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돌격왕 옌스 (34/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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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 바츠지. 그렇지?"

 사람의 인식이란 때론 날카로우면서도, 부정확하기 그지없다.

 단지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장비와 옷차림을 대장장이에 맞추었을 뿐인데 지금까지 유한이 바츠라는 사실을 알아챈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는 자신이 누구였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당신 누구야?"

 유한의 물음에 사내는 비릿한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유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대체 누구냐고!"

 그가 언성을 더 높이자 사내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나? 돌격왕 옌스라고 하면 웬만한 놈들은 다 알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이름 앞에 (돌격왕)이라는 칭호가 떠올랐다.

 돌격왕은 공격 스킬인 대쉬(Dash)를 1만번 이상 성공했을 때 획득이 가능한 칭호다. 그만큼 사내의 성향이나 능력이 얼마나 공격적인지 잘 알려 주는 칭호지만, 유한이 알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난 당신이 왜 나더러 바츠라고 물었는가 알고 싶을 뿐이야."

 자신이 바츠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거기다 그는 알세인의 대장간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혹시 그가 해커거나 해커와 관련된 사람이 아닐까?

 "왜 너를 바츠라고 했냐고?"

 옌스는 씨익 웃으며 한 걸음 내딛었다. 그 순간 그의 몸에서 위험한 무언가가 감지되었다.

 '뭐야, 날 공격하려는 건가?'

 유한은 뒤로 물러서려다가 재빨리 스텝을 바꿨다. 옌스가 검보다 어깨를 먼저 내미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깊이 베기가 아냐! 저건 대쉬다!'

 한 걸음 크게 내딛기에 깊이 베기를 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 다음에 어깨를 내미는 걸 봐서는 직선 돌격 스킬인 대쉬였다.

 눈앞이 번쩍하는 순간, 주변의 대기가 크게 울렸다.

 유한은 아슬아슬하게 옌스의 공격을 피해 냈다.

 거칠고 육중한 충격파가 몸을 사납게 흔들고 지나가는 순간 머리털이 뜯겨져 후드득 흩날렸다.

 대쉬는 정면에서 힘으로 몰아붙이는 단순한 공격 스킬. 그러나 그만큼 호쾌하고 위력도 강했다. 랭크가 높을수록 위력도 배가 된다.

 '젠장, 방금 오판을 했다면...!'

 만약 간발의 차로 비켜서지 못했다면 끔찍한 결과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숄더 차지에 가드(Guard)가 풀린 다음, 상대의 양손검에 두 동강이 났을 터.

 동강이 난 자신의 몸이 땅을 뒹구는 모습을 상상하니,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운이 좋은지 모르지만 유한은 지그로 플레이하며 한 번도 죽은 적이 없었다. 아직까지 그럴 만한 상대를 만나지 못했기에, 대장장이지만 나름대로 강하다고 자신만만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나타난 자는 위험을 느끼게 할 정도로 강했다.

 아니, 강한 것보다 상대가 자신을 공격한 '적'이라는 게 문제였다. 길포드나 로키도 강하지만, 최소한 그들은 적은 아니었으니까.

 유한은 충분히 거리를 벌린 다음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2차 공격을 해 올 줄 알았던 옌스가 검에서 손을 떼며 물었다.

 "방금 이 일격이 생각나지 않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일 년 전, 그러니까 내가 초보 전사였을 때였지.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강해질 수 있나요?'라고 물어본 나에게 너는 이 스킬을 날렸다. 내 피통을 죽지 않을 만큼만 아슬아슬하게 깎아 놓은 것이지."

 "설마..."

 옌스는 떨떠름해 하는 유한의 표정을 확인하고 확신했다.

 다른 사람들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5살때 본 아버지 친구 분의 얼굴을 아직도 기억하는 자신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헤어스타일이나 차림새는 바츠 때와 딴판이지만, 눈매나 얼굴 윤곽은 그때 머릿속에 새겨 넣었던 것과 똑같았다.

 "그때 네놈에게 맞은 일격을 갚아 주고자 불철주야 광렙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의 수준에 다다랐지."

 그날의 만남 이후 바츠에 대한 동경은 원한이 되었다.

