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정령계 (35/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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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생각보다 길이 꽤 험한걸?"

 세계수를 향해 가면 갈수록, 주변은 점점 어두워졌다.

 날이 저물고 있어서가 아니라, 하늘에 닿을 듯이 자라오른 수목들 때문이었다. 빛이 비치지 않는 숲 속은 무척이나 어두웠고, 축축한 바닥은 진창처럼 푹신하고 미끄러웠다.

 "으아앗!"

 "조심해! 여긴 이끼가 껴서 꽤 미끄러우니까."

 어둠에 익숙한 유한이나, 이글 아이를 가진 채린은 괜찮았지만, 리지스가 가기에는 길이 너무 험난했다.

 등불을 비추랴, 카트를 끌고 가랴, 앞을 살피랴.

 고난의 연속이지만 리지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돈이 된다면 지옥길이라도 기꺼이 걸어갈 수 있으므로. (본문에서는 있음으로 라고 표기되었음)

 "여전히 무정하군, 바츠. 힘없는 아녀자를 도와주지 않다니."

 일행의 뒤를 따라온 옌스가 리지스의 카트를 밀어 주었다.

 "어머, 고마워요. 아저씨."

 "훗, 옌스라고 불러. 그리고 난 아저씨가 아냐. 아직 팔팔한 십 대인걸."

 "에이, 거짓말."

 리지스는 옌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대체 어딜 봐서 10대란 말인가. 190은 넘어 보이는 키에 고릴라 같은 체격은 그렇다 쳐도, 옌스의 얼굴은 20대 후반의 청년이었다.

 "진짜야, 증명해 줄 수도 있어."

 그러면서 옌스는 자신의 정보창을 보여주었다.

 공개된 정보창에는 옌스의 증명사진과 '고경덕'이라는 본명, 그리고 생년월일과 나이가 적혀 있었다ㅕ.

 리지스는 물론이요, 앞서 가던 유한과 채린도 그 정보창을 보고 놀랐다. 16세라니! 이 고릴라가 자신들보다도 1살 더 어리단 말인가?

 "덕분에 괜한 오해를 많이 사곤 하지만... 나이트 갈 땐 유리하더군. 하하핫!"

 '이 자식. 진짜 해커인 거 아냐?'

 동생이나 조카의 개인 정보를 도용한 건 아닌지?

 유한은 옌스의 신상 정보를 믿을 수 없었다. 분명 뭔가 조작을 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면 16세 고교생이 어찌 저런 면상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아저씨라고 하면 섭섭하니까, 옌스 오라버니 정도로 불러 줬으면 좋겠군."

 옌스는 친근한 투로 리지스의 어깨를 다독였다.

 숙적 바츠처럼 강하게 되기 위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외로운 전사의 길을 걸었지만, 그렇다고 외로운 늑대로 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알았어, 그럼 옌스라고 부를게. 너도 날 누나라고 부르면 돼."

 "엑? 설마 연상?"

 "호호호. 그럼 내가 중딩인 줄 알았니?"

 리지스는 옌스를 메신저 목록에 추가했다. 부가 정보에 '머슴 2호'라고 적어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후후후, 들이대는 만큼 아주 잘 부려 먹고 뜯어먹어야지.'

 아르페디아 최고의 상인이 되려면 재력뿐만 아니라 무력도 있어야 했다. 그런 무력은 재화로 얻을 수 있었지만, 이렇게 매력으로도 충분히 획득할 수 있었다.

 참고로 그녀의 메신저 목록에 올려진 '머슴 1호'는 송코였고, 유한은 '돈줄 1호'로 기록되어 있었다.

 "지그야, 저 사람 정말 우리보다 어린 걸까?"

 "모르지, 어렸을 때 약을 잘못 먹어서 그런 건지도."

 정말 정보를 조작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걸 조작하고 공개해서 득이 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가지 보았던 옌스의 언행으로는 뭔가 숨길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보다, 아직 세계수까지는 멀었어?"

 "이제 거의 다 왔어."

 먼저 세계수를 찾아가 본 적이 있는 채린은 모두를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우와! 이게 세계수!"

 빽빽한 삼림 가운데 우뚝 선 거대한 나무.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이 자라난 나무는 그 등치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굵고, 나뭇가지는 사방에 뻗어 있었다.

