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푸른새벽 길드 >
(1)
드림맥스 본사 7층.
게임 관리실이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군사령부나 기상청의 대책 본부를 방불케 했다.
중앙에는 아르페디아 대륙의 3D 지도가 입체 영상으로 떠올라 있었고, 벽면과 허공에는 홀로그램 영상 화면들이 가득했다.
게임 관리실 직원들은 이곳에서 영상들을 체크하면서 게임 내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대륙 동쪽은 별다른 일이 없는데, 서쪽은 어때?"
"아직은 조용하지만, 나중엔 모르겠어. 요새 리저드맨들의 활동이 활발해. 마치 족쇄라도 풀린 것 같더군."
"일단 체크해 놔. 연계되는 시나리오가 있는지 조사해보고."
직원들은 몬스터의 움직임이나 국가의 동향, 심지어 날씨까지도 꼼꼼하게 체크했다. 그러나 이것은 개입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혹시 버그가 잇진 않은가 살피기 위함이었다.
버그가 없다면 유저가 길 가다 재수 없이 벼락을 맞아도 게임사에선 관여하지 않는다. 그런 현상 역시 게임의 일부로 치니까.
대신 게임 안에서 유저에게는 최대한 자유도를 보장한다는게 드림맥스의 원칙. 웬만한 분쟁이나 어려움은 유저들이 스스로 해결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내버려 두는 것만은 아니다. 요주의 대상자들이나 중요 관찰 대상자들에 대해서는 일 분 일 초도 감시와 관찰을 소홀히 하지않았다.
"허, 이 녀석이 또..."
엘프의 숲을 감시하던 직원의 입에서 너털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웃음에 주변에 있던 직원들이 죄다 몰려와 엘프의 숲이 비치는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마침 게임 관리실을 찾았던 정경욱 부사장이 다가와서 물었다.
"바츠, 아니 지그가 또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놈이 또 뭔 일을 저질렀는데?"
"엘프의 숲에서 일어나기로 되어 있던 '녹색의 난'을 저지했습니다."
녹색의 난은 엘프들이 봉기하면서 일어나는 시나리오다.
렌슬리라는 엘프 자경단원이 일족을 응집시켜 인간들을 몰아내고 반대파를 유폐한 뒤, 정령계의 통로를 완전 개방시켜 엘프의 숲을 정령계의 일부로 만들어 버리기로 되어 있었다.
정령계에 잠식되는 대지가 넓어지면, 이를 타개하여 대륙을 위기에서 구하는 것은 유저들의 몫. 이를 위한 퀘스트와 설정이 잔뜩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한 때문에 그 방대한 모험극은 없던 일로 되어 버렸다.
"끙, 손석진이 꽤 공을 들인 시나리오인데, 애석하게 되었군."
전 개발실장 손석진이 고생하며 작업하던 때를 생각하던 정 부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저지했을 뿐이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닙니다. 이번 일로 감금된 렌슬리가 누군가의 도움을 얻어 탈출하면 녹색의 난 시나리오는 언제든 발동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도움이 있다면 말이지. NPC들이 꺼내 주는 걸로 되어 있진 않을 텐데?"
"당장은 힘들고, 조만간 대규모 패치가 되면 가능해집니다."
"그렇겠지. 문제는 개발실 쪽에서 꾸물거리고 있으니!"
사표 쓸 각오를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진척은 만족할 만한 수준이 못 되었다.
모든 소스와 변수를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는 인사가 이탈한 타격이 만만찮았다. 작은 패치를 할 때는 모르지만, 대규모 패치를 하려고 하니 전 개발실장 손석진의 존재감이 그리 커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바츠, 아니 지그 저놈은 엘프의 숲에 왜 간 거지?"
"처음엔 여친 퀘스트를 도와주러 간 줄 알았습니다만..."
"아니, 바츠 여자 친구가 있어?"
이건 진짜 놀랄 이야기다. 독불장군 바츠가 여친이 있다니!
30년을 수도한 스님이 환속을 했다는 이야기랑 비슷하게 들렸다.
"하나도 아닙니다. 무려 둘입니다."
"허허, 그 자식 동자공(童子空) 수련을 때려 쳤나 보네."
"그러게 말입니다. 스물다섯 살까지 솔로면 메테오도 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모든 여자를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마법을 쓸 수 있는데..."
맞장구치며 주절거리던 노총각 직원은 정 부사장의 날카로워진 눈빛에 곧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아무튼 목적은 거기 엘프 대장장이에게 있었습니다. 숙련 무기나 레어 무기를 입수하는 흔하지 않은 NPC인데 이 NPC를 상대로 누군가를 찾는 듯했습니다."
"어, 그거 혹시 설마?"
"예... 아무래도 해커를 찾는 것 같았습니다."
게임을 접지 않고 다시 하고 있는 목적이 그것이었나?
뭐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게임을 어떻게 즐기든 그건 유저의 마음대로니까.
"그래서 이름은 들었대?"
"블라덱이라고 캐릭터 이름을 확인했습니다."
"정말 그놈 해커 맞나?"
