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현피를 뜨다 >
(1)
"내가 바츠 유저인 강유한이다!"
유한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노심초사해 온 해커 녀석을 잡게 된 것이다.
녀석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모자챙에 가려진 얼굴이 얼마나 질려 있을지 충분히 상상이 갔다.
'후후후, 기대하라. 내가 해킹으로 입은 정신적, 물적 피해를 배로 받아 내 주마!'
"이거 놔!"
녀석은 다짜고짜 반대편 주먹을 휘둘렀다.
유한은 해커 놈을 잡았다고 쾌재를 부르며 약간 방심하고 있었다. 뺨을 정통으로 맞은 유한은 그만 엉덩방아를 찧었다.
유한은 벌떡 일어났다. 방심하다 한 방 맞긴 했지만, 해커가 당황해서 날린 주먹은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유한을 떼어 버린 해커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부르르르릉!
엔진이 굉음을 토한다 싶더니, 오토바이가 앞으로 뛰어 나갔다.
유한은 놈을 잡으려고 달려갔지만, 오토바이가 조금 더 빨랐다. 놈은 곧장 속력을 낸 채로 공원을 빠져나갔다.
"으아아악! 개자식! 거기 서지 못해!"
멀어져 가는 해커를 보며 유한은 괴성을 질렀다.
자신의 분신과 같은 바츠를 날려 먹은 놈이다.
거기다 전화까지 걸어 조롱했다.
이놈을 잡기 위해 그가 들인 공이 얼마였던가? 그동안 받은 심적 고통은 또 어떠했고?
그런데 다 잡은 놈을 눈앞에서 놓쳐 버렸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지 않나 싶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은 불타는 분노 앞에 깨끗이 지워졌다.
"그냥 도망가게 놔둘 것 같아!"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잡고 말겠다.
그렇게 다짐한 유한은 공원을 가로질러 달렸다. 그에게 부딪쳐 넘어진 사람들이 화를 냈지만, 유한은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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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이만하면 쫓아오지 못하겠지?'
블라덱은 하마터면 경을 칠 뻔했다. 하필이면 자신이 짭짤하게 팔아먹었던 고가 장비의 주인이 나타날 줄이야.
그는 안심하며 오토바이의 속도를 늦췄다.
그런데 바로 그때, 시커먼 그림자가 블라덱을 덮쳤다. 갑자기 옆에서 유한이 비호같이 뛰어나오더니 그의 목을 낚아챈 것이다.
우당탕탕!
주인 잃은 오토바이가 나뒹굴고, 블라덱과 유한도 도로 바닥에 나란히 내동댕이쳐졌다. 다행이 오늘이 휴일로 오가는 차량이 드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큰일날 뻔했다.
"크윽, 이 새끼가!"
"화가 나는 건 나라고, 이 자식아!"
온몸이 쓰라렸지만 해커보다 먼저 몸을 일으킨 유한은 다짜고짜 녀석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컥!"
막 일어나려던 블라덱의 허리가 기역자로 꺾였다.
"일어나, 인마! 아직 안 끝났어!"
유한이 블라덱의 멱살을 잡고 일으키자 엉망이 된 놈이 도리질을 쳤다.
"아, 아냐. 난..."
"안이고 밖이고 일단 맞기나 해!"
유한은 얼굴에 주먹을 한 발 꽂아 넣었다. 좀 전에 녀석이 후려친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분이 풀릴 리가 없다.
유한은 비틀거리는 녀석의 멱살을 잡아당겨 박치기를 먹여 준 다음, 복부를 무릎으로 걷어차 올렸다. 그리고 들려진 녀석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리고 녀석을 다시 일으켰다. 모자를 벗기고 덥수룩하게 자라난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면상이나 자세히 보자 싶어 고개를 젖혀 놓았더니, 실눈에 얍삽하게 생긴 허여멀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안경만 쓰면 정말 컴컴한 골방에서 해킹이나 할 만한 얼굴이다.
그 허연 얼굴은 아까 유한이 날린 주먹 때문에 한쪽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물론 동정심 같은 건 일지 않았다.
이런 녀석이 바츠를 해킹하고 자신을 농락했다고 생각하니 주먹에 더 힘이 들어갔다.
"크악! 그만 좀 때려!"
"시끄러! 바츠 레벨이 얼마였는지 알아? 넌 앞으로 이백 방은 넘게 쳐맞아야 돼."
바츠의 레벨만큼 녀석을 두들게 패 주리라.
물론 그 정도로 때려도 분이 풀릴지 안 풀릴지는 유한 스스로 생각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으악! 난 아니란 말이야!"
"입 닥치라고 했지!"
"내가 해킹한 게 아니라니까!"
마지막 말에 유한은 움찔했지만, 그대로 주먹을 날려 버렸다. 주먹은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시뻘건 선지를 뽑아냈다.
"큭, 내가 그따위 얄팍한 말을 믿을 것 같아? 네놈이 내 아이템을 몰래 판 거 다 알고 왔단 말이다."
