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우성은 필사적으로 버텼다. 죽지 않기 위해. 온 몸이 타고, 녹아내릴 듯 뜨거운 열기 속에서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움직일 수도 없었다. 우성의 몸을 구속한 태양신의 힘은 언제쯤이면 사라지려는지, 계속해서 우성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미 반쯤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로 우성은 눈앞을 가득 매운 빛을 응시했다. 부러진 검조각이 우성의 눈앞에 아른거렸는데, 우성은 검조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떻게 해야 빠져나갈 수 있지?’
닿지 않는 검조각에 팔을 떨구며 우성은 주저앉았다. 마냥 이대로 가만히 손 놓고만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빠져나갈 수 있는 마땅한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마기를 일으켜 힘을 몰아내려 해도 우성을 감싸고 있는 힘은 그대로였다.
이대로라면 우성이 먼저 말라 죽을 판이었다. <대리인>의 지속시간이 끝나는 순간, 우성은 그대로 타 죽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려면 <대리인>을 계속해서 유지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10년의 수명이 추가로 필요했다.
‘미치겠군.’
-몸을 넘겨라. 이 공간을 탈출할 수 있게 해 주지.
아포피스가 유혹했다. 우성의 정신력을 이기지 못한 마검 아포피스는 계속해서 우성에게 스스로 몸을 바칠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힘을 준 것까지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우성은 아무리 강한 힘을 준다고 해도 아포피스에게 몸을 내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 순간, 아포피스가 자신의 몸을 얼마나 막 굴릴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우성은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꺼져!’
**
“피엘-!”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알렌은 피엘을 향해 검을 빼들고 달려들었다. 늘 피엘을 경쟁자처럼 여기던 알렌은 피엘을 발견하자마자 호승심을 참지 못한 모양이었다.
피엘은 알렌을 피하지 않았다. 알렌이 뭐라고 생각하던, 피엘은 알렌을 천사 진영의 무수히 많은 플레이어들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었다. 단지 상대하기가 조금 까다로운 플레이어일 뿐이었다.
까앙-!
두 사람의 검이 부딪히면서 동시에 악마 진영의 플레이어들과 천사 진영의 플레이어들이 부딪혔다. 김진성은 상처를 입고도 효과도 없는 물약을 대충 바르고 곧장 전투에 합류했다.
“재미없을 만큼 끈질긴 녀석이군. 선악공성에서 이미 패한 녀석이 말이야.”
“그 때는 무승부로 기억하고 있는데?”
“도망친 게 무승부인가?”
“그 때는 단지 천사 진영이 패한 상황에서 더 이상 싸움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알렌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피엘을 상대로는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 곧장 검의 힘을 끌어 올린 것이다.
피엘은 알렌으로부터 조금 물러섰다. 피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가이아의 힘을 끌어낸 알렌을 상대로 쉽게 우위를 점할 수는 없었다.
“……짜증나게.”
스스스스-.
피엘의 검에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잠시 고민하던 피엘은 결국 사탄의 힘을 빌리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천신의 검을 가진 녀석도 여기에 있다고 했으니…….’
고민할 것 없었다. 머지않아 사용할 힘이라면 지금 당장 사용하고, 알렌을 처리한 후 곧장 천신의 검을 가진 플레이어와 싸우면 되는 것이다.
피엘의 머릿속으로 사탄이 속삭였다. 마신 사탄은 그 어느 악마보다도 간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신이라기보다는 인간에 더 가까웠다.
‘닥치고 힘이나 내놔.’
피엘의 몸속으로 사탄의 마기가 스며들었다. 가이아의 힘을 머금고 있는 알렌은 피엘이 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에 바짝 긴장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착각하나본데, 넌 조연이야.”
피엘의 몸이 사라졌다. 착시 현상처럼 알렌의 눈에는 피엘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감각은 피엘이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알렌이 검을 들고 자세를 바꿨다. 언제 덤벼들지 모를 피엘의 공격을 대비해 방어를 굳혔다. 방어 후 공격, 그것이 알렌의 기본 싸움 스타일이었다.
쩌엉-!
“크윽.”
피일의 검이 알렌의 머리 위를 내려쳤다. 간신히 막긴 했지만 알렌은 피엘의 힘에 못이겨 무릎을 꿇었다.
‘뭐, 뭐야?’
이전과 싸울 때와는 확연히 다른 힘이었다. 그 때에도 조금씩 밀린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 때에는 두 사람 모두 검의 힘을 이끌어 낸 상태로 한 시간 가까이 접전을 벌였다.
하지만 이번 한 번의 공방을 통해, 알렌은 피엘의 실력이 이전과는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실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피엘에게서 느껴지는 힘의 성질도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우웅, 우우웅-.
알렌이 들고 있는 검, 성검 가이아가 울음을 흘렸다. 그리고 경고를 보내왔다.
위험하다고. 피엘의 검에서 느껴지는 힘은, 그리고 피엘에게서 느껴지는 힘은 이전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피엘은 마검 사탄이 가진 힘을 거의 완벽하게 끌어낸 상태였다.
“이, 이럴 리가…….”
“아직도 안 믿기나?”
까앙-!
알렌이 들고 있던 검이 멀찌감치 날아갔다. 피엘은 까맣게 변한 눈으로 알렌을 응시하더니 멍하게 있는 그를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푸욱-.
섬뜩한 소리와 함께 알렌의 왼쪽 가슴에 검이 박혔다. 알렌은 덜덜 떨리는 눈으로 피엘을 바라봤다. 그는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넌 조연일 뿐이야.”
촤악-!
