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퀘스트를 받다
1
"아함~!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아르페디아 온라인은 현실과 1: 3의 비율로 시간이 흐른다.
유한이 캡슐에서 지난밤을 꼴딱 세웠으니 게임상으로 만 하루하고도 반이 지나간것이다.
"제길!대장장이 되는게 왜 이렇게 어려워? 공략집에는 그렇게 안나와 있던데..........."
유한은 투덜거리며 캡슐을 나섰다.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시간을 보니 새벽 5시 30분.
마침 오늘이 일요일이라 학원을 가지 않아도 되는게 다행이었다.
유한은 냉장고에서 빵과 우유를 꺼내먹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상성이 너무 나쁜가? 캐릭터를 새로 바꿔봐?'
야장 NPC와 상성이 좋은 캐릭터로 새로 만들까 싶었다.
그러나 그동안 했던 노가다들이 아까웠다.
더구나 고생한 만큼 스탯도 올라가지 않았던가.
거기다 오기도 생겼다.어려운 만큼 포기하 기 싫어졌다.
유한 특유의 똥고집이 발동한것이다.
망할 야장 NPC가 어디까지 갈구나 보자며 이를 뿌드득 갈아붙였다.
다시 게임에 접속한 유한은 견습생으로서 대장간 일을 수행했다.
보통 견습생들은 연장을 나르거나 재료와 연료를 가져다주는 대장간의 잔신부름부터 시작했다.
그러다가 보다 상위의 일들을 배우게 되는데 여기서 하나둘씩 스킬을 익히곤 했다.
유한도 허드렛일을 얼마쯤 하다가 야장 NPC의 부름을 받았다.
"네놈도 어느정도 익숙해진거 같으니 이제 일을 가르치도록 하겠다. 네가 제일 먼저 배울것은 광석을 제련하는 일이다"
야장 NPC는 시범을 보이듯이 빈 고로에 숯을 다녀 넣고 광석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장작을 넣고 불을 붙이자 이내 고로에서 쇳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대장장이에게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스킬이다. 숙제를 내줄테니 제대로 터득해 놓도록"
야장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효과음과 함께 유한의 앞에 퀘스트창이 펼쳐졌다.
[제련 스킬 익히기]
1.동괴 10개 제작.
2.철괴 10개 제작.
-동괴 1개 제작에는 동광석 10개필요.철괴 1개 제작에는 철광석 10개가 필요하다.
*완료하면 제련 스킬을 익힐수 있다.
광석이나 연료는 대장간에 잇는걸 얼마든지 가져와 쓸수 있었다.
유한은 야장 NPC가 보여준대로 고로에 광석을 넣고 불을 지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로의 구멍으로 쇳물이 흘러나오자 유한은 그것을 틀에 받아서 괴로 만들었다.
"뭐야,되게 쉽잖아"
동괴 10개를 만들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철괴를 만드는일은 그리만만치 않았다. 아무리 불을 지펴도 고로에서 쇳물이 흘러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놈아,그렇게 나무만 태운다고철광석이 녹겠느냐?"
유한이 계속 장작만 집어넣고 있자,야장이 한심하다는듯 고개를저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온도가 영 안올라가는데요"
"이런 멍청한 놈!풀무는 장식으로 달린줄 알아?"
야장은 고로 옆에 놓인 풀무를 가리켰다.
그가 풀무의 손잡이를 잡고 앞뒤로 밀고 당기자 고로의 불꽃이 거세게 타올랐다.
"바람은 불꽃을 강하게 해준다. 멍하게 있지 말고 네놈이 직접 바람을 일으켜!"
'맞다!산소 공급!'
불을 강하게 지피기 위해서는 다량의 산소가 필요하다.
유한은 풀무의 손잡이를 밀고 당기며 고로에 계속 공기를 불어넣었다.
그런데 이 일은 만만치 않았다.