 미친 듯이 사냥을 하고, 수백의 몬스터를 상대로 맞서 싸웠다. 바츠처럼 누구의 도움이나 지원도 없이 말이다.

 옌스는 두 눈을 감고 꽉 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 처절했던 광렙의 시간을 떠올리니 파도 같은 감회가 밀려왔다.

 '그러니까 이 녀석은 그저 바츠에게 당했던?'

 유한의 수비 자세가 맥없이 풀렸다. 허탈함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 긴장감이 잔뜩 들어가 있던 근육과 신경이 흐물흐물해졌다. 태산 같은 파도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잔잔한 바다가 그를 반겼다.

 '제기랄! 뭐야 이놈은!'

 누군지 모른다. 그러나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았다.

 혹시 이놈이 대장장이 엘프 알세인의 단골, 그러니까 바츠의 아이템을 팔아넘긴 해커가 아닌가 했는데, 다 자신의 착각이었다.

 이 옌스라는 녀석은 바츠였던 시절, 자신이 독불장군인걸 모르고 헤헤거리고 접근했다 한 방 맞고 나가떨어진 귀찮은 날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날파리를 어찌 일일이 다 기억하겠는가.

 문제는 바츠 시절에 날파리였던 녀석이 왕파리가 되어 나타났다는 점이다.

 "널 찾아서 아르페디아 전체를 뒤지고 또 뒤졌다. 남들은 해킹이 되어 게임을 접었을 거라 했지만, 난 믿지 않았어! 바츠라면 분명 포기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지. 그리고 내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이봐, 나는 바츠가 아니라.."

 "부정해도 소용없다! 나를 보고 당황한 것이 그 증거!"

 "그건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야!"

 "닥쳐라! 넌 바츠가 맞다! 비록 다른 캐릭터를 하고 잇다 해도 혼이 바츠라면 전사인 것이다!"

 얼마 전, 옌스는 바츠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크게 낙담을 했었다. 미친 듯이 광렙을 하고 랭커 수준으로 캐릭터를 키운 것은 다 바츠에게 복수를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는 바츠가 이대로 사라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예상대로 지난번 인터넷 방송에서 버츄얼 에이지를 보았을 때, 환생(?)한 바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워낙 의외의 캐릭터를 하고 있어 남들은 몰랐지만, 그는 한눈에 알아봤다.

 "네가 그날 나에게 준 치욕, 오늘 되갚아 주마!"

 (2)

 옌스가 벼락같이 한 발을 내딛으며 어깨를 내밀었다.

 '쳇, 빨라 봤자 직선 공격 따위!'

 옌스의 몸이 코앞까지 다가왔지만, 유한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미 상대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했기 때문에 충분히 피할 자신이 있었다.

 하물며 똑같은 스킬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자신감이 고렙 전사를 상대로 오만한 것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킬 캔슬(Cancel)!"

 유한이 공격을 피하자 옌스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가동했던 공격 스킬을 중간에 취소해 버린 것이다. 

 스킬을 중간에 취소하려면 웬만한 숙련도로는 어림도 없었기에 유한은 허를 찔리고 말았다.

 "리(Re) 대쉬!"

 옌스는 방향을 바꿔 다시 대시를 썼다. 그가 몸을 돌려 한 발 내딛는 순간, 그의 어깨가 유한에게 벼락같이 다가왔다.

 '저거 맞으면 최소 사망이다!'

 카앙!

 불꽃이 튀며 옌스의 어깨 보호구에 검격이 작렬했다. 충돌의 순간, 유한은 뒤로 물러나지 않고 그의 어깨를 검으로 후려쳤다.

 "후후, 과연! 검격을 날려 그 반동으로 피한 건가."

 "제길, 난 바츠가 아니라고 했잖아!"

 사실 맞지만, 유한은 계속 부정했다,

 인정하면 이 이상한 작자가 계속 복수 운운하며 쫒아다닐 것이다. 그럼 굉장히 귀찮은 일이 될 터.

 "나에게 그런 거짓말은 통하지 않아. 방금 일격만 해도 그렇다. 바츠가 아니라면, 대장장이가 그런 일격을 날릴 수 있을 리 없다."

 "어째서 바츠라서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데?"

