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남바린의 영주 >
(1)
"캬캬캬! 속이 다 후련하군."
모든 장비가 박살나고 실컷 얻어맞은 뒤 천옷 바람으로 도망치는 폴크스 일당을 바라보며 유한은 통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문제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지그야. 괜찮겠어?"
채린이 걱정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실력이 변변찮은 세 녀석이지만, 그들 뒤에는 푸른새벽 길드가 있지 않은가. 영지까지 보유한 강력한 길드가 이번 일을 그냥 넘길 리가 없다.
"훗, 걱정 마. 나 그 정도로 겁먹을 약한 캐릭은 아니니까."
유한이 바츠였을 때는 감히 누구도 그에게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그가 나타나면 먼저 물러나기 바빴다.
하지만 지금 그는 바츠가 아니라 대장장이 지그.
푸른새벽 길드에 맞서 싸우기에는 턱없이 약한 존재다.
그러나 그는 힘이 없다고, 상황이 불리하다고 미리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싸울 수 있는 데까지 싸워 봐야 하지 않겠는가?
유한의 다소 낙천적인 말에 채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래도 안심되는 건 아니었다.
'정말 괜찮을까? 아빠한테 도움을 청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대장간에 십여 명의 푸른새벽 길드원들이 찾아왔다.
전원 전투 계열의 유저였는데, 한바탕 전쟁이라도 할 듯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위협적인 그들의 모습에 대장간을 찾았던 유저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거나 로그아웃을 했다.
그들의 선두에는 유한에게 묵사발이 난 폴크스 일당이 있었다.
"저, 저놈입니다. 영주님!"
"네가 이 대장간의 주인인 지그라는 녀석이냐?"
화려한 갑주를 차려입은 기사가 앞으로 나왔다.
남바린의 영주로 보이는 그의 이름은 '케이지'.
금발에 제법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눈매가 가느고 입술이 얄팍한 것이 간사하게 생겼다.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날라리였지만, 유한은 녀석의 얼굴을 보고 두 눈을 치떴다.
'이, 이놈은!'
그는 케이지라는 놈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김필중.
바로 유한이 다녔던 학림 고등학교의 일진인 녀석으로, 이사장 손자 정현일의 오른팔이었다.
녀석은 유한이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게 만들기 위해 무던히도 괴롭혔었다. 틈만 나면 양아치들을 끌고 와서 때리고 차고 밟아 대곤 했다.
"뭘 꼬나봐? 네가 지그냐고 묻고 있잖아?"
겨우 1년 반이 좀 지났을 뿐인데 놈은 유한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유한은 놈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도 뼈에 사무치도록.
정말 이 순간만은 옌스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쉽게 잊어버리지만, 피해자는 가해자를 절대 못 잊으니까.
"귀머거리냐? 내 말 안 들려?"
"그러는 넌 눈이 멀었냐? 캐릭터 이름도 못 보고?"
유한의 반박에 김필중, 아니 케이지의 얼굴이 붉어졌다.
게임에선 항상 캐릭터의 머리 위에 이름이 떠 있었다.
현실에서 늘 하던 대로 건들거리다 한 방 먹은 셈이 되었다.
"흥, 건방진 놈. 무단으로 우리 영지에서 장사를 한 것으로도 모자라 감히 겁도 없이 우리 길드원을 두들겨 패? 거기다 영주인 날 비아냥거리기까지. 이거 간이 아주 탱탱하게 부었구먼."
유한은 일단 놈을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아는 척했다간 괜히 귀찮은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
"내 간이 부었는지 궁금하면 직접 와서 째 보시지. 네 모가지 위에 달린 장식을 관람비로 내놓은 다음에 말이야."
"이 자식이 계속!"
"지, 지그야."
유한의 비아냥에 뒤에 서 있던 채린이 그의 옷을 잡아 끌었다.
그가 싸우겠다면 도와줄 생각이었지만, 필요 이상으로 상대를 자극하는 것은 말리고 싶었다.
"괜찮아. 저런 놈들에게 쫄 필요는 없어."
저런 놈들의 심리는 유한이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급식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 정말 치가 떨릴 정도로 시달렸으니까.
저런 양아치 새끼들에게는 절대 약하게 나가서는 안 된다. 기를 살려 주면 사람을 벼랑 끝까지 몰아넣고 떠밀어 버린다.
그럴 바에는 처음부터 크게 치고 나가는 것이 좋았다.
강자에게는 한없이 빌빌대는 놈들이다. 상대가 강하게 보이면 섣불리 덤비지 못한다.
"흥! 대장장이 주제에 까불긴..."
"그래서 패거리 끌고 직접 납셨나? 영주씩이나 되는 분이?"