지루하고 힘든데다가,불가마 같은 고로 옆에서 쉬지않고 몸을 움직여야 했다.
땀으로 목욕을 한듯 온몸이 흠뻑 젖어들었다.
"크읏!좋아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보자고!"
유한은 이를 악문채 풀무질을 반복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고로의 구멍에서 뻘건 쇳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유한은 재빨리 틀에다가 그 쇳물을 받았다.
그렇게 철괴 10개를 만들어 내자 곧바로 안내창이 떠올랐다.
[제련 스킬]을 익히셨습니다.
-솜씨가 1올랐습니다.
인내심이 1 올랐습니다.
*어려운 일을 참고 견디는자만이 앞으로 나아갈수 있습니다.
-불에 대한 내성이 생겼습니다.
화염 속성이 가미된 물리적 공격이나,마법에 잘 견딜수 있습니다.
화염의 속성에 대해서는 유한도 익히 알고 있었다.
과거 바츠 시절,그의 속성이 화염이었다.화염의 브레스를 극복하고 레드드래곤을 잡을수 있었던것도,플레임 소드를 휘두를수 있었던것도 이 속성에 기인한 바가 컸다.
"휴,드디어 익혔다"
몇시간을 매달린끝에 9랭크의 제련 스킬을 익힐수 있었다.
보통 견습생이나 하급 대장장이들은 제련이 9~7랭크였고,중급은 6~4,상급은 3~1랭크다.
랭크가 높아질수록 상위 랭크로 오르기 위해서는 보다많은 수련 경험치를 필요로한다.
제련 랭크가 높을수록 같은 양의 광석으로 질 좋고 더 많은 양의 금속을 얻을수 있다.
그렇기에 대장장이를 플레이하는 유저라면 제련 기술은 반드시 일정 수준까지 익혀 놓아야했다.
'자,잠깐!근데 이건 왜 이래?'
제련을 9랭크에서 8랭크로 올리려면 당연히 스킬 습득때보다 많은 수련 경험치를 필요로 한다.
공략 사이트에는 동괴 200개,철괴 100개를 제작하면 8랭크로 올라갈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유한의 스킬 수련 목록에 적힌 수량은 동괴 300개,철괴 150개였다.
공략 사이트에 올려진것보다1,5배는 더 많았다.
"버그인가? 아니면 새로 패치된건가?"
유한은 게임을 잠시 중단하고 컴퓨터로 공식 홈페이지와 공략 사이트들을 둘러보았다.
버그라면 신고를 해서 고쳐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문구가 유한의 눈에 턱 하니 들어왔다.
수련 경험치는 직업과 캐릭터의 상성에 따라 달라질수 있습니다. 직업 적성에 맞을수록 수련경험치가 줄어들고,적성이 안 맞을수록 수련 경험치가 많아집니다.
유한은 자신의 상성이 대장장이와 나쁜것이 떠올랐다.
그땐'노가다만 하고 말겠지'하고 넘어갔는데,이런 지뢰가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크악!이것들이 지금 장난하나!"
이렇게 되면 앞으로 랭크가 오를때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수련 경험치를 쌓아야 한다. 남이 철괴 1000개를 만들때,유한은 1500개를 만들어야 하는것이다.
1,5배라지만,랭크가 높아질수록 그 차이가 장난이아니게 되어 버린다.
"아놔,어쩌지......그냥 캐릭터 지울까?"
장기적으로 봤을떄는 그러는것이 맞았다.하지만,오기가 생겼다.
바츠 시절에는 힘든 상대라고,어려운 퀘스트라고 절대 피하지않았다.
어렵고 힘들어도 도전하고 앞으로 전진했던것이 바츠였다.
입장이 바뀌었다고,캐릭터 상성이 힘들다고 그 정신을 버리면 정말로 바츠를 죽이는것이 되 버린다.
"에라,그냥 하자"
유한은 다시 게임에 접속해 고로에 불을 지피고 풀무질을했다.
