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화르르륵-.
콰앙- 화아아악-!
천사와 악마, 대천사와 마왕들이 한데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신력으로 가득한 공간 속에서 부딪히는 마기와 신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했다.
전세는 아무래도 천사들의 우위였다. 일반 천사들은 중급 악마들을 학살하다시피 창으로 찌르고, 베었다. 악마들은 상급 악마 정도가 되지 않는 이상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다.
군주급 악마들이 힘을 써보려 해도 천사장들에게 막혔다. 군주급 악마들은 그나마 공간의 영향을 덜 받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치명적이긴 마찬가지였다.
마왕들의 싸움이 어떻게 돌아가든, 우성은 플레이어들에게 집중했다. 어딘가에 있을 성검 라의 사용자를 신경썼다. 정확한 위치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저 어딘가에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시작해야지.’
우드드득-.
우성의 몸에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광폭화>와 <유체화> 등, 엑티브 스킬들을 모두 활성화 시켰다. 아직까지 <대리인>을 사용할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본 게임에 들어갔다는 생각에 품안에 있던 물약을 꺼내 마셨다.
눈앞이 확 밝아졌다. 150에 도달한 정신력 스텟이 200이 훌쩍 넘었다. 랭커 플레이어의 기준이라던 100포인트의 수치를 두 배 이상 넘어선 것이다.
‘신세계군.’
정신력 200포인트의 세계. 그것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스스로의 몸을 높은 곳에서 관조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굳이 눈으로 앞을 보지 않아도 무엇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마치 세상을 위에서 굽어다 보는 기분이었다.
말 그대로, 게임 캐릭터를 조종하는 신의 입장이 된 기분이랄까? 이 거대한 전쟁터가 한 눈에 들여다보였다. 우성은 씩 웃으며 아포피스를 꽉 움켜쥐었다.
어차피 성스러운 정신력의 물약에는 부작용 따위가 없었다. 대천사 다니엘의 날개를 지료로 사용한 덕분이었다. 내심 이런 물약을 만들어준 패트릭에게 고마움이 들었다.
스스슥-.
우성의 몸이 사라졌다. 이미 천사 진영의 플레이어들과 악마 진영의 플레이어들은 한데 엉켜서 싸우고 있었는데, 악마와 천사들의 싸움과는 달리 막상막하였다.
‘마기’라는 스텟은 특수 스텟으로 분류되었다. 스텟을 보유하고 있는 플레이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신력 스텟을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 역시 마찬가지여서 공간의 힘은 플레이어들의 싸움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서걱-.
전쟁터로 뛰어든 우성의 검이 플레이어 한 명의 목을 베었다. 이미 다른 악마 진영의 플레이어와 싸우고 있던 그는 귀신처럼 나타난 우성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허억.”
갑작스러운 우성의 등장에 악마 진영의 플레이어도 덩달아서 놀랐다. 하지만 이내, 익숙한 얼굴이라는 걸 알고는 안도했다.
“대, 대악마 클랜 마스터 맞으시죠?”
붉은악마 클랜과 동맹을 맺고, 마검 사용자로 알려지면서 우성은 얼굴도 꽤 알려지게 되었다. 전쟁에 참여할 정도면 그래도 꽤 실력과 이름이 있는 플레이어였으니 우성의 얼굴을 아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길게 이야기 할 생각이 없는 우성은 곧장 그 자리를 떴다. 그리곤 근처에 있는 다른 천사 진영의 플레이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이래선 끝도 없겠군.’
하나 둘, 검으로 베어 넘기던 우성은 답답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주변이 모두 적이면 차라리 마기를 뿜어내 광범위하게 공격을 할 수 있을 텐데, 아군도 섞여있다 보니 그게 불가능했다.
하나 둘 플레이어들을 베어 넘길 때마다 포인트가 쌓이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미 서현이의 병을 고치고 난 뒤라 우성은 포인트에 큰 괌심이 없었다.
‘성검 라의 사용자는 어디 있지?’