"더 파 봐야 알겠지만, 수상한 녀석임은 분명합니다. 요주의 대상 리스트에도 올라와 있는 놈입니다. 레벨도 얼마 안 되는 녀석이 꽤 상급 아이템을 거래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중간 세탁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이는 아이템들로 말입니다."
직원은 관련 데이타가 기록된 홀로그램 영상을 정경욱에게 보여 주었다. 그 안에는 의심되는 내용들이 잔뜩 기록되어 있었다.
피싱 프로그램을 사용했든, 아님 정말 귀신같은 실력으로 회사 데이터를 건드렸든, 정말 해커라면 족치고 볼 일이다.
"해커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장물 거래가 의심된다 이건가? 거기다 현거래에도 손을 대는 듯하다?"
잠시 블라덱에 대한 데이터를 살펴보던 정경욱은 홀로그램 영상 상단의 X단추를 눌렀다.
"일단은 내버려 두자고. 우리 바츠, 아니 지그 군이 자력으로 어디까지 추적할 수 있을 지 궁금하니까."
이것 때문에 게임을 한다면 복수할 기회를 빼앗아서는 곤란하다. 운영자라면 유저가 재미있게 놀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법.
직원은 부사장의 결정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일개 직원이 부사장에 개길 수 없는 노릇인데다, 블라덱에 대해서는 좀 더 조사해 볼 것이 있었다.
<부사장님! 부사장님!>
갑자기 정경욱 앞에 홀로그램 영상이 하나 떠올랐다.
며칠간의 철야로 반쪽이된 개발실장의 기쁨에 찬 목소리에 정 부사장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응? 무슨 일인가? 패치 다 끝냈나?"
<그건 아니고... 전 개발실장님에게서 방금 연락이 왔습니다.>
"뭐! 손석진이 말인가?"
<예. 부사장님 안부를 묻겠다고...>
정경욱은 부랴부랴 화상 전화를 바꿨다. 홀로그램 영상에서 못생긴 개발실장의 얼굴이 지워진다 싶더니, 이번엔 안경을 낀 깔끔한 용모의 남자 모습이 떠올랐다.
20대 중반의 준수함 청년으로 보였지만, 그의 실제 나이는 30대 후반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부사장님. 그간 별고 없으시지요?>
"이야! 진짜 반갑다! 자네 지금 도대체 어디 잇는 거야?"
<뒤에 보이시는지 모르지만, 설악산입니다.>
"설악산?"
잘 살펴보니 과연 손석진의 등 뒤로 울산바위가 보였다.
"자네 해외에 있을 줄 알았는데?"
<얼마 전에 귀국해서 백두대간을 관광하고 있습니다.>
"연락 좀 하지 그랬어! 얼마나 자넬 찾았는지 알아?"
<차기 패치 때문이겠지요?>
사실 손석진도 그 때문에 연락을 했다. 얼마 후에 있을 대규모 패치에 대해서 정경욱에게 할 말이 있었기에.
<부사장님, 그 패치는 제가 알기로 이 년은 더 지난 후에 적용하기로 했던 것으로 압니다만?>
"원래 계획이야 그랬지. 하지만 사장님이 워낙 성화였던 데다가 우리도 되도록 빨리 본섭에 적용하고 싶어서..."
<전 이번 패치는 성급했다고 봅니다.>
손석진이 정 부사장의 말을 끊어 버렸다. 평소에는 매우 예의 바르고 점잖은 친구라 이런 경우는 없었지만 뭔가 불만이 있을 때는 이런 식으로 들이대곤 했다.
<부사장님도 아시잖습니까. 베타 서비스 때 적용되었던 데보라 던전의 비밀 보상방이 겨우 얼마 전에야 유저에게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패치는...>
"유저들이 못 따라갈 수 있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춰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손석진의 주장이었다. 지금도 유저가 개봉을 뜯기를 기다리는 시나리오가 많고, 숨겨진 던전과 미지의 필드도 아직 많았다.
"하지만 즐길 만한 요소가 무궁무진하면 그만큼 흥미를 더 끌 수 있지 않나. 더구나 자네도 알지만, 이번 패치는 회사서도 커다란 기대를 하고 있어."
계획 당시에도 사장을 비롯해 중역들은 꽤 솔깃한 반응을 보였다. 패치로 인해 회사가 막대한 돈을 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2년 후에 있을 패치를 앞당긴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자네가 우려하는 부분은 요새 영악한 유저들이 많아지면서 하나 둘 풀려 가고 있어. 메카 드래곤 사건은 들어 봤겠지?"
<예, 관련 유저를 직접 만나고 싶을 정도더군요.>
메카 드래곤 발동은 꽤 어려운 조건으로 맞춰 놓은 것이었다. 설마 그 시나리오를 발동시킬 유저가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럼 만나게 해 줄 수도 있어. 누군 줄 알면 자네도 굉장히 놀랄 거야."
<그렇습니까? 정말 만나게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손석진의 얼굴에 기대감이 떠올랐다.
"자네가 회사에 돌아온다면 말이지. 꽤 우리 게임을 좋아하는 유저니까 이쪽도 실 개발자와의 만남을 사양하진 않을 거야."
<하하하. 꼭 한번 만나고 싶군요. 좋습니다. 조만간에 서울로 돌아가겠습니다.>
"좀 빨리 올 순 없나? 개발실에서 자네의 귀환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네."