유한은 알세인에게 놈이 바츠의 무구들을 판 것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 그건..."
"일단 너 같은 쓰레기는 맞아야 돼. 맞고 나서 이야기 하자."
유한은 다시 주먹을 움켜쥐고는 때리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길을 오가던 행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왜 저래?"
"몰라, 갑자기 뛰어오더니 싸우던데?"
"현피하는가 본데? 아이템 어쩌고 하던걸?"
근방의 사람들이 시선을 몽땅 이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하긴 도로 위에서 갑자기 격렬하고 야만스런 액션이 벌어졌으니 관심을 두지 않을 리 없다.
"이리 와, 인마."
유한은 녀석을 끌고 한적한 곳으로 갔다.
경찰이 오면 사정 불문하고 끌고 갈 것이 분명하다. 그럼 일이 더 복잡해지기 마련, 패 버리더라도 조용한 곳에서 절단 내 놔야 한다.
(2)
"다시 말해 봐. 아까 뭐라고 그랬어?"
"내, 내가 해킹한 게 아니라고."
"그럼 넌 뭐야? 블라덱이 아냐? 놈의 친구냐? 아님 똘마니?"
전화를 한 본인이 직접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부하를 보냈거나, 코스튬 페스티벌 때 함께 했던 친구놈들 중 하나가 대신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맞다면 이 녀석은 좀 억울할 것이다. 설사 그렇다 해도 유한은 미안해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친구든 부하든 간에 이놈도 한 패라면 맞아야 하는 게 당연하니까.
"나 블라덱 맞아."
"그럼 해킹한 게 맞겠네!"
"아냐! 내가 블라덱인 건 맞지만 해킹은 안 했어?"
유한은 다시 주먹을 번쩍 들어 올리자 놈이 서둘러 변명을 했다.
그러나 날아오는 주먹을 멈출 수는 없었다.
"개새끼! 술을 마셨는데 음주운전은 안 했다는 게 말이 돼?"
"커억!"
블라덱의 변명은 유한에겐 그렇게 들렸다.
그러나 얼굴에 쌍코피와 피멍이 어우러진 블라덱은 정말 억울한 눈빛을 했다.
"지, 진짜야. 다른 놈들은 몰라도 바츠는 내가 해킹한 게 아니라니까."
"바츠를 네가 해킹하지 않았다고?"
"그래, 난 바츠 아이템만 넘겨받았을 뿐이야."
이건 무슨 소린지.
기껏 잡았다 싶었는데 고작 하수인일 뿐인가. 아니면 코앞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좋아, 네가 아니라고 치자. 그럼 누구한테 넘겨받았어?"
생각해 보니 블라덱과 해커의 말투가 달랐다. 음성변조를 했지만 자신만만하던 해커의 말투와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내뱉는 놈의 말투는 동일인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나, 나도 몰라. 갑자기 전화를 해서 바츠의 아이템을 사지 않겠느냐고 물었어."
바츠가 해킹당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당시 블라덱은 구미는 당겼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장물거래라도 서로 간데 신용이 있어야 가능하다. 게임에서 한 번도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는 수상쩍은 녀석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얼마 후에 메일이 왔어."
황당하게도 상대는 공개하지도 않은 블라덱의 메일 주소를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르지만, 메일에는 한 개의 압축 파일이 동봉되어 있었다.
압축 파일 안에는 바츠의 아이템임을 증명하는 스크린샷과 그 아이템을 봉인의 상자에 집어넣는 동영상 파일이 들어 있었다.
"제길, 그래서?"
"메일에는 돈을 주면 상자가 묻힌 장소와 암호를 가르쳐 주겠다고 적혀 있었어. 진짜 바츠 것인지는 몰라도 흥미가 가더군. 아이템 가격이 시세의 절반도 안 되었으니까 한번 속는 셈 치고 사기로 했지."
하지만 가격보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상대방이 원하는 거래 방식이었다.
"거래 방식이 어땠기에?"
"전자거래는 싫다면서... 돈을 신문지에 싸서 쇼핑백에 넣고 거리 한곳에 놓아두라고 했어."
"그래서? 그놈이 누군지 봤어? 돈 가방을 가져가는 사람이 누군지 봤냐고?"
유한은 분명히 블라덱이 해커를 봤을 것이라 생각했다.
해커의 메일을 훔쳐서 쓸 정도의 실력자다. 어떤 놈인지 궁금하지 않을 리 없다.
그의 예상대로 블라덱도 거래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래서 가방을 놓고 한쪽에 숨어 누가 가져가는지 살펴봤지만...
"못 봤어. 거리에 사람이 워낙 많이 지나다녀서 누가 가져갔는지 알 수 없었어."
"쳇!"
현실이니까 가능한 수법일 것이다.
게임 상에서 땅에 뭔가 떨어져 있으면 누구든 지나가면서 줍기 마련이고, 돈이나 유용한 아이템 같으면 날름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않다.