케이지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유한의 목을 날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어제 폴크스가 달려와 말한 것이 떠올랐다.
'그 지그란 녀석 조심해야 돼요. 몸놀림도 예사롭지 않고 무구를 한 번에 부수는 이상한 스킬을 쓴다고요.'
정체불명의 히든 스킬이 있는 대장장이.
대장장이 하나 잡으려다 비싼 무구라도 깨 먹으면 손해다. 되도록 말발로 눌러 버리는 게 이득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고로 좋은 거라고 하니까.
"뭐, 이 몸은 관대한 분이시니 어제 그 사소한 일은 문제 삼지 않도록 하지. 하지만, 당장 대장간 때려치우고 꺼지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싫다면?"
유한의 물음에 케이지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영원히 죽도록 만들어 주마."
여기서 죽으면 부활할 곳은 뻔하다. 가장 가까운 영지인 남바린과 대장간 중에 하나.
푸른새벽 길드원들을 두 곳에 배치해 놓고 부활할 때마다 죽여 줄 수 있었다.
'흐흐흐, 오랜만에 장난감이 하나 걸려들었군.'
케이지가 비릿한 미소를 지을 때 채린이 나섰다. 가만히 두고 보자 싶었는데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이봐요! 억지 부리지 말아요! 댁들 이러는 거 운영자가 알면 가만있을 줄 알아요?"
채린은 어제 아르페디아 공식 홈페이지에 들러 확인해 보았다. 정말 이곳이 남바린 영지에 속해 있는게 (본문에서는 있는가 라고 표기되었음.) 아닌가.
그랬더니 유한의 대장간은 남바린 영지의 외곽에 있었다.
"흥, 알 게 뭐야. 지금이라도 저 거지같은 대장간 밀어버리고 요새를 만들면 여기도 우리 땅이 되는 건데. 나중에 가서 일러도 소용없을걸."
거기다 현재 이 근방은 거의 푸른새벽 길드가 장악하고 있었다. 북동부 지역의 6개의 영지와 2개의 도시가 모두 그들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다.
그 결과 아바란 왕국 북동부에서 그들에 대항할 길드는 사라졌다.
"뭐 네가 내 애인이 되어 준다면야. 한 번쯤 봐줄 수 있지."
케이지는 음흉한 눈으로 채린을 슥 쓸어 보았다.
굳이 자신이 올 필요는 없지만, 일부러 부하들을 인솔해서 온 이유는 눈앞의 이 미소녀 때문이다.
어제 세 녀석에게 이야기는 들었지만, 진짜 얼짱에 몸매 착한 미소녀다. 기왕이면 현실에서도 애인을 삼고 싶을 정도로.
'이 개자식이!'
유한은 가슴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번에 제르스와 알덴이라는 놈들도 그랬지만, 채린에게 집적거리는 놈들은 정말 싫었다.
더구나 예전에 자신을 괴롭히던 놈이 채린에게 치근덕대고 있다는 걸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은 단지 소꿉동무라서가 아니라...
"시아야. 저런 녀석과는 말을 나눌 필요 없어. 근본부터 썩은 놈이니까."
대장장이지만 자신에겐 힘이 있었다.
암 브레이크라는 히든 스킬이 있고, 바츠 시절에 쌓아 놓은 전투 감각이 있다.
거기다 함께 싸워 주려는 친구가 있었다. 채린이 함께라면 깨지고 죽는다 해도 결코 후회가 될 것 같지 않았다.
"흥, 좋게 말로 하려니 안 되겠군."
케이지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전사들이 앞으로 걸어 나왔고 마법사들은 일제히 마법 주문을 외웠다.
(2)
"전부 동작 그만!"
일촉즉발의 상황.
고함을 지르며 장내에 난입하는 사람이 있었다. 우레와 같은 고함을 지른 그는 바로 옌스였다.
유한이 강해지기를 기다리며 인근 지역에서 레벨을 올리고 있던 그는 아주 적절한 순간에 등장했다.
녀석을 반갑지 않게 생각하는 유한도 이 순간은 천군만마를 만난 기분이었다.
"칼 좀 고치러 왔는데 웬 떨거지들이 이렇게 많아?"
옌스는 푸른새벽 길드원들을 노려보았다. 폼을 봐서는 '무기 고쳐 주세요'라고 찾아온 것 같진 않았다. 싸움을 걸려고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이것들이 감히! 내가 시식도 안 한 먹이에 손을 대려고 해?"
"넌 뭐야?"
케이지는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녀석을 짜증스럽게 바라보았다.
"나는 돌격왕 옌스다. 하찮은 네놈들이 이 몸을 알 리가 없지."