<역시 패치가 문제군요. 알겠습니다. 주변 정리를 끝마치는 대로 가겠습니다. 늦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 부사장은 그의 말이 영 미덥지 않았다.
손석진은 한번 시작한 일은 쉽게 관두지 않는 친구였다. 회사에서 일할 때도 뭔가를 마칠 때까지 절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문제는 그게 놀거나 쉬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조만간에 온다고 했지만, 다음번엔 지리산에서 연락을 할 지 모른다.
"빨리 오게. 백두대간이 좋다고 미적거리면 서울에서 좋은 구경거리도 못 볼걸?"
<좋은 구경거리요?>
"얼마 후에 아르페디아 온라인 코스튬 페스티벌이 있어. 늦으면 영계로 눈을 정화시킬 기회가 없을 거야."
<하하핫. 그럼 좀 더 서둘러야겠군요.>
"그럼 돌아와서 보자고."
<예. 그때 뵙겠습니다.>
두 사람의 통화는 거기까지였다.
홀로그램 영상이 꺼지자 정경욱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세계 여행 중이라더니 언제 또 국내에 들어와 있었던 것인지.
"아무튼 이걸로 한시름은 놓았군."
손석진만 돌아오면 차기 패치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의 귀환과 더불어 완성될 작품에 입을 떡 벌릴 유저들을 생각하니 정경욱은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2)
유한이 엘프의 숲에서 돌아온 지도 어언 보름이 지났다.
그는 골드러시 상인 연합에서 블라덱의 정보를 보내 주기를 기다리며 생산 스킬들을 올리고, 대장간 운영을 본격화하는데 주력했다.
발덴에서 데려온 대장장이 NPC들은 솜씨가 꽤 좋았다. 사실 그들이 수월하게 질 좋은 무구와 생활 도구들을 생산할 수 있었던 데는 초열탄법으로 생산한 새로운 철괴의 공이 컸다.
'황토 가루랑 송진 가루가 세 스푼. 짐승의 뼛가루 한 스푼...'
지금 유한은 대장간 한쪽에서 장인의 가루를 만들고 있었다.
장인의 가루는 역청탄과 함께 초열탄을 만드는 재료다. 각 원료들의 비율을 제대로 맞춰 혼합한 다음, 역청탄과 섞어야 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초열탄을 만들 수 있었다.
"좋아! 장인의 가루는 완성했고 다음은..."
유한은 역청탄 가루에 장인의 가루를 10대 1의 비율로 섞고 마지막으로 고래 기름 두 스푼을 넣어 둥그렇게 뭉쳤다.
그렇게 주먹만 한 크기의 새까만 초열탄이 만들어졌다.
완성한 초열탄을 고로에 넣자 불꽃이 거세게 타올랐다.
얼마 후 고로 안의 온도는 2천도를 넘어갔고, 새빨간 쇳물이 밖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드워프의 철))을 만들었습니다.
-스킬 경험치 100을 얻었습니다.
초열탄으로 만들어진 철괴들은 드워프의 철이라고 불렸다.
일반적인 철괴보다 더욱 순수하고 단단한 이 철로 무기나 도구를 만드니 품질이 월등한 것은 당연지사.
골드러시 상인 연합에서 역청탄을 공급해 주고 있고, 리지스가 장인의 가루를 만드는 재료들도 제때에 구해 주고 있기 때문에 제품의 품질이 떨어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걱정해야 할 거라곤 인지도뿐.
처음 대장간을 열었을 때에는 골드러시 상인 연합을 제외하고 찾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유한의 대장간이 인지도도 낮았고, 위치도 케이트 산맥 깊숙한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냥하다 들르는 유저들이 퍼트리는 입소문 덕분에 찾는 사람은 조금씩 늘어 갔다.
"이제야 장사가 되는 모양이네요."
"먼 곳까지 소문이 퍼졌으니까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거야."
송코의 말에 유한은 기분이 좋아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암, 그래야죠. 내가 초열탄 제조 비법을 얻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아바란 왕국은 길드전을 비롯해 분쟁이 빈번해서 유저들의 무구 소모가 다른 필드보다 몇 배는 빠르고 심한 지역이었다.
이 위험하고 혼란한 나라에서는 전투력이 약한 상인이나 장인의 활동이 여의치 않기에 다른 지역에 비해 아이템의 가격이 높게 책정되어 있었다.
비싼 것은 무구 역시 마찬가지인데, 몇 배로 비싸다 해도 무구들은 잘 팔려 나갔다. 영지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길드나 난세에서 용맹을 떨쳐 보려는 유저들이 항상 강하고 우수한 무구를 구입하려 애쓰고 있는 덕분이었다.
아바란의 유저들에겐 어디 가까운 곳에 우수한 장인이 있는지, 좋은 무기를 거래하는 상인이 어디로 돌아다니는지 조사하는 것은 필수였다.
그 유저들의 조사 목록에 유한의 대장간이 올라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물론 팔을 걷어붙이고 홍보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자, 여러분! 케이트 산맥에 대장간이 하나 새로 생겼는데, 거기에 가 보시지 않으렵니까?"