2030년대의 대한민국은 부유한 나라고 시민 의식도 높은 편이다. 번화가 한쪽에 놓인 쇼핑백에 관심을 가질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더구나 물건이 드러나지 않게 꽁꽁 싸여져 있다면 더더욱.
아무튼 해커는 돈을 가져갔는지, 얼마 후 전화로 상자가 묻혀 있는 장소와 암호를 가르쳐 주었단다. 그리고,
-너 내가 누군지 궁금한 모양인데 포기해. 나는 너를 볼 수 있어도 넌 나를 찾을 수 없어. 지금 여기서처럼 말이야.
가까운 곳에서 다 보고 있단 소리였다.
그러나 블라덱은 상대가 누군지는커녕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전화번호 추적은?"
"그것도 해 봤어. 인터넷 전화였는데, 방글라데시로 나오더군."
블라덱도 나름대로 자랑할 만한 해킹 실력을 갖고 있었지만, 상대방에 대해서 알아낸 거라곤 자신보다 더 뛰어난 실력과 두뇌, 과감성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추측뿐이었다.
'하긴 그 녀석 입으로도 그랬지.'
자신은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해커라고.
확실히 그걸 생각하면 이렇게 꼬리를 밟혀 정체를 드러낼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제기랄! 다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쉽긴 했지만, 울화통이 터지지는 않았다.
상대는 수준급의 해커다. 놈을 잡는 것은 게임의 퀘스트로 따지면 특 A급, 아니 S급의 퀘스트였다. 그만한 퀘스트인데 벌써 최종 보스가 드러나겠는가?
"내가 아는 건 그 정도야. 도움이 좀 되었으면 좋겠군."
블라덱은 그렇게 말하며 슬그머니 빠져나가려다가 유한에게 뒷덜미를 잡혔다.
"왜 그래? 아는 걸 다 말했잖아."
"닥쳐, 내 볼일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어."
블라덱도 유한이 왜 눈을 부라리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이 녀석, 그러니까 바츠의 아이템을 거래했다.
유한이 무엇을 바라는가는 뻔한 일이다.
"알았어, 때리지 마. 처분하지 않은 바츠의 아이템은 전부 돌려줄 테니까."
"그것만으로는 안 돼!"
유한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어쩌라는 거야! 내가 가진 아이템 대다수가 장물이야. 설마 그걸 가져가겠다고?"
유한은 고개를 저었다. 바츠의 아이템은 당연히 돌려받아야지만, 그 외의 아이템을 먹을 생각은 없다. 먹어 봤자 체하기나 할 뿐이다.
이야기를 듣고 방금 전에 생각났는데, 블라덱에게는 아직 볼일이 더 남아 있었다.
"네 본거지로 안내해."
(3)
블라덱의 본거지는 마로니에 공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창고였다.
빈병과 폐지가 사람 키보다 높이 쌓여 있는 창고에선 곰팡이와 담배, 쉰내가 어우러진 역한 냄새가 났다.
바닥에는 먼지가 가득했고, 여기저기 술병과 먹고 버린 컵라면 용기, 과자 봉지와 담배꽁초가 굴러다녔다.
"여기가 내 비밀 아지트야."
"귀신같은 곳이군."
"흥, 네 방은 얼마나 깨끗하기에?"
"죽고 싶냐? 내가 너랑 똑같을 줄 아냐!"
유한이 눈을 부라리자 블라덱이 움찔했다.
"아, 알았어. 거 성질도..."
유한의 어머니 김 여사가 이 광경을 본다면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란다고 할 것이다. 블라덱보다 덜하다고 하지만, 유한의 방도 꽤 지저분하니까.
"왜 이리 오래 걸렸어?"
"아이템 흥정이 잘 안 되었냐?"
"야! 너 얼굴이 왜 그래?"
안으로 들어가니 소파에 퍼질러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음료수를 마시던 녀석들이 있었다.
모두 6명. 목소리들을 들으니 전에 코스튬 페스티벌에서 블라덱 녀석이랑 함께 있었던 놈들이 분명했다.
순간 유한의 기에 눌려 있던 블라덱이 앞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시팔, 재수가 없으려니까... 야. 저 새끼 손 좀 봐 주라."
"뭐? 누구 말이야?"
"누구긴! 날 따라온..."
돌아선 블라덱의 눈에 유한이 보이지 않았다. 재빨리 입구 쪽을 돌아봤지만, 그곳에도 없었다.
"어? 방금 전까지 내 뒤에 있었는데."
"너 대낮부터 귀신에게 홀렸냐?"
"대체 누가 있다고... 으악!"
갑자기 폐지를 쌓아 올린 탑이 무너졌다.
모두 다급하게 피했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두 녀석이 무거운 폐지 더미에 깔리고 말았다.
유한은 무너진 폐지 더미 뒤에서 손을 털며 나왔다.