"뭐? 돌격바보 옌스라고?"
푸른새벽 길드원 몇 명이 옌스를 알아보았다.
옌스가 주변에서 일어난 길드전에 용병으로 몇 번 참전했기 때문인데, 조금 왜곡되어(?) 알려져 있었다.
"바츠와 첫 대결을 하는 것은 이 몸이시다. 그 전에는 한 놈도 바츠에게 손댈 수 없다!"
"바츠?"
해킹당해 사라진 캐릭터의 이름이 왜 나오는 것인가.
말하는 폼을 보니 대장장이 지그 녀석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는 듯한데 놈더러 바츠라니? 그렇다면 설마...
"훗! 뭐야. 이놈 완전히 미친 거 아냐?"
"캬캬캬. 아주 제대로 쳐 돌았네."
"아놔! 너님. 정신 줄 놓았나요?"
케이지를 비롯해 푸른새벽 길드원들은 옌스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드래곤 슬레이어 바츠를 저 대장장이와 착각을 하다니. 바츠에 미쳐 버린 나머지 헛것을 보는 것이 틀림없다.
"이놈들이!"
진실을 아는 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을 모독하는 놈들은 그냥 둘 수 없었다. 쪽수가 많건, 마법사가 섞여 있건 간에.
"야. 저 미친놈부터 묻어 버려."
케이지의 명령에 십여 명의 푸른새벽 길드원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전사나 기사들은 방패나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고, 마법사와 네크로맨서 계열은 뒤에서 마법으로 보조했다.
"으아아아-- 대쉬!"
그러나 이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이 미친(?)놈은 강했다.
갑자기 어깨가 눈앞에 확대되는 듯하더니, 선두에 섰던 기사 둘이 옌스의 대쉬에 맞아 하늘로 튕겨 났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들의 몸이 상체와 하체로 분리되었다.
단 한 방에 절명(絶命).
케이지의 입가에서 비웃음이 사라졌다.
-어? 대체 어찌 된?
-내 몸이 왜 두동강 났나요?
죽은 기사들은 어이가 없던지 부활할 생각도 못했다.
진짜 엄청난 일격이었다. 차징과 동시에 검을 날리지 않았다면 저런 묘기는 부릴 수 없다.
그렇다는 말은 눈앞의 이 돌격바보라는 녀석이 굉장한 고수라는 이야기인데?
"뭐해, 마법사들! 공격하라고!"
케이지의 지시에 이미 공격 마법을 시전해 놓았던 마법사들이 옌스에게 마법 공격을 집중시켰다.
"파이어볼!"
"아이스 스피어!"
옌스는 피할 틈도 없었는지 쏟아지는 마법 공격을 고스란히 허용했다. 마법사가 여러 명이다 보니 공격은 연달아 쉬지 않고 이어졌다.
"맙소사. 저러다 죽겠어!"
채린이 나서려는 데 유한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채린과 달리 그는 보다 유심해 옌스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기다려. 아직 괜찮은 것 같으니까."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저만한 마법 공격에 맞으면 아무리 랭커라도 밀릴 만도 한데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하하핫! 그걸 공격이라고 하는 거냐?"
옌스는 멀쩡했다. 몸이 그을리고 성에가 좀 끼긴 했지만 말이다.
그는 휠 슬래쉬를 펼쳐 하는로 떠오르더니 몸을 공처럼 말아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쏜살같이 마법사들에게 내려 꽂혔다.
"플라이 롤링 대쉬!"
유한과 엘프의 숲에서 싸움을 벌였을 때 썼던 기술이다. 그런데 회전 속도가 빨라진 걸 보니 위력이 한 차원 더 강해진 듯했다.
"피, 피해라!"
"으악!"
플라이 롤링 대쉬(본문에서는 플라잉 롤링 대쉬라고 표기되었음.)의 작렬에 네크로맨서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직접 타격을 받은 자들은 크리티컬을 입고 쓰러졌고, 직접 타격을 받지 않았지만 충격 영향권에 있었던 자들은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고, 고수다!"
피가 작게는 몇 십에서 크게는 몇 백이 닳은 이들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흐흐흐, 이제야 이 몸의 실력을 알겠나? 하지만 빌려고 해도 이미 늦었다!"
옌스는 의기양양해 소리쳤다.
뒤에서 모든것을 지켜본 케이지는 어이가 없었다.
비록 그가 데려온 부하들은 푸른새벽 길드에서 날고 기는 상위 랭커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영지를 책임질 만큼 강한 유저들이다.