 "물론 '바츠'니까!"

 그야말로 벽창호.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옌스가 다시 달려들 기세를 보이자, 유한은 곧장 왼손을 그를 향하여 펼쳤다.

 피--잉!

 와이어의 추가 날카롭게 날아오자, 옌스는 고개를 돌렸다. 건틀렛에서 암기가 발사될 줄은 몰랐다. 급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면, 한쪽 눈을 실명했을지도 모른다.

 "하하핫! 놀랍군! 과연 바츠!"

 "이거 전혀 바츠답지 않은 공격이거든요!"

 바츠는 암기나 함정 따위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지만, 힘에 부친 상대를 만난다고 해도 고집스러울 정도로 정면 승부를 벌였다.

 유한은 왼손 손목을 교묘히 비틀었다.

 옌스를 지나친 와이어는 마치 독사처럼 그의 몸을 휘감았다.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제압해 놓으려는 것이 유한의 작전. 그러나 옌스는 휘감기는 와이어 사이를 손쉽게 빠져나갔다.

 "아니!"

 "하하핫, 너와 싸우기 위해 연마한 기술은 대쉬만이 아니지!"

 방금 전 옌스가 쓴 스킬은 휠 슬래쉬였다.

 범위 공격 스킬을 썼는데 어떻게 와이어를 피했냐고?

 보통 검을 중단으로 놓고 휘두르는 휠 슬래쉬와 달리, 그는 양손검을 머리 위로 휘두르며 휠 슬래쉬를 썼다. 그러자 그의 몸은 헬리콥터처럼 떠올랐고, 와이어는 허공만 움켜쥐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고안한 플라잉 대쉬(Flying Dash)다! 죽어라, 바츠!"

 유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늘에 떠 있던 옌스가 공중제비를 돌더니 곧장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는게 아닌가.

 발 디딜 곳 없는 허공에서 회전력으로 돌격 에너지를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정말이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참신했다. 완전히 새로운 기술이라고는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꽝!

 유한은 찰나의 순간 허리를 숙였다.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옌스는 정면의 나무와 충돌했다. 한 아름은 족히 될 아름드리나무가 중간에서 뚝 부러져 나갔다.

 대단한 일격.

 그 일격을 어깨로도, 검으로도 한것이 아니라 머리로 해냈다는 사실은 정말 정말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옌스의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후후, 어떠냐? 플라잉 대쉬의 위력이?"

 "롤링 대쉬(Rolling Dash)라고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 그러고 보니 그 이름도 괜찮군! 하하하핫! 과연 바츠! 내 숙적답게 네이밍 센스도 대단해!"

 유한이 뭐라고만 하면 무조건 바츠답단다.

 '언제 댁이 내 숙적이 되었수?'

 나무에 머리를 부딪치더니 정신줄을 놓기라도 한 것인지.

 아무튼 정말 대단한 인간이었다. 대쉬를 공중에 몸을 띄운 상태에서 사용할 생각을 하다니, 랭커들 중에서도 이 정도로 응용력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았다.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의 특성과 전투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예상 불가능한 공격을 할 수 있다니.

 '우습게볼 작자는 아니야.'

 "바츠 너와의 첫 대결을 기념해서, 이 기술을 플라이 롤링 대쉬(Fly Rolling Dash)라 이름 짓겠다."

 "누가 이름을 지어 달라고 했어? 그리고 나 바츠 아니랬잖아, 이 고릴라야!"

 짜증 나는 작자였다. 유한이 뭐라 해도 전혀 들어 쳐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바츠였던 것은 사실이었고, 전투 감각 역시 바츠의 그것이었다.

 "자, 바츠! 다시 검을 들어라!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계속 싸움을 하겠다는 듯, 옌스는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의 뜻과 달리 싸움은 지속될 수 없었다. 유한이 피하기도 했지만, 술의 주인이 그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카앙!

 옌스의 몸이 휘청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그가 들고 있는 양손검의 검면을 때린 것이다.

 소리는 한 번 울렸지만, 날아온 화살은 셋. 세발 모두 파워샷 수준의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세 발의 화살을 날린 것은 싸늘한 인상의 엘프 청년이었다.

 "싸움을 중단하시지. 마을 안에서 분쟁은 허락되어 있지 않으니까."

