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라파엘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있든 없든, 마왕들과 함께 디아블로와 벨제뷔트까지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는 큰 영향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대천사장인 라파엘이 가지고 있던 검, 기아스는 다르다. 그 검이 가이아의 손에 들어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었다.
기아스는 원래부터 가이아의 것이었다. 그것은 무기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애초부터 가이아의 일부라고 보는 게 보다 정확했다.
기아스를 손에 쥠으로서 가이아는 보다 완벽해졌다.
“이걸 말하는 것이냐?”
가이아의 손바닥 위로 한 자루의 검이 둥둥 떠다녔다. 그 검을 본 벨제뷔트의 눈살이 와락 찌푸려졌다.
“기아스…….”
벨제뷔트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검. 지금은 상처가 다 치료된 후지만, 벨제뷔트는 아직까지도 성검 기아스에 당한 상처가 쓰라렸다.
최강의 대천사 미카엘도 문제지만, 벨제뷔트가 천사들에게 당한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성검 기아스 때문이었다. 성검 기아스는 벨제뷔트의 힘에 제약을 걸 정도로 강한 신력을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힘의 본질은 가이아의 것으로, 벨제뷔트보다 상위의 힘이었다.
만약 라파엘이 아닌 다른 대천사가 벨제뷔트를 잡는데 손을 거들었다면, 벨제뷔트가 허무하게 사로잡히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천사장이 대천사장의 징표를 버렸다는 건가? 꽤 오래 전부터 내려온 전통이 깨지는 것도 참 한 순간이군.”
디아블로가 가이아의 손에 들여 있는 기아스를 보며 비웃었다. 디아블로가 기억하기로도 가이아의 기아스가 대천사장에게 내려오던 건 꽤나 오래 된 전통이었다. 영원이라는 시간 동안에도 그것은 단 한 번도 깨어진 적이 없었다.
그것이 깨어졌다는 것은 곧, 그만큼 천사들이 궁지에 몰렸다는 뜻이었다. 고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떨렸다.
‘제대로 싸울 생각이군.’
디아블로는 치천사 가이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은 가이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지만, 가이아와 디아블로는 너무 반대되는 만큼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다만 디아블로는 치천사 가이아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로 미루어 보아 천사와 악마들의 전쟁에 별로 관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번 전쟁에서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큰 개입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어쩌면 전쟁의 승패를 떠나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봐온 치천사에 대한 디아블로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기아스를 손에 쥔 가이아는 진심으로 싸울 생각이었다.
“디아블로. 너는 네 자식들을 사지로 몰고 온 것이냐?”
“자식들? 내 자식이 어디 있어?”
“……그렇군. 그랬지. 넌 나와는 달리, 네 아이들을 자식들이 아닌 도구로 생각했지.”
“개소리 마라, 가이아. 너희 천사들이야 그런 소꿉놀이를 좋아할지 몰라도, 우린 아이야.”
천사들은 가이아를 어머니로 생각하고, 가이아는 천사들을 자식들로 생각한다. 하지만 디아블로는 악마들을 한낱 도구로, 그리고 악마들은 디아블로를 복종해야 할 왕으로 생각한다.
서로간의 생각의 차이. 하지만 이것 역시 서로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쓸데없는 말은 여기까지 하지.”
화악-.
가이아의 손 위에서 떠다니던 기아스의 크기가 순식간에 거대해졌다. 십여 미터의 덩치를 가진 가이아의 몸집에 맞게 말이다.
검을 든 아름다운 신이 나타났다. 미의 여신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던 그녀가 기아스를 들자, 전쟁의 신이 현신한 것만 같았다.
그녀를 바라보던 우성의 몸이 떨렸다.
태양신 라의 현신과 천신의 현신까지. 신(神)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존재의 현신과 마주하고, 싸워보기까지 한 우성이었다. 하지만 그들과 가이아의 차이는 본체가 현신한 가짜인가, 아니면 그 존재 자체인가를 들 수 있었다.
치천사 가이아는 진짜다. 그릇에 힘을 빌린 게 아니었다. 태양신 라나 천신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본신의 힘을 제대로 불러들이지 못한 상태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우성은 태양신 라의 현신과 천신의 현신을 마주했을 때에도 받지 못했던 압도적인 느낌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신(神).’
치천사 가이아, 그녀야말로 진정한 신이었다.
영원이라는 시간과 함께 태양신의 최초로 빚어낸 천사였다. 영생이라는 힘은 애초에 피조물에게 허락된 힘이 아니었다.
“디아블로, 너의 아이들에게 사죄하여라. 지금 이 자리에서 모두 죽게 될 터이니.”
“개소리는 무시하고…….”
디아블로가 손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주위에 있는 마왕들이 일제히 힘을 끌어 모았다.
가이아, 한 존재의 힘과 수많은 마왕들과 군주급 악마들의 힘이 신전 안에서 얽혀들었다. 대천사장인 라파엘은 벨제뷔트와 눈을 마주치며 새로운 자신의 검을 꺼내들었다.
악마들이 뿜어낸 마기가 치천사 가이아의 몸에서 흘러나온 신력에 먹혀들었다. 두 상반된 힘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죽여.”
디아블로의 말이 떨어진 순간.
쿠구구구구-!
마왕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메피스토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현신시켰고, 플뤼톤은 거대한 불꽃을 뿜었다. 루시퍼는 네 쌍의 검은 날개를 꺼내며 검을 들고 날아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가이아의 검이 움직였다.
사악-.