 세계수 주변에는 수많은 나비와 빛의 정령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를 흔들며 노래를 부르는 세계수는 더 없이 아름답고 신비해 보였다.

 사실 이 세계수는 전자 공간에 만들어진 허구의 산물일 뿐이다. 그러나 유한 일행은 이것이 '허상'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들의 눈앞에 보인 세계수는 아름답고 웅장했다.

 "대단하군. 진짜 딴 세상에 온 것 같아."

 "이럴 게 아니라 스크린샷을!"

 세계수 주변에는 몇몇 유저들이 유한 일행처럼 탄성을 내뱉고 있었다. 퀘스트 때문에 온 것으로 보이지만 관광과 기록이 먼저였던 모양인지, 연방 주변을 돌면서 포즈를 잡고 스크린샷을 찍는다고 여념이 없었다.

 "나무 위에서 보는 풍경이 정말 끝내 줘. 숲 밖의 먼 풍경까지 보이는데,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야."

 "세계수 위에 올라갈 수도 있어?"

 리지스가 놀라 물었다.

 "보통은 금지되어 있지만, 내가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는 중이니까 괜찮아."

 "그럼 묻어갈 수도 있는 거구나."

 "물론이지."

 채린이 파티를 만들자 유한과 리지스가 곧장 파티에 들었다. 그리고 옌스까지 역시 채린의 파티에 끼어들었다.

 "어이, 고릴라. 넌 왜 끼는 거야?"

 "내가 여기까지 괜히 온 줄 아나? 다 바츠 너와 승부를 하기 위해서라고."

 "그럼 넌 우리가 갔다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이봐, 섭섭하게 굴지 마. 승부는 승부일 뿐이야. 경치는 사이좋게 즐기는 게 좋은 거 아닌가?"

 "응, 좋은거 아니니까 당장 꺼져."

 "이봐, 바츠. 쩨쩨하게 굴지 마. 네 이름값이 떨어진다고."

 "나 바츠 아니거든."

 그러나 옌스는 탈퇴하지 않았다. 채린도 굳이 강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유한이 불편해 하긴 했지만, 딱히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사이좋게 구경하고 내려오면 되잖아. 여기까지 같이 온 사람을 따돌리는 건 너무해."

 파티장이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유한도 더 반대할 수는 없었다.

 일단 일행은 채린의 퀘스트를 수행한 다음 세계수 꼭대기의 풍경을 감상하기로 했다.

 그들이 세계수 가까이 접근하자 주변에 번을 서던 엘프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을의 엘프들과 다른 고풍스런 차림을 한 이들은 하이엘프들로서 엘프의 성지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이곳은 외부인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알테나 씨의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세계수 아래에 바람의 날개가 있다고 해서요."

 그러면서 채린은 알테나에게 받은 부적을 보여 주었다.

 '바람의 부적'을 본 하이엘프들은 일단 상급자에게 알리겠다며 일행을 그 자리에 대기시켰다.

 5분 정도 지났을까, 상급자로 보이는 하이엘프가 일행의 눈앞에 나타났다. '키르케'라는 이름의 하이엘프는 사제복과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대들이 바람의 날개를 찾으러 왔습니까?"

 "찾는 건 저구요, 이쪽은 제 친구들이에요."

 "그렇습니까? 저를 따라오시죠. 바람의 날개가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키르케는 일행을 세계수 아래의 동굴로 인도했다.

 어둡고 좁은 땅속을 어느 정도 내려갔을까, 키르케는 돌로 된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 문 너머에 바람의 날개가 있습니다."

 키르케가 석문에 손을 가져다 대자 석문에 새겨진 복잡한 문양들에 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석문은 육중한 소리를 울리며 천천히 열렸다.

 휘이잉!

 열려진 석문 안에서 거센 바람과 함께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눈부신 빛에 유한 일행은 잠시 동안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시력이 돌아오자, 석문 너머의 풍경이 그들의 눈에 생생하게 비춰졌다.

 "이, 이건!"

 (2)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석문 너머는 전혀 다른 세상.

 푸른 하늘 위로 풍선같이 생긴 반투명한 물고기들이 날아다니고, 눈, 코, 입 달린 나무들과 바위들이 땅 위를 천천히 걸어 다녔다.

