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우성은 두 명의 천사장을 주목했다. 다른 천사들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천사장들은 이상할 만큼 소극적으로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목숨이 아까워서? 아닐 것이다. 악마라면 모를까, 천사들은 신앙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에 이끌려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던질 수 있는 이들이었다. 특히 천사장 정도 되는 존재라면 더더욱 그렇다.
무언가 노림수가 있다는 뜻. 우성은 다른 변수가 생기기 전에 천사장들을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스타로스는… 바쁘군.’
아스타로스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뽐내 천사들의 수많은 천사들의 목숨을 빼앗고 있었다. 그의 마기는 땅을 뒤흔들고, 천사들의 생명을 빨아들였다. 아스타로스의 힘을 접한 천사들은 미라처럼 말라 비틀어졌다.
우성은 아스타로스에게 다른 천사들을 맡기고 두 명의 천사장들을 향해 나아갔다. 중간에 막아선 엑시드급 천사들이 있었는데, 우성의 검에 베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구구구구구구-.
그 때, 우성의 앞을 백골렘들이 가로막았다. 10미터가 훌쩍 넘는 거대한 덩치. 천사 진영에서 선악공성이 벌어질 때 등장하는 녀석들이었는데, 다른 백골렘들과는 달리 몇 차례 개조되어 훨씬 강력한 녀석이었다.
까다로운 상대. 위협은 되지 못해도 처리하는데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우성의 검에 마기가 넘실거리며 백골렘을 향해 뿜어졌다.
콰과광-!
우성의 검이 백골렘 한 기의 몸을 후려쳤다. 백골렘의 핵, 그리고 몸체를 이루고 있는 신력과 우성의 마기가 부딪히며 강렬한 폭발을 만들어냈다.
더 강력한 쪽은 당연히 우성이었다. 우성의 마기는 이미 천사장들이라 하더라도 받아내기 힘든 수준이었다. 대천사 정도의 존재가 아니라면 받아낼 수 없는 힘을 백골렘의 몸체를 이룬 신력 정도로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까드드득-.
“……어지간히 단단하군.”
단숨에 백골렘 한 기를 박살낼 생각으로 힘을 끌어냈는데, 백골렘은 쓰러지지 않았다. 마기가 뒤덮인 몸뚱이는 여기저기가 부서지고 부식되어 위태로웠지만 아직까지 눈을 반짝이며 움직이고 있었다.
핵을 완전히 부수기 전까지는 백골렘은 끝없이 움직일 것이다. 차라리 살아 움직이는 천사들이라면 단숨에 베어버릴 텐데,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단칼에 베기는 힘들었다.
백골렘은 총 열 기였다. 우성은 자신의 눈앞을 가득 메운 백골렘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온 힘을 끌어올린 마력과 마기가 검에 맺혔다가 백골렘들을 향해 뿜어져 날아갔다.
콰아아아앙-!
우성의 마기가 백골렘들의 몸을 이루고 있는 신력을 부수고, 그들의 몸을 박살냈다. 자욱이 번진 마기의 안개 사이로 우성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괜히 백골렘들과 싸우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백골렘들이야 천사들이 만들어낸 병기 중 하나일 뿐이었다. 우성이 먼저 처리해야 할 대상은 수상한 냄새를 풍기는 두 명의 천사장들이었다.
“방해 한 번 많네!”
앞을 가로막는 천사들을 보니 수상한 냄새는 더 진해졌다. 처음에는 알지 못했지만 이제 보니 천사들의 움직임은 천사장들을 보호하는데 집중되고 있었다. 좀 더 빨리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전략에 무지한 악마들은 단지 보이는 천사들을 죽이는데 혈안이 되었을 뿐이었다.
천사들의 목숨을 건 반격에 우성의 발이 묶여있던 그 순간, 두 명의 천사장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개의 창을 바닥에 꽂고,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그 순간, 우성을 비롯해 천사들을 학살하고 있던 아스타로스는 눈치 챌 수 있었다. 천사장들이 벌이려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님을.
구구구구구-.
화악-!
디아블로가 만든 프로미스 포탈을 중심으로 반경 수 십 키로미터에 둥근 반원 모양의 천장이 생겨났다.
‘시작이다!’
밧줄로 몸이 묶인 것처럼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혹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과 같은 기분과도 닮아있었다. 어떤 종류의 답답함인지는 명확히 말할 수 없지만, 마음대로 움직이기가 불편하다는 느낌인 것만은 분명했다.