근처의 영지로 상행을 나온 리지스는 사람이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지그의 대장간을 홍보했다.
그녀의 돋보이는 미모가 유저들의 흥미를 자극했다.
"이것이 지그표 브레스트 아머! 어디 족보 없는 브레스트 아머에 비하면 무게도 훨씬 가볍고 방어력도 1.5배 더 높습니다!"
"오호!"
주변의 유저들이 리지스가 내놓은 무구들을 구경하러 다가왔다. 광채부터가 다른 대장장이들이 파는 무구들과 사뭇 차이가 났다.
"자, 이 칼을 보세요. 다들 잘 쓰시는 국민용 롱소드입니다. 같은 국민용이라지만 지그표 롱소드는 다릅니다!"
"헉! 뭔가 기분 나쁘게 생겼다."
지그표 롱소드의 검푸른 칼날을 본 유저들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씩 물러났다.
"뭔가 섬뜩하지 않아요? 이건 포이즌 롱소드라고 합니다. 일반 롱소드랑 달라요. 스쳐도 사망이라 이 말씀!"
포이즌 롱소드는 유한이 플레임 마운트에서 경험했던 것을 바탕으로 만든 무기로, 독초와 독버섯 같은 것을 우린 물에 식히고 단조한 검이었다.
"독 옵션을 달고 있다고 혹시 약한 건 아니냐? 천만에 만만에 말씀입니다. 이런 족보도 없는 롱소드보다 훨씬 강도가 뛰어납니다."
리지스가 상점용 롱소드를 포이즌 롱소드로 내리치자, 과연 상점용 롱소드는 뚝 부러져 나갔다.
"저거 가격만 착하면 길드원들을 무장시키기 좋겠는걸?"
"어디 있댔지? 케이트 산맥이라고 하던가?"
"당장 찾아가 보자고."
리지스의 선전을 본 유저들은 곧장 케이트 산맥으로 몰려갔다.
거대 길드들은 대부분 자체 무기 생산 공방이 따로 있어 길드원들에게 값싸고 질 좋은 무구들을 지급하지만, 그렇지 못한 중소 길드나 개인 유저들은 유한의 대장간을 찾았다.
포이즌이라는 쓸 만한 옵션이 달린 품질 좋은 무기에 방어력이 뛰어난 무구들.
직접 가서 대장간에 진열된 무구들을 본 유저들은 힘들게 걸음한 것이 조금도 헛되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만족했다.
더구나 가격까지 저렴하지 않은가.
이만한 수준의 무기는 일반 상점표 가격의 4~5배, 심지어 10배를 줘야 하는데 유한은 2~3배의 정도의 가격만 받았다.
가격을 낮출 수 있었던 것은 초열탄 덕분이었다. 제련이 5랭크인 유한은 원래 철괴를 1개 만들려면 철광석을 5개 넣어야 했지만, 이제는 3개만 넣고도 더 좋은 철괴를 얻을 수 있었다.
무구를 만드는 데 원료가 줄어들고 채굴하는 시간을 아낄 수 있으니 생산량도 늘어나고 그만큼 가격을 인하할 수 있었다.
거기다 남바린을 비롯해 주변 영지들의 무구 값이 비싼 것도 유한의 대장간이 유명해지게 만드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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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바린의 영주관.
영주의 집무실에서 유저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야. 이번 달 세금이 왜 이러냐?"
남바린의 영주이자 푸른새벽 길드의 지부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달 세금이 저번 달보다 무려 1/3로 줄어들었기 때문.
"그게, 우리 영지의 주력 산업인 대장간과 무기 공방의 수입이 급격히 줄어드는 바람에..."
재무 담당이었던 마법사의 말에 영주는 버럭 화를 냈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몰라? 우리가 철십자 길드에 내는 상납금만 해도 한 달에 무려 십만 골드가 넘는단 말이야!"
영지를 차지하기 위해 전력을 빌린 대가로 푸른새벽 길드는 철십자 길드에 매달 10만 골드의 거금을 상납금으로 바치고 있었다.
상납금은 길드가 소유한 각 영지들의 수입으로 마련하는데, 상납금의 할당을 채우지 못한 영지의 경우는 영주가 쫓겨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니 영주가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도데체 이유가 뭐야? 갑자기 무기가 안 팔리기 시작했다면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남바린 영지는 광렙을 할 수 있는 2개의 사냥터와 1개의 던전 덕분에 유저들의 발걸음이 많은 편이다. 영지에 선 이들을 대상으로 무구를 비싸게 팔아 짭짤하게 돈을 벌고 있었다.
"그, 그게 케이트 산맥에 새로 들어선 대장간 때문에..."
"뭐? 케이트 산맥에 대장간이 새로 들어섰어?"
그도 그럴 것이 남바린 점령 이후에 길드 수뇌들과 만난다. 그동안 못 가 본 던전에 가 본다. 여자 유저들 꼬신다 등등 이런저런 외유로 바빴기(?) 때문이다.
"그걸 왜 내버려 둔 거야!"
"구석진 곳에 위치에 있어서 장사가 잘 안 될 거라 생각했거든. 근데 거기 대장장이가 꽤 실력이 괜찮은 모양이더라고."
