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코스튬 페스티벌 (4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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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한아, 내일 오전에 시간 있어?"

 남바린 성을 무너트린 다음 날, 채린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야 있지만..."

 오랜만의 공휴일, 유한은 사냥터에서 광렙이나 할까 싶었다. 요즘 이래저래 바빠 레벨을 올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임만 하려니 지겹지 않아? 나랑 같이 바람도 쐴 겸 놀러 가지 않을래?"

 "어디 가는데?"

 "코엑스 앞 광장. 10시까지 나와."

 채린은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하더니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하지만, 유한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둘만의 나들이는 이터널 월드에 간 이후 참으로 오랜만이었으니까.

 '마치 데이트 약속이라도 한 것 같군.'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아니 들뜨는 느낌이었다. 예쁜 여자 친구와 데이트라니, 암울한 자신의 인생에 이런 일도 다 있다니.

 '흥, 그냥 심심해서 놀러 가자고 부른 걸 거야.'

 유한의 마음 안에 있는 외로운 바츠가 그렇게 비아냥거렸다. 여자 친구라지만 채린과는 그냥 '친구'일 뿐 아니냐고.

 '시끄럿! 자주 만나다 보면 친구 이상도 될 수 있는 거지!'

 이렇게 외치며 등장한 것은 대장장이 지그였다.

 '흥,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잘못하면 지금의 친구 관계가 깨질지 모르는데?'

 '시끄럿! 넌 좀 닥치고 꺼져!'

 지그는 바츠를 유한의 마음속에서 쫒아 버렸다. 

 바츠의 말이 신경 쓰였지만, 유한은 친구 이상도 될 수 있을 거라는 지그의 말에 더 귀가 솔깃했다.

 덕분에 기대치가 쭉 상승한 유한은 게임도 하지 않고 일찍 잠들었다. 내일 약속 시간까지 나가려면 일찍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은 잘 흘러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끝내 태양은 떠올랐다.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나?"

 유한의 어머니는 아침부터 때 빼고 광내는 아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 나갔다 올게요."

 "그, 그러렴."

 또 하루 종일 관짝에 들어가 있을 요령이면 끄집어내 집안일이라도 부려 먹으려 했는데.

 유한이 저렇게 밝은 얼굴로 나가니 어머니 김 여사는 잡을 염두를 내지 못했다. 왠지 모르지만 그냥 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유한은 콧노래를 부르며 달려가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코엑스로 향하는 2호선이 오늘따라 사람이 붐볐다.

 '다들 놀러 가는 사람인가?'

 휴일에 나들이 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상당수가 같은 역에서 내렸다. 유한은 인파로 북적이는 코엑스 앞 광장에서 간신히 채린을 찾을 수 있었다.

 가을에 어울리는 산뜻한 차림을 한 채린은 유한을 보자 손을 흔들었다.

 "유한아!"

 "안녕, 채린아. 그런데 도대체 이 많은 인파는 뭐야?"

 평일에도 코엑스가 사람들로 붐비는 것은 맞지만, 이렇게 많지는 않았다.

 "너 몰랐어? 오늘 이곳에서 아르페디아 온라인 코스튬 페스티벌이 열려. 저들 중 반 이상은 거기에 참가하려고 온 사람들일 거야."

 "그, 그렇구나."

 혹시 데이트가 아닌가 해서 들떠 있었는데, 코스튬 관람이라니, 유한은 내심 김이 샜다. 마음속에 있는 바츠가 낄낄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크, 시간이 벌서 이렇게 되었네. 가자, 유한아."

 채린은 마치 누군가를 만나기로 한 듯, 유한의 손을 잡고 코엑스 안으로 들어갔다.

 종합무역센터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낯선 차림의 사람들이 많았다. 아니, 현실에서 보기 힘들 뿐 아르페디아 온라인에 가면 흔히 접할 수 있는 마법사와, 기사, 신관 등의 복장을 한 사람들이 건물 안을 누비고 다녔다.

