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단골의 정체 (36/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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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녀님은 이미 오래전에 정령의 모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키르케는 아르네스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누구보다 정령과 친했던 존재였기에 그 영혼이 저승으로 가지 않고 정령계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고.

 그랬기에 만 년이나 시간이 지났지만 유한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단다.

 "사실 나는 당신이나 아르네스 님의 결정이 탐탁치 않습니다. 자칫 엄청난 대란이 대륙을 혼란으로 몰아넣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잠자코 있었던 이유가 뭐죠?"

 "인간은 앞뒤를 가리지 않는 행동이 경솔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동적이니까요."

 생각이 많으면 전진하기가 어려워진다.

 엘프들에겐 자연과 세계에 대해 깊은 철학이 있지만, 그것이 그들을 정체시키고 말았다.

 엘프는 나무 하나를 자르는 데도 많은 생각을 한다. 오늘 이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내일은 숲을 개간해 농지를 만들어 배불리 살겠다는 인간에게 행동력에서 뒤질 수밖에 없었다.

 "그 역동성이 수차례 대륙을 구했습니다. 자기들끼리 싸움을 벌이고 대립하곤 하지만, 그렇게 싸우고 경쟁하면서 발전을 해 나고 있지요."

 유한을 비롯해 모두들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키르케가 일행이 눈앞에 있다고 인간에게 금칠을 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인정할 것이 분명 있기에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다.

 인간의 역동성.

 그것은 게임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랬다.

 21세기 초에 온난화 때문에 지구가 멸망할 거라는 둥, 대한민국 경제가 파탄날 거라는 둥 떠들어 댔지만, 유한 세대에도 지구는 멀쩡하고 대한민국은 선진국 대열에 진입해 잘사는 나라로 손꼽히고 있다.

 위기 상황에서 인간은 재빨리 대응책을 내놓고, 기술을 발전시키고 변화를 모색해 왔다. 혼란과 잡음이 끊이질 않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길을 찾고 전진해 나갔다.

 그 결과 생존은 물론이요, 화성에 유인 탐사선을 보내고 달에 정착 기지를 건설하는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옛날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핵전쟁 이후 야만과 폭력이 지배하고, 바이러스에 오염된 좀비들이 걸어 다니는 세상은 그저 만화나 영화 속에나 존재했다.

 "그래서 요즘은 우리도 인간에 대해서 알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역으로 숲을 찾아온 인간들도 엘프의 문화나 사상을 배워 가고 있지요."

 제약은 있지만 엘프의 숲이 개방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인 모양이다.

 물론 설정은 전지전능한 제작자가 세워 놓았겠지만, 단순히 선남선녀 엘프들과 노닐어 보라고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닐 것이다.

 "자, 볼일도 끝났으니 이제 원래 세계로 돌아가도록 하지요."

 유한 일행은 키르케의 안내를 받아 정령계를 빠져나왔다. 

 마을로 돌아가기 전에 일행은 채린의 안내를 받아 세계수 위에 올라가 경치를 구경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과 그 아래에 펼져진 나무의 바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수해(樹海)는 마치 녹색 비단폭을 펼쳐 놓은 것 같았다.

 모두가 광활한 대자연의 풍경을 감상하는 사이, 리지스는 키르케의 호의로 세계수의 잎을 얻었다. 잎사귀를 지폐처럼 헤아리는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깃들었다.

 '이걸 시장에 내다 팔면...'

 족히 수만 골드는 벌 수 있으리라!

 리지스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자, 이제 엘프 대장장이를 꼬시는 일만 남았군."

 유한의 다음 목표는 알세인이었다.

 알세인과 친밀도를 높여서 그의 단골, 그러니까 해커로 의심되는 자의 이름을 알아내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엔...

 "나와의 대결도 잊지 마라, 바츠."

 옌스가 끼어들었지만, 유한은 녀석과 칼을 맞댈 생각이 없었다. 실력 차리는 둘째 치고 이런 벽창호를 상대하기 싫었으니까.

 "..."

 "자꾸 무시할 거냐?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다!"

 옌스의 언성이 다소 거칠어지자, 유한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뭐 때문에 자꾸 날 바츠라 말하는지 모르겠군."

 "그건 바로 네가..."

 "세상엔 비슷한 사람도 많아!"

 나는 네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유한은 그런 의미로 딱 잘라서 이야기했지만 옌스는 전혀 믿어 주지 않았다.

 "제길! 좋아. 정 그렇게 싸우고 싶다면 받아 주지. 하지만 지금은 아냐."

 "어째서냐?"

 "나는 생산직인데다가 레벨도 이제 중렙이라 만족할 만한 실력을 보일 수 없어. 너도 전력을 다할 상대를 맞아서 싸워 이기고 싶겠지?"