그러면서 마법사는 유한의 대장간에 대해 조사한 바를 설명했다. 어떤 식으로 장사를 해서 돈방석을 몇 개나 만들고 있는지.
"호오!"
감탄사를 발하는 영주의 눈이 빛을 발했다. 그것은 탐스러운 먹잇감을 (본문에서는 먹이감이라고 표기되었음.) 발견한 맹수의 눈과도 닮았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손을 써 둬야겠군."
그는 그 자리서 종이 하나를 꺼내더니 깃털 펜으로 뭔가를 휘갈겨 썼다. 그리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길드원에게 건네주었다.
"케이트 산맥에 대장간에 가서 이걸 전해. 그리고 만약..."
영주는 뒷말을 잇는 대신 주먹을 쥐어 보였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힘으로 해결하라는 뜻이었다.
(3)
"이봐, 여기가 지그 대장간이 맞아?"
오늘도 소문을 듣고 찾아온 듯한 유저 셋이 대장간 앞에 나타났다. 대장간 앞에 만든 가판대에서 상품을 정리하고 있던 채린이 그들을 맞았다.
"네. 어서 오세요. 무얼 찾으시나요?"
채린의 환한 미소에 세 사람은 잠시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니, 얼굴 한편에 발그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험! 우리는 여기 대장장이를 만나려고 왔소."
대표로 말한 사람은 큰 덩치의 전사였다.
"네. 무기를 주문 제작하실 모양이군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채린은 예전에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을 백분 발휘하여 그들을 안내했다.
"형, 저 여자애 저번에 TV에 나왔던 애 맞죠?"
"응. 분명 공중 요새 발견자라던..."
"실제로(?) 보니 엄청 예쁜데요."
수군거리던 세 사람은 왠지 뒤통수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돌아보니 가판대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던 손님들이 모두 자신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살 것은 없지만 채린을 보러 오는 유저들이 제법 있었다. 이 근방에서 보기 힘든 미소녀를 관람하는 즐거움을 앗아가 버렸으니 눈빛이 곱지 않을 수밖에.
"어, 리지스. 또 나가는 거니?"
마을 대장간 안에서 리지스가 나왔다.
그녀는 새로 산 드레스로 화려하게 단장하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카트에 무기를 가득 싣고서 상행을 나가려하고 있었다. 호위로는 송코를 대동하고서.
"응. 브로인에 갔다 올 거야. 물건도 팔고 가게도 봐 두려고."
"가게?"
"응. 거기다 무기점을 만들면 장사가 잘될 것 같아서."
브로인은 게임 내에서 3순위로 꼽히는 다크나이트 길드가 다스리고 있는 영지였다.
수많은 길드들의 침략을 물리친 이 영지는 아바란의 대표적인 철옹성으로 유명했고, 그 덕분에 치안이나 경제가 다른 영지들보다 안정되어 있었다.
리지스는 다크나이트 길드에 무기를 팔고 브로인 성 안에 가게를 만들 생각이었다. 떠돌아다니는 상행도 즐겁지만, 고정적인 수입원을 만드는 것도 상인에게는 중요했다.
아르페디아의 상권을 석권할 야망이 있는 그녀에게는 포석을 박는 것과도 같은 일. 이미 가게를 세울 만큼 충분히 돈을 모았다. 물론 그건 다 유한 덕분이다.
"그럼 조심하고 잘 갔다 와."
"응. 지그 녀석 농땡이 안 부리는가 잘 봐 줘."
세 사람은 리지스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생기 있는 채린의 미모도 대단했지만, 화사한 리지스의 미모도 만만찮았다.
대체 이 대장간은 무엇인가?
아무리 대장장이 실력이 좋다고 하지만, 툭 건드려도 쓰러질 것 같은 오두막 주제에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미소녀들이 둘이나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여기 들르는 유저들의 공통된 의문이었다.
그들이 리지스는 돈줄을 놓아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채린은 유한이 정밀 조립 스킬 7랭크까지 올릴 때까지 기다렸다 함께 공중 요새에 갈 생각이라는 걸 알 리 없었다.
그렇게 미소녀,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 나타나 물건을 홍보하고 팔자 대장간에는 여자 유저들보다 남자 유저들이 더 많이 드나들고 있었다.
'영주가 우릴 보낸 이유를 알겠군.'
'영주가 되고도 매번 여자 유저들한테 퇴짜를 맞더니만...'
세 사람이 영주에 대해 오해를 하거나 말거나, 채린은 그들을 대장간 안에서 무구를 수리하고 있던 유한에게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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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캉캉!
유한은 단지 무구를 만들어 파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전매특허인 무구 수리도 같이 하고 있었다.
유저들이 여기 외딴 대장간을 들르는 이유는 채린이나 리지스 때문이기도 했지만, 유한의 뛰어난 수리 실력 때문이기도 했다.
웬만한 것들은 뚝딱 잘 고쳐 주고, 내구가 많이 깎여 사망 일보 직전의 무구들까지 희생시켜 주니 먼 곳에 있어도 걸음을 옮겨 찾아오는 것이다.
덕분에 요즘 유한은 게임하는 시간의 반은 무구 수리에 할당하고 있었다.
-배틀 엑스를 수리하셨습니다. 새것이랑 다름없습니다.