 그뿐만 아니라 멀리 눈 덮인 산도 조금씩 움직이는 듯했고, 시냇물도 움직이는 나무와 바위들을 피해 제멋대로 흘러내렸다. 그런 괴이하고 동화 같은 풍경 속을 작은 요정들과 신비하게 생긴 짐승들이 누비고 다녔다.

 "설마 이 문 너머는..."

 "정령계입니다."

 "역시!"

 유한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정령계는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기본 배경이 되는 아르페디아 대륙과 다른 세계로, 정령들과 그에 가까운 존재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이 정령계와 연결된 통로는 대륙 각지에 있었다. 유한도 바츠 시절에 던전 하나를 깨고 정령계의 통로를 열어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정령계의 신기한 풍경에 감탄해 여기저기 쏘다니며 모험을 했었다. 그렇게 멋모르고 돌아다닐 때는 몰랐다. 정령계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말이다.

 "정령계라니!"

 "잘못하면 캐릭터 접어야 할 곳에 가야 한다고?"

 리지스와 옌스가 긴장하는 걸 보면 뭔가 들었거나 겪어 본 것이 있는 모양이다. 모르는 건 채린뿐이었다.

 "왜? 저기 뭔가 이상한 곳이야?"

 "방향 인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곳이야. 해가 동쪽에서 떴다가 서쪽에서 떴다가 제멋대로인 데다, 별자리도 시시각각 바뀌지."

 다시 말해서 동서남북 구분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거기다 보면 알겠지만, 풍경이 계속 바뀌어. 그래서 조금만 멀리 나오면 원래 들어왔던 통로를 찾을 수 없게 돼."

 "완전히 미아가 된다는 말이야. 길 찾는 거 포기하고 캐릭터 다시 만든 사람도 있을 정도라니까."

 한마디로 잘못 갔다간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

 유한도 바츠 때 정령계에서 탈출한다고 현실 시간으로 일주일 동안 토나오게 돌아다녀야 했다.

 그나마 그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돌아오는데 한 달 이상 걸린 사람도 있었고, 귀환을 포기한 유저도 많았다.

 동화처럼 아름다운 풍경의 정령계였지만, 그 신비한 풍경에 절대 속아서는 곤란했다.

 "우려하신 대로 정령계에서 일반적인 방향 인식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저 안에서 바람의 날개를 찾으라는 겁니까?"

 유한은 어쩐지 채린의 퀘스트가 너무 쉽게 풀린다 싶었다.

 아무리 채린이 엘프들과 친밀도를 올리느라 고생했다지만, 이렇게 쉽게 될 리는 만무했다. 어려운 퀘스트일수록, 막판에 뒤통수를 갈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다.

 "따라 오십시오. 제가 직접 바람의 날개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방향 인식이 통하지 않는다면서요?"

 "정령의 기운을 따라가면 간단합니다."

 키르케는 정령계로 들어가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주저하던 일행은 키르케의 뒤를 서둘러 쫒아갔다.

 "꺅! 뭔가 발밑에서 꿈틀했어!"

 "괜찮아. 정령계는 원래 그래."

 정령계의 모든 사물에는 영이 깃들어 있다.

 사실 그것은 물질계라 불리는 아르페디아 대륙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물질계에서는 영이 실제로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정령계의 경우는 달랐다. 하늘에 있던 태양의 정령이 갑자기 산 아래로 숨어 버리는가 하면, 땅과 물의 정령들고 자기 좋은 곳으로 옮겨 다녔다.

 채린이 발밑에서 꿈틀하는 것을 느낀 것도, 땅의 정령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일행이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작은 요정들은 물론이요 꽃과 풀들도 물러섰다. 작은 돌멩이조차도 밟히기 싫은지 스스로 굴러서 다른 곳으로 피했다. 

 "정말 별의별 정령이 다 있네요. 정령은 다섯 가지 속성의 정령들뿐인거 아니었나요?"

 "그들은 물질계에서도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대표적인 정령들일 뿐입니다. 실제론 모든 사물에 영이 깃들어 있지요. 거기 상인 분이 끄는 카트에조차 영이 깃들어 있습니다."

 "에? 이건 사람이 만든 건데요?"

 리지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연에만 영이 있는 게 아닌가 싶었기에.

