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반으로 갈라진 태양은 빛을 잃었다. 우성이 뿜어낸 어둠은 태양의 빛을 집어삼키고, 종래에는 전두현의 몸을 차지한 태양신까지 집어삼켰다.
그 모든 과정을 우성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이뤄냈다. 이제 태양신이 만들어낸 빛은 더 이상 없었다. 아포피스가 태양신 라를 쓰러뜨리고 태양을 가려 일식을 일으켰듯이, 우성은 태양빛을 어둠으로 물들였다.
“그릇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 걸 발견했군.”
저벅-.
태양신이 어둠 속에서 걸어왔다. 이미 그의 몸에서 흐르던 찬란한 태양빛은 죽어있었다. 우성은 이미 전두현의 몸을 차지한 태양신의 힘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겼다.’
우성은 가슴속에서 벅차오르는 희열을 느꼈다. 자신과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 어쩌면 전혀 반대의 길을 걸었을지도 모르는 숙적을 쓰러뜨렸다는 사실에 우성의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우성은 빛을 잃은 태양신을 향해 걸어갔다. 목표는 그의 손에 있는 성검 라였다.
“그릇 타령은 그만 하고, 이제… 검을 넘기십시오.”
“아포피스여, 과연 그대의 그릇이 태초의 존재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태양신은 여전히 우성이 아닌 아포피스를 보고 있었다. 우성은 그가 말하는 태초의 존재가 바로 치천사 가이아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대리인>을 사용한 우성은 아직까지도 자신의 힘의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처음 디아블로와의 싸움을 통해 <대리인>을 사용한 능력을 알아보았을 때에는 디아블로와 서로 엇비슷한 동수를 이루었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놀라웠다. <대리인>의 힘이 설마하니 디아블로와 같은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다니. 치천사 가이아를 상대로는 힘들겠지만, 다른 마왕들과 벨제뷔트와 함께라면 치천사 가이아를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아포피스에게 더 많은 힘을 전해 받은 지금, 우성은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우성은 단번에 태양신이 만들어낸 작은 태양을 베어버리고, 그를 어둠으로 물들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어쩌면 치천사 가이아도 홀로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태양신은 우성이 아직 가이아를 상대하기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포피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글세. 잘 모르겠군.
‘역시.’
하긴, 가이아라는 존재를 혼자서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너무 과했다. 그래도 더 강한 힘을 얻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시적인 성과였다.
아직 우성의 편은 많았다. 디아블로와 벨제뷔트, 그밖에 마왕들이 꽤 여럿 있었다. 그들과 <대리인>을 사용한 우성이라면 치천사 가이아를 쓰러뜨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가능하면… <대리인>의 사용은 자제했으면 좋겠는데.’
한 번 사용에 십 년의 수명이 사라진다. 디아블로와의 싸움을 통해 <대리인>을 사용한 순간부터 우성의 운명은 십 년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번 싸움을 통해 다시 십 년. 가이아와의 싸움까지 더하면 총 삼십 년의 수명이 사라졌다.
만약 우성에게 정해진 운명이 60년이었다면? 우성은 앞으로 삼 년도 살지 못한다. 50년이었다면? <대리인>을 사용하는 즉시 우성은 죽을 수도 있었다.
태양신은 가까이 다가온 우성을 향해 검을 건넸다. 새하얀 순백의 검에 맺혀있던 태양신의 불길은 어느새 꺼져 보통 검처럼 변해있었다.
“감사합니다.”
순순히 검을 건넬 줄 몰랐던 우성은 태양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검을 부러뜨린다고 태양신을 쓰러뜨릴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가 이 세계에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은 사라질 것이다.
“끝난 거라고 생각하지 말거라.”
“당연하죠.”
태양신의 경고에 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치천사 가이아, 그녀를 쓰러뜨릴 때까지 끝나려면 멀었다.
털썩-.
전두현의 몸이 힘 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태양신의 의지가 깃들어 있던 몸이 성검 라를 손에서 놓으며 힘을 잃은 것이다. 전두현의 자아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지만, 죽거나 소멸했을지도 모른다.