신력으로 가득한 공간. 그것도 우성과 같은 존재의 몸도 불편하게 만들 정도의 힘을 가진 공간이 만들어졌다. 두 명의 천사장은 이 거대한 힘을 가진 공간을 만들고 힘을 모두 소진해 쓰러졌다.
“이걸 위해서였나?”
우성은 하나 둘 쓰러지는 악마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상급 이상의 악마들은 괜찮지만 악마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급 이하의 악마들은 공간이 가지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거나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공간 안에 있는 신력은 악마들이 가진 마기를 억제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반대로 신력을 가진 천사들에게는 힘을 보다 증폭시켜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한 쌍의 날개를 가진 일반 천사들이 상급 악마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두 쌍의 날개를 가진 엑시드급 천사들이 최상급 악마들을 상대했고 몇몇이 힘을 모아 군주급 악마들을 상대로 분전했다.
완벽한 전세의 역전. 아스타로스가 힘을 쓰고는 있었지만 그 혼자서는 한계가 있었다. 본신의 힘을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다면 모를까, 이 거대한 공간은 아스타로스라는 악마의 힘까지도 일정 부분 억누를 정도로 강력했다.
‘이런 공간을 어떻게 만든 거지?’
고작 천사장 둘 정도로 이런 공간을 만들었을 리 없었다. 신력이라는 힘에 잘 알지 못하는 우성이었지만 이 정도 규모의 범위에 이만한 신력을 퍼뜨릴 정도라면 대천사가 나서도 힘들 것이다.
어쩌면 대천사들 전부가 천사장 둘을 제물로 어떠한 개입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대천사들 본인은 나타나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거 골치 아프게 됐군.”
천사들을 공격하던 아스타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멀리서 천사들의 지원 병력이 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닌, 천사장들이 다수 포함된 병력이었다.
“대천사가 둘이라… 아주 작정을 했군.”
뒤늦게 도착한 병력 안에는 대천사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우성과 함께라면 대천사 하나 정도는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아스타로스였지만, 둘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엇보다 이 기이한 힘을 가지고 있는 공간 안에서는 더더욱.
“……머리를 잘 썼군.”
“재수 없는 비둘기 새끼들. 으드득.”
아스타로스가 이를 갈았다. 이대로 적들이 들이닥치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아는 만큼, 이대로 마냥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생각보다 천사들은 악마들의 공격에 대비를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
이 공간 안에서는 아무리 아스타로스라 하더라도 천사장 여럿이 달려들면 발이 묶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 공간 안을 빠져 나가는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포탈을 타고 넘어온 악마들을 모두 버리는 꼴이었다.
엄청난 병력의 손실. 아무리 마왕들의 힘이 대단하다고 해도 그 밑의 악마들을 버릴 순 없었다. 디아블로가 믿고 선봉을 맡겼는데, 그런 피해를 입는다면 얼굴을 들 면목이 없는 것이다.
“힘들어 보이는군.”
그 때, 우성과 아스타로스의 옆으로 한 인영이 나타났다. 우성 역시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아스타로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진작에 모습을 보였어야 하는 존재가 이제야 능글맞은 얼굴로 나타나니 기분이 적잖이 상할 수밖에.
“벨리알, 왜 이제야 나타났지?”
벨리알. 그는 혹시 몰라 디아블로가 아스타로스, 우성과 함게 보낸 마왕이었다. 애초에 그가 천사장들을 잘 견제하고 전투에 합류했다면 이런 고생을 할 일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너무 화 내지 말라고. 내가 반가운 녀석들을 데리고 왔으니까.”
“반가운 녀석들?”
“저 녀석들을 잡아야 하는 것 아니었나? 저 녀석들, 안 필요해?”
벨리알이 막 포탈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두 존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우성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는데, 아스타로스는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플뤼톤, 메피스토.”
두 명의 마왕들. 벨리알까지 포함하면 무려 세 명의 마왕이 나섰다. 이번 전쟁에 모든 마왕들이 총동원될 것은 당연했지만, 막상 그 대단한 마왕들이 한 자리에 모이자 우성은 신기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플뤼톤은 붉은색 머리를 허리 아래까지 길게 늘어뜨린 마왕이었다. 역시나 뿔은 없었고, 조각같은 미남형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메피스토는 어딘가 모르게 다른 마왕들과는 달리 인간의 모습을 벗어나 있었다. 새파란 피부와 동공이 없는 눈동자는 악마라기보다는 귀신이라는 느낌에 가까웠다.