어렵고 힘들수록 그 열매는 달다.
그것은 바츠 시절에도 경험해보았다.
강한 몬스터일수록 좋은 아이템을 주었고,어려운 퀘스트일수록 많은 명성을 올려주었다.
분면 처음에 이리 힘들어도 나중에 좋은것이 있을것이다. 유한은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며칠동안 풀무질 노가다를 계속했다.
"호오,이제 좀 쓸만한 수준까지 되었군"
제련이 8랭크에 오르자 늙은 대장장이가 찾아와 말을 걸었다.
"흘흘!네가 이정도까지 될줄은 몰랐다. 지그 네놈은 저기 카프라는 녀석보다도 싹수가 없어 보였으니까"
카프는 유한과 노가다를 같이 하면서 조언을 해줬던 유저다.
그는 이미 제련기술을 일정 수준까지 올린뒤 생산 스킬을 배우고 있었다.
'저 양반보다 싹수가 없어보였다니.......도대체 난 이야장 영감하고 얼마나 상성이 나쁜거야?'
카프라는 유저도 야장 NPC와 상성이 좋지 않았는데,그렇다면 지그는 거의 상극이라 할만한 수준이 아닐지.
보통 유저들은 잡다한 알바나 퀘스트를 하다보면 레벨20이 금방된다.그리고 그쯤에 관련 스킬들의 랭크를 일정치까지 올려놓고 NPC의 인정을 받앙 정식 대장장이가 된다.
그러나 지그의 경우는 레벨 30이 다되어가는데도 아직도 견습생이었다.
남들보다 많은 수련 경험치때문에 발목이 잡힌것이다.
"그동안 쭉 풀무질만 하면 제련을 해 왔으렸다?"
'덕분에 생산 스킬은 아직 배우지도 못했다고요!'
지그는 정말 대장장이가 될만한 상성이 아닌 모양이다.
"대장장이가 좋은 물건을 만들려면 손재주도 있어야 하지만, 좋은 재료도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제련은 중요한것이다"
"예예,누가 아니라고 했습니까.저도 8랭크까지 올려놨으니까 이제 딴거나 좀 올리렵니다"
이제는 미뤄뒀던 생산 스킬을 익히고 올려야한다.
유한은 제련으로 얻어낸 철괴들을 갖고 모루 쪽으로 다가갔다.그런데 늙은 야장이 유한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웠다.
"잠깐,너에게 따로 시킬 일이 있다"
"시키다뇨?또 뭘?"
유한의 인상이 팍 일그러졋다.
이놈의 야장 NPC는 도대체 자신과 무슨 원수를 졌기에 하는일마다 족족 태클을 건단 말인가.
'지금까지의 노력이고 뭐고 여기서 확 다뒤집어엎어?'
마음같아서 이놈의 야장을 한대 갈기고 싶었다.
그러나 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선 명성과 평가라는것이 있어서 NPC라 할지라도 함부로 대하면 명성이 깎이고 나쁜 평가를 받게 된다.
이성의 끈이 툭 끊기려는것을 간신히 잡았을 때였다.
퀘스트를 받을떄나 들을수 있는 특수 효과음과 함께 메시지창이 떴다.
[랑켈산 퀘스트]를 받으시겠습니까?
유한의 두눈이 휘둥그레졌다.
랑켈산 퀘스트라니!
지금까지 야장 NPC가 이런 퀘스트를 준다는 정보는 없었다.아르페디아 온라인 공식 홈페이지에도 언급이 없었고,대장장이 유저들이 올려놓은 공략 사례들에도 없었다.
지금까지 야장 NPC는 대장간과 관련된 일들을 준것이 고작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오호라!지금 내가 알려지지않은 퀘스트를 받은것인가?'
최악의 상성을 가진 캐릭터가 모든 난관을 이겨냈을때 보상으로 주는 퀘스트가 아닐까?