 유한의 말에 옌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장이가 된 바츠를 때려눕혀 봤자 자랑이 되지 않을 것이다. 믿어 줄 사람도 없고, 오히려 기분만 비참해질지 모른다.

 "네가 강해질 때까지 기다려 달라 이거군."

 "날 바츠라고 생각한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안 그래?"

 "그렇군."

 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장이가 강해져 봤자 얼마나 강해지겠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옌스는 믿었다. 조만간 유한이 예전의 바츠만큼 강해질 것이라고.

 바츠니까, 이 녀석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츠 유저니까.

 "지금의 상황을 넘겨 보려는 비겁한 변명이 아니길 기대하겠다."

 "강해지면 붙어 줄 테니까 염려 마. 그리고 어차피 넌 지금 싸울 수도 없잖아."

 "내가 싸울 수 없다니?"

 옌스가 의아해 하며 묻자 유한은 그가 들고 있는 해비 소드를 가리켰다.

 헤비 소드에 포포가 매달려서 칼날을 갉아먹고 있었다.

 언제부터 매달려 갉아먹었는지, 검은 마치 쥐에게 파먹힌 치즈처럼 되어 있었다.

 "으악! 뭐야, 이 괴상한 몬스터는?"

 옌스는 혼비백산했다. 새로 구한 검이 또 엉망이 되다니.

 "훗, 불가사리 괴생물체도 쓸 만할 때가 있군."

 유한은 새삼 포포의 정체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몬스터이기에 쇠를 먹는지, 그리고 바람의 무녀는 왜 녀석을 작지만 위대한 존재라고 지칭했는지.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문득 스쳐 가는 것도 있긴 했지만, 가능성이 그리 높아 보이진 않았다.

 '뭐, 저놈에 관한 건 나중에 알아봐야겠군.'

 괜히 이런거 저런거 생각해 보려니 머리만 더 피곤해지는 것 같았다. 더구나 배도 많이 고프고.

 그러고 보니 지금은 현실 시간으로 저녁때였다.

 "잠깐 두 시간 정도 쉬고 재접속하는 건 어떨까?"

 "그러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랬으니까."

 "도망갈 수작이면 용서치 않겠다, 바츠!"

 2시간 후에 만나기로 하고 네 사람은 사이좋게 로그아웃을 했다. 내일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선 잠시 쉬어 갈 필요도 있었다.

 (2)

 얼마 후 재접속한 일행은 곧장 알테나의 잡화점으로 향했다.

 그런데 잡화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잡화점 앞에서 엘프 대장장이 알세인과 자경단원 렌슬리가 다투고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야?"

 "뭐? 네가 방금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거냐?"

 "그만둬, 렌슬리! 왜 갑자기 동생한테 시비를 거는 거야?"

 알테나가 말리려 했지만, 렌슬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까지 비난을 퍼부었다.

 "너도 마찬가지야! 위대한 바람의 무녀의 피를 이은 네가 한다는 일이 고작 인간들처럼 장사 일이야? 네가 이 모양이니까 네 동생도 그런 멍청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니냐고!"

 "뭐야? 이 자식이?"

 알세인이 열 받아서 나서려 하자 렌슬리도 마주 외쳤다.

 "그래, 덤벼 봐! 덤벼 보시라고!"

 소란이 커지자 주변의 엘프들과 유저들이 잡화점 주위로 몰려들었다. 소식을 들은 장로도 한걸음에 달려왔다.

 엘프들 간의 분쟁은 매우 드문, 아니 거의 처음 있는 경우라 유저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그야, 지금 무슨 상황인 거야?"

 "돌발 이벤트인가?"

 "글쎄, 좀 더 지켜보는 게 좋겠는걸."

 렌슬리는 불만이 많은 엘프.

 인간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지 않고 나설 수는 없었다.

 "이보게, 렌슬리. 도대체 왜 이러는 건가?"

 장로의 만류에 렌슬리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가 왜 그러냐고요? 화살촉이라도 좀 얻을까 해서 이 시끄러운 곳에 왔는데 저 멍청이가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더군요."

 "아니 알세인이 대체 무슨 말을 했다고?"

 "드워프의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그러더군요."

 "드워프의?"

 주변의 엘프들이 수군거렸다. 엘프와 드워프는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렌슬리는 잠시 엘프들의 반응을 살피디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드워프가 어떤 놈들입니까? 성스러운 대지를 파헤치고 나무를 잘라 불태우는 놈들이 아닙니까? 기거다 거칠고 식탐이 심한 주정뱅이 족속입니다."

 단순한 시각으로 봤을 때 드워프가 그리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드워프가 땅을 파고 나무를 잘라 불태우는 것은 그들이 필요한 광물을 얻기 위함이고, 거칠고 먹는 걸 좋아하고 술을 즐기는 것은 그들의 작업이 고되기 때문이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엘프들은 대부분 그런 사실을 몰랐고, 설령 안다고 해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저열한 야만족을 동경하다니...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다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렌슬리의 말에 몇몇 엘프들이 동조하듯 불만의 말을 쏟아 냈다.