 "시아야!"

 3층의 대형 전시실에 들어가자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람이 있었다.

 상인 복장을 하고 손수 만든 카트를 밀고 있는 미소녀.

 순간, 유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게임 속에서의 모습과 똑같아 그녀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리지스였던 것이다.

 "채린이, 너?"

 "오늘 지수가 코스튬 대회에 참가한다고 해서 말이야." 

 "지수?"

 "이지수. 그게 리지스 본명이야."

 채린과 리지스는 그동안 상당히 친해졌다.

 그래서 서로 전화번호도 주고받았고, 실제 전화도 몇 번 했다. 그 와중에 리지스가 코스튬 페스티벌에 참가한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응원 차 온 것이다.

 하지만, 혼자 오기는 뭐해 집에서 놀고(?) 있을 유한을 함께 데려왔다.

 '쳇, 그럼 그렇지.'

 유한이 크게 실망하고 있을 때 리지스, 아니 이지수가 다가왔다.

 "채린아, 와 줘서 고마워."

 "늦지 않았지?"

 "그럼, 아직 시간 남았어. 그런데, 여기는?"

 그제야 유한을 발견한 모양이다. 그런데, 유한은 게임에서의 모습이 아닌 때 빼고 광을 내놨는지라 선뜻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지그야, 지그. 본명은 강유한."

 "지그라고?"

 "그래. 내가 같이 오자고 했어."

 유한과 지수의 눈썹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제길. 이 망할 계집애 때문에!'

 '이 쓸데없는 부록은 뭐람?'

 유한은 데이트에 대한 기대가 깨진 게 리지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니면 채린이 다른 곳에 놀러 가자고 전화를 했을 지 모른다.

 한편으로 지수는 유한이 반갑지 않았다. 게임에서나 돈줄이나 현실에선 그렇지 않으니까.

 '흠, 제법 괜찮은걸?'

 그건 두 사람이 똑같이 생각한 점이었다.

 유한이 보기에 리지스보다 현실의 '지수'쪽이 인상이 부드러워 더 예뻐 보였다. 게임을 많이 해서 비리비리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팔과 가슴 근육이 발달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탐색하고 있는 사이, 채린은 지수의 코스튬 복장을 보며 연방 감탄했다.

 "그런데, 솜씨 좋다. 정말 게임에서 입던 옷 같아."

 유한이 보기에도 이건 아마추어의 솜씨가 아니었다. 채린의 칭찬에 지수는 얼굴이 밝아졌다.

 "호호호! 채린이 네 거도 있어." 

 "내 것도?"

 "만드는 김에 같이 만들어 봤어. 가자. 내가 입혀줄 테니까."

 지수는 채린을 전시회장 한편에 있는 간이 탈의실로 끌고 갔다. 채린은 좀 부끄러웠지만, 싫지는 않았기에 못 이기는 척 따라갔다.

 "그럼, 유한아. 좀 있다가 봐."

 졸지에 혼자가 되어 버린 유한은 멍한 얼굴로 로비에 서 있었다. 그런데 사람이 많아 도저히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이리 툭 저리 툭 채이기 일쑤였으니까.

 "뭐야? 눈 똑바로 뜨고 다녀!"

 "로비 중간에 멍청하게 서 있으면 어쩌자는 거예요?"

 유한은 결국 로비 한쪽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굉장히 낯익은 인간을 만날 수 있었다. 아니,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인간을 만났다고 해야 할까?

 "이게 누군가, 바츠 아냐?"

 한쪽 벽에 기대어 서 있던 덩치 우람한 녀석이 그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렸던 유한은 인상을 썼다.

 "누가 바츠냐? 지그라고 해. 그리고 난 너보다 한 살이 많아,"

 "흥, 겨우 한 살 정도로 재지 말라고."

 그는 바로 옌스였다. 리지스는 한눈에 못 알아보던데 이놈은 정말 눈썰미가 좋은 모양이다.

