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무역로 개척 (13/143)

무역로 개척 

1

"드,드디어 찾았다!"

쿵쾅쿵쾅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해커가 털어간 바츠 시절의 아이템.

그중의 하나가 유한의 손에 들어왔다. 대장장이 캐릭터를 키워 해커를 추적하기로 결심한 뒤로 처음 거둔 쾌거였다.

"님아,대체 뭘 찾았다는 거심?"

갑부 초딩의 물음에 유한은 잠시 머뭇거렸다.

대체 뭐라고 말해 줘야 할까?

"실은 내가 바츠 유저고,이것은 해커가 털어간 내 아이템이니까 돌려받아야겠구나"

라는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템이 문제가 아니다. 유한이 정체를 밝히는 순간 일파만파 소문이 퍼져 갈것이고,기껏 부상한 해커는 총알같이 잠수해 버릴것이다.

"아무것도 아냐.흠이 난곳을 찾았다는거지"

"그래염? 그럼 깔끔하게 잘 고쳐 주셈"

유한은 정성을 다해 레인저의 활을 고쳐주었다.

내구가 하나도 떨어지지 않은 완벽 수리로 활을 돌려받자 초딩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우와!님,킹짱이셈!자,여기 사례금 받으삼!"

수리비만 갑절로 100골드를 내놓았다. 그러나 유한은 고개를 내저엇다.

"수리비는 필요없고,대신 형한테 레인터 세트를 어디서 샀는지 안 가르쳐 줄래?"

그러자 초딩은 자신이 왔던 거리를 가리켰다.

'서문 근처의 무기상 많은 데서 샀심.'헌드레드'라고 좌판 깔고 장사하는 상인이 팔았삼"

유한은 곧장 판을 접고 서문으로 달려갔다.

과연 초딩이 말한대로 헌드레드라는 이름의 상인 유저가 있었다. 유한은 돗자리 위에 검과 갑옷 따위를 진열해 놓고 팔고 있는 유저에게 다가갔다.

"헌드레드님,혹시 아까 초딩 꼬마에게 레인저 세트 팔았습니까?"

"레인저 세트?아,네 그랬지요"

워낙에 흔하지 않은 목록이라 사 간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다.갑부 초딩이 사준 덕분에 돈도많이 벌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봅니까?"

잠시 멈칫하던 유한은 곧장 말을 꾸며냈다.

"혹시 남는거 있으면 사려고요.여친에게 선물하려고"

"그래요? 하지만 내가 구한건 한 세트뿐인데요.워낙에 흔하지 않은 장비라서"

"누구한테 산건데요?"

"시장에서였어요.'록펠러'라고 마차 끌고 다니면서 파는 사람입니다. 매일 시장에 나와서 장사하니까 한번 가보세요"

유한은 처음에 이 헌드레드가 혹시 해커가 아닐까 의심했었다. 그러나 그는 일말의 머뭇거림이 없었다.

더구나 시장에 있다는 록펠러를 찾아가자 정말 그에게 레인터 세트를팔았다고 했다.

"근데 나도 딴 사람에게 산거야.그저께였나? 이름이 분명........"

그날 유한은 하루종일 발덴과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레인저 세트의 구매자들을 찾았다.

때때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유저도 있어 곤란을 겪기도 했지만 용모나 차림새로 구매자를 파악해서 추적을 계속할수 있었다.

그런 추적 끝에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을 '알리에트'라는 여자 궁수로,레벨 80대의 중수였다.

"아아,레인저 세트!"

그녀는 기억한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름전쯤인가 그때 샀었죠.정말 괴상한 방법으로 샀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어요"

"괴상한 방법으로 사다니요?"

현질이라도 했단 말인가. 유한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공략 사이트의 채팅방에서 잡담하며 놀고있을때였어요.누가 불쑥 들어오더니 레인터 세트를 사지않겠냐고 글을 띄우는거에요"

"그,그 사람 이름이?"

해커가 분명하다.

지금까지 유한이추적했던 사람들의 거래방식과 달랐다.