아르페디아 온라인의 퀘스트는 유저들이 알고 있는것보다 훨씬 더 많아 이렇게 숨겨진 퀘스트가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것은 이 랑켈산 퀘스트란게 어떤 보상을 해주는가다'
현재 지그의 레벨이 낮아서 그리 대단한 보상은 아닐지도 모른다.어쩌면 시시한것일지도......
그러나 미지의 영역에 발을 딛는다는 자체가 흥미로운 일.
그것도 남들이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것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무슨 일을 해야 하는데요?"
"랑켈산의 광산에 가서 안젤로란 자를 찾거나.내가 보냈다고 하면 일거리를 줄것이다. 그일을 하면서 나오는 광물 10개를 나에게 가지고 오면 도니다"
[랑켈산 퀘스트]
-랑켈산 광산의 광부 안젤로를 찾아가자.
광물 10개를 습득하여 야장에게 전달하면 퀘스트를 완수할수 있다.
'뭐야,광산에 가서 광 캐오라는건가?'
기한 제한은 없었다. 생각보다 시시한 일은 아닌지?
실망감을 느끼던 유한에게 늙은 야장이 주섬주섬 뭔가를 내밀었다.
"단순히 광물을 캐오는거라고 생각지 말거라.너같은 애송이에게 랑켈산은 험한곳이다. 그래서 이 장비를 내주는것이니 단단히 준비를 하고 가라"
"이거 저 주시는겁니까?"
군침이 꼴깍 들었다.
"이게 얼마짜린데 공짜로 주겠느냐!임무를 마치면 꼭 돌려줘야 한다"
'쳇!좋다가 말았네'
유한의 입술이 댓자나 튀어나왔다.
야장 NPC가 건네준것은 한벌의 갑옷과 한자루의 검,그리고 아이템 가방이었다.
[야장 파부치의 갑옷]
방어 : 30
내구 : 50
설명 : 아래위 한벌로 투박해 보이지만 초보들이 장비하기에 딱 좋다. 상점에서 파는 초보용 갑옷들보다 방어력이 높고,내구성도 뛰어나다.
[야장 파부치의 검]
공격 : 25
방어 : 2
내구 : 30
설명 : 길이가 다소 짧고 투박하지만 다루기 편리하다.
[야장 파부치의 가방]
설명 : 주로 광물을 담는 용도로 쓰이며 최대 100개의 아이템까지 넣을수 있다.
야창 NPC의 이름이 파부치인 모양이다.
가방을 열어보니 안에 얼마간의 식량가 비싼 힐링 포션이 들어있었다.
다쳤을때나 몬스터에게 공격을 받았을때 요긴하게 쓸수 있을것이다.
"고맙습니다.영감님"
"흥,시킨 일이나 잘해라"
효과음이 들리거나 따로 살펴본것도 아니지만, 왠지 야장 NPC와 친밀도가 높아진것은 아닌가 싶었다.
'확실히 미운정도 드니까 좋네.이런 일도 다 생기고'
유한은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갑옷을 입고 검을 드니,어쩐지 예전의 바츠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2
광삼이 있는 랑켈산은 왕도 발덴에서 한나절정도 떨어진곳이다.
왕도에서 비교적 가깝고 나무열매나 약초등 여러가지 아이템을 모으고 사냥을 하면서 경험치를 높일수 있어 초보들의 명당으로 불리는곳이다.
유한도 바츠를 처음 만들었을때 이곳에서 레벨을 높였다 .그러나 고렙이 된 뒤로는 한번도 찾지 않은 곳이었다.
"하아,감회가 새롭구나"
유한은 곳곳에 흩어져 들개나 코볼트같이 비교적 손쉬운 먹잇감들을 사냥하는 초보 유저들을 보며 아련한 에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나 '초보때 이곳에서 렙업했다'는것 외에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무리도 아니지,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어 했으니까'
랑켈산은 말그대로 초보들이 거치는장소.