그런데, 제대로 타격조차 입히지 못한 것이 아니가. 그리고 전사들은 몰라도 마법사들의 공격이 통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놈이 걸치고 있는 갑옷을 유심히 살펴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봉인의 갑옷?"
"저 레어 아이템이 어째서?"
봉인의 갑옷은 B급 최고의 방어구로, 착용자의 마법 방어력을 3배 상승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당연히 파이어볼이나 아이스 스피어 같은 하급 마법들이 통할 리 없었다.
"후후후. 남바린 던전을 열심히 돌다가 손에 넣은 거다. 드워프들이 마도사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갑옷이라더군."
"크윽!"
자신이 관리하는 던전에서 득템한 장비로 자신들을 공격한다고 하자 케이지는 복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뭐, 뭣들 하고 있어! 저 자식 얼른 죽여 버려!"
케이지의 명령에 넋을 놓은 채 멍하니 서 있던 기사들과 살아남은 마법사들이 서둘러 공격 스킬을 시전했다. 상대가 어떤 실력자인지 알았으니 이번엔 충분히 준비해서 대응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장내에는 옌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푸른새벽 길드에 엄청난 유감을 지니고 있는 유한도 있었고, 채린도 있었다.
"이 자식들이 감히 우릴 무시했겠다!"
유한은 옌스에게만 신경을 쓰는 푸른새벽 길드원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자 채린도 바람의 활을 꺼내 연방 파워샷을 남발했다.
15대 3.
숫자는 유한 측이 불리했지만, 옌스의 좌충우돌 돌격에 유한과 시아들이 참여하자 싸움은 급격하게 한쪽으로 기울고 말앗다.
'으, 으으!'
케이지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설마 자신이 데려온 공격대가 겨우 3명을 제압하지 못할 줄이야.
그는 뒤에서 지켜보다가 결국 고함을 질렀다.
"후, 후퇴하라! 후퇴해!"
그는 제일 앞장서서 도망을 쳤다.
"푸하하하. 도망치는 꼬라지 하고는!"
유한과 옌스는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는 푸른새벽 길드원들을 향해 맘껏 비웃어 주었다.
(3)
"그 때문에 푸른새벽 길드 놈들과 싸웠다는 거야?"
싸움이 끝난 다음, 옌스는 유한과 채린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호사다마라고 하더니, 옛말이 틀린 게 하나 없군."
"마가 껴도 아주 더럽게 끼었다니까."
"오늘은 무사히 넘어갔지만 앞으로가 문제야. 오른 당한 치욕을 갚기 위해 더 많은 길드원들을 앞세워 쳐들어 올 게 분명해."
채린의 말은 틀린 게 하나 없었다.
영주까지 직접 왔다가 망신을 당하고 쫓겨났는데 과연 얌전히 있을 길드가 몇이나 되겠는가? 뻔질나게 찾아와서 귀찮게 할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내일이라도 와서 근방에 요새를 짓고 자기네 땅이라 우기면 손을 쓸 수가 없어."
"흥. 그깟 허약해 빠진 녀석들이 깔짝대면 모조리 쓸어버리면 되지. 이 돌격왕 옌스 님이 나서면 모두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가 버릴걸?"
"그 허약해진 놈들이 이천 명이 넘게 오면?"
유한은 어제 폴크스 일당을 패 버리고 난 뒤에 푸른새벽 길드에 대해서 조사해 보았다.
홈피까지 만들어져 있었기에 자세한 규모를 알 수 있었다.
길드원의 총 수는 2,103명. 하지만, 동맹 길드와 보유 자금으로 동원할 수 있는 용병들까지 합친가면 전력은 3,000명까지 늘어난다.
3,000대 3. (본문에서는 3,000대 5라고 표기되었음.)
바츠가 되살아나지 않는 이상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아니, 놈들의 뒷배를 봐준다는 철십자 길드까지 나선다면 바츠가 되살아나도 어쩔 수 없을지 모른다.
'물론 싸우지 않을 방법은 있지만...'
이대로 대장간을 철거하고 다른곳으로 이사 가 버리면 싸우지 않아도 된다. 개망신을 당한 김필중이야 펄펄 뛰겠지만.
하지만 유한은 대장간을 포기하기 싫었다.
대장간이 위치한 곳은 입지 조건이 최적인데다가 경치도 빼어난 곳이다. 거기다 자신이 처음으로 세운 대장간이다. 이제 단골손님도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없었다.
"돈 많이 벌었다고 다른 가게 세우면 잘될 것 같지? 단골손님을 배신하면 그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어. 사업을 하는 사람이면 신의가 있어야지."
예전에 아버지 가게 일을 돕다가 들었던 이야기다.