 "미친 거 아냐?"

 "그러게. 매일 시끄럽게 망치질을 하더니만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군."

 다행히 장로는 중립적인 위치에 서서 렌슬리를 설득했다.

 "그건 렌슬리가 대장장이니까 그런 게야. 자네도 강한 전사에 대한 동경은 있을 게 아닌가?"

 "장로님 말씀은 맞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전사라 해도 트롤이나 오우거를 동경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비교 대상이 잘못된 것 같은데...'

 유한이 그리 생각하거나 말거나 렌슬리는 지가 하고 싶은 말을 계속 떠벌려 나갔다.

 "저는 장로님이 왜 알세인을 내버려 두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의 대장간에 대해서 불만인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저 인간에게 득이 될 뿐인 시끄러운 곳이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그런 것 없이도 우리 숲의 백성들은 풍요롭게 잘 살아왔습니다."

 보다 못한 몇몇 유저들이 언성을 높였다.

 "야, 인마! 네가 차고 있는 검은 뭐야? 너도 화살촉 얻으러 대장간에 왔다면서?"

 "완전히 이 뭐 병한 NPC구먼!"

 유저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렌슬리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래, 인간들아. 솔직히 알세인이 만드는 무기나 도구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그의 누이가 너희들에게 들여온 여러 가지 물건이 우릴 편하게 해 준 것 역시 부정할 수 없지."

 "그걸 아는 새끼가 왜 비난을 해?"

 "쇠로 된 무기와 도구, 그리도 알량한 상품들. 편하다는 이유로 들여온 인간의 물건들 때문에 우리 엘프들의 근본이 흐려지고 있단 말이다!"

 렌슬리는 엘프의 문화가 변질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자연에 조화, 순응하는 엘프의 문화가 파괴적이고 소비적인 인간의 문화에 물드는 모습은 하나만 살펴봐도 알 수 있었다.

 "숲의 백성들이여! 모두 주변을 둘러보시오. 저기 있는 인간들과 여러분의 차림새가 다른 점이 있는지?"

 정말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장로같이 나이 지긋한 몇몇 엘프들만 전통의 복식을 하고 있을 뿐 상당수의 엘프들은 최신 유행의 인간들 옷을 입고 있었다.

 인간의 옷이 더 편하고 색이 화려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의 옷을 만들고 염색하기 위해 파괴되고 오염된 자연은 엘프 정서와 맞지 않았다.

 "저는 장로님이 숲을 개방한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점점 인간에게 잠식되고 있지 않습니까?"

 동족들에게 피 끓는 호소를 하던 렌슬리는 불타는 눈동자로 유저들을 째려보며 언성을 더욱 높였다.

 "저들은 자신들의 문물을 쏟아 낼 생각밖에 안 합니다. 인간들이 우리를 이롭게 한 적이 있습니까? 오히려 자신들의 분쟁을 끌어 와서 숲을 망치고 있습니다! 거기다 알량한 재물을 미끼로 우리의 자매를 농락하기까지 합니다!"

 그 말에 대부분의 남자 유저들이 머쓱해 하며 고개를 돌렸다.

 사실 신비로운 엘프의 숲을 탐험하자는 순수한 목적보다 아리따운 엘프 소녀와 친밀도를 높여 보자는 엉큼한 목적 때문에 이 숲을 찾아온 이들이 많았다.

 그들 때문에 엘프들과 크고 작은 마찰도 끊이지 않았다.

 "하여간 남자들이란... NPC에게 퍼 줄 노력이면 벌써 여친을 만들고도 남았겠다."

 혀를 차던 리지스는 옆에 있는 옌스를 쿡쿡 쑤셨다.

 "야, 너도 엘프 꼬시러 온 거지?"

 "아니 사람을 뭘로 보고! 이 몸은 바츠를 찾아 헤매다 들린 것뿐이다!"

 "부정하는 목소리가 왜 이리 클까나?"

 얼굴을 붉힌 옌스는 괜히 다른 곳을 보며 딴청을 피웠다.

 렌슬리는 그렇게 유저들을 반성과 쪽팔림의 상태로 몰아넣고, 더욱더 설득력 있는 호소로 엘프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는 인간들에 완전히 흡수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남매의 행동이 인간에게 득이 된다고 말한 겁니다."

 엘프들의 수군거림이 커지고, 렌슬리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를 치는 엘프들이 늘어났다.

 "맞아, 숲에 인간들이 너무 들락거리고 있어."

 "시끄러워서 새들과 짐승들이 마을로 오려고 하지도 않아."

 "이게 다 인간들 때문이야."