 "너도 코스튬에 참가하기 위해서 왔냐?"

 그러고 보니 옌스는 게임에서처럼 전사 복장을 하고 있었다. 봉인의 갑옷을 흉내 낸 통짜 갑옷을 입고 있었고, 등에는 스티로폼을 깎아 놓은 헤비 소드를 맸다.

 "이 몸은 비경쟁 부분에 신청했다. 그러는 넌?" 

 "난 그냥 구경삼아서,"

 유한은 몰랐지만 드림맥스에서 주최하는 이번 코스튬 페스티벌을 두 개 부분으로 나눠서 참가자를 받았다.

 경쟁 부분에는 주로 외모에 자신 있거나 손재주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참가했고, 비경쟁 부분은 개인보다는 단체로 참가를 신청한 사람들이 많았다.

 "너 사실은 여자 꼬시러 왔지?"

 유한의 허를 찌르는 질문에 이리저리 눈을 돌리기에 바빴던 옌스가 쿨럭 기침을 했다.

 "무, 무슨 소리냐? 바로 이 몸의 우람한 근육과 살인미소를 알리기 위해 참가했다."

 "그래, 여자 꼬시러 온 거 맞네."

 "컥! 이 자식이!"

 키 190m의 거구가 잡아먹을 듯이 인상을 썼지만, 유한은 왠지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녀석이 화를 내는 것을 은근히 즐기기까지 했다.

 "빠, 빨리 그 말을 취소해라!"

 "싫다."

 "뭐야? 이 자식이!"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였다.

 "어라, 저거 옌스 아니니?"

 "그러게. 이런 데서도 다 볼 줄이야."

 옷을 갈아입은 채린과 리지스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수많은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용케 유한을 잘 찾아냈다. 덤으로 옌스까지.

 리지스의 용모도 예쁘지만, 레인저 갑옷 세트를 착용하고 등에 활을 맨 채린의 모습은 마치 사냥의 여신을 보는 듯했다.

 "제길, 너 혼자 온 게 아니었군."

 "훗, 내가 넌 줄 아냐?"

 '부러운 자식!'

 미소녀를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끼고 놀다니!

 옌스는 부럽다 못해 배가 아파 죽을 것 같았다. 등에 매고 있는 헤비 소드가 진짜(?)라면 내리쳐 버렸을 텐데.

 "유한아, 나 어때?"

 채린이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유한은 그녀에게서 풍기는 싱그러운 향기에 한순간 정신을 놓을 뻔했다.

 "너, 너무 눈부셔서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아."

 입에서 절로 아부성 멘트가 흘러나왔다.

 "어휴. 낯간지러운 소리 하지 마."

 "컥!"

 채린이 주먹으로 유한의 등을 후려쳤다. 부끄러운지, 아니면 유한의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그녀의 얼굴은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데 옌스 너도 여기 참가하러 왔어?"

 "훗. 이 몸은 비경쟁 부분에 참가했는데, 누님들은?"

 "호호, 우린 경쟁 부분이야."

 "엉? 채린이 너도 참가하는 거야?" 

 유한이 놀라 물었다. 그냥 한번 옷을 입어 보는 거라 생각했는데, 언제 참가 신청서까지 냈는지.

 "지수가 미리 내 것도 신청했더라구."

 그들이 그렇게 웃고 즐길 때 갑자기 로비가 소란스러워지더니 사람의 물결이 좌악 갈라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웬 아저씨 부대가 등장했다.

 모두 용병 옷차림이었는데, 하나같이 인상이 험악하고 거칠어 보였다.

 "레드 타이거 용병대다!"

 "맞아, 길포드와 레드 타이거들이야!"

 그들을 알아본 몇이 소리를 질렀다. 짧은 감탄사를 뒤이어 궁시렁거림이 (본문에서는 구시렁거림이 라고 표기되었음.) 뒤따랐다.

 "나잇값 못하는 아저씨들이구나."

