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길드전 발발 >
(1)
남바린 영지가 어느 정도 복구되었을 무렵.
앞으로 폭풍을 몰고 올 사건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푸른새벽 길드의 본부에는 이른 아침부터 간부 회의가 열렸다. 어제 길드원 하나가 찾아와 남바린 영주의 실정에 대해 보고했기 때문이다.
"겨우 대장장이 하나한테 케이지가 깨졌다고?"
"공격대를 열다섯 명이나 끌고 갔는데 도리어 쫓겨 왔습니다."
간부 회의에 참석해 케이지의 지난 과거를 고해바치는 이는 바로 부하 마법사였다. 그는 케이지를 쫓아내고 자신이 남바린 영주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허! 영지를 제대로 관리는 못할망정..."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만약 유저들 사이에 소문이 퍼지게 되면 길드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게 되리라.
"그것만이 아닙니다. 다음 날 대장장이 녀석을 공격하려고 길드원을 백 명이나 소집했습니다."
"뭐야? 우리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자신의 지부, 그러니까 영지에서 길드원을 동원하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타 지부의 길드원을 동원하려면 반드시 간부 회의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회의장 안이 도떼기시장처럼 시끄러워졌다.
"백작님! 당장 케이지를 소환해야 합니다!"
"그럴 것도 없이 바로 지부장의 자라에서 파면해야 합니다!"
"파면할 것도 없습니다. 이대로 길드에서 강퇴시킵시다!"
그동안 케이지의 성공 기도를 부러워한 간부들이 기회다 싶어 공격하기 시작했다.
회의장이 시끄러워지자 상석의 백작이 손을 들어 조용히 시켰다.
백작 세이언.
30대 초반의 사내로 푸른새벽 길드의 장이다.
그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간부들과 달리 사려깊고 용의주도한 자였다.
푸른새벽 길드가 아바란의 북동부 영지들을 장악하면서 세이언은 아바란 국왕으로부터 백작이라는 작위를 얻었다. 그래서 다들 그를 길드장이라고 하는 대신 백작이라고 불렀다.
얼마 전까지 어느 대기업의 회사원이었다고 하는데, 이곳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새로운 성공을 찾아 직장도 때려치웠다고 한다.
"험험! 그는 우리 푸른새벽 길드의 인재이니 일단 불러서 소명할 기회를 줘야 하지 싶소. 더구나 그는... 잘들 알잖소?"
사실 케이지, 아니 김필중에게는 든든한 빽이 있었다.
백작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그래서 비록 그가 죄를 지었다고 하나 확실히 밝혀지기 전에는 함부로 처벌할 수 없었다.
그제야 그 사실을 떠올린 간부들은 입을 다물었다.
"반대가 없다면 그를 부르도록 하겠소."
케이지는 그날 바로 푸른새벽 길드의 본부가 있는 랑스 영지로 불려 왔다.
처음에 자신이 왜 소환을 당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그는 회의장 안에 있는 부하의 모습을 보고 인상을 구겼다.
"너, 너 이 새끼 어제부터 안 보인다 했더니..."
케이지가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마법사를 요절낼 듯하자 백작이 말렸다.
"어허, 케이지 영주. 진정하고 자리에 앉으시오. 오늘 그대를 부른 것은 한 가지 확인하고픈 것이 있기 때문이오."
김필중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 그렇지 않아도..."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야기해 보시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모두 확인해 볼 터이니 결코 거짓이 섞여 있어거는 안 된다는 것이오."
'하아. 완전히 당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괘씸한 대장장이 녀석을 미리 짓밟아 놓는 건데, 그동안 영지를 복구하는 일로 바빠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다.
케이지는 어쩔 수 없이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유한의 대장간에 대한 소문을 어떻게 듣게 되었으며, 접촉은 어떻게 했고, 싸움은 또 어떻게 벌였는지.
"뭐야? 지그 대장간이었어?"