 렌슬리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지만, 기회라 싶어서 동족들의 마음에 불을 질러 봤는데, 불길은 제대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근간을 지키고,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인간의 잔재를 떨쳐 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이 숲에서 인간들을 몰아내고 그들은 이롭게 하는 자들을 처단해야 합니다."

 "옳소!"

 "인간들을 몰아내자!"

 "배신자도 쫒아내자고!"

 렌슬리에 동의하는 엘프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장로가 수습을 해 보려 노력했지만, 근간을 되찾자는 애국적인 호소에 대항하기 쉽지 않았다.

 "이거 정말 이러다가 큰일나겠는데?"

 "접속을 끊는 것이..."

 "끊었다가 돌아와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으면 소용없잖아?"

 유저들은 슬금슬금 도망칠 궁리를 했다.

 이번 사건이 얼마만큼 큰 사건으로 번지게 될지는 모르지만, 조용히 넘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3)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들 하고 있네."

 갑작스레 들려온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저 녀석, 어쩌려고!'

 채린은 발을 동동 굴렀다. 안 그래도 흥분해 있는 엘프들에게로 유한이 다가갔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리려 했을 때 이미 유한은 렌슬리의 코앞까지 가 있었다.

 "뭐냐, 네놈은? 인간 주제에 엘프의 일에 나서지 마라."

 렌슬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용히 있어도 시원찮을 인간 놈이 건방지게 나서려 들다니."

 "나 몰라? NPC라 그러나? 완전 붕어 지능이네."

 "닥쳐라, 죽고 싶지 않으면 썩 꺼져라."

 렌슬리는 위협할 목적으로 슬적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유한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유한은 알세인에게 볼일이 있었다. 그런데 렌슬리가 그를 처단하자 선동하고 있지 않은가?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 렌슬리가 위협하건 말건 유한은 조소를 짓고 있던 입을 열었다.

 "어이, 너. 원하는 게 뭐야?"

 "너 같은 인간과 인간의 잔재를 쓸어버리고 우리 엘프의 근본을 되찾는 일이다."

 "애들 선동해서 짱 먹으려는 건 아니고?"

 "뭐라?"

 비아냥으로 한 방 날린 유한은 렌슬리를 강하게 몰아붙였다.

 "맘에 안 든다고 깡그리 몰아내는 게 엘프의 방식이냐? 암만 봐도 그건 니가 혐오하는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인간의 방식 같은데?"

 "그, 그것은 우리의 근본을 회복하기 위한..."

 렌슬리가 반박을 하려 했지만, 그가 알세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유한도 그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엘프의 근간을 찾기 위해 엘프답지 않은 수단을 쓰겠다고? 지나가던 슬라임이 웃겠다, 인마."

 유한의 말을 들은 장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는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종족이다. 분노와 증오는 지양해야 할 악. 미움 때문에 그 대상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엘프를 위한다고 하지만, 인간과 똑같은 방식을 취해서야 어디 엘프의 근본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죄만 쌓는 꼴이 될 것이다.

 "듣고 보니 렌슬리가 틀린 것 같아."

 "그래. 저 인간의 말이 맞아."

 "그러면 껍질만 엘프지 우리도 똑같은 인간이 될 뿐이잖아."

 유한의 반박이 제대로 통했는지, 흥분했던 엘프들이 수그러들고 있었다.

 그런 엘프들의 반응에 만족한 유한은 험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린 렌슬리를 보며 비웃음을 띠었다.

 "너 같은 놈이 인간을 싫어하는 이유는 당연해. 원래 사람은 자기하고 똑같은 놈을 싫어하거든. 그걸 전문적인 용어로 '동족혐오'라고 하지."

 "닥쳐라! 감히 인간 주제에 뭘 안다고 나서는 거냐?"

 렌슬리는 진짜 검을 뽑으려고 칼자루를 쥐었다.

 눈앞의 인간을 그냥 둘 수 없었다. 동족들에게 피어올랐던 불꽃이 빠르게 수그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검을 뽑을 수 없었다. 어느 틈에 다가왔는지, 유한이 그의 칼자루를 움켜쥐고 놓아 주지 않고 있었다.

 "이놈이!"

 렌슬리는 유한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유한은 작정하고 나섰다.

 렌슬리가 엘프고 궁수라 스텟에서 솜씨는 높지만 힘은 약할 거라 생각했다. 물론 민첩성도 높을 것이기에 렌슬리가 말을 마치기 전에 미리 행동에 나서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역시 무늬만 엘프였군. 제 뜻대로 안 되니까 칼질부터 해 보겠다 이거지?"

 "닥쳐!"

 렌슬리가 몸을 날려 뒤로 훌쩍 물러났다.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은 유한에 손에 넘어갔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고 뒤춤에서 숏 보우를 꺼내 들고 화살을 쏘았다.

 "위험해! 엎드려요!"