 "조용해, 인마. 실제로 조폭이라는 소문이 있어."

 "엥? 나는 군바리라고 들었는데?"

 "이거 페스티벌의 분위기만 험악해지는 거 아냐?"

 게임에서야 그저 한 사람의 유저들일 뿐이지만, 현실에서 보는 그들의 위압감은 직접 마주하기 쉽지 않앗다.

 특히 레드 타이거 용병대의 제일 앞에 서 있는 송태수, 곽대발, 표재훈 삼총사가 뿜어 내는 살기에 그저 사람을 눈빛만으로도 죽여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후훗, 애들이 우릴 보고 감탄하는 것 같지 않냐?" 

 "흐흐흐. 우리의 듬직한 모습을 보고 반한 애들이 한둘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옆에서 송태수와 곽대발의 대화를 듣고 있던 표재훈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인지.'

 이럴 시간이 있으면 2달 후에 있을 L.O.K 대회의 연습이나 더 하고 싶었다.

 "헉!"

 "악!"

 레드 타이거 용병대가 나타나자 유한과 채린은 얼른 옌스의 뒤에 숨었다.

 유한은 자신이 채린과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키면 송태수한테 맞아 죽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고, 채린은 아빠한테 도서관에 간다고 거짓말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야?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야?"

 "왜 숨는데?"

 어리둥절해 하는 두 사람을 향해 유한과 채린은 동시에 대답했다.

 "아, 아무것도 아냐! 잠시만 이대로 있어 줘!"

 (2)

 "자, 그럼 제 2회 아르페디아 온라인 코스튬 페스티벌을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

 사회자의 선언에 전시회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워낙 전시회장 안이 사람으로 가득 차서 한순간 떠나가는 줄 알았다.

 페스티벌은 먼저 비경쟁 부분부터 시작되었다.

 비경쟁 부분은 주로 팀 단위로 참가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저마다 올라와 개성을 뽐내고 내려갔다. 그 중 몇 팀은 즉석에서 퍼포먼스를 보여 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아르페디아 온라인 코스튬 페스티벌은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즐기는 유저들이 참가하는 대회로 게임 속의 캐릭터나 히어로를 흉내 내는 걸 모토로 삼았다.

 그렇게 비경쟁 부분이 모두 끝나고 경쟁 부분이 시작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아르페디아 온라인 코스튬 페스티벌의 백미로, 이를 촬영하기 위해 잡지사에서 기자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대망의 경쟁 부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자마자 관객석에서 조금 전과는 차원이 다른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유한은 한순간 귀가 마비되는 줄 알았다.

 "메이린! 메이린!"

 "우리의 호프 강인!"

 "벚꽃선녀 화이팅!"

 관객들은 저마다 친구의 이름과 닉네임을 부르며 선전을 부탁했다.

 "그럼 일 번 참가자..."

 잠시 후, 분위기가 가라앉자 사회자는 1번 참가자부터 소개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번호가 호명될 때마다 한 명씩 무대에 올라갔는데 하나같이 멋지거나 당당했고, 아름답거나 귀여웠다.

 리지스는 8번, 채린은 32번이었는데, 두 사람이 무대에 올라왔을 때, 많은 남성 관객들이 환호성을 질러 유한의 눈살이 찌푸러지게 만들었다.

 특히 채린이 등장했을 때는 함성이 더더욱 컸다.

 '채린이 저 녀석 왜 저렇게 예뻐진 거야?'

 전에 처음 만났을 때도 놀랐지만, 지금은 그때보다도 심장이 더 두근거리고 있었다.

 무대에 있는 채린이 자신이 있는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을 때는 정말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신은 채린에게 특별한 사람인 것이다.

 그것이 지금은 친구 정도일 뿐이지만...

 "이어서 삼십삼 번 참가자 바츠!"

 "하하핫! 내가 바로 드래곤 슬레이어 바츠다!"

