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하늘에서 신이 추락하는 건 한 순간이었다.
우성의 검은 천신과 함께 하늘을 갈랐다. 반으로 베어진 천신의 몸은 반으로 쩍 갈라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천사들과 악마들은 물론, 대천사들과 마왕들까지도 움직임을 멈췄다.
악마들은 우성의 힘에 놀랐고, 대천사들은 천신의 현신과 함께 그 천신의 몸이 반으로 베어지는 광경에 놀랐다. 아니,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경악이었다. 현신한 천신의 죽음은 천사들은 물론, 대천사 우리엘과 라구엘의 투지마저 꺼뜨렸다.
“천신님이!”
천사들이 경악을 터뜨렸다. 악마들은 환호를 질렀고, 마왕들은 혼란에 빠진 우리엘과 라구엘을 공격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공간의 힘을 빌려 우위를 점하던 우리엘과 라구엘은 정신이 없는 나머지 그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사탄은 천신을 반으로 가른 우성을 보며 미소 지었다. 천신의 완전한 현신에 그 역시 본래의 몸으로 돌아갈까 하던 참이었다. 헌데, 뜻밖에도 우성의 힘은 현신한 천신을 압도했다.
‘인간의 그릇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군.’
어떻게 저 작은 영혼을 담았던 그릇이, 저만한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사탄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믿기 어려워도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우성은 인간으로서의 능력은 몰라도, 누군가의 힘을 받아들이는 그릇으로서의 능력은 최고였다.
‘어쩌면 나보다 말이지.’
마신인 사탄보다도 더 큰 그릇.
타고난 힘 자체는 인간일지 몰라도, 그릇의 크기는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보다도 위였다.
“하아아아-.”
털썩-.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던 우성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 몸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우성의 눈앞에 익숙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대리인>의 지속시간이 끝났다는 문구였다.
온 몸에 가득히 충만하던 힘이 사라진 건 단순히 지속시간이 끝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우성 스스로가 방금 전 일격을 통해 가진바 힘을 모두 쏟아 부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현신한 천신은 거대한 적이었다.
‘허전하군.’
몸속에 있던 영혼이 빠져 나간 듯한 기분이었다. 온 몸에 가득하던 힘이 사라진 탓이었다. 우성 스스로도 플레이어들 중 누구보다도 강하다 할 수 있었지만, 아포피스의 힘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상대적인 박탈감.
마치 껍질만 남은 몸을 가진 듯했다. 자리에 쓰러진 것도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박탈감 탓이었다.
우성의 시선이 전쟁터를 쓸었다. 천신의 죽음으로 인해 전쟁은 잠시 멈추더니, 악마들의 공격으로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 중 대천사 우리엘과 라구엘이 분쟁하고 있었지만 우성의 눈에 디아블로와 벨제뷔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태양신과 천신, 두 존재가 사라진 이상 더 이상 천사들은 물론, 대천사 우리엘과 라구엘을 보호하고 지켜줄 수 있는 존재는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진짜 끝이군.’
싸움이 정리되는 건 금방이었다.
이제 남은 건, 치천사 가이아. 그녀 한 명뿐이었다.
**
전쟁터의 마무리는 싱거웠다. 지난 고생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이나 말이다.
천사들과 악마들의 싸움은 처음에는 가이아가 만들어낸 공간의 힘을 통해 천사들이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디아블로와 벨제뷔트의 개입, 그리고 우성이 플레이어의 몸을 빌린 태양신과 천신을 베어버림으로써 악마들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이났다.
중급과 상급 악마들의 피해는 상당했다. 군주급 악마들도 꽤 죽긴 했다. 하지만 마왕급 이상의 악마들은 베에모트와 사모스 외에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
소피엘과 미카엘, 우리엘, 라구엘. 네 명의 대천사를 모두 잃어버린 천사들과 비교하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의 손실이었다.
“벌써 여기까지 왔구나.”
대도시 네피렘. 가이아가 잠들어있고, 그녀를 받드는 도시. 단 한 명의 존재가 살아가고 있지만, 천사들에 의해 감히 대도시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
라파엘은 그곳에서 가이아를 알현하고 있었다. 그녀의 거대한 몸짓을 눈앞에서 바라보고, 그녀를 향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네 쌍의 아름다운 날개는 축 쳐져 힘이 없어보였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그렇게 부르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다른 이들이 날 어머니라 부를 때, 너는 그러지 않았는데.”
“당신의 말대로… 멈췄어야 했나 봅니다.”
쿵-.
라파엘의 머리가 신전의 바닥에 찍혔다. 빈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라파엘이 천사들에 비해 잔꾀가 많아도 감히 태초의 천사이자 모든 천사들의 어머니라는 가이아 앞에서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앞에서는 거짓된 모습이나 아첨은 통하지 않는다.
라파엘은 진심으로 뉘우쳤다. 아니, 후회했다. 진작에 멈췄을 수도 있었을 텐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런 생각이 문득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루시퍼.’
첫 시작은 역시 루시퍼였다. 그와 어느 한 인간은 당대 대천사장이었던 가브리엘을 죽이고 도망쳤다. 그로 인해 대천사장 가브리엘은 물론, 당시 대천사였던 루시퍼까지 대천사 자리가 둘 씩이나 공백으로 남았다.
충분히 큰 타격. 하지만 가브리엘의 뒤를 이어받아 대천사장이 된 라파엘은 그 정도면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대천사 둘의 공백쯤이야, 가이아의 존재가 있는 이상 아무 것도 아니었으니까. 라파엘은 맹약을 어겨 힘을 잃은 디아블로와는 달리, 가이아가 태초의 힘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게 문제는 아니었어. 그렇다면…….’