"이름은 몰라요.더구나 비회원 접속이었고,이름도 성의 없는 영어와 숫자 덩어리였어요"

한마디로 기억하지못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름도 기억 못하면서 거랠 어떻게 했는지.

유한의 물음에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괴상한 방법으로 샀다는거죠"

"어떻게 괴상했는데요?"

"내가 사겠다고 하니까 바로 귓속말을 주더군요.'폐허의 땅'에 있는 이층 교회 뒤쪽 나무밑에 물건을 묻어놓을테니,돈은 맞은편 집의 침대 밑에 두라고 하더라고요"

유한은 기가 막였다.

이건 괴상한게 아니라 어처구니가 없는 짓이었다.

"도대체 그렇게 만난 사람을 어떻게 믿고 거래를 튼 겁니까?"

"가격이 무척 쌌거든요.거의 시세의 반값수준.그러니까 나 같은 중수가 레인저 세트를 살수 있었던 거죠"

".........."

확실히 그만하면 혹할만햇지만, 그래도 이해되지 않는게 있었다. 만약 유한에게 그런식으로 거래가 들어왔다면 물건만 가져가고 돈은 놓고 가지 않았을것이다.

"나도 그러려고 했어요.그런데 레인저 세트가'봉인의 상자'에 들어있더라고요"

봉인의 상자는 007가방 비슷한 것으로,암호를 말해야 그안의 물건을 꺼내 갈수 있다. 보통은 유저들이 보물 찾기 놀이를 할때 쓰는데,1회용이라서 안의 물건을 꺼내면 사라지게끔 되어 있다.

"갑자기 멀리서 화살이 날아왔는데 거기에 편지가 있었죠.돈을지불해야 암호를 가르쳐 준다는거에요"

결국 알리에트는 약속 장소에 돈을 두었고,나중에 화살 편지로 암호가 날아오더란다.

'치밀한 자식이구나'

오프라인은 물론,온라인에서도 정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거기다 돈만 받아먹고 암호 따윈 몰라라 할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정직해서가 아니라 시시하게 사기같은 짓으로 소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함이다.

"하여튼 그렇게까지 하니까 좀 미심쩍더라고요.반값에 넘기는걸 보면 혹시 부정한방법으로 입수한 물건이 아닌가 싶기도하고"

알리에트는 찝찝한 나머지 레인저의 활 내구가 20정도 떨어지자 곧바로 처분해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물건은 돌고돌다 유한에게 수리를 의뢰한 초딩에게 건네진것이다.

유한은 채팅 사이트의 운영자에게 문의해보았다. 하지만, 알리에트와 쪽지를 주고받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쳇 ,쉽지 않군'

아이템을 추적하다보면 해커를 잡을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그게 아니었다.

상대는 매우 치밀한데다 신중하기까지 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놈의 덜미를 잡는것은 굉장히 힘들것이다

'그래도 포기할수는 없지!'

포기할수 없는 일이다.

어차피 쉽지않을것은 각오했던바.아무리 놈이 치밀하고 신중해도 사람인이상 실수를 할것이고,그러면 꼬리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이번만 해도 그랬다.

놈은 거래 캐릭터로 궁수를 이용했다. 레벨 80대 궁수인 알리에트의 시야밖에서 활을 쏠만한 실력자라면 최소 100레벨은 될것이다.

물론 그것으로 놈을 섣부르게 판단할수는 없다. 궁수 캐릭 외에 다른것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놈이 아르페디아 온라인을 하고있고,또한 궁수 캐릭을 가지고 있다는것을 안것만으로도 소득이었다.

2

해커 추적을 마친 유한은 광장으로 돌아왔다. 해커를 잡는것도 중요하지만 지그의 스킬을 올리는것도 중요했다.

접었던 좌판을 다시 펴려는데 눈에 띄는것이 있었다.

"어라,웬 사람들이지?"

유한이 고개를돌린곳은 광장 게시판이 있는곳이었다.