 알세인이 외치기 전에 이미 유한은 몸을 숙였다. 녀석이 검을 포기하고 물러났다면, 다음 공격을 어떻게 할지 뻔했다.

 예상대로 활을 쏘았고, 화살은 무서운 소리를 울리며 유한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텅!

 요한한 소리와 함께 유한의 등 뒤에 세워져 있던 잠화접 간판이 흔들거렸다. 간판에 꽂힌 화살이 파르르 떨렸다.

 돌아서서 그것을 확인한 유한은 가슴이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 피하지 않았다면 화살은 간판 대신 자신의 심장에 박혔을 것이다.

 "어허, 이 거리에서 못 맞추다니... 너 정말 무늬만 엘프구나."

 유한은 서늘한 기분을 내색하지 않고 빈정거렸다.

 렌슬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급했다지만 그래도 단거리에서 날린 공격인데 그걸 피해 버릴 줄이야.

 "망할 인간 자식, 머리통을 날려 주마!"

 이번에 렌슬리는 제대로 시위를 당겨 유한에게 화살을 날렸다.

 트리플 파워샷(Triple Power Shot).

 엘프들만 쓸 수 있는 무시무시한 공격 스킬이다.

 옌스의 검을 박살 냈던 그 공격은 옆으로 몸을 날린 유한을 스치고 뒤에 있던 애꿎은 엘프들을 덮쳤다.

 "아앗! 피해!"

 '훗, 역시!'

 유한은 이번 공격도 빗나갈 것이라 예상했다.

 활 공격은 집중력이 생명이다. 흥분한 상태에서 과녁을 제대로 맞출 리 만무했다. 거기다 과녁(?)이 움직였으니 빗나갈 확률은 더 높아진다.

 '그래도 위험했어.'

 화살이 스쳐 가는 소리에 간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다.

 화살촉을 보고 방향을 예측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렌슬리가 시위를 놓는 순간에 몸을 날리지 않았다면 3반 모두 빗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1발만 맞았어도 유한은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와! 엘프를 위한다는 놈이 엘프를 잡고 있네!"

 "이 썩을 인간 놈이 계속!"

 유한은 계속해서 렌슬리를 약 올렸다. 그가 흥분하는 만큼 명중률이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약이 바싹 오른 렌슬리는 다시 화살을 걸고 시위를 당겼지만, 이번에는 쏠 수 없었다.

 "뭐야! 이거 놓지 못해?"

 "렌슬리, 너나 활에서 손을 놔!"

 주변의 엘프들이 렌슬리를 제압하려 나섰다.

 아무리 그의 주장이 타당성이 있다 해도 함부로 인간을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엘프들이 나선 바람에, 그래서 유한은 무사할 수 있었다. 낮게 안도의 한숨을 쉬는 그의 앞으로 갑자기 효과음과 함께 안내창이 떠올랐다.

 (-도발 스킬을 익히셨습니다.-)

 -도발을 이용하면 적을 흥분시킬 수 있습니다.

 '도발?'

 모르는 스킬은 아니다. 이미 게임상에 널리 알려진 스킬이니까.

 실력이 높은 적을 상대로 수차폐 조롱을 하고, 성과를 거두면 자연적으로 익혀지는 스킬이다.

 '몬스터와 유저 둘 다 상대로 해 봐야 한 댔는데...'

 유저를 상대로는 지난번 무역로 개척에서 검은 초승달길드의 장 키라를 약 올려 봤었다.

 몬스터를 상대로 약 올린 적은 없지만, 방금 상대한 렌슬리를 몬스터로 인정해준 모양이다. 사실 지금 렌슬리는 껍질만 엘프일 뿐, 미친 소나 다름이 없는 상태니까.

 그렇게 조건을 맞춰서 도발 스킬을 익히긴 했지만, 유한은 그렇게 기쁘지는 않았다.

 도발은 전투 직업군이나 생산 직업군을 막론하고 배울 수 있는 국민 스킬인데다가, 그 효과는 미미하다고 평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의 공격 성공률을 떨어트린다고 하지만, 일단 도발이 성공할 확률이 높지 않았고, 오히려 화난 적이 자신만 공격을 함으로서 손해 보는 일도 있었다.

 물론 잘 이용하면 유용하긴 하지만 널리 사용되진 않았다.

 '궁수를 상대론 쓸 만한 스킬이려나?'

 그렇게 생각하는 유한의 앞에 또 다른 안내창이 떠올랐다.

 -당신의 지혜야말로 최고의 스킬입니다. 순간의 판단과 찰나의 행동이 당신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마치 공격 스킬이 없다고 투덜대는 생산직 유저를 다독이는 듯한 말이었다.

 위로가 되기보다 어쩐지 조금 짜증이 났던 유한은 안내창을 휘휘 저어서 없애 버렸다. 이런 문구를 생각할 시간에 스킬이나 하나 더 만들어 주면 오죽 좋겠는가.