이곳에 무슨 던전이 있는것도 아니고,희소가치가높은 아이템을 주는 몬스터가 있는것도 아니다.
고렙이 되면서 유한은 초보때 쓰던 장비들을 팔거나 버렸고,아르페디아 온라인에서 지원하는 모험 일지는 커녕 그 흔한 스크린샷 하나도 찍지 않았다.
'이렇게 될줄 알았으면 기록이나 착실히 남겨 둘것을............'
그럼 캐릭터가 해킹당했어도 섭섭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텍스트 파일로 저장되는 모험 일지나 스크린샷은 해킹을 당해도 사라지지않는다.왜 자신은 그런것에소홀했을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말이다.
어쨌거나 유한은 앞으로'지그의 기록'은 부지런히 남겨두리라 결심했다.
4월 26.대장장이 견습생 지그가 늙은 야장의 특별 퀘스트를수행하러 가는중임.
유한은 모험 일지를 켜서 그렇게 기록하고는 저장했다.
전경이 좋은 곳에서 스크린샷도 한장 찍었다.
그렇게 기록을 마쳤을때였다.
갑자기 주변에서 초보유저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악!피해!놈이 나타났다!"
"필드 보스가 떴다!"
아래쪽 계곡을 내려다보니 집채만한 멧돼지 한마리가 날뛰고 있었다.
'레이징 보어(Razing Boar)다!'
일명 미친 멧돼지라 불리는 랑켈산의 필드 보스다.
게임 시간으로 하루에 한번 씩 소환되는 놈은 산속을 이리저리 들쑤시며 초보 유저들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다.이곳에 들리는 유저들의 평균레벨이 20~30대 사이인데,놈의 레벨은 38.
레이징 보어를 잡으려면 적어도 5명 이상의 유저가 힘을 합치거나 레벨 40은 되어야 단독으로 가능했다.
그런데,불행하게도 지금 이 주변에는 고렙 유저는커녕 중렙 유저들도 없었다.
"꺄아아아!살려줘!"
미친 맷돼지는 계곡을 휘젓고 다니는것으로 보였지만, 실제로 한 사람만 쫓아다니고 있었다.
활을 든 궁수 소녀.
그녀가 쫓기는 이유는 미친 돼지의 옆구리에 꽂힌 화살을 보면 충분히 추정해 볼수 있었다.
'레벨도 안되는 주제에 필드 보스의 성질을 건드렸구먼'
쯧쯧 혀를 찬 유한은 광산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는 몇 발자국 가지 못했다.
레이징 보어에 쫓겨다니는 소녀의 비명이 계속 들려왔기 때문.
저 궁수 소녀가 누군지 모른다. 멀리 떨어져 있어 소리가 그리 크게 들리는것도 아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소녀의 비명은 계속 귓가에 울리고 있었따.
마치 자신을 부르기라도 하듯이.
"쳇!시끄러워 죽겠네"
유한은 발걸음을 돌렸다.
귀찮지만, 광산에가기전에 저 성가진 비명부터 어떻게 없애야 할 듯싶었다.
3
'히잉, 왜 자꾸 나만 쫓아오는거야!'
채린은울상이 되어서 개울을 건넜다. 혹시 레이징 보어가 물을 무서워해서 따돌릴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놈은 몇번읭 도약으로 개울을 간단히 넘었다.
"뀌이이이익!"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채린의 모습에 화가 났는지 레이징 보어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아아!이렇게 죽는건가?'
더이상 움직일 기운이 남아 있지 않던 채린은 눈을 찔끔 감았다. 통감 옵션을 최소화로 해 놨기에 그리 아프지는 않겠지만, 집채만 한 놈이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모습은 너무나 무시무시했다.
그때 그녀의 귀에 구원과도 같은 말소리가 들렸다.