"제길. 우리 영지도 그 지그라는 새끼 때문에 수입이 반으로 뚝 떨어졌는데."
대장간 증축 이후로 유한은 지금 남바린 영지를 벗어나 그 이웃 영지에도 한창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조금 거리가 멀긴 해도 상당수의 유저들이 지그 대장간까지 와서 무구를 사거나 수리를 받는 것이다.
덕분에 이들 영지에 있는 대장간과 공방은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사정을 다 이야기한 케이지는 백작을 향해 말했다.
"백작님, 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면 반드시 그 대장장이 놈을 쫓아내고 대장간을 길드에 헌납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영지의 간부들이 이를 반대했다.
"안 됩니다! 그는 한 번 길드의 규칙을 어겼습니다."
"그 괘씸한 대장장이는 길드 차원에서 응징을 해야 합니다."
결국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자 백작도 더 이상 케이지를 옹호할 수 없었다.
그는 좌중을 조용히 시킨 후 케이지에게 판결을 내렸다.
"케이지 영주는 푸른새벽 길드의 지부장으로서 영지 관리를 소홀히 했을 뿐만 아니라 길드의 명성에 먹칠을 했는바, 영주에서 해임하여 남바린의 기사단장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번 공격대를 맡겨 최소한의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준다. 이의 없는가?"
"...없습니다."
그나마 케이지의 뒤에 버티고 있는 빽을 의식해 지위를 한 단계 강등시킨 것으로 끝났다. 만약 그 빽마저 없었다면 케이지는 평길드원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빠드득!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새끼! 아예 게임을 접도록 만들어 주마.'
케이지는 내심 자신을 이렇게 만든 유한을 향해 원한을 불태웠다.
(2)
광렙을 하고 며칠이 지났다.
새로 익힌 주물 스킬을 이용하여 대량으로 검을 양산할 연구를 하던 유한에게 옌스가 찾아와 물었다.
"어이, 바츠. 그 야이기 들었어?"
"뭘 말이야?"
"오다가 들었는데, 이웃 나라에 리저드 대군이 쳐들어왔다더군. 지금 반쯕 점령을 당했다는데 유저들 사이에서 난리가 난 모양이야."
그러면서 옌스는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해 줬다.
아바란 왕국 서쪽에는 아바란 왕국보다 조금 작은 키예프 광국이라는 나라가 있고, 키예프 공국 서쪽에는 초원과 사막, 그리고 플레임 마운트가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사막에서 '리저드 히어로'가 등장하더니 무서운 속도로 리저드맨을 하나로 통합해 버렸다고 한다.
여기까지야 뭐 NPC들 간의 일이니 문데는 없었다. 그저 리저드맨 사이에서 히어로가 나왔다는 게 조금 신기했을 뿐.
그런데, 이 히어로가 통일된 부족들을 이끌고 동쪽의 키예프 왕국을 침공해 버렸다.
처음에 키예프 공국의 유저들은 리저드맨을 우습게 생각했지만, 놈들이 보통 리저드맨과 달리 철제 무기와 방어구를 장비하고 있다는 걸 알고 크게 놀라게 되었다.
저돌적인 리저드맨의 기세에 밀린 키예프 공국은 순식간에 영토의 절반을 빼앗겨 버렸다.
덕분에 리저드맨 토벌과 관련된 퀘스트가 키예프 공국에서 발동되었고, 지금 그쪽은 인간 대 리저드맨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서, 설마!'
이야기를 다 들은 유한은 입을 쩍 벌렸다.
'아닐 거야. 그놈들 머리가 얼마나 나쁜데...'
유한은 그렇게 자위했다.
"그럼 거기서 전쟁이 터졌다면 무기 값이 올라가겠네?"
"그래. 듣자니 키예프 공국에서는 리저드맨과 싸울 용병을 모집하고 있고,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인접국에 사신단을 파견한다더군. 아바란에도 그 사신이 왔다고 해. 그래서 지금 서쪽 영지들의 대장간과 공방에서는 무기를 만든다고 난리라지 아마."