우성은 바닥에 쓰러진 전두현의 몸에 관심을 거뒀다. 그리곤 마기를 이용해 성검 라를 공중에 띄웠다. 이제 이 검을 부러뜨리기만 하면, 우성에게 주어져 있던 중요한 임무 하나가 끝이 날 것이다.
-부숴라.
‘말 안 해도…….’
아포피스를 높게 치켜든 우성이 검을 내리쳤다.
“알아!”
까앙-!
성검 라의 검신이 반으로 쪼개어져 파편이 바닥에 박혔다. 그 순간, 부러진 단면 사이로 빛이 새어나오더니 우성을 덮쳤다.
“이, 이건 또 뭐야?”
분명 태양신의 힘이었다. 이미 소멸한 줄 알았던 힘이, 성검 안에 잠들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태양신은 사라진 게 아니라 성검 안으로 다시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끝난 거라고 생각하지 말거라.
그 말뜻이 이해가 갔다. 정말로 끝난 게 아니었다. 태양신은 전두현의 몸을 버리고, 성검을 통해 우성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방심이라는 틈을 이용했다.
“이런… 시바아알-!”
태양빛에 삼켜진 우성이 비명을 내질렀다. 이번엔 반대로 우성의 어둠이 태양신의 빛에 집어삼켜졌다.
**
화아아악-.
쿠르르릉-!
미카엘과 라구엘, 우리엘.
메피스토와 플뤼톤, 벨리알, 아스타로스.
세 명의 대천사와 세 명의 마왕, 그리고 마왕에 근접한 악마 군주. 그들의 싸움은 전쟁터를 하나의 지옥으로 만들었다. 불이 튀고, 마기와 신력이 뒤섞였으며, 복잡한 마법이 폭발을 일으켰다.
그 속에서 악마들과 천사들은 치열하게 싸웠다. 전황은 악마들에게 급격히 좋지 못했다. 여유가 있는 천사들은 급기야 악마 진영의 플레이어들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미카엘을 상대하고 있는 메피스토는 겨우겨우 막기에 급급했다. 공간의 힘이 아니더라도 메피스토는 미카엘의 상대가 아니었다. 메피스토가 마왕들 중에서 디아블로와 벨제뷔트를 제외하고 가장 강하다고는 해도, 상대인 미카엘은 최강의 대천사였다.
‘빡세군.’
미카엘의 염화가 메피스토를 덮쳐왔다. 거대하게 변한 메피스토는 마기를 넓게 뿌려 간신히 미카엘의 염화로부터 몸을 보호했다. 하지만 그 열기를 완전히 막지는 못해 살갖이 조금 타들어갔다.
“크으음…….”
“지옥으로 되돌아가거라, 마왕이여!”
미카엘의 주위로 수천 자루의 염화의 검이 생겨났다. 수천 자루의 염화의 검은 메피스토의 주위를 빙그르르 둘러싸더니 그를 사방에서 노렸다.
하나하나가 웬만한 군주급 악마들조차 죽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염화의 검이 수천. 그리고 그 검들은 모두 메피스토를 노리고 있었다.
미카엘은 이번 공격을 통해 작정하고 메피스토를 죽일 셈이었다. 메피스토는 자신이 죽으면 플뤼톤과 벨리알, 아스타로스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라구엘과 우리엘까지는 셋이 어떻게든 막고 있었지만, 미카엘이 합류하는 순간 전황은 순식간에 뒤바뀔 것이다.
‘막아야 한다.’
디아블로는 누구도 죽지 말라고 했다. 메피스토 본인은 물론, 함께 있는 다른 마왕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세 명의 마왕과 마왕에 근접한 힘을 가진 악마 군주가 순식간에 몰살한다면? 유리했던 전황은 순식간에 뒤바뀐다.
“난 죽지 않는다!”
메피스토가 온 몸의 마기를 끌어올린 순간.
화악-.
지상에서 거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뜨거운 태양열이 메피스토와 미카엘이 있는 곳까지 느껴졌다. 작은 태양이 거대한 어둠에 먹히고, 아포피스의 마기가 그 태양을 집어삼켰다.
“신… 이시여?”