 이를테면 대장장이 전용의 무한 해머 연타라든가, 대갑옷 오함마술(이게 뭐지?-옮긴이) 같은 것으로 말이다.

 "이거 놓으란 말이야!"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유한은 렌슬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자신을 붙잡은 동족들을 뿌리치고, 나무 위로 날아 올랐다. 그리고 다시 활을 쏘기 위해 화살통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그보다 유한의 행동이 더 빨랐다.

 피--잉!

 "크윽!"

 와이어에 매달린 추가 날아오자, 렌슬리는 당황하며 손을 돌렸다. (본문에서는 물렸다 라고 표기되었음.)

 "흥, 궁수의 공격 모션이야 뻔하지."

 분명 렌슬리가 민첩성이 더 높겠지만, 유한은 충분히 대응할 자신이 있었다.

 활은 화살이 있어야 무기로서 기능을 할 수 있다. 궁수가 공격을 하기 전 화살을 집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공격 패턴. 그 패턴을 노리고 미리 공격을 펼치면 상대를 봉쇄할수 있었다.

 "뻔하다고? 그럼 이건 어떠냐?"

 바람같이 이동하며 동족들과 유한의 공격을 피하던 렌슬리는 화살도 없이 활의 시위를 잡아당겼다. 시위를 당긴 그의 손이 번쩍하는 순간, 유한의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으악!"

 "지그야!"

 지켜보던 동료들이 달려왔다.

 화살도 날아오지 않았는데, 유한의 고개가 젖혀지더니 벌렁 쓰러져 버리는 게 아닌가. 대체 어떤 공격을 받은 것인지?

 "아야아, 제기랄!"

 채린의 부축을 받고 일어난 유한은 자신의 HP가 반 넘게 닳았음을 보았다. 이마에선 피가 찔끔 흘러내렸고, 바닥을 보니 금속 단추가 하나 나뒹굴고 있었다.

 화살을 뽑을 수 없게 되자 렌슬리는 단추를 매서 활의 시위에 걸어 날린 것이다. 마치 새총으로 돌멩이를 날리듯.

 "뭐해요! 공격하고 있잖아요! 얼른 저놈을 잡으세요!"

 리지스의 고함에 유저들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지금까지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그들도 렌슬리를 그냥 두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엘프들은 선동해 유저를 공격하려던 녀석이 아니던가.

 모두들 무기를 들고 렌슬리를 잡으러 쫒아갔다.

 "위험해!"

 카--앙!

 옌스가 가로막지 않았다면 이번엔 유한의 머리에 붕대를 감아 주고 있던 채린이 위험했을 것이다. 렌슬리가 쏜 단추는 옌스가 휘두른 헤비 소드에 불꽃을 튀기며 튕겨났다. 

 단추와 헤비 소드가 만들어 낸 소음이 주위로 퍼지는 순간 렌슬리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바람같이 날렵하던 그의 몸이 주춤했고, 그를 쫒던 다른 엘프들도 미간을 찌푸렸다.

 '어? 왜들 저러지?'

 주춤하던 렌슬리는 재빨리 화살통에 손을 가져가 쫒아오는 유저들에게 파워샷을 날렸다.

 까앙!

 그러나 이번에도 그의 공격은 무위를 끝났다. 화살이 선두에 선 기사 유저의 강철 방패에 막힌 것이다. 강력한 파워샷을 얻어맞은 방패는 요란한 파열음을 울리며 산산이 부서졌다. 

 방패가 부서지는 순간 렌슬리와 엘프들은 또 한 번 주춤했다. 조금 전보다 더 많은 엘프들이 움찔했다. 유저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설마 소음 때문에?'

 쇠를 부딪히는 소리를 싫어하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좀 전에 렌슬리나 엘프들이 대장간이 시끄럽다고 불평하던 것이 떠올랐다.

 원래 대장간은 시끄럽지만, 엘프들에게 유달리 더 시끄러워서 그런 거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유한은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그는 인벤에서 끌을 꺼내서 렌슬리에게서 빼앗은 검의 칼날을 긁어 댔다. 최대한 거슬리는 소리를 내자고 긁어 댔는데, 제대로 효과가 있었다.

 끼익...끼끼끽--!

 칼날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짧고도 화끈하게 울려 퍼졌다.

 검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파열음은 송곳처럼 날카롭게 엘프들의 귀청에 찔러 들었다.

 "뭐야 이 소리는!"

 "누구야? 누가 그랬어?"

 알세인이나 알테나를 제외하고 엘프들은 안색을 붉히며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온화한 얼굴의 장로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크윽! 이런!"

 막 나무 위로 뛰어오르려던 렌슬리는 멈칫하다 그 자리에 넘어졌다. 소음을 들은 순간 놀라서 스텝이 엉켜 버린 것이다.