전쟁은 무기를 만들어 파는 자에게는 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래서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아바란 서쪽 영지들은 영지전이 벌어졌던 곳들도 휴전하고 무기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생산량을 늘려야겠군."
유한도 당연 키예프 공국에게 무기를 팔 생각을 했다.
품질도 뛰어나고 가격도 저렴한 창이나 칼 등을 팔면 될 것이다. 아무래도 그쪽이 수요가 더 많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유한과 옌스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대장간 문이 열리더니 송코가 들어왔다.
"지그야. 누가 널 찾아왔는데?"
"에? 저를요?"
"그래. 나가 봐."
유한은 누군가 싶어 밖으로 나갔다. 그를 찾은 사람은 바로 표재훈. 아르페디아에서 로키라 불리는 기사였다.
"어라? 로키 형.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동안 곽대발을 비롯한 사범 몇몇이 이곳에 와서 무기를 새로 구입하거나 고치고 가긴 했다.
하지만, 로키는 처음이었다. 저번에 사냥터로 광렙을 하러 갈 때도 영지전에 참가한다고 시간이 없다고 했는데.
"무기 고치러."
역시 무뚝뚝한 그는 꼭 필요한 말만 했다.
유한은 빙그레 웃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제가 공짜로 고쳐 줄 테니까."
마침 채린은 대장간에 없었다. 리지스의 상행에 호위 겸 말동무로 따라간 것이다. 둘은 코스튬 페스티벌 이후로 더 친해졌다. 듣기론 오프라인에서도 자주 만나고 있다고.
아무튼 채린이 없는 것은 다행이었다. 자칫 용병대원들이 입을 타고 길포드, 그러니까 송태수의 귀에 들어가면 유한은 그날로 사망이었다.
"뭐? 공짜라고?"
"봐, 내가 뭐라고 했어? 로키를 앞장세우면 공짜로 고칠 수 있다고 했잖아."
"나도 공짜로 고쳐 줘."
그런데 로키는 혼자가 아니었다.
유한이 공짜란 말을 하자마자 대장간 옆의 숲에서 레드 타이거 용병대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다들 극기도 수련생들 중에서도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다들 공짜란 소리에 싱글벙글했다.
'윽! 당했다.'
한 명도 아니고 무려 3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공짜로 해 달란다. 이들을 모두 공짜로 고쳐 주면 적지 않은 손해를 봐야 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뭐 남도 아니고 한 식구 같은 존재니까.'
극기도 도장에서 같이 땀을 흘리며 친해진 사이 아닌가.
유한은 그들 모두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증축하면서 넓게 지었음에 불구하고, 유한의 개인 작업실은 덩치 큰 떡대들로 북적북적해졌다.
이렇게 되자 먼저 들어온 옌스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들은 누구요?"
"그러는 넌 뭐냐?"
옌스는 레드 타이거 용병대원들에게 살기를 뿜었다. 전사 특유의 기감이 위험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가 살기를 뿜자 레드 타이거 용병대원들도 같이 살기를 뿜었다.
"그만! 이쪽은 레드 타이거 용병대의 형들이고, 여기는 옌스라고 제 동료에요."
유한은 서둘러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옌스, 넌 밖에 나가 있어."
"흥. 사냥이나 다녀올란다."
옌스는 콧방귀를 뀌더니 나가 버렸다.
"저 자식 꽤 셀 것 같지 않아요?"
"뭐, 그래 봤자 우리한테는 잽도 안 될 걸."
그렇게 주절거리며 레드 타이거 용병대원들이 내려놓은 무구들은 종류도 다양했고 그 상태도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것은 비교적 양호한 반면, 어떤 것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내구가 닮아 있었다.