가이아는 검을 부드럽고 느리게 휘두른 것 같았다. 모두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그 순간, 모든 이들이 함께 느려졌다.
가이아의 검은 피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막아낼 수도 없었다. 무조건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검격을 피할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과 함께 수많은 악마들이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이 군주급 악마들이었는데, 군주급 악마들 중에서는 기아스의 일격에 살아남은 이들이 두 손에 꼽힐 정도였다.
마왕들은 그나마 나았지만 몇몇이 목숨을 잃었다. 뒤늦게 합류한 마왕 데이몬, 마몬, 플뤼톤. 이렇게 세 명의 마왕이 목숨을 잃었다.
루시퍼를 비롯한 몇몇 마왕들은 간신히 검격을 피할 수 있었고, 메피스토는 무릎 아래쪽이 잘려나갔다.
“괜찮나?”
그리고 우성은, 벨제뷔트에게 목숨을 빚졌다.
가만히 눈을 뜨고 죽을 뻔한 우성을 벨제뷔트가 낚아채 구한 것이다.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한 우성은 어리둥절했으나, 곧 목숨을 잃은 마왕들과 악마 군주들을 보고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멍청하게 있지 마라. 아무래도 네 도움이 꽤 많이 필요할 것 같으니.”
가이아의 힘을 두 눈으로 확인한 벨제뷔트는 제법 긴장한 얼굴이었다. 말로만 들었던 태초의 존재를 눈앞에 마주하자, 그 경이적인 힘에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놀라지 않은 이는 디아블로밖에는 없었다. 그 역시 가이아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태초에 빚어진 존재였다. 그는 가이아가 이 정도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처음부터 세게 나오는군.”
가이아는 곧장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 있던 루시퍼는 기아스를 피해 빠르게 움직였다. 날개 한짝이 베어져 나가며 루시퍼가 몸을 휘청거렸다.
디아블로는 가이아가 처음부터 무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가이아라고 해도 저만한 힘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 세상을 뒤덮은 신력으로 가득한 공간도 그렇고, 기아스를 무리하게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 분명한 오버 페이스였다.
‘그래도 이대로 가다간…….’
디아블로는 과연 마왕들이 얼마나 버텨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아무리 힘이 빠졌다고 해도 적어도 마왕이 다섯 이상은 있어야 힘이 빠진 가이아를 어찌 해 볼 수 있었다. 여기서 마왕들과 악마 군주들을 잃고 돌아간다면, 다음 기회는 없었다.
한 번 공격당한 가이아가 계속해서 가만히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만약 마왕들을 잃고, 가이아가 반격한다면 반대로 악마 진영이 끝장이었다.
“이방인.”
“네?”
“어서 힘을 사용해라. 무슨 수를 써서든.”
명령조의 말에 우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우성 역시 그러고 싶었다.
‘안 되는 걸 어쩌라고.’
우성은 가이아를 마주친 순간부터 아포피스의 힘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왕들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디아블로와 벨제뷔트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우성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이 힘을 다 더해도, 가이아를 상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고.
물론 우성은 디아블로만큼 가이아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직감이라는 게 있었다. 그리고 우성의 직감은 꽤 정확한 편이었다.
다급하긴 우성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여기서 우성이 힘을 사용하지 못해서 악마 진영이 가이아에게 패한다면? 싸움은 악마들의 패배나 마찬가지였다. 마왕들을 잃어버린 악마들이 가이아를 쓰러뜨릴 수 있을 리 없었다.
만약 마왕들이 모두 죽고 난 뒤 우성이 아포피스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우성은 과연 아포피스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더라도 자신 혼자서 가이아를 쓰러뜨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대체 왜!’
우성이 아포피스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아귀가 으스러져라 힘을 주고, 아무리 마기를 불어넣어도 아포피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뭔가 잘되지 않는 모양이군.”
휘익-.
벨제뷔트는 손에 들고 있던 우성을 멀리 뒤쪽으로 던져버렸다. 제법 강하게 던졌지만 우성은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걸리적거릴 거면 거기서 찌그러져 있어라. 네놈 보호하느라 제대로 싸울 수가 없으니까.”
벨제뷔트 역시 이번 싸움에서 우성이 중요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성격에 누군가를 보호한다는 건 누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우성은 가이아를 죽일 수 있는 열쇠였다. 악마 진영의 가장 큰 패는 벨제뷔트도, 디아블로도 아닌, 바로 우성이었다.
하지만 힘을 사용할 수 없는 우성의 힘은 다른 마왕들보다도 못하다. 군주급 악마들과 비교해도 아주 큰 차이는 없었다.
파삭-.
그 때, 루시퍼의 몸이 반으로 베어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처음 세 명의 악마가 죽고, 가이아의 시선을 끌던 그가 드디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루시퍼는 애초에 천사였다. 그 때문일까? 자식을 죽였다는 생각에 가이아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다음 생에는 부디 올바른 아이로 태어나거라.”
루시퍼를 베어 넘긴 가이아의 시선이 가장 뒤편에 있는 우성에게로 향했다. 아포피스의 힘을 사용할 수 없는 우성은 별로 위협이 되지 않지만, 가이아는 다른 악마들보다 그를 가장 먼저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이아의 검이 다시 한 번 움직였다. 가장 처음, 세 명의 마왕과 수십의 악마 군주들을 죽인 그 검격이었다. 그 검격이 지금, 우성 한 명을 노리고 날아오고 있었다.
‘피할 수 없다.’
그리고 막을 수도 없다.
이대로 죽는 건가, 하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은 순간이었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