 "인공의 산물이라도 영이 존재합니다. 아니, 영이 깃든다고 하는 편이 맞겠군요. 오래 사용하면 단순한 물건이라 할지라도 생명과 마음이 싹트게 됩니다."

 "명검이 울음을 터트리는 이유도 그런 거요?"

 "네, 명품일수록 장인의 마음과 생명이 전해지니까요."

 옌스에게 대꾸해 준 키르케는 유한을 돌아보았다. 그에게서 강한 쇠 냄새와 이글거리는 불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제법 실력 있는 대장장이로 보였다. 하지만.

 "분발하십시오. 아직 영을 깃들게 하기는 멀었습니다."

 "댁이 말하지 않아도 분발하고 있다고요."

 애초의 계획이라면 대장간으로 돌아가서 NPC들과 함께 열심히 무구를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엘프의 숲에 해커의 단서가 있는 듯해 일정이 바뀌어 버렸지만 말이다.

 "자, 이제 도착했습니다. 바람의 날개가 있는 곳에."

 키르케가 가리키는 곳은 꽃이 만발한 언덕 위였다.

 살랑살랑 바람이 부는 그 나지막한 언덕에는 하얀 사제복을 입은 여자 엘프가 서 있었다. 그녀는 일행을 보더니 나비처럼 사뿐 날아서 일행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하얀 사제복을 펄럭이며 강림한 그녀는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일행을 놀라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아, 알테나 씨?"

 알테나와 쏙 빼닮은 여성 엘프.

 "안녕하세요, 여러분. '아르네스'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저를 바람의 무녀라 부르지요."

 "역시, 그랬군!"

 알테나의 12대 선조인 바람의 무녀 아르네스.

 제작자가 의도해서 그랬는지, 아님 귀찮아서 복사 신공을 발휘했는지 몰라도 그녀는 알테나와 쏙 빼닮아 잇었다. 목소리만 제외하고.

 뭐 그런 뒷사정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바람의 날개를 탄생시킨 장본인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설마 아직도 살아 있었을 줄이야.

 "바람의 날개 때문에 오신 건가요?"

 "네,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대에게 부탁을 한 것은 미케니아의 마도사들이겠군요. 아니면 그들의 왕이거나."

 오래 살다 득도라도 했는지, 아르네스는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른손을 허공에 휘휘 돌렸다. 작은 바람들이 아르네스의 손으로 모인다 싶더니, 그녀의 오른손 위에 회오리가 만들어졌다. 

  

 "오래 전 생각이 어렸던 저는 바람의 날개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게 선이고 올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만, 진실을 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더군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르네스는 채린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 위에 있는 회오리가 점점 강해졌다.

 강렬한 바람에 몸을 가누기 쉽지 않을 정도였고, 옷자락은 찢어질 것처럼 사납게 펄럭였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지요?"

 "시아라고 합니다!"

 채린은 악을 쓰듯이 외쳐 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바람이 거세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요, 시아. 어디 이 바람을 이겨 내 보세요."

 아르네스는 손 위에 있던 회오리를 내려놓았다.

 땅으로 내려온 회오리는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성장했다. 흙과 모래뿐만 아니라 꽃과 나무들도 뿌리 채 뽑혀서 회오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리지스의 카트에 실린 물건들도 회오리 안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물론 카트에 타고 있던 포포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삐잇!"

 "꺄악! 안돼 포포야!"

 "위험해!"

 옌스가 리지스의 뒤춤을 잡았다. 리지스를 간신히 붙잡은 옌스는 쥐고 있던 헤비 소드를 땅에 박았다. 하지만, 중무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채만 한 회오리에 질질 끌려갔다.

 그나마 그는 나았다. 비교적 가벼운 차림의 유한이나 채린은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제길, 무슨 엘프가 이렇게 폭력적이야!"

 정령계를 송두리째 없애 버릴 셈인가?

 유한은 곡괭이를 땅에 찍어 버티다가 채린 쪽을 보았다. 

 시험의 당사자인 채린도 몸을 숙이고 회오리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버틸 수 없었던지 그녀의 몸이 둥실 떠오르더니 회오리 쪽으로 끌려갔다.

 "꺄악!"

 "시아야, 이거 잡아!"

 유한은 날려 가는 채린에게 와이어를 쏘아 보냈다. 