 유한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사회자의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무대로 달려 나온 참가자는 바츠와 똑같은 레드 본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플레임 소드를 들고 있었다.

 정말 공을 들여 만든 듯한 코스튬,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유한은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 깡통을 집어던졌다.

 "사기 치지 마, 인마!"

 "새꺄, 니가 왜 바츠냐?"

 "너, 검은 초승달 길드의 두목 키라인 거 다 알아!"

 유한뿐만 아니라 '가짜 바츠'의 정체를 아는 사람들이 저마다 이유를 퍼부으며 물통이라든지, 과자 같은 것을 집어던졌다.

 어쌔신 키라, 실명은 박건우인 그의 평은 유저들에게 그리 좋지 않았다. 어쌔신이다 보니 암살 퀘스트를 도맡아 했고, 그 덕분에 그에게 죽은 유저들이 숱하게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들킬 줄이야."

 자신의 캐릭터 코스튬이 아니라도 상관은 없지만, 유명인 바츠를 빙자한 죄는 컸다.

 물론 그렇게 흥분하는 군중들은 자신들 속에 진짜 바츠가 있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3)

 모든 행사가 끝나고 일행은 로비에서 다시 만났다.

 채린과 지수는 선전을 했다. 비록 영광의 1등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입선을 해서 1년치 아르페디아 온라인 무료 이용권과 노트북을 상품으로 받은 것이다.

 1등은 벚꽃선녀, 2등은 지수, 그리고 채린은 5등을 했다.

 "제길! 내가 그 꼬마 걔집애한테 지다니!"

 지수는 분통을 터트렸다.

 벚꽃선녀는 이제 겨우 12살의 소녀였는데, 유한이 보기에도 상당히 귀엽고 깜찍하게 생긴 애였다.

 캐릭터는 마법사, 그러나 요술공주같은 차림에 즉석에서 타로 카드를 뿌리며 보인 귀여운 춤과 퍼포먼서는 남자 관객들은 물론 여자 관객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아 버렸다.

 "이건 뭔가 잘못됐어! 어떻게 그런 발육 부진 꼬맹이가 일 등을 하냐고!"

 리지스는 몰랐지만, 이번 심사위원들은 로리교(敎)로 대동단결하고 있었다.

 "그러게, 내가 보기에는 채린이가 가장 예뻤던 것 같은데."

 "뭐야? 그럼 내가 채린이보다 못하다는 거야?" 

 지수가 펄쩍 뛰며 따졌다.

 괜히 한마디 했다가 성난 벌통을 건드려 버린 유한은 난처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런 유한을 구헤 준 것은 채린이었다.

 "그런데 지수 넌 왜 그리 일 등에 집착하는 거야? 이 등도 좋은 결과잖아."

 2등만 해도 잘한 거였다. 오늘 경쟁 부문에 출전한 사람이 모두 100명도 넘었으니까, 게다가 모두 한 외모를 자랑했고, 정교한 코스튬,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 주었다.

 채린의 경우는 사전에 준비하지 않았던 탓에 퍼포먼스에서 많은 점수를 얻지 못했다. 그래도 5등이면 선전한 것이지만.

 "일 등 상품이 가장 비싸단 말이야."

 1등 상품은 시가 3백만 원 상당의 신형 캡슐이었다.

 "내다 팔기만 해도 이백 오십만원은 족히 받을 수 있는데..."

 역시 돈에 환장한 그녀였다.

 '대체 가정환경이 어떻기에?'

 유한이 내심 지수에 대해 혀를 찰 때였다. 그들을 스쳐 지나가는 한 무리의 사내들이 있었다. 그들도 오늘 코스튬을 구경하러 왔는지 저희들끼리 떠들고 있었다.

 "야! 팔 번 봤어? 엄청 섹시하게 생겼지 않냐?"

 "걔는 좀 말라서 별로였어. 난 그보다 삼십이 번이 더 예뻤던 것 같았어. 닉네임이 시아라고 하던가? 몸매 착한 글래머에 얼굴도 짱이더라."