우성은 플레이어들을 베기보다는 성검 라의 사용자를 찾았다. 혹시라도 기습이 올지도 몰라 최대한 감각을 넓혀 주변을 살폈다.
웅, 우우웅-.
그 때, 우성의 손안에 있던 아포피스가 울음을 흘렸다. 우성의 감에는 잡히지 않았지만 분명 이 근처에 성검 라의 존재가 있었다.
‘찾았다!’
우성은 아포피스를 전방을 향해 겨눴다. 그러자 떨림이 더욱 거세졌다.
터엉-.
우성의 몸이 순식간에 앞으로 날아갔다. 워낙 그 움직임이 빨리 보통 플레이어들은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보지 못했다. 이름 있는 랭커 플레이어들도 제대로 반응하는 이가 없었다.
우성의 목표는 하나. 그리고 그 목표 역시 어느 순간부터 우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쩌어엉-!
화악-!
두 자루의 검이 부딪히며 거대한 파공음을 만들어냈다. 검에 맺혀있던 마기와 신력이 부딪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거대한 힘에 주위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멀찌감치 뒤로 물러났다.
“드디어 찾았다.”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우성이 웃었다. 얼마 전부터 그토록 벼르고 있던 상대를 만났다는 생각에 기쁘기까지 했다.
성검 라의 사용자를 죽이고, 가이아를 죽인다!
그럼 우성은 진정한 의미에서 현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서현이의 병이 다 나은 이상, 아포칼립스라는 세상은 더 이상 동아줄이 아니었다. 언제 떨어질지 모를 높은 절벽이나 마찬가지였다.
성검 라의 사용자는 우성과 비슷한 또래였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그 역시 검은 머리의 한국인이라는 점이었다. 같은 나라에서 각 진영의 열쇠가 동시에 나오다니, 우성은 꽤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아포피스인가?”
성검 라의 사용자는 우성과 눈이 마주치자 웃었다. 그 역시 내내 우성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랑 같은 한국인이네?”
“지금 국적이 중요한가?”
“하긴, 어차피 죽으면 태어난 땅이 어디든 무슨 상관이야. 이번 전쟁이 끝나면 네 존재는 아마 세상에서 사라질텐데.”
텅-.
우성은 성검 라와 맞대고 있던 검을 떼어냈다. 아포피스를 통해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미카엘의 불꽃보다도 더 순수한 기운이었다.
성검 라의 힘. 그것은 태양의 힘과 같았다. 세상을 다스리는 거대한 불의 힘이었다. 성검 사용자는 바로 그 힘을 자신의 것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널 기억해 주마. 아포칼립스에서 죽은 플레이어는 직접 그를 죽인 플레이어만이 기억할 수 있더라고.”
“그런 건 또 어떻게 아는 거지?”
“내 손에 죽은 플레이어가 꽤 되거든. 분명 모든 생명을 다 잃었는데, 난 그 녀석을 기억하고 있어. 다른 녀석들은 다 잊어버렸는데 말이지. 꽤 유명할걸? 천사 진영의 플레이어 학살자, 전두현으로.”
이름은 들어본 적 있었다. 천사 진영에 아군 플레이어들을 학살하고 다니는 미친 플레이어가 있다고. 전두현이라면 악마 진영의 플레이어라도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볼 법한 유명인사였다.
실력이 워낙 뛰어나서 랭커 플레이어도 감당하기 힘들다고 했는데, 설마하니 그 녀석이 성검 라의 사용자일 줄이야. 우성은 의외로 성검 라의 사용자가 유명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쪽은? 혹시 요즘 유명한 대악마 클랜의 마스터신가?”
“……그걸 어떻게 알지?”
“갑자기 급부상한 마검 사용자 플레이어가 대악마 클랜의 마스터 말고 또 있나? 그렇지 않아도 한참 전부터 벼르고 있었어. 널 죽이고, 디아블로까지 죽이기만 하면 이 빌어먹을 싸움도 끝나고, 내 진짜 소원도 빌 수 있단 말이지.”