 채린은 거의 엉겹결에 와이어를 잡았다. 채린은 마치 연이라도 된 것처럼 바람에 날렸다. 유한은 와이어를 회수하려 했지만, 건틀렛의 태엽은 쉽게 되감기지 않았다.

 바람이 너무나 강했다. 이렇게 버티기도 어려울 정도로. 

 '이건 말도 안돼. 버틸 수 없는데 무슨 수로 이겨내라는 거야?'

 아무래도 이 시험은 어려워 보였다.

 바람이 약해질 때까지 버틸 수 있으면 몰라도, 그 전에 회오리에 끌려가고 말 것이라는게 현재 유한의 예상이었다.

 "제길! 대체 바람의 무녀는 무슨 뜻으로다가!"

 이런 시험을 치르게 한 바람의 무녀와 여기까지 자신들을 인도한 키르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일행이 위험에 처했음에도 그들은 이 상황을 중지시킬 뜻이 없는 듯했다.

 아직 피해자가 없으니 그런 건지 모른다. 회오리에 끌려간 것은 이상한 불가사리 생물뿐이니까.

 "삐삣! 삐삐삣!"

 처음에 포포는 회오리 속에서 정신없이 돌기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녀석은 괴이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날개를 펴서 회오리바람을 타고 활공하기도 하고, 일부러 빙글빙글 돌면서 재주를 넘고 춤도 추었다.

 비명과 같은 울음소리가 노랫소리 비슷한 지저귐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한마디로 포포는 '놀고 있었다'.

 '이 불가사리 자식! 남들은 심각한데 지는 놀고 있다니!'

 유한은 어처구니없는 포포의 행각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그 '놀고 있는 상황'을 보다 보니 번쩍 떠오른 말이 있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건 곽대발이 했던 말이었다.

 도장에 가서 첫 수련을 마치고 파김치처럼 쓰려졌을 때였다.

 이걸 앞으로 어떻게 하나, 계속할 수나 있을까, 때려 쳐버릴까 생각하던 유한에게 곽대발은 그리 말했다.

 그리고 그 다음엔...

 "힘들다 생각하지 말고 재미있다고 생각해 봐. 어려운 걸 어렵다고만 생각하면 더 힘들어지는 법이야."

 "흥, 말이야 쉽죠!"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걸 어떻게 재밌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다. 게임이든 인생이든... 결과가 어떻든 그 과정을 즐기면 나름대로 소득이 있지. 투덜거리고 짜증 내고 불평만 해 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때는 그 말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고, 어려운 것일수록 재미있게 생각하라는 말뜻이 어떤 것인지.

 "시아야! 무서워하지 마!"

 "응? 뭐라고?"

 여전히 와이어에 매달려 있던 채린은 유한의 외침에 귀를 기울였다. 유한은 아예 곡괭이를 놓아 버리고 회오리를 향해 달려가며 소리쳤다.

 "그냥 놀이기구라고 생각하면 돼!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놀이기구?"

 "까짓것, 진짜 죽는 것도 아니잖아!"

 유한의 말에 채린도 뭔가 깨달았는지 눈빛이 달라졌다.

 그녀도 회오리에 몸을 맡기고 노니는 포포를 보았다. 

 황당하기 그지없다 생각했는데, 사실 그것이 해답이었던 것이다.

 "그래, 이걸 놀이기구라고 생각하면..."

 채린은 쥐고 있던 와이어를 놓았다. 어차피 유한도 회오리에 휩쓸려 들어간 뒤라 헐렁해진 와이어를 계속 쥐고 있다고 나아질 것은 없었다.

 "꺄아아!"

 와이어를 놓은 채린은 순식간에 회오리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속도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빨랐고, 흐름은 매우 거칠었다.

 무엇보다 작은 나뭇가지나 돌멩이들이 화살이나 총알처럼 스쳐 지나가니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들어와 버린 건 아닌지?

 '괜찮아, 이런 것도 재미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위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만큼 스릴도 있지 않은가.

 채린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회오리바라메 맞춰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거친 흐름에 몸을 맡기며, 천천히 적응해 나갔다.

 '이건 놀이기구인 거야. 재미있고 스릴감이 넘치는.'

 그렇게 생각하고 꾹 견디다 보니 두려움은 점차 사라졌다.