단체로 아바란 서쪽에 있는 길드에 고용되어 격렬한 영지전에 참여한 결과란다. 죽일 듯이 으르렁거리던 두 영주가 갑자기 화해하고 휴전하는 바람에 막판엔 싱겁게 끝났다고.
"그런데, 다들 알고 계세요? 키예프 공국에 리저드맨들이 대거 쳐들어왔대요."
"안 그래도 영지전이 그 때문에 휴전한 거야. 무구를 고치면 그쪽으로 가 보려는 중이야. 키예프 공국이 계속 밀린다더군."
서쪽에서 활동해서 그런지 레드 타이거 용병대는 리저드맨 침공에 대해서 꽤나 많이 알고 있었다.
"혹시 그 리저드 히어로가 어느 부족 출신인지 알아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유한은 내심 자신이 아는 그 리저드맨들이 아니기를 빌었다. 만약 그들이라면 자신이 전해 준 철기 기술 때문에 이번 사건이 터진 셈이기 때문이다.
한 번도 아니고 이렇게 자꾸 게임의 스토리에 영향을 미쳐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원래 이런 시스템의 게임이라지만 말이다.
캉캉캉!
유한은 웃통을 벗어던진 채 작업에 몰두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노력은 곧 수포로 돌아갔다. 대장간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누군가 고함을 질러 그를 찾았기 때문이다.
"지그 이 새끼 어디 있어?"
'아씨! 누가 욕질이야?'
유한은 옷을 걸치며 말했다.
"제가 나가 보고 올 테니까 다들 여기 계세요."
밖으로 나오니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바로 케이지를 중심으로 한 푸른새벽 길드 녀석들이었다.
"뭐야, 너냐? 성이나 짓고 있지 뭐 하러 왔냐?"
"닥쳐! 너 때매 내가 영주 자리에서 쫓겨났다. 오늘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를 테니까 각오해라."
김필중이 손짓을 하자 나무 뒤에서 푸른새벽 길드원들이 꾸역꾸역 나왔다. 그 숫자는 무려 200명이 넘었다.
이들은 푸른새벽 길드의 정예 공격대였는데, 이들을 확인한 유한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한 1~20명이면 모르겠다.
하지만, 저렇게 많은 인원이 덤비면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더라도 이길 수 없다.
"캬캬캬! 이제 와서 빌어 봤자 소용없다. 내가 아주 친절히 게임 접도록 만들어 주지."
유한의 굳은 얼굴을 확인했는지 케이지가 득의양양해 웃었다.
"덤으로 이 대장간은 우리가 접수해 주마. 아, 그리고 NPC들도 잘 사용해 주고. 크크크!"
'이 비겁한 자식이!'
전에도 그랬다.
케이지, 아니 김필중 이 자식은 학교에 있을 때도 혼자 자신을 괴롭히려 온 적이 없었다. 꼭 똘마니들을 병풍처럼 거느리고 와서야 자신을 때리고 못살게 굴었다.
유한이 지난 기억과 오버랩되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케이지는 유한이 그저 겁이 나서 부르르 떠는 줄 알고 기고만장했다.
"뭐 일전의 그 깔삼한 걔집애를 나한테 넘겨주면 최소한 겜은 접지 않도록 해 주지."
케이지는 안 그래도 터지려는 폭탄의 신관을 건드리고 말았다.
"닥쳐! 이 개새끼야!"
우레 같은 고함에 케이지는 움찔 놀랐다. 눈앞에 유한의 주먹이 날아온다 싶더니 그의 안면을 후려갈겼다.
"컥! 이, 이 자식이!"
HP가 많이 닳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리얼하게 터진 코피는 케이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쳐 갈기다니,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무슨 일이냐?"
그때 대장간 문이 벌컥 열리며 로키가 나왔다.
"이놈들이 떼거지로 와서 시비 걸고 있습니다."
유한에게서 사정을 들은 로키의 눈이 무섭게 치떠졌다.