게시판에는 왕궁에서 내놓은 퀘스트가 올라오는데 머더러를 잡기위해 수배 퀘스트가 가장 빈번했다. 그러나 흔한 퀘스트가 올라온거라면 사람들이 저렇게 몰려 잇지는 않을것이다.유한은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를 해치고 게시판에 올라온 공고문을 보았다.

-모집-

위대하신 국왕 폐하께서 이번에 북방의 노스아크와 무역로를 열기로 하셨다.이에 가장 먼저 무역로를 개척하고 교역에 참가할 상인과 상단을 호위할용병,그리고 상행을 지원할 기술자를 선발하는 바이다.

발덴의 백성이라면 누구라도 환영한다.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 하는 인재라면 지체하지 말고 외무성으로 달려와 이번 개척대에 참가하라.

                    -바르카스 왕국 외무대신 콘라드.

'어라? 새로 만들어진 퀘스트인가?'

유한이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바르카스 왕국와 노스아크는 직접무역을 하지 않는다.두 나라사이에 네메시스 산맥이라는 거대한 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산맥이 험하기도 험하거니와,몬스터들이 득실득실해 지금까지는 제 3국을 통한 간접 모역만을 해 왔다.

그런데 이번 공고문을 보니 그런 설정이 바뀌려는 모양이었다.

주변의 NPC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들어봐도 그랬다. 국왕이 영구적인 교역로를 만들기 위해 개척대를 조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한은 즉시 퀘스트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았다.

난이도 B랭크의 퀘스트.

마녀데보라의 던전이 C랭크인것을 감안하면 그 난이도를능히 짐작할수 있다.

"난이도가 B인데 쉽지 않겠지?"

"대신 보상이 꽤 좋을거야"

"하긴,처음 공개되는 퀘스트인데 게임사에서 신경 좀 쓰겠지?"

"좋아!우리 한번 해보자"

보상에눈이먼 유저들은 하나둘 외무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한도 퀘스트에 참가하기로했다.

해커를잡기 위해서라도 지그의 레벨을 올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최소 A급 장비를 수리할수 있어야 바츠의 장비를 만질수 있고,해커 역시 찾을수 있었으니까.

레벨을 올리기 위해서는 던전이나 퀘스트만큼 좋은게 없다.

외무성 앞 임시로 만든 천막에서 NPC관리가 신청 용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유저들은 줄을 서서 신청 용지를 받았는데,뭔가 문제가 있는 지 간간히 소란이 일었다.

"이봐,왜 나는 신청 용지를 못 준다는거야!내가누군지 알아? 나 레벨 130대의 마법사 듀크라고!"

"실력이 높다고 아무나 신청을 받아주지 않습니다.듀크님은 베레타 공화국 국민이아닙니까"

"그래서? 그게 뭐가 어쨌다는건데?"

"공고문에 밝혔듯이 이번 선발대는 발덴 백성 중에서만 뽑습니다. 듀크님은 조건이 안됩니다"

고렙이라고,명성이 높은 유저라고 무조건 참여할수 없는 퀘스트인 모양이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고렙들은이번 퀘스트에 참가하기 힘들듯했다. 다들 레벨이 오르면 바르카스 왕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정착하기때문이다.

유한은 아직 저렙이고 바르카스 왕국을 떠나지 않은 덕분에 신청 용지를 받을수 있었다.

"이름을 쓰고 지원할 업무의 신청함에 용지를 넣으시오"

NPC관리가 가리키는곳에는 3개의 신청함이 있었다.

각각 '호위 업무','통상 업무','지원 업무'라고 적혀 있었는데,유저들은 자기 직업에 맞는업무의 신청함에 용지를 넣었다.

유한은 지원 업무에 신청 용지를 넣었다.

그러자 곧장 안내창이 떠올랐다.

[무역로 개척]퀘스트에 참가 신청을 하셨습니다.

호위할 용병을 뽑는다는것은 몬스터의 습격이든,도적의 노림이든 전투가 벌어진다는 소리고,노스아크까지 거리를 생각하면 한두번의 전투로 끝나지 않을 공산이 컸다.

