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눈앞을 가린 태양빛이 아닌, 하늘 위를 가린 먹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우성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주위에서 사라진 태양신의 힘에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어떻게 된 일이지?’
우성은 방금 전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흐릿하게 남겨져 있던 기억과 함께 손에 잡고 있는 마검 아포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우성은 혼자서 태양신의 힘으로부터 탈출할 능력이 되지 못했다. 아무리 힘을 사용하려 해도 빛에 가려져 힘이 나오질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 힘이 우성에게 위협적이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순히 말해서 봉인과 같은 원리였다. 애초에 태양신의 검에 남아있던 힘의 잔재는 그와 상극인 아포피스의 힘을 잠재우기 위해 존재했다.
만약 그 사이에 다른 천사들이 우성을 공격했다면 위험했을 것이다. 태양신의 힘은 천사들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세상 그 무엇이라도 녹이는 뜨거운 불길도 천사들에게는 따스한 온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포피스나 태양신은 악마나 천사들에게 있어서 반쯤 잊혀진 신이었다. 태양신에에 대해 기억은 하고 있을지언정, 자세히 아는 존재는 일부 대천사들이나 가이아, 천신 정도였다.
‘아포피스가 도운 건가?’
태양신의 힘이 갑자기 사라졌거나, 아포피스가 무슨 수를 썼던가, 둘 중 하나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아포피스의 입장에서도 우성이 이대로 태양신의 힘에 갇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당하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우성에게는 달가운 일이었다. 아포피스가 침묵을 지키는 이상, 어떻게 된 일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어수선한데.”
얼마나 갇혀 있었던 건지는 모른다. 정신이 없던 상태에서 다시 전쟁터를 바라보자, 드문드문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갑작스럽게 당장한 벨제뷔트와 디아블로, 그리고 그들의 밑에 떨어져 있는 붉은 머리의 대천사 미카엘. 이미 한 번 미카엘의 분신을 보았던 우성은 그가 바로 미카엘의 본체임을 알 수 있었다.
벨제뷔트와 디아블로라면 대천사 미카엘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게 뻔했다. 그밖에 다른 악마들과 천사들의 싸움도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주위에는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싸우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가까이서 눈에 띄는 이들은 바로 피엘과 다른 한 명의 플레이어였다.
‘느낌이… 이상한데.’
우성은 천사 진영의 플레이어와 검을 맞대고 있는 피엘을 보며 이질감을 느꼈다. 그가 싸우는 스타일이나 싸울 때의 표정 등, 모든 것이 우성이 기억하는 피엘과는 달랐다.
무엇보다 우성이 기억하는 피엘은 저렇게까지 강하지 않았다. 그의 움직임과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기, 모든 것이 웬만한 마왕 이상이었다. 힘의 크기 이전에 그에게서 느껴지는 힘의 성질은 우성이 아는 벨제뷔트나 디아블로보다도 훨씬 고차원의 것이었다.
“현신?”
그것 외에는 생각할 방법이 없었다. 마신의 검을 가진 피엘인 만큼, 마신 사탄을 직접 몸에 받아들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마치 우성이 사용하는 <대리인>처럼 말이다.
‘그럼 상대는…….’
피엘과 싸우고 있는 상대 플레이어를 지켜보던 우성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마신 사탄의 현신과 이 정도로 싸울 수 있는 존재라면 천신 외에는 없었다.
천사들에 대한 본능적인 살의가 우성의 가슴속에서 끓어올랐다. 그 대상이 천신이라 생각하니 그 생각은 더했다.
그 순간, 천신의 눈이 우성에게로 향했다. 막 날개를 꺼내들었던 천신은 피엘의 몸에 현신한 마신 사탄보다는 우성을 더 신경쓰는 모양이었다.
사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까까지의 싱글벙글한 미소는 없었다. 조금은 경건해진 표정으로 우성을 바라보던 사탄이 다시 웃음기를 머금었다.
“아직 현신은 하지 않으신 건가?”
