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물러나는군.”
천사들을 이끌고 온 라구엘은 조금씩 물러나는 악마들과 마왕들을 보며 팔짱을 끼고 멈춰 섰다. 우두머리인 라구엘이 이동을 멈추자 다른 천사들도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았다.
“추격하지 않는 건가요?”
“그래야겠지. 저쪽에는 플뤼톤과 메피스토, 벨리알, 아스타로스까지 있으니. 아스타로스 녀석, 대체 언제 저렇게 강해진 건지.”
“이 공간의 힘이 사라지기 전에 싸워야 해요.”
“그렇다고 전력상 불리한 상황에 싸울 순 없다.”
“불리하다고 생각하나요? 라구엘님과 저, 그리고 이 공간의 힘이 있다면 저런 녀석들 정도는…….”
“고집 피우지 마라, 우리엘.”
같은 대천사라고는 하나 라구엘과 우리엘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가진바 힘도 차이가 나지만 라구엘은 대천사장인 라파엘보다도 훨씬 오랜 세월을 존재해온 천사였다.
대천사장 라파엘도 라구엘의 말에는 한 수 지고 들어갈 정도. 라구엘은 현명했다. 우리엘 역시 오랜 세월 동안 그를 지켜봐 왔지만 그는 단 한 번도 틀린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럼 대체 저 녀석들은 왜 후퇴하는 겁니까?”
“이 상태로 싸우게 되면 저 녀석들도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우리 둘도 죽겠지만, 저기 있는 녀석들 중 둘 이상은 데리고 갈 수 있을 거다. 잘만 싸우면 이길지도 모르고.”
라구엘은 신력으로 가득한 공간의 힘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가이아님의 은총이 우릴 돕고 있다. 이 안에서 패할 수야 없지.”
신력으로 가득한 공간.
이 공간은 악마들의 힘을 반감시키고 천사들의 힘을 증폭시키는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악마들에게 상극인 신력이 가득 흐르는 공간에서 악마들이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야 당연했고, 천사들의 힘이 강해지는 것 역시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 공간을 만든 존재는 바로 가이아였다. 물론 그녀 혼자서 이 공간을 만들었다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가이아라고 해도 이 정도 힘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할 수는 없었다.
수많은 천사들과 몇 명의 천사장들. 그들이 이 공간을 만들기 위해 희생되었다. 숭고한 날개가 뜨거운 불 속에 제물로 바쳐졌고, 그 힘을 매개체로 삼아 가이아가 이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전력적인 손실은 크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생명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는 악마들과는 달리, 천사들에게 있어서 생명이란 작든 크든 귀중한 것. 일반 천사들과 몇 명의 천사장의 희생을 통해 만들어진 이 공간은 악마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귀중한 밑거름이었다.
“어떻게 하려고요? 이대로 손 놓고만 있어요?”
가이아가 만들어낸 이 공간이 얼마나 오래 유지가 될지는 모른다. 그것을 아는 존재는 오직 이 공간의 주인인 가이아뿐.
“미카엘이 필요하다.”
결국, 그들이 믿을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
포탈을 타고 악마들과 이방인들은 꾸준히 넘어오고 있었다. 악마 진영에 있는 악마들 중 대부분이 넘어오는 것이니, 그 수가 많기야 많았다.
대도시 라키아에는 밤낮이 없었다. 밤은 없고, 해가 떠 있는 낮밖에 없는 세상이었다. 느낌상 하루가 지났다는 생각이 들 즈음, 세 명의 마왕과 아스타로스, 우성은 한 자리에 모였다,.
“저 녀석들도 싸울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
“당연하지. 내가 있는데.”
메피스토의 말에 플뤼톤은 코웃음을 쳤다. 내심 천사들이 덤벼주기를 원했던 그는 아쉬운 마음이 컸다.
메피스토의 명령에 포탈을 타고 넘어온 악마들은 라키아의 맞은편에서 대기했다. 천사들은 대도시 라키아의 높은 성벽 위에서 악마들을 경계했다. 그 중에는 대천사 우리엘과 라구엘도 보였다.
“너 하나 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이겠지.”
“이럴 때는 몸 좀 드러내 놓고 있지, 벨리알? 얍삽하게 숨어있지 말고.”