 어지러운 것도 적응이 되었고, 느리지만 그 속에서 몸을 움직일 수도 있게 되엇다. 그렇게 몇 분 버티다 보니 회오리바람은 언제나 즐기는 놀이기구들과 별반 다름없게 느껴지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속도가 더 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꺄하하하하!"

 완전히 적응된 채린은 즐거운 비명을 마음껏 지르며 날아다녔다. 조금에 무서워했던 게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적응이 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크아악! 살려줘어어어!"

 채린과 달리 유한은 전혀 재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곽대발의 말을 믿고 뛰어들었건만, 애초부터 놀이기구에 익숙하지 않은 그는 재미를 느끼고 싶어도 느낄 수가 없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했지만, 마음먹기도 쉽지는 않았다. 그나마 각오했던 마음도 뺑뺑이 몇 번에 몽땅 풀려 버렸다.

 그래도 곽대발이 말한 소득이란 게 있을 것 같았다. 몇번만 더 고생하면 놀이기구들에 대한 강한 적응력이 생길 것 같으니 말이다.

 (3)

  

 "끄, 끝난 건가?"

 "그런 모양이야."

 리지스와 옌스는 끝까지 회오리에 끌려가지 않고 버텼다.

 원래의 위치보다 10m는 더 끌려왔다. 악몽 같은 시간은 겨우 10분에 불과했지만, 10년은 되는 줄 알았다.

 "꺄하핫! 너무 재밌네. 이거 한 번밖에 못하는 거야?"

 옌스와 리지스는 왠지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남은 죽어라 버텨서 살아남았는데, 정작 회오리에 끌려 들어간 당사자가 한다는 말이 저럴 줄이야.

 "으음, 과연 바츠의 동료! 평범하지 않는 캐릭터라 이건가?"

 "닥치고 누나 물건 회수하는 거나 좀 도와줄래?"

 리지스는 날려 갔던 물건들을 카트에 주워 담았다. 다행히 피해는 크지 않았다. 생각보다 물건들이 멀리 날아가지도 않았고.

 "삐이~! 삐이~!"

 "저리 가! 사람 약올리지 말고!"

 유한은 포포에게 발길질했다. 하찮은 미물 주제에 사람을 깔보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유한의 발은 포포를 맞추지 못했다. 허공을 찬 유한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 자리에 벌렁 쓰러졌다. 아직 하늘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잘했어요. 훌륭하게 바람을 이겨 냈군요."

 바람의 무녀가 채린에게 다가와 칭찬을 했다. 그 칭찬에 채린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헷, 지그가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거에요."

 이번 퀘스트는 유한 덕분이다. 유한이 무서워하지 말라고 해서, 놀이기구라 생각하라고 해서 시험을 이겨 낼 수 있었다.

 "뭐 따지고 보면 이 닭둘기 때문인걸."

 "삐잇!"

 유한이 조언을 해 줄 수 있게 된 것도 포포가 회오리 안에서 노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포포도 자신의 공이 크다는 듯, 가슴을 떡 내밀며 으쓱했다.

 "호호호, 그랬군요. 공로자는 '저분'이었던 거군요."

 "네? 저분이라뇨?"

 "작지만 위대했던 분 말입니다. 잘 돌봐 드리세요. 새로 얻은 몸이 낯설어 고생하고 있는 듯하니까."

 왜 바람의 무녀는 포포에게 존칭을 쓰는 걸까, 그리고 위대했다니 뭐가? 

 거기에 대한 답을 듣고 싶은 것은 유한도 마찬가지였지만, 아르네스는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았다.

 "아무튼 누군가의 시범이나 조언이 있었다 해도 그대에겐 실행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엇어요."

 두려워하지 않고 적대하지 않고 흐름에 몸을 맡길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있어야 진정으로 바람을 이길 수 있다.

 "그래야 바람을 이해할 수도, 바람의 힘을 빌릴 수도 있는 것이죠."

 아르네스는 소매 속에서 투명한 보석을 하나 꺼냈다.

 은빛의 반투명한 깃털이 들어 있는 보석이 바로 바람의 날개였다.

 "시아, 그대는 이걸 가질 자격이 됩니다. 그러나 이걸 그대에게 구해 오라고 한 자들은 그 자격이 있을까 의문스럽군요."