거듭되는 전투는 유저들의 장비 내구를 깎을것이 뻔한일.그것은 수리 랭크를 높일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리고 암 브레이크를 실전에서 쓸수 있을지도 모르지'

유한은 슬슬 퀘스트가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문제는 퀘스트신청자는 많고,인원은 한정돼 있다는 것이다. 이번퀘스트의 정원은 70명인데,신청자는 직므 외무성에 모인 사람만 봐도 수백명은 되어 보였다.

그만큼 갱쟁률은 치열했다.

선발에 떨어지면 당연히 퀘스트에 참가하지 못한다.

'그럴수는 없지.새로운 퀘스트인데 내가 그걸 놓칠것 같아?'

유한은 바츠때를 떠올려 보았다. 그때도 이런식으로 신청자중에서 몇명을 선발하는 퀘스트가 여럿 있었는데,유한은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

명성도 때문이다.

선발 권한을 NPC가 갖고 있는데,명성도 높은 캐릭터를 우선으로 하였기에 그가 요청을 할 경우에는 함부로 거부하지 못했다.

'문제는 지그의 명성도가 먹힐수 있느냐는건데'

이제 겨우 명성치 380.

유저들 사이에서 솜씨 좋다고 입소문 탄것과 달리 대장장이 지그는 NPC관리에게 이제 겨우 초보를 벗어난 수준으로밖에 보이지 않을것이다.

'뭔가 방법이.........'

그 순간 유한의 눈에 번쩍 띄는 NPC가 있었다.

랑켈산의 광산 마을에서 만났던 기사 기욘.그가 이번 무역로 개척에 참가하는지 관리들을 상대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유한은 곧장 기욘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안녕하십니까"

"오,자네는 전에 광산 마을에서보았던......."

"지그라고 합니다"

"그랬지.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인가? 자네도 개척대에 끼려고?"

"하하하!당연한거 아니겠습니까? 노스아크는 드워프들의 나라.드워프하면 제철 기술!나라에 도움이 되게 무역로도 뚫고 ,철의 왕궁에 찾아가 볼 기회가 생겼는데 그걸놓칠수야 없지요"

유한의 말에 동감한다는듯 기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자네말대로 노스아크는 제철과공업이 대륙에서 최고로 발전한 나라지.여러 나라의 장인들이 노스아크의 기술을 배우려고 노력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어"

유한은 문득 파부치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역청탄의 비밀을 알아내려다가 쫓겨났었다고 하던가.

"만약 자네가 노스아크로 가서 그곳의 기술을 익혀 온다면 우리 왕국의 국방에 큰 도움이 될것이야.제철 기술은 바로 한 나라의 군사력과 직결되는 것이니까"

"이를 말슴이십니까.하지만 제가 이번에 노스아크로 갈수 있을지........에휴,일단은 선발 명단에 올라야 할텐데 워낙에 쟁쟁한 장인들이 많아서요"

말을 하면서 유한은 슬쩍 눈치를 보았다.

일부러'저 좀 뽑아주세요'라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진 않았다. 그저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숨만 내쉬었을뿐.

이 성실해 보이는 기사NPC의 성격으로 보아 노골적인 청탁을 했다가는 도리어 부작용이 일어날수도 잇었다.

재수가 없으면 '이놈을 당장 하옥하라!'의 상황이 벌어질지도.

아무튼 유한이 초조한 기색을 보이자 기욘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흠,그 점이라면 염려말게.자네라면 뽑힐거야.광산 마을을 구원한 용맹한 대장장이를 개척대에 뽑지 않는다면 대체 누굴 뽑는단 말인가?"

"하지만 선발은 심사관에 의해 공정하게 진행되지 않겠습니까"

"합당한 인물이라면 추천할수도 있는 문제지.그 점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자네는먼길을 떠날 준비나 단단히 해두게"

"아!감사합니다"

유한은 기욘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런 유한이 기특해 보였는지 기욘은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는 외무성 안으로 들어갔다. 분명 추천을 하러가는 것이리라.

'크크크,이제 선발은 따 놓은 당사이다'

유한은 자신이 뽑힐거라 믿어 의심치않았다.