역시 자신의 생각대로 가장 큰 문제는 벨제뷔트였을까?
맞을 것이다. 그를 노리느라 자마엘이 죽고, 다니엘이 죽고, 가비엘이 죽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천사 자리가 둘씩이나 공백인 지금, 대천사 셋의 죽음은 엄청난 타격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아포피스. 이방인.’
아포피스의 검을 가진 인간 이방인. 그의 등장이 바로 이 모든 일이 틀어지게 된 원인이었다.
처음 벨제뷔트를 사로잡고, 그를 교화시키기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라파엘은 쾌재를 불렀다. 벨제뷔트가 천사들의 편이 되기만 한다면 세상사에 손을 떼고 있는 가이아의 도움 없이도 악마들의 뿌리를 뽑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악마 진영에 숨겨놓았던 벨제뷔트의 검을 빼앗긴 것이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대천사 미카엘의 분신과 함께 천사 진영의 이방인들을 대기시켜 놓았는데, 녀석은 미카엘의 분신을 격파했다.
군주급 악마라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 마왕이 직접 나서지 않고서는 미카엘의 분신을 쓰러뜨릴 수 없었다. 소도시 하멜과 같은 작은 도시의 작은 숲에 마왕이 나타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방인이라는 변수가 생겼다.
‘태양신이시여. 당신은 어찌하여…….’
라파엘이 알고 있는 또 하나의 진실.
그것은 바로 태양신 라, 그리고 대악마 아포피스가 인간들을 이 전쟁에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그들의 개입으로 인해 그토록 오랜 세월을 공을 들였던 라파엘의 계획이 차질이 생겼다.
물론 그는 모르고 있었다.
인간들을 이방인이라는 명목하에 전쟁에 끌어들인 건 아포피스가 먼저라는 것을. 태양신은 아포피스의 계획에 맞서기 위해 같은 수를 둔 것뿐이었다.
“이제 어찌 할 것이냐?”
“……모르겠습니다.”
“천신께서 현신하셨다. 하지만 패하셨지. 그건 그분께서도 마찬가지다.”
가이아는 천신과 태양신의 현신을 멀리서도 알고 있었다. 라파엘은 태양신의 검을 가진 이방인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천신의 존재는 알지 못했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놀라지는 않았다. 애초에 태양신의 현신이 당했다면, 천신의 현신이 적들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가 무얼 더 하면 되느냐? 아이야.”
가이아, 그녀는 이미 큰일을 해 주었다.
그녀의 힘을 천사 진영 전체에 깔아 천사들의 힘을 복돋아 주었다. 반대로 악마들에게는 저주를 내렸다. 마왕들의 힘도 한풀 꺾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이었다.
가이아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 또한 라파엘의 부탁으로 들어준 일이었다. 애초에 가이아는 천사든 악마든, 전쟁이라는 다툼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개입은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신의 힘을 빌리고 싶습니다.”
“나보고 싸워 달라는 말이냐?”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어차피 저들은 이제 곧 어머니를 노리고 이곳으로 올 것입니다. 디아블로와 벨제뷔트, 마왕들, 그리고 아포피스의 힘을 가진 이방인까지도요.”
절체절명.
그것만큼 이 상황에 적절한 말도 없을 것이다. 라파엘은 지금 낭떠러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날개도 없다.
“어머니는… 이제 싸우셔야 합니다. 더 이상 당신을 어머니로 떠받드는 천사들은 없습니다. 어머니의 자식들이 아닌, 어머니 스스로를 위해 싸우셔야 합니다.”
“참으로 가소로운 소리구나. 라파엘, 너의 그 죄로 인해 벌어진 일이거늘.”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진작 저를 도우셨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죠.”
라파엘은 가이아를 원망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강한, 어쩌면 신보다도 더 강할지도 힘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늘 천사들로부터 등을 돌려왔다.
라파엘은 그런 그녀가 못마땅했다. 아무리 천사들에게는 어머니 같은 존재라지만, 라파엘은 자식을 돌보지 않는 어머니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서 가이아는 자식을 내버린 어미였다.
“당신에게도 책임은 있습니다. 자식을 저버린 천사들의 어머니여.”
“라파엘…….”
가이아는 라파엘을 가엾은 눈으로 바라봤다. 측은한 그녀의 눈동자가 길게 잠기더니 다시 떠졌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가이아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스스로가 자식이라고 생각했던 천사들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 자식을 저버린 어미라는 라파엘의 말이 꼭 틀리다고 볼 수는 없다.
“당신이라면 가능하지 않습니까? 저 악마들을 다 죽이고, 악마들을 멸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저희들은 진정한 신이 당신을 이 세상에 내세운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디아블로는 우리들을 멸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가이아와 디아블로는 같은 길을 걷는 존재. 단, 시작점이 반대일 뿐이다.
그리고 라파엘의 말대로라면 디아블로야말로 자신이 이 세상에 발을 들인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있는 셈. 참으로 불경한 말이었다. 자신들의 어머니를 자식을 버리고, 역할을 저버린 존재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라파엘은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가이아를 설득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가 아는 가이아라면 악마들이 들이닥쳤을 때, 순순히 고개를 들이밀고 죽음을 맞이해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싸움을 피하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건만…….”
그녀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아무리 고집이 세다고는 하지만, 악마들이 이곳까지 들이닥친다면 그녀 역시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가이아가 수없이 긴 세월 동안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싸울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