유한네 행복 마트 앞에 잘 나가던 통닭집이 돈 좀 벌었다고 다른 동네에 큰 점포를 사서 나간 적이 있었다.
유한의 아버지는 통닭집 사장의 경솔한 행동을 비난했고, 얼마 후 이전한 통닭집은 근처에 개점한 프랜차이즈 업체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더라는 소문이 전해졌다.
이런 사례를 보고 들었던 유한은 대장간을 옮기고 싶지가 않았다. 물론 상황은 그 통닭집과 다르지만, 힘들게 이곳까지 찾아오는 유저들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 투자한 돈과 시간이 얼마인가.
대장간을 짓고, 장비를 들이고, 홍보를 하느라고 들인 공이 적지 않았다.
그런 노력들을 접고 이전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상대가 김필중이라는 걸 안 이상 절대 밀리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우리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해 보면 어떨까?"
채린이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레드 타이거 용병대.
무서운 극기도 사나이들의 집단으로 아르페디아 최고의 전투력을 자랑한다. 철십자 길드마저도 물 먹였을 정도니 따로 말을 해서 무엇 하겠는가.
"우리 아빠가 거기 대장이거든."
"아니! 폭풍의 길포드가 시아 아빠였어?"
옌스는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이미 알고 있던 유한은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채린이 내민 카드가 최고일지 모르지만, 유한은 그 카드를 쓸 수 없었다. 길포드, 아니 송태수가 자신이 채린과 함께 있는 것을 알면 푸른새벽 길드가 박살 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박살 날 게 뻔할 테니까.
그렇지 않아도 저번에 얼음 궁전에서 같이 방송 한번 탔다가 한 달 동안 죽는 줄 알았다.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아껴 두도록 하자. 웬만하면 우리들끼리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 보자고."
"왜? 간단한 방법을 두고서."
"어른한테 의지하고 싶지 않아."
사실은 송태수에게 맞기 싫을 뿐이다.
"어린애처럼 고집 부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채린의 말에 유한의 먼산바라기 하며 못 들은 척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옌스가 나섰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남바린 영주란 놈을 잡아다 족쳐 버리는 거야."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
채린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터무니없는 소리가 유한에겐 솔깃하게 들렸다.
"영주를 잡아다 족친다?"
"가능할 리가 없잖아. 영주가 머무는 성이면 경계도 철처할 텐데 말이야."
"그건 모를 일이야. 이쪽에서 먼저 공격할 줄은 생각지도 않을 테니까."
딸랑 3명이서 선공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할 것인가? 제대로 기습을 할 수 있다면 의외의 성과를 올릴 수 있을지 모른다. 거기다 이쪽엔 옌스라는 막강한 전력도 있지 않은가?
"해 보자. 직접 놈들의 본거지를 치는 거야."
"너무 무모해! 성공한다 해도 보복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잖아."
"아니, 우리가 기습만 성공해도 그걸로 놈들과 거래를 할 수 있어."
거대 길드인 만큼 평판에 신경 쓰기 마련.
특히 보안 문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거운 세금이야 악평을 듣고 끝나겠지만, 영주관에 적이 침투해 설치고 다녔다고 하면 개망신도 그런 개망신이 없다.
침투한 상대가 별 볼일 없다면 더더욱 체면과 자존심을 구기게 되는 것이다.
"영주관에 들어가서 스크린샷 한 장만 찍어도 우리의 승리라는 거지."
"그러니까 그걸로..."
"계속 딴지 걸면 이걸 확 인터넷에 뿌리겠다고 협박을 하는 거야. 그럼 제 놈도 별수 없을걸?"
실제 아까 싸움도 증거를 남겨 두었다면, 꽤 협박할 만한 자료가 될 뻔했다. 물론 그땐 생각을 못해서 그냥 넘어가고 말았지만.
"하지만 그런 것에 상관하지 않고 우릴 계속 괴롬히려 들 수도 있잖아."
"그렇다면 각서를 쓰게 만들면 돼. 이 게임엔 그와 관련된 전자 문서들이 있으니까."
리지스가 송코를 코 꿰어 버린 거래 계악서뿐만 아니라, 길드 간의 협정을 맺는 조약서나, 포고문 같은 것들고 있었다.
영주 놈을 잡아 놓고 '케이트 산맥은 남바린의 영역이 아님을 인정한다'는 식의 문서에 서명하도록 만들면 되는 것이다. 만약 약속을 어기면 영주 녀석이 패널티를 받게 될 것이다.
"만약 이래도 실패하면 채린이 네 뜻대로 할게."
"알았어. 그럼 지그 네가 말한 대로 먼저 해 보자."