그는 블라덱이 수작을 부릴 거라 예상했다. 순순히 자신의 아지트로 안내한 것도 그렇고, 창고에 들어올 때 슬쩍 보았던 눈동자가 교활하게 번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새끼야! 저 새끼가 다짜고짜 날 팼어."
블라덱의 외침에 덩치들이 유한에게 다가왔다.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불량스러웠고, 일그러트리는 인상도 참 더러워 보였다.
"야, 인마. 너 뭐야!"
"이 자식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구석에서 각목을 집어 든 녀석도 있었고, 깨진 병을 들고 건들거리는 놈들도 있었다. 폐지 더미에 깔린 녀석들도 큰 타격을 입지 않았는지 부스스 일어났다.
'우리 좀 논다'는 듯한 그들의 불량배 포스에 유한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한둘도 아니고 6명. 예전에 이렇게 건들거리며 다가와 에워싸는 놈들에게 참 많이 두들겨 맞았다.
절로 한 발 물러나려던 유한의 머릿속에 곽대발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러 놈이 덤벼들 땐 어쩌냐고? 일단은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돼. 자신이 약하다고 해도 배짱을 부려야 돼. 양아치 놈들은 기본적으로 하이에나 근성을 갖고 있으니까.
하이에나는 야비한 포식자로, 조금이라도 자신보다 강해 보이는 동물에겐 덤벼들지 않는 녀석이다. 동료들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누군가 먼저 상대 목덜미를 물고 늘어지면,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마지막 뼛조각까지 씹어 삼킨다.
쪽수를 내세워 덤벼드는 것은 약자의 전술이자 본능인 것이다. 혼자가 아니면 싸울 수 없는 놈들이나 우르르 몰려다니며 으스댔다.
'그 말대로라면 이놈들은 별로 강하지 않다는 거지.'
유한은 6명의 불량배를 상대로 싸워 본 적은 없지만 용기를 냈다.
"합(合)!"
앞으로 크게 한 발을 내디디며 강하게 발을 구르자, 주변의 양아치들이 움찔하며 물러섰다.
이것은 이종 격투 대회에 나갔던 표재훈의 동영상을 보고 배운 것이다.
표재훈은 시합 전엔 반드시 이랬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포효(咆哮)는 상대 선수의 기세를 꺾어 놓고, 스스로는 호흡과 정신을 가다듬는 데 유리하다고.
사실 그건 표재훈보다 송태수가 원조였다. 폭풍의 길포드로 싸울 때마다 우렁찬 사자후를 터트리곤 하니까.
'그다음엔... 선방이다!'
유한은 양아치들이 움찔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곧장 정면의 깨진 유리병을 든 녀석에게 달려가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빠--각!
"컥!"
유한의 펀치를 맞은 녀석의 턱이 빙글 돌아간다 싶더니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일어날 생각을 못했다.
곽대박 가라사대, 선방은 절대 어설프게 날리면 안 된다고 했다. 아주 기가 팍 꺾이도록 조져 놓으라 하셨다. 그래야 다른 하이에나들이 함부로 덤벼들지 않는다고.
"이 새끼가 죽으려고!"
옆에 있던 녀석이 손에 든 각목을 내리쳤다. 각목 끝에 유한의 옆머리를 후려쳤다. 살갗이 찢기면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아프지만 어설픈 공격이다. 좀 더 제대로 휘둘렀다면 각목은 살갗을 찢어 놓는 대신에 머리를 울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는 유한의 초반 선공에 놀란 양아치가 제대로 겨누지 못하고 서둘러 각목을 휘둘렀기 때문.
'큭, 아픈 기색을 보이면 안 되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그러면 비열한 하이에나들이 기세등등하게 달려든다. 사실 각목에 스친 아픔은 수련 때 맞앗던 곽대발의 살인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야야아!"
유한이 상처 입은 사자처럼 포효하며 주먹을 날렸다. 각목 든 녀석의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비록 한 방에 완전히 보내지는 못했지만, 엉덩방아를 찧은 녀석의 눈에는 두려움이 잔뜩 깃들어 있었다.
"뭐 해? 얼른 조져 놓으라니까!"
블라덱의 고함에 멍하게 구경만 하고 있던 녀석들이 유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처음에 그 기세등등하던 모습들은 어디에 가고 다들 약간씩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반대로 완전히 기가 오른 유한은 마음껏 휘저으며 나머지 녀석들을 때리고 차면서 차례대로 쓰러트렸다.
-사람이 가진 힘은 누구나 동등하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약하고 어떤 사람은 강하지. 내면에 품고 있는 용기(勇氣)가 다르기 때문이야.
사범 곽대박은 이런 이야기도 해 주었다. 이미 유한 너에겐 충분한 힘이 있다고, 극기도의 수련은 그 용기를 강하게 키우고 잠자고 있는 육체의 힘을 일깨우는 것뿐이라고.
'이, 이게 아닌데!'