 자정단원이라도 되는지, '렌슬리'라는 이름의 NPC 엘프는 그럴싸한 무장을 하고 있었다. 척 봐도 레벨이나 실력이 높아 보였다.

 그러나 옌스는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시끄러! 이 역사적인 대결을 방해하는 놈은 GM이라도 베어 버릴거야!"

 "그 깨진 검으로?"

 렌슬리의 조소에 옌스는 자신의 검을 살펴보았다. 세발의 파워샷이 명중된 부분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금이 가 있었다. 이 상태라면 조금만 충격을 줘도 부서질 것이다.

 "맘대로 해 봐. 맨손으로 덤벼도 봐줄 생각은 없으니까."

 엘프 청년이 싸늘하게 말했다.

 "치잇!"

 "다시 말하지만 당장 전투를 중단해. 아니면 다음번 화살은 너희들 머리로 날아가게 될 거야."

 옌스도 더 이상 억지를 부릴 수 없었던지 검을 거두었다. 그러나 엄포를 놓는 것은 잊지 않았다.

 "오늘은 이 정도로 물러나겠다, 바츠. 하지만 다음엔 반드시 나와 결판을 내야 할 거다."

 "아놔! 바츠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난 지그라고."

 "그럼 조만간에 다시 보자, 바츠."

 유한이 끝까지 부정했지만, 옌스는 믿어 주지 않았다.

 옌스에게 질려 버린 유한은 걸음을 돌려 그가 부러트린 나무로 다가갔다. 안 그래도 알세인이 장작을 구해 오라고 했는데, 마침 쓰러진 이놈을 쓸 생각이었다.

 나무가 꽤 컸기에 장작을 팬다면 충분할 것이다.

 "포악한 인간들 때문에 숲이 멍들어 가는군."

 쓰러진 나무를 쳐다보던 렌슬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포악한 벽창호 고릴라를 통과시킨 너희들 잘못이야.'

 대체 그 옌스라는 고릴라는 무슨 수로 엘프의 숲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정령과 친화도는 어떻게 쌓은 것일까? 정령 중에 단순하고 난폭한 놈이라도 있나?

 "대체 장로님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이렇게 인간들이 설치는 걸 내버려 두다니."

 렌슬리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가 버렸다.

 그는 인간과 교류하는 현재의 정책에 대해서 불만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것은 장로보다 훨씬 높은 운영자의 뜻이다. NPC 렌슬리가 이렇게 투정할 수 있는 것도 전능(?)한 드림맥스의 사전 설정 덕분이다.

 '위험한 녀석이군.'

 NPC라고 모두 조용하고, 수동적일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게임 내에서 NPC가 사건을 일으키는 일이 종종 있었다.

 뛰어난 오크 전사가 일족을 규합해 인간 왕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거나, NPC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유저들이 반란군을 진압한다거나...

 메카 드래곤 사건만 해도 그렇다. NPC 갈리의 터무니없는 공상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선량한 유저들이 피해를 입었는가.

 '조심해야겠군. 종족 차별 테러라도 일으키면 큰일이잖아.'

 렌슬리가 그저 그런 NPC라면 모를까, 꽤 실력 있는 유저를 위협할 만한 실력의 소유자다. 충분히 경계해야 할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으니까.

 유한은 쓰러진 나무에 장작 패기 스킬을 써서 장작을 얻어 낸 다음, 곧장 잡화점으로 돌아갔다. 알세인이 원한 연료를 건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잡화점에 도착한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 바츠. 또 만나게 되었군."

 유한의 손에 들려 있던 장작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대장간 안에서 옌스가 손을 들며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어째사 이 벽창호 고릴라가 여기에?

 그러고 보니 옌스가 돌아섰던 방향이 잡화점이었다는게 뒤늦게 생각났다. 그는 부서진 검을 고치기 위해 알세인을 찾아왔던 것이다.

 엘프 마을에 대장간이라곤 여기 하나뿐이었으니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은 필연이었다.

 "역시 너와 난 그냥 헤어질 수 없는 인연인가 보군."

 씨익! 미소 지어 보이는 옌스였다.