“킥. 이게 내 장긴데?”
“숨을 공간도 없이 태워버리기 전에 당장 나와라.”
“어차피 난 물건 뒤에 숨는 게 아니라 상관없는데.”
“그만들 해라, 플뤼톤. 벨리알.”
메피스토가 티격태격하는 플뤼톤과 벨리알 사이를 중재했다. 마왕들 사이에서도 은연중 급이 나뉘어져 있었는데, 메피스토는 세 명의 마왕들 중에서 가장 강한 마왕이었다.
디아블로의 의형제. 악마들 사이에서 의형제라는 관계가 성립이 된다는 게 이상했지만, 디아블로는 악마라는 종족의 특성 자체를 벗어난 존재였다. 영생을 살아온 그는 악마를 벗어난 또 다른 종족이라는 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성격이 인간의 풍습이라고 할 수 있는 의형제라는 관계를 만들어냈다.
물론 메피스토가 디아블로 하나만 믿고 나대는 보잘 것 없는 악마는 아니었다. 그는 힘으로 따져도 플뤼톤이나 벨리알보다 한 수 위의 존재였다. 사실상 디아블로와 벨제뷔트, 둘을 제외하고서 마왕들 중 메피스토를 상대할 수 있는 악마는 없었다.
“다른 마왕들도 포탈을 통해서 곧 건너 올 거다. 우리 셋, 아스타로스와 이방인은 라키아를 친다. 이후에 건너오는 마왕들은 우회해서 갈리오를 공격한다.”
“갈리오면 라파엘 녀석의 신전이 있는 곳인가? 라파엘 녀석부터 죽이려고?”
“그래. 그곳에는 베에모트와 사모스, 그리고 루시퍼가 가고 있다. 그 셋이면 라파엘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겠지. 라파엘 녀석이 가지고 있는 기아스는 최대한 빨리 제거해 버리는 게 나아.”
이미 마왕들 몇몇은 천사 진영으로 넘어온 상태였다. 그리고 그들은 병력을 나눠 천사 진영의 여러 도시를 공격하기 위해 출발한 상태였다.
물론 그 움직임은 아주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마왕 셋이면 어지간한 도시 하나쯤은 순식간에 쓸어버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메피스토는 포탈을 통해 넘어온 악마들을 이끌고 대도시 라키아부터 천천히 천사 진영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전진할 것이다.
“미카엘은?”
“벨제뷔트 녀석이 필요하겠지. 미카엘을 우리들끼리 상대했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 명심해라. 가이아를 상대하기 전까지는 우리들 중, 절대 사상자가 나와선 안 된다는 것을.”
메피스토는 디아블로에게서 한 가지 임무를 받았다.
마왕들 중 그 누구도 죽지 않도록 할 것. 치천사 가이아를 상대로 변수 없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마왕들 전원이 생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메피스토가 라구엘과 우리엘을 상대로 물러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라구엘과 우리엘. 분명 그 둘은 대천사들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메피스토는 플뤼톤, 벨리알과 함께라면 충분히 그들을 상대로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아스타로스까지 있는 만큼 그 확신은 더 강했다. 비록 이 공간에서 제약을 받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메피스토는 아무런 피해 없이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끌 의무가 있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이 전쟁을 이기는 방법이었다.
“이방인. 이야기는 들었다. 네 역할이 바로 가이아를 죽이는 거라고?”
메피스토는 마왕들과 함께 있는 우성에게 관심을 보였다. 포탈을 통해 다른 이방인들도 꽤 여럿 넘어오고 있었지만, 디아블로에게 특별히 임무를 받은 우성은 마왕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가이아가 있는 장소는 대도시 네피렘이다. 뭐, 천사들은 대도시라고 이름 붙여놨지만 사실상 소도시보다 작은 마을이나 마찬가지지만 말이야. 가이아 혼자 기거하는 신전 하나가 전부인 곳이지.”
“그런 걸 도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 말 했다시피, 신전이야. 대도시라고 이름을 붙인 건 어디까지나 천사들 마음이지. 뭐, 사실상 지금 가 봤자 소용도 없겠지만.”