가슴에 검을 꽂은 채, 피엘이 크게 검을 휘둘렀다. 알렌의 몸이 반으로 베어져 나가며 피를 튀었다.
피엘의 눈앞에 포인트 획득 메시지가 떠올랐다. 플레이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천사 진영 최강자라 알려진 플레이어의 죽음. 하지만 피엘은 그의 죽음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냥 중간에 마주친 조금 강한 플레이어 한 명을 죽였을 뿐이었다. 피엘과 알렌은 라이벌이 아니라, 알렌 혼자 라이벌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관계일 뿐이었다.
‘어디지?’
새까맣게 변한 피엘의 눈이 주위를 훑었다. 알렌의 죽음에 천사 진영의 플레이어들은 감히 피엘에게 덤벼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피엘 역시 그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었다.
천신의 검을 가진 플레이어. 김진성의 말에 의하면 그는 분명 이 어딘가에 있었다. 김진성에게 그만한 상처를 입힐 정도라면 꽤 두각을 나타내는 실력자일 텐데, 눈에 띄는 플레이어가 없었다.
피엘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마신 사탄의 힘을 몸에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우성의 <대리인>처럼 포인트나 라이프를 대가로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피엘은 이번 한 번의 싸움에 모든 것을 걸었다. 피엘의 몸에 들어와 있는 사탄의 힘은 이미 그가 견뎌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상태였다. 지속시간이 끝나면 피엘은 한동안 정신을 잃게 될 게 뻔하다.
그 때, 피엘의 눈에 빛에 휩싸여 있는 우성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를 향해 접근하는 한 명의 플레이어가 보였다.
느낌이 이상하다. 이런 상황에서 호기심에 접근할 리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순백의 검은, 분명 성검이었다.
“……저 녀석인가?”
피엘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곤 우성에게 다가가는 플레이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갑작스러운 기습이었지만 정정당당을 따질 때도 아니었고, 천신의 검을 가진 플레이어를 기습으로 쉽게 쓰러뜨릴 수 있다면 그것만큼 남는 장사도 없었다.
콰아아-!
피엘의 검에서 마기가 흩어져 나갔다. 천사 진영의 플레이어는 피엘의 검을 막아내며 뒤로 움직였다.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피엘이 쏘아낸 마기를 정화시켰다. 알렌 정도의 실력자라면 단숨에 쓰러뜨릴 수 있었을 텐데, 적어도 그보다는 훨씬 위였다.
“……사탄의 사용자인가?”
“반갑군.”
프랑스 계열의 플레이어. 이름은 모르겠다. 피엘도 천사 진영의 성검 사용자는 꿰뚫고 있었지만, 전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여기 말로는 8회 차 플레이어라고 하더군.”
“8회 차?”
8회 차라면 이제 막 1회 차 정도를 아포칼립스에서 보낸 플레이어라는 뜻이었다. 아직 애송이 티도 벗지 못할 녀석이 어떻게 자신과 맞서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검 때문인가?’
아무리 검 때문이라고 해도 성장 속도가 너무 빨랐다. 8회 차에 시작했음에도 이 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만약 1회 차에 플레이어로 선택받았다면 어느 정도 수준일지 모를 일이었다.
“마검 사탄, 그리고 마검 아포피스의 파기. 그게 내 역할이다.”
“그거 참 어려운 명령을 다 받았군. 난 네 녀석만 죽이면 만족인데 말이지.”
“그거라면 가능 할 거다.”
푸욱-.
검을 역수로 잡아 자신의 가슴에 검을 박는 플레이어를 보며 피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차피 난, 죽은 목숨이니까.”
“이게 뭐 하는 짓…….”
피엘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플레이어의 몸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신력?’
비슷하지만 다르다. 마기와 신력 중에는 신력에 더 가깝겠지만,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태양신의 불꽃처럼 말이다.
신의 힘. 단순히 빌려주는 게 아니었다. 플레이어는 온전하게 신의 힘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뿐이었다.
‘현신!’
급박해진 피엘은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기회가 있을 때 서둘러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피엘의 몸은 플레이어에게 닿기도 전에 멀리 날아갔다.
콰아아-!
“크윽.”
플레이어의 몸에서 뿜어진 기운에 피엘은 겨우 땅에 착지했다. 도무지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아 피엘은 플레이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기도 오래간만이군.”
플레이어의 말투가 바뀌었다. 목소리는 그대로였지만, 눈빛도 이상했다. 이미 그의 몸을 지배하던 자아는 사라지고, 전혀 다른 존재가 그를 대신하고 있었다.
이마에 새겨진 작은 점. 그것 외에는 외적으로 달라진 건 없었다. 플레이어는 스스로 가슴에 박아 넣은 검을 뽑았다. 피는 한 방울도 나지 않고, 마치 빈 공간에 있던 것처럼 검도 깨끗했다.
“천신인가?”
“마신의 계약자인가?”
부정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천신의 현신. 비록 플레이어라는 몸을 빌렸다고는 해도, 신은 신이었다. 본신의 힘을 다 사용하지 못한다 해도 대천사들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골치 아프군.’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막상 천신이라는 존재를 눈앞에 마주하고 보니 당황스러웠다. 피엘은 마검 사탄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나를 꺼내라.
사탄의 속삭임이 아른거렸다. 천신의 검처럼 마신 사탄의 검 역시 사탄을 이 세계에 개입시킬 수 있는 매개체였다. 만약 피엘이 마검의 힘을 제대로 끌어내고, 자신의 몸을 내어주기만 한다면 사탄 역시 천신처럼 피엘의 몸을 빌려 현신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지금 상태로는…….’
피엘은 결심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