"뭔 소리! 이 몸이 세운 작전이야! 이 몸만 믿고 맡기시라고!"
앉아서 당할 바에는 뭔가 해 봐야 한다. 최후의 카드를 꺼내 드는 것은 그 다음이었다.
(4)
'아놔! 이런 망신을 당하다니!'
영지로 돌아온 케이지는 쪽팔려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생각해 보라.
영주가 직접 공격대 15명이나 끌고 갔는데 겨우 대장장이, 궁수, 전사 세 명에 박살이 났다. 전사가 실력이 뛰어났다지만, 쪽수에서 앞섰던 이상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이 사실이 길드장에게 알려지면 안 되는데...'
푸른새벽 길드장이 자신의 무능을 듣기라도 하는 날엔 지부장 자리를 내놔야 할지도 모른다.
푸른새벽 길드의 지부장은 하나의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다.
영주로서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의 길드원을 거느리고 있는데, 자신의 영지에서는 거의 왕으로 군림한다.
그중에서도 남바린 영지는 몸 리젠이 빠른 사냥터 2곳과 고대 드워프의 던전이 있어 벌어들이는 수익이 많았다. 당연히 자신에게 떨어지는 떡고물도 많다.
그런 좋은 자리를 결코 잃을 수 없었다.
반드시 실수는 만회해야 한다.
"이봐! 애들은 다 모았어?"
케이지는 자신의 선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자신이 믿을 수 있는 길드원들만 불러 모아 괘씸한 대장장이 녀석을 응징하기로 한 것이다.
푸른새벽 길드 내에는 그와 절친한 유저가 약 100명 정도 되었다. 학교 선후배라든가, 거리에서 만난 녀석들이라든가.
케이지의 물음에 마법사 차림의 유저가 우물쭈물했다.
"이, 일단 쪽지는 다 보냈는데 다들 내일은 되어야 모일 수 있다고 해."
"좀 더 빨리 올 수 없는 거야?"
당장 오늘이라도 놈들을 응징하고 싶었다.
"그게 지금 타국에 있는 녀석들이 많아서..."
"제길! 그럼 모두 모이는 대로 나한테 연락해."
"알았어."
케이지는 부하에게 화를 내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답답하고 분한 기분을 풀고 싶었지만, 마음속에 써진 '망신'이라는 단어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제길. 감춰 둔 보물이나 감상하며 기분 전환이나 해야지."
그는 책장에서 가장 두꺼운 책을 반쯤 빼냈다. 그러나 책장이 슥 돌아가더니 비밀 통로가 열렸다.
케이지가 통로 안으로 들어가자 책장은 다시 원래대로 닫히고 빠져 있던 책도 원래대로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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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남바린 영지의 성벽으로 몰래 접근하는 인영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유한과 동료들이었다.
유한은 영주를 족치자고 결의한 바로 그날 밤에 행동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놈을 족칠 바에는 조금이라도 빠른 게 좋다고 생각했다.
"여기가 좋겠군."
보초가 없나 살펴본 유한은 곧장 성벽 위로 와이어를 날렸다.
와이어가 성가퀴에 잘 걸렸나 확인해 보고 왼 주먹을 움켜쥐어 성벽 위로 날아올랐다. 주변에 보초가 없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유한은 와이어를 떨어트려 채린과 옌스를 끌어올렸다.
"좋았어. 여기까지는 성공이군."
"쉿! 옌스, 너 목소리 낮춰."
세 사람은 인적이 드물고 그림자가 짙은 곳으로만 움직여 영주관에 도착했다.
3층 건물인 영주관은 드문드문 경비를 서는 NPC 병사만 보일 뿐 고요했다. 아마 밤이 깊어 모두 잠을 자고 있는 듯.
일행은 몰래 들어갈 수 있는 뒷문을 찾았지만, 거기엔 튼튼한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일행 중에 도적 유저가 있다면 금방 풀고 들어갔겠지만 셋 중에 도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변을 좀 살펴 줄래?"
유한은 채린과 옌스에게 경계를 맡기고, 주머니에서 관련 연장들을 끄집어냈다.
가느다란 끌과 송곳, 집게 등등... 모두 정밀 조립을 할 때 필요한 연장들이다.
유한은 그 연장들을 이용해 자물쇠를 분해해 버렸다.
어차피 자물쇠도 정밀 조립 스킬로 만드는 물건 아닌가.
끌과 집게로 고정 리벳을 뽑아 버리고 안에 있는 스프링과 경첩 장치들을 뜯어냈다.
그렇게 자물쇠가 해체되자 불쑥 안내창이 떠올랐다.
-자물쇠를 분해했습니다.
-스킬 경험치 30을 얻었습니다.