사탄은 아무래도 우성의 몸에 아포피스가 현신하기를 바란 모양이었다. 말이 좋아서 현신이지, 플에이어인 우성의 입장에게는 자아를 빼앗기는 것밖에는 되지 않았다.
물론, 아포피스의 현신은 사탄에게나 다른 악마들에게나 반길 일일 것이다. 사실상 우성이 <대리인>을 통해 아포피스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나, 아포피스의 자아라 우성의 몸을 통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나 큰 차이는 없겠지만 상징성의 차이는 생각보다 꽤 컸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사탄은 우성이 자신의 중얼거림에 답한 우성을 보며 킬킬거렸다. 천신의 표정은 더 없이 굳어져 있었는데, 지금껏 움직이지 못하는 우성을 노리려던 그에게는 우성의 등장만큼이나 좋지 않은 소식도 없었다.
“끝났군.”
“그러게. 그 날개짝도 뜯어버리고 싶었는데, 재밌는 놀이는 끝났나봐. 난 어서 가이아가 보고싶거든.”
“그 때까지 사탄, 네가 그 몸을 통해 현신할 수는 없을 텐데?”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지만 사탄은 개의치 않았다. 이미 전쟁은 악마들에게로 급격히 기울어져 있었다.
지금 당장 싸움은 팽팽해보였다. 공간의 힘에 도움을 받은 천사들이 처음에는 악마들을 쉴 세 없이 몰아쳤지만, 사탄에 의해 꽤나 큰 전력 손실을 겪은 천사들은 수적 열세로 인해 악마들과 팽팽히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벨제뷔트와 디아블로가 개입해 우리엘과 라구엘을 처리하고, 대천사들을 제거한 마왕들이 천사들을 죽이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일방적인 학살이 될 것이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천사들이 악마들을 상대할 수 있었던 건 상대적으로 악마들의 힘이 천사들이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공간의 힘을 빌린다 하더라도 일반 천사들, 그리고 엑시드급과 천사장급 천사들이 마왕을 상대하기란 불가능했다. 대천사라는 전력을 잃어버린 천사들은 마왕들을 상대할 힘이 없었다.
“아무튼 넌 나보다는 먼저 죽겠지. 네놈 자식들도 마찬가지고.”
“네 이놈…….”
“가이아도 금방 보내줄게. 니들은 죽고나면 천신님의 곁으로 간다고 하던데, 진짜냐?”
천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사탄은 천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가이아님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
뜻밖의 존칭. 천신이 태양신 외에 존칭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사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천신 역시 사탄처럼 본래는 천사, 혹은 대천사였다가 스스로 신이 되기를 원했던 존재였다. 그가 이미 세상에 존재했을 때부터 가이아는 모든 천사들의 어머니였다.
“벨제뷔트와 디아블로, 그리고 이 녀석이면 충분할 걸?”
최악, 최강의 악마가 둘, 그리고 아포피스의 그릇이었다. 게다가 그밖에 다른 마왕들도 제법 큰 힘이었다.
사탄은 그들이라면 가이아를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애초에 사탄은 치천사 가이아나 디아블로, 태초의 악마라는 그 둘의 존재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신, 그는 달랐다. 그는 치천사 가이아가 누군가에게 쓰러질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그것은 신이 된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너희는… 그분에게 심판을 받을 것이다.”
“킥킥. 천신이나 되는 녀석이 다른 이에게 심판을 맡기다니, 웃겨 죽겠네.”
“네 놈도 알다시피 신이라는 이름에 묶인 이상 난 더 이상 이 세계에 일정 이상 개입을 할 수 없는 몸이니까.”
“그런 녀석이 대천사 놈들에게 손바닥이고 발바닥이고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냐? 웃긴 놈이…….”
그 순간, 사탄은 자신의 옆을 지나간 우성을 보며 소리쳤다.
“야! 그 새끼는 내거야!”
사탄의 외침을 뒤로하고 우성은 천신을 향해 곧장 검을 휘둘렀다. 아직까지 <대리인>의 지속시간은 남아있었지만, <대리인>의 효과를 제외하고 검을 통해 따로 받은 아포피스의 힘은 많이 희석된 상태였다.