 바람의 날개를 사용하는 것은 채린이 아니다. 미케니아의 공중 요새를 부활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그대는 미케니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오래전에 멸망당한 고대 문명이라고 들었습니다만... 혹시 그들이 사악한 자들인가요?"

 채린은 얼음 궁전의 보상방에서 보았던 벽화를 떠올렸다. 

 사람과 키메라가 사이좋게 살던 문명. 우월한 문명에 심취해 거짓된 신을 섬기다가 신의 노여움을 받아 멸망한 문명이 바로 미케니아였다.

 신에게 멸망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악'이라 지칭될 수 있었다.

 "글쎄요, 그들을 악하다고 한다면 지금의 인간들이나 엘프들도 충분히 악한 존재지요."

 "그럼 어째서?"

 "그들은 너무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자긍심은 오만으로 변질되었고, 세상을 자신들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했습니다. 최고의 존재에게 최강의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은 키메라를 부리고, 또 키메라가 되는 것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더 강한 힘을 추구했고, 다른 문명이나 종족보다 우월한 지식과 기술을 갖추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아르네스 님이 탄생시킨 바람의 날개도 그들이 눈독들인 힘 중의 하나였습니다."

 키르케가 이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당시 엘프족의 제사장이었던 아르네스는 뛰어난 정령술사로 이름을 드날리고 있었다.

 원래 엘프들은 그 선조가 정령계에게 왔기 때문에 정령들과 친화도가 높았다. 그러나 아르네스의 정령 친화도는 그런 엘프들의 수준을 넘어서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바람의 정령들과 유달리 친밀했던 그녀는 바람의 무녀라 불렀고, 정령들에게서 얻어 낸 힘을 하나의 결정체로 탄생시킬 수 있었다.

  

 "그 결정체를 바람의 날개라고 불렀습니다. 바람의 날개는 소유자에게 바람의 힘을 발휘하게 해 줍니다. 하늘을 날고 폭풍을 불러오는 것도 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말입니다."

 "그래서 마도사들이 탐을 낸 거였군."

 유한과 리지스, 옌스도 키르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특히 리지스의 경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였다. 아르네스의 손에 들린 바람의 날개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처음에 아르네스 님은 그들이 원하는 만큼 바람의 날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단지 그들이 건설하는 도시에 이용할 것이라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데 악용되기라도 한 건가?'

 앞서 바람의 무녀가 말한 것이 있었다.

 자신은 선하고 올바른 용도에 쓰일 것이라 생각되어 주었지만, 진실은 다르더라고.

 아마 미케니아의 마도사들은 바람의 날개를 뭔가 나쁜 목적에 사용했던 모양이다. 본인은 물론이고 키르케도 언급하기 꺼려하는 것을 보면 꽤 악질적으로 악용했던 모양.

 '어쩐지 좀 음흉하게 생겼더라 했어.'

 유한은 공중 요새에서 만났던 이바니우스 3세를 떠올렸다.

 지나친 호의 때문에 뭔가 미심쩍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속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바람의 날개를 만들지 않았고, 남아 있는 것을 가지고 정령계로 돌아왔습니다."

 "아르네스 님은 미케니아의 마도사들을 피하기 위함이었지만, 때마침 미케니아에 신의 징벌이 떨어졌습니다. 미케니아는 멸망했지만, 그래도 아르네스 님은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반성하기 위함인가?'

 위험도 없는데 돌아가지 않았다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닌지.

 아무튼 이런 속사정을 듣게 되자 채린은 바람의 날개를 받는 것을 주저하게 되었다.

 바로 눈앞에 바람의 날개가 반짝이고 있었지만, 퀘스트를 끝마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주저하시는군요.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해요. 자신의 선의가 좋은 결과를 낳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문명의 유산을 부활시켜 보자고 퀘스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문명이 실은 굉장히 위험한 자들의 것이었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는 것은 옳지 못하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살인마를 빼내 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어째서 잘못될 수도 있는데 이걸 저에게 내놓으시는 거죠?"

 "미래는 확신할 수 없으니까요. 만약 미케니아인들이 참회했다면 그들을 돕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아르네스는 채린의 손에 바람의 날개를 쥐어 주었다.