"이 바보야!거기서 눈을 감으면 어떡해!옆으로 굴러!놈은 직진밖에 몰라!"
채린은마지막 힘을 짜내 옆으로 몸을 날렸다.
거칠에 돌진하던 레이징 보어는 눈앞에서 소녀가 사라지자 몸을 돌리려 애썼다.
그러나 관성때문에 쉽게 멈춰 설수 없었다. 거기다 왼쪽 다리를 베어오는 화끈한 느낌은 소녀를 잊게 만들어주기 충분했다.
"어이,돼지.나한테 한번 덤벼 보시지"
"꾸익!"
소녀를 구한것은 바로 유한이었다.
현재 지그의 레벨은 28.허나 전투 스킬을 올리지않았기에 전투력은 그보다 아래 레벨의 전사들보다도 약하다 할수 있었다.
필드 보스를 잡을만한 레벨은 아니다. 그러나 절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분명 예전에도 이놈을 잡았어.그때도 레벨이 한참 낮고 전투 스킬도 별로 없었지'
오픈 베타 시절 겁없이 레이징 보어한테 덤벼든 기억이났다.
그러나 그때 어떤식으로 이 미친 돼지를 요리했는지 생각이 나지않았다. 분명 녀석의 저돌적인 움직임을 이용했다는것은 떠올랐지만...........
"퀴이익!"
'이크!정신 차리자!'
유한은 멍하게 있다가 레이징 보어에게 받힐뻔했다.유한이 옆으로 살짝 발을 빼면서 공격을 피하자,레이징 보어는다시 몸을 비틀어 달려들어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유한은 가볍게 피해 버렸다.
"우와아!저 님 대단하다"
"마치 투우사 같아"
주변에서 구경하던 초보유저들이 감탄을 아끼지않았다.
거칠고 저돌적인 필드 보스를 상대로 여유있는 몸놀림을 구사할수 있다니.
'그래!아직 바츠의 전투 감각은 날아가지 않았군!'
캐릭터는 지워졌어도 바츠를 조종할때의 감각은 남아있었다.
물론 전사였던 바츠때와는 달라서 과감하게 공격을 퍼부을수는 없다.
'이제 생각이 난다. 그때도 이런식으로 피하며 녀석의 패턴을 파악했지.그렇게 패턴을 파악해서 피하고 난뒤.........'
그다음은 들고 있던 대검으로 레이징 보어의 목을 갈랐다.
그 일격에 크리티컬이 제대로 터지면서 레이징 보어는 한방에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깊이베기'를 익히지 못했어'
깊이베기는'베기 수련'을 마스터하면 익히게 되는 전투 스킬로,전사라면 가장 먼저 익히고 레벨의 고하없이 유용하게 사용할수 있는 스킬이다.
당시 바츠로 미친 돼지를 잡을떄도 깊이 베기를 사용했다.
그러나지금의 지그는 그어떤 필살기도 없다. 깊이베기를 안쓰고 벨수는 있겠지만,그렇게 되면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힐수 없다.
'어딘가 약점이 없나?'
아르페디아 온라인은 단순히 치고받는 게임이 아니다. 약점이 있고,급소가 존재해서 잘 응용만 하면 적은 힘으로도 일격필살이 가능했다.
레이징 보어는 두꺼운 가죽과 근육을 자랑한다. 거기다 무시무시한 저돌성을 갖고 있어 치명적인 약점이나 급소를 찾기는 무척 어려웠다.
"찾았다!"
유한은 레이징 보어가 재차 달려들자 비스듬히 몸을 돌리며 검을 찔렀다.
살가죽 가르는 소리와 함께 야장의 검이 레이징 보어의 머리에 깊게 박혔다.
"꿰에에에엑!"
달려오는 관성 때문에 레이징 보어는 금방 멈춰서지못했다.
땅바닥에 머리르 처박다시피 하며 주르륵 미끄러지다가 얼마후 완전히 축 늘어져 버렸다.