플뤼톤과 메피스토의 도착은 공교롭게도 두 명의 대천사와 천사장들의 도착과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두 명의 대천사와 천사장들, 그밖에 수많은 천사들은 하늘을 날아 세 명의 마왕 앞에서 멈췄다.
“라구엘과 우리엘인가? 이거 꽤 거물들인데?”
“수준 낮은 놈들은 이미 죽고 없으니까. 남은 대천사들은 모두 꽤나 수준 높은 놈들이라고 보면 될 거다.”
살아있는 대천사들의 이름은 이미 마왕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었다. 우리엘과 라구엘, 미카엘, 소피엘, 라파엘. 이 다섯 대천사들은 오래 전부터 대천사들 사이에서도 가장 강한 다섯으로 꼽히곤 했다.
특히 그 중 미카엘과 라파엘은 보통 마왕들로는 상대가 어려웠다. 최강의 대천사라는 미카엘은 벨제뷔트 정도는 아니더라도 일반 대천사들 둘을 더한 것만큼이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라파엘 역시 성검 기아스를 가진 만큼 다른 대천사들보다 훨씬 상대가 어려웠다.
“미카엘이 없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그 녀석은 벨제뷔트가 잡으려고 벼르고 있더군. 라파엘까지 싸잡아서 말이야.”
“저 녀석들은?”
“우리 몫이지.”
플뤼톤과 메피스토는 멀리 보이는 우리엘과 라구엘을 보며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플뤼톤과 메피스토, 그 둘 역시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플뤼톤은 불을 지배하는 마왕으로 파괴력 면에서는 어느 마왕에게도 뒤지지 않았고, 메피스토는 디아블로의 인정을 받아 이례적으로 형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 둘이라면 우리엘과 라구엘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역시 신력으로 가득한 공간 속에서의 불리함. 이 공간 속에서는 마왕급의 힘을 가진 존재라 해도 일정 부분 힘이 구속되었다. 반대로 대천사들의 경우 공간의 이점을 받아 힘이 증폭될 게 뻔했다.
가능하면 이 공간 자체가 사라질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게 좋았다. 공간 밖으로 빠져 나가도 되겠지만, 대체 그 끝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이런 공간은 어떻게 만든 건지…….”
플뤼톤의 주위로 거대한 불길이 일렁거렸다. 플뤼톤이 사용하는 지옥의 겁화(劫火)는 미카엘의 염화(炎火)와 항상 비교되곤 했는데, 신력으로 만들어진 공간 속에서는 조금 불길이 작아진 느낌이 강했다.
“라파엘의 짓이겠지.”
“라파엘?”
“이런 잔머리를 굴릴 녀석이 천사들 중에 그 녀석 말고 또 있었나? 기아스의 권능을 사용한다면 이런 짓거리가 가능할지도 모르지.”
“하긴. 그것도 그러네. 라파엘, 그 녀석은 생긴 거랑은 다르게 쥐새끼 같은 구석이 있으니까.”
“차라리 잠시 물러나는 게 낫다고 본다. 이 공간을 무한정 유지할 수는 없을 테니, 차라리 이 공간의 힘이 사라진 뒤에 싸우는 게 나아.”
메피스토의 말에 플뤼톤이 탐탁찮은 표정을 지었다. 당장에 천사들을 태워 죽일 생각에 들떠 있던 그였다. 그런데 후퇴라니, 도망치라니.
“지금 장난하나?”
“아니. 냉정하게 생각해라, 플뤼톤. 우린 놀러 온 게 아니다. 디아블로님께서 우릴 보낸 이유를 생각해.”
“우리엘과 라구엘 따위는 우리가 충분히…….”
“미카엘이 온다면? 이 공간 속에서 너와 나, 벨리알과 아스타로스가 있다고 해도 미카엘을 당해낼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나?”
메피스토의 말에 플뤼톤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확실히 이 기이한 공간의 힘은 꽤나 강렬했다.
“포탈의 유지 시간까지는 아직 사흘이 남아있다. 아직 남아있는 모든 마왕들과 악마들, 그리고 이방인들이 모두 넘어온 후에… 전면전을 시작한다.”