평상시에는 살짝 쳐진 눈을 하고 있던 그가 이럴 때는 정말 화가 났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 조그만 변화가 푸른새벽 길드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뭔지 몰라도 욕을 하고 고함을 지르고 인상을 쓰는 것보다도 겁나게 느껴졌다.
"저, 저 녀석은 뭐야?"
케이지는 그동안 유한의 대장간을 감시하고 있던 부하에게 물었다. 하지만 부하는 모를 수밖에 없었다. 로키가 대장간에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제길, 상관없다! 대장장이 새끼와 연관이 있는 놈은 모두 죽여 버려!"
케이지는 유한과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어서 이놈을 무릎 꿇리고 어떻게 괴롭혀 줄지 고민하고 싶을 뿐.
"아, 뭐야?"
"밖이 왜 이리 시끄러워?"
푸른새벽 길드의 공객대가 막 공격을 펼치려는 찰나, 대장간 안에서 레드 타이거 용병대원들이 우르르 나왔다.
설마 그 많은 인원들이 안에 있을 줄은 몰랐던 케이지는 깜짝 놀랐지만, 그래도 겁을 먹지 않았다.
'한 팬가? 그래도 우린 이백 명이 넘는다. 거기다 길드 최고의 실력자들로만 꾸린 공격대야.'
저번에 그가 데려왔던 공격대와는 차원이 다른 실력을 지닌 유저들이다. 이들은 푸른새벽 길드의 전위 부대로서 항상 길드전이 벌어지면 선봉에 서서 싸우는 자들인 것이다.
이들 중 레벨이 가장 낮은 이들이 100전후일 정도로 약한 자가 없었다.
"전부 싸그리 묻어 버려!"
케이지의 결정에 주춤했던 푸른새벽 길드원들은 사정없이 덤벼들기 시작했다.
"니들 뭐야? 갑자기 우릴 왜 공격하는 거야?"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피하기만 하던 레드 타이거들은 점점 거세지는 공격에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이 애새끼들이 어른 말이 귓구멍에 들리지도 않나!"
"버릇없는 쌍놈의 쉐이들, 빌어도 소용없다!"
"오냐, 오늘 몽땅 다 뒈져 봐라!"
그때부터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유한도 레드 타이거들과 함께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처음에는 숫자가 우세한 푸른새벽 길드원들이 승기를 잡는 듯했다. 뒤에서 마법을 뿌리는 사이 기사들과 전사들이 앞으로 달려와 검과 각종 무기들을 휘두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레드 타이거 용병대를 몰라본 것이 죄라면 죄였다. 겉보기에는 어수룩해 보이지만, 레드 타이거 용병대원 하나하나가 전투라면 이골이 난 고수들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들은 푸른새벽 놈들이 유한의 대장간을 노리고 쳐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더욱 흥분해 날뛰기 시작했다.
"이런 싸가지 없는 자식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행패야?"
"순 날강도 같은 쉐이들!"
콰가--각!
삐정--!
그들은 진정 성난 호랑이와도 같았다.
로키를 비롯한 레드 타이거 용병대원들이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한 명씩의 푸른새벽 길드원들이 하늘을 날았다.
"뭐하는 거야! 피하지 말고 공격을 하란 말이야, 공격을!"
뒤에서 케이지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보았지만, 이미 한번 기울기 시작한 기세는 되돌릴수 없었다.
'뭐 저런 놈들이 다 있어?'
눈앞의 용병들은 하나하나가 투신(鬪神)과도 같았다.
레벨도 높은 것 같았지만, 케이지를 더욱 질리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전투 스킬이 아닌 몸을 이용해 싸운다는 것이었다.
케이지도 오프에서 껌 좀 씹어 봤기에 잘 안다.
저들은 진정한 싸움꾼. 몸놀림이나 동작이 간결하면서도 가장 파괴적인 것들만을 취하는데 어설픈 싸움꾼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레, 레드 타이거 용병대?'