 (3)

 "지그야, 어이 지그!"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유한은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채린과 리지스가 서 있었다.

 "저 사람이 아까 널 보고 바츠라고 하는데 왜 그러는 거야?"

 "..."

 "너 설마 예전에 바츠였어?"

 올 것이 온 건가?

 한 번도 정체를 의심받은 적이 없었다. 채린은 물론이거니와 리지스를 비롯해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 모두가 자신을 '대장장이 지그'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옌스 덕분에 이제 만방에 알려지게 되었다.

 뭐 알려져도 상관이 있을까. 이미 해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지웠던 캐릭터의 유저가 대장장이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지그가 바츠?"

 "설마 그런..."

 놀라는 눈치의 두 소녀를 보며 유한은 앞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방송국에서 아주 좋아할 것이다. 버츄얼 에이지의 그 미루라는 요정 MC가 번개같이 찾아와서 인터뷰를 요청할지도 모른다. 

 그 다음 온 인터넷 공략 사이트와 카페, 블로그들이 떠들썩해질 것이고, 해커로부터 바츠의 장비를 입수한 자들은 전원 잠수를 탈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해커를 추적하는 일은 꽤 힘들어질 것이다. 

 뭐 알세인의 단골이라는 자가 해커가 맞다면 그런 걱정은 필요 없지만...

 "호호호! 그럴 리가 없잖아!"

 "깔깔깔! 맞아. 지그가 바츠라니, 상상이 안돼!"

 다행이랄까.

 채린과 리지스는 어벙한 약골인 유한이 포악한 레드 드래곤 카세라스와 맞서 싸운 용사였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리지스도 마찬가지였다. 바츠가 해킹당했다면 다시 전사를 하지 왜 대장장이를 했겠는가. 예전에 해 봤던 직업을 택하면 육성이 훨씬 빠르고 편할 텐데 말이다.

 그러나 그려들의 마음속에 오로지 불신만 가득 찬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번에 자이언트 스톤골렘과 싸운 것을 보면...'

 '지그 이 녀석 돈줄을 쭉 밟고 다니는 게 혹시...'

 한 점의 의혹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설마'하는 생각이 '혹시'라고 판단할 수 있는 상태까지 커졌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불신이 더 강했다. 아무리 봐도 지금 유한의 모습은 석상으로 남았던 바츠의 모습과 매치되지 않았다.

 '하지만 바츠는 미남이잖아.'

 '키도 지그 녀석보다 더 컸어.'

 석상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은 두 소녀는 불신 쪽으로 무게를 잡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연방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행인데 왜 기쁘지가 않지?'

 유한은 채린과 리지스가 안 믿는 듯해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나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자랑이라 할 만한 과거를 믿어주는 사람이 없는 것도 섭섭한 일이었다.

 사실 증명하려고 해도 방법이 없는데 어쩌겠는가. 당시에 찍어놓은 스크린샷이나 기록한 모험 일지는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믿어 주는 것은 저기 벽창호 같은 고릴라 사내뿐.

 유한과 눈이 마주친 옌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기다려라, 바츠! 내 검이 수리되는 순간, 다시 너와 승부를 낼 테니까!"

 "죄송합니다. 실수를 해서 검을 깨 먹고 말았습니다.

 "..."

 알세인이 자루만 남은 검을 건네자, 옌스는 마치 돌이라도 된 것처럼 한참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사실 그의 양손검은 부러질 만했다. 오래 사용해서 내구가 꽤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렌슬리가 날림 파워샷 세 방을 맞고 거의 박살 났으니...

 하지만 하필이면 지금 이렇게 부서질 것은 무엇인가.

 "이 자식, 너 일부러 그랬지?"

 "무슨 말입니까? 생트집 잡지 마십쇼. 수리하다 보면 깨질수도 있단 말입니다."

 "닥쳐! 당장 변상해! 너 때문에 바츠와의 역사적인 대결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단 말이다!"

 옌스가 성난 고릴라처럼 펄펄 날뛰자 알세인도 어쩔 수 없다 여겨졌는지 한발 물러섰다.

 "알겠습니다. 저도 책임은 있으니까 변상을 해 드리겠습니다. 돈보다 쓸 만한 무기가 낫겠죠?"

