
정말 해킹을 당했거나 아님 리지스가 잠시 제정신이 아니더라도 이 기회는 놓칠 수 없었다.
당장에 보따리를 싼 유한은 채린과 함께 서둘러 노스아크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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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 우리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바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모험을 같이 떠나지 못할 정도로 바쁜 것은 아니었다.
유한과 채린을 배웅한 리지스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옌스가 서 있었다.
그는 유한과 채린이 떠나기 전에 대장간에 와 있었다. 거기다 유한과 채린의 은밀한 대화까지 엿들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이대로 가만있어야 할까?"
"무슨 소리! 언제 이 몸이 누구 허락 맡고 다닌 줄 아슈?"
그렇다. 그들은 언제나 제멋대로였다.
좋게 말하면 소신이 있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골칫덩이다.
"그럼 너도 나랑 똑같은 생각이겠네."
"아무렴, 누님. 난 누구한테 따돌림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정도로 성인군자가 아니오. 우릴 떼어 버리려고 한 대가를 톡톡히 받아 내야지, 흐흐흐!"
둘 다 이야기를 듣고도 따라가겠다고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음흉한 미소를 짓는 두 사람을 본 송코는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
"호호호, 어떤 얼굴을 할지 기대되는걸."
"아마 기겁을 하겠지."
얼마 후, 리지스와 옌스의 모습이 대장간에서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송코만이 그들의 행선지를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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