내심 미소를 지은 그가 중앙 광장으로 돌아가려고 할때였다.외무성 청사 밖의 그늘진 곳에서 두사람이 실랑이하는 모습을 우연찮게 볼수 있었다.

"아 글쎄.이러면 안된다니까"

"좋은게 좋은거라고 관리님이 편의를 봐주시면 제가 가만히 안있죠"

유저로 보이는 여자가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배불뚝이 NPC관리에게 건넸다. 생김새로 보아 돈주머니가 틀림없었다.

"이걸로는 부족한데......."

좀전까지 거절하던 태도는 어디가고 배불뚝이 관리가 탐욕스런 표정을 지었다.

"호호호!어디 장사 하루이틀 해요?돈걱정은 말고 제가 이번 개척대에 포함될수 있도록 힘이나 써 주세요"

보아하니 퀘스트에 참가하려고 뇌물을 먹이는 중인듯했다.

"알았어.내 확실히 처리해 줄테니까 나중에 또 그만큼 성의를 보여야돼"

"염려마세요.개척대에 뽑히면 이만큼 또 상납할테니까"

'쳇,현실 세상만 썩은게 아니라 게임세계도 썩었구먼'

유한은 두 사람을 향해 혀를 끌끌 찼다.

부패 관리가 있는것도 ,뇌물을 먹일수 있는것도 게임상에 그런 설정과 기능이 있으니까 가능할것이다.

물론 유한이라 해서 그리 떳떳한것은 아니다.그도 빽을 써서 퀘스트의 선발권을 따내려 햇으니까.그러나 자신은 적어도 뇌물을 먹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래서 게임이 더 재미있는지도 모르지'

현실의 세세하고 구질구질한 모습을 적당히 차용함으로써 유저의 호기심을끌어낸다. 가상현실이라는 말에 어울리도록 말이다.

아니 이것은 가상현실이 아니라 또 다른 현실일지도 모른다.

아르페디아는 단순한 가상현실게임이 아니라 현대인이 경험하고 있는 또 다른 세계인지도.

그런데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유한의 눈이 그만 여성 유저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생각보다 상당한 미녀였다.

붉은색의 드레스를 입어서 그런지 몰라도 화려한 장미를 연상시켰다. 눈매가 날카롭고 입꼬리가 치켜올라간 것도 한 성격할듯.

나이는 유한과 비슷해 보였다.

그녀는 유한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한마디 쏘아붙였다.

"멀봐? 뇌물 먹이는거 처음봐?"

유한은 기가 막혔다. 최소한 들켰으니 부끄러운줄은 알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뻔뻔함이라니.

"어디가서 소문내면 내 손에 죽을줄 알아!"

유한에게 한마디 더 쏘아붙인 그녀는 유한이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총총 걸음으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허참!별별 인간이 다 있구먼"

아르페디아 온라인이 국민 게임이라는 말을 실감할수 있었다.

온갖 군상들이 다 접속해서 즐기고 있는것을 보니까 말이다.

3

다음날 아침,퀘스트 참가자명단이 발표되었다.

광장의 게시판을 본 유한은 지원 업무 명단에 올라와 있는 자신의 이름을 확인할수 있었다. 역시 기욘이 잘처리해준 모양이다.

-축하합니다. 무역로 개척 퀘스트에 선발되셨습니다.

안내창이 떠오르며 이번 퀘스트에 대한 정보들이 쭉 나열되었다.

[무역로 개척]

-그대는 바르카스 왕국과 노스아크 사이에 첫번째 직통 무역을 일궈내고 교역로를 개척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용감한 그대여!왕국의 부강과 발전에 혼신의 힘을 다하라!

1. 퀘스트 진행 기간 : 현실 시간으로 5일간.

2. 퀘스트 진행 시간 : 현실 시간으로 오후 10~새벽 3시.

*해당 시간에 접속하지 않으면 낙오된것으로 간주됩니다. 낙오되면 퀘스트는 더 이상 참가할수 없으니,유저 분들은 시간을 엄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탈락자들은 한숨과 함께 돌아서고 선발된 유저들은 앞으로어떻게 준비할것인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특히 상인유저들은 무엇을 사서 팔것인지 사업 계획을 짜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럼,나도 슬슬 준비해 볼까?'