 유저들에겐 절호의 찬스였고, 렌슬리에겐 치명적인 실수였다.

 "이때다, 밟아 버렷!"

 유저들은 렌슬리가 쓰러지자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일단 활을 빼앗고, 딴 짓을 하기 전에 가둬 놓고 몰매를 가했다.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던 NPC였던 만큼 유저들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유한은 그렇게 렌슬리가 박살 나는 것을 보고 칼을 긁어 대는 것을 멈추었다.

 "그만하시오! 그에 대한 처벌은 우리가 하겠소."

 렌슬리는 맞아 죽기 직전에 동족들에게 구원을 받았다.

 그렇게 엘프의 숲을 광풍에 몰아넣을 뻔한 사태는 유한의 말발과 기지에 힘없이 무사히 넘어갔다.

 (4)

 사태가 진정되고 난 다음.

 유한은 자신의 눈앞에 불쑥 떠오른 안내창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리의 위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리를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 조사하면 (-쇼크 웨이브(Shock Wave)-)을 익힐 수 있습니다.

 '어?'

 쇼크 웨이브.

 이것은 음파로 상대를 공격하는 공격 스킬이다. 바드(Bard)나 싱어(Singer) 같은 칭호를 달고 다니는 음악가들의 스킬인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대장장이가 익힐 수 있다는 건지?

 '혹시 버그?'

 그렇게 생각한 순간 또 다른 안내창이 냉큼 떠올랐다.

 -당신이 휘두르는 망치나 연장으로도 흥겨운 리듬을 만들 수 있습니다.

 -지식이 1 올랐습니다.

 -솜씨가 2 올랐습니다.

 이렇게 일러 주는 걸 봐서는 버그는 아닌 모양이다.

 대장장이도 연주를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아니 그럼 이 스킬은 요리사 같은 직업군도 배울 수 있는 건가?'

 젓가락도 악기가 될 수 있음을 어릴 때 할아버지가 술 마시는 것을 보고 알았다. 칼을 도마에 두들겨 소리를 낼 수도 있고, 물을 담은 그릇을 두들겨 음정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은가?

 주변에 요리사 유저가 있으면 해 보라고 권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유한이 아는 사람 중에는 요리사가 없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유한이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알세인이 오더니 감사의 인사를 했다. 유한의 손을 두 손으로 움켜잡는 모습이 꼭 은인을 대하는 듯했다.

 "정말 당신이 나서 주지 않았다면 저와 제 누이는 어찌 되었을지..."

 '어떻게 되었긴, 동네에서 쫓겨났겠지.'

 엘프들이 렌슬리의 주장에 쉽게 동조한 이유는 잡화점에 붙어 있는 대장간이 너무 시끄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안 그래도 인간보다 청각에 예민한 엘프들인데, 매일마다 망치질로 뚝딱였으니 오죽하겠는가. 괜히 뾰족귀 엘프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대장간을 좀 외진 곳으로 옮기는 게 좋겠네요. 좀 더 신경을 쓰면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킬 일도 없을 테니까요."

 "그렇군요. 저야 매일 일을 하면서 이골이 났지만, 이웃들에겐 많이 불편했겠죠."

 알세인은 유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아무튼 보답은 꼭 하고 싶습니다. 뭔가 어려운 일이 있으시면 말씀하십쇼. 제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그 말에 심드렁하던 유한의 귀가 번쩍 열렸다. 돌발적인 이벤트 덕분에 알세인과 친밀도가 쭉 올라간 듯했다. 

 무엇 때문에 알세인과 친밀도를 올리려 했던가. 해커로 추정되는 알세인의 단골을 알아내기 위함이 아닌가.

 "그럼 댁이 갖고 있는 중고 무구들을 전부 파세요."

 이 말은 유한이 한 게 아니다. 옆에 있던 리지스가 이야기를 듣고 불쑥 끼어든 것이었다.

 다 된 밥에 코딱지를 떨어뜨리는 그녀의 행각에 유한은 저도 모르게 리지스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아얏! 지그 너 무슨 짓이야!"

 "너야말로 무슨 짓인데? 왜 산통을 다 깨려는 거야?"

 "산통을 깨다니! 원래 이럴 계획인 거잖아!"

 물론 표면적인 목적은 그렇다. 중고품들을 건지자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유한의 진짜 목적은 알세인에게 바츠의 아이템을 팔아넘긴 해커가 누군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넌 장사 하루 하고 말거냐? 알세인과 거래도 좋지만, 그에게 중고품을 판 사람을 알아 두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진 않냐?"

 "그건... 그렇네."

 잠깐 동안에 만들어 낸 변명이지만, 돈벌레인 리지스를 상대로 먹혔다. 유통 단계를 하나 더 거치는 것보다 직통으로 이루어지는 게 더 저렴할 테니까.