 채린은 깜짝 놀랐다. 단지 바람의 날개가 손에 들어왔기 때문이 아니다.

 손에 들어온 바람의 날개는 2개였다.

 "그대는 충분히 이것을 받을 자격이 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는 그들을 위해 쓰고, 하나는 그대를 위해 가지세요."

 채린의 마음은 결정된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손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효과음과 함께 안내창이 떠올랐다.

 -바람의 날개를 획득하셨습니다. 이바니우스 3세에게 전달해 보상을 받으십시오.

 과연 이대로 퀘스트를 완수해도 될까?

 채린은 손바닥 위에 놓인 바람의 날개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사실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할 일은 아니다.

 현실이 아니니까.

 그저 게임사에서 꾸민 설정이니 걱정할 이유도 책임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대마왕이 부활하건, 사악한 제국이 전쟁을 일으키건 모두 게임 안에서의 일일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채린이 주저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무리 게임이라도 그 게임을 혼자 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 사람이 같은 가상현실의 공간에서 플레이를 즐기고 있다.

 만약 자신이 수행한 퀘스트 때문에 다른 유저들에게 피해가 간다면? 그때도 그냥 게임에서 있었던 일일 뿐이라고 무시해 버릴 수 있을까?

 "지그야, 나 어쩌면 되는 거야?"

 "..."

 "만약에 내가 한 퀘스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되면, 그건 나쁜 거잖아."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는 개인이 수행한 퀘스트가 단순히 경험치와 보상, 명성만 얻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한 사람의 모험이 게임상의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무역로 개척이나 던전의 숨겨진 보상방 발견이 바로 그런 사례에 속한다.

 그러한 모험의 결과는 모두에게 이롭게 나타나는 것만이 아니라 큰 피해를 입히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유한이 수행했던 드래곤 하트 획득 퀘스트만 해도 그렇다.

 만약 그가 퀘스트에 실패했더나 포기했다면 노스아크에서 유저들이 억울한 떼죽음을 맞지 않았을 것이다.

 '호의가 꼭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말은 틀리지 않아.'

 메카 드래곤과 연관이 있는 유한이기에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분명 갈리는 드래곤을 물리치기 위해서 메카 드래곤을 만들었다. 안듀라스를 물리치고 드워프들에게 자유와 북동부 산맥의 노다지 광산을 안겨 주기 위해서.

 하지만 그의 연수는 동족들에게 피해를 입혔고, 심지어 유저들까지 휘말리게 만들었다.

 그런 사례를 생각하면 채린에게 바람의 날개를 공중 요새에 전달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자칫 얼마나 많은 유저들에게 피해를 입히게 될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건 고민할 필요 없어."

 유한은 바람의 날개를 쥐고 있는 채린의 손을 움켜쥐었다.

 "퀘스트란 유저가 수행하라고 존재하는 거니까."

 "아..."

 게임이란 즐기는 것이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결과는 중요치 않아. 잘못한 것이 있으면 나중에 또 수습을 하면 그만이야.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예상하며 미적거릴 필요는 없어."

 어떻게 보면 앞뒤를 살피지 않는 막무가내.

 그러나 채린은 그 말이 틀리다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지그 네 말이 맞아."

 채린이 어떠한 결정을 내릴지, 유한이 어떠한 말을 해 줄지 긴장하고 있던 리지스와 옌스는 박수를 쳐 주었다.

 "잘했어, 주는 것을 사양하는 건 유저의 도리가 아니니까."

 "후후, 과연! 바츠라면 그렇게 말해 줘야지."

 바람의 무녀 아르네스는 채린의 결정에 만족했는지 미소를 지었다.

 "잘하셨습니다. 나는 시아 당신의 의지가 깃든 결정을 내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무녀님!" 

 아르네스의 몸이 점점 투명해졌다.

 놀란 일행의 눈앞에서 아르네스는 마치 대기에 녹아들듯 조금씩 희미해져 갔지만, 키르케는 오히려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 걸어가세요. 그리고 아무리 험하고 힘들어도 절대 물러서지 마세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람의 무녀는 마치 그곳에 없었다는 듯 사라졌고,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채린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아르네스의 마지막 인사.

 채린은 한참 동안 그 바람이 흘러간 곳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두 손엔 바람의 무녀가 건네준 바람의 날개를 꼭 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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