그제야 그들의 이름이 떠올랐다.
언제나 허름한 용병옷을 입고 다니기에 일반 유저들은 잘 모른다. 하지만, 어깨에 힘 좀 준다는 길드들은 모두 그들을 알고 있었다.
레드 타이거 용병대는 전장의 사신(死神)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대장인 길포드는 아르페디아 온라인 최고의 길드인 철십자 길드의 길드장 노벨을 죽인 유명인이었다.
'제, 제길 저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혹시 지그 놈 대장간의 배후에 저들이 있었던 건가? 그래,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저 새끼가 겁도 없이 우리한테 덤볐지.'
케이지는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다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그리고 오늘의 일이 영 재미없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건 함정이야! 저놈이 우리가 올 줄 알고 있었던 거야!'
그렇게 생각한 그는 공격대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모두 퇴각한다! 퇴각하라!"
그렇지 않아도 패색이 짙었던 푸른새벽 길드원들은 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크하하핫! 이놈들아 쳐들어왔으면 끝장을 봐야지!"
"어린 것들이 인사도 없이 가다니, 정말 싸가지 좋구나!"
"다음에 올 때는 좀 쓸 만한 녀석들로 데려와라!"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는 놈들을 향해 레드 타이거 용병대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3)
"뭐야? 그래서 그냥 도망쳐 왔다고?"
"도망친 게 아니라 작전상 후퇴를..."
푸른새벽 길드의 정예 공격대가 돌아오자 길드 본부가 난리 났다. 확실한 승리를 장담하고 보낸 전력인데 깨져 돌아왔기 때문이다.
"허허! 도대체 자넨 뭐 하는 사람인가? 그것도 하나 제대로 처리 못하나?"
"백작님. 사실은 대장장이 놈의 뒤에 레드 타이거 용병대가 있었습니다. 공격대가 패한 것도 놈들 때문이고요."
케이지는 서둘러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회의장 안이 시끌벅적해졌다.
"레드 타이거 용병대가 배후에 있으면 쉽게 생각할 게 아냐."
"그렇다고 대장간을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잖아. 길드의 재정을 잠식하는 것도 문제지만, 놈들에게 연속으로 박살 나 길드의 체면이 땅에 떨어진 게 더 큰일이니까."
아바란 왕국 동북부의 패자는 누가 뭐래도 푸른새벽 길드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소울리버 길드를 물리친 뒤 어느 누구도 그들의 지배를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길드도 아니고 기껏 대장장이 한 녀석에게 연속으로 패했다면 다들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분명 주위의 길드들은 자신들을 우습게보고 칼을 들이밀 것이 틀림없다.
만약 여기서 더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레드 타이거와 전쟁을 벌이자고? 그 꼰대들이 누구인지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설마 무적이려고? 우리 길드원을 총 동원하면 놈들을 밟아 버릴 수 있을 거야."
간부들의 의견은 두 패로 나뉘었다.
하나는 전력을 동원해 레드 타이거 용병대와 싸우자는 쪽이고, 다른 하나는 그냥 합의하고 끝내자는 쪽이었다.
쾅!
장내가 시끄러워지자 백작 세이언은 주먹을 내리쳐 그들을 조용히시켰다. (본문에서는 조용시켰다 라고 표기되었음.) 그리고 차분한 시선으로 그들을 일별한 뒤 말했다.
"제군들. 우린 지금 쉽지 않은 적을 마주하고 있다. 길드의 전력을 총 동원하면 이길 수 있지만, 그 피해도 만만찮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이 두려워 싸움을 피한다면 다른 길드들이 우리를 더 우습게보게 될 거다."
세이언이 평소의 점잖은 높임말이 아닌 딱딱한 얼굴로 이야기해 가자 어느 누구도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
"여기 그걸 원하는 사람 있나? 본인은 푸른새벽 길드가 그리 나약한 길드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여기까지 말한 그는 길드전을 선포했다.