 알세인은 잡화점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커다란 검을 하나 질질 끌고 나왔다.

 "단골에게 산 건데, 이거라면 손님에게 적절한 변상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어! 저, 저거!"

 알세인이 갖고 나온 검을 본 유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헤비 소드(Heavy Sword)라 불리는 그 검은 B급 무기 중에서 하류에 속하는 양손검이다.

 이름에 걸맞게 굉장히 무거운 데다가 밸런스도 극악이라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만 공격력은 높아서 일격필살의 공격을 날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유한도 바츠 시절에 한 자루 입수해서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때 밸런스를 조금이라도 맞춰 보려고 칼자루 끝에 커다란 납덩이를 묶어 놓았었다.

 알세인이 들고 나온 헤비 소드의 칼자루에도 뭉툭한 납덩이가 묶여 있었다. 또다시 바츠 때 썼던 장비가 나타난 것이다.

 "흠. 별로 맘에 들진 않지만, 이 정도로 용서해 주도록 하지."

 "이봐, 그 칼은..."

 "왜 그러나 바츠? 뭔가 문제가 있나?"

 "아니, 아무것도."

 유한은 그 검이 내 것이었다고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말해 버리면, 자신이 바츠라는 걸 인정하게 되는 일. 그럼 정체가 탄로 나는 것은 둘째 치고 눈앞의 고릴라가 귀찮게 할 것이다.

 "후후, 바츠 너와의 대결은 좀 미뤄야겠군. 이 헤비 소드를 익숙하게 다루려면 감을 좀 잡아야 할 것 같으니까."

 옌스가 곤란하다는 투로 말했지만, 유한은 물론이고 구경하던 채린과 리지스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앗다.

 이미 옌스는 헤비 소드를 능숙하게 휘둘러 대고 있었기 때문. 마치 가는 빗자루 휘두르듯이. 웬만한 유저들은 힘에 부쳐서 제대로 들고 있지도 못하는 걸 생각하면 입이 떡 벌어질 일이었다.

 '아무튼 저 작자에 대한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알세인의 단골이 누군지 아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 위해 알세인과 친밀도를 높이기로 했지 않던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유한은 구해 온 장작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필요하다고 했던 장작 갖고 왔어요."

 "예. 고맙습니다."

 "이거 말고 다른 부탁할 일은 없습니까? 대장간 일도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는데요."

 유한의 말에 알세인은 잠시 생각해 보는 듯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흐음...지금은 없네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도와주세요."

 "그러지 말고, 전 수리도 매우 잘한다고요."

 유한의 말에 알세인은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아뿔싸! 괜히 신경을 건드려 버린 건 아닌지.

 "지금은 절 내버려 두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 남의 도움을 바라면 늘릴 수 없는 재주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알세인은 묵묵히 망치질을 계속했다.

 어떻게든 빨리 친밀도를 올려 보고자 했던 유한으로선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를 붙들고 늘어지면 오히려 더 상황이 나빠질 것이 뻔했다.

 일단 물러나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야, 리지스. 저 미남 대장장이 꼬신다더니 어떻게 됐어?"

 "끄응, 그게 내 미모에 넘어오지 않잖아. 뇌물도 통하지 않고 말이야."

 리지스도 낭패를 본 모양이다.

 하긴 선남선녀가 사방에 널린 엘프의 숲에서 리지스의 미모가 통할 리 만무했다. 거기다 물질에 초탈한 엘프라 그런지 돈 욕심도 거의 없었다.

 "별수 없이 지금은 물러나야 하나?"

 "십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라고 해 두지 뭐."

 "후후후. 두 사람, 일이 잘 안 되나 보네."

 채린이 중간에 불쑥 끼어들었다.

 알세인에게 물을 먹은 유한과 리지스와 달리 그녀의 표정은 밝았다. 아마 알테나에게 퀘스트에 대한 정보를 들은 모양이다.

 "나는 이제 한 군데만 들르면 여기 퀘스트는 다 끝나."

 "어딜 들러야 하는데?"

 "세계수 아래. 알테나 씨가 거기로 가 보래."

 세계수는 엘프의 숲 중앙에 있는 거대한 신목(神木)이다. 이 숲은 물론이거니와, 엘프들의 근간이 되는 매우 신성한 나무다.