-복잡한 제품을 자주 분해하면 정밀 조립 스킬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솜씨가 1 올랐습니다.
'훗, 이런 식으로도 스킬 경험치를 주나?'
그저 조립하는 것과 반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해 본 것인데 의외의 성과였다.
아무튼 시간이 좀 걸렸지만, 그 사이에 경비는 오지 않았다. 덕분에 유한 일행은 뒷문으로 무사히 침투할 수 있었다.
"정말 대장장이는 별 걸 다 하는군."
"너도 전사 관두고 대장장이를 한번 해 보던가."
"싫어. 어떻게 키운 캐릭턴데."
"쉿! 누가 오고 있어."
채린의 말에 유한과 옌스는 바로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오른쪽 복도에서 걸오온 사람은 영주관의 NPC 시녀였다. 등불을 들고 걸어오던 그녀는 침입자가 있는 줄도 모르고 다가오다 채린에게 제압당했다.
순식간에 시녀의 뒤로 돌아가 목에 그라디우스를 겨눠 버리는 그녀의 실력에 유한과 옌스는 감탄가를 터트렸다.
"히익!"
"조용히! 소리 지르지 마. 묻는 말에만 대답해."
NPC는 유저와 달리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부활할 수가 없다. 당연히 유저보다 생존 본능이 투철하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영주는 지금 어디 있지?"
"이, 일 층 중앙의 큰방에 계십니다."
"고마워."
용건을 마친 채린은 손날로 시녀의 뒤통수를 때렸다.
시녀는 찍소리도 못하고 쓰러졌다.
"죽인 거야?"
"아냐, 죽였으면 내가 머더러가 되었게?"
"실력 좋은데? 과연 길포드의 딸답군."
'송건달의 딸이라 그럴 거다.'
영주의 거처를 확인한 그들은 바로 1층의 큰방을 습격했다.
"이 자식! 각오해라!"
방문을 쾅 부수고 들어간 옌스는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휑한 찬바람뿐.
"얼레? 아무도 없잖아?"
"그러게. 혹시 로그아웃해 버린 거 아냐?"
"그건 확인해 보면 알겠지."
유한은 채팅창을 이용했다. 비주얼 키보드로 '@케이지'라고 입력하고, '형 왔다'라고 간단히 입력해 보았다.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러나 유한은 확신할 수 있었다. 녀석이 로그아웃을 하지 않았다고.
만약 로그아웃을 했다면 귓속말을 보내도 '해당 인물을 찾을 수 없습니다'라는 안내문이 떴을 것이다.
"놈은 아직 접속하고 있어. 숨겨진 방 같은 게 있을지 모르니 찾아보자."
"그 전에 스크린샷 한 장 찍고."
적의 심장부에 들어온 기록은 남겨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조롱거리로 삼아 협상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세 사람은 조심스럽게 방 안을 뒤져 보았다. 비밀 통로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마음은 점점 초조해졌다. 이러다가 푸른새벽 길드원들이 들이닥치면?
그때는 싸우다 죽는 수밖에 없다.
"여기다! 여기가 분명해!"
옌스는 책장 아래를 가리켰다. 책장 아래 바닥에 책장이 돌아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런 잔상 효과까지 남기는 드림맥스의 그래픽 기술은 혀를 내두를 (본문에서는 두를 이라고 표기되었음.) 만했다.
"분명 이 뒤에 비밀 통로가 있을 거야."
옌스는 검을 빙글 돌리더니 책장을 내리쳤다. 책장이 박살나고 꽂혀 있던 책들이 사방에 흩어졌다. 그의 무식한 처사에 유한이나 채린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지만, 성과는 인정해야 했다.
정말 뒤에 비밀 통로가 있었으니까.
아마 놈은 이곳을 통해 어딘가로 이동했을 것이다.
"좋아. 들어가 보자!"
세 사람은 비밀 통로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계단을 통해 길이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한참 계단을 내려가니 복도가 나왔고, 복도 끝에 문이 있었는데 활짝 열려 있었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불이 켜지며 주위가 환해졌다.
커다란 대전에 20명가랸의 기사와 마법사들이 포징해 있었는데, 그들 중앙에 낯익은 금발이 서 있었다.
"푸하하하!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바로 남바린의 영주 케이지였다.
"뭐야? 우릴 기다린 거야?"
"후후후, 너희들은 감쪽같이 이곳에 잠입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이 남바린 성은 마법사들이 항상 수정을 통해 감시하고 있지. 즉 너희들의 침입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거다."
녀석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방 싱글벙글했다.
어쩐지 푸른새벽 길드원들이 보이지 않더라니, 연락을 받고 이곳에서 죄다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생각보다 별로 많지 않은걸?"