"오늘부로 우리 푸른새벽 길드는 레드 타이거 용병대를 상대로 길드전을 선포한다. 전 길드원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고 빠른 시간 내에 본부로 집결할 수 있도록 하라. 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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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없는 사이에 그런 일이 또 터졌구나."
상행에서 돌아온 채린과 리지스는 유한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한동안 조용하다 싶었는데, 드디어 이놈들이 다시 일을 벌이려는 모양이다.
"제길, 내가 있었어야 했는데..."
싸움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옌스가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그때 마침 사냥을 떠난 터라 싸움에 끼지 못했었다.
"앞으로가 문제야. 가만히 있을 놈들이 아니니까."
레드 타이거 용병대 덕분에 푸른새벽 길드의 정예 공격대를 물리칠 수 있었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이제 그들은 전력을 다해 부딪쳐 올 것이다.
"아빠에게 부탁해 볼까?"
'헉!'
채린의 말에 유한은 또 경기를 일으켰다. 길포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좋다. 하지만, 채린과 자신이 쭈욱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날에는 운명을 달리해야 한다.
"아빠와 사범님, 오빠랑 아저씨들이 도와준다면 푸른새벽 길드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야."
'제기랄, 정말 그 수밖에 없는 건가.'
평소 친한 유저도 얼마 없고, 길드는 더더욱 없는 유한에게 힘을 빌려 줄 곳은 그곳밖에 없는 듯했다.
딜론의 골드러시 상인 연합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상인. 그들의 힘을 빌리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아마 연합에 들어오라거나 초열탄 제조법을 알려 달라고 하겠지.'
"그래도 힘들지 몰라."
유한이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송코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푸른새벽 길드가 작정하고 나서면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이 이천 명이 넘어. 아무리 레드 타이거 용병대가 강하다고 하나 이백 명이 채 안되는 인원으로 이기는 건 좀..."
길드전에서 쪽수는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천하장사라도 다굴을 이겨 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어떡해야 하죠?"
"글쎄다.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나한테 맡기라니까. 이천 명이 아니라 이만 명이 쳐들어와도 내가 다 박살 내 준다니까!"
옆에서 떠들어 대는 옌스를 제외하고 네 사람이 머리를 맞대어 봤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유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아야, 아무래도 레드 타이거 용병대의 힘을 좀 빌려야겠다."
"잘 생각했어."
채린은 유한이 극기도 도장에 다니는 것을 모른다. 그리고 송태수가 유한에게 엄포를 놓았다는 사실도 모른다. 그래서 저렇게 밟게 웃으며 좋아할 수 있었다.
'나도 너처럼 마냥 웃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
"아참! 오펜하고 에이린한테도 도움을 청하면 달려올거야."
"그래, 그쪽에도 연락할게."
하지만, 유한은 그 정도로는 도저히 안심할 수 없었다.
그 혼자라면 상관이 없었다. 그냥 싸우다 힘이 달리면 죽으면 될 테니까.
하지만, 이제 싸움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채린이 있었고, 리지스도 있었으며, 송코와 옌스도 있었다.
자신과 함께 싸우겠다며 전의를 불태우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확실히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어쩌면...'
유한은 마지막 희망에 모험을 걸어 보기로 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다.
"지그야! 어딜 가는 (본문에서는 거는 이라고 표기되었음.) 거야?"
"어이, 바츠! 겁나서 도망가는 건 아니겠지?"
유한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잠깐 어디 다녀올게. 그러니까 대장간 좀 부탁해."
산 아래로 달려가는 그의 목에는 리저드 샤먼에게서 받은 동지의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 9. 길드전 발발 >>>
(대장장이 지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챕터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 챕터의 내용을 다 알려 주는 듯한 그런 분위기가... 9챕터 마지막 문장도 그렇고.....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