-스킬 경험치 80을 얻었습니다.
-수리 스킬이 4랭크로 올랐습니다.
-솜씨가 3 올랐습니다.
-지식이 1 올랐습니다.
*B급 무구를 수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리 성공률이 65%가 되었습니다.
*솜씨를 계속 올리면 수리 성공률을 더 높일 수 있습니다.
"앗싸!"
유한이 주먹을 움켜쥐자, 배틀 엑스의 주인도 일어나서 만세를 불렀다.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애병이 부활했기 때문이다.
그레인 스킬을 익힌 뒤로 유한은 수리 성공률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무구의 상태가 매우 불량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고칠 수 있었다.
'한번 확인해 볼까?'
유한은 자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확인하기로 했다.
<상태창>
-이름: 지그
-칭호: 오우거헌터, 드워프의 조수, 공중 요새의 발견자, 레저드의 친구
-직업: 대장장이
-레벨: 88
-체력(HP): 611/610
-스테미나: 421/420
-마나(MP): 41/41
-힘: 85
-민첩성: 65+10(바람의 부츠)
-인내심: 70
-지식: 46
-행운: 60
-솜씨: 125
-명성: 3800
-공격력: 92+12(포이즌 세이버+와이어 건틀렛)
-방어력: 68+10(? 이거 잘 안보입니다.) (바람의 부츠+장인의 코트+와이어 건틀렛+동지의 목걸이)
-경험치: 1400/1800
-돈: 75,200골드
(습득 스킬)
-장작 패기 스킬 4랭크
-벌목 스킬 7랭크
-채굴 스킬 4랭크
-채석 스킬 6랭크
-제련 스킬 4랭크
-생산 스킬 4랭크
-합금 스킬 7랭크
-정밀 조립 스킬 8랭크
-수리 스킬 4랭크
-도발 스킬 9랭크
-수리 성공률 65%
(히든 스킬)
-그레인 스킬 4랭크
-암 브레이크 스킬 6랭크
미친 듯이 일을 할 때는 몰랐는데 지금 확인해 보니 스킬들이 많이 올랐다. 이제 합금이나 정밀 조립 스킬들만 좀 올리면 중급 대장장이를 넘어 상급 대장장이에 다다를 수 있을 듯.
"뭔가 좋은 일이 있나 봐?"
유한이 내심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언제 들어왔는지 채린이 옆에서 물었다.
"수리 스킬이 4랭크가 되었다는 말씀. 이제 B급 무구도 만질 수 있어."
"오! 축하해."
"그런데 스텟은 별로야. 그동안에 대장간에 너무 쳐박혀 있었나?"
레벨이나 스텟을 올리려면 사냥이나 던전 탐사가 최고였다.
"그럼 내일은 일을 쉬고 던전에 한번 가 볼래?"
"너도 많이 지겹지?"
"당연하지. 하루 종일 가판대에서 물건만 파는데 안 지겨웠을까 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채린은 생각보다 지겹다거나 답답하지 않았다. 늘어나는 일감과 주문 때문에 유한이 정밀 조립 스킬을 올리는 게 늦어져도 불만이 없었다.
파티 플레이를 하자고 친구들에게 쪽지가 온 적도 있었지만, 약속이 있다며 거절하기도 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냥 유한과는 얼굴 바라보고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다.
그저 어릴 때부터 친구라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좋아. 그럼 남바린 영지에 있는 던전에 가 볼까?"
"안 그래도 옌스가 거기 괜찮은 던전이라고 하더라. 드워프와 관련된 던전이라는데, 미로 같은 던전에서 흥미진진한 탐험을 하다가 대박 아이템을 하나 건졌다고 얼마나 자랑을 하던지..."
옌스는 유한이 머무는 주변 지역을 돌아다니며 레벨을 올리고 있었다. 던전에서 모험을 하거나, 길드전에 용병으로 참가하거나.
바츠가 강해지기를 기다리겠다는 것이 옌스의 계획이었지만, 요즘은 은근히 자신의 무구 수리를 부탁하기도 했다. 바트라면 이 정도는 고쳐야 한다 어쩐다 하면서.
"그런데 거기 세 사람은?"
잠시 동안이지만, 세 사람은 자신들이 투명인간이 되는 기분을 맛봤다.
커플(?)의 즐거운 대화에 이렇게 잔인하게 소외될 수 있다니. 새삼 필드 곳곳에 한 맺히게 꽂혀 있는 '커플 숙청'이라는 팻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것은 그것이고, 임무가 있으니 수행을 해야 했다.
대표로 나선 덩치 큰 전사 사내는 나름대로 멋지고 위엄 있어 보인다 싶은 말투로 말문을 열었다.
"험, 나는 남바린 영지의 사자 폴크스요."
"남바린에서?"
유한은 이들이 푸른새벽 길드원이라는 걸 알고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로 오셨수?"
남바린 영지에서 화려한 바가지를 써 봤기에, 이들을 맞는 유한의 태도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폴크스는 발끈했지만, 그 정도로 큰일을 망칠 수는 없었기에 꾹 참고 손에 들린 편지를 유한에게 건네주었다.
"남바린 영주님의 서찰이요. 그대에게 전하라 하셨소."