하지만 아포피스의 힘과 천신의 힘은 애초에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힘의 크기는 둘째치고, 천신은 아포피스의 힘을 전해받은 우성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저렸다.
쩌어어엉-!
천신의 눈앞으로 삼각형의 막이 생겨났다. 우성의 검이 단번에 천신이 만들어낸 막을 깨뜨렸다. 수호의 천사라는 다니엘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방어였지만, 우성의 검은 그것을 단번에 깨뜨렸다.
“크윽.”
천신의 눈이 우성을 또렷하게 노려봤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성을 죽일 생각이었다. 이방인은 한 번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지만, 다시 살아나는 데에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천신은 가이아라면 아포피스의 그릇이 없는 악마들 정도는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콰아아아아-!
천신의 몸이 흩어졌다. 몸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그의 몸을 이루고 있던 신력이라는 힘만이 세상에 남아 형체를 이루었다.
플레이어라는 인간의 모습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흩어진 신력은 점차 덩치를 불려, 수백 미터의 거인으로 바뀌었다. 거대한 신력의 덩어리이자, 천신의 본체와 가장 가까운 모습이었다.
“현신할 수 시간을 단축하는 건가?”
천신은 시간을 오래 끌어 현신해 있어봤자 우성을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최대한 자신과 닮은 모습, 그리고 가장 가까운 힘을 끌어냈다.
힘을 많이 쓸수록 천신이 현신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천신은 자신의 거의 모든 힘을 다했고, 지금 이 짧은 시간이 지나면 천신의 현신을 끝나고 그의 힘을 담았던 그릇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대천사 자마엘과 가비엘, 그리고 가브리엘과 같은 대천사들은 천신의 힘을 자신의 힘처럼 사용하곤 했다. 그들은 천신의 손을 빌리거나, 그의 힘을 일부 몸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 나타난 천신은 그들이 빌린 천신의 몸 전체였다. 비록 완전한 형태는 아니더라도, 거기에 가장 가까운 형태라는 것만은 변함이 없었다. 기나긴 천사와 악마들의 역사에서도 천신의 모습이 이만큼 나타난 적은 없었다.
“크긴 크군.”
우성 역시 그 거대한 덩치에 놀랐다. 메피스토도 나름 거대한 편이었지만, 천신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그야말로 신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모습이었다.
천신은 고개를 숙여 우성을 바라봤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장발이 땅에 닿았다. 물론, 그 머리카락조차도 형태의 하나일 뿐 천신의 힘이 모습을 갖추었을 뿐이었다.
쿠구구구구-.
천신의 발이 위로 올라갔다. 우성은 한 마리 개미처럼 여길 정도로 거대하고, 짓밟는 것만으로도 도시 하나쯤을 날려버릴 발이었다. 그의 발길질 하나, 손짓 하나에 지형이 바뀔 것이다.
“어마어마하군.”
우성 역시 이 천신의 힘을 맞닥뜨려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아무리 아포피스의 힘이 천신보다 위에 있다고 한들, 힘의 성질 이전에 크기에서 너무나도 차이가 있었다.
천신이 마검 아포피스를 부러뜨리거나 소멸시킬 수는 없다고 해도, 우성은 아포피스가 아니었다. 아포피스는 멀쩡해도 우성의 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피해야 한다.’
어디로?
그 방향조차 알 수 없었다. 천신의 손과 발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이미 그의 존재는 세상 어디에나 닿을 수 있었다. 세상 반대편, 설령 악마 진영으로 되돌아 가더라도 천신의 손과 발은 우성을 짓누를 것이다.
피할 수는 없다. 막는 수밖에는.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쿠우우우-.
천신의 발이 우성의 위로 떨어졌다. 우성은 피할 생각을 접고, 온 힘을 검 끝에 끌어모았다. 그대로 천신의 몸을 두동강 내겠다는, 무모한 생각을 하면서.
솨아아악-!
그 순간, 우성의 검이 하늘을 향해 휘둘러졌다. 천신의 몸과 함께, 하늘이 갈라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