 "아! 나도 그런 여친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게임은 물론이고 현실에서도..."

 갑자기 채린의 이야기가 나오자 유한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사내놈들이 채린에 대해서 주절거리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뭐 귀찮게 굴지 않으면 상관없지만, 이후에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크크 병신아. 아무나 그런 여친을 사귈 수 있을 것 같아? 적어도 여기 블라덱 님은 되어야지. 레벨은 몰라도 남자는 쩐이야, 쩐!"

 "제길, 나도 해킹 좀 해서 돈을 벌든가 해야..."

 "닥쳐, 이것들아.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미, 미안."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그들이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유한의 심장은 마치 폭발할 것처럼 쿵쾅쿵쾅거렸다.

 머릿속에서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블라덱!'

 어찌 그 이름을 잊을 수 있겠는가.

 알세인에게 바츠의 무기들을 판 녀석의 이름이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바츠의 계정을 해킹한 범인으로 유한이 지목하고 있는 녀석이었다.

 사내놈들 틈에서 그 녀석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아니, 이야기까지 한 것을 보면 블라덱 본인도 거기 끼여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기회가 아닌가.

 "유한아! 어딜 가는 거야?"

 채린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왜 유한이 갑자기 뒤돌아서 뛰어가는 것인지?

 "나 잠깐 다녀올 곳이 있어. 조금 있다가 전화할게!"

 유한은 좀 전의 그 녀석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렸다.

 그러나 워낙 사람들이 많아 좀처럼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거기다 누군가와 부딫치기까지 했다.

 "어이쿠!"

 "죄, 죄송합니다."

 유한은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었다. 뒤에서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지금 그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자, 잠깐만요!"

 유한이 소리를 질렀지만, 엘리베이터는 이미 문이 닫힌 뒤였다. 거기에 놈들이 타고 있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가자 유한은 계단으로 향했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래도 뛰고 또 뛰었다. 전력을 다해서.

 하지만, 결국 놈들을 놓치고 말았다.

 코엑스 1층과 지하를 모두 뒤져 보았지만, 좀 전에 본 놈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제길! 빌어먹을!"

 유한은 괜히 멀쩡한 벽을 주먹으로 때렸다.

 정말 가까이 다가왔다 사라진 단서였다. 해커 본인이었으면 절대 놓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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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봐. 석진이, 괜찮나?"

 정경욱의 물음에 손석진은 문제없다는 듯 싱긋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쯧쯧, 뭐가 급하다고 저러는지."

 정경욱은 저 멀리 사라지는 유한을 바라보며 끌끌 혀를 찼다.

 "뭔가 사정이 있겠죠. 그보다 오늘 사람이 정말 많군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가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그만큼 자네가 만든 게임이 재미있다는 이야기 아니겠나. 그러니 이번 패치도 자네가 잘 도와줘야 해. 그래야 유저들이 더욱 열광할 게 아닌가?"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면서 들었는데 게임에 해커가 돌아다닌다면서요?"

 "아, 그거?"

 정경욱은 몇 달 전에 있었던 바츠 해킹 사건을 설명해 주었다. 캐릭이 삭제되고 아이템이 모조리 털렸다는 걸. 그리고 그 범인으로 의심되는 녀석이 버젓이 아이템을 팔고 다닌다는 것을.

 "바로 조치를 하시지 그랬습니까?" 

 "물론 조치할 수도 있지. 하지만 잠시 지켜보기로 했어. 아주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거든."

 "재밌는 일이라고요?"

 "아, 지금은 비밀이야. 나중에 가르쳐 주지. 크크크!"

 그러면서 정경욱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자네가 묵을 곳은 회사에서 마련했어. 그러니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오랜만에 부사장과 만나 환담을 나누고 재미있게 축제도 구경한 손석진은 천천히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르페디아의 세계의 창조자가 지금 걸어가고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 누구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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