유한은 뭔가 싶어서 편지를 펼쳐 읽어 보았다.
내용은 간단했다. 지그의 대장간이 있는 장소가 남바린 영지의 땅이니 세금을 내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도 일주일에 무려 1만 골드씩.
"여긴 중립 지대로 알고 있는데?"
"처음에는 중립 지대였소. 하지만, 얼마 전에 우리 푸른새벽 길드가 영지의 경계를 넓히면서 우리 땅이 되었으니 세금을 내야 하오."
"순 억지잖아!"
한 달에 1만 골드는 너무 많았다.
아까 리지스가 떠나기 전 상점 어쩌고 이야기를 했는데, 상점이나 대장간의 세금은 많아도 한 달에 1,000골드 이상은 받지 않는다고 했다.
이건 분명 시비였다. 거기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만약 이곳이 정말 남바린 영지에 속하게 되었다면, 저녀석들이 찾아오기도 전에 유한에게 대장간의 소속을 알리는 메세지가 떴을 것이다.
"난 경계와 관련된 메시지를 받은 적 없어."
"뭐, 그대가 일하다 바빠서 지나쳤을지 모르지. 하여튼 이곳은 어제부로 우리 영지의 땅이 되었으니 세금을 내던가, 아님 당장 문을 닫고 떠나든가 하시오."
"둘 다 싫다면 어쩔 거냐?"
척 봐도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놈들을 보내 시비를 걸다니. 푸른새벽 길드에서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것 같았다.
유한이 검을 슥 빼어 들자 폴크스를 포함한 세 사내의 얼굴이 험악하게 찌푸려졌다. 점잖은 기색은 이제 표정에서도 말투에서도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다.
"이쪽에서 좋은 말로 할 때 따르는 게 좋을 텐데?"
"점잖게 대해 주니까 이거 안 되겠구먼!"
"죽고 싶어. 이 자식아!"
세 사내가 으르렁거리며 본색을 드러냈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배틀 엑스의 주인은 슬그머니 대장간을 빠져나갔다.
'이 사람들 시비 걸러 온 거구나.'
옆에서 지켜보던 채린의 얼굴이 굳어졌다.
손님인 줄 알았는데, 자릿세를 받으러 온 불한당이었다. 바닥에 침까지 찍찍 뱉는 모습이 혹시 진짜 깡패나 양아치는 아닌지?
채린은 유한을 바라보았다.
걱정되어 바라보았던 그의 얼굴이 아니나 다를까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화가 많이 났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험악한 표정과 달리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은 왜일까?
(4)
"좋은 말로 할 때 둘 중의 하나를 택해. 사람 성질 더럽게 만들지 말고."
"울 형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좋을걸?"
"너 이분이 누군지 모르지? 푸른새벽에서도 한참 뜨고 있는 샛별이시라고."
세 녀석은 안면 근육을 환상적으로 일그러트리며 유한을 위협했다.
그들의 목적은 유한에게서 세금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남바린 영지의 주요 소득원 중에 하나였던 무기 판매 시장을 빼앗아 간 괘씸한 대장장이 놈을 쫒아내는 게 목적이었다.
물론 순순히 나가려 하지 않을 테니 적당히 손을 봐 줄 생각이었다. 이 허름한 대장간도 그냥 박살 내 버리고.
"닥쳐. 당장 그 더러운 발 떼고 꺼져!"
"허. 얘가 진짜 사람 성의를 무시하네. 너 그러다가 죽는 수가 있다."
폴크스는 기도 안 차다는 듯 피식 웃었다.
대장장이 주제에 전사에게 덤비려 들다니, 어지간히 억울하다 생각하는 모양이다.
"흥. 꼭 별거 아닌 놈들이 죽인다고 악을 쓰지."
"뭐? 이 새끼가 자꾸!"
"죽여 봐. 멀찍이 떨어져서 죽인다고 하면 참 잘 죽겠다."
"이 새끼가 진짜 죽으려고 환장했나!"
전사 사내는 버럭 화를 내면서 허리에 차고 있던 투 핸드 엑스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나 녀석의 행동은 너무 성급했다. 도끼를 내리치는 것보다 유한이 들고 있는 포이즌 세이버가 찔러 드는 것이 더 빨랐다.
"어, 어, 어!"
섬뜩하게 목을 노르고 들어오는 칼날에 놀란 폴크스는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나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자신이 대장장이가 휘두른 검에 놀라 쓰러질 줄이야. 그것도 미소녀가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말이다.
폴크스는 부끄러움을 유한에 대한 분노로 덮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님, 괜찮습니까?"
"나서지 마! 저 새끼 골통은 내가 부술 거니까!"
달려온 부하들의 손을 뿌리친 폴크스는 무섭게 유한에게 달려가며 투 핸드 엑스를 휘둘렀다.
'흥, 깊이 베기인가?'
자세는 검으로 하는 깊이 베기와 반대지만, 발을 내딛는 첫 동작이나 휘두르는 폼을 보면 깊이 베기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속도는 굼떴고, 뻔히 보이는 공격 패턴이다.
이 녀석보다 훨씬 강한 몬스터나 유저들과 싸워 봤던 유한은 한숨이 다 나올 정도였다.