"우왓!잡았다!"
"그것도 단 한방에!"
유저들의 탄성이 흘러나오는동안,유한의 눈앞에 안내창이 연달아 나타났다.
-경험치 360을 얻었습니다.
-레벨 29가 되셨습니다.
힘이 1 올랐습니다.
*앞으로 좀더 강한 힘으로 사냥할수 있습니다.
-레벨 30이 되셨습니다.
민첩성이 1 올랐습니다.
*몬스터의 공격을 좀더 빠르게 피하거나 움직일수 있습니다.
-레벨 31이 되셨습니다.
*한번에 3레벨을 올린 당신의 힘이 3올랐습니다.
행운이 2 올랐습니다.
*행운은 당신이 사냥을 하거나 던전을 탐사할때 아이템을 발견할 확률을 높여 줄것입니다.
-명성이 10올랐습니다.
-멧돼지 삼겹살을 얻었습니다.
멧돼지 가죽을 얻었습니다.
멧돼지 이빨 5개를 얻었습니다.
"나이스!"
레벨 상승과 아이템 획득을 알려주는 창들을 보며 유한은 주먹을불끈 쥐었다.
필드 보스라서 그런지 경험치를 꽤 많이주었다.
덕분에한번에 3레벨 이상 올랐고,추가 스탯도 받았다. 일종의 보너스인 셈이다. 기껏해야 1~2포인트지만,티끌 모아 태산이 되듯 나중에는 상당한 도움이 된다.
이 때문에유한은 바츠 시절에 경험치를 많이주는 필드 보스나고렙 몬스터들을 노려가며 레벨을 올렸다.
물론 경험치를 많이주는 몬스터는 그만큼 강하고 위험했지만,이겨낸만큼 대가도 충분했다.
항상 자기보다 강한 놈들과 싸우다 보니 레드 드래곤과 혼자 싸워도 물러서지 않을만큼 배짱도 생겼고.
"우와,어떻게 한방에 죽일수가 있지?"
"미친 멧돼지 미간에 칼을 찔러넣었잖아.저러니까 한방에 갈수 밖에 없지"
유한은안내창에서 일러준 아이템들을 챙긴뒤,레이징 보어의 미간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찰나의 순간에 급소로 찎은것이 바로레이징 보어의 미간이었고,거기에다가 검을 깊숙이 찔러 넣자 뇌까지 관통된 미친 멧돼지는 죽을수밖에 없었다.
물론 레이징 보어가 저돌적으로 덤벼들지않았다면 시도할수 없었을것이다.
그의 힘만으로는 멧돼지의 단단한 두개골을 꿰뚫을 능력이 안되었으니까.
"나도 저런식으로 한번 잡아볼까?"
"미쳤냐? 저렇게 하는게 아무나 될것 같아?"
배짱이 없으면 저리못한다.
저렇게 할수 있다는건 레벨의 고하를 떠나 게임에서 사냥이나 전투를 상당히 많이 해봤다는 증거다.
"이봐,잠깐!"
유한이 레이징 보어를 죽이고 다시 갈길을 가는데 누군가 그를 불렀다.
돌아보니 아까 레이징 보어에게 쫓기던 궁수 소녀가 서 있었다.
좀전에는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는데,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소녀였다.
맑은 목소리에 어울리는 용모와 맵시를 갖추고있었는데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진짜 예쁘군.성형도 이정도까지는 안될텐데'
아르페디아 온라인은 기본적으로 캐릭터가 유저의 용모와 체격에 맞춰서 만들어진다. 점이나 흉터같은것은 없앨수 있지만, 얼굴 윤곽이나 골격 자체는 수정할수 없다.
물론 계정을 현질하면 바꿀수 있지만, 여기선 패스.
"난 '시아'라고 해.아까는 사정이 여의치 못해서 인사를 못했어.구해줘서 정말 고마워"
원래 게임 내에서 사람들과 사귀지않는데다가 여성에 대해서 서투른 유한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괜히 화끈거리고 심장이 두근두근 했다.