블라덱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자신의 본거지에는 같이 어울려 노는 덩치들이 있었다. 싸움의 귀재들은 아니지만, 뒷골목에서 힘 좀 쓴다고 할 수는 있는 녀석들인데다가 숫자도 많았다. 당연히 자신을 두들긴 녀석을 어떻게 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쓰레기가 가득한 바닥에 신음 소리를 토하며 나뒹구는 건 놈이 아닌 자신의 친구들이었다.
"후후, 남은 건 너뿐이군."
"하하하. 님, 우리 문화인답게 말로..."
간사하게 웃는 블라덱을 바라보며 유한도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옆으론 굳게 쥔 주먹이 치켜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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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증."
유한의 말에 블라덱과 그의 친구들은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유한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경찰한테 찌를까? 아님 게임사에 이를까?"
해킹에, 해킹한 아이템을 몰래 거래했다.
죄의 경중으로 치자면 무단침입에 자신들을 두들겨 팬 유한이 더하지 않나 싶었지만, 지금 그들은 유한의 박력에 밀려 버렸다.
잘못하면 또 맞을지도 모른다. 바츠 유저라더니 싸움 실력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들은 포기하고 얌전히 학생증이나 신분증을 내놓았다.
블라덱만 대학교 1학년이고, 나머지는 모두 재수생이었다. 사실상 백수건달이라 할 수 있는.
모두 유한보다 형님들이었지만, 그렇다고 유한은 봐 주거나 한 수 접어 줄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는 미리 챙겨 왔던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호주머니 속에도 들어가는 이 작은 카메라는 할바어지가 쓰던 것이었다. 디지털 카메라가 아닌 아날로그 카메라로 필름을 쓰는 제품이다.
거실에 고이 모셔져 있던 것을 집어 온 유한은 우선 놈들의 학생증과 신분증부터 찍었다.
"꽤나 고물딱지를 들고 다니는군."
"이런 물건일수록 수작 부릴 가능성이 낮아지니까."
"하긴 필름을 조작하기가 쉽지 않으니."
다지털 카메라는 편한 대신 편집 프로그램으로 조작하거나 데이터를 지울 수 있다. 하지만, 아날로그 카메라는 그게 불가능했다. 대신 필름 간수를 잘 해야 하는 벌거로움이 있지만.
유한은 이 카메라의 필름을 구한다고 애를 먹었다.
이미 21세기 초에 아날로그 카메라는 그 운명을 다했다. 지금은 전문 사진작가를 제외하면 아무도 쓰지 않아서 필름 값도, 나중에 사진을 인화하는 비용도 굉장히 비싸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를 남길 수 있는 물건이기에 유한은 아낌없이 용돈을 투자했다.
"어디 보자, 해커 일당이 쓰는 장비를 살펴볼까나?"
블라덱들은 창고 안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 대는 유한을 잡을 수도 말릴 수도 없었다.
그들은 될 대로 되라는 듯 체념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발각이 난 것도 처음이기에 마땅히 대응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기도 했고.
아무튼 중요한 것은 유한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뿐. 어떻게든 오늘을 무사히 넘겨야 했다.
너저분한 창고 안에는 컴퓨터와 캡슐, 복합기를 비롯해 몇 가지 전기 기구들이 들어서 있었다. 컴퓨터의 홀로그램 스크린에는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게임 세계가 그대로 비춰지고 있었다.
'공식 홈페이지의 라이브 스크린(Live Screen)이군."
라이브 스크린.
현재 게임 속 상황이 어떤가 보여 주는 영상이다.
아르페디아 대륙 몇 군데에 게임사에서 설치한 라이브 스크린이 있는데, 게임 중계와 달리 CCTV 비슷한 수준이라 보통 사람들은 대충 보고 지나가는 정도였다.
"이걸 켜 놓은 이유가 뭐야?"
잠시 주저하던 블라덱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갑부 탐색용이다. 레벨이 높지 않더라도 돈 많은 놈들이 있거든. 보통 그런 놈들은 차림새부터가 다른데..."
라이브 스크린을 보고 '고객이 될 만한 사람들'을 선별하고, 게임에 접속해서 그들의 정보를 조사한다고.
몰래 그들을 쫓아다니며 찾고 있는 물목이 무엇인지, 거래하고자 하는 아이템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접근을 한다는 것이다.
"해킹은?"
"그런 건 따로 핵이나 프로그램을 뿌리는 거지. 공략 사이트나 카페 같은 곳에 게임할 때 유용한 프로그램이라고 던져 놓으면 알아서 입질을 하는 거야."
그런 프로그램들은 유한도 알고 있다.
몬스터의 레벨이나 정보를 표시해 주고, 날씨를 미리 알려 주는 등의 편리한 기능을 제공하는 유털리티들이었다.
물론 이것은 드림맥스가 금지하는 불법 프로그램이다.