폴크스의 도끼는 아래에서 위로 커다란 호를 그리며 휘둘러졌다. 뒤로 점프하며 물러섰던 유한은 몸을 튕기듯 날리며, 폴크스가 입고 있는 갑옷을 후려쳤다.
"암 브레이크!"
"헉!"
단 일격에 판금 갑옷이 순식간에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유한의 암 브레이크는 자세 보기를 익힌 뒤로 한층 더 강해져 있었다.
빠각!
놀라 물러서는 폴크스의 머리 위로, 유한이 날린 제2타가 날아들었다. 머리가 욱신한 느낌보다 투구가 일격에 박살 났다는 충격이 폴크스의 정신을 더 아득한 곳으로 떨어트렸다.
어떻게 돈을 모아 샀던 투구였던가.
먹을 거 안 먹고 사고 싶은 거 안 사 가면서 모은 돈으로 구입한 장비였다. 그런데 그걸 한 방에 박살 내다니!
"몸에 걸친 것은 몽땅 다 부셔 줄 테니까 각오해라!"
"으아아아!"
폴크스는 당황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아직 HP는 온전했지만, 피 같은 골드를 들여 산 무구가 대장장이의 공격에 박살이 나고 있었다.
"형님!"
"막아! 저 새끼 막으라고!"
자세한 정황은 모르지만, 어쨌든 충성심 깊은 부하들은 그의 명을 충실히 이행했다.
유한은 멈칫하며 자세를 바꿨다. 일대일은 몰라도 전사둘을 상대로는 주의를 하며 싸워야 했다.
하지만 그의 짐을 채린이 덮어 주었다. 달려가는 두 녀석 중 하나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린 것이다.
"이, 이게! 비겁하게!"
"둘이 하나한테 덤비는 게 더 비겁하잖아!"
채린에게 걸려 엎어진 녀석은 바로 일어나서 칼을 치켜들었다.
상대가 예쁘고 늘씬한 여자애라는 사실은 이 순간 안중에도 없었다. 더구나 상대가 궁수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채린이 벼락같이 활을 꺼내 쏠 때까지는.
"파워샷!"
"으악!"
근거리에서 파워샷을 맞은 녀석은 복부에 화살이 꽂힌채로 반대편 벽까지 날아갔다. 즉사하진 않았지만, 벽에 장식처럼 박혀 버린 녀석은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사이 유한에게 덤볐던 녀석은 폴크스와 마찬가지로 검과 방패가 암 브레이커에 박살 났다. 무기와 방어구를 잃은 녀석은 허둥거리며 도망치려다 채린이 날린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형님! 같이 가요!"
녀석은 화살 맞은 다리를 질질 끌며 애원했지만, 자신을 희생시킨 형님은 거의 굴러가듯 달아나고 있었다.
"이 자식! 곱게 튀게 내버려 둘 줄 알아!"
"켁!"
유한이 날린 와이어가 폴크스의 목을 휘감았다. 그는 버둥거리는 폴크스를 질질 끌어당겼다.
"뭐야? 월척이네."
"시비 걸러 왔다 꼬라지 좋구먼."
대장간에 왔던 유저들은 이미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형편없이 망가진 세 사람을 보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 이봐. 이러지 말고 우리 되도록 말로..."
"감정을 상했다면 차라리 우릴 죽여 줘."
제발 피와 살이나 다름없는 장비만은 놓아두기를.
그것이 세 녀석의 소원이었지만, 한번 검을 뽑아 든 유한은 가차 없었다.
"암 브레이크! 암 브레이크! 암 브레이크!"
유한은 연속적으로 암 브레이크를 사용해 세 녀석의 무구를 모조리 깨 버렸다. 칼질에 HP가 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세 녀석은 암 브레이크가 떨어질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도대체 이건 무슨 스킬인가? 기껏 대장장이의 칼질 한번에 자신들의 무구는 왜 박살 나고 있는가?
설마 무구가 불량? 그건 아닐 것이다. 몇 번이고 확인을 했으니까. 어쩌다 상황이 이 지경으로 되어 버렸을까?
장비가 모두 박살 날 때까지, 세 녀석은 아무런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씩씩거리던 유한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이번엔 몽둥이를 들고 왔다.
"장비는 박살났는데 HP는 멀쩡하면 억울하지, 안 그래?"
"안 억울해! 아니, 안 억울합니다!"
부정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도망을 치려 했지만, 채린이 활을 들고 입구를 딱 막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천사처럼 보이던 소녀가 지옥의 마녀처럼 보였다.
이판사판인 상황에서 어떻게든 반항하려 했지만, 빈손에 장비 하나 걸치지 않은 상황에서 폭풍처럼 쳐맞는 것말고 할 수 있는게 없었다.
퍽! 퍼퍼퍽!
"아악! 항복!"
"그, 그만 때려!"
아주 급소만을 노려서 치는 유한의 주도면밀한 모습이 채린에게는 조금 섬뜩해 보였다. 뭐 맞을 짓을 한 놈들이니, 터지는 건 당연했지만 말이다.
< 4. 푸른새벽 길드 >>>
(이제부터는 챕터가 다 기네요. 그래도 쓸맛이 나니까 우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