 바로 그 나무 아래에 바람의 날개가 있다고 알테나가 알려 주었단다.

 "세계수라면 엘프들이 신성시하는 나무인데 인간이 함부로 다가가도 되는 거야?"

 "난 이미 접근 허락을 받아서 괜찮아. 저번에도 세계수의 잎을 가져와 달라는 퀘스트를 받았었는걸."

 "헉! 세계수의 잎!"

 리지스의 눈동자에 돈 표시가 떠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계수의 잎은 고가의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고급 포션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재료였고, 잎 자체만 해도 일정 시간 동안 스텟을 올려 주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헤헤, 시아야. 퀘스트 도와줄 테니까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으음, 별로 어려울 건 없는데..."

 "그래도 혼자가면 심심하잖아.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도 몰라?"

 세계수의 잎을 뭉텅이로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어디 잎뿐인가. 재수만 좋으면 수액과 가지, 열매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잎에 비해 그런 것은 부르는 것이 값.

 "시아야, 나도 같이 가 줄게."

 "지그 너도 가겠다고?"

 유한이 나선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 녀석의 만행을 감시해야 네 퀘스트 완수에 문제가 안 될 것 같아서 말이야."

 "뭐야! 내가 사고라도 친다는 거야!"

 "뻔하지 뭐."

 리지스라면 세계수의 잎을 몽땅 따거나, 수액을 받겠다고 나무에 대롱을 박는다거나, 아예 톱질을 하려 들지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만약 그리 된다면 엘프들의 반응은 뻔하다. 신성한 세계수를 훼손한 인간을 가만히 두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인간에게 적대적인 엘프가 존재하는 판국에 말이다. 

 자칫하면 퀘스트 실패는 물론 채린의 목숨이 위험해질수 있었다.

 "내가 같이 가면 시아도 심심하진 않을 거 아냐."

 "후훗, 신경 써 줘서 고마운걸."

 "뭘, 친구니까 당연한 거지."

 친구니까.

 그러나 웬지 채린은 그 말이 예전에 들었을 때보다 기쁘게 들리지 않았다. 당연하다 생각되면서도 뭔가 섭섭한 느낌. 뭔가 확실히 표현할 수 없었다.

 "여어, 바츠. 어디 모험이라도 떠나는 건가?"

 근처에서 열심히 헤비 소드를 휘두르고 있던 옌스가 다가왔다. 그가 또 뭔 수작을 부릴지 모르기에 유한은 일단 거리를 벌리고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너답지 않은걸? 항상 솔플만 했었잖아."

 "내가 바츠도 아닌데 바츠 같은 플레이를 왜 하겠수?"

 "훗, 스스로를 부정하려고 무리를 하는군. 그런다고 내 눈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스스로를 부정하는 건 맞지만 무리를 하는 건 아니다. 지그가 된 뒤로는 파티플을 여러 번 했었으니까.

 그래서 파티원들과 모험을 떠나는 유한의 모습에는 어색함이라곤 티끌만큼도 없었다.

 "자자, 저 고릴라 아저씨는 무시하고 바람의 날개를 찾으러 가자."

 "뭣이? 이봐, 바츠! 기다리지 못해!"

 옌스가 거듭 불렀지만, 유한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깨끗하게 무시하다니, 정말 저놈은 바츠가 아니란 말인가?'

 아니다. 그럴리 없다.

 차림새나 분위기는 바뀌었지만, 놈은 분명 바츠의 얼굴과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때 자신을 한 방 갈기고 돌아섰던 오만한 바츠의 모습이나, 파티원들과 함께 떠나 버리는 저 대장장이의 모습은 전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때보다도 지금의 모습이 왠지 더 화가 났다.

 놈의 파티원이 여자라는 것. 그것도 스타일 좋고 늘씬한 미소녀 궁수에 화려하고 도도한 미모의 상인이라는 사실이 질투심헤 기름을 끼얹었다.

 "기다렷, 바츠! 거기 서지 못해!"

 옌스는 숲 속으로 사라지는 유한 일행을 쫒아갔다. 무거운 검을 쥔 그의 손은 필요 이상 힘이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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