"다음부터는 수준에 맞는 몹을 잡는게 좋겠어.남에게 피해를 안 끼치려면 말이야"
말을 내뱉고 유한은아차 싶었다.
적당히 조언을 해준답시고 꺼낸 말인데,어쩐지 비아냥거리는 투인것 같았다.
상대도 그렇게 느꼈는지 말투가 달라졌다.
"뭐라고? 방금 무슨 의미야?"
"그러니까 내 말은..........분수를 알라는거야"
이게 아닌데!이번에도 적당한 말을 찾다 그만 엉뚱한 소리를 해버렸다. 왜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해서 저 에쁜애의 인상이 돌아가게 만드는건지 모르겠다.
채린은 두손을 허리에 척 올리며 소리쳤다.
"사람 우습게 보지마!내가 화살이 떨어져서 도망친거지.화살만 있었으면 미친 멧돼지쯤은 충분히 잡을수 있었어"
"그럴지도"
유한은 절대 소녀의 실력을 비하할뜻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말투는 오해를 사기에 충분할정도로 교만했다.
유한은 자신의 입에서 왜 이런 말투가 나오는지 알고 있었다.
독불장군이었던 바츠 시절 .그는 자신을 아는 척하거나 친근하게 구는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대하여 쫓아버리곤 했다. 괜히 친절하게 굴면 달라붙어서 여간 귀찮지 않았으니까.
'이상하다.대장간에서 일할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오랜만에'바츠다운'전투를 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자신은 바츠가 아니다. 교만한 말투를 내뱉을 만큼 레벨도 높지않고 유명하지도 않다.
만약 이 궁수 소녀가 울컥해서 자신에게 활이라도 쏴 버리면 자신은 꼼짝없이 죽음이다.
물론 소녀는 머더러(Murderer)가 되겠지만.
"잘났네.진짜.게임 좀 했다고 재는거야 뭐야?"
"좀 한건 사실이지"
"오호!그러셔? 그런분이 왜 이런 초보들만 오는 랑켈산에 오셨을까?"
"누가 사냥하러 왔데? 난 퀘스트 하러 온거다"
"흥!알게 뭐야"
다행히 그즘에서 말다툼은 끝났다.
주변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이 부담스러웠는지 소녀가 찬바람을 쌩 일으키며 가 버렸기 때문이다.
'뭔가 멍청한 짓을 해 버렸군'
바츠 시절부터 줄곧 게임을 했지만, 저렇게 예쁜 소녀와 만난것은 처음이었다.
아니,사실 예쁜 여자 유저들은 많았다. 가까이 할 기회가 없었고,이쪽에서도'바츠스럽게'먼저 대쉬하지 않았을뿐.
이렇게 우연히 기회가 만들어지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서투르고 멍청한 자신은 그것을 걷어차 버렸다.
'잘하면 여자친구를 사귀게 됐을지도 모르는데...........'
아르페디아 온라인에는 게임을 하면서 사귀게 된 커플들이 많았다.
같이 파티를 이뤄 게임에 열중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정이 생겨나는 것이다.
일명 닭살이라고 불리는 유저들은 레벨업보다 상대방과의 데이트에 열중한 나머지 솔로 부대원들의 부러움과 시샘을 사기도 했다.
'솔로부대원들이여!커플 연방을 타도하고 솔로 제국을 만들자!'
'이곳은 솔로 부대원들의 전용 사냥터임.커플 연방의 출입을 엄금함'
닭살들의 애정 행각이 얼마나 지나쳤으면 필드 곳곳에위와 같은 문구나 팻말을 심심찮게 발견할수 있었다.
'훗,내 팔자에 여자 친구는..........'
한번피식 웃어 버린 유한은 광산을 찾으러 떠났다.
BY RAY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