유한은 여행기간동안 필요한 물건을 사러 중앙 광장 뒤편에 있는 상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상현실 게임에서 전투나 생산 활동을 하면 스태미나를 소모하기에 유저들은 항상 식량을 휴대해야 한다.

바르카스 왕국은 식량이 풍부한 나라라 어디에서는 쉽게 식량을 구할수 있지만, 이번은 달랐다. 몬스터가 우글우글한 네메시스 산맥에서 식량을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노스아크에서 식량을 구입하기도 쉽지 않다.

노스아크는 대륙 북부에 위치한 공업 국가라 식량이 매우 비쌌기에 현지에서 식량을 구입한다는 것은 땅에다 돈을 버리는것과 마찬가지였다.

설마 NPC들인 개척단 퀘스트에 참가한 유저들을 굶기기야 하겠냐마는 그래도 비상식량은 휴대하는게 좋았다.

'어디 보자.비용대 효과가 좋은 먹을거리가.........'

드림맥스에서 보내준 캡슐은 미각 기능이 강화된 신품이었지만, 유한은 미식가가 아니라서 그점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현실에서조차도 먹을것은 무엇이든 배 안고플정도로 먹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유한이 선택한 것은 바로 건빵과 육포였다.

가격이 저렴할뿐만 아니라 인벤토리 공간도 그다지 차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헛? 사람이 꽤 많잖아'

유한처럼 생각한 유저들이 많은지,시장의 제과점과 상점에는 사람들이 와글와글했다.이야기하는것을 들어보니 대부분 노스아크로 사무역을 떠나는 유저들이었다.

"어서 오십시오.무엇을 사시겠습니까?"

"건빵 백개 주세요"

게임속에서 건빵은 현실에서 파는것처럼 작고 앙증맞은것이 아니다.모양은 비슷하지만, 크기가 손바닥만했다.

"건빵만 사십니까? 버터나 크림은 필요없으십니까? 비스켓이 건빵보다 나은데 그건 어떠십니까? 가격은 좀더 비싸지만, 삼백개 이상 구입시에는 할인을........"

"아 그냥 달라는걸로 줘요"

유한은 제과점 주인 NPC의 상술에 넘어가지 않았다.

하여간 이놈의 게임은 어떻겓느 유저들의 골드를 긁어모으려고 난리였다.

'응?'

건빵을 사서 돌아서던 유한은 제과점안으로 우르르 들어오는 일단의 무리들과 마주쳤다.

소규모 길드라도 되는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하나같이 인상이 험악해 보였다. 가장 나이 어린 유저는 30대 초반,제일나이 들어보이는 유저는 유한의 아버지 뻘이었다.

'용병 길드인가?'

유한은 별생각 없이 그들 옆을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제일 나이 많아 보이는 털보 유저의 말에 유한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쯧쯧,세상 참 어찌 되려는지.이 시간에 한창 학교에 서 공부를 해야 할 고삐리가 방구석에서 게임이나 하고앉았으니"

누구라고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시선의 각도나 어투가 유한을 두고 이야기한듯했다.

'아놔,이 아저씨가!'

보통때라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지만, 해커를 추적하다 놓친일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을때라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짜증이 분노를 일으키고,분노는 이성을 장악했다.

"뉘 집 자식들이지 몰라도 참 불쌍하구먼.가정을 책임져야 할 가장이 한가롭게 대낮에 게임이나 하고 있고"

유한의 비꼼에 털보는 화가났는지 다가와 어깨를 움켜쥐었다.

"어이,꼬마야.방금 뭐라고 했지?"

"안경을 쓰셔야겠군요.세상에 이렇게 큰 꼬마 봤습니까?"

"허허,이거관을 봐야 정신을 차릴 놈이로군"

"번지수 잘못 잡으셨네요.이건 무협 게임이 아니라 판타지 게임이거든요"

수틀리면 비무를 신청할수 있는 무협 온라인게임과 달리,판타지 게임에선 지정된 장소나 이벤트가 아니면 PK를 인정하지 않는다.