가이아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힘뿐만이 아니라 성격까지도 마찬가지였다. 홀로 먼 곳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성격은 전쟁 중에도 여전했다.
만약 가이아가 천사들과 함께 전쟁의 전면에 나섰다면 전세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벨제뷔트와 디아블로가 있다고 해도 가이아를 상대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상황에서, 대천사들까지 합류한다면 아무리 마왕들의 수적 우세가 있다고 해도 전쟁은 힘들어진다.
결국 마왕들은 다른 대천사들을 모두 죽이고 가이아를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디아블로가 생각한 전쟁의 키워드였다.
“그럼 전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분의 힘을 빌리기 전까지는 대천사 하나도 상대하기 어려운 어중간한 녀석의 도움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 넌 네가 맡은 역할이나 잘 하면 된다.”
아무래도 메피스토는 우성의 도움을 크게 기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우성이 생각해도 <대리인>을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큰 도움이 되기는 힘들어 보였다.
우성의 실력은 군주급 악마보다는 월등히 강하고, 마왕들보다는 조금 부족한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대천사들을 홀로 상대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대리인>을 사용하고 날뛸 수는 없었다. 신(神) 마검에 이른 아포피스를 통해 사용하는 <대리인>은 이전과는 다른 부작용이 있었다. 그 부작용을 감수하면서 자주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가이아를 만나던가, 성검 라의 사용자를 만나던가 해야 되는 건가?’
어차피 치천사 가이아가 일찍부터 나설 것 같지는 않았다. 반면, 플레이어인 성검 라의 사용자는 당장이라도 만날 가능성이 있었다.
“포탈을 타고 넘어온 이방인들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병력을 나눠야겠지. 베에모트, 사모스, 루시퍼가 라파엘을 죽이고 나면 세력을 반으로 나눠 천사 진영을 쓸어버린다. 이방인들의 반은 그곳에 배정될 거다.”
포탈을 통해 넘어온 이방인들 중에는 우성의 일행도 있을 것이다. 우성은 그들이 가능하면 자신과 같은 곳에 있기를 원했다.
“기준은요?”
“랜덤. 이방인들의 배정은 플뤼톤, 벨리알, 너희가 알아서 해라.”
“왜 우리가!”
“알았다.”
벨리알과 플뤼톤의 상반된 대답은 무시하고, 우성이 물었다.
“데려오고 싶은 이방인들이 있는데, 혹시 제가 선별해도 되겠습니까?”
“그 정도는 용인해주지. 단, 많은 수는 안 돼.”
“감사합니다.”
어차피 일행은 그리 많지 않았다. 디아블로가 우성의 편의를 봐 주는 것도 있으니, 이 정도 수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저것들도 이제 슬슬 움직이려나 보군.”
그 때, 메피스토가 멀리 보이는 라키아에서 날아오르는 천사들을 발견했다. 하얀 날개를 펄럭이며 수많은 천사들이 악마들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공간은 대체 언제까지 지속되는 거지?”
아직까지도 천사 진영에 넓게 퍼진 공간의 힘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메피스토가 천사들과의 싸움을 피하고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공간의 힘이 사라지길 기다렸던 것이었는데 말이다.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공간이 계속해서 남아있었다. 메피스토는 눈살을 찌푸리며 날아오는 천사들을 바라봤다.
“그냥 싸우는 수밖에 없나?”
대천사들이야 어찌 상대가 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밑에 있는 다른 악마들이었다.
이 공간 속에서 악마들은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다. 한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들이 상급 악마를 상대할 수 있다는 건, 전력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마왕들 역시 힘이 제약되고, 천사장들의 힘이 증폭된 만큼 대천사가 아니라 천사장들까지 신경을 써야 할 판. 가능하면 이런 불리한 환경 속에서는 싸우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이거…….”
그 때, 플뤼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메피스토는 그의 얼굴에 번진 미소를 보며 불길한 표정을 지었다. 플뤼톤의 저런 표정은 곧 즐거운 싸움을 앞두고 있다는 뜻이었다.
“무슨 일이지?”
화악-!
픝뤼톤의 몸에서 불길이 뿜어졌다. 뜨거운 지옥의 불길 속에서 그는 천사들 사이를 바라봤다.
“미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