자칫 이런 프로그램들이 게임 프로그램과 충돌해 트러블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반칙성 프로그램에는 위험한 해킹 프로그램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보안 프로그램인 '인스팩터(Inspecter)'는 이런 것들이 깔려 있으면 소거해 버리거나 게임 접속을 차단해 버린다.
"하지만 아르페디아 온라인에는 인스펙터가 있잖아?"
"그야 내려 버리면 되는 거고, 어디나 게임을 편하게 하려는 부류들이 있지."
"인스펙터 자체를 없애 버린다고? 인스펙터가 없으면 게임에 접속을 못하는데?"
"그렇지. 하지만 그런 건 손을 쓰면 간단하지."
더미 인스펙터(Dummy Inspecter).
해커들이 자신들의 밥이 될 자들을 위해 만든 보안 프로그램이다. 더미 인스펙터를 깔면 게임에는 접속할 수 있지만, 해킹에는 무방비로 노출된다.
"게임사에선 나서지 않는 건가?"
"당연히 안 나서지. 본인의 개인 정보 관리 소홀로 인해 벌어진 일은 게임사가 책임지지 않는다고 약관에도 나와 있잖아."
그 말은 유한도 예전에 들어 보았다.
바츠를 해킹당했을 때 고객 상담실장이라는 작자가 그리 말하며 뻣뻣하게 나왔던 것이다.
물론 유한은 스스로 갑옷을 벗고 화살을 맞는 멍청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런 프로그램들을 깔지 않아도 충분히 게임을 즐길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건 피해당한 유저에 대해서 복구를 안 해 준다는 것이고, 드림맥스에서도 해커 추적과 박멸은 하고 있어. 그래서 우리도 항상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지."
창고 안에 흩어진 각종 장비들과 메모리 칩에 담긴 프로그램들은 드림맥스의 추적을 회피하기 위해 마련한 것들이라고.
"따로 훔쳐 낸 개인 정보로 계정과 캐릭터를 만들고 친구들끼리 아이템을 돌려 가며 손을 써서 세탁을 하는 거지. 인챈트를 하거나 일부러 손상을 입히는 방식으로."
"아이템의 정보를 바꾸는 거로군."
"그래. 하지만 아주 완벽하다곤 할 수 없어. 직접 드림맥스의 데이터를 주무르기엔 너무 위험도 크고...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어. 지금까지 그랬으니까."
블라덱은 이렇게 상대를 맞닥트릴 줄은 몰랐다. 그것도 자신이 해킹한 사람이 아닌 자신이 구입한 아이템의 주인을.
"자, 그런 이야기는 됐고, 내가 알고 싶은 건 따로 있어."
사진을 충분히 찍은 유한은 지금까지 이해되지 않던 것들을 블라덱에게 물어보았다.
"피싱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해킹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해당 인물의 개인 정보가 웹에 공개되어 있다면."
"아니, 그것도 아니라면?"
유한은 자신이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하지 않았다고 믿었다.
인스펙터를 건드린 일도 없고, 수상한 사이트에 들락거린 적도 없었다.
"그래도 누군가 개인 정보를 알고 있으니 홀랑 벗겨 간 거겠지. 초 일류 해커라도 돼서 국가 기관의 데이터를 해킹하지 않는 이상 그건 불가능해."
"날 해킹한 놈은 자신이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해커라고 했어."
유한의 말에도 불구하고 블라덱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허풍일걸. 그만한 해커가 찌질하게 남의 게임 캐릭터나 벗겨 먹을 리는 없잖아? 내가 그런 실력이었으면 벌써 스위스 은행을 털었을 거다."
"뭐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하더군."
확실히 바츠라면, 누구도 엄두를 못낸 레드 드래곤을 홀로 때려잡은 바츠라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궁금한 것과 아이템을 벗겨 먹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아무래도 바츠를 해킹한 녀석은 사이코인 모양이다. 간단히 쪽지나 메일로 만나자고 하면 될 것을 굳이 해킹을 하다니.
하지만, 실력만큼은 분명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분명했다.
"도대체 해킹을 어떻게 당한 거야?"
"말했잖아. 피싱 프로그램하곤 상관없다고."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야. 해킹당했을 때의 상황을 묻는 거야. 평소와 다른 일이 있지 않았어?"
유한은 입을 다물었다. 대답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정말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것을 일일이 따져 보지 않았을까?
수사 범죄 드라마를 보아도 사건이 일어난 전후 상황을 면밀히 재구성하지 않는가.
아마 해킹당한 당시에 워낙 정신이 없었던 탓일 것이다. 그 이후에도 해커를 찾는다고 설치고, 대장장이 지그를 키운다고 바빴으니까.
"그러니까 그게..."
유한은 해킹당했던 때의 상황을 모두 블라덱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4)
"흠, 생각보다 의심 가는 사람이 많은걸?"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블라덱이 그렇게 말하자, 유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라면 우선 가족들을 의심할 거야. 서로의 개인 정보를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뭔가 싶었던 유한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분명 부모님은 자신이 게임하는 것을 꽤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계시니까.