무시하고 공격해서 유저를 죽임면 머더러가 된다. 상대방이 도발하거나 놀렸다고해도.

아무튼 유한이 꼬박꼬박 대들자,장년의 사내와 같은 길드에 속한 유저들은 입을 쩍 벌렸다.

레벨도 낮아보이는 고삐리 녀석이 대체 무슨 깡으로 자기네 대장의 심기를 이토록 건드리는지 의아했다.

걸어다니는 폭탄이라 부를 정도로 한번 눈이 뒤집어지면 뵈는게 없는대장인데.그들은 곧 고삐리가 경을 칠것을 믿어 의심치않았다.

'길포드라고?'

유한은 시비가 붙은 상대의 이름을 슬쩍 확인해 보았다.어디선가 들어본것 같은데 확실히 기억나지 않았다.

하긴,비슷한 이름의 유저가 하나둘도 아니고,좀 유명한 유저가 있다면 그 아류의 이름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아르페디아 온라인이다.

"하룻강아지 범무서운줄 모른다더니.꼬마야,이 아저씨가 마음만 먹으면 너 따윈 손가락 튕기는 것만으로 죽일수 있다"

털보의 협박에 유한은 지지 않았다.

"그럼 어디 한번 해보시죠.아주 대놓고 머더러 한번 돼 보세요.이곳의 유저들이 아주 좋아할 겁니다"

털보의 인상이 더 험악해졌다.

그러나 무슨생각에선지 유한을 붙들엇던 손을 놓았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 그냥 보내주마.하지만, 다음에 마주쳤을때는 말조심하는게 좋을거다"

"흥!누가 말조심해야 하는데요"

유한은 끝까지 지지않고 말대꾸를 한뒤 제과점을 나섰다.

"대장 ,저 고삐리 자식을 그냥 두실겁니까?"

"저한테 맡기십쇼.조용히 한방에 끝내겠습니다. 머더러가 되면 수배 시간이 풀릴때까지 숨어 있으면 그만입니다."

부하들이 한마디씩 하고 나섰다.

길포드는 그들의 행동을 말렸다.

"어허!레드 타이거 용병대가 애송이에게 조롱당해 PK까지 하더라고 소문을 내고 싶은거냐?"

"하지만........"

"나도 혼쭐을 내주고 싶은 마음은 너희들과 다르지 않다. 허나 우린 어른이다. 어른이 어린애와 싸워서야 쓰나"

길포드의 점잖은 말에 부하들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대장이 오늘 뭔가 잘못 먹었나?'

'그러게.요 며칠 딸과 함께 지내더니 머리가 이상해진것이 틀림없어'

부하들이 저마다 이런 생각을할때 길포드가 말을 이었다.

"여기서 먹을걸 잔뜩 산것을 보면 고삐리 녀석도 노스아크로 가는게 분명하다. 틀림없이 이번 무역에 참가할터..........."

레드 타이거 용병대도 무역로 개척 퀘스트에 참가하기로 되어있다. 유저들을 선발한 것과 별개로 바르카스 왕궁에서 개척대의 안전을 위해 경호를 의뢰했기 때문이다.

"그때 녀석을 요리하면돼"

씨익!

길포드가 사악한 미소를 짓자 부하들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이 되었다.

이번 개척대는 노스아크까지 가야하는 퀘스트다. 당연히 하루이틀에 끝나지 않는다. 그동안 저 버릇없는 녀석을 손봐줄 기회는 많을것이다.

'그런데 아까 그놈의 이름이 지그였던가?'

길포드는 문득 고삐리의 이름이 생각났다.

낯설지 않은 이름.분명 어디서 들어본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대체 어디서 들었던 것일까. 며칠전에도 들었던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했지만, 떠오르지않았다. 오히려 생각하려 할수록 더 생각이 나지않는것 같았다.

'그런건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보면 되겠지'

일단은 노스아크로 떠날준비부터 하는게 먼저였다.

                                            BY RA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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