“진짜 소원?”
아무래도 태양신 역시 아포피스처럼 이번 전쟁이 끝나면 한 가지 절대적인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전두현은 딸아이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우성과는 달리, 좀 더 큰 소원이 있는 듯 보였다.
“그것까진 네가 알 필요 없고… 내 손에 뒈지기나 해.”
화아악-.
전두현의 몸이 밝아졌다. 작은 태양을 연상케 할 정도로 그의 몸과 그가 들고 있는 순백의 검은 밝은 빛을 내뿜었다.
우성은 직감적으로 그가 성검 라의 힘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가 본신의 힘을 사용했다면, 이제부터는 우성의 <대리인>과 같이 신의 힘을 사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어차피 성검 라의 사용자를 만나면 <대리인>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우성은 망설일 것 없이 <대리인>을 사용했다.
두근-.
우성의 심장박동이 거세게 빨라졌다. 1초에 세 번씩 뛰는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다.
눈앞이 붉어진다거나 하는 느낌은 없었다. 그 대신, 우성은 자신의 몸을 누군가와 공유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그것은 단순히 몸만을 공유하는 게 아니었다. 우성은 영혼까지 아포피스와 조금씩 동화되고 있었다.
우성의 영혼은 아포피스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무리 그릇이 크다고 해도, 창세신이라는 존재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아니었다.
[대피인의 부작용으로 플레이어의 수명이 10년 감소합니다.]
[감소한 수명은 포인트를 통해 회복할 수 없습니다. 수명은 운명의 영향을 받습니다.]
간단한 메시지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포인트로 회복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정해져 있던 수명이 줄어든 것이다.
우성의 몸에서 마기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온 몸이 마기와 하나가 되며, 절대적으로 순수하지 못한 마기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필요하지 않은 힘에 불과하지만 그 마기는 보통 천사들은 닿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드디어 만났구나.
우성과 동화된 아포피스가 속삭였다. 그는 성검 라의 사용자를 눈앞에 두고 희열에 떨었다. 신이지만 이럴 때 보면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느낌도 들었다.
-죽여라. 그리고 부숴라.
성검 라의 파괴!
우성은 전두현이 들고있는 순백의 검을 바라봤다. 겉으로 보기엔 별로 특별할 것 없는 검이었는데, 이제 보니 마검 아포피스에서 색만 바꿔놓은 것 같았다.
똑같은 모양에, 정 반대의 색상. 마치 두 명의 창세신을 대변하는 듯했다. 어느 한 쪽이 부러지는 순간, 이 세상의 운명도 뒤바뀔 것이다.
“재미있지?”
전두현이 동공이 새하얗게 변했다. 반면, 우성의 동공은 새카맣게 변했다. 둘은 너무나도 반대이기에 닮았다고 할 수 있었다. 전두현은 그게 너무 재미있었다.
“넌 뭐가 그렇게 간절해서 이렇게 됐냐?”
전두현 역시 자신이 선택받은 이유를 아는 모양. 그 역시 무언가를 간절히 원했기에 태양신 라의 선택을 받은 것이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우성은 전두현이라는 사람을 다시 보게 되었다. 조금 가벼워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그 역시 무언가를 원하고 또 원했기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알 것 없어.”
“그래? 난 말하고 싶은데. 어쩌면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넋두리 정도는 괜찮지 않아? 아, 넋두리가 아니라 부탁일지도 모르겠네.”
“말 하든가.”
“성x대학교 언어재활과에 재학중인 임지민. 나 없으면 그 애 좀 부탁한다. 이 친구야.”
따로 말하지 않아도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우성이 딸을 위해 이 세상에 발을 들여놓았다면, 그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이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전두현과 우성은 비슷하지만 상황이 달랐다. 전두현이 사라지더라도 사랑하던 여자는 이 세상에 남아있지만, 우성은 사라지게 되면 사랑하는 딸과 함께 사라진다.
“그건… 좀 어렵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