그 순간, 미카엘의 염화가 일렁거리며 흔들렸다. 태양신 라의 추종자인 그는 자신의 신이 아포피스의 대리자에게 패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메피스토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흔들림 없던 미카엘이 흔들린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메피스토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었다.
“지옥불에 떨어져라, 미카엘!”
고오오오오-.
푸른 먹구름이 미카엘의 주위를 둘러쌌다. 메피스토의 마기로 이루어진 먹구름은 순식간에 부피를 줄이더니 미카엘의 몸을 집어삼켰다.
그 순간, 메피스토의 주위들 둘러싸고 있던 염화의 검이 형체를 잃고 미카엘을 집어삼킨 먹구름을 향해 쏘아졌다. 마기로 이루어져 있던 먹구름을 미카엘의 염화가 태워 정화시키자, 미카엘의 몸이 다시 드러났다.
“잔재주를 부리는군.”
“잔재주라면 너희 천사들이 부리고 있는 거겠지. 대체 이 공간은 뭐지? 가이아의 짓인가? 아니면 저기 있는 태양신의 소행인가?”
“그분들의 이름을 감히 그 더러운 이름으로 짓밟지 마라!”
“빌어먹을 광신도 새끼!”
미카엘의 염화가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멀리서 익숙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으아아아악-!”
“벨리알?”
메피스토의 시선이 비명소리가 터져 나온 곳으로 향했다. 비명소리의 주인은 바로 벨리알이었다.
우리엘과 싸우고 있던 벨리알은 결국 그녀의 창에 몸이 꿰뚫렸다. 보통 창이라면 심장이 꿰뚫리더라도 살아남을 벨리알이었지만, 우리엘의 창은 보통 창이 아니었다. 대천사들이 손에 쥐고 있는 무기는 하나같이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우리엘의 신력을 머금고 있는 창이었다. 심장을 꿰뚫린 벨리알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젠장!’
우리엘을 상대하던 마왕 하나가 죽었다. 그렇지 않아도 벨리알은 우리엘에 비해 한참 모자란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공간의 힘 때문에 제약을 받으니 상대가 되지 않는 건 당연했다.
라구엘을 상대하고 있는 플뤼톤은 아스타로스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아직 상태가 괜찮았다. 하지만 우리엘이 가세하기 시작한 순간, 평행을 이루던 균형은 순식간에 깨어질 것이다.
‘최악이다!’
정작 미카엘을 상대하고 있는 메피스토도 상태가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 지금 당장만 하더라도 미카엘의 염화는 메피스토의 피부를 계속해서 태우고 있었다.
“……여기까진가.”
미카엘이 만들어낸 수천 자루의 염화의 검.
더군다나 미카엘은 염화의 날개를 펄럭이며 스스로도 검을 들고 메피스토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이미 힘이 많이 빠진 메피스토는 더 이상 미카엘을 막아낼 수 없음을 직감했다.
“힘들어 보이는군.”
카가가강-!
그 순간, 미카엘이 만들어낸 수천 자루의 염화의 검이 산산이 깨어졌다. 불이 깨어진다는 건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 믿기지 않는 광경을 두 눈으로 확인한 순간, 메피스토는 이런 일이 가능한 존재를 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벨제뷔트!”
최고악 벨제뷔트. 그가 미카엘의 앞에 나타났다. 메피스토를 끝장내고자 달려들던 미카엘은 움직임을 멈추고 염화의 날개를 펄럭였다.
차분하던 눈동자가 미약하게 떨렸다. 벨제뷔트가 도착하기 전까지 메피스토를 비롯한 다른 마왕들을 처리해 놨어야 하는데, 생각보다 벨제뷔트의 도착이 너무 빨랐다.
미카엘을 노려보는 벨제뷔트의 입가가 올라갔다. 라파엘을 죽이고자 갈리오로 향했던 그는 허탕을 치고, 다음 표적인 미카엘을 만났다. 한 번 허탕을 쳤던 만큼 이번엔 드디어 표적을 만났다는 생각에 반가움이 더 컸다.
“미카엘…….”
벨제뷔트 손에 마기의 덩어리가 터질 듯이 타올랐다.
“반갑다.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