하지만 개인 정보만 안다고 해서, 그걸 기반으로 계정 정보를 알아냈다 해서 바츠를 홀랑 털고 캐릭터까지 없애 버릴 수는 없었다.
바츠의 아이템을 털려면 게임에 접속을 해야 하는데, 가상현실 게임에 접속하는 일은 과거처럼 ID와 비밀 번호만 안다고 되는 일은 아니니까.
접속하는 당사자가 캡슐에 들어가 빠르지만 복잡한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걸 패스할 방법은 관련 장치와 프로그램을 주물럭거리는 것뿐인데, 가족 중에 그런 실력자는 없다.
젊을 때 게임 좀 했다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요새 얼굴 보기 힘든 유현이 녀석조차도.
외할머니나 외가 쪽 사람들을 의심해 봐도 마찬가지.
외가 쪽 식구들은 시골에서 과수원이나 농사일을 하는 순박한 사람들이다. 음흉하고 교활한 해커와 하늘과 땅만큼 거리가 있었다.
"그래도 이상하지 않냐? 하필이면 네가 외가에 갔던 일주일 사이에 캐릭터가 털렸어. 마치 네가 접속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는 것처럼."
"으음..."
"네 가족 중에 해커가 없더라도 해킹에 가담할 만한 의사가 있는 사람은 분명히 있잖아."
확실히 그건 그랬다.
해커가 '아들을 게임 접게 해 드릴까요?'라고 제의하면 부모님은 얼싸 좋다 하고 협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랬을 것 같지도 않은 게, 유한의 가족들은 그리 엉큼하지 않다는 것이다. 차라리 아들 방에 있는 컴퓨터랑 캡슐을 때려 부수고 내다 버렸으면 모를까.
임종이 눈앞이라고 거짓말을 한 외할머니도 그런 것은 마찬가지다. 손자의 게임 중독을 고치실 요량이라면 시골에 불러다가 웰빙스런 삻을 살게 하셨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 해도 해커 녀석은 내 주위에 있는 게 틀림없어.'
옆집 형이거나, 아버지의 절친한 흑룡반점 박만철 사장이 아니더라도, 자신은 놈의 가시권 안에 있는 건지도.
어쩌면 오늘 이렇게 블라덱과 대면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의심해 볼 수 있는 게..."
"뭔데?"
"아니, 이건 아닌 것 같아. 다시 생각해 보니 좀 터무니없는 거라서."
블라덱은 유한에게 이야기해 주려다 말았다.
분명 의심 가는 게 하나 더 있지만, 확증이 없는데다가 그런 짓을 해서 그쪽에서 딱히 득 볼 것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야."
"그럼 그 생각이 맞나 네가 알아보면 되겠군."
"뭐라고?"
블라덱의 눈이 동그래졌다.
한 사람의 해커로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으니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녀석은 엉뚱한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네가 찾아봐. 바츠를 털어 간 해커를 말이야."
"내가 왜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해야 하는데!"
"너도 그놈이랑 똑같은 놈이잖아. 얼마나 많은 유저들을 털었는지는 몰라도 네 정보가 인터넷에 올라가면 편히 살긴 어려울걸."
편히 살기는커녕 현피에, 경찰이 추적해 올지도 모른다.
유한은 카메라를 손 위에서 만지작거렸다.
잠시 유한을 노려보던 블라덱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당장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친구들과 다시 놈에게 덤벼 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아까 맞은 상처가 쓰린 아픔에 아직도 얼얼했다.
힘으로 안 되면 어떻게든 다독여서 좋게 마무리해야 한다.
"이봐, 내 실력이론 그놈을 찾는 건 무리야."
"한번 해 보고 된다 안 된다는 말을 하시지. 누군 확신이 있어서 발품 팔고 쫓아다닌 줄 알아?"
대장장이가 되어 바츠의 아이템을 수색하고 그것을 추적하여 해커를 찾는 것.
확신은 없었다. 좁쌀보다도 작은 가능성만 있었을 뿐이다.
지금도 해커를 찾는 것이 요원하다 느껴지지만, 그래도 아무런 기약 없이 파부치 영감의 대장간에서 풀무질을 할 때보다도 많은 성과를 이뤄 냈다.
"내가 요새 하고 있는 캐릭터는 대장장이 지그다. 일주일에 한 번씩 내 쪽으로 성과를 보고하도록 해."
"켁! 리, 리자드 히어로의 친구가 너라고?"
"바츠 유저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 안 그래?"
유한은 자신도 모르게 옌스처럼 말하고 말았다. 놀라는 블라덱의 앞아세 으쓱대던 그는 눈빛을 다시 날카롭게 번득였다.
"시끄러운 일은 사양이니까 함부로 떠벌렸다가는 죽을 줄 알고."
"아, 알았어."