 "그런고로...알세인 씨, 당신에게 중고 무기를 판 단골 거래자가 누군지 알고 싶군요."

 유한의 말에 알세인은 이전과 같은 경계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유한과의 친밀도가 상당히 올라간 것이다.

 "시아에게 준 그라디우스를 판 사람 말입니까?"

 "예, 지금 옌스가 들고 있는 헤비 소드를 판 사람과 동일 인물이겠지요?"

 유한이 옌스를 가리키자 알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다 같은 사람에게서 사들인 것이 맞았다.

 "예, '블라덱'이라고 하는 분입니다."

 블라덱.

 해커로 추정되는 인물의 이름을 들은 유한은 뛸 듯이 기뻐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면 정말 환호성을 지르고 춤을 추었을지도 모른다.

 "올 때마다 좋은 물건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죠."

 '확실하군.'

 일부러 통행에 제한이 있는 엘프의 숲에 와서 거래를 하고, 올 때마다 좋은 물건을 가지고 온다는 걸 보면 해커가 확실했다.

 그 질 좋은 중고 무구들, 그러니까 숙련도가 쌓이거나 레어인 물건들이 다 어디서 얻어지겠는가?

 "자주 찾아오나요?"

 "예전엔 일주일에 한 번씩 들렀는데, 얼마 전부턴 발길이 뜸해졌습니다. 갑자기 연락도 없이 그래서 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지요."

 '얼마 전부터 발길을 끊었다면 나 때문은 아닐까.'

 유한이 그리 여긴 것은 얼마 전에 해커가 직접 전화를 했었기 때문이다. 한번 자신을 잡아보라고.

 그런 식으로 술래잡기 승부를 걸고 녀석은 거래처들을 모두 바꿔 버린 것이 틀림없다. 같은 거래처를 계속 애용하다가는 꼬리를 밟히게 될 테니까.

 만약 채린이 퀘스트 때문에 엘프의 숲에 오지 않았다면, 알세인에게 그라디우스를 받지 못했다면, 이렇게 추적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 그런데 중고 무구의 거래는?"

 "그건 이 녀석이랑 이야기하세요."

 유한은 나머지 뒤처리는 리지스에게 맡겼다.

 리지스가 신이 나서 알세인과 거래하는 사이, 유한은 블라덱이라는 이름의 해커를 어찌 추적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분명 거래처를 바꿨을 테니 엘프의 숲에는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다른 거래처를 구하고 있다면...

 '골드러시 상인 연합에 의뢰해 봐야겠군.'

 유한은 곧바로 발덴의 지부장인 딜론에게 쪽지를 보냈다.

 블라덱이라는 유저가 자신에게 사기를 치고 잠적했는데, 행방을 알 수 없으니 좀 찾아 봐 달라고 말이다. NPC를 상대로 거래할 수도 있으니 신경을 써서 조사해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같은 상인이니 분명 행방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느긋하게 게임을 즐기자.'

 할 일이 많았다.

 본격적으로 대장간도 운영해야 한다.

 또 도발 스킬의 가능성도 연구해야 하고, 쇼크 웨이브 스킬을 어떻게 획득할지도 알아봐야 한다.

 '공격 스킬은 많이 배워 놓을수록 유리하니까.'

 공격 스킬이 적으면 공격 대상도 고정되기 마련. 채석이나 벌목으로는 돌과 나무로 된 놈들밖에는 상대 못한다.

 도발이나 쇼크 웨이브는 좀 더 다양한 부류를 대상으로 전투를 수행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공중 요새도 부활시켜야 하고, 할 게 진짜 많구나.' 

 이런 재미들을 즐기면서 해커도 함께 추적해야 한다.

 그러나 교활하고 조심성 많은 생쥐를 잡기 위해서는 발소리를 죽이고 조금씩 다가갈 필요가 있다.

 해커의 뒷덜미를 잡을 때까지는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된다.

 "오늘은 이 정도 할까?"

 "그래, 시간도 늦었는데 내일 보자."

 유한은 동료들과 내일 다시 만날 약속을 한 다음 로그아웃을 했다. 캡슐 밖으로 나와 보니 시계 바늘이 자정을 넘어 있었다.

 "빨리 자야지."

 날이 밝으면 학원도 가야 하고 도장에서 땀도 좀 흘려야 한다.

 그런데 침대에 눕자마자 채린을 비롯한 동료들이 또 보고 싶어졌다. 내일 다시 친구를 만날 수 있을 테지만, 그 시간까지 기다리려니 지루한 기분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시간이 빨리 흘러갔으면 좋겠다.'

 유한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3. 단골의 정체 >>>

(휴...이번 챕터는 좀 길었네요. 여기까지 쓰는 데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더군요 ㅎㅎ 괜히 쓴다고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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