유한이 검을 뽑아 들며 말하자 옌스도 거들고 나섰다.
"흥! 잡것들을 모아 놔 봤자 이 몸에겐 소용없어."
낮에도 이와 비슷한 숫자를 격파한 적이 있었다. 비록 쉽진 않겠지만 옌스와 자신이 앞을 막고, 채린이 지원을 잘해 준다면 해 볼만 했다.
"큭, 알고 있다. 나는 바보가 아니니까."
캐이지는 자신의 옆에 있던 석상으로 향하더니 석상의 손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철컥! 그르르릉!
"어엇!"
기관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발밑이 허전해졌다. 유한 일행이 미처 어떻게 해 보기도 전에 몸이 아래로 쑥 꺼졌다.
아래를 보니 시커먼 어둠이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유한은 다급하게 위를 향해 와이어를 날렸지만, 불행하게도 걸리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크윽!"
"꺄아악!"
한참을 떨어진 유한과 동료들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충격으로 피가 많이 달았지만 그래도 죽지는 않았다.
"크윽! 모두 괜찮아?"
"응. 간신히 죽는 것은 면했어."
"제길.뭐 저런 비겁한 자식이 다 있어?"
옌스가 자신의 검을 주워 들고 투덜거릴 때, 위에서 케이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핫, 내 말이 들리나? 들리면 똑똑히 들어라. 거긴 너희같이 보물 창고로 들어온 쥐새끼들을 가두기 위해 대인들이 만든 함정이다."
비밀 통로 아래에 있던 대전은 남바린 성의 보물 창고였던 모양이다.
"거기 있으면 그걸 만든 게임사가 미워질 거다. 왜냐하면 거긴 걸대 빠져나갈 수 없는 곳이거든. 거점 부활이 먹히지 않는 아주 지랄 같은 곳이지."
"뭐라고?"
거점 부활이 안 되면 자살핻 탈출할 수 없다는 소리가 아닌다.
이런 곳에 사람을 빠트리다니, 나중에는 몰라도 지금은 게임사보다 케이지가 더 미웠다. 할 수만 있다면 상판대기에 메테오를 쳐박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럼, 그곳에서 영원히 잘 먹고 잘 살아라."
그 말을 끝으로 함정이 닫혔다. 순간 주위가 빛 한 점 없는 칠흑같은 암흑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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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저곳에 갇히면 빠져나갈 수 없어?"
입을 벌렸던 바닥이 닫히자, 케이지의 부하 마법사가 물었다.
유저들이 상대편 길드의 유저나 자신의 길드에서 죄를 지은 유저를 골탕 먹이기 위해 사사로이 감옥을 만든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폐가나 버려진 우물을 파서 만들거나 부활 포인트를 철창으로 둘러 버리는 정도였다. 영주관 밑에 이런 거창한 시설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개미지옥.
부활도 되지 않고 그렇다고 탈출할 수도 없는 감옥.
한 번 빠지면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다 하여 개미지옥이라 불린다. 그곳에 갇힌 유저는 캐릭터를 포기하거나 싹싹 빌고 구조를 요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글쎄, 설명이 그렇게 되어 있던데."
김필중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걸 안 것은 성을 점령하고 거처에서 비밀 통로를 발견했을 때였다. 성 아래 보물 창고를 뒤지다 우연히 석상을 건드려 숨겨진 함정을 가동시키자, '거점 부활이 안 되는 함정입니다'라는 안내문이 뜬 것이다.
하지만 실제 성는 시험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사람을 가둬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임사에서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뭐 그런가?"
"그래. 내일 정오까지 영주관 앞에 모이기로 했어. 근데 이제 와서 그건 소용없지 않아?"
놈들을 완전히 가둬 버렸는데 불러올 필요가 있을까?
그건 케이지도 알고 있었디만, 만약의 경우라는 걸 대비해야 했다.
"이놈의 게임이 워낙에 유저들 뒤통수를 잘 후려쳐서 말이야."
"하긴, 그런 경우가 많지."
그래서 케이지는 자신을 따르는 길드원들이 모이면 유한의 대장간을 박살 내러 가기로 했다. 지금 전력으로 달려가도 박살 내 놓을 수 있지만, 지하 감옥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저 녀석들이 탈출에 성공하기라도 하는 날엔 오늘 낮처럼 또 당할 수 있었다.
"하루 정도 지켜보자. 함정의 성능이 정말 설명대로인지 말이야."
그래서 그는 내일 정오까지 탈출의 유무를 확인해 보고 그 다음에 지그의 대장간을 없애 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급할 것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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