"그리고 네가 갖고 있는 바츠 아이템을 전부 내 앞으로 보내. 지금 당장!"
유한의 명령에 블라덱은 인상을 구겼다.
생돈을 주고 산 아이템을 공짜로 내놔야 할 판이다.
그러나 자신은 불법을 저질렀고, 시킨 대로 하지 않으면 콩밥을 먹을지 모른다. 뭐 그 전에 이 녀석에게 묵사발이 나겠지만.
캡슐에 들어간 블라덱은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접속했다. 그가 플레이 하는 모습이 스크린 하나에 그대로 비춰졌다.
"인벤 몽땅 열어! 가방이고 은행이고 내가 일일이 다 확인할 테니까."
블라덱이 주저하자 유한은 캡슐을 발로 세게 걷어찼다.
쾅!
"얼른 안 열어? 캡슐째 땅에 묻어 줄까?"
캡슐 표면이 일그러졌지만, 그 정도로는 고장 나지 않는다.
겁에 질린 블라덱은 순순히 인벤토리를 모두 열었다.
그리고 유한이 지켜보는 와중에 바츠의 아이템을 골라 상자에 차곡차곡 담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수량이 적었다.
유한이 물으니 이미 교묘하게 세탁을 끝낸 것은 유저들에게 처분했고, 그렇지 못한 것은 알세인의 경우처럼 싸게 NPC에게 팔아 버렸단다.
"정말 이것뿐이야? 플레임 소드랑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은?"
바츠의 주력 장비가 없었다. 유한의 물음에 캡슐 안에 있던 블라덱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외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건 애초에 거래 품목에 없었어. 아마 그놈이 나보다 더 돈 많은 녀석에게 팔았을 거야."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순간 유한의 머리에 새로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뒤에서 주춤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덩치들을 돌아보았다.
"니들도 게임 접속해서 인벤토리 다 열어 봐."
"우, 우린 별로 가진 게 없어."
"닥치고 접속이나 해!"
양아치들은 블라덱의 아이템 세탁을 도왔다. 당연히 바츠 아이템 한두 가지는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다.
예상대로 녀석들의 인벤토리에도 바츠의 아이템과 바츠 것으로 의심되는 장비들이 발견되었다.
유한은 그것마저 고스란히 챙겨 상자에 같이 담게 했다. 그리고 블라덱이 상자를 우편으로 보내는 것까지 모두 감시했다.
"주소는 케이트 산맥의 지그 대장간이다. 곧장 돌아가서 확인해 볼 테니까 엄한 수작은 하지 않는게 좋아."
우편은 인수되기 전에 반송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유한은 겁을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뭐 이런 협박이 필요 없을 정도로 블라덱과 그의 친구들은 꼬리를 내린 상태였지만.
"명심해. 너희에 대한 정보는 모두 내가 찍어 두었다는 걸. 이상한 수작 하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찍을 것도 다 찍고, 들을 말도 다 듣고, 돌려받을 것도 다 돌려받았다. 협박과 위협까지 모두 마친 유한은 블라덱의 아지트에서 빠져나왔다.
"하하하하핫!"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입이 벌어지며 커다란 웃음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원하던 해커를 잡지 못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자신의 강함으 깨달았기 때문이다.
숫자도 많고 연장까지 들고 있는 양아치 놈들을 상대로 싸워서 이겼다. 거의 일방적이라 할 수 있는 수준으로.
현실에서의 레벨 업이 이렇게 즐거운 일일 줄이야.
"고마워요. 대발이 아저씨."
유한은 자신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는 허공의 곽대발을 향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가 그렇게 상쾌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과 반대로, 칙칙한 창고 안에 있는 블라덱 일당은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아, 씨발! 이게 뭔 망신이야? 쪽팔려서 어디 말도 못하겠다."
"너, 저딴 녀석은 왜 데려온 거야!"
"시끄러! 니들은 여섯이나 되면서 다굴도 제대로 못하냐!"
블라덱과 녀석의 친구들은 서로 짜증을 냈다.
멀쩡히 잘 놀다가 날벼락을 맞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것으로 앞으로, 바츠인지 지그인지 하는 놈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제길, 이게 다 바츠를 해킹한 그 자식 때문이야.'
블라덱이 뿌드득 이를 갈았다.
그가 유한에게 맞은 것도, 이렇게 코가 꿰여 버린 것도, 전부 그때 아이템을 사지 않겠냐며 꼬드긴 그놈 탓이다.
블라덱은 결코 자신의 잘못에 대해 자책하고 성찰할 녀석이 아니었다. 종로에서 맞은 뺨을 한강에서 풀 정도의 소인배였다.
'어떤 놈인지 나도 면상 좀 보고 처갈기기나 하자.'
허공에 날아가 버린 돈도 보상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블라덱은 곧장 게임 내에 나도는 바츠의 아이템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유한과 함께 정체불명인 해커의 행방을 쫓는 사람이 또 한 명 늘어났다.
< 1. 현피를 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